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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0: 13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 ( 하 )
4]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또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하는 불신앙에 떨어지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행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면서 의와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 이 말씀을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① 시험이 임할 때
우리에게 회피할 길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로 하나님은 시험과는 무관한 분이심을 전제한다.
②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실 때
피할 길도 함께 예비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주관자이심을 전제한다. (Hendriksen).
그런데 본 절에서는 '즈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와 함께')이 사용되어 후자의 해석이 더욱 타당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며 또한 직면한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20년 전에 이런 말이 교계에서 회자되었다. IMF으로 모든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몇 분의 귀부인들이 안타깝게도 사회적으로 수모를 당했다. ‘일부’ 이웃의 어려움은, 그 후에 닥칠 ‘전체’의 어려움에 대한 ‘신호탄’이다. 그러므로 이웃의 어려움은, 내 어려움으로 알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성경의 예로 보나, 20년 전 역사로 보나 오늘날 우리 모두는 깨어있어야 할 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 모두가 하나님의 징계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20년 전 같은 경제난이나, 자연 재난이 닥칠 수 있다. 그러나 깨어있고 기도하는 사람은, 만에 하나라도 철저히 대비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가 H. G 웰스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는 가장 현저한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된다.”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의 실패, 과거의 오류, 과거의 비극이, 오늘이라는 역사의 장에서, 또 내일이라는 역사의 장에서 그대로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거울과 경계이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 10: 6) 그들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 11) 역사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경계’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경고를 받아야 한다.
특별히 말세 때의 경계,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종말의 시간이 더 가까워진 오늘 우리들을 위한 변함없는 거울이요, 경계라고 할 수가 있다.
5] 우리의 거울 : 박조준 목사 (고전 10: 1-13)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애굽에서 종살이 하며 고생할 때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흘리는 눈물을 보시고 우고를 아시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불러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려와서 내가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하나님의 은혜로 종살이 하던 땅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했지만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도 그럴 수 있는 것이 식생활만 시켜주면 이 막대한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다면 그 다음부터 당장 국고성을 짓는 일에 있어서 노동력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여러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재앙을 당할 때에는 바로가 그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다가도 그 재앙만 지나가고 나면 제자리에 돌아오곤 해서 열 번째 재앙인 애굽인의 장자와 맏짐승을 다 죽이는 재앙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왕을 비롯해서 온가정에서 맏아들이 죽는 재앙 앞에 애굽 땅은 통곡의 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이미 모세를 통해서 지시를 받고 양을 잡아 집집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서 그 피를 보고 하나님의 사자가 넘어가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움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희를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햇빛을 가리워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한기를 막아 주셨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2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어두운 밤에 자유를 찾아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민중들에게는 그 길을 비춰 주는 빛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밝은 태양 밑에서는 외적들의 공격의 대상이 될 위험이 있으므로 이스라엘과 대적들 사이를 가로막아 가리워 주며 보호해 주는 그늘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에게도 좌우를 분별할 수 없이 모두가 어둡고, 지척을 가릴 수 없는 환경과 예측을 불허하는 앞날을 가리기 위하여 우리의 이 어두운 마음을 그리고 앞길을 비춰 줄 빛이 요구됩니다. 더구나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원수들의 해를 입을 위험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를 쳐서 해치려는 무리들 앞에서 나를 가리워 주고 저들이 나를 겨누지 못하게 하고 흔들어 떨어뜨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줄 짙은 안개 같은 구름이 필요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은 언제나 우리 인간의 필요와 형편에 응하여 주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우리의 필요를 훨씬 더 정확하게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을 만한 분명한 이유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의무 앞에서 주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용기와 담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실패하여 낙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희망을 안겨 주십니다. 우리가 슬픔과 탄식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위로와 평강을 약속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의 신앙을 이렇게 간증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구름 기둥, 불 기둥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며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는 때때로 위험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도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위험과 공포와 환난의 때에도 함께 하실 뿐더러 새 날이 오게 하시고 새 소망이 넘치게 하시며 내일에 대해 기대를 가지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시고 계획하시고 건설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된다면 어떤 고난과 위험과 절망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믿지 못하는 사람은 이 고난 속에서 시들고 거꾸러지고, 저 무서운 절망의 심연 속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고, 그대로 하십니다.
