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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韓江)=아리수의 역사에 대하여.
◉ 한강(韓江)은 한문으로 이 글자가 맞다.
그런데 사대주의자들이 그리고 왜놈의 앞잡이인
식민사관들이 한강(韓江)을 한강(漢江)이라고 만들었다.
한국에 있는 강이 어떻게 한강(漢江)이라고 하는지
우리의 자존심을 위하여도 한강(韓江)이라고 써야 한다.
곧 일본의 만행으로 우리나라의 큰 강이란 뜻으로 불리운
한강(韓江)을 한강(漢江) 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 고구려사에서 요동에 있는 것은 평양(平壤) 이라 하고
한반도 안에 있는 평양을 하평양(下平壤)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수(漢水)=한강(漢江)은 중국에 있는 황하를
말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한강(韓江)은 고구려사에서
그 당시에는 아리수 라고 부르고 있다.
고로 한수(漢水)나 한강(漢江)은 중국의 황하강을 말하고 있다.
◉ 백제 제3대 기루왕(己婁王): 서기 77년~128년 재위함.
백제의 시조 온조의 맏아들이 2대 다루왕이며 이 다루왕의 아들이 기루왕이다.
기루왕 때 특이한 기록으로는 97년(기루왕 21년)에
한강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대 사서에서 용은 곧잘 왕을 상징하며 신비한 일을 상징한다.
108년(기루왕 32년)에는 가뭄이 극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백제 16대 진사왕(辰斯王) 때의 역사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진사왕의 운명은 고구려에서 본명이 담덕(談德)이
광개토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비극적 종말의 서막을 열게 된다.
진사왕과 광개토왕은 392년인 진사왕 8년 광개토왕 2년에 전투에 만나게 된다.
광개토왕은 4만의 병력으로 백제 북쪽 국경의 성들을 함락시키면서
노도처럼 밀려든다.
이때 한강 북쪽의 10개 성이 고구려 수중에 떨어지고
난공불락이던 서해의 요충지 관미성
(關彌城)도 결국 고구려군에게 점령된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지만 대체로
지금의 황해 웅진반도와 강화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 관미성이 얼마나 공고했는지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즉위년 조에 잘나와 있다.
즉 관미성은 사방이 험한 절벽이며 그 주위에는
시퍼런 바닷물이 있어서 고구려 군사는 일곱
방면으로 20일 동안 공격해서야 겨우 함락시킬 수 있었다.
백제의 진사왕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역사에서 사라진다.
◉ 경자대원정: 서기 400년(영락 10년 즉 광개토대왕 10년)에 경자년(更子年)이며
고구려가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여
왜와 백제 임나를 토벌한 전투이다.
즉 백제,왜, 가야 등은 연합군을 형성하여
한반도 진출을 노리는 고구려에 대항하는 한편 신라를 압박하여
그전에 396년 봄에 드디어 대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백제로 향하였다.
이에 상륙작전을 시도하여 일팔성을 비롯한 50여개 성을 점령하고
아리수(한강) 이북을 장악하였다.
이에 결국 백제 17대 아신왕은 항복을 서약하고 신하의 예를 갖췄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백제 왕족 및 대신 10명을 볼모로 삼아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획득한 아리수(이당시는 한강 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아리수 라고 하였다)
이북의 백제땅 58개 성과 7백개 촌을 고구려 영토에 편입시켰다.
◉ 고구려 20대 장수왕 재위 63년인 475년 9월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 21대 개로왕은 탈출하다가 아차산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수왕은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백제와 일본이 중국의 남조에 해상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한편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장수왕 때 고구려의 국경은 서쪽에 요하 북쪽에 개원 남쪽에는
아산만과 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른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다시 말한다면 현도성, 요동성, 건안성, 졸본성, 미추홀,
위례성 어하라[於瑕羅: 북부여의 마지막 왕의 딸인
소서노(召西弩)의 나라] 개원 등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 궁예는 서기 896년(진성여왕 10년)에 임진강 연안을 공략하여
개성에 있던 왕건(王建) 부자의 투항을 받고 이어 여러 현을 점령하였다.
이때에 양길은 남쪽인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 등 30 여개 성을 취하고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망하고 말았다.
서기 899년(신라 52대 효공왕 3년이며 이때는 최치원이 면직되어
가야산 해인사로 은둔함)에
왕건을 출병하여 양주 견주(見州)를 복속하고
그 다음해에도 광주 춘주 당성 청주 괴양(괴산)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阿湌)의 벼슬을 주었다.
