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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하기 전국에서 제일 좋은 밀양강 삼문동 둔치 강변공원(3)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4474?svc=cafeapp
이 글은 (1) (2) (3)편으로 작성되었으며, 전국으로 홍보합니다. 모두 250 장 정도의 아름다운 밀양강 삼문동 둔치(강이나 못 따위의 가장자리) 주변의 사진이 있습니다.
※"고수부지"는 일본어이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둔치"로 사용해야 합니다.
물의 도시, 수변(水邊) 공원의 도시, 밀양 !
밀양강 삼문동 둔치 강변공원은 전국에서 제일 좋다.
(3)번 글은 밀양강(密陽江)에 건설한 나노교(Nano橋) 명칭 제정에 대해, 우리나라의 교량 명칭 제정 관례에 비추어 보아, 그 관례와는 멀다는 것을 강조하며, 서울의 《한강에 건설한 32개 교량》의 명칭 제정 사유(교량 명칭 유래)를 URL 링크 글로 집중 조명합니다.
●밀양강(응천凝川)에 둘러싸인 100만 평의 밀양시 "삼문동(三門洞)"
※위의 위성지도에서 타원형 섬이 삼문동이며, 그 북쪽인 12시 방향에 밀양시청, 북동쪽인 2시 방향에 영남루, 남쪽인 5시 방향에 경부선 KTX밀양역이 있다
밀양강 삼문동 둔치 강변공원은 둘레가 타원형이고, 평평하며, 강을 따라 5.5km를 시원하고, 아늑하고, 그 강변에 산책길과 자전거길이 평행하게 있다.
KTX 밀양역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10분 이내인 용두교 건너 밀양여자중학교 정문 앞에서 하차하면 바로 밀양강 삼문동 둔치 강변공원이다.
답답한 도심에서 탈출하여, 조용하게 산보하면서 밀양강 삼문동 둘레 강변공원길을 산책하면 멋진 하루를 여행할 수 있다.
1. 밀양강 삼문동 둔치 강변공원은 100만 평의 원형의 섬(島)인 삼문동을 따라 밀양강이 흐르고, 강물이 매우 깨끗하다.
2. 섬을 한 바퀴(5,200m) 돌면 건강에 매우 좋다.
3. 강바람은 매연이 없고 매우 깨끗하다
4. 주변 공기도 매우 깨끗하다.
5. 가장 아름답다
6. 주변에 영남루와 용두목 등 풍광이 좋다
7. 24시간 치안이 가장 안전하다
8. 가장 조용하다
9. 가장 아늑하다
10. 교통이 가장 편리하다
11. 경부선의 KTX와 일반 열차가 매우 편리하다
12. 新대구 - 부산(구포)간 고속도로가 편리하다
13. 울산 - 밀양간 고속도로가 편리하다
14. 주변에 숙박 시설이 좋다
15.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선사시대의 "한국의 암각화조각공원"이 있다.
16. 넓은 잔디공원 둔치가 있다.
17. 밀양시 삼문동(三門洞)은 밀양강(일명 응천 凝川)으로 둘러싸인 섬(島)으로서, 제1밀양교, 제2밀양교, 용두교, 밀주교, 나노교 등 아름다운 대형 교량이 무려 5개나 있고, 또 6번째 교량을 건설하고 있다.
밤이 되면 모든 교량의 난관과 교각에 형형색색의 조명이 날이 샐 때까지 빛나며, 그 아름다운 빛은 강물에 반사되어 장관을 이룬다.
※밀주교(密州橋)의 "밀주(密州)"란, 고려시대에 밀양이 최대의 영역을 가졌을 때의 밀양의 명칭이며, 그 당시는 지금의 밀양시와 이웃의 창녕군과 ㆍ북쪽인 경북의 청도군이 모두 밀주(密州)의 영역이었다.
18. 시원한 밀양강 야외수영장이 있다
19. 아름다운 경부선밀양강철교가 있다. 이 철교는 "경부선 한강철교" 다음으로 두번째로 길며, "구(舊) 밀양강철교"의 둥근 교각은 일제가 밀양읍성을 파괴하여, 성돌로 만들었다. 일본제국(日本帝國)의 괴뢰국(傀儡國)인 만주국(滿州國)과 식민지 조선(朝鮮)을 효율적으로 침탈하기 위한 병참선으로 경부선과 경의선을 부설했음에도 불구하고, 교각의 토목공학적 가치와 식민지 역사성, 식민지 침탈 병참선의 역사적 흔적 등을 보존하여, 다시는 이 땅을 일본제국주의자로부터 병탄당하지 않게 하는 교훈으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보존하려는 밀양의 항토사학자 등의 강력한 요청으로 철거하지 않고 남아있다.
20. 자연 경승지(景勝地) 용두목(龍頭項:용의 머리와 모가지)이 옆에 있다.
21. 아름다운 밀양강 살여울 징검다리가 있다. 봄이 오면 살여울 징검다리 주변의 버들강아지와 능수버들이 밀양강에 제일 먼저 희망의 봄소식을 전해준다.
22.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삼문동 송림과 이재금 시인의 시비(詩碑)가 있다
23. 밀양읍성의 망루인 무봉산 무봉대가 보인다. 무봉산(일명 아동산 衙東山)의 유래는 영남루 앞을 흐르는 전국 최고의 수질인 밀양강(일종의 사행천인 일명 응천 凝川)에 황새(봉황새 = 봉새)가 은어(銀魚) 등의 물고기를 잡아먹고 울창한 무봉산의 송림에 하얗게 앉아 있어 유래되었다. 즉, 황새가 송림에 날고 드는 모습이 춤추는 모습과 같이 보여 무봉(舞鳳)이라 했다
24. 천년고찰 무봉사가 밀양강 위에 있다.
25. 밀양읍성이 바로 앞에 있다
26. 국보 영남루가 있다
27. 아름다운 야외공연장이 있다.
이 공연장에서는 밀양의 큰 축제가 많이 열린다
28. 아랑각이 있다.
