The Longest Day (5): 그 후
방카 속에 들어앉아 포대경 들여다보는 일을 지겨워하고 답답해한 것은 정신나간 짓이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블백을 메고 자대로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경운기를 타고 민통선 안에 들어와 밭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내가 “야, 민간인이다”라고 소리치자, 잠시 뒤 박상병이 “야, 여자다.”라고 소리를 쳤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이 머릿수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여자 같았다. (박상병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살았었다고 한다. 유명한 극장식 나이트클럽 ‘월드컵’의 여종업원들과 야유회를 가서 찍은 사진이라고 하였는데, 그 사진을 보면, 군복을 입고 있는 박상병이 정말로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 이외에 대광리 자대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장점은...... 어쨌건 심심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라고나 할까? 내려온 지 며칠만에 내 얼굴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얼굴 피부가 하얗게 벗겨지는 것이었다. 7월달이었으니까. 그러더니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몸무게가 2키로가 빠졌다. 고등학교 3학년 이후로 변화가 없던 내 체중이, GOP 생활 세 달만에 2키로가 불었는데, 원상복귀된 것이었다.
양평에서의 생활로 돌아간 것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전기와 총 이야기는 앞에서 했지만, 각종 장비와 보급품이 업그레이드되었다. 이제는 위장풀을 뜯으러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낡은 판초 우의가 대량으로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맥주가 배급되기도 하였다. 본부포대 의무실에 군의관이 나타났다. 다른 병사들이 포경수술을 받을 때 나는 성형수술을 받았다. 군의관이 메스를 써서 내 얼굴에서 사마귀를 제거해주었던 것이다. 빤스바람 같은 기합은 없어졌고 고참들의 집합도 확실히 줄어들었다. 고급 군대로 바뀌었다고 할까, 군대다와졌다고 할까, 군대의 전문성이 강화되었다고 할까.
그러한 변화 중 나한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무선중계소 둘팔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양평에서는 그냥 교환대의 한 구석에 P-77 한 대를 놓고 그것을 둘팔이라고 불렀는데, 대광리에서는 — 그리고 그 이후 내산리에서는 — 부대 바깥의 구릉에 통신시설과 내무반을 갖춘 작은 파견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무전병들은 거의 다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양평에서는 사역에 차출되기나 하였던 무전병들이 여기에서는 전문적 업무에 투입되어, 각종 작업뿐만 아니라 유격이나 공수 훈련에서도 열외가 되었다. 전문적 업무를 수행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에는 MOS를 수행하였다. CW병들이 모르스부호를 가지고 씨름할 때 나 같은 보이스(Voice)병들은 음어를 가지고 씨름하였다. 양평에서는 음어라는 것을 몰랐다. 이것이 나한테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변화다.
205전우회라는 다음 까페에 들어가서 찾아보면, 김주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년의 205 통신병이 까페에 가입하면서 자기를 소개하는 글을 읽어볼 수 있다. 그 아저씨는 자신이 ‘군단 A급’이었다고 자랑하고 있는데, 거기에 조병장이 등장한다. 자기가 누군가 하면, 그 유명한 조병장과 조를 이루어 군단 음어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자라는 것이다. 그 대회는 나도 물론 기억한다. 대회 당일날의 세부 사항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대회는 통신경연대회였고, 그래서 무전병만 출전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목에 걸고 다니는 실전 음어판을 사용하였고 복식으로 치러졌는데, 나는 김주영에게 조립하여 송신하는 역할을 주고, 나는 수신하여 해석하는 역할을 맡았다. 출전 순서를 정하기 위한 추첨에 참여하고 온 쪼인타 선임하사가 “어어어어떻게 하냐? 우우우리가 첫빠따야.”라면서 걱정하였지만, 나는 그이를 안심시켰다. “빨리 끝내고 쉬는 거지요, 뭐.” 우리 205는 4분이 약간 넘는 시간 — 4분 03초라거나 —을 기록하였다. 뒤이어 출전한 20 여개의 팀들로서는 연습 때도 끊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점수였다. 쪼인타가 뛰어다니면서 상기된 표정으로 다른 팀들의 성적을 계속 알려주었던 모습도 기억난다. 김연아가 앞 순번으로 나와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격이니, 그 뒤의 팀들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러니 김주영이 ‘군단 A급’이라고 자랑할 만하였지만, 조병장으로서는 트로피를 하나 추가한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 음어경연대회는 보통 단식(개인전)으로, 그리고 훈련용 음어판으로 치러진다. 포단 주최의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포단을 대표하는 선수로 발탁이 된다. 이 선수는 포단본부로 파견을 나가 생활하면서 사단 주최의 대회에 대비한 훈련을 받는다. 보병들과 겨루는 사단 주최의 대회에서 우승을 하거나 좋은 성적을 거두면, 5사단의 대표 선수로 발탁되어 사단 본부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차상급 대회를 준비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백의리에 있는 포단본부와 사단본부에서도 생활한 적이 있다. 부상으로 ‘사단장 김복동’이라고 새겨진 만년필도 받았고, 약간 이상하지만, 콘사이스 영어 사전도 받았으며, 포상 휴가만 해도 다섯 번이 넘게 나왔다. 실지로 나온 것만 쳐도 그렇다. 포상 휴가를 받아놓고 나가지 못한 경우도 있다. 아침에 기상하여 동정복을 입고 대기하고 있는데, 이상한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1979년 10월 26일, 아니 그 다음 날이었다.
