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조모상(呑棗模象)
대추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혀로 그 모양을 더듬는다는 말이다.
呑 : 삼킬 탄(口/4)
棗 : 대추 조(木/8)
模 : 본뜰 모(木/11)
象 : 코끼리 상(豕/4)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의 심문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 중 권철신(權哲身)의 처남 남필용(南必容)의 공초(供招)는 이랬다. "제가 여러 해 동안 사학(邪學)을 독실히 믿은 마음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라에서 지극히 엄하게 금지하고 있는지라 감히 옛것을 고쳐 새로움을 도모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권철신은 제사를 갑작스레 폐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 밥과 국만으로 대략 진설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그 말에 따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폐하지는 않겠습니다."
국금(國禁)을 따르겠다면서도 신앙을 버리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제사를 드리기는 하겠는데 흉내만 내겠다는 얘기였다.
이 진술에 대해 형조에서 내린 판결문은 이랬다. "이 죄수는 전후의 공사(供辭)가 모두 골동설화(汨董說話)요 탄조모상(呑棗模象)이라 입으로는 그렇다 하면서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다(口然心否). 제사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해놓고 억지로 대략 지내겠다 하고, 사학이 좋다고 하고선 조정의 명령에 따라 버려서 끊겠다고 말한다."
표현이 재미있다. 골동설화는 골동품처럼 케케묵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란 뜻이다. 탄조모상은 대추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혀로 그 모양을 더듬는다는 얘기다.
대추는 가운데 씨가 있어 함부로 씹다가는 이빨을 다친다. 혀로 살살 굴려 과육 부분을 가늠해 조금씩 베어 물어야 해서 이런 말이 나왔다. 예각을 피해 우물쭈물 구렁이 담 넘어가는 소리만 한다는 뜻이다. 말로는 수긍하는 체하며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겠다고 하면 죽음이 기다린다. 죽기는 싫고 배교를 선언할 마음도 없다. 그래서 그는 이도 저도 아닌 말로 호도(糊塗)해서 상황을 모면할 작정을 했다.
그 결과 그는 제사를 전폐하겠다는 놈보다는 조금 낫고, 이미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으니 죽음을 감하여 강령(康翎) 땅으로 유배 보내라는 판결이 났다. 긴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니면서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대추알 우물대는 탄조모상의 두루뭉수리 화법으로 목숨을 건졌다.
▶️ 呑(삼킬 탄)은 형성문자로 吞(탄)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千(천, 탄)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呑(탄)은 성(姓)의 하나로 ①삼키다 ②싸다 ③감추다 ④경시(輕視)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토할 토(吐)이다. 용례로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음을 탄묵(呑默), 하늘을 삼킨다는 뜻으로 파도가 매우 심함을 이르는 말을 탄천(呑天), 알약이나 가루약 따위를 삼켜서 넘김을 탄하(呑下), 삼키는 일과 뱉는 일을 탄토(呑吐), 남의 재물이나 영토를 강제로 빼앗음(強呑), 아울러 삼킨다는 뜻으로 남의 재물이나 영토 등을 강제로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삼음을 병탄(竝呑), 고래가 작은 물고기를 통째로 삼킨다는 뜻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병합하여 자기 마음대로 함을 경탄(鯨呑), 소를 삼킬 만한 장대한 기상을 일컫는 말을 탄우지기(呑牛之氣), 배를 삼킬 만한 큰 고기라는 뜻으로 장대한 기상이나 인물을 일컫는 말을 탄주지어(呑舟之魚), 칼을 삼켜 창자를 도려낸다는 뜻으로 사악한 마음을 없애고 새로운 사람이 됨을 이르는 말을 탄도괄장(呑刀刮腸),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을 감춤을 일컫는 말을 탄성엄읍(呑聲掩泣), 개 약과 먹듯이 맛도 모르고 먹음을 이르는 말을 구탄약과(狗呑藥果), 똑똑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함을 이르는 말을 조탄골돌(棗呑鶻突), 맑은 것과 탁한 것을 함께 삼킨다는 뜻으로 선악을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을 이르는 말을 청탁병탄(淸濁倂呑), 남의 시가나 문장 등을 그대로 흉내내어 조금도 독창적인 점이 없다는 말을 활박생탄(活剝生呑) 등에 쓰인다.