29. 아름다운 제1 밀양교(密陽橋)아래 뱃놀이 오리배 선착장이 있다
30. 밀양강 삼문동 둔치의 넓은 무료 주차장이 있다.
31. 아름다운 장미공원이 있다.
32. 봄에는 제방과 둔치에 핏빛 아름다운 연산홍과 샛노란 유채꽃과 개나리ㆍ하얀 쌀밥같은 이팝이 만발한다.
33. 이른 봄에는 5km의 벗꽃길 터널이 장관을 이룬다.
34.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넓은 강변파크골프장이 있다.
35. 아름다운 제2밀양교(密陽橋)가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속에 있다.
36. 밀양강 수중보의 아름다운 낮은 강물폭포가 물보라를 일어키며 폭포수 소리가 주변을 진동하면 복잡한 세상사를 잊어버려 좋다.
37. 밀양강에 백조가 날아든다.
38. 아름답게 설계된 나노교가 있다.
39. 넓은 풋살 경기장이 있다.
40. 가을에는 넓은 코스모스화원이 장관을 이룬다.
41. 강건너 멀리 밀양의 남산인 종남산이 보인다
42. 밀주교(密州橋)가 마암산 층암과 함께 아름답게 놓여 있다
43. 그림같은 밀양강 하중도(河中島)가 있다.
44. 경승지(景勝地) 용두목이 있다
45. 멀리 산성산과 밀양 고대읍락국가시대(古代邑落國家時代)의 산성인 자씨산성(慈氏山城) 터가 보인다.
46. 《제2 밀양교》를 건너 200m만 가면, 왼쪽에 1970년대 우리나라 3대(大) 최초ㆍ최대 "벼 육종(育種) 시험장"인 100,000평이 넘는 영남작물시험장이 있다. 1970년대 초에 우리 3000만 국민(이 당시에는 3000만 명이었음)이 보릿고개에 굶주릴 때 밀양의 영남작물시험장, 수원의 수원작물시험장, 익산(당시는 이리)의 호남작물시험장이 필리핀 국제미작(米作)연구소와 합작으로 통일벼 등 수십 종의 벼품종을 육종ㆍ개량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시험장이 밀양의 영남작물시험장이다. 지금은 명칭이 국립식량과학원 남부작물부로 바뀌어서 여러 밭작물까지 품종을 과학적으로 개량하고 있다. 밀양에 영남작물시험장이 설치된 이유는 지명인 密陽(햇빛이 빽빽하게 드는 지역)인 것과 같이,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벼의 특성에 가장 알맞은 지형(반半분지형)을 갖춘 지역이기 때문이다. 관선(官選) 군수시절에는 밀양군수의 직급이 4급일 때, 영남작물시험장의 장장(場長)은 2급 ~ 3급이었을만큼 직급과 명성이 높았다.
47. 밀양강 건너 사포땅에는 고려시대에 밀양 사람들이 몽고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을 외치며, "경주 판관(判官) 엄수안"과 "금주(김해)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이끄는 몽고군의 허수아비가 된 고려 관군과 싸웠던 밀양인의 기개가 살아있는 역사적인 유적지인 "사포(沙浦) 병구지(兵區地:옛날 들빼기 들판과 동암 새마을과 강변 들판, 다부티골짜기 등)" 터가 있다.
※판관(判官)이나 방어사(防禦使)는 고려시대 관직의 이름으로, 쉽게 설명하면 군령권(軍令權)을 가진 요즘의 시장이나 군수 정도의 지방관(地方官)의 직위이다.
48. 밀양강 본류와 삼문동 밀양강 맞은편인 사포 동암마을의 강변 사이에 있던 밤섬(율도 栗島)은 조선시대 유림(儒林)의 영수(領袖:우두머리)였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농사짓던 밭이 있었고, 밀양의 고지도에는 빠짐없이 그려져 있었는데, 1990년대에 밀양강 직강(直江) 공사로 없어졌다.
49. 삼문동 송림과 붙은 제방 바로 너머에는 우리 나라의 최초의 공설운동장인 수백 년 송림에 둘러싸인 옛 밀양공설운동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밀양아랑제 등 밀양의 대형 축제를 수십 년간 개최했고, 지금도 밀양시민의 최고의 체육시설로 각광받고 있고, 특히 금년에 운동장 트랙에 맨발걷기 황톳길을 만들어 시민들의 건강증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밀양시에 따르면 밀양강변 둔치에도 750m의 맨발걷기 황톳길을 금년 년말에 조성할 것이라 한다.
50. 밀양강 삼문동 둔치 산책로를 따라 종가시나무가 10m 간격으로 2,500m 정도 심어져 있어, 겨울에도 푸른 빛이 강물과 함께 더해진다.
○종가시나무는 긴 타원형의 잎 가장자리에 가시처럼 생긴 것이 돋아있고, 손가락 반 마디 길이의 종 모양의 열매가 열리는 상록수이다.
51. 나노교를 건너 직진하면 조선시대 유림(儒林)의 영수(領袖:우두머리)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향사하는 예림서원이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의 영수(領袖)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 생애(1)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4445?svc=cafeapp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의 영수(領袖)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 생애(2)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4444?svc=cafeapp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의 영수(領袖)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 생애(3)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4443?svc=cafeapp
52. 봄이 되면 이 섬(삼문동)의 주민들이 벚꽃축제를 벌이고,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축제를 벌인다.
밀양에는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많습니다.
국민 여러분 !
밀양으로 오십시오.
잠시 쉬어가셔도 좋습니다.
행복한 보금자리를 만드셔도 좋습니다.
환영합니다.
밀양강과 삼문동
2023년에 서남쪽(8시 방향)에 5번째인 대형 《나노교》를 건설했고, 서쪽(9시 방향)에 6번째 대형 교량을 건설 중에 있다.
