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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첫 번째 설교(2)
행 13:13-23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 설 교 >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양향모목사 / 행 13:17-19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회당에 들어가서 행한 설교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비시디아 안디옥이라고 하니까 그런 도시가 있었는가 보다 하고 그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별 관심이 없이 설교한 내용만 살펴봅니다.
지금의 비시디아 안디옥은 터키의 아주 한적한 시골 촌으로 그 때 바울의 설교를 기념하는 기념교회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이 도시는 정말로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하려면 머리도 복잡하고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안디옥이라는 이름은 헬라적인 이름이라고 해서 아마도 헬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세운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헬라문화가 최고의 문화로 각광받았기 때문에 최고의 학문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도시였는데 아주 특별하게 로마 황제가 직접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는 도시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황제가 직접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는 총독부가 자리 잡고 있는 중요 핵심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대인들이 와서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배우며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터키의 작은 도시에 시골 사람들을 앉혀놓고 설교를 했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최고의 학문을 자랑하는 사람들과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최고의 종교를 가지고 있던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을 앉혀놓고 최고의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1차 선교여행 때 바울의 위치는 바나바가 원목사라면 바울은 부목사정도로 따라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앞에서의 설교를 바나바가 아닌 바울이 한 것은 바울이 그런 사람들과 맞상대를 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당시의 최고의 학문을 배운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유대교에 열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헬라적이고 로마적이고 히브리적인 사람들에게 동시에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바울의 설교를 아주 중요한 설교로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냥 대강 적당히 모인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 앞에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하는 설교임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19절의 말씀을 가지고 세 번째 말씀을 드립니다. 짧은 세절이지만 오랜 세월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또 알아야 하고 교훈을 받아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19절 말씀을 중심으로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살펴보고 있는데 어떤 때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한없이 너그러우신 분으로 나타나시고 어떤 때는 아주 엄격하고 단호하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18절에서는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라고 하셨고 19절에서는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사”라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오랫동안 참아주시고 어떤 때는 가차 없이 멸망을 시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오래 참아 주시고 어떤 때에 멸하시는지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 참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멸망시키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멸망을 당해야 할 사람인가, 오래 참아주시는 중이신가, 계속 사랑을 받으면서 살 사람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성경말씀을 살펴보고 설교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더 잘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수시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보습을 살펴보고 점검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사
19절에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가나안 땅은 물이 없어서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서 애굽은 물이 풍부해서 비가 별로 오지 않아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야곱 때 그의 식구 70여명이 가나안 땅을 포기하고 애굽으로 이사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을 사는 동안 장정만 60만 명이 되는 큰 민족이 되었지만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전락해서 힘든 삶을 살았고 그들의 고통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탈 출 시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오는 길에 광야가 있었습니다. 그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나가는 것만 해도 너무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기쁨은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다가 7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했고 그나마 애굽을 나올 때 장정이었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훈련을 통과한 젊은 세대들이 모세의 후계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여호수아 장군을 앞세우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됩니다. 여호수아서를 보시면 그 땅을 정복하여 각 지파를 따라 나누어주는 장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에는 일곱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7장에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고 여호수아 24장에는 정복이 끝난 후 정복한 족속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기록에 의하면 일곱 족속은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잘 살고 있는 이 일곱 족속을 완전히 다 죽여 버리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여 볼 말씀은 일곱 족속을 멸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멸절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냥 쫓아 낸 것이 아니고 모두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7: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6:21절에 보면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사정없이 남자나 여자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다 죽여 없애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다 죽여 없애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매정하게 하셨을까요? 교회에는 안 다니면서 성경을 지나가다가 조금 읽은 사람은 이런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은 참 냉정하고 무자비한 분이라고 비웃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냉정하고 무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아주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범한 사람은 여차 없이 그냥 죽여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다 진멸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몰라보고 삽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탄의 졸개를 따르며 잡신들을 섬기면서 삽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살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그 인간의 후손이 아니고 제 스스로 생긴 인생이라면 자기 마음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자신도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몸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짓만 골라한다면 그 사람은 죽어도 마땅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온갖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며 그 우상을 절대로 버리지 못할 사람들임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을 살려두면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자꾸 섬기라고 유혹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7:3-4절에 가나안을 점령할 때 주의 사항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가나안을 점령하다가 예쁜 며느리 감이 있다고 데리고 와서 며느리를 삼거나 좋은 사위 감이 있다고 데리고 와서 사위를 삼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겉보기는 멋있게 하고 있지만 그들 안에 우상을 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녀들을 유혹을 해서 우상을 섬기게 할 것이고 그로 인해 너희들도 진멸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여호수아 6:21절에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성에 있는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로 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을 칼날로 멸하는 것이 하나님께 그것들을 바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사제도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제사제도를 보면 짐승을 아주 비참하게 잡아 죽이고 피를 흘리고 어떤 때는 아주 불살라서 없애버립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좋아하는 악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와서 다 불살라 버리는 것이 제사입니다. 그래서 그런 제사를 하나님께 좋아하시고 흠양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사람 대신 짐승을 잡아 죽여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짐승을 비참하게 죽여서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할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상숭배를 단호히 거절하여 오직 하나님만 섬김으로 멸망당함을 면하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이 끝난 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24:14-15)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우상 구덩이인 애굽에서 탈출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우상을 섬기던 원주민들을 모두 죽여서 없애버리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 것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모든 우상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로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에게 있는 모든 우상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물론이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도 버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많이 잘못되어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각오를 해야 하는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세상의 욕심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들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조금 잘못이 있어도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주 철저하게 진멸을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우상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한 여호수아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19절 하반 절에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나누어 주셨는데 그 기간이 약 사백오십 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백오십 년은 이 구절을 어디에 놓는가에 따라 해석이 다릅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성경 번역처럼 기업으로 나누어주시기까지가 사백오십 년이라고 한다면 쉽게 계산이 나옵니다.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에서 종노릇 한 세월이 사백년이고 광야 생활 사십년 그리고 가나안 정복 기간을 십년으로 보면 가나안을 떠나서 다시 가나안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된 세월이 사백오십 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해석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그냥 이렇게 생각을 하겠습니다. 가나안을 떠나온 이스라엘을 다시 가나안에 정착시킨 그 세월이 사백 오십 년이며 참 중요한 세월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면서 흉년만 피했다가 얼른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는데 450년이 걸렸고 그것도 그들 스스로 돌아 온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고난을 체험 한 후에 하나님께 그 고통을 부르짖어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도우심을 주심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잠깐 형편이 좋아질 때까지 신앙생활 좀 쉬다가 다시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떠나면 돌아오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편의상 잠깐 떠났다가 얼른 다시 돌아오면 되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이번에는 귀신이 수십 배로 들어와서 붙잡고 못 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중요한 것은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기업으로 주셨다는 말은 유산 상속과 관계가 있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듯이 각자의 몫을 나누어 주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각각 땅을 공정하게 분배한다는 것은 땅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내 땅은 좁다, 좋지 않은 땅이라고 하면서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 정말로 시끄러웠을 것인데 다행히 잘 분배를 했습니다. 사백오십 년 동안 나라도 없이 내 땅도 없이 나그네처럼 살던 그들이 내 나라를 가졌고 내가 살 내 땅을 가졌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땅을 가지고 사는 것이 참 행복한 삶입니다. 평생 한 평의 땅도 소유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땅을 가져보는 것이 참 행복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언젠가는 나도 한번 땅땅거리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기업은 영원한 기업입니다. 이 세상에서 땅을 유산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께 유업으로 상속받는 것입니다. 나는 돈도 없고 아무런 공로도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너무 가지신 것이 없으셔서 나에게 발붙일만한 땅 한 평 상속해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저에게 그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믿음을 상속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기업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몰라보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인정사정없이 멸망시켜버리시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는 오래 참아주시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상속해주시는 너무나 좋은 분이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양향모목사 / 행 13:20-23
‘찰리 채플린’이라는 희극배우가 남긴 유명한 말이 몇 마디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나무를 하다가 칡넝쿨을 걷는다는 것이 그만 잠자는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당기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호랑이가 달려들자 나무꾼이 나무위로 올라갔는데 호랑이가 나무를 흔들어서 떨어진다는 것이 호랑이 등으로 떨어졌답니다. 호랑이가 자기 등에 탄 나무꾼을 떨어뜨리려고 마구 달립니다. 나무꾼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하여 호랑이 등가죽을 잡고 매달려 있습니다. 논에서 땀 흘려 일하고 있던 농부가 이 모습을 멀리서 보고 불평을 합니다. 나는 평생 땀 흘려서 농사를 지으면서 고생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호랑이 등이나 타고 다니고 세상 참 불공평하다고 불평을 하더랍니다.
멀리서 보니까 호랑이나 타고 놀러 다니는 행복한 사람 같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남들이 멀리서 볼 때 행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다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사는 불쌍한 사람이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윗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볼 것인데 다윗의 경우도 이 경우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멀리서 보면 다윗은 참으로 굉장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중에 가장 훌륭한 왕이라고 평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등치가 엄청나게 큰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물맷돌 한방으로 쓰러뜨린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아주 멋있고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양치는 소년에 불과한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왕 중의 왕이 다윗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온 인생여정을 잘 살펴보면 비극 중에 비극적인 삶을 산 사람이 또한 다윗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였고 겨우 왕이 된 후에도 자식에게 배반을 당하여 도망을 다녀야 했고 이런저런 고난이 그칠 날이 없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어쩌다가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로 거의 일평생을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하면서 지냈고 이런저런 비극들이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하고 그 벌을 달게 받으면서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파란만장한 다윗의 생애를 오늘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핵심만 살펴보고 우리가 받을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본문 21절에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라고 했습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여 별로 내키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왕이지만 아무나 아무렇게나 세운 왕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지정하셨고 각 지파 중에서 제비를 뽑아서 당선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용모도 단정하고 키도 다른 사람들보다 어깨가 더 있을 정도로 큰 사람이었고 겸손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미움을 사서 그의 왕족이 폐족이 되었고 다윗을 통하여 새로운 왕가를 시작하셨지만 사울이 다윗에게 비해서 크게 더 나쁜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울의 첫 죄는 제사장이 아니면서 왕의 권위로 제사를 집전한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제사를 집전해야 할 제사장 사무엘이 시간에 맞추지 못하고 늦게 오자 성질이 급하여 자기가 집전해서 제사를 드린 일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미움을 사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를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사무엘이 늦게 와서 대신 제사 한번 집전을 한 일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화를 내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한 번은 전쟁에 나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하셨는데 사울이 그 명령을 어기고 아각 왕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오고 우양 중 가장 좋은 것은 죽이지 않고 살려서 끌고 왔습니다. 사울의 변명에 의하면 소나 양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에 좋은 짐승이라서 끌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사무엘에게 임하시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다윗을 질투해서 죽이려고 한 일이나 다윗을 도와준 제사장들을 85명이나 죽이고 그 가족들도 죽이는 큰 죄를 지었지만 그 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떠나자 악령이 그에게 들어와서 큰 죄들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을 때 지은 죄는 제사와 관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반드시 제사장을 통하여 드려야 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다는 것과 전쟁에서 이기고 하나님께 제사할 명목으로 가져왔다는 짐승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사와 관련된 명령은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자기 생명 대신 짐승을 잡아 죽이는 것인데 그 제사를 지내면서 불법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그 죄의 형벌이 이렇게 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제사를 드리면서 오히려 죄를 지으면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울이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다지파에서 왕손이 나온다는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울은 임시적인 왕에 불과했습니다. 사울은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인간으로서 완전한 왕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다윗 왕이 진짜 왕임을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을 통하여 교훈을 받을 것은 사울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베냐민 족속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될 유다족속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서도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제사제도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얼마나 우리에게 절실한가를 알아야 되는데 그 중요한 제사를 드리면서 그런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예배의 핵심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감사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날 구원해주셨음에 대하여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으면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본문 22절에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마침 지난 주간에 제가 강의 나가는 신학교에서 사무엘하서를 가지고 다섯 시간 동안 특강을 했습니다. 사무엘하서는 다윗 왕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앞서 서론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다윗 왕의 이야기는 멀리서 보면 참으로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참한 삶을 산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1)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새로운 왕가를 세우는 장면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유다지파 가운데서 왕을 세우시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에게 이새라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아들 중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삼으셔서 그 후손으로 그리스도가 오시게 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사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룻기’라는 네 장으로 된 작은 책이 있습니다. 룻이라는 사람이 모압이라고 하는 나라에 살던 외국인이었지만 그 나라에 살러온 유대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남편이 죽자 시모를 따라 유다 베들레헴으로 와서 이스라엘 사람이 되고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그 남편을 대신해서 다시 결혼을 한 사람이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보아스라는 사람이 유다지파 사람이고 예수님의 조상이 될 사람이었기 때문에 룻이라는 여인도 예수님의 조상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얻은 여인이었습니다.
룻기서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 이 여인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유다지파인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선택해 놓으신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지파를 통해 그 유다지파 중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워서 그 후손으로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계획해놓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 속에 있는 다윗을 만났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시는 눈은 우리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사무엘의 눈에는 등치가 크고 건장하고 힘이 센 사울과 같은 사람이 왕이 되기에 적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새의 집에 갔을 때도 거기 다윗의 형들이 일곱 명이 있었는데 다 키가 크고 건장하게 잘 생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 크고 잘 생긴 형들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형들보다 비교적 등치도 작고 남자답게 못생겨서(얼굴이 아름답더라고 했는데 여자 같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형들은 군인으로 전쟁에 나가 싸울 때 집에서 양이나 치던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외모로 보시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시고 다윗을 마음에 맞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사람의 성격까지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나중에 사울이나 다윗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셨는지를 조금 알 수 있습니다. 왜 사울을 싫어하시고 다윗을 좋아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나 다윗이나 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울보다 다윗이 더 못된 죄를 짓습니다. 사울은 제사장이 아니면서 제사를 집전한 것과 전쟁터에 나가서 제사 드리기 좋은 짐승 몇 마리 남겨온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남의 아내와 간통을 하고 그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서 충성스런 군사를 죽이는 아주 흉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짓고 난 후의 모습은 많이 달랐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변명을 했습니다. 사무엘이 늦게 왔기 때문이라고 남의 허물을 찾았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짐승을 가지고 왔다고 거짓 변명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마음까지 다 아시기 때문에 그런 변명과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을 다 아시고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비록 아주 흉악한 죄를 지었지만 죄를 지적받은 즉시 아무런 변명 없이 즉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평생토록 회개하면서 보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대적하여 싸우려고 하지 않고 맨발로 울면서 도망을 갔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자신을 배반한 것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별로 알고 달게 받은 것입니다.
사울의 집안사람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쫓겨 가는 다윗을 향해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당장 그 사람을 잡아 죽일 능력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저주하는 것임을 알고 달게 받았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일을 당하면서도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으로 한한 벌을 달게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당하면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 핑계를 대고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들은 다 나의 잘못으로 알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고 그 괴로움을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2) 내 뜻을 다 이루리라
죄에 대한 다윗의 그런 자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이중적인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그의 왕위를 자손들에게 잘 계승시켜서 후손으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지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떠나거나 이런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떠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잘못하는 일이 있어서 벌을 받기도 많이 받고 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임무는 그의 삶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나서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평생 통감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평생 외치고 살았습니다.
