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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첫 번째 설교
행 13:13-23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 13:13-23 / [밤빌리아로 가다] 바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로 가는 길에 버가라는 항구에 내렸다. 그러나 거기서 요한은 두 사람을 남겨 두고 혼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으므로 14) 바나바와 바울만이 비시디아 지방에 있는 안디옥이라는 도시로 갔다. 안식일이 되어 두 사람이 예배를 드리려고 회당으로 갔을 때였다. 15) 보통 때처럼 모세의 책과 예언서 낭독을 끝낸 예배위원들이 두 사람에게 부탁하였다. `형제들이여, 혹시 우리에게 가르칠 말씀이 있거든 나오셔서 말씀하여 주십시오.' 16_ 그래서 바울이 일어나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한 후에 설교를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우선 우리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17)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가려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국 땅 애굽에서 이방인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그들을 높이셔서 영광스럽게 구출해 주셨습니다. 18) 그리고 ㄱ) 광야를 방황하던 40년 동안에도 그들을 양육하여 주셨습니다. (ㄱ. 70인역 신1:31) 19-20)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ㄴ) 가나안 일곱 민족을 멸망시키시고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셔서 약 450년 동안이나 사사들을 세워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언자 사무엘 때까지 이르렀습니다. (ㄴ. 신7:1) 21) 이때 백성들이 왕을 세워 주실 것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셔서 40년 동안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22) 그리고 그를 물러나게 하신 뒤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ㄷ)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고 칭찬하셨습니다. (ㄷ. 삼상13:14,시89:20)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구세주 예수께서 나신 것입니다.
구보로에서 전도의 첫 승리를 거둔 바울의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넘어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예증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긴 설교를 하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다(13-14)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가 요한은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이 일로 인해 훗날 2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요한을 데려가는 문제로 심히 다투고 결별하게 됩니다(15:36-41). 바울의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여 그곳에 있는 회당을 방문하였습니다. 이곳에서부터 바울이 선교팀의 중심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성경을 낭독한 후 설교한 바울(15-16) 회당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바벨론 포로 이후의 전통이었습니다.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을 방문하여 율법과 예언서의 낭독이 있은 후에(15) 첫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수사학도 사용하며 자신의 모든 재능과 경험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는 회당에 모여 있는 청중들에 대한 분석을 끝내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하며 설교를 시작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설교(17-23)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시작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한 사사시대와 다윗과의 약속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셨고(17), 광야 40년 동안 그들의 악행을 참으시고(18), 가나안의 대적을 멸하시고(19), 땅을 주시고(19),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할 때에 사울과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성경을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출애굽, 가나안 정복, 사사시대, 사울과 다윗 왕조를 구속사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씨로부터의 메시야 탄생이 모든 유대인의 한결같은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구약의 구속사를 통해서 메시야를 증거했습니다.
적용: 우리는 의미를 모른 채 눈으로만 성경을 읽는 때가 많고,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뒤로 흘려보내 과거에 쌓이게 하는 무의미한 시간들이 많습니다. 어떤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오늘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습니까? 그 의미와 가치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봉양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즉 끝없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지금도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온 인류를 위해 신실하게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지금까지 내가 받은 축복과 은혜를 떠올리며,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의 기도를 드리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 - 박수 엘루마의 사건 이후 누가는 여기서부터 바울을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누가의 관점에서, 바울이 엘루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을 기독교인으로 회심시킴으로써 선교 사역에 있어서 지도자격으로 부상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 - 구브로 섬을 떠나 바울 일행이 두번째로 찾은 밤빌리아는 지중해 북단에 있는 소아시아의 남쯤 해안에 접한 지역이다. 해안의 길이가 120km이며 내륙쪽으로 폭이 48km 정도의 이 지역은 동편에는 길리기아, 서쪽에는 루기아, 북쪽에는 비시디아가 인접해 있다. 그리고 버가는 밤빌리아의 중심 도시로 해안에서 내륙쪽으로 13km정도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이곳을 들르게 된다(14:25). 이곳에서의 바울 일행의 선교 행적에 관한 언급은 없다. 아마 별다른 성과가 없었을 것이다. 요한은...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 예루살렘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를 동행하여(12:25) 그들을 도우며 따라왔던(5절) 마가 요한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만 누가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이 떠난 이유에 대해서 학자에 따라 다음과 같이 추측이 다양하다. (1) 사전에 구브로까지만 동행하기로 함. (2) 사촌 바나바를 따라왔다가 바울이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바나바가 소외된 데 대한 불만(Alexander), (3) 향수병, (4) 용기 부족으로 여행을 포기함(Lenski), (5) 바울이 풍토병에 걸려(고후12:7;갈 4:13, 14) 겁을 먹었음(Ramsay). 그러나 모두 다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쨌든 나중에 요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되는 점으로 보아 바울은 요한의 귀향으로 크게 실망하고 상심한 듯하다(15:37-39).
=====13:14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 이곳은 안디옥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되는곳으로(11:27) 해발 약 100m에 달하는 고원지대이다. 오늘날의 터키 중남부 지방의 얄바크(Yalvach) 근처의 폐허 지역을 말하며 당시에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바울은3차전도 여행때에도 이곳을 들르게 된다(18:23).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 셀류쿠스 왕조 때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했으므로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이있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구브로나 이곳에서도 바울 일행이 회당올 먼저 찾은것은 이방땅에서 동족에 대한 친밀감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통해 이방 선교 이전에 유대인에 대한 방문이 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 - 회당의 예배 순서 중 한 부분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율법서는 모세 오경을 가리키며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를 말한다. 1세기경의 회당 예배는 쉐마(신 6:4-9) 기도,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그리고 설교나 권면의 말씀과 축복의 순서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성경이 회당에서 낭독되었던 전통은 바벧론 포로기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B.C. 163년부터는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율법서 낭독을 금지하여 예언서만 낭독되었으나 마카비 혁명 때에 다시 율법서가 낭독되었다. 회당에서 성경은 히브리어로 낭독된 다음 다시 아람어나 코이네 헬라어로 통역되었다(Robertson).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 예배순서상 권면의 말씀을 할 차례가 되었는데 회당장은 바울에게 사람을 보내어 설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당시 예배 중에 설교 또는 권면의 말씀을 담당할 대상을 회당장이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랍비나 방문자에게 설교를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당장은 예배 전에 설교자를 선정해야지 예배 도중에는 할 수 없었다(Haenchen, Robertson).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로 회당장이 예배 도중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게 되는데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예배 시작과 더불어 회당에 들어왔기 때문에 미리 설교를 부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수 있다. 이를 통해서 블 때 회당장에 바울 일행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듣고, 그들에 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할말이 있거든 말하라 -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는 본문의 어투는 '만일'(* , 에이)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조건적 제안으로서 상대방에게 공손하게 요청하는 말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최대한 살려 "두 분께서 혹 격려할 말씀이 있거든 이 회중에 한 말씀 해주셨으며 좋겠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 회당장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바울은 곧바로 일어나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본래 회당 안에서의 설교는 관습적으로 앉아서 하는데(눅 4:20) 바울은 일어서서 손짓까지 하면서 설교를 한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열정적인 웅변가로 보여지게 된다. 아마 누가는 바울을 헬라적인 연설가로 묘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Haenchen). 어쨌든 이러한 형태의 설교는 유대 회당의 전통과는 다른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 여기서부터 바울의 설교가 시작된다. 서두에서 누가는 설교를 듣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해 학자에 따라 다음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이스라엘로 언급된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란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이다(Lenski, Robertson). (2)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생에 의한 유대인 및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10:2의 '경건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을 가리킨다(Haenchen, Bruce, Neil).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자들은 이스라엘 벡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이스라엘 사람에 포함된다. 따라서 (2)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13:17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 여기서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요약으로 신앙 고백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7장에서 소개된 스데반의 설교와 그형식이 비슷하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는 스데반보다는 간략하다. 바울이 이스라엘을 구원시킨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방인 청중을 의식하여 언급한 듯하다(Lenski). 즉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출애굽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형태의 호칭은 당시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며 70인역(LXX)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어투였다(Laenchen). 우리 조상들을...백성을 높여 - 본절에서 '조상들'과 '그 백성'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은 시문학에서는 병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해서 그 구절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명확하게 하곤 했다. 만일 본절이 그러한 형식을 취했다면 두 용어는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두 용어가 다른 의미로 쓰여 역사적인 흐름을 차례로 설명하고 있다면 '조상들'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아들을 칭하는 의미이며 '족장들'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과 본절의 바울 설교를 비교해 볼 때 '족장들'로 해석하는 편이 무난하다. 큰 권능으로 - 에굽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현인 '큰 권능'은 70인역(LXX)역에서 영향받은 어투로(Robertson) 출 6:1, 6;신 5:15;시 136:12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13:18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 본 구절은 광야 40년간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참으시고'로 번역된 혤라어 본문은 사본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 '에트로포포레센'(* ):공동번역 및 많은 영역 성경이 이 용어를 따라 '참으시고'로 번역했다. 이 용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 많은 잘못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참으신 사실을 부각시켜 준다. (2) '에트로포포레센'(* ):영역 성경 중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이 번역을 취하며 몇몇 대문자 사본 및 소문자 사본, 그리고 번역본들이 이 용어를 선택한다. 이는 '돌보다'는 의미로 신 1:31의 70인역(LXX)에 따른 것이다. 몇몇 학자들이 (해석을 지지하지만(Holtzmann, Zahn, Bruce)어떤 학자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Haenchen, Marshall, 아사노 중이찌). 사본상으로 '참으시고'가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으나 의미상으로는 '돌보시고'가 더 어울 리기에 어느 하나를 강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신 1:31의 히브리어 본문은 70인역의 '돌보시다'란 의미보다 '참으시다'의 의미에 더 가깝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는7'에트로포포래센'(* )이 더 적합하다.
=====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정착하게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약한 본문은 신 7:1과 연관이 있다. 신 7:1에서 그 일곱 족속이 헷,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로 언급되어 있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 '기업으로 주다'에 사용된 동사 '카타클레로노메오'(* )는 70인역(LXX)에서는 종종 나타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서만 언급된다. 그 뜻은 '몫을 따라 분배하다'란 의미로 유산 상속과도 관계가 있다. 본절에서 이 동사는 각 지파가 받을 분깃에 따라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것에 대해 적용되었다. 약 사백 오십 년간 - 여기서 450년이라는 기간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계산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매우 모호하다. 특히 사본에 따라 본 구절의 위치가 다르다. (1) 개역성경처럼 20절에 언급되는 '그후'란 표현 앞에 본구절을둔다(* ,A,B,C). 이 경우450년은 사사 시대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2) 20절의 '그후' 다음에 450년을 둘 때 애굽에서 탈출한 후 광야생활부터 사사 시대까지 포함하여 450년이 된다. 첫번째 견해를 취할 경우 애굽에서400년, 광야에서 40년, 가나안 정복 기간 10년을합친 450년을 뜻한다(Bauernfeind, Lenski, Bruce, Knowling, Weiss, 아사노 중이찌). 그러나 실제로 광야 40년과 사사 시대는 사무엘 이전까지 약 37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사로 앉으면서 활동한 기간이 다윗왕까지 이어지는 70여 년간으로 계산할 경우 450여년이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 450여 년은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정착하여 왕을 세우기까지의 기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2)를 따르는 편이 무난하다.
=====13:20
그 후에 - 앞절이 가나안 정복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므로 '그 후'란 가나안 정복 이후 사사 시대를 뜻한다.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후 이스라엘을 이끌어 갔던 지도자들을 요약하여 언급하고있다. 가나안 정복 후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 기간은 가나안 정복 전쟁(B.C. 1405)에서부터 사무엘이 그의 사역을 마치기까지(B.C. 1017) 약 400여 년이다.
=====13: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 사사 시대가 끌나고 왕정 국가 시대가 언급되고 있다. 왕정 국가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사무엘이 너무 늙었다는 이유와 함께 다른 열방들의 왕권 통치에 대한 부러움예서 시작되었다(삼상 8:5). 사실 이러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거부하는 것이며 신정 시대(神政時代)를 폐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은 들어주셨으나 호 13:11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이 분노하여 왕권을 허락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즉 왕권에 대한 요구는 부당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사울의 통치는 40년간(B.C. 1050-1010) 계속 되었는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함과 동시에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음으로써 그의 통치는 끝나게 된다(삼상 31:1-6). 본 구절에서 언급되는 사울의통치 기간 40년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으므로 다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추측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Haenchen, Lenski).
=====13:22
폐(廢)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 바울은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등극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사울왕을 '폐하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호 13:11)임을 보여준다. 이는 왕정국가가 성립되었어도 하나님 개입이 계속 되었음을 말해 준다. 아마도 바울은 18절의 표현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참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려는 듯하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 삼상 13:14과 시 89:20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본문은 이스라엘의 왕정(王政)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왕가(王家) 의 정통성을 신적인 권위로 세우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열망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음에 합한'이라는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구속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인물임을 부각시킨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 다윗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는 23절에서 언급되는 메시야탄생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결국 다윗 선택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속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구속사를 이스라엘 백성이 대망하던 메시야에게로 초점을 맞추어 진행시키고 있다.
=====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은 삼하 7:12에서 볼 수 있다. 이약속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언약을 맺는 형식을(창 15:1-21) 취하지 않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주어졌다. 그렇지만 언약 맺음에 있어서 수반되는 축복과 저주, 충성과 복종의 조항이 언급되므로 삼하 7장을 '다윗 언약의 장'이라 부른다. 아무튼 바울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면서 다윗 언약을 상기시켜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왕통을 이어받았음을 증명하였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 이 말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안에서 성취되었음에 대한 표현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약간의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즉 본절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온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예수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소명자로서의 바울과도 모순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메시야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유대인들은, 다윗에게 약속한 메시야는 다윗 왕국을 강건하게 복원시키는 정치적 인물임을 믿었다(삼하 7:12-16).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에 대해 다앙한 예언이 있다. 즉 수난의 '종'(사 42:1-7; 49:1-7; 50:4-9; 52:13-53)또는 '인자'(단 7:13), '왕'으로서의 메시야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슥 4:11-14) 등이 나타난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한 메시야에게 다양한 상(像)이 복합적으로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으나 유대인들은 굳이 일부분만을 취하여 메시야를 정치적인 즉 이스라엘에 국한된 메시야로 한정시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이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말한 것은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메시야 사상을 말하기보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예언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구주임을 권위있게 증언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국한시키는 말로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설 교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 13:13-16 / 양향모 목사
사도행전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나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명령을 하셨고 제자들은 그 명령대로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13장에 들어오면서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아닌 바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유대문화와 헬라문화를 동시에 배우고 경험하여서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된 기독교를 이방인들에게 전하기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사울이라고 불리던 그가 13장부터는 자연스럽게 바울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으로 이방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라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여행을 했는데 1차 선교 여행에서 3차 선교 여행까지로 구별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그의 선교여행이 막을 내립니다. 1차 선교여행은 안디옥교회에서 시작을 해서 구브로섬과 소아시아지역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2차 선교여행은 소아시아지역(지금의 터키)과 유럽의 일부지역에서 선교를 했고 3차 선교여행은 1,2차 선교지역을 다시 돌아보면서 복음을 전했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올라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브로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 일행이 배를 타고 소아시아지역인 밤빌리아의 버가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더 나아가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바울이 최초로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 이전에도 복음을 전하면서 이런저런 말씀을 전했지만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설교를 한 것은 처음이로 보입니다. 앞서서 베드로의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바울의 설교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설교하기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본문 13절에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라고 했습니다.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 있는 버가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첫 선교지가 구브로라는 지중해 연안의 섬나라라고 했습니다. 바보는 그 섬의 수도였고 항구도시였습니다.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로 갔다고 했는데 버가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의 해안도시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잘 아실 텐데 복음이 세계만방으로 전파되면서 한꺼번에 먼 나라로 전파되지 않고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점점 멀리 점차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에 있는 구브로로 갔다가 구브로에서 북쪽의 소아시아로 갔다가 그 다음에는 점점 더 서쪽에 있는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됩니다. 유럽의 입구 쪽에 있는 로마로 복음이 전파되어서 로마의 국교가 되게 하고 나중에는 유럽에서 서쪽인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서쪽인 우리나라가 있는 아시아지역으로 와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동으로 가면서 서쪽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할 때 늘 동역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번 1차 여행 때는 바나바가 같이 왔고 요한도 같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브로에서 버가로 올 때 요한은 함께 오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마가요한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사도의 제자였고 함께 동행한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마가요한이 왜 중도에서 돌아갔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힘든 선교여행을 견디지 못해서 돌아갔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도 뒤따라 가다가 위기가 닥치자 걸치고 있던 홑이불을 던져버리고 도망을 갔던 사람입니다.
그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간 이유는 아마도 바울과 마음이 맞지 않아서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닌 베드로사도의 제자였고 그도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으로서 예수님께 직접 배운 제자가 아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마가요한에게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후일 마가가 다시 바울과 동행하려고 했을 때 거절하고 그와 같이 가기를 원하는 바나바와도 결별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겁이 많다는 이유로 그렇게 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선교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같이 하고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일을 같이한다고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른 복음을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좋다, 착하다, 부지런하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함께 할 사람을 구별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바른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잘해주고 아무리 좋은 것을 주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이단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가까이 하면 안 됩니다. 조금 엇비슷하다고 해서 받아주면 안 됩니다. 그 작은 차이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는 너희가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른 교훈 즉 복음을 따르지 않는 자는 잘 살펴보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께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할 사람은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무장이 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좀 부족하고 힘이 없다고 할지라도 바른 복음 안에 있을 때 진정한 복음의 일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세워서 파송한 안디옥교회는 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있는 수리아(지금의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교회였지만 본문의 안디옥은 지금의 터키지방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라가 망하고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는데 여기 비시디아 안디옥에도 유대인들아 많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우고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모여서 기도를 하고 성경말씀을 낭송하고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설교를 통해서 배우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보다도 이런 회당들이 오늘날 교회에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회당에 모여서 같이 읽은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을 말하고 선지자의 글이란 대소선지서를 말하는 것이지만 대개 구약성경을 이야기 할 때 율법과 선지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읽어놓고 그 뜻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구약성경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받은 선민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고 잘 산다고 했는데 지금 그런 말씀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되었는데 그런 약속의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 같으면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이방인들처럼 이방신이나 섬기고 살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은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낭독하고 있지만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을 하여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가 그곳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마침 그들이 회당 안에 들어 온 것을 보고 청중에게 권면할 말이 있으면 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서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봤지만 철저하게 구약성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도 다음 주부터 살펴보겠지만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 많은 사건들이 그 많은 축복의 약속들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는 것임을 설명하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시대의 회당에 앉아서 구약성경을 낭독하고 이 세상의 축복들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처럼 구약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의 축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발견해야 할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의 도리로 지켜야 하는 율법을 강조하고 세상 축복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간판을 걸고 예수교라는 간판을 걸고 교회당에 십자가를 우뚝 세워두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고 바르게 사는 일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복 받고 잘살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의 핵심을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아시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안 된다고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해주셨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착한 일을 하고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저 한두 가지 한 착한 일을 내세우지 말고 마음속에 가득한 죄악의 무서움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자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성경의 교훈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6절에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유독 ‘들으라’라고 하는 말씀을 자주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신명기 6장의 말씀도 ‘들으라’로 시작을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라고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들으라’로 시작을 합니다. 단순히 들으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들으라고 시작하는 신명기의 말씀처럼 듣고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언제나 이 말씀을 강론하고 손목에 매여 기호로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고 하신 것처럼 철저하게 이 말씀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첫 설교인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마치시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무리가 잘 아는 로마서의 말씀에서도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진리도 알고 진리를 알아야 믿음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한데 말씀을 듣는 것은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항상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 대상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라고 했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진리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으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신 선민 이스라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아니지만 이방인으로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 있습니다. 유대인들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복음의 말씀을 우리들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듣기는 듣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 끝이 나고 진리를 알지 못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듣는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만 들리는 신비한 비밀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4:23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후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하셨는데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을 보면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대부분이 다 잘 들으시지만 다른 교회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면 유난히 잘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이 들리시면 여러분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혹시 말씀이 잘 안 들리면 들으려고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시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에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하는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특권이며 엄청난 축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경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세계만방에 전파되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김경수 목사 / 행 13:13
요즘 단순한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에도 보면 단순한 삶의 비결을 제시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얼마 전까지 만해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 있는데 그 제목이 ‘단순하게 살아라’(Simplify your life)입니다. 복잡한 삶의 방식을 정리하여 단순하게 만들어야 효율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물품관리, 시간관리, 건강관리, 재정관리, 인간관계 등 모든 삶의 주변 요인들을 단순성이라는 원칙을 기준으로 과감하게 버리고 정리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단순한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복잡한 겁니다. 피곤해요. 지쳤습니다.
