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뭔가 글 하나는 써야 하지 않겠냐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다가 게시판에 글쓰는 꿈꾸까지 꾼 적 있는 미륵임다.
전술이라곤 앞에 마시는 술이라는 것밖에 모르는 넘이라 축구전술이니 뭐니 쓸 건덕지는 없고....
'한국팀 전력 분석'하면 한국전력 구조조정, 민영화 등이 연상되니 뭐 전력 분석..그런 것도 남의 야그고.....
관전평이라 함 나 경기장 가서 봤다, 아님 텔레비전으로 봤다...는 평이외에는 모르고...
그저 지금까지 '나도 경기보러 가겠슴다' 또는 '나도 가입했슴다'는 말밖에 쓸 건덕지가 없어 도대체 뭘 쓸까 고민 졸라했슴다.
그래서 하나 건진게 예부터 고민하게 했던 "김유신 동생 보희와 김춘추의 썸싱을 중심으로 본 축국(蹴鞠)", 이라는 논문 되겠슴다. 한마디로 하면 축국 그게 뭐냐는 거 되겠슴다. 딴지식으로 말하면 '우리 역사에서 축국 그것을 함 디벼보자'겠슴다.
좀 길고 기루함다. 읽기 싫음 지금이라도 '← 뒤로' 눌러주심 됨다.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조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함다.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그 언니[姉]가 꿈에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오줌을 누었더니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졌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어 꿈 값을 치루었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청컨대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 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고름을] 꿰메게 하였다. 그의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꿰메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눈부실 정도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루었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法敏)이다. 왕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이다. 법민은 용모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영휘(永徽) 초에 당나라에 갔을 때 고종(高宗)이 태부경(太府卿)의 관작을 주었다. 태종 원년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이 되었다가 얼마 후 태자가 되었다. 현경(顯慶) 5년(660)에 태종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알다시피 신라는 골품제 나라임다. 한마디로 신분 구분(차별)이 졸라 쎈 나라라는 것임다. 늬들도 알다시피 왕도 첨엔 성골만 될 수 있었슴다. 그런데 남자로는 유일한 성골인 진평왕이 숟가락을 놓자 어쩔 수 없이 덕만공주, 즉 선덕여왕이 왕이 됨다.
이제 신라 귀족, 특히 진골들은 세빠지게 머리를 굴림다. '담에는 어쩔 수 없이 진골이 왕이 되는데....누가 될 것인가' 하고 말임다. '기왕이면 내가'가 되겠슴다.
이때 김유신도 시대 정신에 따라 머리를 굴림다.
"누가 왕이 될 것인가, 망한 나라 왕족(김유신은 가야국의 왕족이었다는 것, 모름 지금 배워두면 좋슴다)은 울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어느 넘을 잡아야 하는가" 뭐 이런 고민였을검다.
김유신이 결국 생각한 넘이 바로 김춘추였슴다. 그 김춘추를 자기 동생하고 응응응 시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짱을 봄다. 아 기회는 왔슴다. '그래 결정했어', 하고 작업을 들어가는데....그게 바로 축국였슴다.
그럼 여기서 축국이란 뭐시냐
일명 타구(打毬)·농주(弄珠),또는 기구(氣毬)라고도 함다. 쇠가죽 속에 털이나 겨를 넣어 공처럼 만들어 차는 놀이라는 검다. 짱골라 넘이 쓴 『구당서(舊唐書)』에도 고구려 넘들은 졸라 축국을 잘했다, 는 글 있다고 그 책 본 넘이 그럼다.
고려 때도 이규보라는 친구가 [공기 가득차서 공이 되었을 땐 사람에게 한번 채여 하늘 높이 올랐는데/ 공기 빠지자 사람 또한 흩어지니 쭈그러져 하나의 빈 주머니만 남았구나]라는 글을 남겼다고 함다. 동국이상국집(이동국집이 아니라), 난 이 책 안읽었지만 읽은 넘이 그럼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이규보는 인생의 허무함을 공에 비유했슴다. 공기빠진 공.....앙꼬없는 찐빵보다 얼마나 폼나는 말임까. 우리 것...이렇게 듁이는 표현 많슴다. 이야기가 자꾸자꾸 딴지스러워짐다....
다시 졸가지를 잡슴다.
그럼 축국은 어떻게 했냐......짱골라 왕운정이란 넘이 쓴 [축국도보(蹴鞠圖譜)]에는 구장(球場)에서 하는 축국과 구장이 없이 하는 축국, 양쪽에 골문을 설치한 축국 경기 등이 있다고 함다. (그 책 읽은 넘이 그랬슴다. 난 그 책 읽은 넘이 쓴 글만 읽었슴다.)
