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릴 적부터 위인전을 통해, 그리고 학교 수업시간을 통해서 많은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독립운동가 외에는 그다지 많이 알지는 못하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던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 선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성환(曺成煥) 선생은 1875년 7월 9일 서울 낙원동에서 출생했습니다. 선생은 25세가 되던 해인 1900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는데요. 그 당시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한 무관들이 군대의 주요 요직을 차지했고, 일제와 친일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권력을 악용하고 군부를 부패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선생은 “썩은 군대는 곧 나라를 망치게 합니다. 속히 썩은 자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시켜야 합니다!”라고 외치고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뒤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칙령으로 특사되어 참위로 임관되었으나 얼마 뒤 군대에 환멸을 느껴 결연히 군을 떠났습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던 조성환 선생은 그 후 상동청년학원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며 국권회복운동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1907년 중반부터는 안창호, 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이후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논의되자 조성환 선생은 간도 및 러시아 방면 인사들과 연계하여 이를 진행시켜 나갔고, 그 일환으로 1908년 초에는 연추(노우키에프스크)를 직접 다녀오기도 했습니다.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구체화되어감에 따라 조성환 선생은 1909년 북경으로 망명했습니다. 이곳에서 선생은 국내를 비롯해서 만주, 러시아, 미국 지역의 독립운동가들 간의 연락과 통신을 담당했는데요. 한편으로는 중국 인사와 교류하며 청년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리고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한국 독립운동의 호기회로 여겼던 선생은 신규식과 함께 남정으로 건너가 공화혁명에 참여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1912년 7월에 한국과 중국의 호조기관인 동제사를 상해에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경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한인의 중국입적운동을 추진하던 조성환 선생은 전 일본수상인 가쓰라 다로의 암살음모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국내로 송환된 후 1년간 유배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8년 말에는 만주 길림에서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평등복리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일제의 학대와 압박을 벗어나 대한민족의 자립을 선명(宣明)한 대한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는데요. 이때 조성환 선생은 김교헌, 김동삼, 조소앙, 이동녕 등 39명의 한 사람으로 서명을 했습니다. 그 후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대한국민의회는 이를 경축하고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결의한 뒤 독자적인 조각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여론이 끓어오르자 각 지역 대표들이 1919년 3월 중순 상해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모임을 가졌는데요. 이때 선생은 노령대표로 상해로 건너가서 이동녕, 이시영, 신채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후에 상해와 북경에서 머무르며 만주에서의 독립군 재건을 추진하던 조성환 선생은 1922년 가을에 북만주로 이동하여 무장단체간의 통일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독립군 통합을 위한 군사연합회 조직 활동이 성과 없이 끝나자, 선생은 1924년 후반 남만주 지역에서 독립군 통합여론이 일자 군사분과위원으로서 정의부 성립에 기여하였습니다. 곧이어 대한군정서 대표자격으로 북만주 독립군 단체 간의 통합교섭을 주도하여 1925년 3월에 신민부를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삼시협약으로 인해서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자, 선생은 1926년 후반부터 ‘대독립당북경촉성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계의 대동단결을 추진했는데요. 한편 ‘입적간민회’를 설립하여 만주에서의 한인추방정책에 대응했습니다. 조성환 선생은 만주사변 이후 임시정부와의 교류를 강화해나갔는데요. 1935년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를 시작으로 선생은 광복 전까지 국무위원을 역임하는 한편, 1944년 전반까지 군무부장의 직위를 맡으며 임정의 군사업무를 총괄하였습니다. 특히, 선생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일전쟁 수행을 준비했는데요. 1939년에는 군사특파단의 단장을 맡아 1년간 서안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광복군 창설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1945년 중경에서 해방을 맞은 선생은 그 해 12월에 다시 환국했는데요. 그 후 독립촉성국민회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선생은 건국사업에 남은여생을 투자하다가 1948년 10월 7일에 서거 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