그 다음은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에 이르렀을 때 뒤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것을 후회한 바로 왕이 자기의 기병대를 파견해서 쫓아옵니다. 다급한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라”는 모세의 지도를 받아 홍해가 육지같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고 뒤쫓아오던 애굽 왕의 기병대가 몰사하는 광경도 보았습니다. 모두가 감격스러운 것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본문 3~4절에 보니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하였는데, 이것은 저희가 광야를 지나면서 먹을 음식이 없어질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고, 마실 물이 없어 목이 말라할 때 반석에서 생수가 솟게 하여 사람들과 생물이 마셨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신령한 음식이요, 신령한 음료였습니다. 그리고 반석은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신령한 음식으로 배불림을 얻고 신령한 생수로 해갈을 얻으며, 낮에는 구름으로 서늘하게 가려 주고, 밤에는 불기둥이 따뜻하게 비춰 주며, 가는 길을 하루하루 인도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처음에는 모두가 신비해 보이고 놀라와 보여서 감사도 하고 감격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다 보니 신비한 사건이 평범해 보이고 감사와 감격도 점점 사라지게 되고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까 애굽에서 고생하고 천대받고 억울하던 생각은 다 잊혀지고 광야 생활에서 권태를 느끼고 지루하고 짜증스러운 생각마저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무슨 변화를 추구하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해방되던 때의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들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의 감격과 감사는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왜 다윗이 시편 103편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했습니까? 이렇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잊어버리면 배은망덕한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 보세요.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처음의 감격과 감사를 잊어버릴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게 되고 결국 유감스러운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저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을 지내는 동안에 미래 지향적인 생활이 아니라 과거 지향적인 생활을 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아무리 지루하고 어려운 생활이라고 하더라도 인내하는 중에 소망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야 했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심지어 애굽의 고기 가마 생각을 다시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고, 이쯤 되니 하나님의 마음과 모세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악을 즐겨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시지만 저희의 범하는 죄를 사랑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에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했습니다. 11절에도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동안에 행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당한 일 모두가 우리에게는 거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우리는 악을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 중에서 무슨 악을 행하였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 다 열거할 수 없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 중 몇 가지를 열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거울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본문 7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의 역사적인 배경은 구약 출애굽기 32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돌판에 십계명을 받는 데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모세가 보이지 않자 아론에게 찾아가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심입니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는다고 다른 지도자를 택하자고 했습니다.
아론은 이런 때 바른 지도를 했었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서 금고리를 모아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아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았습니다. 이 광경을 하늘에서 보신 하나님께서 화를 발했습니다.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러니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해서 그들을 진멸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 그 크신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어떻게 진노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시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들에서 멸망시키려고 애굽에서 끌어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시고 주의 백성에게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들을 들고 내려오다가 금송아지 앞에서 떠드는 그의 백성을 보고 손에 들었던 돌판을 산 아래 던져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레위 자손을 시켜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 3천명 가량을 죽여 버렸습니다.
8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했습니다. 구약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 말씀의 배경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싯딤이란 곳에 머물러 있을 때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 모압 여인들과 음란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방 여인들과 이런 생활에 빠지게 되니까 자연히 그 여자들이 하는 대로 따라 가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들의 이방신에게 같이 가서 먹고 그들의 신에게 절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서 염병이 퍼지게 되고 하루에 2만여 명이 죽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4절과 신명기 5장 18절에 “간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으에 간음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남자나 여자에게 다 같이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본래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신성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답고 깨끗한 가정을 잘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이 깨끗할 때에야만 그 가정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기본 단위입니다. 사회 질서의 기초입니다. 가정이 문란하게 되고 파괴되면 그 사회는 결국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왕성하던 로마가, 세계 문화를 주름잡던 헬라의 영화가, 찬란하던 폼페이 도성이 간음 때문에 망하고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가공케 하는 AIDS라는 병이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성의 문란에서 온 병이 아닙니까? 이 병의 감염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2만 3천 명이 죽은 옛날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9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 두 구절의 배경은 민수기 21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며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 하도 험하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여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서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매일 같이 주시고 메추라기를 몰아 보내 주셨지만 그들은 그 단조로운 음식에 권태를 느꼈습니다. 맨 처음에는 만나를 볼 때 너무 놀랍고 신기해서 “이게 뭔가!”하고 감격했지만, 오늘도 내일도, 일 년 전에도 십 년 후에도, 똑같은 만나가 내리니까 신비로움도 놀라움도 사라지게 되고 지루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미국에서 잘 팔린 요리책 중에 “모세 부인의 요리법”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드는 요리법이었습니다. 매일 같이 똑같은 만나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 하니 지루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셔서 백성을 물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사람이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백성들이 모세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했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의 이르러 모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족장 된 사람 한 사람씩을 뽑아 40일 간의 기한을 주어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보냈습니다. 그들이 40일 간의 탐지를 마치고 돌아와 그 땅에 대한 보고를 하는데 열두 사람 중에 열 사람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이때 온 회중은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슨 일이 잘 안 되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화가 나서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런 일이 언제 있었어요? 40년 간의 광야 생활이 다 끝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조금만 더 참고 믿음으로 주의 종 모세를 따랐으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터인데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11절에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개인이나 민족은 악을 즐겨 행합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성도덕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망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종살이 하던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인 천국을 향해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악을 행하지 맙시다. 누구를 원망하고 시비하는 것을 그치고 우리 스스로 깨끗하게 삽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말씀을 순종하고 의의 편, 진리의 편에 서기만 하면 약속의 땅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산이 높습니다. 골짜기가 험합니다. 성이 견고합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키가 큽니다. 광야 생활이때로는 지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의 땅을 차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면, 아니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면 약속의 땅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