▶️ 棗(대추 조)는 회의문자로 枣(조)의 본자(本字)이다. 대추나무는 가시가 많음으로 가시를 겹쳤다. 그래서 棗(조)는 ①대추 ②대추나무를 뜻한다. 용례로는 대추와 밤 또는 신부가 시부모에게 드리는 폐백을 조율(棗栗), 대추를 볶아 짠 기름을 조양(棗瓤), 대추를 술에 담가 만든 초를 조초(棗醋), 대추를 말려서 만든 포를 조포(棗脯), 꿀에 절인 대추를 당조(糖棗), 꿀에 조린 대추를 밀조(蜜棗), 말린 대추를 건조(乾棗), 혼례에서 시아버지가 새 며느리의 폐백 대추를 받음을 무조(撫棗), 대추와 찹쌀을 섞어 쑨 죽을 조미죽(棗米粥), 대추를 곤 것을 꿀에 섞어 설탕과 계피와 후추가루를 넣어서 동글게 빚어 만든 음식을 조유정(棗油錠), 배는 희고 갈기와 꼬리가 검은 말을 조류마(棗騮馬), 꿀이나 설탕에 버무려서 시루에 쪄 말린 대추를 밀건조(蜜乾棗), 똑똑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함을 이르는 말을 조탄골돌(棗呑鶻突), 제사의 제물을 진설할 때 동편에서부터 대추 밤 배 감 순으로 놓으며 그 외의 과일은 순서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율이시(棗栗梨枾), 제물을 차릴 때 대추는 동쪽에 밤은 서쪽에 놓는다는 말을 조동율서(棗東栗西) 등에 쓰인다.
▶️ 模(본뜰 모/모호할 모)는 ❶형성문자로 橅(모)와 동자(同字)이다. 음(音)을 나타내는 某(모, 막)는 해질녘, 여기에서는 물건이 보이지 않게 되다, 위로부터 뒤집어 씌운다는 뜻을 나타냄. 模(모)는 나무테로 찰흙을 둘러 싸아 질그릇을 만드는 것, 나중에 무엇이든 물건을 만다는 표준으로 하는 것, 본이란 뜻으로 쓴다. 본으로 하다와 같이 동사로 쓰일 때는 본디 摸(모)라고 썼으나 지금은 그 뜻인 때도 模(모)라 쓴다. ❷형성문자로 模자는 ‘형상’이나 ‘본뜨다’, ‘본받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模자는 木(나무 목)자와 莫(없을 막)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莫자는 ‘없다’라는 뜻을 가지고는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模자는 나무를 깎아 만든 틀을 뜻하기 위한 글자였다. 模자가 ‘형상’이나 ‘본뜨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같은 모양을 본뜨던 틀에서 유래한 것이다. 模자는 ‘법도’나 ‘양식’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데, 이는 정해진 규격에 맞춰 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模(모)는 ①본뜨다, 본받다 ②모호하다(模糊--) ③쓰다듬다, 문지르다 ④법(法), 법식(法式: 법도와 양식) ⑤본(本), 본보기(本--) ⑥무늬, 문채(文彩) ⑦모양, 형상(形象) ⑧거푸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본뜰 방(倣)이다. 용례로는 겉으로 나타나는 생김새나 됨됨이를 모양(模樣), 흐리어 똑똑하지 못함을 모호(模糊), 본받아 배울 만한 본보기를 모범(模範), 다른 것을 보고 본뜨거나 본받음을 모방(模倣), 똑같은 모양의 물건을 만들기 위한 틀을 모형(模型), 본떠서 만듦을 모조(模造), 무엇을 본으로 삼아 그대로 만들거나 행하는 일을 모습(模襲), 사물을 형체 그대로 그림을 또는 어떤 그림을 본보기로 그와 똑같이 본을 떠서 그림을 모사(模寫), 본받아 배울 만한 본보기를 모표(模表), 실제의 것을 흉내내어 시험적으로 해 보는 일을 모의(模擬),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떠서 나타낸 것을 모상(模相), 이미 있는 조각 작품을 보고 그대로 본떠 새김을 모각(模刻), 남의 노래를 흉내내는 일을 모창(模唱), 딴 물건을 본떠서 만든 물건을 모조품(模造品), 모범이 될 만한 것을 모범적(模範的), 여러 뜻이 뒤섞여 정확하게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기 어려운 말의 성질을 모호성(模糊性), 교도소의 규칙을 잘 지켜 다른 죄수의 모범이 되는 죄수를 모범수(模範囚), 일의 범위가 넓고 큼을 대규모(大規模), 일의 범위가 매우 작음을 소규모(小規模), 특정한 사람의 목소리나 또는 짐승이나 새 등의 소리를 그럴 듯하게 흉내 내는 일을 일컫는 말을 성대모사(聲帶模寫), 사물의 이치가 희미하고 분명치 않음을 이르는 말을 애매모호(曖昧模糊) 등에 쓰인다.