낮은 폭포수 같다
●종남산(終南山)
●밀양을 대표하는 명산(名山)으로 옛 문헌(文獻)에는 남산(南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명동산(異名同山)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국가기관에서 발행한 봉수대 관련 문헌 속의 고지도(古地圖)에 표기한 南山을 終南山과 다른 산으로 보아, "밀양시 상남면 (주)한국화이바 인근에 있는 팔봉산(八峰山)에 남산봉수대가 있었다" 라고, 기록한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왼쪽은 조선시대 밀양의 8대명산(8大名山)중의 하나인 우령산(牛齡山)이 보인다. 우령산은 조선시대 명사(名士)인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우령한운(牛齡閑雲:우령산에 한가로이 떠있는 구름 한 점)이란 유명한 시(詩)를 남겼고, 바로 남쪽에 억석암(抑石岩:복호암伏虎岩) 이야기가 전해오고, 종남산과 함께 늦은 봄까지 잔설(殘雪)의 풍광이 아름답다
●삼문동에서 진장의 아랫쪽 끝으로 연결하는 6번째 교량이 건설되고 있다
삼문동에 이런 운동기구가 3군데나 있다
멀리 밀양에서 창녕으로 가는 마흘리고개(일명 일현 日峴 또는 나리태고개)
교량 건설
●이 교량 명칭은 무어라 지을지 궁금한다. 삼문동과 내이동의 진장 아랫쪽을 연결하니까, 삼진교(三陣橋)로 지어면 어떨까?
●아니면 삼문동과 교량의 북단 소재지가 내이동이므로 내이동의 글자를 차용하여 삼이교(三二橋) 또는 삼내교(三內橋)로 하면 어떨까? 그러나 "삼내교(三內橋)"는 어감이 좀 어색하고, 또 "내일동"이 있어 "內 字"를 차용하기란 곤란하다.
●진장(陣場)
○옛날 밀양부(密陽府) 관아에 속한 별포군(別捕軍)의 주둔지가 현재의 밀양고등학교와 영남작물시험장 부근이라 한다 (임인수씨 말)
○지금의 응천강은 제방을 축조하기 전에는 강물이 자유로이 나며들며 하여 강변이 마치 넓은 운동장 같이 되어 군사 훈련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고 한다(윤상선씨 말)
○그러므로 별포군의 군사훈련장 곧 진(陣)을 치는 장소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영남작물시험장 입구 사거리에서 남쪽, 제2밀양교에서 북쪽 지역 일원이 진장에 해당하는데 이 곳은 법정 구역으로는 삼문동에에 속하는 번지를 가진 지역이고 행정상으로는 내이동에 속하는 지역이다(출처: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종남산(終南山)과 우령산(牛齡山)
●강 건너에는 《나노산업단지》가 아닌, 밀양에서 제일 큰 마을 중의 하나인 《사포마을》과 밀양에서 두번째로 큰 《사포일반산업단지》와 밀양의 명산인 《종남산》이 있다.
●그런데 사포마을 쪽으로 가는 교량 명칭을 《나노교》라 했다. 잘 아시다시피 《나노산업단지》는 《사포리》에 있지 않고, 《감천리》와 《오례리》에 있다.
●(19) 조선시대 우령산이 '밀양10大山'으로 선정된 사유는 牛齡閑雲과 東西南北에서 본 伏虎岩(抑石岩)의 名勝이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Pvb9/112?svc=cafeapp
●密陽十景의 하나인 우령산의 우령한운(牛齡閑雲)
●제목 : 牛齡閑雲
우령산의 한가로운 구름
○지은이 : 徐居正
●牛齡迢迢揷層碧
우령초초삽층벽
우령이 멀리 겹겹 청강석을 꽂아 논 듯 해라
※碧:The Green Beauty of the Stone
※揷:찔러 넣다
※청강석 靑剛石 :
단단하고 빛깔이 푸른 옥돌. 짙고 푸른 무늬가 나뭇결처럼 있다.
●嶺南佳麗天下獨
영남가려천하독
영남의 아름다운 경치가 천하 으뜸일세
●瓊樓畵棟金鰲頭
경루화동금오두
화려한 누각 용마루는 금오 머리에 우뚝한데
●閑雲繚繞長五色
한운료모장오색
한가로운 구름 얽히어 마냥 오색이 찬란하네
※繚 감길 료 : 두르다
※繞 두를 요 : 두르다
●誰言雲是無心物
수언운시무심물
구름을 무심한 물건이라고 누가 말했던고
●澤潤生靈元有術
택윤생령원유술
생령을 윤택하게 하는 술법이 원래 있는 걸
●何曾弊日漫遮天
하증폐일만차천
어찌 공연히 태양과 하늘을 가리기만 하랴
●大旱成霖應不日
대한성림응불일
큰 가뭄엔 응당 불일간에 장맛비를 내리리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박태근
●서거정:1420~1488, 字는 剛中, 號는 四佳亭,達城人,陽村 權近의 외손, 세종 때 文科에 급제하여 세조를 거쳐 성종 때까지 6대의 조정에 벼슬하여 오랫동안 文衡을 잡았고, 관직이 左贊成에 이르렀으며, 달성君으로 책봉되었다. 시호는 文忠.
멀리 종남(산終南山) 아래에 "사포일반산업단지"가 보인다
바로 오른쪽에는 초동면으로 넘어가는 옛 산중대로(山中大路)였던 방울재(영현鈴峴)이다
밀양강 삼문동 둔치 파크골프장
파크골프장
파크골프장
●멀리 왼쪽에는 2023년에 건설한 나노교 첨탑
●멀리 나노교의 첨탑 바로 오른쪽의 낮은 고개가 부북 사포에서 상남쪽으로 넘어가는 다부티(고개)이며, 그 바로 오른쪽의 낮은 봉우리 3개가 삼태봉(三台峰:三台星에서 유래, 옛 사포 신당新塘마을에서 새벽녘에 동쪽 밤하늘을 보면 삼태봉에 삼태성이 떠오른다. 사포沙浦마을의 남쪽에 있어 사포 사람들은 삼태봉三台峰을 안산案山이라고도 한다)이며, 삼태봉과 종남산 제2봉우리(오른쪽에서 왼쪽으로 2번째 봉우리) 사이의 낮은 고개(A지점)에 "옛 남산(종남산)봉수대 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오른쪽의 제일 높은 봉우리가 해발 663m의 종남산 제1봉 정상이다. 제1봉 정상에 2005년에 복원한 남산(종남산)봉수대는 위치가 잘못 복원된 봉수대이고, 원래 위치의 남산(종남산)봉수대는 위의 A 지점(아래 사진 참조)이다.