가정용 전자제품의 기능은 갈수록 다양해지며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터넷을 할 수 있는 냉장고도 있다더군요. 사무용 기계의 사용설명서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것도 있습니다. 교회 복사기가 자꾸 고장이 나서 작년인가 복사기를 바꿨습니다. 전에 있던 것보다 더 기능이 많고 성능이 좋은 복사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용을 못하겠더군요. 얼마나 복잡한지.... 아예 배울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컴퓨터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도 제대로 알고 사용하려면 수백 페이지의 매뉴얼을 숙지해야 합니다. 저도 한컴퓨터 하는데, 얼마나 시간을 많이 투자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습니다. 자꾸 업그레이드, 발전하거든요. 그런데 이거 다 따라갈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무선 랜이 어쩌고 그렇게 떠들어대지만 사용 안하고 있습니다. 나이 드나봐요. 이젠 아주 복잡한 게 자꾸 싫어집니다.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 최신 휴대폰의 기능은 다 알고 사용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요즘은 휴대폰으로 별 걸 다 하더군요. 더 말 안하겠습니다. 휴대폰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다 설명하고 나면 예배 마쳐야 됩니다.
신용카드 응용법(?)은 그야말로 무한대입니다. 주유소에서 기름 넣을 때 어떤 카드를 어떤 주유소에서 사용하면 몇%가 할인이 되고 포인트가 적립이 되면 어떤 물건을 선물로 주고, 어떤 카드는 놀이공원 입장할 때 몇 사람까지 몇%가 할인이 되고 어떤 기간에는 무슨 보너스가 있고, 어떤 카드는 어떤 물건을 어떤 백화점에서 살 때 포인트 점수를 몇 점 주는데 그 포인트를 몇 점까지 모으면 어떤 조건에 한해서 어떤 물건을 구입할 수도 있고, 어떤 카드는 물건을 구입할 때마다 구입액의 몇%를 마일리지로 적립해 주는데 그 마일리지로 어떤 호텔에서 어떤 조건으로 식사를 할 수도 있고 지금은 실버회원이지만 마일리지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골드회원이 되는데 그러면 무슨 골드회원 전용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더 많이 돈을 쓰면 다이아몬드회원이 되는데 그러면 뭐 어쩌고....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모든 복잡한 도구들을 그야말로 신들린 듯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볼 것도 많고 알아야 될 것도 많고 즐겨야 될 것도 많고 생각해야 될 것도 많습니다. 얼마나 복잡합니까? 얼마나 피곤합니까? 그런데 안 따라 갈 수가 없어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사는 게 앞서가는 것이고 똑똑한 것이고 잘난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떻게 그렇게 안 살 수가 있습니까? 바로 이게 문젭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복잡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이 있습니다. 이러한 강박증은 괜히 사람을 바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잃게 합니다. 핵심을 흐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짙은 안개와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정리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을 구별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돈이 기준일까요? 자녀가 기준입니까? 체면? 무엇을 기준으로 내 삶에서 덜 중요한 것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요?
단순하게 살아라는 책에서 단순한 삶을 일곱 단계의 피라미드 모양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피라미드의 가장 밑 부분, 즉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에 인생의 목표를 발견하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단순한 삶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기준으로 해서 덜 중요한 것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토마스 켈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삶이란 ‘거룩한 중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삶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거룩한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거룩한 중심이 과연 무엇이냐가 중요하겠군요.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 말씀 가운데에서 그 거룩한 중심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3주 전에 오늘 읽은 본문을 포함해서 앞부분에 있는 바울사도의 설교를 함께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바울사도의 역사관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사도의 역사관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택하시고 인도하시고 참으시고 주시고 또 주시고 세우시고 또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의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혜의 역사를 믿는 것이 기독교적인 역사의식입니다.
역사는 흐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고 흘러 어디로 가는지 아는 역사학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은혜의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은혜의 역사는 구주 예수를 향하여 흐르는 것입니다. 구주 예수는 은혜의 바다입니다. 은혜의 강물은 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입니다.
‘천년과 하루’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이라는 신학자가 쓴 신학서적입니다. 이 책은 구약성경의 중요한 흐름을 설명한 책입니다. 그래서 부제목이 ‘구약성경의 주류’입니다. 그런데 왜 책제목을 천년과 하루라고 정했을까요? 구약성경의 역사는 수 천 년의 기간을 포함하고 있지만 성문화되는 과정은 약 천년이 걸렸습니다.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수 천 년의 역사를 정리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목적은 하루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하루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던 날입니다. 그래서 천년과 하루입니다. 구약역사의 흐름은 바로 이 한 날을 향하여 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구원의 날이었고 은혜가 완성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구주 예수님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여름휴가 때 가끔 야외수영장을 아이들과 같이 갑니다. 어떤 수영장을 가면 유수풀이라는, 물이 흐르는 풀이 있습니다. 이 유수풀에서 수영을 하면 무슨 수영선수가 된 것처럼 수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수영을 못해도 공기주머니 깔고 앉아 있으면 저절로 흘러갑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수풀에서 놀다가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 줄 요량으로 제가 가끔 장난을 할 때가 있습니다. 흐르는 물을 거꾸로 타고 수영을 하는 거죠. 뭐 미친 듯이 물장구를 치며 발버둥치면 아이들이 좋다고 하거든요. 왜 좋아할까요. 우선은 발버둥치는 게 재미있겠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발버둥쳐도 뒤로 간다는 사실이 우스운 거죠.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인생이 그 모양이라면 절대로 웃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반대 방향으로 삶의 목표를 정한다면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아주 민망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의 본질과 이치를 밝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의 본질이 은혜요, 역사의 이치가 십자가 구원을 향하여 흘러가는 것이라면 거기에 방향을 맞추고 사는 것이 복입니다. 아주 단순한 겁니다. 복잡할 것 하나 없습니다. 은혜에 인생을 맡기고 구주 예수를 바라보면 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중심입니다.
은혜의 물결을 타고 가시기 바랍니다.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좀 필요 없다 싶은 건 좀 덜어냅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은혜를 바라볼 여유가 없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저는 현대인들이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을 잃은 불안감과 놀이공원의 즐거움이 공존하는 복잡한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길을 잃었지만 놀이공원의 즐거움과 환호성 때문에 정신이 산란하고 헛갈리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숨 돌릴 틈 없이 발전하는 기술 문명이 주는 새롭고 신기한 경험 때문에 인생의 참된 목표를 찾는 일에는 시들해졌다는 말입니다.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는 관심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도 보내야 하고 가끔가다 벨소리도 바꿔야 되고 인터넷 메일의 아바타 옷도 갈아 입혀야 되고 하루에 수십 통씩 들어오는 스펨 메일도 지워야 되고 새로 업그레이드된 프로그램의 새 기능도 익혀야 되고 사회적 인맥형성을 위해 사람도 만나야 하고 국제화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외국어 학원도 다녀야하고 사회적 교제를 위해 골프도 배워야 하고 몸매도 만들어야 되고 교양을 쌓기 위해 연주회에도 가끔 가야하고 스트레스 풀기 위해 극장이나 춤방에도 가야하고 춤방에 가자니 춤도 배워야 하고 취미생활을 위해 동호회 가입하고 번개모임이다 정팅이다 가봐야 하고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해야 하고 머리카락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치료해야 하고 싼 물건 찾기 위해 인터넷 바다를 헤집고 다녀야 하고 가끔가다 채팅에 게임도 조금씩 해야 하고...
물론 사람들이 이처럼 새로운 기술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단지 호기심이나 즐거움 때문 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보화 사회라는 새로운 사회적 압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기술 정보에 대한 지식이 힘입니다. 그러나 기술정보산업의 도구에 대한 이해 없이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기술정보사회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쁘게 산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복잡하고 향상된 기계와 사회적 시스템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바쁘고 복잡해진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두된 새로운 영적 문제입니다. 바쁜 생활이 영적 생활에 치명적인 해악이라고 말하는 영성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쁘고 복잡하고 분주한 삶의 환경은 우리의 영적 여행에 짙은 안개와 같습니다. 은혜의 강물을 따라 구주 예수님의 품, 은혜의 바다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 1952년 7월 4일, 미국에서는 한 여자 수영선수가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을 TV로 중계했습니다. 그 수영선수는 플로렌스 체드윅이라는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영국해협을 수영으로 왕복한 최초의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가 새로운 기록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플로렌스 체드윅은 캘리포니아주 카타리나 섬에서 출발해서 캘리포니아 해안을 향해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16시간 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목표지점을 얼마 남겨 놓고 그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캘리포니아 해안은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기자회견을 하면서 그녀는 실패의 원인이 안개였다고 말했습니다. 목표지점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두 달 후 플로렌스 체드윅은 그 일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이번에는 남자가 세운 최고 기록을 두 시간이나 단축시키면서 목표지점에 도착했습니다. 그 날도 역시 안개가 자욱했지만 플로렌스는 그 안개를 보지 않고 안개 너머에 있는 목표지점 만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안개 뒤에는 승리, 안개 뒤에는 승리라고 외치면서 목표지점 만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플로렌스 체드윅은 안개를 보다가 실패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도에서는 안개를 보지 않고 목표지점을 생각했습니다. 안개 속에 존재하는 목표 지점만을 생각하고 헤엄쳤습니다.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의 안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안개에 가려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몇 해 전 교역자 기도회를 갔던 수양관 마당에서 참 기억에 남는 바위를 보았습니다. 그 바위에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주 간단한 글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역시 예수, 결국 예수!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오직 예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역시 예수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라고 외치며 눈을 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인생입니다. 이제 보니 오직 예수, 알고 보니 역시 예수, 살고 보니 결국 예수! 오직 예수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역시 예수라고 고백합시다. 예수라고 외치며 눈을 감을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허물을 회복하는 자리로 나오십시오
행 13:13-14 / 이일기 목사(김해삼일교회)
행 13:13,14; 딤후 04:11
사람은 실수를 통하여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하여서 나는 저렇게는 안 되어야지 하는 간접적 배움을 익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허물과 실수를 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온전한 삶을 살기 원하지만 그럼에도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고 자신과 타인에게 본의 아니게 누를 끼치게 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으로 삼는 생활이어야 하고, 교회를 중심한 생활에서는 덕을 세워야 하며, 성도 간에는 유익한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에 그곳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균열과 갭이 생기고 인간적인 냄새가 나타나게 되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염려와 근심 그리고 걱정거리가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살피고 자신을 주께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허물과 실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한 후유증이나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행심사에 각별히 유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내용 중에 마가의 중대한 허물이 나오며 그리고 그 결과가 나중에 큰 후유증을 가져오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마가의 허물을 통하여서 나는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각오를 함으로 허물과 실수를 예방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마가의 인적사항을 살펴보겠습니까?
마가는 행 13장에서 안디옥교회로부터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을 때 선교사의 수행자(修行者)로서 발탁 된 사람입니다.
아마 그가 수행자로서 발탁 된 데에는 어떤 신앙의 장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침묵하고 있지만 적어도 기도의 열심, 전도의 열기, 충성의 열매, 굳은 결의와 각오 등이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행 12:12절에 의하면 요한은 사회생활을 위하여는 마가라고 하는 로마식의 이름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상적으로 마가 요한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① 먼저 마가복음의 저자(著者)라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아니면서도 복음서 중 두 번째의 기록자로서 귀중한 사명을 감당한 인물입니다.
② 다음으로 마가의 어머니 다락방이 유명합니다(행 12:12,13). 이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시행되었고 또 120여명의 성도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공간역할을 하였으며 후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락방의 규모(120석 이상)로 보아 마가 요한은 경제면에서는 그의 어머니의 배경 아래 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③ 마가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첫 부분은 행 12:25절입니다.
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 오니라.
여기 부조의 일은 예루살렘교회가 기근(饑饉)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에 안디옥교회가 구제헌금을 하여 전달하는 일을 바나바와 바울이 맡았는데 그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교회로 돌아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왔다는 말입니다.
이 마가가 안디옥교회에 와서 함께 봉사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나바와의 인척관계 때문이라고 추정합니다(골 4:10 바나바의 생질 마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가의 두 번째 부분은 행 13:05절에 나옵니다.
행 13:0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1차 선교를 나설 때의 기록)
2. 마가의 허물이 여기에 있습니다.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마가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교의 대열에서 갑자기 돌아 서 버렸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밤빌리아의 수도 버가에서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으니 이 시간 여러 각도에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분명히 마가는 자신의 뜻과는 맞지 않는 일들이 생겼으리라는 짐작이 듭니다. 한 마디로 시험에 들었다는 말이죠. 물론 힘드는 일들이야 많이 안 생기겠습니까? 낯선 곳이니 말입니다.
고향 생각도 절로 났겠지요? 편안한 이부자리에다 좋은 환경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보통 결심이 아닌 단단한 각오를 하고 따라나섰을 터인데 왜 마가가 도중하차(途中下車) 하고 말았을까요?
자기가 돌아서면 그로 인해 발생할 후유증이 선교의 일에 대단히 큰 지장을 줄 건데 말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마가가 되돌아간 이유를 한 번 추적해 보겠습니다.
① 바울 선교 팀이 바보에서 성공적인 전도를 마친 후 배를 타고 280Km를 지나 앗달리아(행 14:25)항에 상륙하여 다시금 육로로 20Km를 걸어서 버가에 도착하였습니다.
13,14절에 마가가 돌아간 지역 버가에서부터 이후의 행선지를 살피면 처음에는 해안로(海岸路)를 따라서 가다 높은 고원지대로 올라가야 하는 코스입니다.
그런데 해변에서 고원지대로 올라가는 이 길이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 중의 하나인데다 도둑과 강도가 들끓는 지역으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험난한 치받이 길을 올라가려고 할 때 마가는 육신의 위험과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되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4:13-14에 의하면 바울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지역의 풍토병인 말라리아 병을 앓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이 나옵니다. 리더자가 지금 지쳐있고 거기에다 병까지 겹쳤으니 마가 요한 자신도 수행자로서 나아갈 길이 험산 준령인지라 그 고생길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되돌아간 것으로 생각이 되어집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고생 한 번 안하고 자랐기에 막상 눈앞의 큰 시련들을 당하고 보니 자신은 없고 출발할 때의 그 굳은 각오도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사명의식이 투철하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말이지요.
결국 마가는 주님으로부터의 받을 영광만 바라보았지 고난의 십자가는 보지 못한 영적 시야가 좁은 사람으로서 인간적인 열심만 앞세웠던 사람입니다.
② 마가가 되돌아간 일을 놓고 볼 때 또 하나의 짐작되는 일이라면 외숙부 되는 바나바가 선교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율법 지키는 문제로 의견에 차이(갈 2:13)가 있었는데 이 때 외숙부가 너무 밀리자 그 불만 때문에 되돌아갔을 것이라는 짐작입니다.
고후 6: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일에도 헌신과 희생하겠다는 각오가 따라야만 일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지 그저 안일한 생각만 가지고는 능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 처음에는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차츰 시간이 좀 지나다 보면 살며시 사라지는 마가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도 마가와 같은 각오로 신앙의 출발을 하였지만 이내 무너져 낙심한 마가와 같은 자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들에게 전도를 하면 하는 말이, 나도 한 때는 교회 열심히 잘 다녔고, 충성도 했고, 신앙의 의무도 잘 이행했습니다. 세례도 받았고 서리집사도 교사도 했습니다라고.
그러면 왜 이러한 사람들이 실족하게 되었습니까? 여러 사정들이 있지만 신앙의 기준점이 인간적인 중심 즉 사람을 보고 믿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처음에도 잘하지만 끝에도 잘하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시험이 있고 고난도 있기 마련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낙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면 이것은 사단이 나에게 주는 시험이구나. 이 시험은 이겨내야지 라는 신앙의 자세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3. 마가의 허물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까?
마가의 선교지에서의 도중하차하는 사건은 초대교회의 시절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등장을 합니다. 한 번의 허물이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제2차 선교가 시작될 무렵 다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행 15:36-40).
제1차 선교를 잘 마친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하고 온 지역의 사람들이 몹시 궁금했습니다. 잘 믿고 있는지, 시험에 들지는 않았는지, 그 사람들을 다시 심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다시 선교를 떠나자고 제안을 합니다.
양자 간에 좋다고 의견 일치를 하여 2차 선교를 준비하는 중에 그만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발생을 합니다(행 15:37-41).
행 15: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라는 말(행 15:39)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두 사람 다 안디옥교회의 중요한 일꾼으로서 교회를 발전 시켰으며 어려운 중에서도 1차 선교를 은혜 중에 마쳤던 사이 아닙니까? 그런 두 사람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게 된 이유가 바로 마가의 1차 선교 때의 중도에서의 돌아간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자기의 생질인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 위해서 바울에게 마가를 수종자로 데리고 가고자 제안을 합니다(행 15:37).
