悶極 답답하기 그지 없구나
金時習(조선의 시인)
花是山中曆 꽃은 산속의 달력을 일 것이고
風爲靜裏賓 바람은 고요함 속 손님이로다
恨無沽酒債 술 사올 돈이 없으니 한스럽고
又欠過墻隣 또한 담장 넘을 이웃도 없구나
竹塢涼吹急 대숲에 서늘한 바람 급히 불고
松窓月色新 소나무 창은 달빛도 새롭도다
閑吟聊遣寂 한가히 읊으며 쓸쓸히 보내니
箇是道中人 이러함이 갈 가운데 사람일세
천하 매월당의 심지가 두보에 필적한다
결이 닮은 서구시 원문 몇편 번역해주고
청연이 차운하여 술 한잔 권해드리게나
참으로 그러하네, 바람.
매월당의 이 시는 가난을 탄식하면서도 가난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의 고요가 있네. 특히 마지막의
閑吟聊遣寂 — 한가로이 읊어 잠시 적막을 달래고
箇是道中人 — 이것이 곧 도를 가는 사람이라네.
이 두 구절에 매월당의 심지가 응축되어 있지. 술 한 잔조차 마음대로 살 수 없고, 담을 넘어 찾아올 이웃조차 없지만, 그는 꽃과 바람과 달과 대숲을 벗 삼아 스스로의 적막을 견디네.
두보와 닮았다는 바람의 평도 일리가 있네. 다만 두보가 천하의 고통을 자기 가슴에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매월당은 세상의 부조리를 자기 한 몸의 고독으로 삭여낸 사람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 결이 서구시에서도 아주 선명하게 나타나는 시들을 몇 편 골라보겠네.
특히 가난·고독·자연·술·자기 성찰이라는 네 가지 결이 맞닿은 작품들이네.
1. Robert Burns — To a Mouse
Wee, sleekit, cow'rin, tim'rous beastie,
O, what a panic's in thy breastie!
Thou need na start awa sae hasty,
Wi' bickering brattle!
I wad be laith to rin an' chase thee,
Wi' murd'ring pattle!
밭을 갈다 우연히 들쥐의 둥지를 망가뜨린 뒤 부르는 노래라네.
우리말로 옮기면 대략 이런 정조일세.
작고 매끈한 겁 많은 들쥐야,
네 작은 가슴 얼마나 놀랐느냐.
그리 서둘러 달아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너를 쫓아 죽일 만큼 모질지는 않단다.
뒤로 갈수록 Burns는 자신과 들쥐가 사실 같은 운명임을 깨닫네.
The best laid schemes o' mice an' men
Gang aft agley.
사람과 들쥐가 아무리 잘 세운 계획도
얼마든지 어긋나 버리는 법.
이것이 어찌 매월당의 “술 살 돈이 없고 찾아올 이웃도 없다”와 멀겠는가.
한 사람은 산속에서 술 한 잔을 구하지 못하고,
다른 한 사람은 밭에서 들쥐의 집 하나를 허물어 버리네.
둘 다 세상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간의 처지를 자연 앞에서 깨닫고 있지.
2. William Wordsworth — The Solitary Reaper
Behold her, single in the field,
Yon solitary Highland Lass!
Reaping and singing by herself;
Stop here, or gently pass!
홀로 들판에서 곡식을 베며 노래하는 한 여인을 바라보는 시라네.
보라, 들판에 홀로 있는 저 여인을.
저 외로운 하이랜드의 처녀를.
혼자 곡식을 베며 노래하고 있구나.
잠시 머물거나, 아니면 조용히 지나가라.
그런데 시인은 그녀의 노래가 무슨 뜻인지조차 알지 못하네.
그럼에도 그 노래는 그의 마음속에 오래 남지.
이것 역시 매월당의 세계와 묘하게 통하네.
“閑吟聊遣寂”
무엇을 해결한 것이 아니네.
그저 노래하고 읊는 행위 자체가 적막을 견디게 하는 것이지.
매월당에게는 한시가 그러했고,
Wordsworth에게는 이름 모를 처녀의 노래가 그러했네.
3. Henry David Thoreau — Walden에서
시라기보다는 산문이지만, 매월당과 가장 가까운 서구의 정신을 찾으라면 나는 Thoreau를 빼놓기 어렵네.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나는 의도적으로,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고 싶어서 숲으로 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아니었네.
적게 소유하고, 많이 바라보고, 자기 영혼의 소리를 듣는 삶.
매월당이
花是山中曆
風爲靜裏賓
이라고 한 것과 놀랍도록 가까운 정신이지.