●2023년에 건설한 나노교(Nano橋)의 첨탑
●《나노교》는 《삼문동》에서 《사포》로 잇는 교량이다.
●교량의 명칭은 유ㆍ무형적으로 그 교량이 가까운 지역발전에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
●저(도재국)는 지금부터 17년 전에 《사포일반산업단지》와 《골프장》이 조성될 때 고향 마을과 들판ㆍ산록이 모조리 산업단지와 골프장에 편입되었기에 실향민으로서, 지금은 "사포 지역"에 땅 한 평도 없고, 다시 고향에 돌아가 거주할 의향이 전혀 없기에, 제가 《나노교 명칭》에 대해 논하는 것에 대해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오직 지명 제정 차원에서 이 글을 쓴다.
●평생 고향 밀양의 지명을 조사ㆍ연구해 오고 있는 손흥수 선생과 저(도재국)는 《나노교》가 건설되기 훨씬 이전에 밀양시지명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삼문동》에서 《나노교》를 건너면 《나노산업단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밀양시에서 제일 큰 마을인 《사포 마을》과
○밀양에서 두번째로 큰 《사포일반산업단지》와
○밀양 최고의 명산(名山)으로, 고향 사람들에겐 아버지와 같은 산이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겐 망향의 향수를 달래면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산인 종남산(終南山, 일명 南山)이 있다.
○또 종남산(終南山, 일명 남산 南山)은 밀양의 지리문헌이나 밀양지 ㆍ밀주지 ㆍ밀주구지 등에는 밀양을 대표하는 산으로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을만큼 중요한 산이다.
●그래서 이 교량의 명칭을 《나노교》보다는 《사포교》 또는 《종남산교》로 했어야 도로의 길을 찾는 데에 편리하다.
○도로는 밀양지역 사람들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 만인이 이용하는 시설이다.
●교량의 명칭은 큰 지역에서 작은 지역을 향해서 갈 때는, 가는 방향에 있는 대표적인 지명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내(도재국)가 사포(沙浦) 출신이라서 하는 주장이 아니고, 수십 년간 지명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의 의견이다.
○또 지명(교량 명칭)을 제정하는 이런 관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다 《사포교》로 해야지, 《나노교》로 한 것은 잘못되었다 한다.
●이것은 도재국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대체로 전국적으로 통하는 관례이다.
●또 두 지역의 대등한 위치에서 정한 교량 명칭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밀산교(密山橋, 일명 긴늪다리:밀양 시내 중심부와 산외면)와 삼상교(三上橋:삼랑진읍과 상남면)이다.
●또 시골같은 곳에서는 대체로 큰 마을 이름을 따서 짓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금곡교(金谷橋)이다.
●따라서 지명(교량 명칭)은 큰 지역(도심)인 삼문동에서 사포ㆍ종남산 방향으로 통하므로, 교량의 명칭을 《사포교(沙浦橋)》 또는 《종남산교(終南山橋)》로 했어야 맞다.
=== 사 례 ===
●《가곡동》에서 상남면 예림리 방향으로 통하므로 《예림교》이다
●《삼문동》에서 《용두목》 방향으로 통하므로 《용두교》이다.
○처음 건설한 용두교는 지금의 삼문동과 가곡동 사이에 있는 밀양강 야외수영장의 위치에 있었는데, 사라호태풍으로 떠내려 가고, 조금 아래인 지금의 자리에 다시 건설했다.
●또 《밀주교》도 《마암산교》로 해야 맞다.
○마암산(馬岩山)이란 지명은 밀양의 역사성이 깊은 지명이다.
●또 《감천교》도 밀양 시내에서 《감천리》 방향으로 통하므로 《감천교》이다.
●지명(교량 명칭)을 선정할 때도 그 지역의 정치적 힘이 작용한다고 보여진다.
●또 예를들면, 1914년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이 정비되면서 밀양시 부북면의 리별(里別) 순서가 전포ㆍ동암ㆍ후사포ㆍ제대ㆍ신흥ㆍ상감ㆍ오례ㆍ덕곡ㆍ청운ㆍ가산ㆍ대항ㆍ월산ㆍ퇴로ㆍ위양ㆍ무연ㆍ춘기ㆍ화산ㆍ용포ㆍ지동ㆍ대전ㆍ신전 순서로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행정사무소의 소재지 우선 기준에 따라, 대전ㆍ신전ㆍ전포ㆍ동암ㆍ후사포ㆍ제대ㆍ신흥ㆍ상감ㆍ오례ㆍ덕곡ㆍ청운ㆍ가산ㆍ대항ㆍ월산ㆍ퇴로ㆍ위양ㆍ무연ㆍ춘기ㆍ화산ㆍ용포ㆍ지동ㆍ 순서로 되었다.
●《마암산교》로 되지 않고 《밀주교》로 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포 마을쪽에 정치력이 강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밀주교》가 《마암산교》가 되었을 것이고,
●《나노교》가 《사포교》 또는 《종남산교》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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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나노교》를 《사포교》 등으로 변경하고, 《나노산단 유치를 기념하는 별도의 기념물》, 예를들면 《울산 공업탑》 같이 《나노산단 기념탑》을 나노산단의 중앙 또는 입구에 설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노산단》이 자기 구역도 아닌 남의 구역인 《사포 지역》에 와서 《사포교》의 명칭까지 빼앗아간 강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밀양시 산외면과 단장면을 잇는 단장천(丹場川)의 《상상교》도 그런 식으로 교량 명칭을 지어면 시민들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무엇을? 왜? 상상하는지? "상상"의 뜻과 교량 명칭 제정의 이유를 시민들에게 널리 설명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교량 명칭을 그 지역의 지리적 상황에 맞게, 또 관련 주민들에게 유리하게 "계법교(桂法橋)"로 변경해야 한다.
