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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을 증거하다
행 13:24-35
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행 13:24-35 / 이분이 오시기 전에 침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에게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그의 생명이 거의 다해 가던 무렵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메시야로 생각합니까? 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분은 곧 오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조차 풀어 드릴 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참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26) 아브라함의 자손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여러분, 이 구원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27) 그런데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임으로써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마다 예언자의 말씀을 읽고서도 예수께서 바로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이라는 것을 깨닫지도 알아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28) 그들은 예수를 처형할 만한 아무런 정당한 근거도 없이 빌라도에게 강요하여 예수를 죽이게 하였습니다. 29) 그분의 죽음에 관한 모든 예언대로 그들이 다 해치운 후에 그들은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장사하였습니다. 3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었던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31) 그후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동행한 사람들에게 여러 번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 사실을 여러 사람들 앞에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32-33) 이제 바나바와 나도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그 기쁜 소식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때에 와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제 2편에서 ㄱ) `오늘 내가 너를 내 아들로 세워 영광스럽게 하였다'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ㄱ. 시2:7) 34)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음에서 살려 내신 뒤 다시는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ㄴ) `내가 옛날에 다윗과 맺은 언약을 그대로 지켜서 그 모든 약속을 너희에게 이루어 주겠다'고 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ㄴ. 70인역 사55:3) 35) 다른 시편에서는, ㄷ) `주께서 이 몸을 스올로 팽개치지 않으시고 주님만을 애타게 그리는 이 몸 버리지 않으시리라'고 더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ㄷ. 시16:10)
바울에게 회당과 안식일은 복음전파의 좋은 매개체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한 바울의 설교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24-25) 세례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였고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요한이 먼저 회개와 세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은 그들을 구주께로 돌이키려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여 그 분을 위해 사는 삶을 의미하고, 물세례는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향하려는 헌신을 공적으로 보여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의 말을 인용해 결국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약속에 대한 무지를 깨우쳐 줌(26-31) 바울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배척당한 것이 사람들의 무지, 곧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니’(28)라는 예수님의 무죄에 대한 언급은 누가가 기록한 빌라도의 재판을 연상시킵니다(눅 23:4, 14, 22).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습니다(27, 29). 그는 예수님의 사형 수단을 ‘나무’(29)라고 설명함으로써 예수님이 신명기 법에 의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로 인식되었음을 증거했습니다(신 21:23). 또한 예수님이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하신 것과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설명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본 증인들이 있음을 밝혔습니다(31).
약속의 성취(32-35)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시 2:7)라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예수님이 그분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바울은 33절에서 인용한 시편 2:7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55장 3절과 시편 16편 10절을 인용했습니다. ‘거룩하고’(34)와 ‘거룩한’(35)이라는 같은 뜻의 단어가 함께 인용되었습니다. ‘썩음을 당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다윗의 후손을 가리켜 약속한 것입니다. 남아 있는 과제는 ‘썩음을 당하지 않는’ 자의 정체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밝혔습니다(37).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복들이 다른 사람들(너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34).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적용: 물이 범람하는 장마철에 마실 맑은 물 찾기가 어렵듯이 성경말씀의 정보들과 자료들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이 시대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 사실을 믿고 있는 사람입니까?
모든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며, 그 안에서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우리를 일으키시고 힘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늘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13:24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 바울은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한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세례 요한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세례 요한을 예수의 권위를 보증하는 데 이용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었으며 이러한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18:25;눅 3:7-15). 따라서 바울은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거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청중들에게 이러한 세례 요한의 활동을 회상시켜 그의 말에서 예수의 권위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그는 이 사실이 예수의 권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13:25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 이 말은 딤후 4:7에서도 나오는데 헬라적 어투로서 바울의 독특한 어법이다(Haenchen). 본 구절은 요한이 예수에 대한 증거 사역을 다하였을 때를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바울이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언급한 의도는 이 표현 속에 함축되어 있다. 즉 요한 자신이 메시야임을 직접적으로 거부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본문은 눅 3:15, 16과 요 1:19-27의 내용으로 당시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믿었던 유대인들이 많았음을 반증함과 동시에 요한이 대중들로부터 대단한 신뢰와 인기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신뢰하는 요한이 직접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 예수가 참 메시야이며 따라서 세례 요한 자신은 그 증언을 위한 사명자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혔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를 메시야로 확증하고자 한다.