시편에 보시면 대부분의 시가 다윗이 쓴 시이고 많은 부분들이 죄에 대한 회개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밧세바를 범한 죄를 지적 받은 후에 지은 시가 시편 51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지를 고백합니다. 심지어 어머니가 죄 중에서 자신을 잉태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이 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피 흘린 죄에서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뿐이심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삶을 통해 그가 지은 죄를 통하여 구원의 하나님이 필요함을 고백하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하여 구원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였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외모나 우리의 선행이나 우리가 착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기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실수를 할 때 잘못을 했을 때 핑계나 변명을 하지 말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됩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나의 잘못으로 인한 징계라고 생각하고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런 부족한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늘 생각하시고 이 구원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찰리 채플린의 말과 거꾸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멀리서 볼 때는 참 힘들게 사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우리를 알고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위대한 믿음의 진가를 알고 나면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최고 행복한 길을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양향모목사 / 행 13:20-23
요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지금부터 약 3-4천여 년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 연대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냥 대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나와서 애굽에서 살다가 다시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살게 된 그 세월을 약 450년이라고 했습니다. 그 450년을 가나안 정복부터 다윗 왕 때까지로 계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시기도 대략적으로 450여년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시대의 시작부터 다윗 왕까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후 일천여년이 지난 후에 오시는 예수님까지 언급을 하고 있지만 다윗 왕의 통치 시기까지 언급하고 그 후손으로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20절 말씀에 기록된 사사시대의 형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사’(士師, judge)란 ‘다스리다’, ‘재판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로 구약시대에 선지자, 제사장, 왕직을 겸한 막강한 지도자를 말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부터 사울 왕을 세울 때까지 약 35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지도자들이 사사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에 이 사람들의 활약상이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사들을 대략 12명으로 보고 활약을 많이 한 여섯 명의 대사사와 비교적 활약이 적은 여섯 명의 소사사로 나눕니다. 여섯 명의 대사사는 옷니엘(삿3:7-11), 에훗(3:12-30), 드보라(4~5장), 기드온(6:1~8:32), 입다(10:6~ 12:7), 삼손(13~16장)을 말합니다. 여섯 명의 소사사는 삼갈(3:31이하), 돌라(10:1,2), 야일(10:3-5), 입산(12:8-10), 엘론(12:11,12), 압돈(12:13-15)을 말합니다. 이 외에도 바락(삿4:6-22)이라는 사람까지 사사에 넣어 13사사로 간주하기도 하며, 사무엘도 사사로 간주하고 사무엘의 두 아들도 사사로 호칭했기 때문에 이들 모두 합하면 16명이 됩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이 사사들의 면면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대략 시대적인 상황과 우리가 받을 교훈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후에 사사를 주셨더니
본문 20절에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 후란 여호수아가 죽고 난 그 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 사사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 사사시대가 사무엘 선지자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사사시대의 특징을 “불순종, 심판, 회개, 구원”으로 봅니다.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주변 국가들을 통해서 심판하시고 그 심판을 견디기 어려워서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사사를 세워서 그들을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1) 불순종
사사기 2장에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2:11-1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우상 숭배이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가장 악한 일이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여 따로 세우고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들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우상 섬기는 곳에서 불러내서 따로 세웠고 그들이 우상숭배의 본거지인 애굽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종이 되었을 때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탈출시키셨습니다.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실 때도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사람들을 모조리 다 죽이심으로 우상숭배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신신당부를 한 것도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신을 택하든지, 가나안 땅에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을 택하든지, 오직 하나님만 섬기든지 선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숭배를 하지 말 것을 간곡하게 당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약속을 어기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지금 그들 앞에서 그들을 도와주고 있는데 바알이나 아스다롯 같은 신을 섬기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비슷하게 선하고 의롭고 그들을 도와주는 신이 있으면 그들을 섬기라고 하겠지만 순 가짜 신들은 그것도 그들을 유혹하여서 악하게 만들고 멸망 길로 달려가게 하는 사탄의 졸개들을 신이라고 따르는 것을 보고 정말로 안타까운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사시기를 읽어보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니라”(삿3:12, 4:1, 6: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10:6) 제가 자세하게 끝까지 체크하지 못했지만 이런 말씀이 계속 반복됩니다.
악을 행하고 벌을 받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고 난 후에 또 다시 악을 행하고 벌을 받고 하는 것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벌을 받고 고생한 그 사람이 다시 똑 같은 악을 행하였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 후손들이 조상들이 지은 죄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버지께 아버지의 경험담을 듣고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인지 그 결과로 받는 벌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또 그 전철을 밟아서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께서 제일 악하다고 보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다른 죄들은 쉽게 용서를 하시지만 우상숭배만큼은 반드시 심판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도 창조하시고 수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런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사탄의 편에서고 사탄의 졸개들인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지 말아할 악한 일은 배신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나를 사랑하고 은혜를 베푼 사람을 배신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악한 일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이나 가족을 배신하는 것이 큰 죄로 여기는 것은 그들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나를 길러주신 부모님을 배반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을 배신으로 보시고 가장 큰 죄악이라고 하시며 그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신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주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그저 육신이 좀 아프고 하던 사업 좀 잘못되고 이런저런 불행한 일이 닥치고 하는 그런 정도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사기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삿2:13-15)
이스라엘 주변에는 이스라엘을 시샘하는 민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이스라엘을 쳐서 자기들이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지켜주시고 전쟁에 이기게 해주셔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니까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대적자들의 편이 되어주심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넘기시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신데 이렇게 비참하게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가 얼마나 큰 죄이며 얼마나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변의 원수 같은 나라들의 편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참하게 죽게 하고 전쟁에 패하게 하고 그들의 노예가 되게 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진노의 심판입니다.
3) 회개
이스라엘 백성들 회개를 하는 것을 보면 좀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진심으로 자기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 다시는 그런 죄를 절대로 짓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금식을 하든지 재를 둘러쓰고 앉아서 회개를 하든지 해야 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냥 고통을 당한 후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고만 했습니다. 사사기 10장에만 한번 이렇게 회개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개는 하나님 힘듭니다. 살려주세요 라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얼른 사사를 세워서 그들을 구원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회개의 시늉만 내면 얼른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죄와 너무나 가까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의 마음이 타락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한 한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악하게 생각하는 우상숭배의 죄는 절대로 짓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은 죄들에 대해서 얼른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킬 때 이왕이면 바른 회개를 해야 합니다. 징계를 당하기 전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징계를 당하지 않고 최후의 심판까지 그냥 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죄를 짓고 뭐가 잘 안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 자신을 살피고 회개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잘 살피지 못합니다. 자신이 주인공이고 자기가 하는 일은 다 옳은 일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진실 되게 충고해주는 사람들의 말도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 착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은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나의 잘못을 말해주는 사람을 고맙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회개를 할 때 확실하게 하셔야 합니다. 뭘 잘못했는가를 확실히 알고 그 잘못에 대해서 고백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야 합니다.
4) 구원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사사들을 등용하여 사사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사사기에는 사사들을 통한 구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삿3: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삿3:15).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전쟁에 패해서 이방나라에게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에서 구원입니다. 사사를 세워서 그들을 무찌르고 다시 해방된 나라 자유로운 나라가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신 것 같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세우시고 사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통한 구원은 그들이 다시 죄에 빠지게 하고 또 심판을 받아야 하고 또 회개와 구원이 반복되는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고 영원한 구원입니다.
우리가 받을 교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일어난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특별히 성경에 기록하신 역사들은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도 그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진리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사사시대의 여러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는 교훈이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그냥 그 시대에 얼어난 그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으면 안 됩니다. 사사시대의 악한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구원해주셨는데 그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사기에서 좀 특이할만한 기록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해주셨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비교적 하나님을 잘 섬겼지만 그런 전쟁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믿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3장 1절에서 4절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사는 원주민들을 다 죽여서 없애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원주민들을 남겨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용인하시고 넘어가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을 옆에 두고도 그들과 종족을 섞지 않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따라 섬기지 않는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방인들과 혼인을 하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많은 악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을 높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온갖 우상들을 하나님 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 곁에 남겨두신 이유는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람하고 섬기는가를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고난들 우리 앞에 있는 걱정거리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는 도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르는가를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 승리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소중히 여기며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사시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시대의 죄악상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악한 세력들 악한 환경들이 다 우리를 시험하는 도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잊지 마시고 끝까지 믿음을 붙잡고 승리하는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
행 13장 20~22절 / 금암교회
할렐루야!
오늘날 개인도 사회도 도시도, 국가도 기업도 벤치마킹의 열풍이 일고 있습니다.
보다 성공적이며, 행복한 개인 가정, 사회, 도시, 기업, 더 나아가 국가까지도 벤치마킹의 표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성장하는 교회를 벤치마킹하려고 하는 열기가 대단합니다.
최근에 교계에는 다윗이라는 인물에 대해 새로운 조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이라는 사람이 과거 역사의 한 인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다윗의 리더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윗의 섬기는 리더쉽, 양치기 리더쉽, 청지기 리더쉽, CEO 다윗 등 다윗의 리더쉽에 관한 책들이 봇물 터지듯 발간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인물입니까?
오늘 성경에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다윗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이후에 왕을 구하거늘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사십 년간 세우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사사 시대가 끝나고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 악하므로 그를 폐하시고 새로운 가문에서 왕을 세우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이새의 팔형제 중 말째인 어린 목동 다윗이었습니다.
일개 어린 목동에 불과하였던 다윗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강력한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일 왕국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는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위대하게 쓰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만 하면 위대하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분명 다윗은 그 외양이 탁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삼상 16:7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toronto)에 있는 회중 교회의 오스왈드 J. 스미스(Oswald J. Smith) 목사님은 30세 되던 해 생일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특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스미스 목사가 구하지도 않은 유명한 목사도 되게 해 주시고, 유명한 부흥사도 되게 하시고, 한때 세계 최대의 교회를 맡게도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 줄 모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눈에만 들어도 복된 일인데 하물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고,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다윗은 참 믿음의 사람이었고,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다윗이 참 믿음의 사람인 것은 골리앗과이 싸움에서 이미 나타났습니다.
블렛셋과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나라에는 엄청나게 크고 힘센 거인 골리앗 장군이 있어서 아무도 능히 당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이렇다 하는 용맹한 장수들도 모두 사시나무 떨 듯 하고만 있지 감히 그와 싸우려고 나서질 않았습니다.
이때 어린 소년 다윗이 형들을 찾아 갔다가 골리앗이 하나님을 향하여 저주하고 욕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어린 마음에 의분이 솟아 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욕됨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 다윗의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아니, 감히 하나님을 욕하다니’라고 하며 죽음도 불사하고 자청해서 나가서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울왕도 ‘그는 큰 용사요, 너는 어린 소년인데 어찌 싸울 수 있겠느냐’고 말렸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저 놈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싸우겠노라’고 하면서 마음의 불이 붙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양떼를 칠 때에도 사자와 곰이 나타나면 따라 가서 그 물고 가는 새끼를 빼앗고 쳐 죽였습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 17:36절)라고 하며 싸웠습니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지팡이 하나와 물맷돌 몇 개와 물매만 가지고 나갔습니다.
골리앗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비웃고 조롱했으나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화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절)고 하면서 물매를 잡아 돌리다가 던질 때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서 꽝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지켜 본 블레셋 군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저리로 도망가고 소년 다윗은 달려가 골리앗의 칼을 빼서 그 목을 잘라 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욕된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의 마음의 중심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고자 하는 마음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목숨까지 내걸고 골리앗과 싸운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불타는 마음이 있어서 믿음으로 나가 싸웠던 것입니다.
다윗은 일사각오의 참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고 희생하고자 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도 우리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 48:11절에 보면 “내가 나를 위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고전 10:31절에도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삼상 2:30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은 참 믿음을 가지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2.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알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회개하였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알고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허물이 없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사울 왕 못지않게 큰 죄를 지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왕이 되고 나서 평안하게 궁궐에 거할 때, 자고 일어나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짐승같은 마음을 절제하지 못해서 데려다 범죄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하필이면 그 여자가 임신을 해버렸습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일선에 나가 싸우고 있는 그 여자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오게 해서 집에 들어가 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충성된 장군이라 “여호와의 법궤가 지금 들판에 있고 내 부하들과 상관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내가 어찌 편안히 집에 들어가 아내와 더불어 잠을 자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므로, 결국 위험한 사지로 내몰아 적과 싸우다가 죽게 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간음죄, 살인죄, 권력 남용죄 등을 다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명의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와서 죄를 깨우쳐 주고 책망할 때 그는 체면이나 위신같은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즉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철저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면 남의 말을 듣지 않을려고 합니다.
왕권을 가지고 있는데, 일개 무명의 선지자가 책망하는 데 왕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지은 시가 그 유명한 시편 51편 회개의 시입니다.
그는 그 일로 말미암아 그 후에 고통을 많이 당할 때에도 자기의 죄값이라고 겸손히 회개했습니다.
가장 사랑하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궁궐에 있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갈 때 사울의 집 족속 가운데 시므이란 사람이 돌을 던지며 저주하고 욕함으로, 아비새 장군이 즉시 머리를 쳐 죽이려고 할 때에도 못하게 말렸습니다.(삼하 16:5~9절)
결국 이렇게 깊이 회개하는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왕권도 위신도 다 회복시켜 주시고 그를 저주하던 시므이도 다시 와서 그에게 무릎 끓고 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히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유명한 사무엘 같은 선지자가 간곡히 말하는데도 고집을 부리고 회개하지 않아서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면서 그를 페위시키고 말았습니다.
대하 7: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회복시켜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솔직하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위치에 올라가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속성이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인정하고 하물의 사함을 구할 수 있을 때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에 좀더 솔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였습니다. 즉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다윗은 어떤 인물입니까?
일등공신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런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가 반역을 도모하였더라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사울 왕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 지쳐서 군사들과 함께 엔게디의 굴속에 들어가 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 굴속에 다윗과 그 부하들이 숨어 있었는데 부하들은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당장 목을 쳐 죽이자고 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을 내가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사울의 옷자락만을 칼로 베어 가지고 나가 멀리 서서 외쳤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당신은 내 생명을 해하려 하나 나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그때 사울왕은 소리 높여 울며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또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 다녔습니다.
한 번은 십 황무지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밤에 군사들이 빙 둘러 진을 친 가운데 사울은 안심하고 그 가운데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다윗은 그 가운데로 들어가 사울의 물병과 창만 가지고 나온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사울과 달리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마 6:15절에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빌 4: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처럼 진정 관용하는 사람은 널리 용서하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4. 비천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겸손했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팔형제 중 막내 아들로 양떼를 치던 비천한 목동이었는데 하나님이 그 중심을 보시고 왕으로 삼고 존귀한 사람이 되게 해 주셨지만 그는 늘 자기의 원래 신분은 비천한 자였음을 잊지 않고 겸손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까닭입니다.
삼하 7:18,19절에 보면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울은 처음엔 겸손했으나, 왕이 된 뒤에는 교만하고 고집세고 완고해서 사람의 충고도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신 32:7절에도 보면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비천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겸비하는 자만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돌리며 또한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베푸시는 온갖 영예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느 날 부자가 되면 가난했던 시절을 잊고 삽니다.