그러나 바울의 눈에 비친 마가는 변절자로서 신임할 수 없는 낙인이 이미 찍히고 말았는데(행 15:38) 도무지 신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 13: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하다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그렇게 배신한 사람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포기하자는 것이지요. 두 사람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를 수행자로 데리고 가는 일을 놓고 격렬한 논쟁 속에 서로가 갈라서고 말았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마가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1차 선교를 떠날 때 함께 동참하면 재미나는 여행이 될 줄 알았지만 그러나 선교는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려울 때에 도망간 자는 참된 동역자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어떤 과정이었든지 간에 마가는 두 사도로 하여금 분쟁을 일으키는 허물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다툼을 일으키게 하는 일에 내가 불씨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나의 허물은 무엇입니까?
사명 의식이 부족하고 믿음의 시련을 이기지 못하는 일로 인해 전체적 문제를 일으키지는 아니합니까? 나 때문에 교회단체가 아니면 소속한 기관이 또한 사회의 생활단체가 시끄럽고 요란스럽지는 아니합니까?
전체의 힘을 모아 주의 일을 하여야 할 때임에도 나 하나쯤이야 하는 무관심 때문에 교회나 기관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나 때문에 주님의 일에 피해를 끼치는 쓴 뿌리가 되지 않도록 요나와 같은 심정으로 삽시다.
욘 0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4. 결론으로 마가는 결국 자신의 허물을 회복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 디모데후서 04:11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딤후 04:11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이 그저 노년에 마가를 옛정을 생각해서 한번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가가 1차 선교여행 후 약 15년 동안 역사의 표면에서 가려 있었고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 행적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딤후 04:11절 말씀으로 보아 전날의 그 허물을 어떻게든 신앙으로 회복하여 바울로부터 재신임을 받고 좋은 관계가 다시금 이루어졌다는 것을 다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몬 01:24절에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소개하고 골 04:10절에서는 나와 함께 갇힌 마가로 표현함으로 바울이 자신의 선교 대열에 마가가 동참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지하 감방에서 순교를 앞두고 있었을 때 마가를 이렇게 갑자기 등장시킴은 이탈자로서의 허물을 충분히 회복할 만한 신앙의 일들이 능히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마가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며 목회를 하였다고 전해지고는 있습니다. 다시 충성할 기회를 얻은 마가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서 지금 충성의 기회를 잘 살립시다.
바울의 아시아 전도와 마가의 중도 포기
사도행전 13:13-15 / 김영규 목사
바울의 아시아 전도에 대하여
오늘 읽어드린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요지는 바울 일행의 행선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구브로 섬을 떠나 아시아 본토로 향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터키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향후 바울의 제2차, 제3차 전도 여행 때도 빠짐없이 들리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둘째 요지는, 요한 마가가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간 일입니다. 마가의 이탈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에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바울의 아시아 전도입니다. 아시아라고 하지만 지금으로 하면 주로 터키 영토 내에 있는 지역입니다. 바울은 구브로 섬의 바보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의 밤빌리아 지역에 있는 버가의 외항 앗달리아에 상륙했습니다. 이 지역은 지금의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 지역입니다. 여기서 육로로 북상하여 내륙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한 것이 제1차 전도여행의 주요 내용입니다. 본문에는 그 첫 번째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 활동이 시작됩니다.
비디디아 안디옥이 어디일까요? 안디옥이란 이름이 붙은 도시는 16개나 됩니다. 모두가 다 알렉산더의 후계자의 한 사람이었던 SELEUCUS 1세 NICATOR(312-280, BC)에 의해 세워진 도시들입니다. 그는 이 도시들을 건설하고 자신의 부친 ANTIOCHUS의 이름을 따서 안디옥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시리아 지역의 안디옥과 같은 배경입니다. 시리아의 안디옥이 로마의 3대 도시 중에 하나인 큰 도시였다면, 비시디아 안디옥은 터키 내륙 지역에 있는 중심 도시였습니다. 사실 “비시디아 안디옥”이란 말은 맞지 않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안디옥이 위치한 지역은 비시디아가 아니라 행정구역상 갈라디아의 부르기아였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브르기아의 안디옥이라고 불러야 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훨씬 후에 비시디아라는 로마의 행정구역이 생기면서 그 수도가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BC25년 로마의 영토가 되었는데,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 도시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군사도시로 만들고, COLONIA CAESAREA ANTIOCHIA란 공식 명칭을 붙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왕의 길’이란 칭호가 붙은 로마의 군사 도로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남서쪽으로 120마일 떨어져 있는 루스드라 역시 ‘왕의 길’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로마의 군인들, 헬라인들, 유대인들, 고위 관리들의 부인들이 다 전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시아 지역, 특히 터키 지역이 바울의 제1차, 전도 대상 지역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지리적 문화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터키는 묘한 지역에 놓여 있습니다. 본토 대부분은 아시아쪽에 놓여 있습니다만, 가장 큰 도시인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 쪽에 놓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터키는 동서양의 통로인 셈입니다. 복음이 터키 지역에 전파된 후에 바다를 건너 유럽 마케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터키를 통해서 복음이 서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정했는데, 이 콘스탄티노플이 바로 지금의 이스탄불입니다. 터키를 통해서 건너간 복음이 유럽을 복음화하고, 마침내 대서양을 건너서 서진을 계속하게 됩니다. 11세기 이후로 터키 지역은 셀주크 터키족에 의해 이슬람화 되면서 마침내 오스만 터키 이슬람 제국을 세우게 됩니다. 16세기 경 오스만 터키가 융성할 때는 지중해 연안의 대부분과 오스트리아 지역까지 회교 세력이 팽창했습니다. 그 후 오스만 터키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연합군이 되었다가 패전국이 됨으로써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그와 함께 회교 세력도 다시 밀려나게 됩니다. 터키는 회교와 기독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접경 지역입니다. 터키 국민의 98% 이상이 수니파 회교도이고, 인근 유럽의 알바니아 같은 지역에는 많은 회교도들이 살고 있습니다. 터키가 유럽 지역에 회교를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해마다 터키가 유럽 연합(EU)에 가입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유럽에서 좀처럼 받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 터키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통로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지역에 복음을 집중적으로 전파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에베소, 골로새,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이 모두 이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바울의 아시아 전도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터키 지역이 종교적으로 어떠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 터키는 전 국민의 98% 이상이 수니파 회교도인 회교 국가입니다. 과거, 사도 바울이 수 십 년간 목숨 걸고 전도하여 세웠던 교회들은 흔적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도 물론 자취를 감춘지 오래입니다. 저는 터키를 여행하면서 한참동안 허탈감과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왜 기독교 국가가 한 순간에 몰락하여 회교국가가 되었을까? 그 많은 순교자들의 피는 어디로 가고 기독교 신자가 몇 백 명 밖에 안 되는 나라로 남아 있을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선교사가 목숨 걸고 전도한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해답은 바로 신앙의 현재형에 있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과거형 신앙은 없습니다. 나도 왕년에 이렇게 믿었는데! 나도 왕년에 이렇게 봉사했는데! 다 소용 없습니다. 선교는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과거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특정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신앙에서 떠나면 교회는 소멸됩니다. 복음은 언제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입니다. 지금 현재 믿는 사람이 중심이 됩니다. 지금 현재 복음 전하는 사람이 중심이 됩니다. 지금 현재 믿는 살아 있는 신앙이 핵심입니다. 과거형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왕년 신앙으로 살지 마세요. 현재 신앙이 문제입니다. 왕년에 무슨 경험, 왕년에 무슨 사업, 왕년에 무슨 직분, 다 소용 없습니다. 현재 믿는가? 현재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가? 현재 살아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요한 마가의 중도 포기
다음의 주제는 요한 마가의 이탈에 대한 부분입니다. 요한 마가는 바울이 아시아에 상륙한 직후 바울 일행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에게 상당히 아픈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오죽하면 제2차 전도여행을 출발할 때에 이 사건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헤어지기까지 했겠습니까? 바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요한 마가와는 절대로 선교 사업을 같이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일 때문에 바울이 마가와 영원히 등진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마가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골 4:10). 그러나 마가의 도중하차가 한 때나마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큰 실망을 줬던 것은 사실입니다. 마가의 이탈은 돌발적인 것이었고, 정당한 사유가 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초반에 보면 마가는 성령이 지시한 선교사 명단에 이름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신 선교사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입니다. 마가는 말하자면 옵서버로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마가가 아무 생각 없이 선교사를 따라 나선 것은 아닙니다. 그도 분명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결심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안디옥 교회 역시 그를 선교사의 일원으로 파송했습니다. 실제로 마가는 구브로 전도 당시부터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예를 들면 새로 믿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다든지 하는 일입니다. 아무튼 마가가 어떤 이유로 이탈했든지 그 이탈로 말미암아 다른 일군에게 상처를 준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마가가 왜 선교사 대열에서 이탈했는지 살펴보고,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일에서 도중하차 않으려면 어떤 자세로 임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많은 일에 자의로 참여했다가 도중하차 하는 일이 많습니다. 옛 속담에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반면교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선 요한 마가가 누구인가부터 말씀드립니다. 마가는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마가는 바울처럼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식 이름과 로마식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식 이름은 요한이고 로마식 이름은 마가(Marcus)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마가는 예수님이 뽑아서 보내셨던 70 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당시 마가의 부친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부친은 이미 사망하고 모친만 생존한 것으로 봅니다. 마가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그의 집에 대문을 지키는 하녀가 있고,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다락방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의 집안은 상당히 부자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입니다.(골4:10) 후일 마가의 행적을 보면, 신약성경의 마가복음을 기록했고,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 있을 때에 통역을 맡았으며, 애굽으로 건너가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창설하고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마가의 집이 몇 차례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나눈 곳이 마가의 집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고 교회가 창설된 곳도 마가의 집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인들이 모여 기도한 곳도 마가의 집입니다. 마가는 모친과 함께 주님께 헌신하고, 신약 교회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한 마디로 마가는 대단히 믿음도 좋고 열심 있고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왜 선교하다가 도중에 그만뒀을까요? 마가의 이탈 원인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대충 소개하면 이런 것들입니다. ‘본래 출발할 때부터 구브로까지만 가려고 했다. 외삼촌인 바나바가 바울에게 밀려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탈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어머니가 그리워서 이탈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탈했다. 전도 여행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힘들었기 때문에 이탈했다. 사도 바울이 말라리아에 걸리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이탈했다.’(갈 4:13-14) 등등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
제가 볼 때에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직분에 대한 소명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요한 마가는 나무랄 데 없는 청년입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마가 역시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주의 일을 하기로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선교 여행에 주저 없이 따라나섰습니다. 마가는 성경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행적을 꼼꼼히 살피고 많은 자료를 수집한 사람입니다. 그만큼 주님께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마가가 왜 선교지에서 이탈했을까요? 문제는 직분에 대한 소명입니다. 주님께 부름 받았다고 무슨 일이든지 다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이 사람마다 맡기신 일이 다릅니다.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29-31) 목사라고 다 같은 교회를 맡은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도 있습니다. 구성원이 다 다릅니다. 장로라고 다 같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마가가 좋은 일군인 것은 틀림없지만 바울과 동행할 아시아 선교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열정이 있다고 아무 일이나 다 하려고 하지 마세요. 성령이 지시하시고 내게 맡겨주시는 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도와주시고, 일이 잘 됩니다. 인간적인 욕망으로 일을 하면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이라도 감당 못합니다. 도중하차 하는 인생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목사의 일을 하지만 실패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많습니다. 실패한 목회자, 실패한 선교사들이 사역에서 이탈합니다. 해마다 문 닫는 교회가 많아요. 조용히 문만 닫으면 되는데 시끄럽게 팔려가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평신도들도 마찬가집니다. 실패한 교사, 실패한 성가대원, 실패한 장로, 실패한 집사, 실패한 권사, 실패한 봉사대원. 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믿음이 문제입니까, 열성이 문제입니까? 헌신이 문제입니까? 대인관계가 문제입니까? 다 좋아요. 다만 성령님이 맡기시지 않는 직분을 맡아서 한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 어떤 일이든지 소명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시키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을 직분에의 소명이라고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의 직분이 있고 아내의 직분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직분, 아버지의 직분, 자녀의 직분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인 직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직업에 대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 1%들이 다 의사가 되려고 해서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최고 엘리트들이 다 한 가지 직업만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 무모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대학 다닐 때는 공부 잘 하는 수재들이 물리학과와 같은 순수 학문에 많이 지원했습니다. 요즘은 모든 학문을 수입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직업을 주시는지 생각지 않고 그냥 수입 많은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소명 없는 직업, 부르심 없는 직업은 실패합니다. 혹간, 외형적으로 성공한다 해도 만족이 없고 보람 없는 인생을 살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자신을 살펴보세요.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이 부르셔서 맡겨 주신 일입니까? 아니면 내가 욕심으로 맡은 일입니까? 가정 일이든, 직장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마찬가집니다. 능력이 있다고 무엇이든지 다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형통케 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찾으세요. 그래야 성공합니다. 성령이 맡기시지 않은 일을 하면 도중하차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실망을 줍니다. 바울 같이 믿음 좋은 사람도 마가 때문에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 좋다는 핑계로 이 일 저 일 마구 하다가 그만둠으로써 남에게 실망을 줄까요? 상상해 보세요.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정말 주님이 맡기신 일입니까? 그렇다면 죽음이 와도 물러서지 않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난, 어떤 고난, 어떤 굶주림도 우리를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소명 없는 직분이 우리가 하는 일을 멈추게 할 뿐입니다. 소명에 죽고, 소명에 사는 사람들이 되세요. 그래야 실패 없고, 중단 없는 일군들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전 7:17, 참고 20, 24절)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사도행전 13:14-19 / 김영규 목사
안식일에 회당에서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14)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첫 전도 활동은 유대인 회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안디옥에 도착한 후 첫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살든지 반드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가정에서의 예배와 회당에서의 예배가 중심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당에 나와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은 종일 예배로 일관합니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물론, 가정에서는 식사를 겸한 예배로 몇 시간 씩 가족이 함께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인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인간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은 예배로 시작되고 예배로 마쳐져야 합니다. 하루의 일과도 예배로 시작되고 예배로 마쳐져야 합니다. 한 주간의 삶도 예배로 시작되고 예배로 마쳐져야 합니다. 구역 모임을 가지든지, 비즈니스를 하든지, 야외 소풍을 가든지 시작과 끝은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삶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 자체를 식상해 합니다. 왜 매주 똑같은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왜 같은 형식의 가정예배, 같은 형식의 구역예배, 같은 형식의 주일 예배, 같은 형식의 수요 예배, 같은 형식의 새벽기도회를 해야만 하는가? 식상한 이유는 그 마음에 하나님 만나는 것을 중심 주제로 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마다 주님 만나는 것을 핵심 사항으로 삼는다면 아무리 자주 만나고 반복된다 해도 절대로 식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니까 모든 것이 지루하기만 한 겁니다. 보세요! 사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나 항상 반복됩니다. 하루 세 끼 식사가 반복됩니다. 매일 세수하고 양치질 하는 것이 반복됩니다. 매일 화장실 가서 볼 일 보는 것도 반복됩니다. 이런 일이 귀찮아서 그만두면 죽습니다. 매일 숨 쉬는 것이 반복됩니다. 매일 심장 박동이 반복됩니다. 숨 쉬는 것이 귀찮으면 죽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영혼의 양식이며, 호흡입니다. 생명을 얻는 시간입니다. 만날수록 좋고, 만날수록 새 힘이 납니다. 오늘 바로 그런 예배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의 회당 예배 순서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얼마간의 기도가 진행된 후에 성경을 읽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15) 성경은 두 곳을 읽습니다. 첫째는 율법서, 즉 모세 오경을 읽습니다. 둘째로는 선지서를 읽습니다. 선지서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구약의 역사서와 예언서를 포함한 부분입니다. 성경 읽은 후에는 회당장이 지목하는 사람이 설교를 합니다.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15) 회당장의 임무는 회당 건물을 관리하고, 공적인 예배를 준비를 하고, 회당에서 일어나는 각종 모임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예배 시에 설교자를 정하고 맡기는 것도 회당장의 직무입니다. 본문에서 회당장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설교를 맡긴 이유는 성경 지식이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문에 보면 회당장은 바울에게 설교라는 말 대신에 무슨 “권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15)고 합니다. “권하다”(paraklhvsew")는 말은 “위로하다”는 뜻입니다. 설교는 백성에게 위로를 준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아무튼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 예배 시간에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두 종류였습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16)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 즉 혈통적인 유대인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이방인으로써 유대교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유대인들과 다른 점은 회당 예배 외에는 유대인과 같은 의식이나 규율을 유대인처럼 지키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어찌되었든지 바울이 복음을 전한 일차 대상자들은 유대인과, 유대인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입니다. 우선 구약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종교성이 있는 사람들이 우선입니다. 영적인 일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종교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
바울 설교의 시작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 선민 하나님 백성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선민사상은 신구약 성경을 일관하는 가장 중요한 사상이며, 성경에 가장 풍부하게 언급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확실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17) 오늘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결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내가 어떤 종교를 선택한 결과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행이나 수행을 하고, 혹은 깊이 사색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된 것도 아닙니다. 또는 누가 내게 교회에 가자고 이끌어서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병이 들어서, 혹은 사고를 당하여, 사업이 망하여, 등등, 막다른 상황에 부딪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 나옵니다. 그렇다고 그 자체가 하나님 자녀 된 원인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는 근거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 자녀로 선택하신 결과일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 자녀 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결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 자녀가 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선택하실 때에 어떤 조건도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아브라함이 무슨 조건이 좋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우상을 만드는 “우상 공장 공장장”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이나 가문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무슨 학식이 뛰어나거나 지위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선민의 조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어떤 세상적인 조건도 없습니다. 그는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어부입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집안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부자도 아닙니다. 도시 사람도 아닙니다. 갈릴리 시골 마을 촌사람입니다. 무슨 관직도 없었고, 유명 인사도 아닙니다. 그래도 그는 주님의 택함을 받은 것, 한 가지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으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구원과 영생을 주시려고 택하셨습니다.
즉, 완전한 자녀를 삼으시려고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택하신 자들에 관하여는 완전한 구원이 보장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8:28-30,33)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22,24,31)
2. 우리의 행위나 조건에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 은혜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롬11:5-6)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1,1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3. 선택의 시기는 창세 전의 예정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4. 선택은 개인적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4)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3:8)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5. 선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롬 10:20)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엄청나게 비방합니다. 왜 하나님은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시는가? 왜 하나님은 조건을 보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자녀를 선택하시는가? 왜 인간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시지 않으시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을 선택의 여지없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것, 내가 어느 집안의 사람이 된 것, 국적, 인종, 내가 가진 신체 조건들, 피부색, 얼굴 형태, 혈액형, 체형, 건강 상태, 내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 모든 것이 선택의 여지없이 받은 삶의 조건들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 되는 과정을 하나님께서 피조물 인간에게 물어보고 해야 됩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특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특혜를 받았습니까? 본문을 보세요. 우리에게는 세 가지 특전이 주어졌습니다.