●오늘 어느 밀양시 의원님이 연락이 오기를, 그 당시에 《밀양시의회》에서는 《상상교》 명칭을 반대했는데, 전임 시장이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한다. 지금이라도 《상상교》를 그 지역 지리에 맞게, 주민들에게 편리하게 변경해야 한다.
●지명은 만인(萬人)이 찾아가기 쉬운 고유명사(자연 지명ㆍ시설물 지명ㆍ행정 지명ㆍ역사유적지 명칭ㆍ역사인물 이름 등)를 붙이는 것을 대원칙으로 한다. 그러므로 《상상교》 같은 《극히 추상적인 명칭》을 붙이면 절대 안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있다.
●관련 글 :
“밀양분지(密陽盆地)를 둘러싼 일련의 산성(山城)과 산악(山嶽)을 연결”해 보면 일련(一連)의 산성은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의 산성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4497?svc=cafeapp
●사포(전사포리와 후사포리) 마을과 사포공업단지와 사포일반산업단지의 위치와 규모와 나노교의 위치
● 사포공업단지는 대략 100,000평 정도로 30여년 전에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에 조성되었으며, 사포일반산업단지는 200,000평 정도로 2007년에 부북면 전사포리와 후사포리에 조성되었으며, 두 공단의 2024년 현재 가동 규모는 나노산업단지보다 크다. 나노교는 2023년에 건설되었으며, 그 위치는 나노교의 훨씬 북쪽인 밀양시 부북면 감천리와 오례리 일대로 2024년 현재도 부지를 조성 중에 있으며, 면적은 500,000평이나, 2024년 현재 입주 기업은 3~4개 정도이다.
●나노교(Nano橋)의 명칭은 나노산업단지와 위치적으로 관련이 없고, 사포(전사포리前沙浦里와 후사포리後沙浦里) 방면과 연결되므로 사포교(沙浦橋)라 해야 맞다
●카카오맵으로 위 3개의 공단 면적을 계산한 결과 실재 면적보다 적게 계산되었다.
● 30여 년 전에 밀양에서 제일 먼저 조성한 사포공업단지는 실재로는 120,000평 정도가 된다.
● 2007년에 조성한 사포일반산업단지는 실재 면적이 250,000평이다
● 현재 조성 중에 있는 나노산업단지는 500,000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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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橋"를 "계법교(桂法橋)"로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
●제목 : "상상橋"를 "계법교(桂法橋)"로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
○ 보갓산(洑林山, 양당보 바로 동쪽의 산, 금곡교에서 50m 아래임. 계령산桂嶺山의 바로 북쪽 支脈임, 密陽誌 3페이지 단장면 桂嶺山) :
단장면 미촌리 사촌마을 뒷편의 가마봉에서 북쪽으로 휘감은 산 이름인데, 그 산 기슭을 돌아 나가면 단장리에 이르고, 금곡교를 건너면 24번 국도와 연결된다. 단장천의 물을 끌어 들여 "양당들"에 물을 대는 양당보(陽塘洑) 수로가 산 아래로 지나간다 하여 "보갓" 또는 "보갓산"이라 한다.
※출처 :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480페이지 단장면 편(編) 미촌리 사촌마을조(條)
●계법보(桂法洑, 상상교 바로 위의 洑임, 금곡교 하류 50m) :
금곡교에서 단장면 미촌리로 돌아가는 산 모롱이에서 산외면 금곡리 "옛 봉숭징이" 쪽으로 현재의 단장천에 걸쳐 있는 보(洑)이다. 보(洑) 머리는 금곡들 쪽에 있다. 이 보는 단장천에서 흐르는 물을 막아 "다원들"에 물을 댄다.
※출처 :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362페이지 산외면 편(編) 다죽리 다죽마을 조(條)
●탑골(塔곡, 봉성사가 있었던 골짜기로 밀양시립노인요양원 남쪽 골짜기) :
산외면 금곡리 본촌 마을의 서쪽 "평전산" 기슭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이 곳에는 "봉성사(奉聖寺)"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절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보양리목조(寶壤璃目條)의 기록에 보이는 신라 말기에 창건되었다는 사찰이었다.
※출처 :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365페이지 산외면 편(編) 금곡리 본촌마을 조(條)
●봉성진(奉聖津, 옛날에는 단장천이 본촌마을 남쪽의 소하천을 따라 24번 국도옆 한천공장쪽으로 흘렀음) :
옛날에 단장천이 본촌마을 남쪽의 소하천을 따라 24번 국도옆 한천공장쪽으로 흘렀을 때 산외면 금곡리 탑골 앞에 있었던 나루터다. 옛날 이 앞으로 동천(東川, 지금의 단장천임)이 흘렀을 때 있었던 나루터를 건너서 "봉성사"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고 지금은 경지정리와 강의 이동으로 나루터가 없어졌다. (그 들판을 건너 단장천 변(邊)에 계법보가 있다.
※출처 :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365페이지 산외면 편(編) 금곡리 본촌마을 조(條)
●양달들(兩塘들, 陽坪, 兩塘坪, 계령산 서쪽 좁은 들로서 옛 미촌시유지 바로 북쪽 들판임) :
단장면 미촌리 사촌 마을 뒤쪽, 구미 마을 동북쪽에 있는 들판의 이름이다. 동쪽과 서쪽이 확 트여서 햇빛이 비치는 양달에 위치한 들판인데, 이곳에서 나는 쌀의 품질이 좋기로 이름이 있었다. "양당(兩塘) 봇물"을 끌어대어 농사를 짓는다 하여 "양당들"이라고도 한다.