어느 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낮은 자리에 있던 자신을 잊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며 지금의 ‘나’ 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참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겸손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이전의 자신의 과거를 기억함으로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다윗 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되어서 이 시대 크게 쓰임받고 다윗처럼 탁월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마음에 합한 다윗
행 13장 20~22절 / 성창용목사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대부분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마음에 함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등장하는 다윗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목동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붙들림을 받아 승리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말씀하셨을까요?
첫째,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얌전하고 조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잘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내가 흙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잘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윗의 일생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내어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의 인생이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방패시요, 목자요, 구원이시요, 나의 영광이요”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는 그보다 크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바라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했기에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둘째,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교육의 대헌장은 신명기 6:5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진정으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루에도 7번씩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한 일은 여호와의 법궤를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통일왕국의 왕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매사가 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과 상관하여 생각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잘 듣고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우리아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당시 통일왕국을 이루어 강력한 왕권을 갖고 있었던 다윗에게 뭐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가 정죄한다 해도 무시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말에 급히 엎드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잘 들을 줄 알고 회개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보다 회개치 않는 자를 더 미워하십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회개하여 승리하는 인생을 살았고 가룟유다는 회개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문제는 회개했느냐 회개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겸손한 믿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회개할 줄 아는 인생으로 승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성도여러분도 다윗과 같이 첫사랑을 회복하고 범죄했으면 회개하여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켜 더욱 크게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
행 13장 20~23절 / 류영모목사
I. 쓰임받는 행복
어릴 때 시골교회에서 부흥강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시골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이삿짐을 내리는데 놋으로 만든 오강단지 하나가 나오더랍니다. 여러분 오강 단지 아십니까? 옛날 방마다 놓여있던 소위 이동용 화장실입니다. 그 교회사택은 요즘 아파트처럼 집안에 수세식 화장실을 시설한 터이라 무거운 놋으로 만든 오강단지가 필요할 일이 없지요. 마침 주물공장을 운영하시던 장로님이 교회에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이 놋 오강단지를 들고가 풀무에 녹여 밥그릇, 국그릇을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은 그 교회에 계시는 동안 그 놋그릇에 밥 담고 국 담아 잡수셨더랍니다. 부흥강사의 얘기는 오강단지 같은 우리가 성령안에서, 예수의 보혈안에서 녹아 밥그릇되고 국그릇 되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오강단지로 남아 있어 가지고는 아파트 문화에 쓰임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시대에 따라 바뀔 줄 알아야 하고, 비전에 따라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본질, 신앙인의 본질에 맞게끔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주님의 심장속에 있던 바로 그 교회를 찾아가는 몸부림을 하고 있습니다. 소위 셀교회 운동입니다. 교회의 비전과 사명이 셀교회의 회복에 있다면 내 성향도, 사명도, 비전도, 꿈도 거기에 맞게끔 바뀌어야 하나님이 쓰십니다. 교회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몇 달동안 「은혜의 영성」 그리고 「복의 근원」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다윗이란 인물을 중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란 주제로 몇 시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을 연구하려면 구약성경의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등 무려 6권의 책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외에도 시편의 많은 부분이 다윗의 삶과 그 신앙을 조명해 줍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시작하며 마태복음 1:1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그러므로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들여다 본 우리가 다윗을 살펴본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 시간 저는 하나님께 솔직하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나님,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다윗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만한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이 선택했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첫째, 이 두 질문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셋째, 아무리 약자라도 하나님이 들어 쓰실 때 그는 위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일찍이 루소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릇이라고 다 그릇이 아닙니다. 쓰임 받고 사는 그릇이 있고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보면 큰그릇이 쓰임받는 것이 아니고 아침 저녁으로 들랑날랑 거리며 국 담고, 밥 담고, 반찬 담는 - 쓰임받는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쓰임받는 그릇을 만들지 아니하고 너도 나도 큰 그릇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사회가 이렇게 어지러운 것이고, 교회가 신령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큰 함백이 같은 것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김치나 담글 때 옆집에서 빌려다 써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들랑거리는 간장 종기는 쓰임을 받는 거지요.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간 인도네시아 오바쟈 목사는 ‘You can be a leader! 당신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라는 구호를 외쳤고, 그 구호를 들은 교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전에 사로잡혀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셀교회가 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유능한 사람인데도 버림당한 사람이 있고 무능한 사람인데도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버림받은 사람의 대표로 사울을 들고 있고 쓰임 받은 사람의 대표로 다윗을 들고 있습니다.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내가 그를 쓰겠다」- 다윗을 쓰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버리시고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십니까?
II. 하나님은 약자를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첫 번째 이유는 대단히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다윗이 약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들어 쓰십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갑니다. 이새는 일곱 아들과 함께 몸을 성결하게 하고 사무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 8형제 중 막내로서 아버지도 그에게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왕이 될 면접시험에 다윗은 빠져 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묻기를 ‘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의 대답이 사무엘상 16:11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 말째라는 말은, 단순히 형제 서열상 말째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약자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했습니다. 약자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기 자신이 말째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약한 자,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사울 임금이 버림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왕이라고 제사장이 하는 제사까지 다 집례할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는 자신을 위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울 임금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약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큰 자”라는 이름을 바꾸어 “작은 자” 즉 바울 이라고 고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했고, 성도 중에서도 작은 자라고 말했으며,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큰 자로 남아 있을 때 친히 나타나 대적하셨고 작아 질 때 크게 들어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작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스스로 말째라고 여기는 사람을 첫째로 들어 쓰십니다.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말째가 하나 있기는 한데 만나 보나마나입니다. 신통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형님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말째야, 우리 형제들 가운데 임금이 나올 모양이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러 갈테니 넌 여기서 양을 치고 있거라.”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형님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분명 난 아니야. 난 심부름이나 해야지.’
보십시오. 그의 부모는 그를 부정했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자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다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No 하고 당신 자신마저도 No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Yes 하시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역자,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믿습니까?
III. 하나님은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두 번째, 우리를 주목시키는 단어는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이 나온다면 다윗도 관심을 가지고 쫓아 왔을 법도 한데 다윗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습니다.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옥중에서 모범적인 죄수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고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깊은 밤 성전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베드로는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 쓰셨습니다.
특별히 “양을 치고 있었다”고 하는 말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은 밖에서 자기 양떼를 치다가 천사의 음성을 듣고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다윗이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장차 하나님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사람도 쓰십니다. 무능한 사람도 쓰십니다. 죄가 많은 사람도 쓰십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 열정이 없는 세상,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쓰는 법이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어린 양입니다. 때문에 자기라는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경험하므로
-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성실한 자녀가 되어 자신이라는 어린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 자신의 믿음을 잘 키켜야 합니다.
- 그리고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동생을 지키기는 커녕 동생을 해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때 가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중요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벨은 아버지 어머니나 지키는 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해쳐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우리의 셀목장 가족을, 믿음의 가족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맡겨진 사역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했느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형님들이 다 떠나간 그 자리에서 혼자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IV.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가 사무엘상 16:7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의 일곱 아들을 다 거절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중심이 어쨌다는 이야기입니까? 다윗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멋진 다큐멘타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모두 주눅이 들어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나타나 사울 임금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나 정도의 용맹이면 해 볼만 합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일꾼들의 눈에는 일이 보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보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적장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계속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 믿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블레셋의 거인이 아닙니다. 적군의 힘이 아닙니다. 사울 임금의 권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형님들을 전술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을 보셨습니다.
옳습니다. 역대하 16:9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어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로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임금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나도 저를 버렸다” (삼상15:23)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높이실 때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이제 결론은 분명합니다. 인본주의 - 자기 중심, 자기 고집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신본주의 -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 것이냐 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버리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크게 쓰는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갈림길이 됩니다.
골리앗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골리앗이 되고, 다윗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 가치관 / 칼, 창, 단창 큰 키, 외모 / 자신의 힘
다윗 가치관 /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을 의지함, 자신의 약함 하나님의 능력
J. L. 코미스키라는 사람이 전 세계에서 쓰임 받는 셀교회 리더를 연구해 보니까, 그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은사가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얼마만큼 영광스러운 교제를 가지는가? 내게 맡겨준 사람들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신 사명과 소명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며 살아가는가? 이것만이 쓰임 받는 지도자와 버림 받는 지도자의 준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성령님을 요청하십시오. 환영하십시오. 무한대로 여러분의 삶을 열어놓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만큼 하나님 앞에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몇 주전 한국을 다녀간 피터 와그너 박사는 “21세기는 신사도적 교회와 그 사람들에 의해 시대적인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 중에 세상 학교에서는 많은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성령학교에서 성령을 배운 사람들이 나타나 세계교회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사실 19세기 많이 배우지 못한 D.L. 무디에 의해 부흥운동이 주도되었듯이, 지금 우리시대 성령운동도 많이 배우지 않은 남미의 카를로스 아나콘디아 같은 사람들에 의해 강력한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꿈을 가지십시오.
V.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을 쓰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상 16:13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 “이 날부터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개역성경 사무엘상 18:10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자가 되었다(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야료(惹鬧)란 이유 없이 생트집을 잡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귀신에게 붙들리면 귀신의 종이 되고 성령에 감동되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 가운데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다윗은 궁궐에서 쫓겨 나는 것보다 주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은 왕관을 거두어 가는 것 보다 성령을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재물과 권세를 빼앗기는 것보다 주의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 더 두려운 줄 알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했던 다윗은 하나님을 몹시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에 실린 다윗의 시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는 시로써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들여올 때에는 너무 좋아서 그 행렬을 따르며 부끄러움도 잊은 채 춤을 추었습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신앙적 감동과 시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극히 예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다윗은 철저하게 교회 중심의 사람이요 성전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VI. 다섯째,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까지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일로 인해 사울 임금의 시기를 받아 쫓겨다녀야만 했던 고통스런 훈련의 시간들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임금의 미움을 받은 다윗은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정식 왕이 되기까지 자그마치 15년간을 쫓겨다니는데 때로는 엔게디 굴속으로, 때론 이웃나라 블레셋과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팔레스타인 산지, 평야, 사막 구석구석 사울의 군사를 피하여 도망 다녔지만 그것이 도망 다닌 생활이 아니라 전국의 곳곳, 이웃나라까지 군사적 지리를 몸소 답사하고 익히는 훈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성경에 분명하고도 똑똑히 기록되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라” (삼상 16:18, 18:28)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이유였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훈련의 기회, 자신이 치루어야 할 고통스런 댓가를 흔쾌히 치루어 갑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영광스런 교회를 향한 걸음을 서둘지도 않고 미루지도 않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걸음마다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한 일꾼들을 통해 그 짐을 감당토록 하셨습니다. 꿈땅비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댓가 지불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이 일은 멋지게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만사엔 때가 있고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철학자 칸트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남자가 청혼을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칸트가 청혼을 하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그녀가 먼저 청혼한 것이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한 칸트는 그 뒤부터 그녀와의 결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선 머리로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사랑과 결혼에 관한 책을 모조리 찾아 읽었고, 자신의 노트에 결혼에 대해서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을 하나하나 적어서 분석했습니다.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 이젠 그녀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이 보다 더 신중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자신이 내린 신중하고 합리적인 결정에 그는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만큼 그 누구보다도 근사하게 그녀에게 청혼하리라.’ 마음먹은 그는 다음 날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내 딸은 이미 결혼해서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소. 당신은 너무 늦게 왔군요.?
VII.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생을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1.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말째를 부르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이다 부정하고 No! 라고 말해도 하나님이 긍정하시고 Yes! 하시면 당신의 생은 긍정이 될 수 있습니다.
2. 당신 자신을 잘 지키십시오. 당신에게 주어진 양떼들, 하나님과의 관계, 당신의 영성, 당신의 믿음, 당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소중히 지키십시오.
3. 하나님은 당신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 땅의 가치관, 골리앗의 가치관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늘의 가치관, 다윗 가치관으로 사십시오. 예수님 이름의 권세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4. 성령의 임재와 권능, 그분의 감동하심과 함께 하심을 잃지 마십시오. 역사는 그분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그 분의 자원과 능력을 구하십시오.
5. 이 일을 이루기까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 받기까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사람
행 13장 20~23절 / 류영모목사
I. 쓰임받는 행복
프로이드는 삶의 원동력을 쾌락이라고 보았습니다.
애둘러는 돈의 힘이나 종교의 힘, 권력의 힘 등 파우워가 삶의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빅토 프랭클은 「로고테라피」- 의미요법이라는 책에서 인생의 상처를 치료하는 힘도 삶의 원동력도 바로 의미 meaning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에서 의미를 느낄 때 어떤 고통도 시련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 고통의 의미를 가르쳐 주면 그것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느낄 수 없을 때 작은 시련 앞에 우리는 금방 지치고 쓰러지게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에게 결혼한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이 아이를 낳고 아이 하나를 키우느라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코비 아빠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아빠, 내 아이에게 몸과 시간을 다 빼앗기고 있어요. 난 언제 내 꿈을 이루어요?" "딸아, 너는 지금 가장 소중한 일을 하고 있다. 시간에 쫓기지 말아라. 그 아이와 함께 네 꿈을 이루어 가거라.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방향이다. 네가 가는 방향이 옳다면 그것을 감사하고 즐겨라."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일엔 의미가 있고 세상 모든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목적이 있고 연필 한 자루에게도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에 맞게 살 때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3장 22절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다. 내 뜻을 다 이루리라. 내 목적을, 내 꿈을,
내 비전을 이루리라."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사람」「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일찍이 루소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릇이라고 다 그릇이 아닙니다. 쓰임 받고 사는 그릇이 있고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보면 큰그릇이 쓰임받는 것이 아니고 아침 저녁으로 들랑날랑 거리며 국 담고, 밥 담고, 반찬 담는 그릇 - 쓰임받는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쓰임받는 그릇을 만들지 아니하고 너도 나도 큰 그릇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사회가 이렇게 어지러운 것이고, 교회가 신령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큰 드럼통 같은 것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김치나 담글 때 옆집에서 빌려다 써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밥상마다 오르내리며 쓰임받는 그릇들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셀목회 전도자 인도네시아 오바쟈 목사는 You can be a leader! 당신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라는 구호를 외쳤고, 그 구호를 들은 교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전에 사로잡혀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셀교회가 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유능한 사람인데도 버림당한 사람이 있고 무능한 사람인데도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버림받은 사람의 대표로 사울을 들고 있고 쓰임 받은 사람의 대표로 다윗을 들고 있습니다.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13:22)
「내가 그를 쓰겠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시겠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버리시고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교회를 쓰실까요?
II. 교회의 존재 목적 ① 예배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고 했을 때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교회가 언제나 기도하고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교회의 가치나 종교의 가치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존재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몇 년 동안 고생해 완성한 최후의 만찬을 공개하기 위해 지인들을 초청했습니다. 드디어 천이 벗겨지고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한 친구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군. 예수의 손에 들린 저 광채 나는 유리잔을 보세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붓을 들어 유리잔 부분을 뭉개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을 향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실패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시선이 예수의 얼굴에 집중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유리잔에 시선이 모아졌다면 그것은 제 의도를 벗어난 것이지요." 그는 유리잔이 예수의 표정을 가리지 않도록 다시 그림을 그려 완성시켰습니다.
현대인들은 종종 예수의 손에 들린 광채 나는 유리잔에 환호하는 우를 범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예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 그분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목적도 예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회가 예배당을 잘 짓는 이유도 교인들이 모두 함께 모여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매 예배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고 싶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고 싶습니다. 비전 채플을 설계하면서 제 머릿속에는 온통 영광스런 예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어떤 예배당이, 얼마만큼 큰 예배당이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경험하지 못했던 영광스런 예배를 드리도록 해줄까? 영광스런 찬송, 영광스런 임재를 맛보기 위해 어떤 예배당을 지을까?
