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진 옛길을 걷다가
추석 연휴가 시작된 구월 넷째 목요일이다. 새벽에 일어나 어제 다녀온 주남 들녘 주천강 돌다리를 소재로 시조를 한 수 남겼다. “주남지 수문에서 시작된 주천 강물 / 판신과 주남 사이 희미한 내력 서린 / 자연석 돌무더기가 멋스럽게 보여라 // 들판서 멀리 보인 정병산 정상에서 / 커다란 덮개돌을 끌어와 놓았다는 / 그 전설 긴가민가해 갸우뚱한 고개다” ‘주남 돌다리 사연’ 전문이다.
아침 시조를 주천강 돌다리 사진과 함께 몇 지기들 카톡으로 전하고 식후 마음에 정한 산책 행선지로 길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이웃 동 꽃밭으로 나가니 꽃대감은 보이질 않고 안 씨 할머니만 뵙고 인사를 나누고 나는 나대로 일정을 수행했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양곡으로 가는 차를 타서 진해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 장복터널 못 미친 목장마을을 앞둔 관음사 입구에서 내렸다.
횡단보도는 평소 행인이나 자전거 이용객이 드물어 보행자가 조작 단추를 누르면 녹색불이 왔다. 녹색불에서 넓은 차로를 건너 진해로 가는 예전 마진터널을 향해 올랐다. 그곳 역시 아스팔트로 포장되었으나 장복터널이 뚫려 오가는 차량이 없어 한적했다. 목포에서 부산까지 이르는 2번 국도가 진해를 지나는 데였으나 이제는 새로운 찻길에 제2 장복터널까지 뚫어 개통을 앞두었다.
관음사 들머리부터 진해로 가는 옛길은 고목 벚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사이 어디쯤 한 그루 밤나무가 서 있었다. 조금 전 나를 앞질러 승용차로 지나갔던 운전자는 중년 부부로 차를 세워두고 갈색 윤이 나는 알밤을 줍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 거기에 밤이 떨어지는 줄 알고 찾아온 이들인 듯했다. 멧돼지가 시식할 알밤은 부지런한 사람 손길이 닿아 먼저 차지했다.
차량도 행인도 다니질 않은 호젓한 길을 따라가니 건너편에는 장복터널로 넘나드는 차들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붕붕거렸다. 가로수 벚나무는 연륜이 오래된 고목이라 밑둥치에 구멍이 숭숭 나 있기도 했다. 벚나무는 고목일수록 낙엽이 일찍 져 아직 서리 올 날이 많이 남았음에도 거의 나목이었다. 길섶 여뀌들도 때를 맞추어 꽃을 피웠는데 선홍색 이삭여뀌와 좁쌀 같은 흰여뀌였다.
갓길을 표시해둔 교통 안전봉에는 사마귀 한 마리가 거꾸로 붙어 있었는데 볼록한 배가 눈길을 끌었다. 바닷속 가시고기는 암컷이 알을 슬면 수컷이 찾아와 수정란을 뿌리고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 앙상한 뼈로 남았다. 죽어가는 수컷의 살점이 삭아 흩어지면 치어들이 먹고 자랐다. 사마귀는 짝짓기를 끝낸 후희로 암놈은 수놈을 잡아 삼켜 뱃속에 잉태한 새끼 영양분이 되었다.
배가 볼록했던 사마귀를 보면서 대를 잇는 종족 보존과 내일로 다가온 추석 명절 차례 풍습이 떠올랐다. 연전부터 우리 집안은 설과 추석의 차례와 조부모님과 부모님 기제사를 줄여 봄날에 통합한 시제로 지내고 있다. 형제에서 나누어진 조카들까지 늘어난 자손들이 때때마다 오가는 번거로움을 한 번으로 줄였다. 조상 숭모의 날에 조촐한 제수를 차려 맑은 술을 잔에 채워 올린다.
가시고기와 사마귀에서 연상된 차례와 기제사 풍습을 떠올리다가 어느새 마진터널에 닿았다. 넘나드는 차량이 아주 뜸해도 터널 내부 천정에는 조명을 훤하게 밝혀 놓았더랬다. 터널을 빠져나간 남쪽에 40여 년 전 여름 태풍 산사태를 수습하다 돌아간 해군 장병 8명의 혼을 기리는 순직비가 세워져 있었다. 도로변 벚나무 가지 사이로 잔잔한 진해 바다 일부가 호수처럼 드러났다.
진해 드림 로드 기점에서 청청한 소나무가 우거진 조각공원으로 내려섰다. 조각품들은 몇 차례 들러 낯이 익은지라 예사로 스쳐 지나 방창갑 시인 시비를 둘러봤다. 진해 출신 방창갑은 나보다 앞 세대 작고 시인으로 ‘꽃을 보는 마음’이라는 시가 빗돌에 새겨져 있었다. 쉼터에 한동안 앉아 소나무가 뿜어내는 음이온을 받아들이다 진해 문화센터로 내려서 창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23.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