※출처 :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481~482페이지 단장면 편(編) 미촌리 사촌마을 조(條)
●양당보(兩塘洑, 상상교 바로 윗쪽 洑) :
단장면 미촌리 사촌 마을 뒤 "양달들"에 물을 대기 위한 원거리 보(洑)인데, 단장리 경주산(競珠山) 기슭의 사당수(泗塘水)와 금수(錦水) 어구의 석계당(石溪塘) 등 양당(兩塘)의 물을 끌어들이는 보(洑)라하여 생긴 이름이다. 이 보는 "보갓산" 북쪽 기슭으로 난 도로를 따라 봇도랑이 흐르고 있으며, 수량도 매우 많아 "양달들", 집들의 관개(灌漑)를 충분히 하고 있다.
※출처 :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482페이지 단장면 편(編) 미촌리 사촌마을 조(條).
●봉숭징이(일명 봉선정 또는 봉성징이, 옛 봉성사 산문 입구) :
산외면 금곡리 본촌마을의 서쪽으로서 한천공장 윗쪽에 있다. 이 바위에 글자와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가 있는 위치가 이 절의 산문(山門)이 있었던 자리라고 전해온다
※출처 :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365페이지.
●추화봉성사지(推火奉聖寺址)와 그 유물(遺物) :
요약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보양이목(寶壤梨木) 조(條)의 기록에 보이는 신라 말기 사지(寺址)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절터를 "탑골"이라 부르고, 그 뒷산을 "평전산(平田山)"이라 부른다.
●보양(寶壤) 스님이 당(唐)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먼저 추화(推火:밀양)의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다. 때마침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친정군(親征軍)을 이끌고 후백제(後百齊)를 치기 위하여 동쪽으로 쳐들어가다 청도(淸道) 지경에 이르렀는데, 산적(山賊)이 견성(犬城 : 지금의 밀양 화악산 동쪽에 있는 한재라는 험한 고개)에 모여서 교만과 거만을 부리며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태조(太祖)가 산하(山下)에 이르러 보양(寶壤) 스님에게 산적(山賊)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방책을 물었다. 스님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대개 개(犬)라는 것은 밤(夜)을 맡(司)고 낮을 맡지 않으며 앞을 지키되 뒤를 잊어버리는 것이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太祖)가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산적이 패하여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 신통한 꾀를 가상히 여겨 해마다 가까운 고을의 조세(租稅) 50 석(碩)을 주어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였다. 그래서 절에 2성(聖:寶壤스님과 太祖)의 진용(眞容)을 봉안하였고 그로 인하여 봉성사(奉聖寺)라 하였다. 그 뒤 보양스님은 작갑(鵲岬)에 이거(移居)하여 크게 절을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그리하여 보양(寶壤)의 작갑사(鵲岬寺)는 935년(後唐 淸泰 4년)에 태조로부터 운문선원(雲門禪院)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는데, 이로써 보면 봉성사(奉聖寺)는 운문사(雲門寺)보다 먼저 창건이 된 기성사찰(旣成寺刹)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밀양지(密陽誌) 462페이지.
●향토사학자 손흥수 선생의 계법보(桂法湺)의 지명 유래 :
○계법보(桂法湺)의 "桂 字"는 단장면 미촌리 사촌마을 뒷산의 桂嶺山의 "桂 字"를 차용했으며, "法 字"는 推火奉聖寺의 "절(佛法의 法)"이라는 "法 字"를 차용했으며, "湺"는 "물을 가두는 보"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단장천의 유하(流下) 변경으로 봉성진(奉聖津)의 역할이 계법보(桂法洑)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보(洑)는 현재 물을 대는 산외면 사람들이 대부분 농사짓는 넓은 다원들판에 물을 대는 계법보로서 매우 중요한 지명이다. 지금의 "상상교"는 반드시 "계법교"로 변경해야 한다.
○밀양시에서 옛 미촌시유지에 션샤인밀양테마파크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전체 면적의 2/3가 넘는 면적이 일반 밀양시민이 무료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는 사기업의 골프장이고, 나머지 좁은 부지에 지은 시설물 몇 개도 유료이고, 또 밀양인에게 무슨 유토피아적인 상상(想像)과 체험을 하게 하는 시설물도 아니므로 기존의 교량 명칭인 "상상교"를 반드시 옛날의 큰 역사적인 사건인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삼국통일 대업 수행 과정에 큰 역할을 한 추화봉성사(推火奉聖寺)의 보양선사(寶壤禪師)에 얽힌 역사적 유적지와 연관이 있고, 또 대부분의 산외면민(山外面民)을 먹여살리는 넓은 다원벌판에 농업생명수를 공급하는 계법보(桂法洑)의 명칭에 따라, 또 단장면의 계령산(桂嶺山)의 명칭을 따라 반드시 계법교(桂法橋)로 변경해야 한다.
●위 《나노교》 명칭이 당해 지역(사포 지역)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아래 한강(漢江)에 건설된 "32개 교량 명칭 제정 사유"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남한강(南漢江) 양평(楊平)에서 한강(漢江) 하류까지 "32개 교량 명칭 제정 사유"
(2024.10.19.밤 11:25 작성)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4476?svc=cafeapp
푸르지오 아파트
2023년에 건설한 나노교
멀리 마흘리고개
오른쪽은 우령산
2023년에 건설한 나노교
●파크골프장과 나노교 남쪽에 풋살(축구)경기장이 있다.
●풋살 [futsal] :
정식 축구장의 4분의 1 정도 되는 공간에서 5명이 한 팀이 되어 벌이는 간이 축구.
●풋살경기대회 사진
※페이스북에서 캡쳐
멀리 오른쪽 마암산
마암산(馬岩山)
풋살경기장
나노교
삼문동에 5번째 건설한 교량이다
나노교
나노교
풋살경기장
●마암산(馬岩山)
●말 머리 : 마암산 마을 북쪽의 물에 잠긴 바위로, 밀양강 직강공사로 사라졌다.
●말의 어깨 : 위 사진의 제일 높은 부분
●말의 등허리 : 옛 예림교쪽으로 뻗은 긴 능선
●말의 꼬리 : 예림리 쪽
마흘리고개
일현(日峴)ㆍ 나리티고개로도 불린다.
《창녕》으로 가려면 《마흘리고개》를 넘어야 한다.