이것은 예배당이 커야 한다는 뜻도 화려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가 성막을 짓는 심장으로 다윗이 성전을 준비하는 심장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처소를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는 교회가 존재하는 첫 번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III. 교회의 존재 목적 ② 영혼구원
교회가 이땅에 존재하는 두 번째 목적은 천국복음 -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사역이 말씀을 가르치고 천국복음을 선포하신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그 머리의 뜻을 잘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 즉 천국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합니다.
오늘 구원받은 우리가 교회에 나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양식입니다.
-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얻습니다.
- 말씀을 배우면 예수님의 성품을 닮습니다.
- 말씀을 통하여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 말씀은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됩니다.
- 말씀이 구원의 확신을 줍니다.
- 말씀은 치유의 능력입니다.
- 말씀은 희망을 줍니다.
- 말씀은 인생의 안내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에 옵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꼭 찾고 싶어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입니다. 한 방문객들이 이 유명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인도해주던 안내자가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 무덤에 묻혀 있는 지나간 세기의 찬란한 영웅들의 삶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또 현재 그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끝난 후에 안내자는 방문객들을 향해서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아이오아 주에서 이곳을 방문했던 어느 여신도 한 사람이 안내자를 향해서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과 내력에 관해서 훌륭한 설명을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한가지만 하겠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도, 한소망교회도, 비전채플도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잘 섬기고 상처로 얼룩진 이 땅을 찾아가 섬기는 이유도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내일의 천국가족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엄밀히 말하면 친목단체나 구제기관이나 사회사업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가족을 만들어 가기 위해 교회는 존재합니다.
IV. 교회의 존재 목적 ③ 한민족의 소망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고 희망의 빛이 솟았습니다. 해적떼들이 변하여 문명국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던 식인종들이 변하여 예배하고 기도하는 부족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민족지도자들의 산실이었습니다.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꿈을 얻는 곳이었습니다.
고 함석헌 선생은 일찍이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책에서 한민족 5000년 고난의 역사는 십자가에 의해서만 풀려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밝혀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만 한민족은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소망교회 비전채플이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모든 젊은이들이 꿈을 꾸는 동산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민족의 지도자들을 만들어 내는 곳
- 세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세계적인 인물들이 태어나는 곳
-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동참하는 인물들이 자라나는 곳
- 그 옛날 한국교회 본래의 사명,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한민족 희망의 동산이 되고 싶습니다.
나아가 넘어지고 상하고 깨어진 한국교회의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상처 나고 쓰러진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팔이 되고 싶습니다. 두 날개로 비상하는 우리교회의 꿈이 어린교회들을 함께 안아 날아 오르고 싶습니다. 고양, 파주, 김포와 문산 - 경기 북부 이 지역이 통일 한국 영적 성지가 되고 한국교회 부흥의 새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교회가 바로 이곳에 세워진 목적이요 존재 목적이요 비전채플을 세우는 이유입니다.
한소망교회는 어려운 시대에 어렵사리 세워진 교회입니다. 한소망교회의 움직임 하나 하나는 한국교회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여 부흥하는 교회의 비전, 성경적인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셀교회를 향한 몸부림,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는 권세있는 교회를 찾고 싶었던 열정...
- 이 모든 것이 한국교회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실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비전채플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새시대, 새비전, 새그릇을 세우는 한소망 가족의 기도입니다. 한소망 모든 가족이 마음을 담아 세워가야 할 역사적 과제입니다. 힘이 들다고 쓰러지지 마십시요. 내 맘과 다르다고 너무 쉽게 비판도 하지 마십시요. 어떤이는 기도로, 어떤이는 격려로, 어떤이는 무거운 헌신으로... 각자의 은사를 따라 충성해야 합니다. -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이요 비전입니다.
V.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 사람 다윗
"다윗을 보니 그는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다. 그를 통해 내 뜻을 이루리라."
"한소망교회를 보니 내 마음에 꼭 맞는 교회이다. 내 목적을 이루리라."
"한소망교회 아무개를 보니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다. 그를 통해 내 비전을 이루리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도구로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은 약자를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첫 번째 이유는 대단히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다윗이 약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들어 쓰십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갑니다. 이새는 일곱 아들과 함께 몸을 성결하게 하고 사무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 8형제 중 막내로서 아버지도 그에게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왕이 될 면접시험에 다윗은 빠져 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묻기를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의 대답이 사무엘상 16:11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 막내라는 말은, 단순히 형제 서열상 막내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약자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했습니다. 약자를 택했습니다.
"막내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막내가 하나 있기는 한데 만나 보나마나입니다. 신통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형님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막내야, 우리 형제들 가운데 임금이 나올 모양이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러 갈테니 넌 여기서 양을 치고 있거라."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형님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분명 난 아니야. 난 심부름이나 해야지.
보십시오. 그의 부모는 그를 부정했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자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다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2. 하나님은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두 번째, 우리를 주목시키는 단어는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사람도 쓰십니다. 무능한 사람도 쓰십니다. 죄가 많은 사람도 쓰십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 열정이 없는 세상,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쓰는 법이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어린 양입니다. 때문에 자기라는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우리의 셀목장 가족을, 믿음의 가족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맡겨진 사역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이새의 일곱 아들을 다 거절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중심이 어쨌다는 이야기입니까?
사무엘상 17장 적장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계속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을 보셨습니다.
4.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상 16:13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 가운데 이런 말을 합니다.
"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다윗은 궁궐에서 쫓겨나는 것보다 주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은 왕관을 거두어 가는 것 보다 성령을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재물과 권세를 빼앗기는 것보다 주의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 더 두려운 줄 알고 살았습니다.
5.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까지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일로 인해 사울 임금의 시기를 받아 쫓겨다녀야만 했던 고통스런 훈련의 시간들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임금의 미움을 받은 다윗은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정식 왕이 되기까지 자그마치 15년간을 쫓겨다녔습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성경에 분명하고도 똑똑히 기록되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라"(삼상 16:18, 18:28)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우리 한소망교회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고 싶습니다.
1.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막내를 부르셨습니다. 연약한 우리교회를 당신의 뜻에 쓰실 것입니다.
2. 당신 자신을 잘 지키십시오. 당신에게 주어진 양떼들, 하나님과의 관계, 당신의 영성, 당신의 믿음, 당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소중히 지키십시오.
3. 하나님은 당신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4. 성령의 임재와 권능, 그분의 감동하심과 함께 하심을 잃지 마십시오.
5. 이 일을 이루기까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 받기까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우리교회 당신을 쓰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행 13장 20~23절 / 손상률목사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서 그가 의도하시는 역사를 경영의 중심에 세우십니다. 본문말씀 중에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발탁되어 선민 이스라엘 왕국의 뿌리가 되었고 그의 후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하였습니다(마 1:1). 일찍이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왕위에서 실각되었을 때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의 양을 치는 다윗을 불러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삼상 16:13). 시편 89:20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오늘날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의 표본입니다.
1.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눈높이를 낮추어 주셨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부족을 아시고 끌어올려 주시는 경우일 것입니다.
1) 선택을 받았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값없이 받는 혜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곧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호의를 의미합니다. 여기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신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을 이새의 아들에게 맞추어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분부를 받고 이새의 집에 찾아갔을 때 다윗은 그의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새의 여덟 아들 중 큰 아들 엘리압을 비롯하여 둘째와 셋째가 훨씬 더 잘 생기고 똑똑해 보여서 그들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째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삼상 16:6-13).
2) 긍휼을 입었습니다.
다윗은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 놓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불러들여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를 보내서 다윗의 죄를 지적하며 준엄한 심판을 예고하였습니다(삼하 12:7-13).
그 말씀대로 다윗은 일평생 값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베푸신 축복의 언약을 거두지는 않았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열병으로 앓다가 일주일 만에 죽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밧세바의 몸을 통해서 다른 아들 솔로몬을 허락하였습니다. 징벌 가운데 내려주신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범죄할 때 채찍을 들어 징벌하시지만 그래도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3) 하나님 나라의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많은 아들들 중에서 솔로몬을 후계로 세우고 이스라엘 나라 왕위를 이어가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그토록 소원하던 성전 건축도 솔로몬을 통하여 이루게 하였습니다(삼하 7:12-13).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구속(救贖)의 역사는 다윗과 그의 후손들로 이어져 오다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를 완성하였습니다. 이사야 55:4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열왕기상 15:5에 “다윗이 헷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1)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저를 불러 왕으로 세우시고 먼 훗날에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계획하심을 알고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사무엘하 7:18-20에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주 여호와는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하고 감격해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엄청나게 많은 물질을 바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역대상 29:14에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2) 자기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비춰지는 자기의 모습을 살핍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성실하게 자기 관리를 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여러 차례 창을 던지기도 하고 군사를 풀어 수색도 하였지만 그는 사울 왕을 원수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숨어 있는 굴 앞에서 사울이 잠든 것을 보고 아비새가 단칼에 죽이겠다고 하였을 때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해할 수 없다고 하며 자기의 금도를 지켰습니다(삼상 24:5-7). 또 요압의 반란으로 피난을 갈 때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부었을 때도 그는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하며 묵묵히 견디었습니다(삼하 16:11).
3)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다윗은 책임감이 투철하였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가 베들레헴 목장에서 양을 지킬 때 사나운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물어가면 사자의 수염을 잡고 주먹으로 턱을 때려눕히기도 하였습니다(삼상 17:34-36).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불레셋 장수 골리앗을 만났을 때도 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물맷돌을 던져 쓰러뜨렸습니다(삼상 17:49). 훗날 사울 왕의 신하로 발탁 되었을 때 항상 왕의 옆에서 수금을 타며 왕을 즐겁게 해 주었고(삼상 16:23). 사울 왕이 어려운 일을 시켰을 때도 목숨을 걸고 그 일을 수행하였습니다(삼상 18:25-30). 성경은 성도가 육신의 상전을 섬길 때도 하나님께 하듯 진실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라고 하였습니다(엡 6:5-8).
3. 축복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전무후무한 축복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역사의 주역이 되어 인류에게 미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였습니다. 역대상 29:26-30에는 다윗이 받은 축복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장수와 부귀의 복입니다.
역대상 29:28에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복 가운데 오래 사는 것을 가장 으뜸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무조건 오래 사는 것만 복이라고 하기는 곤란합니다. 건강을 잃고 병약한 몸으로 오래 사는 것이나 가난하여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경우, 또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오래도록 살아 있는 것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나이가 많아서 늙었지만 재물에 부요하고 또 온갖 영화를 누렸으며 사는 날 동안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니 분명 행복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2) 계대(繼代)하는 축복입니다.
역대상 29:28절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의미심장한 유언을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2:3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복을 주시고 그의 생애에 전쟁을 치르지 않은 평화의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또 그를 통하여 자랑스러운 예루살렘 성전을 짓게 하였습니다(왕상 6:1-10).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을 보고 두로 왕 히람은 “오늘 여호와를 찬양할지로다 그가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사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도다”고 하며 축하했습니다(왕상 5:7).
3)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입니다.
역대상 29:29에 “다윗 왕의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견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글에 다 기록되고 또 그의 왕 된 일과 그의 권세와 그와 이스라엘과 온 세상 모든 나라의 지난날의 역사가 다 기록되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일대기가 선지자 사무엘과 나단과 갓에 의하여 책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랑스러운 일도 있고 그가 남긴 과오도 기록되어 있겠지만 그의 생애와 업적이 역사적인 자료가 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거울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한평생을 살면서 의미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성도의 생애는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의 증거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노경모목사(함께하는교회) / 행 13:21-23
내가 좋아하고, 내가 존경하며, 내가 높이 모시고 있는 분의 마음에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높으신 분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갖은 아첨을 다 부리고 심지어는 부당하게 요구하는 것 까지도 들어 주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대통령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관련된 사람들은 저마다 애를 쓰고 노력들을 합니다. 대통령의 마음에 맞아야, 쉬운 말로 말하면 대통령과 코드가 맞아야 대통령이 나를 부르시게 되고, 내가 높은 직책에 등용이 되고, 내가 출세를 하게되고...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에 한 가지 질문을 드릴테니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보고 스스로 답볍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 우리를 창조하신 분,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애를 썼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 바랄 것이 없게 됩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요.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남의 집에서 종노릇을 할 때에도, 심지어는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요셉을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다니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그들과 어뗳게 함께하셨고, 그들을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닌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무엘상 13장 14절입니다. 다같이 보시지요?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기록되어진 사람입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을까요? 우리가 참 궁금하지만 성경에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쭉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다윗의 성품을 통해서, 아, 이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구나?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첫째, 다윗은 기쁘게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섬기는 데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섬기는 생애였습니다. 어려서는 양을 섬겼습니다. 팔 형제가 갈이 살고 있었지만 다윗 혼자서 만이 들판에서 양을 칠 때가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칠 형제가 다 사무엘 앞에 섰을 때 다윗만 혼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1절을 봅시다.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다윗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더라도 다른 목동과 달랐습니다. 항상 양을 세 종류로 나주었습니다. 어린 양, 병든 양은 따로 기르면서 막 피어나는 연한 물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건강하나 아직 어린 양은 보통 풀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양들은 억센 풀을 먹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겁니다. "다윗아! 네게 양을 맡겨 보니 너무나 잘 돌본다. 네가 내 백성을 맡겨도 그렇게 잘 할 것 같다. 내가 너를 왕으로 삼으리라"
다윗은 어려서는 양을 섬겼고, 청년 시절에는 사울 왕을 섬겼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다윗은 사울을 섬겼습니다. 사울 왕이 병들었을 때 수금을 가지고 가서 연주하여 주었습니다. 다윗이 기분 좋게 악기를 연주하여 줄 때 악귀가 나가고 사울의 병이 상쾌하게 나은 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서는 온 백성들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다윗의 섬김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백성들이 얼마나 평안했습니까? 다윗 때에 이스라엘의 영토가 엄청나게 확장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섬김으로 이스라엘은 세계적인 국가로 세워졌고, 백성들은 물질적으로도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섬겼는지? 시편을 보십시오? 전체 150편의 시편 중에 73편이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쓴 시를 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겼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라고 하지 않습니까? 서비스라는 말은 섬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다윗은 누구못지 않게 하나님을 잘 섬긴자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겠습니까?
교황으로부터 성자란 칭호를 받은 이가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입니다. 로마의 한 수도사가 그 성자를 보고 싶어 일부터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수소문하여 찾아 찾아 가서 만나고 깜짝 놀랐습니다.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초라하게 구두를 수선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성자라고 하는 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왜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성자라고 말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삶의 철학 한 가지만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두를 맡기면 나는 언제나 예수님의 구두를 수선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선합니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을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기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섬기는 마음이 그를 성자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과 지체를 잘 섬기고, 내가 맡은 직분을 잘 섬기고, 교회를 잘 섬기고, 하나님의 잘 섬깁시다.
