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를 쓰지않으면 영원히 노벨賞은 탈 수 없다 (고영근 제공) 순수한 우리말은 과학이나 문명어로는 限界 趙南俊 전 월간조선 이사
곧 노벨상의 시즌이 돌아온다. 한국인이 일본과 일본인을 부러워하고 배 아파하는 때다. 그들은 매년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1명 이상 배출해내기 때문이다. 노벨상은 최소한 일류 부자국은 아닐지라도 일류 과학국임을 상징하는 척도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은 지금까지 物理(물리), 化學(화학), 生理-醫學(생리-의학) 등 과학부문에서 25명, 文學(문학) 2명, 平和(평화) 1명 등 2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계를 포함하면 30명이나 된다. 한국은 한 사람의 과학, 문학 부문 수상자를 배출하기 못했다. 왜 그럴까. 필자는 2019년 6월6일자 본란에 “왜 한국인은 노벨賞을 타지 못할까”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첨삭해서 다시 싣는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映畵(영화) ‘기생충’이 칸 映畵祭(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데에는 유능한 영어 翻譯家(번역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美國人(미국인) 영화평론가 다르시 파퀫(Darcy Paquet)씨를 말한다. 그는 2018년에만 한국영화 8편을 飜譯했거나 監修(감수)했다고 한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영화평론을 할 만큼 영화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映畵는 일상의 生活言語(생활언어)로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外國人의 情緖(정서)를 이해하고 그들의 心琴(심금)을 울릴 飜譯을 하기란 至難(지난)한 일이다. 다행히 우리말과 映畵에 능숙한 美國人을 만나 칸에서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고 본다. 이듬해 영화의 본고장 미국에서 아카데미 大賞(대상)인 작품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外國人을 설득할 만한 日常의 生活言語를 飜譯하기도 어려운 법인데, 만일 이것이 自然科學분야나, 數學, 文學의 분야로 넓어진다면 우리의 사정은 어떻게 될까. 아직껏 누구도 이를 穿鑿(천착)하여 명백히 밝혀낸 사람이 없어서 분명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위 映畵의 예에서처럼 言語의 문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학문이건, 문학이건, 정치건 다 마찬가지다. 자신의 사상, 실력을 나타낼 수 있는 수단은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을 통해 疏通(소통)을 해야 남들이 업적을 인정해준다. 예컨대 어떤 나라의 詩人이 神(신)도 讚嘆(찬탄)할만한 작품을 썼다고 치자. 자국인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그 가치를 알아줄지 모른다. 그러나 노벨상을 주관하는 외국인들도 똑같은 깊이로 우수성을 이해할까? 英語를 쓰는 英國이나 美國人들이 감동할까? 수치로 나타나는 과학적 성과도 마찬가지다. 문학작품보다는 쉽겠지만, 外國人이 자연스럽게 수긍할 만큼 그 나라 말과 글로 잘 표현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작업을 日本처럼 잘 해왔다고 자신할 수 있나? 日本은 16세기 이후, 鎖國政策(쇄국정책)을 쓰는 동안에도 나가사키, 사카이 같은 도시를 열어두고 서양의 과학문명을 받아들였다. 그 대표적인 결과가 바로 戰國時代(전국시대)의 日本을 통일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인을 혼 뺀 鳥銃(조총)이다. 그리고 明治維新(명치유신)이 일어나기 전부터, 네델란드語, 英語를 가르치는 곳이 생겨났다. 福澤諭吉(복택유길•후꾸자와 유기치))로 代表되는 日本의 近代 思想家들은 1850년대부터 미국, 영국 등 외국에 留學(유학)을 가서 서양의 문명을 접하고 이를 漢字로 표기하는 수많은 單語(단어)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수많은 근대 文明語(문명어)는 대부분 日本人 작품이다. 지금 韓國, 中國, 臺灣 등이 그 덕을 보고 있다. 飛行機(비행기), 地下鐵(지하철), 鐵道(철도), 汽車(기차), 軍隊(군대), 社會(사회), 文化(문화), 運動(운동) 등. 이런 單語는 鳥足之血이다. 科學(과학), 生理學(생리학), 物理學(물리학), 化學(화학), 工學(공학), 哲學(철학)이라는 말 그 자체와 그 속에서 쓰이는 수많은 용어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렇듯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200년 가까이 日本人은 漢文(한문)의 古典(고전) 속에 나오는 漢字를 이용하여 선진외국의 문물을 나타내는 수많은 文明語를 만들어냈고, 이를 온갖 학문에 適用(적용)해서 넓고 깊게 蓄積(축적)해놓았다. 천문학 예를 들어보자. 영어의 star, planet, satellite, comet, meteor는 恒星(항성), 行星(행성), 衛星(위성), 彗星(혜성), 隕星(운성), 혹은 流星(유성) 등으로 번역된다. 모두 일본인이 만든 말이다. 그 결과, 外國人은 정확히 定義(정의 • definition)가 내려진 단어로 작성된 日本人의 논문을 쉽게 英語로 置換(치환)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모두 별이다.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하여 과학 용어를 번역하기란 이렇게 불가능하고,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 감각을 표현하는 노랗다는 누렇다. 샛노랗다, 싯누렇다, 누르스름하다, 누리끼리하다 등 많은 단어가 있으나, 과학 문명어를 나타내기에 우리말은 한참 부족하다.
그렇게 일본과 일본인이 수입하고 만들어낸 근대과학과 문명어가 우리나라의 産業化(산업화)에 크게 기여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65년 이후 請求權 資金(청구권 자금)과 공식적 技術 供與(기술 공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수백 년 蓄積해온 과학 실력 뿐 아니라, 문학, 철학, 법률 등 인문학 지식을 해방을 전후하여 우리가 베껴오다시피 借用(차용)내지 盜用(도용)한 것들이 어디 한둘인가. 양과 질에서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 結論(결론)은 말과 글이다. 우리는 4350년의 歷史(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글자 없이 살았다. 다행히 紀元前後(기원전후) 무렵, 漢字가 들어와 吏讀(이두), 한국식 漢文, 중국식 漢文으로 발전하면서 중요한 표기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1443년 세종대왕은 세계가 인정하는 우수한 글자를 만들어냈지만, 汎用(범용)한지는 100년 밖에 안된다. 우리말사전이 편찬된 지는 80년에 불과하다. 文明語로 정착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한글은 현재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發音記號(발음기호)에 불과한 형편이다. 飛行機를 우리말로 ‘날틀’이라고 하자. 그럼 20만개가 넘는 비행기 部品(부품)은 무엇이라고 용도에 맞는 이름을 붙일 것인가. ‘現象學的 方法論(현상학적 방법론)’은 무엇이라고 우리말화할 것인가. 한자를 한글로 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글자는 읽을 수 있겠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는 ‘言語 無識者(언어 무식자)’를 양산할 공산이 크다.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천재들이 태어나 순수한 우리말로 문학작품, 과학, 철학서적을 펴내고 이를 읽지 않고는 世界人이 학문을 논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英語와 직접 交互作用(교호작용)을 할 수 있는 漢字를 적극 사용하고 권장해야한다. 그렇게 해야 우리의 業績(업적)과 사상이 정확히 저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국어를 사용하는 학자나 작가는 100년이 가고, 200년이 가도 노벨상을 탈 수 없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