구장이 없이 아무데서나 하는 축국에는 한명에서 아홉명까기 하는게 있다 함다. 혼자서 차는 것을 1인장, 두 사람이 마주서서 차는 것이 2인장, 그럼 문제 냄다....세 사람, 네 사람이 마주서서 차는 것은? ...당근 3인장, 4인장되겠슴다.
암튼 축국도보라는 책 읽은 넘이 쓴 글을 믿어보면 구장에서 하는 축국은 중국 한(漢)나라 때 성행했다고 함다. 사면에 담장을 치고 구장 양쪽 끝에 각각 6개의 구멍을 파놓고 공을 차서 그 구멍에 넣으면 승부가 나는 경기였다 함다. 글구 당나라 때에는 2개의 골문을 설치한 구장에서 축국을 하였담다. 글구 이 때부터 바람을 불어넣은 공을 사용하였는데, 경기 방식은 그물을 쳐놓은 대나무 2개를 세워서 골문을 만들고 편을 가른 2팀의 선수들이 상대편 골문 그물에 공을 차 넣으면 이기는 것이였담다. 옛날 축국은 인원 제한이 없이 양편이 같은 수이면 되었고 2개의 골문을 설치한 축국은 오늘날의 풋볼과 매우 흡사한 경기였다고 말함다.
아님 말고....그렇게 나왔으니 그냥 그렇구나라고 믿을 뿐임다. 난 그저 그 책 읽은 넘이 쓴 읽고 여기에 쓸 따름임다.
암튼 짱골라의 1∼9인장 놀이가 나중에 제기차기로 변했지만, 신라 때는 공을 차는 경기였다고 주장함다.(누군지는 기억안남다. 나 워낙 많은 책을 읽어 일일이 책 쓴 넘들 다 기억 못함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한 축국은 2인장 축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슴다.
참고로 수호지를 보면 첨에 송나라 휘종이 축국에 환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슴다. 고구라는 축국 귀신을 총리에 임명하면서 사건이 시작됨다.(이건 수호지 고우영 버전 보면 나옴다. 난 이 책은 봤슴다) 지금과 비교하자면 디제이가 축구에 미쳤고, 그래서 홍캡틴을 국무총리에 임명하는 셈이라 하겠슴다.
근데 울 나라에서는 골문을 세워서 한 축국의 기록이 있다고 글 쓴 넘 못봤슴다. 그러니 아마 없을검다.
조선시대에 2인장이나 3인장 같은 축국을 한 기록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있다고 그 책 읽은 넘은 말함다. 거기엔 “젊은이들이 축국 놀이를 하는데 공은 대포알만하고 위쪽에 꿩털을 꽂았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번갈아 차는데 땅에 떨어뜨리지 않아야 잘한다고 했다. 겨울부터 시작하여 설날에 많이 한다”고 있다함다. 읽은 넘이 그랬음다.
그런데 '순서대로 서로 번갈아 돌려가며 차다가 공을 땅에 떨어뜨리는 사람이 진다' 이거 분명 제기차기 되겠슴다. 나도 그런거 많이 해봤기 때문에 잘암다.
여기서 잠깐.....히딩크옹이 첨 울 나라 와서 왼발 오른발을 다 잘 쓰는 선수보고 뽕 갔다고 하는데..그게 다 어렸을 때부터 제기차기로 다져졌기 때문임다.
우리 축국이 제기로 이어지고 그 제기를 차던 울 국대 선수들이 히딩크를 뽕가게 만들고 그 히딩크의 지도로 월드컵 4강 들고.......뭔가 필이 오지 않슴까? (딴지처럼 똥꼬가 아려온다는 천박한 말 ..난 안씀다)
암튼 이렇게 고려시대까지 정치와 삶의 무대가 되었던 축국이 조선시대와서는 찬밥이 됨다. 그 이유는 뭔가......그게 바로 씨바스러운 '양반' 체통임다.
늬들이 잘 아는 이항복은 어린 시절 씨름과 축국을 일삼다 홀어머니의 꾸중을 들었다고 함다. 왜, 양반이 축국을 하다니 체통이 없다는 검다. 항복형이 쓴 '백사집'이란 책 읽은 넘이 그렇게 말했슴다. 그니까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공을 찬다는 것은 시빠시럽다고 생각했던 것임다. 내가 생각해도 조선 양반들, 충분히 그럴 넘들임다. 정말 씨바스럽슴다.
단군신화에서도 알다시피 우리의 상징은 곰임다. 우직하지만 힘이있는..그런 상징이 조선으로 오면서 속이 텅비고 겉만 번드르르한 대나무, 겉은 고고하지만 톡치면 터질듯한 학...뭐 그렇게 됨다. 나 조선이란 나라, 중기부터는 졸라 미워함다. 최소한 임진왜란 후에는 왕조가 바뀌어야 됐다고 생각함다. 난리가 나자 왕부터 죄다 도망치는 그런 지배계급이 2백년을 더 지탱하는 나라, 아마 없을 검다.