멀리 종남산
●강변 보도와 자전거길과 종가시나무
●밀양강 삼문동 둔치 산책로를 따라 종가시나무가 10m 간격으로 2,500m 정도 심어져 있어, 겨울에도 푸른 빛이 강물과 함께 더해진다.
●종가시나무는 긴 타원형의 잎 가장자리에 가시처럼 생긴 것이 돋아있고, 손가락 반 마디 길이의 종 모양의 열매가 열리는 상록수로, 가지는 대체로 직립으로 자란다.
삼문동 둔치의 코스모스 화원에 잡초를 뽑는 사람들
삼문동 둔치의 코스모스 화원에 잡초를 뽑는 사람들
코스모스 화원
코스모스 화원
코스모스 화원과 "사랑채 아파트"ㆍ"e편한세상삼문동 아파트"
왼쪽은 "e편한세상 삼문아파트", 오른쪽은 "유한강변 아파트"
멀리 오른쪽은 자씨산(慈氏山)
나노교 첨탑
《삼문동》에서 《사포 마을과 사포일반산업단지》로 잇는 《나노교》
●《삼문동》에서 이 교량을 지나면 《나노산업단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밀양시에서 제일 큰 마을중의 하나인 《사포 마을》과 밀양에서 두번째로 큰 《사포일반산업단지》와 밀양의 명산(名山)인 종남산(終南山, 일명 남산)이 있다.
●따라서 이 교량의 명칭을 《나노교》보다는 《사포교》 또는 《종남산교》로 했어야 도로의 길을 찾는 것이 편리하다.
●교량의 명칭은 큰 지역에서 작은 지역을 향해서 갈 때는, 가는 방향에 있는 대표적인 지명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내(도재국)가 사포 마을 출신이라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수십 년간 지명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의 의견이다.
●따라서 지명(교량 명칭)은 큰 지역(도심)인 삼문동에서 사포ㆍ종남산 방향으로 통하므로, 교량의 명칭을 사포교(沙浦橋) 또는 종남산교(終南山橋)로 했어야 맞다.
●사례 :
●가곡동에서 상남면 예림리 방향으로 통하므로 예림교이다.
●삼문동에서 용두목 방향으로 통하므로 용두교이다. 처음 건설한 용두교는 지금의 삼문동과 가곡동 사이에 있는 밀양강 야외수영장의 위치에 있었는데, 사라호태풍으로 떠내려 가고, 지금의 자리에 다시 건설했다.
●또 밀주교도 마암산교로 해야 맞다. 마암산(馬岩山)이란 지명은 밀양의 역사성이 깊은 지명이다.
●시내에서 감천리 방향으로 통하는 교량도 감천교이다
멀리 자씨산과 가곡동
코스모스 화원
푸르지오 삼문동 아파트
멀리 밀주교(密州橋)
사랑채 아파트와 e편한세상 삼문아파트
삼문동 둘레의 제방도로 5,000m 전부가 이렇게 벚나무가 있어, 봄이면 벚꽂터널을 이루는 밀양에서 제일 긴 벚꽃 길이 된다.
●시내버스 정차장
●멀리 정면 : 제일훼미리 아파트
●오른쪽 : a편한세상 삼문아파트
●왼쪽 : LH삼문 아파트
※KTX밀양역을 오가는 시내버스 정차장임
밀양시 삼문동 소재 제일훼미리 아 파트(뒷문)ㆍe편한세상 삼문 아파트(정문)ㆍLH 삼문 아파트(동문)를 왕래하는 시내버스 정차장 안내간판
신(新) 삼문동 남북(南北)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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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3선을 한 이상조 전 밀양시장의 여러 업적 중에서 최고의 업적이 해마다 홍수가 나면 뻘밭으로 변하는 밀양강 삼문동 둔치를 공원으로 만든 것이다.
●내(도재국)가 밀양읍사무소에 근무할 1970년대 중반에는 넓은 밀양강 삼문동 둔치에는 모두 땅콩과 노지 고추ㆍ토마도ㆍ옥수수 등을 재배했다.
●그후에 하우스시설재배 풋고추와 토마도가 소득이 높아, 둔치 전부가 풋고추와 토마도 재배지로 바뀌었다.
●1970년대에는 밀주교~삼문동 송림~영남루 앞~"옛 삼문동 변전소"가 있던 지금의 "제2 밀양교" 바로 아래까지만 제방이 있었다.
●나머지 삼문동 구간과 맞은편인 부북면 감천리~제대리~전사포리 구간인 밀양강 양쪽은 제방이 없어, 홍수가 나면 밀양강 양쪽 유역은 물바다가 되었다.
●삼문동의 제방이 없는 강변의 풋고추와 토마도 하우스 시설 재배단지에도 거의 해마다 홍수 피해로 고추밭과 토마도밭이 허리 정도 높이로 강물에 잠겨, 농사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도재국)는 해마다 홍수가 나면 물에 잠겨 뻘밭이 된 고추하우스밭과 토마도밭에 목이 긴 장화를 신고, 고추와 토마도 피해 면적을 조사하여, 그 당시 전국 최고의 을류농지세를 납부하던 밀양 농민의 세금 감경에 노력했다.
●그후 토마도밭도 전부 풋고추 시설재배단지로 작목 전환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삼문동의 구(舊) 시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전체 면적이 시설하우스 고추재배 단지였다.
●삼문동에서 시작한 시설하우스 고추재배가 인근의 광활한 상남들판과 부북들판 등 밀양 전역으로 재배 단지가 퍼져나가, 밀양이 전국 풋고추 재배 면적의 50%를 점유하였고, 밀양 풋고추의 명성이 높았다.