선택의 결과
1.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17)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는 말은 곧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애굽은 하나님 없는 세상을 상징하고 애굽왕 바로는 마귀를 상징합니다. 오늘 이 세상은 영적 애굽이며, 이 세상 지배자는 영적인 임금 마귀입니다. 세상은 사람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하수인일 뿐입니다. 마귀는 영원한 심판을 받은 한시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역사가 마감되는 날까지 발악을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마귀, 혹은 사탄이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대적자”란 뜻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마귀는 본질상 죄악 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각종의 죄를 짓게 만듭니다. 나쁜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악한 사상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으로 거기에 매달려 종노릇 하게 만듭니다. 영혼을 파괴합니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무한 인생이 되게 합니다. 죽을 때가 되면 갈 곳 없어 방황하며, 지옥에 떨어지기 싫어서 두려워 절규하는 인생이 되게 만듭니다. 성경이 마귀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8:12)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8,10) 하나님은 애굽에 온갖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죽음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 세상은 결국 애굽처럼 재앙이 내려지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를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셨습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모든 마귀의 지배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입니다.
2. 광야에서 기르셨습니다.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18) “소행을 참으시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한 단어입니다. “tropoforevw”(트로포포레오), 참고 견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간 참으셨습니다. 이 말은 좀 뜻이 이상합니다. 광야 40년간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아보셨는데, 왜 참았다는 말로 표현했을까요? 실제로 어떤 영문 성경에 보면 참으셨다는 말 대신에 “nursed them”(DBY)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참으셨다는 말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들고 원망하고 불평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하고 뽑아주셨다고 감사하고 사례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툭하면 원망하고 불평만 합니다. 광야 40년은 구원 받은 이후의 이 세상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후에, 광야 40년을 지나는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양식 떨어졌다고 원망합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물 주고, 양식 주면 그 다음에는 메뉴가 매일 똑 같다고 불평합니다. 왜 밤낮 만나만 주시는가? 어제는 만나 볶음, 오늘은 만나 찌개, 내일은 만나 튀김, 모레는 만나 스튜, 왜 만나만 주는가?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민11:5-6) 그런데도 하나님은 끈질기게 참고 견디시면서 이 백성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내가 그래도 참고 견디었으니까 이만큼 하나님을 믿었지, 내가 참지 않았으면 교회생활도 안했을 거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정말 참은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제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언제 신앙 지키려고 참았습니까? 툭하면 교회 안 나올 생각만 하고, 툭하면 예배 빼먹을 생각 하고, 무슨 일만 생기면 하나님 탓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후에 하나님 원망 안 하고 멀쩡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까? 100% 없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돈 떨어지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내가 병들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내 자식이 안 되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내가 떵떵거리면서 살지 못하게 하시는가? 평소에 하나님을 찾지도 않다가, 무슨 일만 생기면 하나님 탓을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지만 저 다른 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으로 많아요. 이런 상태로는 천국에 못 갑니다. 하나님이 매일매일 참아주시니까 견디는 겁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광야 40년, 내가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참고 견디어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무사히 천국에 도착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결과입니다. 할렐루야!
3. 가나안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오십 년간) (19)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가로막고 있는 일곱 족속들을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가나안을 가로막고 있는 일곱 족속들이 있습니다. 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들입니다. 이들은 천국을 가로막는 온갖 악한 세력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정없이 몰아내셨습니다. 오직 택하신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시고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뜻하지 않게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을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천국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하나하나 멸하십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 누굽니까?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바알, 아세라, 다곤을 섬기는 것은 물론, 자식을 불태워 죽이는 고약한 풍속을 가진 우상숭배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타락한 족속들입니다. 성문화가 문란하여 신전에서 매춘을 일삼고, 가족 관계가 엉망진창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정없이 멸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앞에 우상숭배의 세력을 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부도덕하고 타락한 문화를 멸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도전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이기 때문에!
물론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강한 힘이 있었습니다. 여리고처럼 견고한 요새와 성이 있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처럼 경제적으로 번영했습니다. 아낙 자손처럼 신체적으로 건장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메뚜기로 비하할 만큼 초라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철병거가 이스라엘의 맨손 앞에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세상 불신 문화와 우상의 세력을 보면 엄청납니다. 이 흐름에 도전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2000년 동안 항상 맨손으로 칼과 권력을 제압해 왔습니다. 로마 황제를 제압했고, 공산주의를 제압했습니다. 오늘날 불신 문화, 타락한 문화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도전을 이기게 하십니다. 담대하게 행하세요. 우리는 세상을 이깁니다. 이미 이긴 자들입니다. 현재도 이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길 겁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그리고 필경은 천국에 도달하게 하실 겁니다. 할렐루야!
결론입니다.
바울 설교는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끝없이 참으시면서 우리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이 세상의 우상과 불신앙 부도덕, 죄악들의 도전을 이기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이 확고부동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선택받은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이 선택받은 자임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선택받은 자녀답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로 그 확인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5)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행 13:20-23 / 김태복 목사
하나님은 다윗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런 엄청난 칭호를 얻을 수 있었는가?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려면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내 능력, 내 지혜나 내가 가진 재산이나 지위 등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믿고 무조건 순종으로 행한 자들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큰 믿음이 있었다는 대표적인 증거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입증되었습니다. 다윗이 아직 소년티도 제대로 벗지 못하는 때에 이스라엘 나라의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불레셋 군대가 쳐들어 왔는데 그 군대 대장은 골리앗으로 당시는 아무도 대적하지 못할 정도에 천하 장수였습니다. 키는 6규빗 한 뼘으로 약 280㎝요, 갑옷의 무게는 5,000세겔로 57㎏이었습니다. 제 몸무게가 59kg입니다. 그러므로 골리앗은 저 같은 사람을 하나 엎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다가 창은 1,600세겔로 약 20㎏인데 그 창을 마치 막대기를 놀리듯 했으니 상상만 해도 너무나 무시무시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유명한 장수들은 다 나가서 싸웠으나 연전연패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장수를 이길 때마다, 이스라엘 장수의 벤 목을 들고 산천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비방합니다. 그렇게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비방했으나, 감히 대적할 사람이 없어서 벌벌 떨면서 수비만 했지 감히 나가는 자가 없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장래는 망하여 불레셋의 속국(屬國)이 되는 길만 남았습니다. 온 국민들과 군대들은 공포에 질리어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소년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가 있는 세 형님들의 식사를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가보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골리앗은 연일 나와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 병신들아, 나와 싸울 자가 없는가?’라고 비방했으나 모두 고개만 쳐 박고 찍소리 못하고 있으니 너무나 분개했습니다.
소년 다윗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분연히 일어나서 형들이 극구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사울 왕에게 가서 자기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다윗은 작은지 사울의 갑옷을 입혔더니 갑옷 속에 쏙 들어갑니다. 그 꼴이 너무나 한심합니다. 그런 소년이 싸우러 나가겠다니 모든 어른들이 자존심이 완전히 상할 지경입니다. 사울도 처음에는 말렸습니다. 삼상17:33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라고 했으나 다윗을 보십시오.
담대히 고백하기를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할 수 없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양 치던 막대기와 물맷돌만 가지고 천하 장수 골리앗을 행해 나갑니다.
이스라엘의 온 군대는 숨이 칵칵 막히는 절박한 상황에서 이 모습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은 천 번 싸워도 천 번 패할 수밖에 없는 100%의 불가능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이나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 믿음으로 바라보고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골리앗을 향해 믿음으로 외칩니다. “골리앗 이놈아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했습니다.
구구절절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만용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전진하고 믿음으로 물맷돌을 힘껏 던졌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을 보고 마치 강아지를 본양 너무 기가 막혀 웃던 골리앗의 이마의 급소에 정통으로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달려가서 골리앗의 칼을 빼서 그 목을 베었습니다.
하나님이 마른 막대기를 들어서 쓰시는 순간이요,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 철저히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가는 자에게 이런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 강원도 속초에서 10여 년간 ‘대동의원’을 운영하던 강원희라는 의사는 1982년도 갑자기 번성하던 병원 문을 닫고 선교사의 길을 떠나겠다고 하자, 노부모님과 식구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모든 친지들이 눈물로 말렸습니다. 그러나 48세 한창 나의 고집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소신을 밝히기를 “아무 관계도 없는 UN군 병사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피를 흘렸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남을 도와야지요.”라고 하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네팔로 떠났습니다. 간호사 출신 부인 최화순씨와 함께 처음 정착한 것은 네팔 제2의 도시인 포카리시였습니다. 그곳에서 부부는 국제선교단체 산하의 병원에서 의료활동을 펼쳤습니다. 말할 수 없이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때로 피가 모자라 자기의 팔에서 직접 피를 뽑아 네팔인들에게 수혈하기도 하고 차가 다니지 못한 곳에는 왕복 10시간 걸어서 왕진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네팔인들은 강원희 의사를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는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오직 하나님만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그 때마다 강하게 붙들어 주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특별히 젊은 제직들과 청년 여러분들이여, 불리한 환경과 조건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강하게 붙잡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순종의 좁은 길로 나감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레’인데 그 뜻은 ‘두려워한다. 존경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해서 대단히 어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존경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존재로만 알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동시에 하나님의 것을 진심으로 존귀하게 여기었기에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 사위로 맞아 들였으나 다윗에 대한 인기가 자기보다도 10배나 더 높아지자 다윗의 쿠데타가 무서워서 여러 번 면전에서 창을 던지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얼마든지 힘과 기회가 있었으나 사울을 향해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점점 도탄에 빠져서 온 백성들이 다윗이 왕이 되기를 갈망하였음에도 피해 다닐지언정 끝까지 반역의 칼을 들지 않은 것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을 해할 수 있으랴?’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울 왕이 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빼앗겼던 법궤를 찾아서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는 법궤 뒤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그 부인인 미갈이 비난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 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라면서 왕으로서 체신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의 대답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는 한없이 낮아질지라도 그리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한없이 높이셨으나, 그러한 하나님 앞에 겸손을 비웃던 미갈은 한없이 버림받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의 것을 업신여기는 잘못을 범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날인 주일, 하나님의 물질인 십일조, 하나님이 맡긴 직책, 하나님의 교회와 교역자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그 때 하나님도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입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새의 집에 와서 사울 왕 대신에 왕으로 세울 인물을 여덟 아들 중에 선발할 때에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니 키도 크고 용모도 뛰어나서 마음에 들므로 왕의 후보로 기름을 부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곱 형제를 보았으나 하나님이 다 불합격을 내리셨습니다. 사무엘은 답답하여 아버지 이새에게 묻기를 “또 다른 아들이 있느냐”라고 물으니 막내가 있는데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형들은 양들을 모두 동생에게 맡기고 택함을 받으려고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무 불평을 하지 않고 적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때로는 그 양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자와 곰과 싸우며 피를 흘릴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택하심으로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붇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외모를 봅니다. 인물, 학벌, 재산 유무, 예의범절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 아무리 적을지라도 충성을 다하는가, 아닌가, 중심을 다해 충성하는가, 안 하는가를 보시고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작은 일에 중심을 다해 충성하는 자가 큰일을 맡기어도 충성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은 일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큰일을 맡기어도 충성하지 않습니다. 과연, 다윗은 후에 아무리 큰일을 맡기어도 충성을 다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전쟁터에서 앞장을 설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특히 교회에서 맡기는 일, 즉, 교사나 찬양대, 혹은 기관 임원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인생을 반드시 책임을 져 주십니다.
윌리암 부드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시므로 가난 속에 성장했습니다. 저는 학교도 중퇴하고 전당포에서 취직하여 심부름꾼으로 가사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고 틈틈이 나가서 열심히 노방 전도를 했고 빈민가에 나가서 축호전도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해 중심을 다해 충성을 다하는 윌리암 부드를 하나님은 점점 더 강하게 쓰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구세군의 창설자가 되어 세계적인 사역자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여, 젊은 제직들과 청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무슨 일을 맡기든지, 크거나 적거나 중심을 다해 충성하심으로 하나님이 점점 큰 달란트를 맡기시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덕이 있는 인물입니다.
다윗의 큰 장점은 대단히 후덕한 인물이라는 데 있습니다. 사울 왕 이후에는 사울을 지지하는 이스라엘과 다윗을 지지하는 유다 두 나라로 거의 갈라진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묶어서 통일된 이스라엘을 만든 것은 총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윗의 덕으로 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끝까지 자기를 죽이려고 면전에서 창을 던지는 잔혹한 일을 해도 끝까지 참아 냈습니다.
나중에는 사울이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중상을 당했을 때에 병기든 자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해서 결국 죽이었고 그 사실을 다윗에게 고하자 옷을 찢으며 저녁때까지 금식하며 슬피 울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인 사울을 죽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신하를 죽여 버렸습니다. 또한 삼하3:31에서 보면 다윗의 장군인 요압이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사울왕의 장군인 아브넬을 죽였을 때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울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죽인 자도 붙들어다가 사형을 시키고 이스보셋을 성대히 장례식을 치러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다윗의 후덕한 모습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함으로 마침내 모든 지파가 하나가 되어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자기의 막강한 군사력과 자기의 인기만 믿고 사울 왕과 그 족속들과 그 부하들을 다 멸절시키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쉽게 왕이 되어 큰 권세를 누리었는지 모르지만,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을 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 종으로 높이었고 후대함으로 반대편에 있던 모든 백성의 마음을 살 수 있었고 또한 자기도 기름 부음 받은 종으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영적 권위를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다윗은 온유한 사람이었으므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맑은 호수에 고기가 모여들지 않습니다.
너무나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흐릿해 보이는 호수에 오히려 고기가 많은 것처럼 남의 허물과 남의 잘못을 눈을 감아 주는 이, 어찌 보면 좀 경우가 없어 보이는 자 밑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법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재주가 많고 똑똑한 조조 밑에는 인재들이 왔다 가도 다 떠나가지만, 유비는 재주도 별로 없고 명민하지 못하나 후덕함으로 제갈량이나 방통 같은 인재들이 꾸역꾸역 모여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여, 젊은 제직들과 청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온유한 자, 후덕한 그릇이 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5.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회개에 능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다윗은 다 훌륭하였으나 한 가지 큰 결점은 너무나 정력이 강한 탓인지 후처들이 많았습니다. 그것도 부족한지 어느 날은 신하 우리아의 아내까지 범하고 그 간음죄를 감추기 위해서 요압 장군에게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낸 후 갑자기 퇴각하게 함으로 죽게 만드는 아주 비열한 살인죄까지 지었습니다. 다윗의 가장 큰 강점은 부하들과 백성들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는 것이었는데 정력에 눈이 어두워지자 이런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 때부터 다윗 정부는 권력과 인재군단에 누수 현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윗의 식구들이나 부하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는 것을 성경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와서 사정없이 회개를 요구할 때 다윗은 그 선지자를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과연 위대합니다. 그러한 나단 선지자의 직언을 듣자마자 그 즉시 회개를 시작하는 데 침상과 베개가 눈물로 적실 정도로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회개한 죄는 용서를 받았으나 다윗이 뿌린 악의 씨는 나중에 자기가 걷어야 했습니다. 불의의 씨인 밧세바의 아이는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죽는 비극이 생기었고 후에는 다윗의 아들인 암논이 이복누이인 다말을 성적으로 범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그 일로 인해서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이복형인 암놈을 살인하는 비극이 생기었습니다. 더 나가서는 압살롬이 아버지를 향해 반란을 일으킴으로 비참하게 쫓겨 다니는 신세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로 가정과 나라가 큰 비극의 열매를 거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철저히 회개한 결과, 가정과 나라가 다시 회복되게 하시고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부강국으로 만드시고 그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합한 자는 회개에 능한 사람입니다.
■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장기려 박사는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또한 성자 의사라는 말을 할 정도의 훌륭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그러한 인생을 산 비결은 그는 회개에 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나의 이력서」라는 글에서 고백하기를 “나는 어려서 팽이 하나를 훔쳤다. 그 후 부흥회에서 ‘도적질한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을 듣고 팽이 주인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변상했다. 그 후부터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소학교 이 학년 때 담배를 피우다가 사촌형에게 꾸중을 듣고 회개한 후 지금까지 담배를 안 피운다. 나는 학생 때 울긋불긋한 바지가 좋아 보여 2원주고 사 입었다가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후로는 모양을 내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 나의 전 인격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세례를 받은 것이 바로 내 인생관이 이루어진 때라고 믿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여, 젊은 제직들과 청년 여러분이여,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 덕이 많은 사람, 회개에 능한 사람들이 다 되므로 하나님이 강하게 붙들어 주므로 성공적인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울왕과 다윗왕
사도행전 13:20-23 / 김영규 목사
신정에서 왕정으로
본문은 바울 설교의 두 번째 부분으로 가나안 정착 이후부터 다윗 시대까지의 역사를 언급합니다. 이 시대는 세 시기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사사 시대이고, 둘째는 사울 왕의 시대, 셋째는 다윗 왕의 시대입니다. 이 세 시기는 정치적으로, 신앙적으로 중요한 특징과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사 시대입니다.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20) 사사(!yfip]Voh')라는 명칭은 재판관(judges)이란 뜻입니다. 사사들은 대개 세 가지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첫째는 통치자로서 정치적 직무입니다. 당시 통치의 중심은 재판이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은 겁니다. 둘째는 군사적 직무입니다. 대개의 사사들은 군대를 일으키고 외적들을 물리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셋째는 종교적 직무입니다. 사사들은 제사장 직분과 선지자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사사들의 통치는 가나안 정착 이후 약 300년 간 계속되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특징을 요약하면 제멋대로 사는 시대, 자유분방의 시대입니다. 왜 사사들이 일어났는가? 이 시대의 종교 사회적인 특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를 특징지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21:25) 왕이 없다? 한 마디로 무정부 시대입니다. 사람마다 제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했습니다. 12지파 전체가 통합되지 못했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구심점이 되는 인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적들이 쉽사리 쳐들어와서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기껏 농사지어 곡식이나 과일을 추수해 놓으면 주변 족속들이 다 빼앗아갔습니다. 이런 고통이 심해지면 그 때마다 사사들이 등장하여 백성들을 건져내곤 했습니다. 이것이 사사 시대의 패턴입니다.