.............이거 역사 이야기로 넘어갔슴다. 졸라.....
다시 시작함다.
조선시대 양반이 시바스럽게 생각한 축국, 그러나 민중은 축국을 씨바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슴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 그저 새끼줄을 둥글게 말아서 차거나 소나 돼지의 오줌통에 바람을 불어넣어 차기도 했던 것임다. 유전적으로 우리는 축구를 잘할 수밖에 없는 것임다.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다...이제는 이 말 믿어야 하지 않겠슴까?
잠깐만 뭔 이야기를 하려했는지, 앞을 다시 봐야겠슴다.. 졸가지를 잡아야 하니까....
각설하고.....잠깐 지나가는 이야기하나 하겠슴다.
앞에 옮겨 쓴 삼국사기 보면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루었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法敏)이다."라고 나옴다.
마치 김춘추가 유신옹 동생을 보고 뿅가서 청혼을 하고...뭐 그런거로 나오지만 삼국유사에는 그렇지 않슴다.
삼국유사는 삼국유사와 '임신하여'만 같슴다.
유신옹 뜻대로 춘추옹은 보희를 보고 뽕가서 둘이 응응응 합니다.
여기서 문제, 남녀가 응응응하면 결과는? 그렇슴다. 임신임다.
다시 문제, 연애하다가 응응응해서 여자가 애를 가졌을 때, 남자의 반응은?
졸라 도망가려고 한다.......맞슴다.
보희가 임신하자 김춘추는 그녀를 멀리함다.(음.....지독한 마초의 역사임다. 그런거는 좀 계승 창조안했음 좋은데....)
그런데 김유신이 누구임까. 어떻게 해서 만든 기횐데 그냥 있겠슴까?
다시 문제, 시집 안간 여동생이 임신을 했다. 오빠의 반응은?
그렇슴다. 듀길려고 뎜버듬다.
우리의 유신옹 역시 보희를 잡아다 처녀가 애를 뱄다고 불에 태워 죽이려 함다.
여기까지는 그저 그런 오빠임다.
그런데 이거 가만히 보면 김유신의 작전이었던 것임다.
선덕여왕이 행차를 하는 날, 그것도 자기 집 가까이 오는 날, 그리고 거기에 김춘추가 있는날...그날을 골라 온갖 폼을 잡으며 장작에 불을 붙임다. 보희를 죽이려고? 아님다. 보희가 죽음 큰일남다.
아마 연기만 졸라 나고 타지 않는 젖은 낭구를 쌓아 놓고 불을 지른 거다고 생각함다.
왜냐면.....연기를 본 선덕여왕, 그 이유를 알아오라 시키고....이유를 알게 된 선덕여왕, 김춘추에게 사람을 살려야 한다, 너 결혼해라..그렇게 말하고.....춘추는 어쩔 수 없이 유신옹 집으로 졸라 뛰어가서 나 결혼할테니 보희 살려도고...이렇게 마무리되는데.......
당시는 핸폰도 없을테니까......불이 붙기 시작하고 최소한 수 십분이 걸렸을텐데 보희는 멀짱하게 살았슴다.
어쨌든.......춘추는 보희와 결혼하고 김유신은 뒤에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함다. 선덕여왕이 죽자 아직 힘이 있는 다른 귀족들이 설칠까봐 진덕여왕을 세우고 그들을 제거할 시간을 번 다음......
아, 지금 역사 시간이 아니구나......죄송함다...졸라
이렇게 신라에서 축국은 정치적 음모의 수단이자 공간이 되었슴다. 정아마개 회장이 축구로 대통령 후보군에 낀 것 보면......역사는 참 아이스림잉 하다는 걸 알 수 있슴다.
자 이제는 분명해졌슴다.
백과사전 보면 나오는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 (오늘의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Flying Fish)호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식 축구의 보급은 1904년 서울의 관립(官立) 외국어학교에서 체육 과목의 하나로서 채택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축구 경기는 1906년 3월에 서울 삼선평(오늘의 삼선교 부근)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간의 시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들...죄다 구라되겠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뭔가 허전함다...마무리가 영........
하지만 더 먹고 싶을 때, 숟가락 놓자고.......뭔가 아쉬울 때, 끝내는 게 좋을 듯 하여 여기서 끝내겠슴다.
다만 또 기회되면, 조회수 졸라 많고 댓글도 여럿있음 다른 글로 제대로 된 마무리하겠슴다.
AC바졸라......
피에쑤
이 까페에 있는 분들 모두 합집합이 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어떤 교집합이 있기 때문에 가입한 것이겠죠.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른가 보다는 너와 내가 무엇이 같은지...그것을 먼저 생각하고 같은 영역이 있다는 것에 우선 만족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어제 오늘 올라온 글을 보면서...느낀 소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