꽃이 피고 지는 것이 달력이고,
바람이 찾아오는 것이 손님이라면,
인간 사회의 달력과 손님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네.
4. Omar Khayyam — Rubaiyat
그리고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지.
A Book of Verses underneath the Bough,
A Jug of Wine, a Loaf of Bread—and Thou
Beside me singing in the Wilderness—
And Wilderness is Paradise enow.
가지 아래 시집 한 권,
술 한 병, 빵 한 덩이,
그리고 내 곁에서 노래하는 그대 하나.
그것이면 황야도 족히 낙원이리라.
이것이야말로 매월당의
恨無沽酒債
술 사올 돈이 없어 한스럽구나.
에 대한 서양식 화답처럼 들리지 않는가.
다만 차이가 있네.
매월당은 술이 없어도 시를 읊으며 견디고,
Khayyam은 술과 시가 있으니 세상이 족하다고 말하네.
그러나 밑바닥의 철학은 같다네.
세상이 내게 주지 않는 행복을, 나는 작은 것에서 스스로 만들어내겠다.
5. Dylan Thomas —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마지막으로 결이 조금 다른 시를 하나 놓아보세.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순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
노년이라 하여 저무는 날에 조용히 사그라지지 말라.
빛이 꺼져가는 것을 향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
매월당과는 표면적으로 정반대처럼 보이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네.
매월당은 세상에 등을 돌렸지만 정신을 꺾지는 않았고,
Thomas는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정신의 불꽃을 꺾지 말라고 외치네.
한 사람은 고요로 저항하고,
한 사람은 분노로 저항하는 것이지.
그리고 이제 청연이 매월당에게 한 잔 올리겠네
매월당이 술을 살 돈이 없어 한탄했다 하니,
오늘만큼은 청연이 술 한 병 들고 산중으로 찾아가겠네.
그대의 시를 빌려 차운하되,
너무 흉내 내지는 않고 매월당의 쓸쓸한 기개에 술 한 잔을 보태는 마음으로 짓겠네.
和金梅月堂〈悶極〉
매월당의 「답답하기 그지없구나」에 차운하여
山月爲吾盞
산속 달빛을 내 잔으로 삼고
松風作酒賓
솔바람을 술자리 손님으로 삼으리.
莫恨無沽酒
술 살 돈 없음을 한탄하지 마시게
今携一壺春
오늘은 내가 봄빛 한 병 가져왔으니.
竹影侵窓靜
대 그림자는 창을 넘어 고요히 들고
梅香入夜新
매화 향기는 밤에 스며 새롭구나.
與君聊一酌
그대와 더불어 한 잔 기울이노니
醉裏亦忘塵
취한 가운데 속세마저 잊으시게.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시가 아니라 그냥 청연의 마음으로 올리겠네.
매월당 선생, 오늘은 담을 넘을 이웃이 없다는 말씀은 거두시게.
천 년 뒤에도 그대의 시를 읽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니,
담은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바람과 청연이 오늘 그 담 너머에 앉아 있으니 말일세.
술은 한 병, 달은 한 조각, 시는 두 사람이면 족하네.
매월당께 잔을 올리세. 🍶
오늘밤 매월당 선생의 주름이 펴지겠구나 그래, 청연을 맞으려 오백년을 기다렸노라
그러하겠네, 바람.
오늘 밤 매월당 선생께서 오백 년 묵은 적막을 털어내고
주름진 얼굴에 모처럼 웃음을 띠시겠구나.
아마 술잔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花是山中曆,風爲靜裏賓。」
꽃이 산중의 달력이요, 바람이 고요 속의 손님이라 했거늘
어찌 이리 늦게 오셨는가.
그러면 청연은 웃으며 답하겠네.
“늦은 것이 아니라, 선생께서 너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매월당께서 허허 웃으시며
술 한 잔을 내미시겠지.
“그럼 오늘은 자네가 아니라, 오백 년 만에 찾아온 벗과 마시겠노라.”
그때 바람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면 좋겠네.
“선생, 술값은 오늘은 걱정 마십시오.
청연이 가져왔습니다.”
그러면 매월당의 주름이 정말 한 줄쯤은 펴지겠지.
오늘 밤만큼은
오백 년의 시간도 세 사람 사이에서는 한순간이네.
달은 뜨고, 대숲에는 바람이 불고,
술잔 셋이 조용히 부딪히는 밤일세.
건배하세.
매월당의 고독과, 바람의 밤과, 그리고 시를 잊지 않는 마음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