왜 사사 시대는 무정부 시대가 되었을까? 왜 사사 시대는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전체를 통합시키는 지도자가 없었을까? 왜 사사 시대에는 사회가 혼란하고, 항상 외세에 시달렸을까?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즉, 신앙의 상실입니다. 사사 시대는 불신앙 무신앙 시대입니다. 명색이 하나님 백성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없습니다. 신앙을 잃으니 통합의 정신이 없어졌습니다. 신앙 상실은 단순한 신앙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원리와 원칙의 상실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원리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앙 상실과 함께 이 원리를 잃었습니다. 그것이 무원칙 한 삶의 원인입니다. 일찍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누누이 경고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신30:15-18) 하나님을 버리니, 하나님 말씀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으니 원칙과 원리가 없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삶이 되는대로 사는 삶입니다. 요즘 좀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다양성만 있고 통합이 없는 시대.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삶 또한 되는대로 사는 삶입니다. 사사 시대는 무정부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무정부가 아니라 무원칙이었고, 이런 무원칙한 삶의 원인은 무신앙에 있었습니다. 즉, 신앙 없는 것, 하나님 없는 것, 하나님 말씀으로 살지 않는 것, 그것이 모든 사회 혼란의 원인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통치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정이 시작됩니다. 왕정의 시작은 시대적 현상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무슨 현상이 나타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인 분석입니다. 사사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 분석이 엉터리입니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게 분석했습니다. 우리가 왜 반복적으로 고통을 당하는가? 외적들이 쳐들어오기 때문이다. 왜 외적들이 쳐들어오는가?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약한가? 우리를 통합해 주는 지도자, 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왕이 있으면 된다! 왕을 세우자! 결론은 왕을 세우는 일로 낙착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 마지막 사사요, 지도자였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원해내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돌보시고 다스리시는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출애굽 시대나 가나안 정복 시대나 정치적으로 보면 神政 통치의 시대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다스리시고, 여호수아를 통해 다스리셨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셨습니다. 이런 백성이 세상적인 왕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왕의 권한과 왕정의 폐해를 조목조목 얘기해 줬습니다.(삼상8:11-18) 그러나 백성들은 계속 왕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주신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21) 사울은 전형적인 세속의 왕입니다. 사울의 됨됨이는 세상 모든 왕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여론이나 인기에 민감했습니다.(삼상18:7-8) 정적을 제거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습니다.(삼상18장-26장) 자기 공적을 알리려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삼상15:12) 백성들 앞에서 왕의 체면을 세우려고 애썼습니다.(삼상15:30) 그러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악령에 시달리는 연약한 인간 그대로였습니다.(삼상16:14) 사울은 세상 정치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본다면 특별히 나쁘다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왕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이 행복해졌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울 시대 백성들은 과연 왕이 없던 사사 시대 사람들보다 더 행복해졌을까요? 일시적으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몇 차례의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승리 역시 사울 때문에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의 지도 아래 주신 작은 선물일 뿐입니다. 사울 통치 40년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시험의 기간이었습니다. 과연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사울은 전형적인 세속의 왕입니다. 신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제사장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왕 아래서 백성들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 형태가 백성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왕정 아래서도 행복할 수 있고,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통치자의 영적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통치자 아래 있으면 백성들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통치자 아래 있으면 불행합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신정 통치로 시작된 민족입니다. 모세 시대나 여호수아 시대에 얼마든지 승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에는 무신앙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울 시대에 이르러는 세속의 왕정으로 더욱 낮아졌습니다. 정치 형태는 발전했는지 몰라도 영적 상태는 저질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민주주주의가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상태로 낮아졌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무한 자유를 요구합니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자고 합니다. 역사상 가장 동물적인 삶이 현재 인간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영혼과 정신을 부정합니다. 동물과 똑 같이 행동합니다. 스스로 동물적 행동을 하면서 끝없이 통치자를 욕합니다. 사울 왕이 잘못입니까? 사울 왕을 요구한 백성이 잘못입니까? 거기서 거기입니다.
다윗 왕의 통치
사울 통치 40년이 끝나고 다윗 왕조가 시작됩니다. 다윗 왕은 사울왕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요구한 왕이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좋아서 세우신 왕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버리셨지만 다윗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사울과 다른 근본적인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로, 제사장적인 왕입니다. 사울은 근본적으로 중심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제사장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제사직과 제사 자체를 가볍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제사직이 뭡니까?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직책입니다. 제사직을 가볍게 여긴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결과입니다. 사울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외면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위한 제사장으로 봉사했습니다.
성경 역대상 기록을 보면 1장부터 10장까지는 창세 때부터 사울왕까지의 긴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기나긴 역사를 단 10장 안에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11장부터 29장까지의 내용은 다윗 통치 40년에 대한 기록입니다. 40년 역사를 19장에 걸쳐서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엄청나게 긴 역사는 10장으로 요약하고, 다윗 통치 40년은 19장에 가득 채우고 있을까요? 그만큼 다윗의 역사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역대상 22장부터 29장까지의 기록은 다윗이 성전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봉사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 통치 기록의 절반은 성전을 세우기 위한 다윗의 준비 작업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다윗의 제사장적인 역할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성전의 사람입니다. 성전은 제사의 장소입니다. 제사는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다윗은 그 통로를 열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둘째로, 선지자적인 왕입니다. 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이 어떻게 다릅니까? 제사장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말하자면 죄인의 편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역할입니다. 반면에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죄인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향해 뜻을 전달하는 역할입니다. 다윗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전달했습니다. 성경 시편을 보면 약 73편 정도가 다윗의 저작입니다. 다윗의 저작 가운데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는 시편이 아주 많습니다.(8,16,22,52,58,59,69,109, 110,140편 등) 다윗은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을 충실하게 전달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통치의 기반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22) 하나님은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a[ndra kata; th;n kardivan mou,” “a man after My own heart” 다윗은 인간적으로 결점이 많고, 큰 실수도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하신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 뜻을 충실히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높고 권세 있는 사람, 유능한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이루겠다고 하신 뜻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인류 구원의 사역입니다. 다윗은 메시아를 상징하는 왕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은 제사장적 왕입니다. 다윗은 선지자적인 왕입니다. 다윗을 통해서 오실 메시아는 왕이시오, 선지자시오, 제사장이십니다. 이 계시대로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23)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예수님의 육신적인 조상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입니다. 다윗은 영원한 왕조를 시작한 왕입니다. 다윗 왕조가 어떻게 영원한 왕조가 되었습니까? 역사적으로 다윗이 세운 왕국은 BC 586년에 바빌론에게 멸망당하고 사라졌습니다. 다윗 왕조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 왕국은 바로 다윗 왕국의 영원한 실현입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0-33)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11:15,17)
그러면 이제 현실 문제로 돌아와서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지금 이 설교를 유대인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다윗 왕국을 회복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친 것처럼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예루살렘에 왕궁을 짓고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육신적인 다윗 왕국은 BC 586년 이후로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제 역사상 이런 왕국은 다시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세워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왕국은 육신적인 다윗 왕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국가를 세우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2-54) 만일 예수님이 지상 왕국을 세우실 계획이셨다면 굳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를 제압하고 세상 왕들을 단번에 제압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인간 왕들을 제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지배자 마귀를 제압하는 것입니다. 죄에 매여 종노릇 하는 인간들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왕국은 일시적 왕국이 아닙니다. 영원한 왕국입니다. 오늘 우리가 속한 왕국은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왕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5년 마다 대통령을 새로 뽑습니다. 새 대통령을 뽑을 때마다 기대하고 기대합니다. 이번에는 달라지겠지? 뭐가 달라집니까?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세상 왕국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울 같은 왕이 계속 될 뿐입니다. 지금 불경기가 다가왔습니까? 이런 불경기는 역사상 무수히 있었습니다. 흉년과 불경기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입니다. 이런 흉년을 인간 통치자가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할 일이 뭡니까? 새로운 왕을 기다릴 것이 아닙니다. 세상 나라가 덧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세우신 영원한 나라 신령한 나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세상 시민권에 매달리지 말고 천국 시민권을 찾으세요. 주님은 세상 흉년을 통해서 진정한 신분을 찾아 주십니다. 오늘 세상 흉년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천국 시민권을 찾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신령한 백성입니다. 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오늘 분명한 길을 선택하세요. 사사 시대처럼 되는대로 사는 무정부 무신앙 무원칙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사울 시대처럼 세상적인 왕 세속적인 통치자 아래서 세상 사람들처럼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 아래 사시겠습니까? 다윗 왕은 제사장입니다. 다윗 왕은 선지자입니다. 다윗 왕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왕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영혼과 육신과 범사를 통치하시는 유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세요.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세요. 지금 우리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선택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97:1-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사도행전 13:21-23 / 옥한흠 목사
성경에는 수백 명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영적인 자산과 우리에게 도전을 줄만한 여러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다윗은 특별히 우리에게 도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죽 읽다가 이 본문 말씀에 오면 잠깐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다윗을 처음 보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참 다윗을 겪어 본 다음 다윗을 평가하는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가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 여기에서 '마음에 합한다'는 말은 '마음이 맞는다',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듯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없어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하여 그와 같은 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부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은 영웅적인 인물이어서 또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어 나라를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상관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일하는데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너무나 부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자신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을 들고, 그 다음에는 다윗을 들었습니다. 3,000년 이상 되는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 왔는데, 그 혈통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을 제외하고 오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만 언급합니다. 즉 다윗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닦아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같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다윗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다윗이 한 일을 우리가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만 특별히 맡기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면서 한 가지 욕심은 낼 수 있습니다. '나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없을까? 이런 소원은 성경을 읽으면서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이 본문 말씀을 읽다가 너무나 도전을 받고 부러운 나머지 갑자기 자신의 영어 이름을 '바울'(Paul)에서 '다윗'(David)으로 고쳤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분이어서 이미 인쇄물마다 '바울'이란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던 터라 한바탕 소동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 목사님의 변명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꼭 합한 자라. 내가 그에게서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으면서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도 다윗처럼 될 수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이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름을 바꾸면 다윗처럼 되려고 더 힘껏 노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마음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다윗을 닮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계실 동안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강에서 나올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마 3:17). 여기에서 '기뻐하는 자'라는 말은 '내 맘에 합한 자'란 뜻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입은 모습으로 변화되었을 때에도 동일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곧 "모든 족속으로 예수 믿게 해서 예수님을 닮는 사람을 만들어라. 작은 예수를 만들어라." 하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는데 힘을 쏟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려면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목표를 세운다는 말은 책임의식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만큼 책임감 있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목표가 없는 사람은 책임의식도 없습니다. 따라서 목표를 세워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그만큼 성공할 확률도 큰 것입니다.
예일 대학의 연구 발표입니다. 대학생들 가운데 장래의 목표를 분명히 세워놓고 열심히 학업에 전진하는 사람이 전체 학생수의 3%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100명 당 3명밖에 안됩니다. 나머지 97명은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10년, 20년 후를 조사한 결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공부한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고 합니다. 이만큼 목표를 세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길 소원한다면 몇 가지 목표를 놓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 변화의 목표를 세우십시오.
우리가 수년 간 신앙생활 하면서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에 나와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비록 믿음이 약하다 할지라도 벌써 그 마음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신앙양심이 작동합니다. '난 이래서는 안될 텐데. 이것은 고쳐야 될 텐데. 내가 이것을 안 고치면 신앙생활을 바로 못하는데.' 하고 나름대로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런 것들은 고쳐서 변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변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을 찾아서 제거하는 것이 변화입니다. 이것은 회개라는 말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꼭 변화를 가져와야 될 것들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간혹 교회 안에서 주상복합형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됩니다. 주상복합형 건물이란 주택과 상가를 겸할 수 있는 건물을 말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전에 갖고 있던 생각이나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반드시 변화해야 될 부분에서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종교란에는 반드시 기독교인이라고 씁니다. 이런 이중적인 구조를 가진 신앙생활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두 가지 예로 미지근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일찍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태도를 놓고 소극적이라고 말하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지근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성격을 보면 절대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운동 경기나 직장생활 하는 것을 보면 누구에게도 안지겠다는 투지가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작한 일에 대해선 끝을 보는 성격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미지근합니다. 주일이라도 좀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시간 맞춰서 오다가 그만 지각하고, 어떤 때는 10분, 15분씩 늦게 오기도 합니다. 이런 미지근한 상태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성격 탓인지, 아니면 영적으로 병이 든 탓인지 그들은 미지근하여 적극성이 없었습니다. 가슴에 뜨거운 열정이 식어버렸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토하실 정도로 미지근한 태도를 싫어합니다.
이런 신앙태도가 습관이 되면 더 이상 고치기 어렵습니다. 뭐든지 습관이 되기 전에 고쳐야 합니다. 제가 사랑의교회를 시작한지 23년 동안 아직도 그 미지근한 신앙태도를 고치지 못해 이제는 구제불능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23년이란 나이도 같이 먹었으므로 더더욱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다니지만, 볼 때마다 너무나 답답합니다. 그나마 하나님이 천국에서라도 받아주시면 좋겠는데, 쫓겨나올 확률도 배제하진 못합니다. 이렇듯 습성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숀 코비(Sean Covey)는 습성을 의인화시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당신을 성공으로 밀어 주기도 하고 실패로 끄집어내리기도 합니다···나를 택해 주세요. 나를 길들여 주세요. 엄격하게 대해 주세요. 그러면 세계를 제패하게 해 주겠습니다. 나를 너무 쉽게 대하면 당신을 파괴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습관'입니다." 습성이라는 것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좋은 습성을 선택해서 잘 훈련하고 엄격하게 다루면, 그 좋은 습성 때문에 내가 세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습성을 받아들여 내 몸에 자리잡게 만들면 결국은 내 자신을 파괴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좋은 습성과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만일 미지근한 태도를 습성화시키면 하나님 나라를 내 발 앞에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파괴시키고 맙니다.
이런 것들은 반드시 변화를 시켜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긴 어렵습니다. 나에게 이러한 태도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 당장 이것을 고쳐야 되겠다고 작심하십시오. 그리고 1년 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 세속화도 변화를 주어야 될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중적인 가치관 즉, 교회 안에서는 성경적 가치관대로, 사회에 나가면 세상의 가치관대로 사는 사람은 세속화된 사람입니다. 배가 물위에 떠 있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배 안에 물이 가득 차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잘못된 가치관이 내 속에 들어와 내 안에 가득 차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그것은 물이 들어와서 가라앉는 배와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 살아야 됩니다. 그것도 세상 한가운데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부패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가운데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에서 세상 관례대로, 세상 법칙대로,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려는 태도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고쳐야 될 변화의 대상입니다. 그런 이중적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이나 교회 안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간에 과연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만한지, 성경적인 것인지를 먼저 마음에 두고 판단해야 합니다.
숨은 죄도 마찬가지로 변화해야 될 부분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음의 숨은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특별히 법에 걸릴 일을 안 한다 할지라도 마음으로는 용서치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채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죄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 남은 잘 가르치면서 내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숨은 죄입니다. 음란하고 성적인 것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고 자주 마음을 빼앗기는 고질적인 숨은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30년 간 믿었는데도 뿌리를 뽑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는 탐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온 우주에 주가 되신 가장 높으신 그분의 마음에 들기 위해 변화의 목적을 세우십시오. 바꾸어야 될 것, 고쳐야 될 것을 정해놓고 실제로 행동에 옮겨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태도입니다.
2. 성장의 목표를 세우십시오.
우리는 발전해야 될 것들이 많습니다. 만일 자식이 성장하지 않으면 그 자녀는 부모에게 근심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자녀로 삼으셨는데, 성장해야 될 부분들이 10년, 20년 그대로 남아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4:15) 예수님을 닮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계속 자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10년 전에 비해서 아직도 자라지 못했다고 생각됩니까? 그러면 믿음을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십시오. 믿음은 계속 발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자라지 않거나 처음 믿음에 비해 더 뒤쳐진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믿음을 키우고 싶다면 교회 안에 있는 여러 프로그램들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 좋은 형제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헛소리하는 믿음 좋지 못한 사람들을 따라 다니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까지도 나중에 헛소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시간을 내어 뛰어 드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자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에도 계속 성장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한번 알았다고 그것으로 다 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도록 하기 위해 우리 손에 성경을 들려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어떤 큰 계획을 갖고 계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알수록, 성경을 마음에 담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될수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라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너무 성경에 대해 무식해. 10년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이 없어!' 하는 생각이 들면 배우고 성장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열심만 내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시간이 나지 않아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테이프를 통해 자습해도 얼마든지 말씀의 실력이 쌓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인격은 어떻습니까? 믿음은 좋아 보이는데 신앙인격은 자라지 않아 날마다 사고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진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신앙인격은 계속 자라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했지만 예수 믿고 10년, 20년이 지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숙한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만나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고 덕을 세우고 가는 곳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내 믿음을 키워야 되겠다. 하나님의 지식을 계속 배워야 되겠다. 내 신앙인격도 키워야 되겠다.'는 성장 목표를 정해 놓고 노력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 헌신의 목표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헌신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매일 신실하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을 빌리면, “가장 위대한 도전이요, 매 순간마다 결정해야 할 신실한 삶입니다. 그는 덧붙여 말합니다. 당신이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그만 둬야 합니다.” 곧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고자 하는 신실한 자세가 헌신인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 자신과 우리 모든 지체를 그분에게 거룩하게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우리는 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 위대한 선언이 나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니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만물이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서 이 모든 우주 만물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결국은 이 모든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손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전부는 하나님께 드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같이 허무하게 살다가 가는 인생, 이 인생을 움켜쥐고 있다가 끝내서는 안됩니다.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놓으신 것들을 사용하되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도록 내 몸, 내 시간, 내 달란트, 내 재물, 내 모든 인생의 전부를 하나님의 손에 드리고 그분 앞에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헌신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한번 잘 판단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모든 것이 쓰여지고 있습니까? 드리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그리고 실제로 드리면 그 사람은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움켜쥐고 내놓지 않는다면 헌신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나우웬의 말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쓰지 않으면, 헌신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다 헛된 일입니다.
평소에 우리 교회만큼 좋은 교회도 없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와 자매 교회인 미국에 있는 남가주사랑의교회를 보면서 요즘 도전을 받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와 저는 30년의 깊은 영적인 선후배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두 교회가 제자훈련 목회 철학을 가지고 각각 한국과 미국에서 제자훈련을 하는 선두 주자로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제 남가주사랑의교회는 14년 된 교회입니다. 역사가 우리 교회보다 10년이 더 짧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전세계 4,000여 이민 교회가운데 가장 큰 교회로 발돋움을 했습니다. 이민교회 안에서 장년 예배에 3,500명 정도 모이고, 1년 예산이 700~800만 불이 되는 사례가 없습니다. 현재 제일 앞서가는 교회로 그 교회를 통해 많은 교회들이 제자훈련에 도전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달전 특별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헌금의 목적은 이민 2세들을 믿음으로 바로 양육하기 위해, 영국의 이튼 스쿨(Eton School)처럼 참 지도자다운 지도자를 키워낼 만한 센터를 건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프로젝트를 가지고 700만 불의 예산을 세웠습니다. 우리 나라 돈으로 100억 가까이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교인 3,500명이 700만 불 헌금을 작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헌금이 1,000만 불이 웃돌게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와 비교해보면 규모면에서 1/6 작은 교회로 보면 됩니다. 출석율로 따지면 우리 교회로서는 600~700억을 헌금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제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교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 앞에 물질로 헌신하길 원했는지 700만 불 목표에 1,000만 불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그런 경험을 한 일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교회는 불과 3년 전에 천 몇 백만 불을 들여서 새로 지은 교회입니다. 곧 3년 전에 교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헌금했던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님, 바치고 싶어도 바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 할 정도로 그야말로 쥐어 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물질을 드린바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헌금을 하는데 교인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제자훈련을 통해 터가 닦이자,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면 나에게 있는 것도 기쁨으로 내 놓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임을 몸소 알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40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쌓아놓은 보화와 재물,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지을 성전을 위하여 하나도 남겨놓지 아니하고 다 바치고 갔습니다. 자기 것을 남겨 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헌신의 사각지대가 있진 않습니까? 시간은 내어 교회를 위해, 전도를 위해 일하긴 하는데, 막상 헌금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빛이 싹 사라지는 헌신의 사각지대가 없습니까? 헌금은 하는데, 시간만큼은 절대로 내 놓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해 쓰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는 헌신의 사각지대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각지대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길 소원하면 몇 가지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변화의 목표, 발전의 목표, 성장의 목표, 헌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책임 있는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우리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 다윗처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고칠 것은 고치게 하시고, 성장해야 할 것은 성장하게 하시고, 헌신해야 할 것은 헌신하게 하셔서 우리가 온 우주의 주가 되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바울의 설교
행 13장 13~41절 / 대구성서아카데미
사도행전의 바울 설교
사도행전 앞부분에는 대표적으로 베드로와 스테파노의 설교가 실려 있고, 뒷부분에는 바울의 설교가 실려 있는데, 바울의 설교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여러 번에 걸쳐 행해진 것이다. 첫째는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의 회당에서 행한 설교로서 오늘 본문이고, 둘째는 아테네의 아레오파고 광장에서 행한 설교(17:16 이하), 세 번째는 에베소 원로들 앞에서 행한 설교(20:17 이하), 네 번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하는 순간에 행한 설교(22:1 이하)이다. 그 이외에서 작은 설교들과 심문과정에서 행한 비교적 긴 설교들도 있다.