둘째, 다윗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죄를 안 지은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진실된 회개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였습니다. 죄가 탄로날까 두려워하면서 남편 우리아 장군을 전쟁이 심한 곳에 보내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간음죄와 살인되를 지은 것입니다. 작은 죄가 아니라 큰 죄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찾아 와서 그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자존심에 타격을 받고, 책망을 받는 지적을 받았지만 다윗은 분노하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즉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진정으로 회개했습니다. 그 회개가 얼마나 진실되고 가슴깊이 우러 나오는 회개였는지 침상이 눈물에 뜰 정도로 통곡하는 눈물의 회개였습니다.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후 다시는 그 죄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회개가 진실되었고, 회개한 후가 깨끗하였습니다. 다윗은 회개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 동깁니다.
하나님이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회개자의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무리 좋은 그릇, 큰 그릇이라 할찌라도 그 그릇에 더러운 것이 담겨져 있으면 주인이 그릇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도 회개하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오래도록 교회문 밖에서만 맴돌던 인도의 한 청년이 눈병으로 심히 고통을 당하다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눈을 정밀히 진찰한 의사는 긴장된 표정으로 눈에 살인적인 병독이 들어가 감염되었으므로 두 눈을 뽑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므로 내일 즉시 두 눈을 뽑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절망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픔과 번민과 슬픔으로 몸부림치고 있는데 크리스천 친구가 찾아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슨 말인들 못 듣겠습니까? 그는 친구와 함께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데 참으로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예수 믿으라고 할 때는 끄덕도 하지 않던 자신이 죽게 되자 살려달라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완악했던 마음부터 회개하기 시작하니 기도의 홍수문이 열려 모든 것을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눈이 퉁퉁 부을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마음이 홀가분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수술대에 올랐는데 다시 진찰을 하던 의사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심하게 번졌던 독균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의 뜨거운 회개의 눈물은 영육의 생명을 모두 고침받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질병을 치료하십니다.
요즈음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성도들 조차도 회개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하고 둔합니다. 심지어는 내가 죄를 짓고 있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죄인지 알지도 못하고 인식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사소하게 잘못한 것들은 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한 것, 남을 속인 것, 남을 미워하고 정죄한 것 등입니다. 죄를 짓고 난 뒤에도 회개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회개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왜 회개를 해?’ ‘회개 안해도 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기도 속에서 점점 회개의 부분이 줄어들고 드디어는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양심이 무디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매일 손을 씻듯이, 세수하듯이 우리가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지은 죄들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가 됩니다.
셋째, 다윗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왕은 백성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좋아한다는 생각에서 죄없는 다윗을 죽이려고 집요하게 쫓아 다닙니다. 다윗에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다윗은 다윗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신하들조차도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 사울왕을 죽이자고 권유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내가 손댈 수 없다고 말하고 신하들에게도 절대로 죽이지 말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참으로 다윗은 원수까지 용서하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말년에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향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에 의하여 요단강을 건너 멀리 도망가야했습니다. 그럴 때 시므이란 사람이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다윗의 신하였던 아비새 장군이 화가 나서 "저 놈을 쳐죽이겠습니다"고 했지만 다윗은 그를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반란이 수습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 바로 얼마 전 다윗의 피난길에 나타나 저주를 했던 그 시므이가 이번에는 아양을 떱니다. 아비새 장군은 아니꼽게 생각해서 "대왕이시여, 저 놈을 한칼에 없애 버리고 맙시다"고 했지만
다윗은 "아닐세, 오늘처럼 좋은 날 사람을 죽이다니....."하며 말렸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노를 억제할 줄 알았던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고 시편 37편 11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 22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맞는 자의 후손까지 하나님은 놀랍도록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윗을 통해서 그 후손에서 구세주 에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사람들의 칭찬과 추앙을 받는 일들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합당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그러한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모두가 외적인 그 어떤 것 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에 마음에 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이웃을 기쁘게 섬기고 지체들을 기쁘게 섬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기쁘게 섬깁시다. 또한 다윗처럼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늘 깨끗하게 유지합시다. 그리고 온유한 마음을 가집시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행 13장 21~23절 / 문기태목사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당신이 기적 같은 놀라운 선교를 할 수 있었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프로그램도 아니고 전술 전략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그와 함께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어떤 큰 일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위기에도, 절박함에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 이스라엘이 전쟁에 지고 있어도 법궤를 빼앗겨도 가만히 계셨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망해도 개의치 않고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같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일어나면 그를 붙잡고 큰 부흥의 바람을 일으켜 주십니다. 온 도시를 회개시키고 나라를 바로 세우며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고 위기를 순식간에 극복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다가도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교회는 쇠퇴하고 맙니다. 지역사회 안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교회가 있어도 그 사회는 다시 죄와 타락이 만연해집니다.
하나님은 돈이 없어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일하시며 큰 비전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없으면 일하실 수 없습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실 때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얘, 너야말로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돌아가서 함께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찾아가 우리도 왕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세워진 인물이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왕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욕심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왕을 버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 하나님과 함께 일할 정결하고 순수한 믿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때 하나님께 발견된 사람이 다윗입니다. 성경은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함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마음을 맞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나타나면 하나님은 오늘도 다윗에게 주신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다윗처럼 존귀하게 높여 주실 것입니다. 다윗처럼 사랑하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언제 어디서든지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마음이 맞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마음을 맞출 수 있습니까?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었습니까?
1. 맡은 일에 성실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삼상17:34,35)
다윗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절대로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삼상 17장 34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양떼를 치면서 성실했습니다. 양을 먹이는 일과 양을 보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양을 해치려는 맹수와 싸워서 지켜냈습니다. 그런 것들이 후에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담대함, 전술, 지략 등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어 훈련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미 사울왕의 무기를 드는 자로 선택을 받아 사울이 악령에게 시달리면 수금을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 악령을 쫓아내는 중임을 감당하고 있었으면서도 양떼를 보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삼상 16장 15절에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라고 기록합니다. '나는 왕의 앞에서 왕을 섬기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까짓 양 몇 마리에 신경 쓸 때는 지났다'고 말하며 방치할 수도 있지만 다윗은 양 몇마리를 돌보는 일이 자신의 일임을 알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맡은 일에 성실한 사람을 귀히 쓰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맡은 바 자기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부르셨지 빈둥빈둥 놀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너 할 일 없으면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바다에서 열심히 그물 던지며 물고기 잡는 어부들을 현장에서 부르셨습니다. 세관에서 세금을 거두며 성실하게 일하는 마태를 현장에서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시시해 보일지라도 자기의 맡은 일에 열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맡겨 주면 성실히 감당하게 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78:70에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라고 증거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눈에 들어 존귀하게 쓰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주어진 직업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시시한 일이라고 불평하지 말고 별로 돈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우습게 여기지 말고 성실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찮게 여길지 몰라도 하나님은 눈 여겨 보십니다. 여러분이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일에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직장에서 성실한 직장인, 자기 사업을 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업가, 학교에서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 가정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가족들을 위해 일하는 주부들 사이를 다니시며 다 낱낱이 살피며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되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삼상17:37)
블세셋과의 전쟁터에서 다윗이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를 보고는 참지 못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려는 의협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려고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것을 들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조롱 당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받는다면 막아서고자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의식주 문제보다 더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우리 인생의 사는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얼마 만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염두에 두고 말하며 행동하고 있습니까?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일어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하고 골리앗에게로 나아갔습니다. 45절을 보면 골리앗에게 말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골리앗의 칼과 창에 맞서는 다윗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전쟁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찬송하고 기도만 하고 있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골리앗은 자기의 힘과 무기를 믿고 까불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시고 하나님이 승리를 안겨주실 것을 확신하고 전쟁을 한다는 말입니다. 힘을 다하여 물맷돌을 던지지만 하나님께서 실수하지 않게 하시고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니 골리앗의 칼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의 갑옷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의 큰 군대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이 충만하니 사울 왕이나 형들의 만류도 다윗을 주저앉히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세상이 위협하는 무서운 무기들 앞에서 왜 두려움에 숨게 되는지 아십니까? 세상이 자랑하는 온갖 막강한 힘 앞에 점점 더 작아지며 주저앉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던 마음을 접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분의 강력한 무기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이 돈을 자랑한다고 여러분도 같이 돈을 내세우려고 하면 안됩니다. 세상이 힘을 자랑한다고 여러분도 같이 힘을 내세우려고 하면 안됩니다. 세상이 지식을 자랑한다고 같이 지식으로 맞서려고 하면 안됩니다. 비록 우리가 돈이 없고 지식이 없고 힘이 달린다 해도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승리를 확신하고 나아갑시다.
한 자폐아의 엄마가 자신의 아들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세상과 소통을 거부하는 아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만 떠도는 아이. 마땅한 약도 특별한 치료법도 없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아이. 놀이터에서 노는가 하면 모래를 자기 눈에 비벼대고 깨진 유리 조각을 자기 얼굴에 뿌려대는 아이--" 이 아이의 엄마가 아파트 11층 베란다에서 아이와 함께 뛰어내릴 생각을 하던 어느 날 아파트 이웃들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주일 목사님의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설교를 듣고 집에 돌아와 이 엄마는 두 장의 그림을 그립니다. 하나는, 온 가족이 아이와 함께 단란하게 식사하는 그림(그런 일이 없었기에), 또 한 장은 아이가 학교 교실에서 열심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미래를 구상하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장의 그림을 거실 중앙에 붙여 놓고 이 엄마는 기도합니다. "제 아이가 그렇게 되게 해 주십시오. 더 이상 이 아이의 과거를 바라보지 않겠습니다. 제 아이가 짐이 되는 존재가 아닌 축복이 되는 존재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이 아이의 미래를 감사함으로 바라보며 다만 저를 축복하며 섬기겠습니다." 아 아이가 바로 2005년 9월 체코에서 열린 세계 장애인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 19살의 나이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김진호라는 아이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진호 엄마(유현경)와 같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병든 아이를 축복의 아이로 바꾸어내고 절망을 소망을 바꾸어내며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내는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큰 능력이 여러분을 통해 나타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은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삼상16:13)
다윗의 생애는 그가 가진 자질 때문에, 교육 때문에, 역량 때문에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그 다윗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어느 날입니다. 이새의 집에 사무엘이라는 선지자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새 가문의 아들가운데서 왕을 세우신다는 놀라운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하나하나를 면접합니다.
그 날도 형들은 모두 아버지 집에 갔기 때문에 다윗은 일손이 바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아버지가 오라는 전갈에 숨이 턱이 차도록 달려왔습니다. 다윗은 가난했지만 당당했던 아버지, 누구에게 머리 숙인 것을 본 적이 없었던 아버지가 수염이 허연 기품 있는 노인 앞에서 몸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한쪽의 형들은 머쓱하게 이상하게 풀이 죽어 있는 모습입니다. 이 소년은 맑은 눈으로 그 노인을 바라봅니다. 그때입니다. "나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노라" 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이 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돈이 많든지, 사회적인 역량이 있든지, 또 개인적인 기품이 있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소개할 적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분이 예수만 믿으면 큰 일을 할 사람입니다." 이것은 미신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데 큰 일을 합니까? 스케일이 크다고 하나님의 나라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교회에서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열정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그 사람이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붙잡으셔서 그로 큰 일을 하게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잘 나고 그럴듯한 조건을 갖춘 다윗의 형들은 모두 하나님이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히려 외적으로는 가장 작고 어린 그래서 부모들조차도 아무 기대도 하지 않은 다윗이 선택 받았습니다. 사람의 눈에 가장 시시한 다윗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역사상 가장 크게 쓰셨습니다.
주의 영이 여러분을 붙잡고 여러분이 그분의 마음에 드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를 붙잡으셔서 걸작으로 사용하시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할 것입니다. 일 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자를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펼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라고 하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시시의 성자 프랜시스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그리스도의 기적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고, 선생님만 만나며 사람들이 변하는데 그 놀라운 능력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프랜시스가 대답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 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구석에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한 사람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그래 저 사람이다. 저를 통해서 나의 강함과 나의 지혜로움과 나의 능력을 나타내리라.'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의 전부입니다."
엊그제 제가 형님으로 부르는 목사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근사한 곳에서 점심식사를 맛있게 먹고 독일식으로 꾸며진 아주 분위기 좋은 곳에서 특별한 커피까지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자리는 우리 부부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여자 전도사님이 자기 목사님을 초대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초대한 분이 자리가 남으니 목사님 좋아하는 목사님 부부를 초대하시라고 하였는데 제가 선택된 것입니다. 초대해 주신 전도사님이 말하기를 "우리 목사님이 목사님 부부를 너무 좋은 분이라고 얼마나 자주 말하는지 몰라요. 도대체 어떤 분들이기에 우리 목사님과 사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실까? 생각했어요." 사실 그 형님 목사님 부부가 저희 부부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음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종종 값이 나가는 레스토랑에 초대해 맛있는 것을 사주십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선물로 보내오는 것입니다. "문목사 휴가 계획 잡았어?" "아직요." "그럼 나랑 제주도 가자. 제주도로 이사간 교인이 있는데 자기 집을 개방해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섬기는 것을 잘하는 아주 좋은 분들인데 거기 같이 가서 쉬고 오자." 그렇게 잘해주어 부담도 되고 황송하기도 하였지만 이분들이 우리를 너무 좋아하시는구나! 눈치를 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말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을 받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만나 식사를 하던 중에 아내가 "그 교회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좋은 처녀 있으면 소개하세요.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결혼을 못하고 노총각으로 있어요." 그러자 사모님이 대뜸 "우리 딸 소개해주어요." 그래서 만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시크둥 했던 두 사람이 다 서로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했는데 너무 잘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 부부도 마음에 쏙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를 더 특별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본인들이 준비된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칭찬과 대접은 저희가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황송한 마음에 이러지 마시라고 그만 하셔도 된다고 해도 한번 마음에 드니 다 좋게 보고 아낌없이 부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좋으냐?" "예, 주님,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천국에 오면 이와 같이 너의 수고에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영광과 상급을 너를 위해 준비해 놓았다." "예?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대단하지 않은 충성을 한 것을 가지고 주님을 어마어마한 상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을 찾으실 때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눈에 발견되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존귀하게 쓰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행복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빼앗기고, 받고...
행 13장 21~22절 / 김우영목사
요절 : 그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1,22)
본문은 하나님의 마음이 떠나 폐위, 왕권을 빼앗긴 사울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왕권을 받게 된 다윗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 : 빼앗긴 자, 사울
강도에게 재물을 빼앗겼거나 처신을 잘못하여 명예를 빼앗겼다든지, 몸 관리를 잘못해서 건강을 빼앗겼다면 이는 분명 고통이며 불미스러운 슬픔입니다. 무엇을 빼앗기든 빼앗김은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허나 불행중 불행이요 비극중 비극은 사단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김입니다.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표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잠5:9)" 사울 왕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① 효자였습니다(삼상9:3,4).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리고 사울에게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니 에브라임 산지, 살리사 땅, 사알림 땅, 베냐민 사람 땅까지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② 용서와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삼10:27) 사울이 왕으로 선포됨에 비류 한 사람이 저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않았음에도 잠잠하였습니다.
③ 애국자요 용사였습니다(삼상11:11) 암몬과 싸울 때 새벽에 적진에 들어가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사람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처음엔 왕이 될만한 사람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된 후에 달라지기 시작했고, 점점 비뚤어져 갔습니다. 처음이 아무리 좋아도 끝이 나쁘면 좋은 시작으로 얻어진 좋은 결과를 빼앗깁니다.
사울왕이 폐위 되기까지의 원인들입니다.