=====13:26
형제들 - 청중들을 부르는 이 말은 회당 안에 모인 유대인들과 개종한 이방인들 및회당 예배에 참석한 이방인들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청중을 다시 부름으로써 주위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의 설교를 본론으로 이끌었다. 아브라함의 후예 - 이 말은 혈통적인 유대인들을 제한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도 의미한다. 이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 본 구절은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들로 이해된다. 이에 대해서도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 본 구절을 헬라어 본문에 따라 직역하면 '이 구원의 말쏨이 우리에개 보내졌거늘'이란 의미가 된다. 개역성경은 주어를 하나님으로 전제해서 보내신 주체(主體)인 하나님을 강조했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구원의 말씀'이 강조되었다. 본절부터가 바울의 설교에 있어서' 본론 부분에 해당하므로 당연히 '구원의 말씀이 강조되어야 한다. 한편 '우리에게'란 표현은 어떤 사본에서는 '너희에게'로 언급되어 있다. 본절의 구원의 말쏨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없이 주어졌음을 볼 때 '우리에게'가 무난하다.
=====13: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 - 바울은 예수를 처형했던 주범을 언급하고있는데 이것은 누가의 견해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를 처형한 장본인들이 이스라엘 종교.정치 지도자들임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눅 23:1-25).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 15절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그들은 예배때마다 예언서를 읽지만 예언서의 올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구셰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같은 바울의 지적은 유대 지도자들의 무지함을 강조하며 또한 예수의 처형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응하게 하였도다 - 결국 예수의 불법적인 처형도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이미 제시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밝히는 바울의 설교는 3:18에서 언급되는 베드로의 설교와 일치되고있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와 바울은 신학적으로 동일성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이 두 설교가 누가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누가 자신의 신학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Haenchen).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나 바울의 설교에서 같은 내용을 언급하여 초대 교회 시대에 있어서 케리그마가 어느 지역에서나 동일했음을 보여준다.
=====13:28
죽일 죄를 하나도 채지 못하였으나 - 본 구절은 예수의 무죄함을 강조한다. 이는 눅 23:14, 15에서 언급된 빌라도의 무죄 선언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무죄 선언과 눅 23:14, 15에서의 무죄 선언의 주체를 구분하고있다(Haenchen). 즉 그는 눅 23:14, 15에서는 빌라도가 무죄를 선언한 것이고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무죄함을 입증한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죄가 없으신 예수에 대한 무죄 선언은 재판 과정에서나 신학적으로나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13:29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 바울은 예수의 재판과 처형을 이미 성경에 예언된 바의 성취로 이해하며 예수 사건을 전체 구속사의 핵심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재확인하면서 부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즉 장사지내고 무덤에 돌어갔다는 점이 예수의 죽음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바울은 믿는 듯하다. 여기서 '십자가'라는 말 대신 '나무'라고 언급한 것은 신 21:23에서 언급된 예언과 일치시키려는 바울의 의도로 보여진다. 한편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복음서처럼 자세하게 설명하지않았다. 이는 바울의 관심이 예수의 완전한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구속사적 의의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13:30
하나님이...저를 살리신지라 - 부활신앙에 대한 고백은 초대 교회에서 이미 공통된교리로 고정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15;4:10). 그리고 예수를 부활하게 한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정죄와 처형을 하나님께서 불법적이고 부당한 것으로 보증하셨음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예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에게 정당한 것으로 용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13: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 - 본 구절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동행했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복음서에서도 증언하는 부활 목격자는 매우 다양하다. 즉 마태는 예수의 부활 현현(顯現)의 장소를 갈릴리로 제한시켜 언급하고 있으며(마 28:7, 10, 16) 마가 역시 마태와 동일하다. 요한은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각각 부활 현현이 있었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요 20장;21:2, 14). 또한 누가는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가 예수의 부활 현현을 목격했으며(눅 24:18) 예루살렘에 있던 열 한사도와 그 외의 추종자들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눅 24:33). 이와 같이 각 복음서마다 부활 현현의 장소와 대상이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도 고전 15:6에서는 열 두사도와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 전반에 걸친 부활 현현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할 때 본문의 의미는 불특정한 같릴리 출신인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10:39-41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처럼 사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Haenchen, Bruce).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다메섹 경험을(9:1-8)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고전 15:6에서 언급한 500명의 목격에 관한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본문의 내용은 저자인 누가의 관점에서 묘사된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 언급된 바처럼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출신의 예수 추종자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러 날 - 여기서 언급한 부활 현현의 기간은 1:3에서 언급된 400일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Haenchen, Robertson, Beyer).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이 부활의 산증인임을 언급하는데 바울 자신이 그 증언자에 포함되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32절에서 본절의 증인들과 구분하여 '우리도'라고 바울 자신과 바나바를 언급한 점으로 보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목격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한다(10:39-41).