누가는 이 바울의 설교를 어디서 입수한 것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바울의 선교를 수행한 의사로서 바울의 설교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그것을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수행의인 누가가 아니라 훨씬 후대의 어떤 저자에 의해서 집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을 수행한 누가의 기록이 후대까지 그대로 전해졌을 가능성은 없을까? 바울이 아무리 철저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또는 그를 수행한 누가가 아무리 역사적 안목이 있던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후대를 위해서 바울의 설교를 직접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도행전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초기 기독교에서는 그런 의식이 전혀 없었으며, 더 근본적으로 바울의 선교행위가 오늘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텍스트의 역사성이 전혀 없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무게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가능성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설교를 창작했거나, 또는 그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반적인 설교 형식을 그대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바울 이전에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바울도 그들 못지않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팔레스틴 공동체가 세력을 잃어가고 헬라파 공동체가 초기 기독교의 주류로 등장하는 시기에 바울의 편지들과 구전 형식의 그의 설교가 새롭게 부각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자신이 수집할 수 있는 모든 바울의 자료와 그 당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게 된 교회의 케리그마를 근거로 해서 바울의 입을 빌려 여러 편의 설교를 진술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의 설교는 완벽하게 바울의 설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각을 충분하게 담은, 더구나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정확하게 담은 설교임에는 틀림없다.
세 번에 걸쳐서 ‘여러분!’을 부르는 오늘의 설교는 세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이집트로부터 세례 요한까지(16-25)
지금 바울이 설교하고 있는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의 회당에는 주로 유대인 디아스포라, 또는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이방인들이 모였을 것이다. 1세기 회당예배는 쉐마와 (18개의 간구) 기도, 사제의 축복,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그리고 지방언어로 번역, 마지막으로 권면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물론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회당의 책임자는 바울에게 권면을 부탁했을 것이며, 이를 좋은 기회로 알고 바울은 기꺼이 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회당에서 행해진 권면은 앉아서 조용하게 이루어진데 반해서 누가는 흡사 그리스 웅변가들의 모습처럼 바울이 일어나서 손짓을 했다고 묘사한다. 어쨌든지 이제 바울은 거의 예루살렘 유대인들과 비슷한 정도로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에게 설교를 시작했다.
바울은 이집트 이야기로부터 설교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자신들의 역사에 개입한 하나님의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출애굽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이집트 이야기로 시작되는 바울의 설교에 호감을 가졌을 것이다. 바울은 광야생활과 판관시대, 뒤를 이어 사울과 다윗왕조를 언급한다. 바울 스스로 베냐민 지파였기 때문에 사울이 베냐민 지파출신이었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 같다. 다윗은 곧 이스라엘을 구원한 예수의 조상이었다. 아주 짤막한 요약이지만 구약의 전체 역사를 총괄하는 대목이다. 결국 설교 초반부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출애굽의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예수를 구원자(메시야)로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지금 출애굽 사건을 민족적인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
바울이 요약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몇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사무엘, 사울, 다윗,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이 거론된다. 특히 그는 세례 요한이 예수와의 관계에서 모종의 긴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이 스스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라고 알렸다는 것은 곧 그를 그리스도로 생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미 복음서에도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점이 암시되었다.
죽음과 부활의 복음(26-37)
이집트 이야기로부터 세례 요한을 거쳐 예수에 이르는 구원사의 줄기에 관한 해명은 유대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설교의 두 번째 항목에 해당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매우 낯설게 들려졌을 것이다. 이는 곧 잔잔하게 흐르던 개울이 낭떠러지를 만나 갑자가 폭포로 변한 듯한 느낌이다. 이 대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예수를 예루살렘 사람들과 지도자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다. 그들은 예수를 죽일만한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 그 예수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한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범한 잘못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의도적으로 (빌라도에게 무고하여) 예수를 죽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앞의 행위는 의도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잘못이라고 생각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는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서도 얼마든지 악한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바울이 여러 번 강조하듯이 이 예수 사건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기 때문에 그 구약 텍스트를 바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를 몰라볼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신학적인(영적인) 통찰력의 결여로 예수를 죽인 셈이다.
인간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렸다는 주장에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이 담겨 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생명 지향적이지 않고 오히려 파괴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인간과 역사를 본다. 선악과를 통한 불순종, 형제 살해, 바벨탑, 그 이후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발생한 우상숭배,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 살해에서 우리는 성서가 바라보는 인간을 읽을 수 있다. 에릭 프롬이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문명과 전쟁은 비례한다는 말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아무리 인간이 파괴적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명 지향성을 방해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의 역사에서 아무리 생명 파괴적인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가르침을 믿는 우리는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인 생명의 선취라 할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다. 이 부활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용서의 복음(38-41)
‘이스라엘 동포’(16)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의 후손과 경건한 사람들’(26)을 거쳐 세 번째 단락에서 바울은 청중을 ‘형제’라고 부른다.(38). 그만큼 그의 설교가 친밀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일까? 설교가 죄의 용서라는 매우 실존적인 단계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호칭의 변화도 일관성이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교 교리와 만난 셈이다. 바울은 앞에서 구약의 다윗에 관한 인용문을 다루면서 예수가 썩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다음에 죄의 용서라는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 상식에 의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곧 우리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한동안 소위 ‘배상만족설’이 정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 진노를 풀기 위해서는 죄에 해당한 값을 치러야 하는데,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그 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교리가 곧 그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는 늘 십자가를 죄와 연관해서 생각하고, 심지어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기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일도 있다. 그러나 배상만족설은 지나치게 ‘신인동성동형론’의 구도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석의 오류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주장은 우리 인간의 역사에 발생한 훨씬 근원적인 사태를 소급해서, 혹은 원인론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지 인간 구원을 위해서 결정된 사건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근원적인 사태는 곧 인간 구원이 인간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죽음의 힘을 무력화하는 예수의 부활이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죄에서 풀려날 수 없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풀려날 수 있다(38, 39)는 바울의 설명은 인간의 현실을 정확하게 뚫어본 사람의 말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 현실은 인간이 죽어야만 죄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모범적으로 만드는 모세의 율법은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게 끝장나기 때문에 아무런 해결책이 못되며,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만이 해결책이 된다는 말이 된다.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 죄의 세력이 활동할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긴장이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죽어야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살아있는 지금도 이미 죽음 이후의 생명인 부활을 경험하고 믿는다면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인 셈이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며, 의인이면서 죄인이라고 했다.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행 13장 13~20절 / 신성종목사
(예화) 제가 여러 해 전에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에 객원 교수로 초청을 받아 얼마동안 가 있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저는 양을 인도하는 목자들의 모습을 직접 볼 수가 있었습니다. 또 군대에 있으면서 양을 키워 젖을 짜서 환자들을 먹도록 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양에 대한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양은 첫째로 무지하고, 둘째로 무능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양이 얼마나 무지한가하면 자기가 다니는 길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또 독초나 마시지 못할 물도 구별을 못합니다. 또 많은 동물들이 다 자기를 방어하는 무기가 있지만 양만은 전혀 없습니다. 보호색이나 냄새나 지혜도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희생제물로 많이 쓰입니다.
또 양은 얼마나 게으른지 풀을 뜯어먹고는 나무의 그늘 밑에서 졸다가 반추를 계속합니다. 해가 이미 저 멀리 갔는데도 그냥 누워만 있으려고 합니다. 이때에 염소를 풀어놓으면 양들은 염소의 뿔이 무서워서 도망을 갑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은 것을 잘 소화시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0장은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 세상에는 네 가지 종류의 목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1절의 절도며 강도 타입의 목자입니다. 소위 이단 종파를 만들어서 교주의 욕심만 채우는 그런 목자들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둘째는 5절에 나오는 타인 타입의 목자들이 있습니다. 전혀 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목자들도 있습니다.
셋째는 12절에 나오는 삯군 타입의 목자들입니다. 양에 대한 관심은 없고, 매달 받는 월급에 더 관심이 있는 목자들입니다. 그러나 받은 것만큼은 일을 합니다.
끝으로 11절에 나오는 선한 목자 타입의 목자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는 그런 목자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양이기 때문에 목자들을 따라가야 합니다만 그러나 절도며 강도 타입의 목자들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양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타인 타입의 목자들도 조심해야 하고, 삯군 타입의 목자들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오직 선한 목자되신 우리 예수님만을 따라 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나는 양이다. 목자 되신 주님이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양이다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은 17절에 있는 말씀,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을 인도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에서부터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아주 세밀하게 인도하신 사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천사들을 통하여] 인도하여 주시기도 하고, 또는 직접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인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야곱과 요셉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꿈을 통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세밀한 기록은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40년간의 생활의 기록입니다. 이 출애굽기는 유대인들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선민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잣대이기도 합니다. 광야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구름과 불은 둘 다 우리들의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고,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구름은 낮의 더위를 가리워 주고, 불은 밤의 추위를 녹여주는 각기 다른 역할을 합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라고 했습니다. 22절에서는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인도하시되 앞에서 인도하셨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 새벽마다 만나를 주셨고, 모세로 하여금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고기를 먹고 싶을 때에는 메추라기를 보내어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항상 인도하십니다. 믿습니까? 그 방법은 다양합니다만 또 사람마다 다릅니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인도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는 우리의 목자로서 인도하시고, 왕으로서 우리들을 다스려주십니다. 이것을 시편에서는 눈동자 같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고 했습니다.
(예화)눈 동자를 어떻게 보호하시는가?
겉 눈 섶을 통해서 땀이 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뚝을 막아주셨습니다. 속 눈 섶을 통해서 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초를 서게 하셨습니다. 예민한 눈 등을 통해서 눈동자를 막아주시고.,.보호하십니다. 눈의 유리 막을 통해서 눈동자가 터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눈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여러 모로 보호하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다고 했고, 누가복음 21장 18절에서는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지금까지 쓰여진 찬송가가 40만개가 넘습니다. 그 중에서 뽑고 뽑아서 골랐는데 세 개가 뽑혔습니다. 하나는 188장의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란 찬송이고, 다른 하나는 364장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집 같은 고생이나”란 찬송이고, 다른 하나는 531장의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란 찬송이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노래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들을 인도하십니까?
첫째는 [말씀을 깨닫게](행 8:30-31)하여 그 말씀에 따라서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깨닫지 못합니다. 먼저 믿어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깨달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리로 가면 그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이 됩니다.
둘째는 [평강(눅 1:79)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눅 1장 79절에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고, 불의한 길로 인도하시는데 빠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강의 길로 우리들을 인도하셔주십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형통했는데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감옥에 있을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는 [진리(요 16:13)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요 16장 13절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좀더 넓게 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
넷째는 [시온의 대로로] 인도하여 주십니다(시 84:5). 이 세상에는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많은 사람들은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온의 길, 즉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오직 보혜사 성령님만이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온의 대로는 바로 성공의 길이고, 축복의 길입니다. 그 길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그러면 지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사주팔자를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주란 태어난 년.월.일.시의 네 가지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64패와 384효로 나누어 길흉화복을 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 년초에는 토정 이지함이 쓴 토정비결을 통해서 그 해의 운수를 보았습니다. 지금도 심지어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예언기도를 받기 위해서 기도원이나 기도를 많이 하는 분들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가지는 미신입니다. 미국은 어떻습니까? 여기저기에 손금을 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또 점성술을 많이 믿고 있습니다. 점성술이란 하늘의 별들을 12 궁으로 나누어서 천궁 도를 만들고, 수양자리에서 물고기자리까지의 별들의 움직임을 보고 그 사람의 운명을 알아 마치는 바벨론에서부터 시작된 미신입니다. 신약시대에도 헤롯이 바로 이 점성술에 심취한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동방박사들이 바로 이런 점성술사들이었습니다.
미국에는 심지어 텔레비전에도 광고가 됩니다만 소위 psychic, 즉 영매(靈媒)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최면술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을 꾀뚫는 기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영매를 통해서 죽은 사람들과의 대화도 하게 하고, 미래를 예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자들이 가지는 태도지 성도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크게 네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설교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기도를 통해서 세미한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성령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넷째는 믿는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시편 23편 1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여호와를 우리의 목자로 삼고 있으면 우리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로서 믿고, 맡기고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월평 동산교회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비결은 주님만을 목자로 삼고, 그만을 따라갈 때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런 복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1차 선교-안디옥
정방원목사 / 행 13:15~41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선교사를 최초로 파송한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1차 선교를 떠납니다. 수행원은 마가 요한입니다. 그들은 먼저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어서 밤빌리아 버가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갑니다. 본문 14절에 ‘안디옥’이라는 지명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그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입니다. 반면에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의 중심지인 안디옥은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에서 그 동안 드러난 특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변경됩니다. <행 13:9>“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사울’이라는 이름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이라는 이름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아마도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로마식 이름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둘째, 선교의 중심이 바나바에서 바울로 바뀝니다. 사도행전 13장 2절과 7절에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표현이 13절에서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바뀌고, 본문 16절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이 주도적으로 설교를 하며, 사도행전 13장 43절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셋째, 수행원인 마가 요한은 밤빌리아 버가에서 선교를 포기합니다. <행 13:13>“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오히려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나아갑니다. <행 13:14>“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여기서 ‘더 나아가’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가 요한이 선교를 포기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앞으로 더 전진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여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울이 주도적으로 설교합니다. 본문은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첫 설교입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12장까지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가 중심이며, 후반부는 13~28장까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과 안디옥 교회가 중심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나오고, 사도행전 13장에는 바울의 설교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에는 바울의 설교가 총 세 편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1차 선교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 사도행전 17장에 2차 선교 때 아덴에서 행한 설교, 사도행전 20장에 3차 선교를 끝내면서 밀레도에서 행한 고별 설교, 이렇게 세 편의 설교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면, 바울의 설교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대지는 본문 16~25절까지입니다. 본문 16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두 번째 대지는 본문 26절부터 37절까지입니다. 본문 26절에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라고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세 번째 대지는 본문 38~41절까지입니다. 본문 38절에 “형제들아!”라고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바울이 설교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첫째,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합니다.
본문 16~25절을 보겠습니다. 본문 16절에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같은 이방인과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서기오 바울과 같은 이방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설교하면서 먼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주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17절에 주어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주권적으로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본문 17~19절에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애굽 생활, 출애굽, 광야 생활, 가나안 정복까지 거의 사백오십 년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본문 20절에 여호수아 이후 사무엘 선지자 때까지 사사 시대의 역사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본문 20~21절에 사울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왕정 시대의 역사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증언하십니다. <본문 22절>“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왜 다윗을 주목할까요? 본문 23절에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그리스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24~25절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먼저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하십니다. <마 3: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요 1:29>“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여러분, 구약성경은 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씀할까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구약성경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요 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마태복음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의 맨 처음은 무슨 말씀일까요? <마 1: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바울은 구약성경에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하게 개괄하는데, 아주 정확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둘째, 구원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본문 26~37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실까요? 구약성경이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실까요? 본문 26절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구원의 말씀’이시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말씀’은 말씀을 의인화하여 구원을 주시는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태어나십니다. 그 때 천사는 그 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 1: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님은 말씀이신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본문 27절에 유대인들과 유대 교권자들은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본문 28~29절에 빌라도 총독에게 요구하여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 30절에 무덤에 계신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덤을 열고 사흘 만에 부활하십니다. 본문 31절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본문 32~33절에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성경적인 증거로 본문 32~37절에 구약성경에서 세 구절을 인용합니다. 첫 번째 인용한 성경 구절은 본문 33절에 시편 2편 7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즉 그리스도이십니다. 두 번째 인용한 성경 구절은 본문 34절은 이사야 55장 3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에게 허락한 영원한 언약이십니다.’ 즉 다윗의 후손이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인용한 성경 구절은 본문 35절에 시편 16편 10절입니다. ‘예수님은 썩음을 당하지 않으십니다.’ 즉 부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실까요? 바울에 의하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이시며 약속의 성취이십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삼 일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한다면,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이십니다.
셋째, 신앙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본문 38~41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설교 결론에서 선명한 대조를 통하여 신앙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구원이냐 멸망이냐?’를 선택해야 합니다. 본문 38~39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본문 38~39절>“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반면에 본문 40~41절은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면 멸망을 당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본문 40~41절>“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신앙의 결단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신명기 28장에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신앙의 결단이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여호수아 24장에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신앙의 결단이 중요합니다. 엘리야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신앙의 결단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의 결론에서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에 ‘좁은 문이냐? 넓은 문이냐?’ ‘좋은 나무냐? 못된 나무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냐? 불법을 행하는 자냐?’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냐?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냐?’ 신앙의 결단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이실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왜 구원의 말씀 즉 복음일까요?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어야만, 죄 사함 즉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며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행 16:31>“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은 1차 선교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첫 설교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분석하면, 첫째,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관합니다. 구약의 핵심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구원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시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셋째, 신앙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거부하면 멸망을 받습니다.
바울의 첫 설교,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정 우목사 / 행 13:16-23
한 10년 전, 조사입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미국의 설교자 중,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1위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었습니다. 2010년 그 당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나이가 90세였는데, 그는 전 세계 185개국, 약 2억여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185개 국가 중에는 공산주의 국가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여의도광장 집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1973년입니다. 3일 동안 334만 명이 모였습니다. 심지어 거기서 자고 먹고 그랬습니다. 대단한 집회였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까?”기자들도 묻고, 대통령도 묻고, 학자들도 물었습니다. 그때 그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얼마든지 자기 실력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기 노하우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했던 첫 설교 중 일부입니다. 안디옥에서 안식일을 맞았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회당에 갔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배 중에 회당장은 사람을 보내어 바울과 바나바 중 한 사람에게 말씀 전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어떻게 회당장은 이들이 랍비인 것을 알아보았을까요? 얼굴에 표가 났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회당의 구조 때문입니다. 회당에는 회중석이 있고, 랍비석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랍비석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가 16절부터 41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긴 설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역사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설교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구원계획을 갖고 계셨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계획입니다. 집을 지을 때 설계도부터 만듭니다. 또한 사업을 할 때는 사업계획서부터 만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어떤 일을 하실 때 먼저 계획부터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계서 하신 큰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먼저 계획부터 하셨습니다. 첫째 날은 무엇을 창조하고, 둘째 날은 또 무엇을 창조하고, 그런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아무렇게나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 계획대로 하셨습니다.