◉ 역사는 천재의 자질을 가진 김시습은 그 당시 세조찬탈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단종을 복위하다가 죽은 사육신을
딴 사람은 그 시신에 손을 못되었지만
그는 그 시신들을 등에 업고 한강을 건너 노량진 언덕에 안장하고
사육신충의가를 읆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 사육신은 사대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즉 단군의 혼을 살리기 위한
민족자존을 살리려고 한인재들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들을 다 죽이고 천재인 김시습은 이들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계룡산 동학사 삼은각(三隱閣: 고려의 역사를 끝까지 지키려다가 죽은 혼령인 목은 포은 야은을 제사지내는 곳)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이후 세조는 불경언해 사업을 위하여
효령대군의 청으로 빼어난 경지를 가진 김시습을 보고자 하였다.
즉 유학자들은 대국의 문자인 한자만을 고집하여
언문을 천시하고 거절하므로 인하여
왕실에서 한글로 해석함으로써 한글의 사용을 유포하게 되었다.
이에 호국불교의 맥을 이어온불교의 경전인
불경언해(佛經諺解: 한자의 불경을 한글로 풀이한 것) 사업을 시작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것이었다.
이때에 김시습의 빼어난 경지를 보게되었다.
이에 세조는 효령대군의 청을 받아들여 장안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세조는 절이름을 원각사(圓覺寺)라고 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파고다 공원이다.
이후 김시습은 원각사 낙성식에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찬시(圓覺讚詩)를 지어 올리고 다시금오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세조의 부름을 계속 물리쳤다.
천재인 김시습은 오세(五歲)에 세종대왕으로부터 경이란 칭호를 받은 그는
삼은과 사육신과단종을 위해
가을에 동학사에서 제사지내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초월한 우주에서 잠을 자면 될 것이다.
하면서 말하기를 가정은 왕실이오 사회는 교실이며지구는 병실이고
우주는 침실이니 내가 죽으면 충남 부여에 있는 만수산(萬壽山) 무량사
(無量寺)에 매장했다가 3년 후에 화장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김시습은 내가 죽은 이곳에산신각(山神閣)을 지어
먼 훗날에라도 이곳에 단군의 혼백이 모셔져 있음을 알게 하라고 하였다.
후세인들은 그를 즉 김시습을 생육신(生六臣) 이라고 불러 추앙했다.
◉ 병자호란이 일어난 그다음해인 1637년 1월 30일인 즉 45일 만에 성문을 열고
조선의 16대 국왕인 인조와 왕세자(소현세자)는
삼전도(三田渡: 한강 동편에 있음)에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움을 당하였다.
즉 인조는 땅바닥에 머리를 9번이나 박고
청나라 태종인 홍타시에게 사배를 올리는 치욕을 당하였다.
이를 사배(四拜) 구고두(九叩頭: 9번 땅바닥에 박음)라 한다.
결국 조선의 나라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그 다음해인
정축년(丁丑年)인 1637년부터 시작하여
1895년 청일전쟁으로 일본에게 패하는 날까지 무려 258년간이나
청나라에 복속되어 신하의예와 군사력을 키우지 못하게 한
병자호란 다음해인 정축년(丁丑年)에 정축약조(丁丑約條)의
11개 조항으로 청나라에 복속되어 결국 나라는 패망하였다.
즉 역사에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정축국치(丁丑國恥)의 치욕을 당하였다.
◉ 경복궁(景福宮)의 위치는 북쪽의 주산(主山)인 북악산(백악산)의 아래 이며
남쪽에는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동쪽에는 낙산이 있으며
서쪽에는 인왕산이 있고 내수(內水)인 청계천이 있으며
외수(外水)로는 한강(韓江)이 흐르며 궁의 왼쪽에는 종묘(宗廟)가 있고
오른쪽에 사직단(社稷壇)이 자리 잡고 있는 명당 터이다.
경복궁 앞에는 광화문(光化門)이 있고
동쪽에는 건춘문(建春文)이 있고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이 있고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이 있다.
그리고 일본놈들의 만행을 보면
일본의 만행으로 설날을 폐지하고
창덕궁 안에 동물원을 만들어 왕실의 권위를 짓밟았으며
경희궁(慶熙宮: 임금이 비상시 피하여 업무와 거처를 하는 곳) 터에다가
일본의 고관대작들의 집을 지었으며
조선의 인의예지신의 뜻이 담긴 즉 조상의 얼이 담긴 훌륭한 얼을 지워버리기
위해 즉 훌륭한 얼을 말살하기 위해 동서남북의 사대문의 이름인
흥인문(興仁門)을 동대문으로
돈의문(敦義門)을 서대문으로
숭례문(崇禮門)을 남대문으로
홍지문(弘智門)을 북대문으로 바꾸었다.
