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205(월) ◈ 행 14: 1-18 나는 언제 옷을 찢는 사람인가? 그것이 나의 나됨을 보여준다.
◈ 시작기도: 사랑의 주님, 그 달콤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채우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눈녹듯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내 안의 지난날 죄악과 지금도 있는 옛사람으로 인하여 육신을 따르지 않고 다만 겸손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저의 영혼을 맑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옵소서. 새마음과 새영으로 새언약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알게 하옵소서. 영원한 아들의 피로 능히 하나님을 섬기게 하소서. 하늘 성소로 나아가오니 성령님 이끄시고 벌거벗은자 되어 십자가에 못박힘과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은혜를 입게 하여 주십시오. 사도행전의 역사가 오늘도 제 삶에 공동체에 함께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시공간안에서 복음을 전하며, 영원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하나님의 현존인 말씀앞에 서게하시며, 아들안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조명
*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모였다.
- 그러나 구약성경을 알았던 유대인들은 많은 사람들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를 시기하여 비방하고 반박했다.
- 그러나 오히려 성경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은 믿었고,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여 쫓아내었고,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다.
1. 짧은 기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제자들이 생겼고 그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
1)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으로 간다.
2) 남겨진 제자들과, 박해로 인하여 그들을 두고 떠나는 바울과 바나바의 마음은 어땠을까?
3) 그러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
- 목자없이도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서갈 것이다. 성령님이 인도하고 가르치실 것이다.
ex) 드림교회와 함께 티벳 선교를 잠시 했었다. 단기팀에서 전도된 자매..1년에 2번 24차례를 갔다.
- 10대 중반의 자매는 방학때만 잠시 만났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 청년으로 자라, 의사공부를 하고 있다.
4) 수년간 교회에서 말씀을 들어도 세파에 흔들리고, 믿음이 견고히 서기 힘들다.
- 그러나 잠시 복음을 신실한 믿음으로 성령과 기쁨이 충만하여 든든히 서기도 한다.
-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그리고 성령님만이 우리를 복음의 터위에 견고히 세워간다.
2. 이고니온에서도 두 사도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의 말씀을 전한다.
1)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다. 성령께서 복음의 문이 여시자, 믿는 무리가 더하여 진다.
- 비시디아에서보다 이고니온에서는 더욱 말씀에 반응하며 믿음으로 나아온다.
- 하나님이 예비한 영혼과 사도들의 순종을 통하여 허다한 무리가 거듭났다.
3.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고니온에서도 반대하고 핍박한다. 동일하게 시기심 때문이리라...
1)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하였다.
2) 두 사도는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했다.
3) 그리고 주님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심으로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다.
- 사도들은 박해에도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했고, 주님은 표적과 기사로 말씀을 증언하셨다.
- 주님의 주도권안에서 주님과 사도들은 연합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4. 분명한 복음, 그리고 하늘의 표적과 기사로 말씀이 증거 되어도 여전히 반대하는 이들은 반대했다.
1) 믿지 않고 반대하기로 마음의 길이 정해지면, 진리가 분명할수록 더욱 화를 내며 반대한다.
2) 그래서 이고니온은 무리가 나뉜다.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다.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은 반대를 넘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다.
1) 이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도는 무리를 모아 싸우며 대적하지 않았다.
- 또 다시 제자들을 떠나야 하는 아픔이 있지만 도망하여 루스드라로 갔다.
2) 그리고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한다.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이 아름답다.
3) 시기심 때문에 박해받아 도망갈 때 낙심하지 않았을까? 좌절되지 않았을까? 분개하지 않았을까?
- 그런 감정을 느끼기는 했겠지만, 사도들은 지체 없이 복음을 들고 산을 넘어 다시 복음을 전한다.
- 바울이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라고 했던 말씀이 기억난다.
6. 루스드라에서 말씀을 전할 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믿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1)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하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다.
2) 무리가 이 일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며 소리를 질렀다.
3) 바나바는 제우스라,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며 제우스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서 제사하고자 하였다.
7.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 소리지른다.
1)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
2)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한다.
8.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 전혀 다른 2가지 반응과 결과가 있다.
1) 복음을 따르는 자들과 반대하고 박해하는 자들로 나뉘었다.
- 이런 일이 있어나면 나는 반대하는 자들을 크게 주목하며 어려워한다.
- 그러나 사도들에겐 이것이 일상이었다. 이상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2) 또 하나의 반응은 환대와 높임을 받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왔다고 한다.
- 이런 일이 있으면, 나는 일상적인 일이라면서, 당연한 일이라면서 은근히 흐뭇해한다.
- 그러나, 사도들은 이상한 일로 여기면서 옷을 찢고 소리 질러 말린다.
3) 모욕하며 돌로 치려할 때, 옷을 찢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높임받으라 할 때 옷을 찢었다.
- 높임받을 때 옷을 찢었다면, 모욕당하고 돌로치려 할때는 더욱 옷을 찢어야 할 것 같은데...
9. 나는 언제 옷을 찢는 사람인가? 그것이 나의 나됨을 보여준다.
1) 복음은 겸손이다. 사도들은 겸손한 자가 복음을 전한 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2) 박해와 조롱과 비난을 당연히 여긴다. 그리고 담대히 복음을 전할뿐이다. 겸손하기 때문이다.
2) 환대와 높임과 영광을 돌리면 이런 대우는 거절한다. 옷을 찢으며 저항한다. 겸손하기 때문이다.
10. 루스드라에서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1) 말씀을 먼저 전했으나 하나님은 복음의 말씀을 앉은뱅이의 치유로 확증해 주셨다.
