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시를 쓰고 싶어하는 여러분에게(2) / 이승하(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추기> 시인 송수권은 자선시집 <여승>에 실은 배한봉 시인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시는 사유재산이고 비밀재산이에요. 그런데 대중을 상대로 유통언어를 얼마나 많이 뿌리는가요? 그런 시를 나는 '뽕짝조' 타령이라고 부르거든요. 그것이 카페정서지 민족정서라곤 볼 수 없어요. 대학 강단에선 언급도 안되는 시들이 바깥 세상을 얼마나 오염시키는가요. 베스트셀러 시집들의 속성이 그렇잖아요. 말초적 감각을 흔드는..., 그래서 잘 팔리는 시인들이 따로 있지요. 이런 현상은 저널리즘이 문제입니다. 아카데미즘이 아닌...., 시를 보는 눈이 천박한 독자 수준을 넘지 못해요. 문창과 신입생들에게서 이 유통언어를 걷어내는 데 1년이 넘게 걸려요. 또 사회교육원 시 전문반만 해도 뽕짝조에 물들어 자기 사적인 비밀언어를 무덤 쓰고 살아요. 시가 기본수준도 안되는 원인이 이 때문인 줄 모르니 여고생 때 썼던 시를 평생 쓰고 있는 우스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추기> 시인 유용주의 다음 "고백"을 들어보자 .....참 부드럽고 아늑하고 겉보기에 풍성한 곳을 많이도 찾아 다녔다네. 사근사근 혓바닥에 구르는 당의정처럼 독이 더 많이 들어 있는 연애시의 마을, 자기가 쓰고도 무슨 말을 썼는지 모른 해독 불가능한 난해시의 패거리, 요설과 장광설 하나로 포스트모던의 적자임을 강조하는 외국 입양을 못해 안달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임, 엄살과 광기로 얼룩진 반장들 동네, 공식을 만들어 놓고 언어를 조립하는 조립식 건축업자들의 단체,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도사풍의 시, 끊임없이 남의 시를 조금씩 베끼는 쥐새끼들의 시, 주제만 너무 주장하다가 그 주장에 치어 저도 감당하지 못할 말을 주저리주저리 동어 반복하는 사람들까지 수 없는 마을과 동네를 기웃거렸다네. 한때는 그 사람들과 들고나면서 만고풍상을 겪었지만 결국 문학이란 사람살이에서 오는 눈물겨움 아니던가. 잘 드러나지 않은 그늘의, 배면에 깔려 있는, 생명 있는 것들의 안쓰러움 아니던가. 모시고 섬기는 일에 너무 인색해. 모두들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지금 말한 내 말도 내가 그런 과정을 거쳐 오면서 부화뇌동했다는 고백을 하기 위함일세. - 서정시학 2002년 여름호
<추기>오늘의 우리 시를 읽는 대중들은 김소월을 뛰어넘지 못하는 소박한 수준임에 비추어 정지용 이상의 수준은 잘 모르겠다고 손사래를 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요즘의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시들을 한두 편 예로 들면 대체로 이런 부류의 시들이다.
①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 뛰어든 / 나는 / 소금인형처럼 / 흔적도 없이 / 녹아 버렸네
② 그대를 만나던 날 /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 착한 눈빛, 해맑은 웃음 /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에도 / 따뜻한 배려가 있어 / 잠시 동안 함께 있었는데 / 오래 사귄 친구처럼 /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①은 류시화의 '소금인형' ②는 용혜원의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라는 시들이다. 그래도 류시화의 경우는 깊이 있는 명상을 동반하는 시이므로 나은 편이지만 용혜원의 경우는 사춘기 소년 소녀들을 겨냥한 얄팍한 감상주의의 옷을 입고 있으며 그것을 한 꺼풀 벗기면 에로틱한 연애편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글에선가 이승하 시인이 지적했듯이 류시화의 시는 이 땅의 현실이 완전히 제거된 신비주의적 명상 내지는 잠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제가 있고, 목사 시인인 용혜원의 시는 소녀적인 감상을 포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둘 다 상업적인 전략의 차원에서 쓰여진 시라 할 것이다 - 강인한 '시와 시인, 독자와 시의 거리'―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중에서
<추기> 시는 언어예술이기에 시인은 말을 잘 부릴줄 알아야 한다. 또한 시는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이른바 진정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시는 새로워야 한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참신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시와는 다른 목소리와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런 것들이 또다른 시와의 변별성이며 개성이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의 모험을 해야 한다. 그 결과 얻어지는 것이 시의 독창성이며, 시의 진실이며, 시의 감동이며, 시의 진정한 모습으로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다. - 제13회 <시와 사람> 신인상 심사평 중에서
<추기>...딸의 신발이 작다고 신발을 벗기고 발가락을 자르는 아버지, 내 몸을 둘둘 말아 접시에 올려놓았더니 나를 집어먹으려는 어머니, 몸이 기우뚱거리지 못하도록 아버지에게 자신을 쾅쾅 박아달라는 딸..., 그러나 여성시에 관한 한 이런 진술들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조말선의 시에는 박서원의 자기 신체 훼손, 노혜경의 카니발리즘, 김언희의 도발적 상상력 등 선배 여성시인들의 언어가 큰 변주 없이 한 집에 모여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의 낡음이 사유의 낡음과 무관하지 않다면, 언어의 답습은 적지 않은 결함으로 지적될 수 있다. ...한국시에 관한 한, 서정적 경향의 시라고 분류되는 것에는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부정적 측면이 존재한다. 대체로 자연친화적이고, 복고적이며, 전근대적 삶에 향수를 느끼고 있고, 세계의 불화나 갈등 보다 화해나 조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안이한 감상성에서 탈피하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문단에서 여전히 주류를 점하고 있는 이러한 시들의 생산은, 정치적 현실로부터 독립성을 지키지 못했던 제도권 문학의 탓도 있지만, 최근 생태주의적 인식의 대두에 고무되어 목소리를 더 높이는 경향이 있다...안이한 서정시일수록 세계의 복잡다단함과 폭력성을 직시하기보다는 대상과의 합일이 가능하다는 사고에 기울어지는 추세가 있다. 그를 위해 순진무구한 자아를 설정하거나, 세계와의 합일이 가능한 시대나 지역이라고 생각되는 전근대 또는 문명화되지 않은 영역이 등장하는 경향이 한국 서정시에 빈번하다. - 정문순 (다층 2002년 겨울호 '2002년 시를 점검한다' 중에서)
<추기> 요즘 읽는 시들 중 많은 것은, 비록 말장난의 시라도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이라는 개념도, 대화라는 개념도 없다. 중언부언 도대체 요령부득인, 그래서 안이하고 탄력없는 시가 새로움이란 가면을 쓰고 난무한다. - 신경림, 시집<뿔>에 실은 '시인이라 무엇인가' 중에서
<추기> 다음은 시의 문장에 관한 이희중의 글이다. 시에 쓰이는 문장이 모두 통사적으로 완벽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까다롭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그래야 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일상의 말도 마찬가지이지만, 자명하게도 시가 요구하는 통사적 완성은 표현을 제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 요청된다. 시인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표현할 통사구조를 구하지 못했을 때, 또는 정확한 전달을 원하지 않을 때, 통사적 완성을 포기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은 이를테면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도 깊은 뜻을 눈치채지 못할 때도 생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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