▶️ 象(코끼리 상)은 ❶상형문자로 코끼리 모양으로 코와 귀의 특징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象자는 '코끼리'를 그린 글자이다. 象자는 단지 자형에 豕(돼지 시)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豕자 부수에 들어가 있지만 ‘돼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象자는 코가 긴 코끼리를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는 황하 유역까지 코끼리가 서식했었다. 그래서 象자는 고대 중국인들이 직접 코끼리를 보고 만든 글자이다. 중국의 많은 역사기록에도 코끼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코끼리를 본뜬 여러 유물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만을 봐도 코끼리는 고대 중국인들과 매우 가까운 동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은(殷)나라 이후 기후변화와 함께 농경문화가 확산하면서 코끼리의 개체 수는 급감하였고 지금은 동남아시아와 맞닿아 있는 일부 경계지역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코끼리가 일찍 사라져서인지 象자는 '코끼리'라는 뜻 외에도 '모습'이나 '형상'이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象(상)은 (1)장기 짝의 하나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코끼리 ②상아(象牙) ③꼴, 모양, 형상 ④얼굴 모양, 초상(肖像) ⑤법(法), 법제(法制) ⑥징후(徵候), 조짐(兆朕) ⑦도리(道理) ⑧점괘(占卦: 점을 쳐서 나오는 괘) ⑨통변(通辯) ⑩역법(曆法) ⑪통역관(通譯官) ⑫문궐(門闕: 교령을 게시하는 곳) ⑬무악(舞樂)의 이름, 춤의 이름 ⑭술잔 ⑮천상(天象: 천체가 변화하는 여러 현상) ⑯상징하다 ⑰유추하다 ⑱본뜨다, 그리다 ⑲표현하다 ⑳본받다 ㉑따르다 ㉒같다, 비슷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모양 형(形)이다. 용례로는 추상적인 사물을 구체화 하는 것을 상징(象徵), 사물의 형상을 본뜸을 상형(象形), 코끼리의 어금니를 상아(象牙), 코끼리가 끄는 수레를 상거(象車), 코끼리의 뼈를 상골(象骨), 용모가 공손함을 상공(象恭), 붓을 달리 일컫는 말을 상관(象管),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목적이 되는 사물이나 상대가 되는 사람을 대상(對象), 눈 앞에 나타나 보이는 사물의 형상을 현상(現象), 온갖 물건의 형상을 만상(萬象), 어떤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하였을 때 그 대상이 사람의 마음에 주는 느낌을 인상(印象), 마음속에 떠오르는 직관적 인상을 심상(心象), 관찰할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나는 사물이나 현상을 사상(事象), 코끼리는 상아가 있음으로 해서 죽음을 당한다는 뜻으로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화를 입음을 이르는 말을 상치분신(象齒焚身), 여러 맹인이 코끼리를 더듬는다는 뜻으로 즉 자기의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사물을 그릇 판단함을 이르는 말을 군맹무상(群盲撫象),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체를 이르는 말을 유상무상(有象無象), 우주 안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이르는 말을 삼라만상(森羅萬象), 천하가 태평할 때는 이를 지적하여 말할 만한 형상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태평무상(太平無象)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