① 조급함에 왕이라도 할 수 없는, 오직 제사장만이 권한을 가진 제사를 드렸습니다(삼상13장).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이 위급해집니다. 이에 사울을 좇는 백성들은 떨었고, 사무엘이 길갈로 오겠다던 기간인 이레를 기다려도 오지 않음에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집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사울이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오라 하여 제사를 드립니다. 헌데 사울이 번제를 마치자 사무엘이 도착합니다. 사울은 정한 기한 이레가 완전히 지날때까지 사무엘을 기다려야만 했었습니다. 사울은 월권을 했고, 이는 하나님께 범죄함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책망합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회개치 아니하고 부득이 해서 그랬다고 변명만 합니다.
② 아말렉을 진멸하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삼상15장). 그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아각 왕과 좋은 것은 진멸치 아니하고 가치없고 낮은 것만 진멸함으로 또 득죄를 합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15:11)" “하나님은 인생의 아나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23:19)" 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후회? 주경 학자 들에 의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때문에 아파하신다는 의미이며, 사울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워 졌음을 암시함이라고 합니다.
③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들어가 번뇌케 되었습니다.(삼상16:14)
④권력욕과 질투심이 생겼습니다(삼상18:6-9).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다윗과 사울왕을 찬양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도다" 라고 하매 사울은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고 그날 후로 다윗을 주목하였습니다. 악신이 들어간 사울은 기회만 되면 수금타는 다윗을 죽이고자 창을 던졌고(삼상18:11,19:10), 집으로 도피한 다윗을 지키고 있다가 아침에 죽이려 했으며(삼상19:11), 적진으로 보내 죽이고자 했고 (삼상18:25), 엔게디 들로 좇아 다니며 죽이려 했습니다(삼상24장). 사울의 왕권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함에는 아무도 대항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됩니다.
⑤자살했습니다(삼상31:3,4).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게 됨에 병기든 자에게 죽여달라고 하나 그가 두려워 행치 않자 스스로 자기 칼을 취하여 죽습니다. 사단이 들어가 끝내 회개치 않고 죽은 가룟유다처럼... 자살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끊는 것이나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끊는 것임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까닭에 자살은 살인입니다. 독수리가 바위 위에서 토끼한 마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사냥꾼이 활로 독수리를 쏘아 맞혔습니다. 가슴 깊이 화살이 박힌 독수리가 땅에 떨어지며 가슴의 화살을 보더니 갑자기 비통한 신음을 하며 말했습니다. “우리 독수리 날개 털로 만든 화살에 내가 찔려 죽어야 하다니...원통하구나" 이솝(Aesop)우화입니다. ‘나'를 파멸로 몰고 감은 ‘내'속에 있는 ‘나'입니다. 부득이 하게 지은 죄라도 죄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도 철수 됩니다. ‘질투는 일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도 바로 보지 못한다' 히브리 격언입니다. 잘되면 잘되는 이유가 있고, 잘못 되면 잘 못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인과율의 법칙"이라 하고 성경은 “심은 대로 거둔다" 라고 하십니다.
둘째 : 받은 사람, 다윗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폐하시고'라는 헬라어 ‘메타스테사스'는 ‘자리를 바꾸어 놓다' ‘옮기다'라는 의미이며, 누가복음16장 4절에서는 ‘청지기 직을 빼앗다'라는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내가 만나니'라는 헬라어 ‘휴론'은 ‘내가 발견하다' 라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보물을 발견하셨다'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합한'이라는 헬라어 ‘카타'는 '...의 뒤를 좇는' ‘∼을 따라'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내 마음을 뒤 따르는 사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리지도 않고 앞서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이새의 아들 가운데 하나에게 기름을 붓고자 갔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장자 엘리압을 보고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인줄 알았습니다. 허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십니다. 둘째 아비나답, 셋째 삼마... 일곱 아들이 다 하나님께 불합격이었습니다. 결국 양을 치고 있던 말째를 데려 왔고, 그가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입니다(삼상16장).
다윗의 중심이 어떠했길래 일개 목동이 하나님께로부터 왕위를 얻고, 왕권을 부여 받을 수 있었을까요?
① 효도는 물론, 책임감이 투철했으며 희생심이 강했습니다(삼상16:11,17:17-22). 형들은 모두 사무엘의 초대에 갔으나 가장 어린 그는 혼자 양을 지켰고,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있는 형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② 하나님 절대신앙의 사람입니다(삼상17장).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소년 다윗은 전혀 놀라지도 두려워 하지도 아니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5-47)" 다윗은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거장 골리앗을 물매와돌로 쓰러뜨려 죽이고 승리합니다.
③ 자기를 끊임없이 죽이려 하는 사울왕을 해하지 아니하고 살려주었습니다(삼상24,26장). 동굴 속에 발을 가리우러 들어왔던 사울 왕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건만 옷자락만 가만히 베었고, 잠을 자고 있던 사울을 죽일 수 있었건만 또 해하지 아니하고 사울의 머리 맡에 있던 물병과 창만 들고 나왔습니다. 까닭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을 손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원수의 생명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한 사람입니다.
④ 회개의 사람입니다(삼하11,12장).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충신 우리아를 죽였습니다(삼하11장).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죄요 결코 합리화 할 수 없는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침상을 띄울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 했습니다. 그는 사울 왕과는 달리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변명하지 아니했으며, 죄를 시인 했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 했습니다. 회개의 깊이는 눈물의 분량으로 측정 됩니다. 기독교인의 참된 회개는 눈물에 빠져 죽을 정도 는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중심을 잃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래야만 받은 것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끝까지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중국의 사막에서 이는 황사가 중국, 한국, 일본은 물론, 하와이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이를 막는 대책은 사막에 나무나 풀을 심어야 하는데, 돼지 감자를 심는 것이랍니다. 그렇듯인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심겨지지 아니하면 죄악의 행사를 일으키는 범죄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받은 것을 빼앗기지 말고, 받아야 할 것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사회는 자기 확장, 자기 팽창, 자기 과대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늘 무엇에 쫓기며 살고 상대적 빈곤에 허덕입니다. 가장 편리한 시대 임에도 가장 불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까닭은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가라 내가 함께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현대인의 중심에 부재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가 되면 지금의 낮고 어려운 자리에서 높고 귀한 자리로 옮겨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복은 회개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받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라
행 13장 21~23절 / 서금석목사
트럭 두 대가 뒤를 맞대고, 운전수가 이 트럭에서 저 트럭으로 나무 상자를 옮기느라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지나던 사람이 도와주겠다고 나섰습니다.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한동안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와주던 사람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습니다. "안 되겠네요. 우리 힘으로는 아무래도 짐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운전수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내리다니요! 난 내리려는 게 아니라 실으려는 거였어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한다 하더라도 생각이 다르면 일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올리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내리려고 한다면, 힘만 들뿐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뜻이 있어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인생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생이 되지 못하면, 그야말로 힘만 드는 안타까운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라면,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산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성경은 다윗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다윗을 보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고 계셨을까? 성경은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사무엘상 16장에 나오는 기름부음을 받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새의 집에 간 사무엘은 이새로부터 아들들을 소개받습니다. 사무엘이 처음 본 아들은 엘리압이었는데,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는 "바로 이 사람이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라고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바로 이 말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는 말씀을 볼 때, 다윗이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의 중심, 다윗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 마음에 무엇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 첫째,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알고자 힘썼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려고 했을 때의 일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가지고 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법궤를 가져온다는 것 자체가 다윗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당한 의미를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온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가져오는 도중 웃사가 그만 법궤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웃사가 법궤에 깔려 죽자, 더 이상 법궤를 옮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큰 일을 하다가도 사고가 터지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지 않습니까? 다윗도 마찬가지로 법궤를 가지고 오는 것을 멈추고 대신 법궤를 오벧 에돔의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다윗의 속마음은 법궤를 가지고 오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법궤가 오벧 에돔의 집에 머무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벧 에돔의 집이 축복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고, 그 누가 법궤를 가지고 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윗이 이 순간에 무엇을 했을까요? 법궤를 가지고 오지 못한 아쉬움에 사로잡혀 안절부절 했을까요?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었는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블레셋 사람들처럼 법궤를 수레에 실어 오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역대상 15장 2절과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가로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저를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하고",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다윗은 웃사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법궤는 제사장들만이 어깨에 메어 운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다윗은 법궤를 가지고 올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궤가 위치할 장막을 쳤습니다. 또한 아론 자손과 레위 자손을 모아 그들 중 각 족속의 족장들로 하여금 몸을 성결케 했습니다.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문지기를 세우며, 노래를 가르치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여섯 걸음을 갔을 때마다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소와 살진 양을 제물로 잡아서 바쳤습니다(삼상 6장 12절).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 고난 가운데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깨닫고 그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이 했던 대로 암소에 메어 법궤를 운반하려고 할 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괜히 죄 없는 웃사만 희생되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면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됨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랍 유목민이 살고 있는 어느 사막의 둥근 천막에 두 명의 보석상인이 들어섰습니다. 두 상인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보석에 대해 은근히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한 상인이 일부러 큰 진주를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상인이 그 진주를 주우며 "이 진주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랍 유목민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 역시 당신들처럼 보석의 소유와 매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서 모래 바람을 만나 며칠 동안 먹지 못하고 탈진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큰 주머니를 발견하고 혹시 음식이라도 들어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열었는데 진주만 가득했습니다. 그 때의 절망감은 이룰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의 소유가 되는 것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을 가지게 되는 순간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져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의 근본이 되어야 함을 믿으십니까? 잠언 3장 5절로 6절 말씀입니다. "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인정하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알고자 힘쓰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얼마나 애쓰십니까? 직장을 선택하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십니까? 공부를 하더라도 왜 내가 공부를 해야 하며, 누구를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십니까? 결혼을 할 때는 어떻습니까?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 싶어하는지 알고자 기도하십니까? 정말 많은 순간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애쓰기 보다는 자신의 발전만을 위해 힘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향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에 둔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힘차게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2. 다윗은 하나님만을 드높이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엄청난 고통의 세월 후에 예루살렘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적들도 잠잠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단 선지자로부터 하나님께서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자손까지 축복하신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때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들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때 취한 행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무엘하 7장 18절입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에게 있어서 지금이 어떠한 때입니까? 다윗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기쁨을 누구와 함께 나누고자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동안 함께 역경을 헤쳐 나온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든지, 사랑하는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든지 할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힘들고 괴로운 일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즐겁고 행복한 일, 그리고 어떤 일에 성공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려 하기보다는 나만의 즐거움에 도취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한다든지,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성공을 맛보더라도 주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 아닙니까?
아직도 월드컵의 감동이 식지 않고 있는데, 월드컵 기간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어느 때였습니까? 골을 넣고 기도하는 선수들을 볼 때, 그리고 한 경기를 승리로 이끌어 낸 후, 믿는 선수들끼리 그라운드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감격스럽지 않으셨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JESUS"라는 글씨를 자신의 속옷에 써놓고는 경기가 끝난 후에 그것을 자신 있게 보여주는 선수의 모습은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습니까?
국가대표팀에 최태욱 선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번 월드컵 경기 때에 경기장에서 뛴 시간은 짧았지만, 이 최태욱 선수는 다른 선수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최태욱 선수가 국가대표팀에서 최 목사로 통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의 신앙은 참 대단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해외로 전지훈련을 가도 그곳에서 꼭 예배를 드리려고 힘썼답니다. 한번은 사이프러스로 전지훈련을 갔는데, 그곳에서 한인 교회를 찾지 못해 동료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 간단하게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 머물렀을 때에도 한인교회를 물색해 예배에 참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도 웃지 못할 일화가 있습니다. 최태욱 선수가 LG구단에 입단하게 되었을 때, 그는 구단으로부터 받은 계약금 중 2천만원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노발대발 했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교회에 찾아가 목사님께 다짜고짜 "내 아이가 뭘 몰라서 드린 것이니, 다시 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만수 교회의 목사인 김 원영 목사는 "태욱이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에 태욱이가 와서 되돌려 달라하면 돌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최 태욱 선수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서는 최 태욱 선수에게 "내가 목사님께 잘 이야기 해 놓았으니, 가서 다시 돌려받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최태욱 선수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방황할 수 있었던 사춘기를 잡아준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는 지금 마약 중독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 은혜입니다." 결국 최태욱 선수의 아버지도 아들의 믿음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드높이는 것이야말로 성도의 본분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높일 수 있습니까? 찬양입니다.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다. 찬양을 살리세요. 찬양에는 힘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의 여러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시편 149편 1절로 3절 "1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양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2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子民)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3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 150편 1절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찬양을 회복하세요. 마음을 다하는 찬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해줍니다. 지친 영혼에 새 힘을 공급해 줍니다. 그런데, 요즘 찬양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입술로는 찬양하는 것 같지만, 혼을 다한 찬양은 없어요. 마치 가요를 부르는 것이나 찬양하는 것이나 그 마음이 동일해요.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물론 목회자의 탓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찬양하는 우리의 모습에 더 문제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찬양하는 우리의 입술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입술로 찬양을 합니다. 거짓을 말하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찬양을 받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고 우리의 입술이 정직과 진실을 말할 때, 하나님은 그 찬양을 받으십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지고 그 심령으로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들을 높여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3. 다윗은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3장에는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도와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곡식을 타작하고 있는 그일라 사람을 공격해서 많은 곡식을 탈취해 갔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일라로 가서 그들을 구원하라"는 응답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군사들과 함께 그일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군사들이 반대를 합니다. 그들은 그일라로 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일라로 가는 것은 단순히 블레셋과의 싸움을 통해서 그일라 사람들의 원수를 갚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 일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블레셋이 아닌 또 다른 적에게 죽게 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또 다른 적이 누군 줄 아십니까?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그일라는 사울이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일라 사람들이 거하는 곳은 성이었는데, 그곳에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포위되기 쉬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울 역시 다윗이 그일라 사람을 구하러 그곳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다윗은 이제 독안에 든 쥐이다." 성도 여러분, 독안에 든 쥐를 죽이는 것이야말로 시간문제 아닙니까? 그럼으로, 이러한 상황이 전개될 것을 뻔히 알면서 도와주러 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진실의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실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라고 해서 자신의 군사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생각하지 못했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이 처하게 될 위험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위태롭게 된다 할지라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 나머지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진실입니까? 사무엘상 23장 2절입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은 기도했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일라 사람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은 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한계는 자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다른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정말 진실인지 다시 한번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합니다.
진실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실이라는 이름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이 보일 수 있습니까?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Yes해야 할 상황에는 No하고, No해야 할 상황에는 Yes 하는 거짓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사명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그일라 사람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응답 앞에 단지 육신이 연약해서라는 핑계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기피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내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진실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라면, 그것이 내게 불리한 것으로 작용한다 할지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일라 사람을 구하라"고 응답하셨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럼으로 진실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하나님의 응답이라면, 역경 속에서 묵묵히 실천해 나가는 사람이 진실된 사람입니다.