둘째, 구원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인간이 죄 지을 것을 아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인류는 다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도록 애쓰고 힘쓰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오늘 본문 22절 하반절을 보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여기‘내 뜻’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성경 중 흠정역(킹제임스번역)에 보면, 내 뜻을‘my will(내 계획)’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계획)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구원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구원계획을 언제 세우셨을까요? 인간이 범죄하고 난 후일까요? 아닙니다. 성경 에베소서 1장 4-5절상반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여기에 중요한 단어 네 가지가 나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예정하사’
그 기쁘신 뜻은 우리 인간을 위한 구원계획입니다. 그런 구원계획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정하셨다(미리 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시는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원계획이 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신 구원계획도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계획에 따라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현재만 봅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그 어려움만 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시야를 넓힌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곡식 단 꿈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의 꿈을 통해서입니다. 요셉이 크게 될 것이요, 또한 그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꿈과 그런 하나님의 계획과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형들에 의해 팔리기도 하고, 애굽에 노예로 끌려가기도 하고, 그리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요셉은 그런 고난의 때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 비결은 현재만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어려움만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차 펼쳐질 하나님의 계획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었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셨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구약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첫째, 주어입니다.
17-23절까지를 보면, 주어가 누구입니까?
17절,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절, “(하나님이)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절, “(하나님이)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3절까지 주어가 계속 하나님입니다.
둘째, 동사입니다.
17-23절까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에서 나그네 된 백성들을 높여주시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40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시고, 약속의 땅을 주시고, 사사를 주시고, 사울을 왕으로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
어떠십니까?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주어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도적으로 일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력해서 출애굽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켜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멸해 주셨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런 일들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의 택한 백성들을 선히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기억하시지요.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이면서 전도자였던 무디가 있었습니다. 시카고에 큰 불이 났습니다. 그래서 무디가 목회하던 예배당도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기자가 비아냥거리면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설교하셨지요? 그런데 어떻게 예배당이 불타는데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지요?” 무디 목사님의 대답입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하나님께 더 큰 예배당을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교회가 불탄 것입니다. 불탔기 때문에 예배당 허무는 비용도 들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기자는‘체~’하고 웃습니다. 웃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 새 예배당 건축비는 있습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무디는 성경책 한 권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보여주면서 “나는 이 성경책 속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선한 역사 이루실 것입니다. 당신은 얼마가지 않아 놀라운 예배당을 볼 것입니다.”그 후 무디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부흥회를 인도했고, 그러자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헌금해서 전에 있던 예배당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예배당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역사를 말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입니다.
우리 21-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둘 다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을 중간에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뜻을 다 이루리라’
여기에서‘만나다’는 단어는 헬라어성경에서‘휴리스코’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관찰하여 발견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하셨습니다.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인가? 마침내 다윗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을 향해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을까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원문 성경에서 그대로 직역하면 ‘내 마음을 뒤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뒤따르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하나님을 뒤따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뒤따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뒤따릅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뒤따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돈을 사랑하면 무엇을 뒤따릅니까? 돈을 뒤따릅니다. 명예 사랑하면 명예 뒤따릅니다. 여자 친구 사랑하면 여자 친구를 뒤따릅니다. 사랑하는 것 뒤따르는 법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뒤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을 그를 통해 다 이루리라’그래서 다윗의 후손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다윗은 얼마나 영광스런 사람이 되었습니까? 우선 사울왕은 중간에 폐위되었지만 다윗은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자손 대대로 왕위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 후손 중에서 인류를 구원할 만왕의 왕이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중) 원문성경에 보면, ‘이 사람들’은 사람들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물들까지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그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런 그에게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립니다. 다음 시간에는 신약의 역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설명하면서, 그 초점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고 구약의 역사, 심지어 다윗까지도 언급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십니까?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때 우리 모두‘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아십니까
행 13장 16~23절 / 이재철목사
어느새 12월이 시작되었네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말이.. 한해가 지나가면 늘 느끼는 생각이지만 좀 더 열심히 살 걸 하는 아쉬움이 늘 남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한해 동안 맺은 열매를 세어보니 부끄럽기 그지없구요.
남은 한 달 동안 2003년 잘 정리하고 2004년을 계획하는 시간되세요.
연말 세상 모임에서 주(酒)선생과 친해지지 말고 목장모임에서 목장식구들과 더 자주 만납시다!!
♬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두 무릎 꿇고 다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드려 절하세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드리리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 자랑으로 가득찰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의 소명을 가지고 비시기아 안디옥에 복음을 전하러 가다가 안식일에 회당장이 설교를 부탁하자 바울이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 바울의 설교는 예수님 이야기로 가득찼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①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23절)
출애굽 → 광야 40년 →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심 → 450년 후 사사시대(주변국을 강하게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침공하게 하셨습니다. 전쟁이 주께 속한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울부짖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사를 통해 자기 민족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사울왕을 세우심(실패)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왕을 세우심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인 이세벨과 결혼한 아합왕과 사울의 목숨을 요구했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만 하면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벗겨주십니다.
②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29-30절)
죽음과 사망을 정복하고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신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을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 삶이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못하면 예수님도 못해'라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욕심으로 하려하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분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주님을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의지하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최선의 길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③ 예수님은 예언의 완성자·성취자 이십니다. (32-33절)
하나님이 이루실 약속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주신 약속에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죽음 후에도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왜 힘이 듭니까?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예수님에 대해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뱀의 후손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 즉, 예수님을 믿지만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가 핍박을 받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뱀의 머리를 치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범죄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7:14절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미 5:2)
예수님은 이 예언을 모두 성취하였습니다.
▶ 복음을 들을 때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 은혜받는 사람 (42절)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아 다음 안식일에도 설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42절) 그리고 다음 안식일에 온 성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44절) 모인 이들이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주님을 찬송하였습니다.(48절) 이들을 보며 제자들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52절)
하나님의 기쁨을 이 땅 위에서 맛보게 하기 위하여 영혼구원과 제자 삼는 사역을 주셨습니다.
㉡ 거부하는 사람(45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을 비방하였습니다.
▶ 복음을 전할 때 거부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 첫 번째,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 두 번째, 먼저 믿는 사람들을 보며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 이 두 가지 장벽을 허물어줘야 예수님을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 먼저 삶 공부에 초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풀어집니다.
㉡ 그리고 목장 모임에 초청해서 주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겨주십시오. 그러면 크리스찬에 대한 오해가 풀릴 것입니다.
▶ 초점이 맞지 않으면 예수님 믿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물어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했을 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실까'를 생각하십시오.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는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지?'를 물어보십시오.
내가 잘못된 마음을 품었더라도 바른 생각, 바른 태도를 갖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면 모일 때마다 예수님을 자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낙심하며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곳에서 예수님은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의 임재가 임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행 13장 16~23절 / 피종진목사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보실 때에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합한 자가 되지 못하면 어딘가 결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사람의 마음에도 합한 자가 될 줄 믿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서 그 얼굴빛이 붉고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자였습니다(삼상 16:12). 그러면 다윗의 어떠한 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행 13:36) 우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는 지혜도 있고, 내가 원하는 소원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참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내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뜻에 내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143:10에 보면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고 그 뜻대로 살기를 원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뜻을 행하려면 내 뜻을 포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까지도 포기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사람에게도 인정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사람에게도 반드시 유익을 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핵심 중에 하나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루신 뜻을 우리가 이루기를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철저한 회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잠재력과 그의 의식과 과거 현재 미래 전체를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철저한 회개의 사람이었습니다. 회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축복이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절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는 부끄러워해도 회개는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다 죄 아래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역사가 바로 죄 문제를 청산케 하여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죄를 회개하지 않은 자를 가리켜 ‘마귀의 자식, 악을 행하는 자, 저주받은 자, 버림받은 자, 빛을 미워하는 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있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죄가 있을 때는 마음에 평안이 없어집니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시 38:3) 그리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파멸과 고생(롬 3:16), 심판과 멸망(마 3:10)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비극을 가져오는 무서운 죄를 용서받는 길은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해주신 주님(사 53:11)을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할 때 우리 주님은 그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않으시고(히 10:17), 흔적도 없이 도말시켜주시며(사 43:25; 사 44:22)),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겨주시고(시 103:12), 씻겨주십니다(행 22:16). 또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해주시고, 재앙이 사라지게 하며, 축복을 받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는 절대로 정죄하지 아니하고, 죄에서 해방시켜주시며, 용서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얼마나 흉악한 죄를 범했는지 모릅니다.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을 하고 전쟁터에 나간 그의 남편을 불러들여 그와 동침케 하여 그것을 무마시키려 하다가 잘 따르지 않자 그를 최격전지로 보내어 죽게 했습니다. 즉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는 이 죄를 너무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회개한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허물 많은 베드로도, 나태했던 유두고도, 창녀같은 고멜도, 불순종했던 요나도,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던 아론과 같은 사람도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혀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서 거리낌이나 합당치 못한 것이 있으면 다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다윗은 형님들의 수종을 들고 아버지의 심부름도 잘했습니다. 어려서 그는 블레셋이라고 하는 강대국이 골리앗 대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치려고 할 때 다윗은 자기가 어린 몸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독하는 그 골리앗 대장을 향하여 물맷돌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워 이겼던 다윗을 보면 그의 용감성과 부지런함을 알 수 있습니다.
괴테는 말하기를 ‘열성만이 인생을 영원하게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노벨상 수상자 물리학자 에펄튼은 말하기를 ‘나의 과학적인 연구의 성공은 나의 전문적인 지식에서가 아니라 나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가능성과 육체적인 가능성, 지적인 가능성, 환경과 여건의 가능성 등 무한한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이 가능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귀하게 사용해야 됩니다. 묻어두거나 게으르면 안됩니다. 기회를 놓쳐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활용하는 자에게 더 크게 역사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시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다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허물과 약점이 있었어도 하나님이 그것을 책망하거나 그것으로 인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는 장점을 보십니다. 베드로는 혈기가 많은 사람으로서 그의 칼로 말고의 귀를 베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충성심과 열성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아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밀 타작을 하던 기드온 용사, 세관에서 열심히 집무하던 세리 마태, 소 열 두 겨리를 가지고 열심히 밭을 간 농부 엘리사도 하나님께서 그 열성을 보시고 크게 들어 쓰셨습니다.
로마서 12:11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11:12에도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윗은 모든 일에 부지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큰 일을 맡겨주셨고, 축복해주셨습니다.
넷째,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 어떤 사람은 자기 감정에 치우치고, 어떤 사람은 자기 고집에 치우치며, 어떤 사람은 자기 교만에 치우칩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 부음을 받고,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그 때부터 모든 일을 성령이 감동하는 대로, 성령이 지혜를 주는 대로, 성령께서 깨닫게 하는 대로, 성령께서 힘을 주시는 대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1이하에 보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갑자기 그들은 그 이후부터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행 2:4).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행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성령이 내 마음을 주장하여주시기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모든 것을 출발해야 됩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결과가 좋아집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갈 5:22,23).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며, 철저한 회개가 있는 사람이 되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며,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입은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행 13장 16~24절 / 강문호목사
경륜과 역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경륜을 알면 역사가 보이고, 역사를 들여다 보면 경륜을 알 수 있습니다. 경륜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경륜을 이루시며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여선교회 회원들이 설악산에 가서 하룻 밤 쉬러 가기로 하고 출발하였습니다. 대형 뻐스가 서울을 출발하여 설악산을 삽니다. 설악산에 간다는 계획은 움직일 수 없는 목표입니다. 그러나 뻐스 안에서 노래를 부리고, 기도를 합니다. 휴게소에 들러서 화장실도 가고 커피로 한 잔 마십니다. 그런 것은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 사용하시다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폐하시고 다른 사람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을 하나님의 경륜을 위하여 역사속에 불러 쓰시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불러 쓰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불러 사용하신 이유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을 쓰셨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22)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는 지 그 이유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은 구약에 800번 가량, 신약에 60번 가량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인입니다. 정치가입니다. 제사장입니다. 군인이자 지도자입니다. 왕이자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어떤 성품을 지녔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일까요?
1. 섬기는 사람
다윗은 섬기는 데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섬기는 생애였습니다. 어려서는 양을 섬겼습니다. 8형제가 갈이 살고 있었지만 다윗 혼자서만이 들판에서 양을 칠 때가 종종 있었던 것같습니다. 7 형제가 다 사무엘 앞에 섰을 때 다윗만 혼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다윗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더라도 다른 목동과 달랐습니다. 항상 양을 세 종류로 나주었습니다. 어린 양, 병든 양은 따로 기르면서 막 피어나는 연한 물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건강하나 아직 어린 양은 보통 풀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양들은 억센 풀을 먹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아! 네게 양을 맡겨 보니 너무나 잘 돌본다. 네가 내 백성을 맡겨도 그렇게 잘 할 것같다. 내가 너를 왕으로 삼으리라"
다윗은 어려서는 양을 섬겼고, 청년 시절에는 사울 왕을 섬겼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다윗은 사울을 섬겼습니다. 사울 왕이 병들었을 때 수금을 가지고 가서 연주하여 주었습니다. 다윗이 기분좋게 악기를 연주하여 줄 때 악귀가 나가고 사울의 병이 상쾌하게 나은 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서는 온 백성들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엄청난 금을 준비하였습니다. 금만도 10만 달란트를 준비하였습니다(대상29;3-5) 10만 달란트는 우리 돈으로 약 9조원입니다. 200억 정도 교회 45,000개를 지을 수 있는 돈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양이나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모두를 잘 섬기는 사람을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국에 귀족을 공작이라고 합니다. 공작이라는 뜻은 정말 훌륭합니다. <누구보다 먼저 앞을 내다 보고, 전진할 때 선두에 서서 길을 인도하고, 적에게는 제일 먼저 대 들어야 하며, 공격을 당할 때에는 제일 먼저 희생 당하는 자" 라는 의미입니다.
영국에서 수상이라는 말은 <수석 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잘 섬기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교황으로부터 성자란 칭호를 받은 이가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입니다. 로마의 한 수도사가 그 성자를 보고 싶어 일부터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수소문하여 찾아 찾아 가서 만나고 깜짝 놀랐습니다.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초라하게 구두를 수선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성자라고 하는 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왜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성자라고 말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삶의 철학 한 가지만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두를 맡기면 나는 언제나 예수님의 구두를 수선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선합니다. 나를 찾아 오는 사람을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기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섬기는 마음이 그를 성자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난하지만 남을 정성껏 섬기기를 좋아하고 성실한 청년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에 충성하였습니다. 그 교회에 미국인 선교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어느 날 장작을 좀 쌓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선교사집 귀퉁이에 장작을 힘들여서 잘 쌓았습니다. 힘들게 다 쌓고 나니까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이 곳은 비가 맞을 염려가 있으니 저 쪽에 다시 쌓아 주시겠습니까?"
그 청년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렇게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되었습니다. 유학 비행기 표와 유학 허가증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일년동안 그 청년을 이렇게 저렇게 시험하여 본 것이었습니다. 성실성, 정직성 그리고 충성성 그리고 남을 섬기는 모습을 이렇게 저렇게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을 섬기는 사람을 축복하시며 마음에 합하다고 하십니다.
2. 회개하는 사람
다윗은 죄를 안 지은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멋진 회개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였습니다. 죄가 탄로날가 두려워 하면서 남편 우리아 장군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다윗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침상이 눈물에 뜰 정도로 울었습니다.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더중요한 것은 그 후 다시는 그 죄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회개가 멋있고, 회개한 후가 깨끗하였습니다. 다윗은 회개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 동깁니다.
스탈린이 공산주의를 만들 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소위 KGB 비밀 경찰대를 만들어서 왠만하면 살린 것이 아니라 왠만하면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알려졌습니다.
스타린이 어느 날 한 마을에 가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밤 중에 개가 짖어 댔습니다. 스타린은 옆에 있는 신하에게 "밤잠을 못 자게 하는 저 놈을 죽여 보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가서 개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돌아 와서 "죽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무엇을 죽였나?" "개를 죽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스타린은 말했습니다.
"아니 개 주인을 죽이란 말야"
신하는 총을 들고 뛰어 나갔습니다. 조금 후 총소리가 나자 스타린은 평안하게 잠에 들었습니다. 이렇게 수 천만명을 죽인 사람이 스타린입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였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철저한 회개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점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칭찬받는 사람
다윗은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1) 스데반이 칭찬하였습니다.
최초이 순교자 스데반이 다윗을 이렇게 칭찬하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행7;46)
(2)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윗을 칭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났을 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모세는 최고의 선지자로, 다윗은 최고의 왕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도 예수님을 부를 때 "다윗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3) 다윗의 원수 사울도 다윗을 칭찬하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엔게디 굴속으로 숨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그 굴속으로 들어와 피곤하니까 잠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리고 굴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사울 왕이 한 잠 자고 나왔습니다. 그 때 다윗은 옷자락을 높이 들고 말했습니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삼상24;11-16)
이 말을 듣고 사울 왕이 다윗을 칭찬하였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24;17)
(4) 가까운 신하들이 다윗을 칭찬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인 베들레헴을 블레셋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을 그리워 하며 말했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대상11;17)
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세 신하다 목숨을 걸고 들어가서 우물 물을 길어 왔습니다. 신하들이 무심코 한 말에 목숨을 걸 정도였습니다. 물을 길어 왔을 때 다윗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그 물을 땅에 쏟으며 말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대상11;19)
이렇게 말 한 마디에 생명을 걸 정도로 대단히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로부터 존경받는 남편으로부터 인정받는 아내, 자기 교회 교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목사가 정말 참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가까운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가까운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이 참 된 사람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성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 부목사는 얼마나 욕하는 지 아주 대조적입니다. 가까운 사람이 칭찬하여야 진실입니다. 다윗은 신하들이 칭찬하였습니다.
(5) 하나님이 칭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이같이 다윗은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마음에 합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윗은 완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22)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 죽었습니다.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 도중에 죽는 사람도 비일비재합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대합니다. 우리는 잘 살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잘 죽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잘 죽는 것도 잘 사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을 일을 다 이루고 죽게 축복하셨습니다. 하여야 할 일을 다 하고 하나님 앞에 가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서울 총각과 강원도 처녀가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결혼식 날을 잡았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강원도로 내려 갔습니다. 신랑은 부유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내려 갔습니다. 대단한 행렬이었습니다. 강원도 시골 마을이 떠들석할 정도였습니다. 모두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신부조차 그 날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신랑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결혼을 약속하여 놓고 갈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고 왠 일이요?"