●밀양강 삼문동 둔치를 포함한 삼문동은 시설하우스 풋고추 재배단지의 전국적인 효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이 당시 고추하우스 시설재배를 하는 농가의 을류농지세 부담액이 평균 200,000 원 정도였고, 1977년경에 을류농지세를 최고로 납부한 농가는 삼문동 거주의 최 모(某) 어르신으로 납부액이 무려 1,300,000원 정도였다. 그 당시 8급 공무원 월급이 30,000원 정도의 40배가 넘었으니까, 지금의 8급 공무원 월급과 비교하면, 농민들이 얼마나 많은 을류농지세를 부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농지세는 벼 생산량 가액에 부과하는 갑류(甲類)농지세와 밭농작물 생산량 가액에 부과하는 을류(乙類)농지세가 있었다.
●그 당시에 전국적으로 을류농지세 부담이 높아 민원이 청와대까지 폭주했고, 감사원에서 을류농지세의 주(主) 세원(稅源)인 밀양의 풋고추 재배지와 충청도 금산의 인삼 재배지와 제주도의 감귤 재배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면서 1998년?경에 감사원 암행감사원이 갑자기 밀양읍사무소에 근무하던 나에게 직접 들러 말하기를
●"저는 감사원 암행감사반원입니다. 제가 밀양읍사무소에 출장온 것을 읍장(邑長) 등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선생님이 을류농지세 담당자이니까, 밀양지역의 을류농지세인 풋고추 세금에 관한 농민들의 반응과 을류농지세법의 법률적 개선 방안을 솔직하게 적어주세요. 선생님이 적어내는 진술서는 앞으로 을류농지세 세금 감면에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며,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과도한 을류농지세 세금을 못 낮추는 이유는 제주도 밀감과 충청도의 인삼 세금을 없애면 도정(道政)이 안 돌아갈 정도로 을류농지세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였다.
●감사원 암행반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단숨에 농민들의 과중한 세부담과 을류농지세 기초공제액 문제를 집중적으로 A4용지 규격의 갱지에 볼펜으로 무려 5장을 적어서 그 분에게 주었고, 그 분은 모두 읽어보더니, 무릎을 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맞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하고, 고맙다 하면서, 밀양읍사무소를 떠났다. 그 때가 1978년? 경의 초가을이었고, 그러한 자료를 근거로 그해 12.31자로 농지세법 중 을류농지세 기초공제액이 변경, 대폭 인상되어 농가 평균 200,000원 정도를 납부하던 세액이 1/10로 낮아져서 20,000원 정도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은 농민들에게 가렴주구나 마찬가지였던 을류농지세 제도가 폐지되었고, 잇따라 갑류농지세 제도도 폐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대통령 직속의 감사원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다. 감사원 암행감사반원이 지방에 나타났다 하면 시장ㆍ군수ㆍ구청장 등이 벌벌 떨 정도였다
●그 당시에 을류농지세부담이 너무 높아 해마다 여러 번 밀양강 삼문동 둔치의 고추하우스 시설재배지에 고추 작황조사를 나갈 때마다 농민들은 세금이 비싸다고 나에게 온갖 항의를 하였고, 농민들을 아무리 설득시키러 해도 잘못된 (을류)농지세법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1979?.1.1부로 인사발령이 나서, 나는 세무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이동했고, 그해 여름에 을류농지세 세법 개정 후인 첫해에 농가 평균 200,000원 정도를 납부하던 을류농지세액이 1/10로 낮아져서 20,000원 정도 되었고, 세금납부 농가도 1/10로 줄었다.
●1978?.12.31부로 농지세 세법 개정으로 1979년?에 을류농지세 기초공제액의 대폭 인상으로 을류농지세를 예년보다 1/10로 감경 납부했거나, 아예 납부 대상이 안된 사람들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도재국이가 세무 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발령나서, 우리 농민들 을류농지세 세금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속이 시원하다"
●농민들은 내가 감사원 암행감사반원에게 농민들의 과중한 을류농지세(稅) 부담을 줄이기 위한 암행 출장조사 때에, 내가 적어준 농민들에게 세금을 낮춰주어야 한다는 진술서 등을 근거로 해서 1978?.12.31부로 농지세법이 변경되어 세금이 거의 없다시피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농민들은 내가 세무부서를 떠났기에 즉, 내가 과도하게 세금을 매겼고, 내가 세무부서를 떠나서 세금이 거의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 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넓은 삼문동의 제방 안쪽은 신(新) 시가지가 되었고, 바깥쪽은 지금과 같이 아름다운 강변공원이 되었고, 그 농민분들 일부는 하늘의 아름다운 별이 되셨고, 일부는 만나면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내가 이런 글을 적어면 "도재국이는 자기 자랑한다"하는 사람이 몇몇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결코 내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지나간 사실을 적는 것이고, 이 또한 밀양강 삼문동 둔치의 홍수 때마다 뻘밭으로 변하는 농지가 지금의 전국 최고의 아름다운 강변공원으로 변한 지난 역사의 발자취를 적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50년 전의 밀양강 삼문동 둔치의 고추하우스 시설재배 농민과의 깊은 인연을 요즘 나이 70이 넘어 강변 공원길을 산책하면서 그 깊은 추억을 소환해보곤 한다.
●그후 밀양읍이 밀양시가 되고, 이러한 밀양강의 넓은 삼문동 둔치의 고추하우스 시설재배단지를 철거하고 이상조 전 밀양시장이 지금의 삼문동 둔치를 전국에서 가장 넓은 강변 공원 중의 하나인 , 가장 아름다운 시민의 휴식 공간인 강변 공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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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이나 방어사는 고려시대 관직의 이름으로, 쉽게 설명하면 군령권(軍令權)을 가진 요즘의 시장이나 군수 정도의 직위이다.
※밀양시 산외면과 단장면을 잇는 단장천(丹場川)의 《상상교》도 그런 식으로 교량 명칭을 지어면 시민들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무엇을? 왜? 상상하는지? "상상"의 뜻과 교량 명칭 제정의 이유를 시민들에게 널리 설명해야 합니다.
지명은 만인(萬人)이 찾아가기 쉬운 고유명사(자연지명ㆍ시설물지명ㆍ행정지명ㆍ역사유적지명칭ㆍ역사인물 이름 등)를 붙이는 것을 대원칙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상상교》 같은 《극히 추상적인 명칭》을 붙이면 절대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