성도는 진실로 사는 것이지,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실하세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의 삶을 표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성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순간에 처하더라도 그 순간에도 여전히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그분의 음성이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그분을 찬양하세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나로 하여금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또한, 진실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진실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진실할 수 없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감정에 맡기지 말고, 진실함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 다윗
행 13장 21~23절 / 김창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13장 21절에서 23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마음에 드는 사람 다윗”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2절을 보면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시대 450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자 사울을 초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세웠더니 변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움을 받은 후에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집사일 때에는 순종하고 충성하다가 장로로 세워놓으니 변질되어 목에 힘을 줍니다. 차라리 장로가 안된 것만 못합니다. 그런 장로는 문제가 됩니다. 사울도 왕으로 세워놓자 변질되었습니다. 권사 되기 전에는 성경공부도 잘 하고 봉사도 잘 하다가 권사로 세워놓자 이제는 될 만큼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 다음달로 당장 성경공부와 봉사를 그만 둡니다. 차라리 권사가 안 되는 것이 낫습니다. 권사 되는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었다 봅니다. 후회 스러운 인간입니다.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참아 기다려보시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하시고 사울을 전쟁에 보내어 죽이시고 아들 요나단도 끝내버리고 맙니다. 사울이 죽고 왕노릇을 했던 이스보셋마저도 하나님은 노여워하여서 정리하셨습니다. 그 후에 다윗을 세우시고 내 마음에 꼭 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밖에 나면 하나님께서 폐기처분 하시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도 세워주시고 자기의 뜻을 이루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찾을 수 없으나 성경 이곳 저곳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런 면이 마음에 들었겠다라는 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사건들은 다윗을 만나매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신 이후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과론 적이 아니냐고 하실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적이라는 것을 아시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래서 다윗 평생의 사건들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신앙적인 사람 다윗 (삼상 17:45-47)
다윗의 믿음이 마음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웠는데 처음에는 얼마나 겸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쥐꼬리만한 믿음이 있더니 그것도 나중에는 모두 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 꼴을 보지 못하시고 정리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무엇이 마음에 들으셨느냐 하면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형님 세분이 블레셋 나라와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군대에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세명의 아들걱정을 하면서 다윗에게 가서 안부를 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전쟁터에 가서 안부를 알아 가지고 오는 것은 턱도 없는 소리이지만 그 때는 가능했습니다. 다윗이 그 때에 소년의 티는 벗어났지만 청년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가보니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대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블레셋의 대장 골리앗이 앞으로 나오더니 이렇게 싸울 것 없이 블레셋의 대표자 한명과 이스라엘의 대표자 한명이 나와서 일대일로 싸우고 끝내자고 하였습니다. 그 장면을 본 이스라엘 군대가 모두 두려워 떨며 누구도 나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때 형님의 안부를 알기 위해 갔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섰습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욕하는 골리앗을 보고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저 놈을 해치우겠다고 하는 자세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누구와 싸울 때 둘이서 치고 받고 싸우는 경우 져줄 수도 있지만 아버지 욕을 하고 어머니 욕을 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싸우려면 나와 싸울 일이지, 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건드립니까? 부모님 욕을 하는데도 가만히 있다면 정말 멍청한 자식입니다. 나를 욕하고 나에게 싸우자고 하는 것은 괜찮은데 부모님을 욕하면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척 장신에 베틀채같은 창을 가지고 나오는 골리앗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다윗이 물맷돌 다섯 개를 가지고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갑옷도 입지 못했습니다. 어른의 갑옷을 입혀주자 질질 끌려서 움직이지를 못했기에 맨몸으로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골리앗을 보고 “너무 크다”라고 합니다. “너무 크다”라고 할 때에는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한가지는 너무 크니까 우리가 감당을 못하겠다는 반응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이렇게 생각하였고 그러기에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는 너무 크니까 물맷돌을 아무렇게 던져도 다 맞겠다는 반응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러분, 야구선수가 홈런을 칠 때 어떻게 해서 치는지 아십니까? 어린아이 주먹만한 공이 날아오는데 그 공이 축구공만 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축구공이 날아오는데 못 칠 야구선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그 공을 치면 홈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3진 아웃되는 사람들을 보면 그 공이 콩알만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칠 수가 없고 아웃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도 골리앗을 보았을 때 몸집이 너무 크니까 아무렇게 던져도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골리앗이 전신갑주를 입었는데 얼굴만 내놓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자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칼도 없이 물맷돌 다섯 개만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차고 있는 칼을 빼서 골리앗의 목을 베었습니다. 누구의 칼에 누가 죽은 것입니까? 자신의 칼에 자신이 죽은 것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큽니다. 내가 한 말에 내가 걸려드는 수가 있습니다. 말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한 짓에 내가 걸려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칼에 내가 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보기 좋게 승리합니다. 블레셋 군대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을 치고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군대를 뒤쫓아가면서 빼앗고 죽였습니다.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장 다윗이 이기니까 그 군인들은 구경만 하다가 이겼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대장 예수님과 죽음의 권세를 잡은 마귀가 싸우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마귀가 이긴 것 같았는데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마귀와 더불어 싸워 이기셨습니다. 이제는 죽음이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대장 예수님이 승리하므로 우리는 마귀와 더불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겨놓은 싸움만 싸우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삼상 17:45,47). 이 이상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같은 믿음을 찾지 못했고 사울왕에게서도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에게서 그 믿음을 보고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사울왕이 가져야 할 믿음과 사울왕이 했어야 할 일을 다윗이 한 것입니다. 매사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매사에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살며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어머니가 없으신 분계십니까? 다 계십니다. 세상을 떠나셨어도 어머니는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내 어머니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세상 태어날 때 어느 여자가 날 낳는가 하여 눈을 새까맣게 뜨고서 태어납니까? 그러다가 이 여자가 날 낳았으니 내 어머니다라고 합니까? 눈을 감고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어느 여자가 날 낳았는지도 모르게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여자에게 어머니라고 합니까? 병원에 가서 혈액형 검사를 했습니까? DNA검사를 했습니까? 병원에서 증명서를 받아서 어머니라고 부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이 여자가 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나에게 젖 먹여주고 품에 안아주고 울면 달래주고 업어주고 키워주시니까 이 여자는 분명히 나의 어머니가 맞다고 경험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남자가 아버지라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어머니만 알지, 이 남자가 아버지인지, 저 남자가 아버지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말입니다. 병원에 가서 증명서를 받아들고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아버지를 증명할 길이 없으니까 믿지 못하겠다고 하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고 아버지로 생각지도 않으며 아버지로 섬기거나 모시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믿지도 섬기지도 않으면서 밖에 나가서는 착한 일, 의롭고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를 보고 저 남자는 우리 집에 왜 있느냐고 합니다. 이런 경우 아버지가 기뻐하겠습니까? 잘한다 하시겠습니까? 밖에 나가서 의롭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다음 문제입니다. 첫째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믿고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로 모시고 섬겨야 하지 않습니까?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제2차적입니다. 아버지라 부르면서 재롱을 떨고 사랑하며 위하고 모시며 섬기는 것이 얼마나 아버지의 큰 기쁨이 됩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참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살 동안 만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아버지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하늘나라에 가면 아버지는 하나님 뿐이요, 육신의 아버지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만 아버지이기에 육신의 아버지는 살 동안만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요, 참 아버지는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하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며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누가 뭐라고 해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매사에 믿음으로 사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둘째, 열성적인 사람 다윗 (시 69:9)
예수님께서 나이 서른 살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성전에 들어가시니 성전 마당에서 송아지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는 자들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성전 밖에서 쓰는 돈과 성전 안에서 쓰는 돈이 다르기 때문에 돈을 바꾸는 사람들도 한목 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은 성전 밖에서 해야 하는데 성전 뜰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모두 내쫓으며 왜 아버지의 집을 장사꾼의 집으로 만드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시니 그전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몽둥이를 들고 모두 내쫓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신 후에 하시는 말씀이 왜 강도의 굴혈을 만드느냐고 하셨습니다. 3년 전에는 장사하는 사람의 집이라고 하시더니 이번에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악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왜 강도짓인 줄 아십니까?
유대사람들은 유월절만 되면 천리밖에 있는 사람들도 남자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옵니다. 심지어 외국에 사는 유대인 남자들도 유월절을 지키려고 오곤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유월절에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 양이나 소를 기릅니다. 그런데 멀리 사는 사람들은 천리를 끌고 올 수가 없으니 그것을 팔아 가지고 예루살렘 근방의 목장을 찾아가 좋은 송아지나 양을 사왔습니다. 장사꾼들이 여기에 착안하여 제사장들과 결탁을 하였습니다. 장사꾼들이 성전 뜰 안으로 들어와서 송아지와 양을 팔테니 아무리 비루먹은 송아지나 양일지라도 흠잡지 않기로 제사장들과 결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밖에서 사오는 양이나 송아지는 아무리 좋아도 흠을 잡아 거절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밖에서 아무리 좋은 송아지와 양을 사와도 제사장이 불합격을 시켰습니다. 할 수 없이 성전 뜰 안에 들어와서 송아지와 양을 삽니다. 그쯤 되면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만원짜리도 2만원 부르면 2만원 줘야 하고 3만원 부르면 3만원 줘야 하지 않습니까? 눈감을 때 코를 베어 가면 차라리 낫지만 눈을 뜨고 있는데 코를 베어 가는 형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강도짓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강도의 굴혈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떼돈을 벌어서 장사꾼들과 제사장이 나누어 먹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가만히 계십니까? 몽둥이를 들고 내쫓고 얼마나 야단을 치시는지 정신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때 사도요한이 시 69편 9절에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삼킨바 되었다 하더니 저런 경우로구나”라고 인용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이 바로 그 예수님을 가리켜 열심에 삼킨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지어내서 쓴 말이 아닙니다. 다윗의 시편 가운데서 한 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69편 9절을 보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얼마나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그 열심에 삼킨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전을 왜 그렇게 사모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기 까닭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불같은 다윗의 그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찬양대가 연습하기 전에 연습할 찬양곡을 나누어주지 않습니까? 나누어주면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얼마나 실력이 쟁쟁한지 속으로 중얼중얼 두세 번 부르더니 당장에 잘 부릅니다. 연습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실력은 쟁쟁한데 연습시간에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안나옵니다. 왜냐하면 실력 없는 사람들이나 연습하고 나는 한 두 번 정도 혼자서 불러보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 독창은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해도 되지만 함께 음을 맞춰 찬양을 할 때에는 아무리 실력자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연습을 하고 맞춰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안나오고 싶으면 안나온다면 실력은 있는데 열심은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사람은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열심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에 삼킨바 되어 불덩어리처럼 또는 정신나간 것처럼 열심 있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열심히 살고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하며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또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장사를 해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당합니까? 예수님도 열심에 삼킨바 되었습니다. 열심 있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사랑하는 사람 다윗 (시 18:1)
제가 지금 누구하고 삽니까? 김기옥 사모님하고 삽니다. 그렇지요, 김기옥 사모하고 사는데 제가 그것을 왜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까? 나의 아내와 나는 촌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데 저는 제 아내와 촌수가 있습니다. 몇 촌인가 하면 사촌입니다. 왜 사촌이냐 하면 제가 열여덟 살에 혼자 피난을 내려와서 얼마나 외롭게 살았습니까? 그래서 아들 딸을 보기만 하면 너무 예뻤습니다.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쓰다듬어 주면 제 아내가 비키라고 야단합니다. 아빠가 아이 젖 먹는 모습을 쓰다듬어 주는데 왜 비키라고 합니까? 이것이 사촌이지 뭡니까? 물론 잠이 들려고 하는 아이가 깰까싶어서 비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지 남편보다 더 사랑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신의 아내와 아들 딸보다 더 사랑합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본문 시편 18:1에 보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멋집니까? 베드로가 평생에 세 번의 신앙고백을 합니다.
첫째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는 베드로 이상의 전문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실패했습니다. 날고 뛰는 사람도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여러분들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 날 마침 베드로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실패한 날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실패했을 때 예수님을 만나면 절대로 손해보는 것도 아니고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증거 하신 후에 갈릴리 바다에서는 밤중에 얕은 곳에서 고기를 잡지만 그 반대로 한낮에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생각할 때 턱이 없는 소리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하리이다 라며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고 건져 올렸더니 두 배에 꽉 찼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달려와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전에는 주님을 모르고 자신의 멋대로 살아온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자신의 멋대로 사는 것이 큰 죄입니다. 나는 죄인이라 고백할 때 예수님과의 인연이 생깁니다. 즉 관계가 맺어집니다. 주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 나는 죄 없다고 생각하며 내가 천국을 못 가면 세상에서 누가 천국에 가겠느냐고 얘기하는 자칭 의인은 주님께 소용이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고백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기본적입니다.
둘째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불러 제자를 삼고 얼마동안 가르치신 후에 전도하러 보냈습니다. 돌아온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때 거듭나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 못 얻습니다. 관계가 시작되는 것뿐입니다.
셋째로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받으시고 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베드로 된 것입니다. 이 사명을 받지 못했다면 문제는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사명을 주고 직분을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목회자는 쓸데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장로는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자기 주장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권사는 문제가 많습니다.
맛있는 고구마를 구워서 먹고 있으면 냄새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 냄새를 맡은 원수처럼 지내는 앞집의 강아지가 앞에 와서 꼬리를 흔들고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힘을 다해서 강아지 배를 걷어차면 강아지가 죽는다고 도망을 갑니다. 사람을 미워하니까 그 집 강아지까지 미워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집에 사는 사랑하는 갑순이의 강아지가 와서 꼬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고구마 껍질만 벗겨 줍니까? 아니면 고구마를 뚝 잘라서 줍니까? 뚝 잘라서 줍니다. 갑순이를 사랑하니까 갑순이네 강아지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예수님의 양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그 양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못할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그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것입니다.
결론을 짓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첫째는 믿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윗은 무엇이나 믿음으로 하였습니다. 매사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열심 있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꾼에게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없는 능력은 써먹지 못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삼킨바 된 다윗이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윗은 매사에 하나님 우선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즉 아내 미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행 13장 21~23절 / 신성종목사
도입)이 세상에는 53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을 직업별로 나누면 2만 5천 가지가 넘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버림받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우상숭배 빠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십니다. 이들은 더러운 것들을 청소하는 도구와 심판의 도구로만 쓰임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천하게 쓰임 받는 사람]과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은 능력이 없거나 인물이 못 나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고, 소명감이 없고, 그래서 헌신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다윗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을까요? 인물이 잘나서 그렇습니까? 인물로 말하면 사울 왕이 더 잘났습니다. 착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처럼 사람들을 많이 죽인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그처럼 원했던 성전 건축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열왕기 상에 보면 “그러나 너는 그 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왕상8:19)고 했습니다. 왜 그러면 성경에서 다윗을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형으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그 이유를 찾아서 우리들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는가?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첫째로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말은 영어 성경에 보면 [after my own heart] 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말로 옮기면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란 말입니다.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일평생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도 죄를 지은 것이 많습니다. 다윗은 크게 두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는 밧세바를 탐하여 음행을 하였고, 그것을 은폐하려고 그 남편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가정에는 불화와 불행이 끝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다른 동생 다말을 유혹하여 농락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가정의 비극이 시작되었고, 압살롬까지도 변절하여 다윗의 자리를 탐하였습니다. 압살롬의 생명만은 죽이지 않게 헸지만 요압은 그것을 묵살하고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윗 한 사람의 죄는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다윗의 또 다른 죄는 사무엘 하 24장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죄입니다. 이것은 교만의 죄입니다. 군대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수를 세어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80만, 유다 사람이 50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음에 자책을 하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심판을 택하도록 하였습니다. 7년간의 기근, 대적에게 쫓겨 3달간의 도망생활, 3일간의 온역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직접 그를 심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온역으로 죽은 자가 7 만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왕이 된 것은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 21절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그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이고, 그의 가족은 가장 작은 가족이라고 거절했습니다. 10장 22절에 보면 기름을 부으려고 했을 때에 행구 사이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뒤에 사울은 교만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버리십니다.