신부가 오히려 놀라며 물었습니다.
"오늘이 아닙니다"
"오늘이요?"
신랑은 수첩을 보이며 소리를 지르듯이 말했습니다.
알고보니 신랑은 양력으로, 신부는 음력으로 날자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달 차이가 났습니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습니다. 신랑신부 마음이 맞지 않아 결국은 깨진 결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 가요? 다윗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1. 섬기는 사람
2. 회개하는 사람
3. 칭찬받는 사람
그래서 모든 뜻을 다 이루고 하나님앞에 간 사람입니다. 인물을 보면 인격이 보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은총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행 13장 17절 / 이원근목사
구약 시대의 예법과 절기들은 이미 죽은 종교의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단정짓고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의 모든 예법과 절기와 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그분이 이루신 구원과 영광스런 천국을 예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맥추절을 단순히 구약시대에 지켜졌었던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절기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맥추절은 영적으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복된 절기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들을 저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분이심을 깨닫게 해주는 거룩한 절기라 하겠습니다.
1. 생존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먼저 당신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깨우치신 바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이 과연 자기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절기와 제사를 주신 이유 중에 하나도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맥추절 기념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야말로 인간의 생존 근원이 되시는 분이시요, 따라서 인생은 그 누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임을 일깨워주고자 하셨습니다. 정녕 우리는 늘상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시16:2)는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확의 기쁨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감사의 제사를 요구하신 것은 오직 당신만이 영광 받으실 분이요, 당신을 떠나서는 우리 인생이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절망과 탄식만이 주어질 것입니다(눅15:11-1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2. 신앙의 주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잠언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고 했습니다.
1)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맥추절을 지킬 때에는 고운 가루로 만든 떡 두 개를 요제로 흔들어 하나님께 바쳐야만 했고(레23:15-17), 어린 양, 수소. 숫양 등을 번제로 드려야만 했습니다(민28:28-29). 이러한 다양한 헌물과 제사 속에는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돌려드린다는 절대적인 신앙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소유와 사업과 가정과 장래와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다는 깊은 신앙심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신앙인은 자기에게 있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따라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부 맡길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신앙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역사에 전적으로 순복해야 합니다.
맥추절 기념행사는 매년 정한 날짜에 치러져야 했습니다. 그 해에 기쁜 일이 있든지, 혹은 우환질고가 있든지를 불문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에 구애됨 없이 항상 감사하고 경배하는 태도는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에 대해 전폭적으로 찬동하고, 또 그 모든 결과에 전적으로 순복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신앙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기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이점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오직 “아멘”만 있을 뿐입니다.
3.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라고 했습니다.
1) 세상의 모든 탄식과 눈물을 씻겨주십니다.
맥추절 기념행사에 참여하는 자는 일체의 노동을 중단하여야 했습니다(민28:16). 이것은 모든 세속적인 관심을 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의미도 담겨 있고, 또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중단하라는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염려와 걱정을 깊이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친히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당신께 나아와 순전한 심령으로 감사하고 벅찬 감격으로 찬양하는 영혼의 안타까움을 결코 외면치 않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찢긴 상처를 싸매주시고, 모든 탄식과 눈물도 친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과 탄식이 끝나는 저 찬란한 기쁨의 천국으로 친히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2) 하늘의 신령한 양식을 얻게 하십니다.
맥추절은 먹을 양식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우리에게 하늘의 양식을 주시어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시해 주는 절기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죽어 마땅한 우리 죄인들에게 생명의 떡이요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참회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신령한 양식으로 배불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신령한 양식에 관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양식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사55:1-3)
결론
우리 인생은 하나님 없이는 결코 1분 1초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하고 하찮은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고하지 말고, 오직 우리의 생존의 근원이시오, 신앙의 유일한 주재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장래를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자리에 이르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을 택하시고
양향모목사 / 행 13:17-19
요즘 새 정부가 들어서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적폐청산”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적폐(積弊)라는 말은 오랫동안 쌓인 잘못된 것이나 옳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 옳지 못하고 잘못된 것들이 있는데도 오랫동안 고치지 못하고 쌓여 있는 것을 청산하자는 것입니다. 잘못되어 있는 것 그것도 오랫동안 쌓여 있는 잘못된 것을 청산하고 새롭게 바르게 하자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잘못된 것을 고칠수록 좋고 새롭게 바르게 하자는 것은 정말로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적폐의 기준이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실행했는데 다른 사람이 보니까 그것이 나쁜 것이고 적폐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사람마다 의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고 사람마다 양심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이 서로 다를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유행하는 말이 ‘내로남불’이라는 말입니다. 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인데 내가하는 일은 옳은 일이고 같은 일이라도 남이 하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도 적폐청산과 같은 시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에는 바르게 시작을 했는데 세월이 흐르다가 보면 잘못된 일들이 생기고 그것이 고쳐지지 않아서 아주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런 오래된 잘못들을 고치려고 하는 일들이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시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잘못된 것을 정하고 고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학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자유나 행복을 중심으로 의와 불의를 구분하려고 합니다.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사람의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그것이 설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으로 간주를 합니다. 인간의 생각에 맞추어서 성경도 고치고 하나님의 뜻도 바꾸려고 합니다.
반대로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의와 불의를 구별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인간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뜻이면 그대로 따르려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원래의 뜻을 끝까지 지키고 따르려고 하기 때문에 때로는 보수주의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속한 고신교단은 개혁주의 혹은 보수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단입니다. 저 역시 그런 신학으로 목회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원뜻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애를 쓰고 거기서 잘못된 것은 고쳐서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부터 시작되는 바울의 설교를 적폐청산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에 대해서 오랫동안 잘못알고 있었던 것들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성경을 보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살았지만 잘못된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원래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잘못된 생각들을 청산하고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로 나가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17절에서 19절까지 읽었지만 오늘은 17절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조상을 택하시고”라는 말씀을 주제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조상을 택하시고
본문 17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들의 조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조상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위대하게 생각하고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조상을 통해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잊어버린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훌륭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셨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받을 수 있는 그 귀한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시작할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선택하실 때 엄청난 사람을 선택하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을 아주 위대한 인물이요 자랑스러운 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훌륭하고 착하고 능력이 있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저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만들어서 팔던 데라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처음부터 경건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큰 민족을 이룰 조상으로 부르셨다면 아들을 잘 낳는 사람으로 선택을 하셔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75세였는데 그때까지 자식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 아내는 아브라함이 100세가 될 때 겨우 이삭이라는 아들 한 명만 낳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아도 특별하게 칭찬을 받을만하게 잘 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전적으로 믿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셨음에도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양아들도 삼아보려고 하고 첩을 얻어서 아들을 낳기도 한 것을 보면 믿음도 없고 순종도 안하는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인간구원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손을 특별한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 후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축복의 핵심도 모르고 그냥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만 자랑하고 자부심을 갖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복되고 왜 아브라함의 후손이 복이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진정한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도 특별한 사람을 선택하여 하시지만 그 구원을 받을 사람도 특별히 선택을 하시고 그 선택받은 사람만 구원을 얻도록 하십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된 것은 정말로 알고 보면 엄청난 복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교회들이 많고 교회에 성도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무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살다가 간 수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 특별히 복음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천에 한 사람 만에 한 사람 있을까말까 한 아주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하심도 작은 일의 선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찬국 백성이 되는 일에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도 부족하고 순종도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약속을 해주시지만 그 약속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약속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내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다든지 많은 돈을 들여서 그 권리를 샀다든지 하면 귀하게 여길 것인데 그런 저런 것도 없이 그냥 은혜로 거저 받아서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받았다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능력으로 우리의 자격을 받았다면 오히려 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물로 이 귀한 것을 받을 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도 그때그때 하는 것을 보면서 심판을 하셨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진짜 믿음을 가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면서 꾸준히 훈련을 시키신 결과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식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할 때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처럼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그때그때 평가하신다면 우리 가운데서도 불합격 받아서 퇴출당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심을 후회하시거나 취소하시지 않고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가지도록 훈련시켜서 꼭 합격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믿음의 훈련을 잘 받으셔서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믿음을 통하여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모릅니다. 외형적으로 건물이 큰 것을 자랑하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는 것을 자랑하면서 정작 정말로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른다면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조상을 자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임을 자랑하면서 왜 그것이 자랑스러운지를 모르는 것처럼 우리 성도가 교회를 자랑하고 교회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정작 교회의 성도를 위대하게 하는 복음을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17절 하반 절에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결정적인 불순종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언약도 주시고 그 언약을 행할 장소도 주셨는데 그 장소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거기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살기를 좋아하지 않고 슬금슬금 애굽으로 내려가기 시작을 하더니 결국은 애굽으로 이주를 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들이 자꾸 애굽으로 가려고 했던 이유는 가나안 땅보다 애굽 땅이 더 좋아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땅이 아주 좋은 땅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비가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이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이라는 나라는 나일 강을 중심으로 해서 물이 풍족하여서 비가 좀 오지 않아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비가 조금 오지 않으면 자꾸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살라고 하셨으면 설마 굶어죽게야 하겠습니까? 주여 하고 기도하면 비를 내려주시든지 다른 먹을 것을 주시든지 하실 것인데 믿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이야 가물어서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 같지가 않지만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친히 다스리고 계셨기 때문에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다 해결이 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하기 싫은 것입니다. 기도를 그냥하면 됩니까? 기도를 할 수 있는 떳떳한 상태여야 하는데 만날 착하고 바르게 살 수 없으니까 기도할 때만 잘못된 것 회개해야 하고 똑바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하니까 그런 어려운 기도생활 하지 않고 살아보자고 애굽으로 가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잘 풀려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척박한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처럼 살기가 더 어렵습니다. 늘 기도하지 않으면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것이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자꾸 애굽땅을 바라보고 삽니다. 애굽에만 가면 이렇게 애 터지게 기도하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라고 사정하지 않아도 되고 또 가끔은 죄도 지으면서 살아도 되니까 애굽으로 가고 싶어서 쳐다보고 사는 것입니다.
가끔은 로또복권이라도 사서 당선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한 10억쯤만 있으면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땀 흘려 일하지 않아도 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고 한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척박한 땅에서 살아야 하는 가나안 땅의 생활처럼 좀 어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려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특별히 도와주시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의 삶보다 더 쉽고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못살 것 같지만 세상의 재물이나 좋은 환경보다도 더 좋고 편안하고 쉬운 것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어려워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면 도움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기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은 멸망의 길이고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고 믿음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미련하지만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존재이지만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척박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좁은 문 좁은 길로 가지만 이 길 끝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원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양향모목사 / 행 13:17-19
서울대 공대 이정동 교수라는 분이 “축적의 시간”, “축적의 길”이라는 책을 쓰고 그것을 주제로 텔레비전에 나와서 특강도 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산업계는 ‘개념설계 역량’이라는 것이 부족해서 위기를 맞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개념설계 역량은 축적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축적의 길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개념설계란 무엇을 계획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짜서 새로운 것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것을 더 깊이 있게 연구하여 강화시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 개념설계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노력하고 또 노력을 하고 실패를 경험하고 또 도전하고 해서 기술을 축적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어디서 새로운 것을 가지고 와서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을 알고 그것을 꾸준히 노력을 하고 또 노력을 하여서 축적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해서 새롭게 쉽게 빠르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을 노력을 통해서 체험을 통해서 실패를 통해서 이루어나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 기발한 아이디어로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서 시행을 했습니다. 전도 프로그램, 성경공부 프로그램, 기도프로그램,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실행을 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이런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참 좋아해서 우리나라에 개발된 프로그램은 다 그 세미나에 가서 교육을 받고 교회에서 실행을 했습니다.
세미나에 가서 교육을 받고 올 때는 이 프로그램이야 말로 최고의 프로그램이고 이 프로그램만 실행하면 교회도 부흥하고 성도들도 더 열심을 낼 것이라고 진행을 합니다. 그런데 조금 해 보면 생각대로 잘 안 되고 그냥 시들시들 해지고 또 다른 프로그램을 찾고 또 하다가 시들해지면 또 다른 프로그램을 찾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그런 프로그램만 개발을 하다가 보니까 정작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교회가 왜 존재하고 있는지 교회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근본적인 것을 놓쳐버리고 엉뚱한 일을 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교회에 옵니까?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습니까?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런 중요한 일 핵심적인 일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먼저 발견해야 할 것이 신앙의 근본개념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그 근본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것을 우리의 삶에 실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들을 살펴보고 실패하지 않고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실패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에 실패를 통해서 경험을 쌓으면서 더 나은 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새로운 활동을 개발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근본핵심을 바르게 알고 그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시간부터 바울의 설교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1차 전도여행 중에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회당에 들어가서 그들이 읽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실패와 실패를 한 그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지난주에 살펴본 1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라고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귀중한 일을 시작하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불러서 인류구원이라는 위대한 일을 시작하셨는데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는 위대한 일을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가나안 땅에서 살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고 그 후손들이 아예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살게 되었습니다. 흉년을 만나 그들이 생각하기에 살기가 좋아 보이는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가 아예 거기서 살게 되었습니다.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이라고 했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 70여명이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해서 애굽으로 와서 살았습니다. 요셉을 미리 보내서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쉽게 이주를 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애굽 땅에 와서 400여년을 사는 동안 그들은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애굽을 떠나올 때 장정만 60만 명이라고 했으니까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2백만 명이 넘을 정도의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와서 큰 민족을 이루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든지 애굽에 와서 그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200만의 큰 민족으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 성경들은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성장한 면을 강조합니다. ‘강대한 민족으로’(공동번역), ‘이 백성을 높여 주시고’(새번역). ‘큰 민족이 되게 하셨으며’(현대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가나안 땅에서 살지 않고 애굽으로 왔지만 애굽으로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대한 민족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긍정적인 면으로 봅니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업적을 높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애굽에 와서 큰 민족을 이룬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읽은 개역개정이나 이전의 성경 개역한글에서는 부정적인 면 즉,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래 헬라어성경에서도 나그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그네로 번역을 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 와서 큰 민족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나그네와 같이 임시로 살았던 것이지 거기서 머물러 살 민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민족을 이루었을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애굽으로 왔기 때문에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룬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라고 했습니다. 나그네 된 백성을 높였다는 것은 나그네 되었을 때 그들이 낮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출애굽기를 읽어보신 분들이니까 잘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아실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서 대우를 받고 산 것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고 힘든 일을 하게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하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일 강에 던져서 죽게 하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고된 노동과 비참함을 당한 후에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그 비참한 신분에서 높여주시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세워주시고 그 비참함에서 탈출시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불러내서 따로 구별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꾸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으로 나간 결과는 늘 뻔합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서 헤어나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삽니다. 그런 비참한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또 건져내서 따로 세워두면 또 세상에 가서 사탄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참한 세상에서 영원히 멸망 길로 달려가는 인생에서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신세에서 우리를 높여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게 해 주셨으면 그냥 세상 기웃거리지 말고 거기서 사세요. 왜 자꾸 세상을 보며 세상을 기웃거리며 사세요?
보따리 싸가지고 산속으로 들어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차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도 모르고 이 세상만 있는 줄 알고 사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가는 목적지가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데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무리 즉 성도답게 살자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믿는 사람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최선의 일로 여기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나라 교회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의 일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에 앞장을 서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본문 18절 말씀에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 애굽에서 종노릇 하는데서 기적적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가는 길에 광야를 통과하게 됩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은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만한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주일 길을 40년 동안 빙빙 돌아서 가게 되었습니다. 400여년을 하나님을 떠나서 살던 사람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시면서 그들을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알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고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어렵고 힘든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실 가나안 땅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힘차게 가면 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읽어보시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치사한 인간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적들을 얼마나 많이 체험을 했습니까? 애굽 왕 바로가 안 보내주려고 몇 번이나 약속을 번복을 하고 붙잡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이적을 보여주시면서 바로의 강판한 마음을 꺾으시고 탈출을 시켜주셨습니다.
나가라고 해놓고도 금방 마음이 바뀌어서 군사를 이끌고 말을 달려서 뒤쫓아 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지의 길처럼 지나가게 하시고 애굽의 군사들은 물에 수장을 시켜버리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일을 체험을 했다면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보고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구출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그 은혜를 평생 감사하고 그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즉각 따르고 그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좀 힘들고 어렵고 마음에 안 들어도 순종하면서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정말로 한심합니다. 물이 없으니까 물이 없다, 먹으로 것이 없다, 나중에는 고기가 먹고 싶다. 별별 것을 다 요구하면서 원망불평을 합니다. 애굽에서 종노릇을 할지라도 거기서 고기라도 얻어먹으면서 살다가 죽었으면 좋을 텐데 왜 광야로 끓어내서 고생을 시키느냐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로 끌고 와서 죽이려고 하느냐 별별 원망을 다합니다.
광야에 물이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먹을 것도 없고 고기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면 하나님께 달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주실 텐데 원망부터하고 불평부터 쏟아놓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일주일만 참으면 광야 길을 벗어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거기 들어가면 남들이 지어놓은 집에 들어가서 살 것이고, 남들이 심고 길러놓은 나무의 과실을 먹게 될 것인데 그 조금을 못 참아서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 되면 누구 말대로 막가자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님이고 구원이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도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음 같으면 구원이고 뭐고 다 취소해버리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뭐고 소용이 없습니다. 택한 백성이고 뭐고 소용없고 다 멸망시켜버리고 다시 시작을 하셔도 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이 소중한 일이셨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참으시고 계속 그 일을 진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일은 포기하시지 않으셨지만 원망하고 불평한 사람들은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실 엄청난 복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구원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출애굽하여 광야로 온 사람들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다른 민족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주로 원망이 시작됐습니다. 섞여 있던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고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과 고기를 먹고 싶다고 원망을 시작하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덩달아서 함께 원망을 했습니다.(민11장 참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입에서는 늘 감사와 찬양이 나와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은 선택을 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서나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위치는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서 살고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탈출을 해서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광야와 같은 세상입니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고기는 더더욱 없는 곳입니다.
그래도 참고 이 길을 가는 것은 영원한 가나안 땅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배고프면 어떻습니까? 좀 목마르면 어떻습니까? 좀 즐거운 일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조금만 참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는 나라에서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인데 나그네와 같은 잠깐의 세월 좀 못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귀한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좋은 차타고, 좋은 것 먹으며, 좋은 곳에 여행도 다니고 싶다고 하면서 그렇게 살지 못함을 불평하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큰 은혜를 거두어가시고 싶진 않으실까요?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그런 소행을 참으시고 영원한 가나안 땅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잡고 그 나라까지 들어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세상을 뒤돌아보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원망과 불평이 영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련하게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가서 그들의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잊지 않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은 계속을 하셨지만 계속해서 원망하고 불평하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실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잊지 마시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광야처럼 어려운 세상이지만 참고 견디면서 영원한 가나안 땅 천국까지 끝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