우리의 자존심과 훌륭한 얼을 빛내기 위하여도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홍지문으로 다시 불러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그리고 덕수궁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이라 하여
중국의 사대주의를 대변케 하였다.
또 일본의 만행으로 동의보감 등 우리 고유의 한의학(韓醫學)을
중국의 한의학(漢醫學)으로
유래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큰 강이란 뜻으로 불리운 한강(韓江)을
한강(漢江) 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이씨왕조 라고 만들었다.
경북궁 안에 조선총독부를 지어 조선왕조의 지맥을 끊어놓고
그 왕운을 이어 조선을 지배하려했다.
발해(대진국)의 역사를 중국사에 붙여 놓고
중국의 지배를 받은 민족으로 만들었다.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말살시키기 위해
단군왕검의 실록의 역사를 신화라고 만들었다.
일제괴광기(日帝怪狂期)=일제강점기 때 일본천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은 우리나라의 고귀한역사를 왜곡하였다.
즉 우리나라의 총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조선사(朝鮮史: 고조선을 포함한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원래 중추원(中樞院: 임금의 핵심기관)에서
편찬하기로 한 조선사의편수 작업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만들어
고귀하며 위대한 단군역사 외 무수한 역사를 왜곡 변절 단절하였다.
대한독립 만세를 부른 독립투사 독립의사를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잔학하게 잔혹하게죽였으며
또한 숱한 고문과 수모를 저질렀다.
이외 일본놈들의 만행은 수없이 많다.
반드시 그만행의 피해보상과 정신적 피해를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
◉ 김동삼(金東三)은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하르빈)에 거주하고 있는 정인호의 집에 투숙중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3일 순국하였다.
김동삼의 유언으로 내가 조국에 끼친 바(所=事)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달라 하여 그 유골을 한강에 표장(漂葬: 물에 뿌려 장례를 치름)
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 1960.4.19.학생민주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 되고
허정(許政: 윤보선에 대통령 후보를양보함)의 과도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각종 시책을 펴지를 못하고 그 뒤 민주당이 들어섰지만
3.15부정선거 등을 처리를 못하고 학생데모 노총관계 데모 등 무수히 일어났다.
1960.7.29일 국회의원총선에서 장면(張勉)정권이 선거에 압승하여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무능으로 정치와 데모 등으로 사회가 불안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 위협이 증가하였으며
이러한 과도정부(過渡政府)에 정군(正軍)의 군사혁명 세력의 움직임은
4.19.이후 처음으로
정군운동으로 사회 전반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사회 정치적 안정과 지위 신장과 권력욕구 불만과
사회의 부정부패와 또한 군부의 고급장교의 부정부패와 각종 군부비리
현상으로 인하여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육사 8기생들이 1960년 9월에 모의하여
1961.5.16.새벽에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여
제2공화국 장면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여
군사정변(쿠데타)이 성공하여 3일만에 국가재건최고위원회를 출범시켜
혁명공약 6개항을 발표하여 일어난 것을 5.16.군사혁명이라고 한다.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윤보선이 이때의 유명한 말로 올 것이 왔다. 라는 말을 함.
1962년 3월 23일 국가재건최고위원회에 노력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곧 하야함.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실시된 대통령선거에
민정당 후보자로 출마하여 박정희와 대결하여 근소한 차이로 패배함.
이외 한강에 대하여 나오는 역사의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우리의 얼이 담긴 한강을 바로 찾아서 써야 한다. (終)
☞ 이 글은 제가 2014년 4월 30일부터 전자책으로 발간을 시작하고 있는
홍익역사단지(弘益歷史團誌)
천자문(千字文) 총 25마당 중 제15마당에 나오는 글을 이곳에 먼저
올리옵니다.
桓紀 9211년 神市開天 5912년 檀紀 4347년 甲午年(갑오년) 西紀(서기) 2014년
5월 19일 월요일
삼라만상을 좋아하는 心操彿山(심조불산) 庸史(용사)
* 나머지 자료와 참고문헌은 제 블로그(자료실 또는 홍보실) 첫 글인
천지인(天地人)방으로 http://blog.naver.com/hhs0203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