(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히 11: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그가 골리앗과 싸울 때에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 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
찬송가 544장,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4)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배신한 압살롬은 물론 원수의 아들인 요나단을 사랑했습니다. 원수의 아들이요 병신인 므비보셋을 자식처럼 사랑했습니다.
(5)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기도와 찬양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필요한 악기들을 만들어 썼고(대하 7:6), 시편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수많은 찬양을 썼습니다(대하 29:30). 제사장들을 위해서는 반차를 정해서(대하 8:14)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윗의 기도생활이었습니다(삼하 7:18절 이하). 다윗의 기도에는 그의 겸손과 경배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한다는 말씀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분명히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것은 다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1장 15절에는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헛갈리지요? 그러나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이 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 내용을 알면 서로 보완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 화)쾬즈렌드의 모르간이란 산이 있습니다. 산비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메마른 땅에서 밭을 일구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발밑에 무궁무진한 금맥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왜 몰랐을까요? 산 이름이 모르간이니까요? 이것은 농담이고, 그들은 지질학에 대한 상식이 없어서 몰랐고, 어떻게 캐야 되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발밑에는 무궁무진한 영적 보화가 있는 것을 믿고 있습니까? 다만 이것을 모르고 있고, 캐낼 줄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크게 세 가지로 하십니다.
첫째는 Yes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간혹 우리의 기도가 우리들에게 저주가 될 때에는 No하고 응답하십니다. 고후 12장 8-9절에 보면 바울이 자신에게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아마도 이 가시란 말은 안질이었을 것입니다. 안질만 없으면 좀더 힘 있게 선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고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롬8:26절에서는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정말 우리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리는 모르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의 방법은 Wait란 응답입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합당치 않은 것을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연약성으로 인해서 오용할까봐 하나님은 지극한 사랑으로 거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은 한 가지 조건만을 말씀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얼마나 단순한 조건입니까? 그러나 이 말씀은 주문을 외우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면 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크게 세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는 [기도가 주님 때문에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쾌락이나 출세나 번영이나 성공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하는 기도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은행에서 수표를 현금화하려면 [우리의 신분이 확인되어야] 하듯이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된 상태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도의 내용이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엘리사의 종인 게하시는 주인의 이름을 도용해서 나아만 장군에게서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문둥병이 그에게로 옮겨지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3절에서 말씀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됩니다.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로마서 11장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의 깊으신 뜻 가운데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깨닫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6) 끝으로 다윗은 [충성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고전 4장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 사람입니다. 충성이란 말은 한자의 뜻은 가운데 마음으로(충), 말씀을 이룬다(성)는 뜻입니다. 헬라어의 뜻은 믿음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들이 다 충성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계시록 2:10절에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충성을 다 해서 하나님의 귀한 도구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이루신 뜻은?
(1) 먼저 주변의 모든 족속들을 다 멸하고 [이스라엘의 기반을 세웠습니다]. 사무엘하 8장은 다윗의 전쟁 기록서입니다. 그는 불레셋과 모압, 암몬과 아람, 에돔과 아말렉, 소바와 에람, 등을 다 치고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셨지만 그러나 그 땅을 다 차지한 것은 다윗 때에 와서야 비로서 다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입니다.
(2)[예루살렘을 여부스 족속에게서 빼앗아 수도로 삼고], 그곳에 성전을 지을 수 있는 터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그처럼 원했던 성전을 짓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도 짓지를 못한 성전을 지었는데 이것이 보통 축복입니까? 그러나 죄송한 것은 성전 짓기를 반대하신 분들이 그 축복에 들어갈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멀리 보지 못한 단견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3) 다음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는 점입니다. 법궤 속에는 세 가지가 들어있었습니다. 모세의 돌로 된 십계명,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 항아리였습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식이요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였습니다.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는 것은 영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중심을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개인과 가정과 직장의 중심을 하나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4) 끝으로 [예배 의식을 완성]했다는 데 큰 공헌이 있습니다.
역대하 23장에 보면 레위 자손들을 구분해서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레위 족속 중에서 문지기들을 뽑고, 다음에는 악기를 가지고,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을 구분해서 새벽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찬송케 하였습니다. 또 24장에 보면 24 반차의 제사장 조직을 만들어 아론에게 명하신 규례대로 수종을 들게 했습니다. 25장에는 찬양대를 조직했다고 했습니다.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가지고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배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바라기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서 위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밑으로는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서 승리와 영광을 얻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다윗의 신앙
행 13장 21~23절 / 피종진목사
사람이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된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혹은 국가의 공무원 또는 많은 단체에서도 많은 리더를 선택하고, 또 그 사원들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택받는 것도 귀하지만, 더 귀한 것은 하나님께 선택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은 왕의 직책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스스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렸을 뿐만 아니라(삼상 13:8∼14),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삼상 15:18∼23).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해서 선택을 받았습니까? 이 다윗의 신앙을 본받아서 이 시대에 가장 하나님께서 귀하게 선택하시는 위치에 세움을 받을 수 있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22절상)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도 대단히 귀한데 창조주이신 하나님,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또 그 신앙이 얼마나 모범되다고 하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귀하지만 이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봐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집에 사무엘을 보내서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에게 지시할 때 기름을 부으라고 선지자 사무엘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하나 하나 다 통과했는데, 다 아니라고 했습니다. 맨 나중에 다윗이 나타났을 때 그 때 바로 이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할 때 그의 외형적인 것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중심을 보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일을 맡겨도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작은 일을 가지고도 큰 유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보실 때에 언제 어디서든지 맡길만하고 또 세울만하고 부탁할만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100% 다 완벽하지는 못해도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22절) 우리가 무엇을 할 때에 내 뜻을 주장하고 관철시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귀한 승리요 성공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 성공은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나의 영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한 겟세마네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처럼 우리도 '주여, 주의 뜻을 이루어주옵소서. 주의 뜻을 헤아려 알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시고, 예수님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으면 부모는 닮은 자식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어쩌면 너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기뻐하는 일을 그렇게도 철저하게 잘하느냐?' 이렇게 칭찬할만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그 뜻을 귀히 여기면 언제나 우리는 자신의 소리가,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오히려 기뻐하고, 무언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보아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일에 완벽하고 능수 능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만이 성공이 아닙니다. 나의 계획한 것이 무너져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그게 바로 성공입니다.
이 세상에서 '출세'라는 말을 합니다. 남보다 뛰어나고 앞서며, 남보다 더 지위 명예 권세를 가지고, 남보다 더 돈을 많이 벌고, 남보다 더 잘 생기고 똑똑하고 챔피언이 되고 일등하고 기수가 되어 선두주자가 되면 성공했다고 말하는데, 이보다 더 큰 성공이 있습니다. 남을 많이 성공시켜놓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보다 더 큰 성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4:15에 보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사람이 계획해도 그것을 이루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오늘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 땅에 나타내게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2에 보면 주님께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2) 시편 136장 1절에서 26절까지 보면 다윗의 감사가 26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삶과 일들이 감사로 시작되고 진행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찌모라 간조는 '감사는 은혜 받는 그릇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조금 있는 사람은 은혜를 조금 받은 사람이고, 감사가 많이 있는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세익스피어는 '감사가 없는 인생은 겨울 바람에 눈보라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넷째, 철저한 회개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다윗은 사무엘하 12:15이하에 보면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서 지은 죄를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삼하 12:16) 그 결과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인과 죄인의 차이는 회개를 했느냐, 안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모든 죄를 씻음 받으면 죄인이지만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주의 긍휼하심을 입고 의인의 칭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옥은 죄 많은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회개하여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으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고 말씀했습니다.
지난 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그릇으로 선택하여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크고 귀하고 비싼 그릇일지라도 그릇이 더러우면 거기에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릇은 깨끗해야 됩니다. 말씀으로 죄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함으로 죄를 깨끗이 씻음 받고 성령의 불로 죄를 태워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더러운 죄를 성령의 불로 다 소멸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6:6,7).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성령의 불이 임해서 모든 죄가 소멸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더 귀한 것을 여러분에게 맡겨주십니다.
다섯째, 성전을 사모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성전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곳(시 11:4)이요, 간구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시 28:2)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교회를 볼 때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사모하는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자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 안에서 다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주님을 함께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하나님의 전을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시편 122:6에 보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는 성도들,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는 나라의 지도자들, 교회를 사랑하는 이 땅의 모든 창조 받은 인생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84:4에 보면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2,13)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다윗은 성령으로 크게 감동을 입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쓰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근심 걱정이 물러가고, 모든 질병이 소멸되고, 모든 어리석음과 미련함도 제거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낮은 자가 높아지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주의 영광이 여러분에게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약한 자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성령은 바로 능력입니다. 성령은 바로 지혜입니다. 성령은 바로 생명입니다. 성령은 바로 영광입니다. 주의 신으로 충만하여 다윗처럼 선택받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감사할 줄 알고 철저히 회개할 줄 아는 사람, 성전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을 입은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시는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자녀로 키우라
행 13장 21~23절 / 엄기호목사
여섯 남매를 모두 예일대, 하버드대 등 명문대에 보낸 어머니가 있습니다. 게다가 네 아들 중 두 명 은 미국에서 고위 공직에 올랐습니다. 얼마 전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사람으로 키운 다>는 책을 펴낸 전혜성(77)씨 이야기입니다. 전 씨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 시절 인권담당 차관보를 지내고 현재 예일대 로스쿨 학장 으로 재직 중인 고홍주(52. 해럴드 고)씨의 어머니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 씨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도 “저는 아이들에게 ‘항상 남과 사회에 보탬이 되 는 사람이 돼라’고 일렀습니다. 부모한테 섬김을 받는 아이, 자신을 섬기는 아이, 그 래서 남을 섬길 줄 아는 아이가 진정한 리더로 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아이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심으로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요즘 공교육에 대한 신뢰, 천정부지로 치솟는 사교육비, 조기교육, 조기유학 등 교육문 제로 말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점에 전혜성 씨를 보면서 공교육이나 사교육보다 더 중 요한 것은 가정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는 가장 좋은 선생님입니다’라는 광고처럼, 어떤 선생 님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엄마, 아빠입니다. 요즘처럼 청소년 범죄가 심각하고, 우울증에 자살하는 아이들이 나날이 증가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학교 선생님들에게만 책임이 있을까요? 우리 가정에, 부모인 우리 자신에게 먼저 문제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거는 기대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자녀들이 이 시대 에 꼭 필요한 존재, 이 시대에 크게 쓰임 받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녀들을 이 시대에 필요한 인재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강한 힘의 소유자로 키우십시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예수라고 증거하면서 하나님이 택 하신 인물들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인물 , 특별히 다윗에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 볼 때 다윗은 당대에도 필요한 존재였으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였습 니다. 그런 다윗은 더 나아가 인류역사에 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처음 등장하는 때는 그가 대략 15세 전후의 소년일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이 15살의 철부지일 때 벌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 칭찬하셨 습니다. 소년 다윗의 어떤 면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요? 그는 여러 가지 면으로 탁월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양을 칠 때 맹수가 공격해 와도 담대히 맹수를 물리치고 양을 지켰습니다(삼상 17:34~36). 악한 왕 사울이 마음의 평정 을 잃고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소년 다윗은 수금을 가지고 그 왕 앞에 나아가 왕을 잠 잠하게 할 수 있었던 용기와 지혜로움이 있었습니다. 골리앗이라고 하는 무서운 장군이 이스라엘 군대를 공포에 떨게 했지만 그는 작은 물맷돌 하나를 들고 나가서 그를 일순 간에 침몰시킬 수 있을 만큼 보이지 않는 무서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힘은 어떤 외형적인 풍채나 육체에서 나오는 완력, 혹은 돈이나 권력을 의지하고 나오는 그런 위력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갖고 있는 내 면에서 나오는 힘이었습니다.
요즘 지나치게 자녀를 무분별한 사랑으로 키우는 부모들을 많이 봅니다. 자녀가 하나, 둘이다 보니 너무나 지나친 과잉보호로 자녀들을 망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과잉보호 속에 자란 아이들이 과연 성인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 에게 다윗과 같은 내면의 용기와 강함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자녀의 올바른 교육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부모가 대신해 주고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처럼 강한 자녀로 키 워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그 어려움을 헤쳐 나아갈 용 기 있는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영적으로 철저히 무장된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다윗이 그와 같이 강했던 까닭은 그가 영감있는 소년이었기 때 문입니다. 영감이란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 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탁월한 믿음의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가문은 믿음의 조상들이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교육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려서 부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축복받 은 이야기를 철저히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십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성령의 역 사를 체험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다윗은 아무도 대항할 수 없는 강한, 아주 무서운 소 년이 되었습니다(삼상 17:45). 다윗의 강한 힘은 성령의 뜨거운 감동을 받았던 그의 내면의 세계에서 나오는 힘이었습니다. 어른들은 흔히들 어린 아이들은 아직 어리 기 때문에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한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는 열 살이 되기 도 전에 성령의 영감을 받아 위대한 인물로 준비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씀의 교육과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만이 우리들의 자녀들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그 말씀을 통해서 자라고, 그 말씀과 함께 성령 의 영감을 받으면 우리 자녀들은 비록 나이가 어릴지라도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불의 앞에서도, 골리앗과 같은 원수 앞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담대한 강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영감으로 무장된 자녀로 키우는 것만이 이 시대가 필요로 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을 수 있는 강한 자녀로 키울 수 있는 방법이며, 그가 성장한 어른이 되어서도 하나 님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길입니다(요일 5:4 ; 잠 14:27).
그리고 꿈과 목표가 분명한 자녀로 키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꿈이 있는 자를 통해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행 하시기 위해 꿈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이상이나 꿈과 는 상관없이 그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 다. 현대의 과학은 인간을 편하게 했지만 동시에 생각하기 싫어하고, 창조하기 보다는 창조 된 것을 그저 받아들이게만 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자라나는 아 이들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갈수록 증가하는 청소년 범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주범으로 폭력 적이고 퇴폐적인 컴퓨터 게임과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를 꼽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점점 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앞에서 꿈을 잃어가고 , 늦은 밤까지 학원을 순례하며 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점은 자녀들에게 있는 것 이 아니라 바로 우리 부모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 부모 들이 정신을 차리고 꿈을 가지고 자녀를 키워야 하며, 우리의 자녀들을 꿈이 있는 아이 로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 가정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갖고 굳게 서기보다는 자꾸 변화되어가는 세상의 교육관에 물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성경적인 자녀교육 에 대한 자신을 잃고, 세상을 기웃거리며 그 물결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들의 삶이 하나님 중심이 되어서,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성령으로 무장된 강한 자녀로 잘 키워야 합 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갖고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부모로서의 사명입니다. 자녀를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으로 키우겠다고 아직 부모의 품이 좋은 아이들을 이국땅 에 보낼 것이 아니라, 세상 교육에서만 조기교육을 할 것이 아니라, 신앙교육의 조기 교육을 통해 먼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녀로 키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좋은 선생님은 바로 우리 자신들임을 항상 기 억하고, 자녀들을 이 시대는 물론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로 키우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