김주영은 빠릿빠릿하고 유능하였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 — 군대에서는 이것이 결정적인 결함이 되지 않는가?
“그런데, 조병장님, 우리가 하는 음어는 암호하고 다르잖아요?”
“그렇지.”
“어떻게 달라요?”
“암호는 CW병들이 받는, 네 자리로 된 숫자잖아. 암호병들이 취급하는 거고.”
“그런데 그걸 왜 암호라고 하지요? 음어는 왜 음어고요?”
“뭐라고?”
“CW도 그래요. CW가 뭐예요?”
“너 CW 몰라? 도로로쓰쓰 하는 거잖아.”
“그걸 왜 CW라고 부르냐구요? 그게 뭐의 약자일텐데.”
“뭐 임마? 그걸 왜 물어. MOS나 열심해 해. 이번 대회에서 또 걸어오지 않으려면.” 당시의 통신 장교는 독한 데가 있어서, 대회에서 성적이 좋지 않으면 부대까지 걸어오게 하였다.
“MOS는 또 뭐예요? 조병장님”
“너 죽을래?”
그러나 김주영은 눈치를 살살 보다가 또 물었다. ATT도 물었고 RCT도 물었다.
“실지로 대포를 쏘면 ATT. 안 쏘면 RCT. 보병하고 같이 나가잖아.”
“그건 아는데......”
“그거 알면 됐지 뭐. ATT 나가라면 ATT 나가면 되고, RCT 나가라면 RCT 나가면 되고. 뭐. 너 자꾸 대학 다니다 온 티 낼래?”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이다. 이상하게 삽질도 잘 되고, 축구도 잘 되었으며, 만약 새끼꼴 일이 있었다면, 그것도 잘되었을 것 같다. 저절로 말이다. 원주통신훈련소에서는 5인이 한 조가 되어 설치하였던 RC-292 안테나를 혼자서 설치한 적도 있다. 정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급하니까 되었다. 그리고 추위도 덜 타게 되었다. 조병장은 겨울이 되면, 아침에 혼자 물가에 나가 냉수마찰을 하였다.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약간 강박적인 느낌이 있지만, 훈련나가는 날도 빼먹지 않고 하였다.
다음 까페 205전우회에 들어가 보면, 205가 만만치 않은 조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까페를 기반으로 하여 오프 라인에서도 모임을 가지는데, 그 오프 라인 모임에는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그 모임에는, 양평 시절 대대장이었던 분(중령 예편)도 나오고, 그 시절에는 그 대대장 밑에서 전포대장을 하였으나 나중에는 5사단의 사단장으로 승진한 분도 나온다. 서로를 어떤 호칭으로 부를지..... 나하고 가까운 곳에도 오프 라인 모임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 통신과의 모임이다. 주로 영등포역 인근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스크린 골프를 친다. 고참을 부를 때는 "양병장님"하는 식으로 하고, 졸병을 부를 때는 "조영태씨"하는 식으로 하더라. 그런데, 여기에는 유선병들이 나올 뿐 나같은 무전병은 나오지 않는다. 유선병보다 무전병이 학력이 더 높은 편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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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이 직접하면 되지. 보이스병의 경우는 전문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어. 음어는 실전에서는 별로 쓰지 않는 거고. 안테나 치는 게 좀 문제겠지만, 77은 안테나도 필요없고.
우리의 젊은 시절
군대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그냥 영장이 나왔고 아무 생각 없이 훈련소로 갔고
번호대로 부대가 나뉘어져
새로운 세상, 새로운 분위기와 사람들
모르던 고참과 후배들과 섞여서
거의 3년 가까이 그런 생활을 했었지
지금처럼 어떤 곳인지 알고 갔다면
예비군 훈련장에서처럼 요령도 피우고 잔머리도 굴려가며 보냈을 텐데
우리들은 그냥 아무 준비 없이 새로운 사회를 받아들였지
고맙고 기쁜 기억보다는 힘든 기억이 많았던 시절
이유 없이 맞을 때도 있고 한겨울 그 춥던 눈오는 날 밤
연병장에서 팬티 바람에 피부가 눈에 얼어 터지는 기합도 받으면서
3년아 어서 어서 지나가라 만 되뇌인 적도 있었지,
기억이 없다면 지금 나의 삶이란 것도,
내 존재마저 없어져 버리고 말 텐데
세상 아무런 겁없이 젊었다는 거 하나로
그 모두를 견뎌낼 수 있었던
아련한 옛 시간들을
소중한 기억 기억으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조 교수님
멋져부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