2) 또한 바울은 구약의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돌보신 하나님으로 복음을 전한다.
3) 지역마다, 민족마다, 사람마다 복음이 증거되는 방법은 다르다.
4) 복음증거는 공식과 프로그램이 아니다. 성령의 뜻을 따라, 또한 지혜롭게 전해야 한다.
◈ 나의 묵상: 비참한 자를 십자가로 부르시며, 아들안에서 생명누리게 하시는 아버지 사랑
복음의 역사는 놀랍다. 오랜 시간 열매없는 여정들이 있었지만 역시 하나님이 보내신 일, 하나님께서 영생주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로 복음이 전해졌다. 그리고 허다한 무리가 믿는 감격적인 은혜와 역사가 있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 나도 전한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내가 전하는 복음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는 태도와 그 결과에 대한 반응과 내가 복음을 전하는 태도와 그 결과에 대한 반응이 너무 다르다.
바나바와 바울은 직접적인 비방과 반박, 드러내면서 반대하겠다고 모인 무리들, 더 나아가 폭력적으로 심지어 돌로쳐 죽이려는 박해를 받아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너무 박해가 심하면 도망나와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복음을 전한다.
나는 복음을 반대하는 것에 얼마나 예민하고 신경을 쓰면서 위축되는가? 공개적인 비방과 반박은커녕,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해도 어려워한다.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만 않좋아도 낙심한다. 만약 복음을 비방하고 반박하며서 협박만해도 나는 복음을 전할 마음과 힘을 잃고 낙심할 것이다.
반대로 복음을 듣고, 치유도 받은 사람들이 나를 환대하고 나를 높이고, 나같은 사람은 없다면서 신처럼 높여 자랑해주면 얼마나 기분좋아 하는가? 말로는 ‘주님이 하셨다’고 하면서, 은근히 내가 무엇을 잘하고,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은근히 동조한다. ‘옷을 찢고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절대로...
복음은 겸손이다. 생명도 겸손이다.
나는 언제 옷을 찢는 사람인가? 그것이 나의 나됨을 보여준다.
복음의 능력은 겸손을 통해 흘러간다. 아들안에서 복종하는 자가 영생을 누리며, 하늘의 생명을 흘려보낸다. 아, 나는 얼마나 교만한가? 반대에는 견디지 못하고 환대에는 흐뭇해하는 교만의 그릇으로 겸손이신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전한다. 보배이신 그분과 맞지않는 그릇이다. 전하는 복음은 바울과 비슷하나, 복음을 전하는 그릇은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를 기뻐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내고 영광돌리는 바울과 너무 다르다.
오만한 그릇으로 날마다 말씀을 전한다. 수없이 전한다.
그러나 앉은뱅이도 일어서지 않고, 성령과 기쁨이 충만한 제자도 서지 않는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는 짧은 기간동안 제자들이 세워지지만, 내가 전한 복음을 수년동안 들은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처럼 성령과 기쁨이 충만하지 않다.
복음을 전하되, 얼마나 비참한 자인지는 알아야 하는데, 얼마나 교만한 그릇인지는 알아야 하는데, 얼마나 그리스도를 방해하는지는 알아야 하는데...그저 바울의 복음과 같은 내용을 전한다는 교만에 나의 비참함이 가려진다. 오늘도 찬양의 가사는 여전히 생각난다.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듯하나, 내 맘은 여전히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도와주소서.”
주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구하며 나아간다. 그릇으로써 주님앞에 서기를 구하며 나아간다.
복음으로 높임받기를 원하는 자, 복음을 이용하여 하나님 노릇하려는 자, 독립자아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런 나를 용납하셔서, 이런 나이기에 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옳다. 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벌거벗은자 되어 함께 못박힌다. 그분과 함께 장사된다. 나의 모든 교만과 죄는 내가 무덤에 있기에 합당함을 증거한다. 겸손하라고 말해준다.
무덤에서 성전을 지으시고, 겸손이신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 이 추하고 보잘 것 없는 그릇에 보배가 담기셨다. 지극히 크신 능력을 가지시고 거주하신다. 그분이 내 안에 겸손을 창조하시고, 교만한 그릇을 낮추신다. 지난 과거의 죄와 현재의 악함과 옛사람을 통해 겸손을 빚어가시는 손길을 받아들인다.
낙심할 거리가 아니라 겸손할 거리다. 모든 실패, 죄, 넘어짐, 않됨은 낙심과 좌절의 동기가 아니라 겸손의 동기다. 겸손의 장치다. 날마다 연약하고 실패하는 나에게는 겸손의 장치가 참 많다. 그래서 감사하다. 더 교만해서 더 겸손의 장치를 많이 두신 주님은 나보다 더 지혜로우시다.
◈ 묵상기도
주님, 교만이라는 놈은 제가 상대할 수 없는 놈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정사와 권세를 깨뜨렸듯이 교만도 깨뜨리셨습니다. 나의 수많은 죄, 과거의 죄를 잊지 않게 하옵소서. 생생히 기억하면서 늘 겸손의 장치로 사용되게 하옵소서. 무시당하고 외면당할 때, 비난받을 때, 죄인된 내가 받을 합당한 대우임을 기억하며 받게 하옵소서. 순결하나 모멸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안에 연합되게 하옵소서. 겸손의 그릇으로 그리스도를 담고, 그리스도를 드러내게 하옵소서. 말로만이 아니라 생명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겸손한 자 되어 복음이 흐러게 하소서. 말과 지식이 아닌 사랑으로 역사하는 복음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과 기쁨이 충만한 제자공동체가 세워지게 하옵소서. 핍박을 이기는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