=====13:32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 - 이 약속은 23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한다. 바울은 롬 4:13과 갈 3:16에서도 같은 형태의 진술을 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오셔서 사역했음을 밝혔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이단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성취된 소식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무지를 벗겨주고자 노력했다.
=====13:33
우리 자녀들에게 - 몇몇 사본들에는(* ,A,B,C,D 등) 약속이 성취된 세대가 '우리의자녀들'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본에서는(C,E,P 등) '그들의 자녀된 우리에게'로 언급되었다. 본절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세대에 대한 것이므로 '우리 자녀들에게'란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바울은 지금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대의 세대를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대부분의 영역처럼 '그들의 자녀된 우리에게'로 해석되는 것이 무난하다. 너는 내 아들이라 - 시 2:7을 인용한 본문은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대관식(戴冠式)때 사용되던 시로서 이스라엘 왕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 하나님과 부자(父子)의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이 시편의말씀을 예수에게 적용시킨 것은 바울의 독특한 인용이 아니다. 사실 복음서에서도(막 1:11; 눅 3:22) 예수가 메시야로서 성령의 능력을 받을때 본문과 갈은 내용을 인용하고있다(Bruce).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시 2:7을 예수에 대해 적용시켜 인용하였다(히 1:5). 이는 시 2:7이 비록 왕의 대관식에서 많이 사용된 구절일지라도 유대인의 전통에서 그 구절을 메시야와 연관시켰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예수께서 다윗의 가문에서 나온 왕권적인 권리를 가진 메시야로서 하나님께 세움을 받았다고 믿었던 것이다.
=====13:34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 - 바울은 예수가 죽어서 썩지 않고 부활할 것이라는 구약적 근거를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다윗의 가문에서 부활할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는 구약적 증거로 칠십인(LXX)역의 이사야 55:3을 들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의도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2:27). 여기서 바울은 기독교를 유대교 전통과 분리된 이단이 아니라 유대교가 필연적으로 가야 할 길임을 강변하고있다. 즉 본절은 당시 전통적인 유대교 앞에 소수종교로서 기독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바울의 끈질긴 설득이다.
=====13:35
또 다른 편에 - 이 말은 33절에서 언급한 들째 편(시 2:7)과 구분되는 시편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은 시 16:10 근거로 구약적인 부활 사상을 다시 언급하여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더욱 심도있게 진술하고 있다.
< 설 교 >
메시야에 대한 증언들
사도행전 13:24-31 / 김영규 목사
마지막 예언자 세례 요한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예수님만 유일한 구원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변은 “성경이 그렇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철저하게 성경에 예언된 대로의 생애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초반부터 예수님에 대한 상징과 예언으로 충만합니다. 여자의 후손(창3:15)은 분명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할 것을 암시합니다. 뱀(사탄)이 여자의 후손(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신 가죽 옷은 장차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실 의의 옷(갈3:27)을 상징합니다. 하와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실 생명의 상징입니다. 아벨이 바친 어린양의 희생, 유월절 어린 양은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요1:29)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대 위에 세운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나게 하신 것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레위 제사 제도에서 항상 바쳐지는 각종의 희생 제물은 모두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출생지, 거주지, 혈통과 계보, 행하신 일들이 다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동정녀 탄생을 그대로 예언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예수님은 성경대로 오시고 성경대로 사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세상에 직접 소개한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24)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마11:11) 세례 요한은 구약의 기라성 같은 선지자에 비한다면 그 행적이 오히려 초라합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기적을 베푼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사야나 예레미야 다니엘 같이 많은 예언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을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세례 요한만이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 세상에 알렸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세례 요한만이 예수님을 목격하고 소개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한 일이 뭡니까? 요단강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그 다음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세례 요한이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감옥에서 한 일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런 질문을 한 일입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눅7:19)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24-25) 세례 요한은 구원자가 누구인지 알려 줬습니다.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26) 나사렛 예수 바로 그분이 메시아시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배척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은 세례 요한의 소개가 아니더라도 충분이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 승천하시기까지의 전 생애가 구약 성경의 예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증명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27-28) 특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 죄를 덮어씌웠습니다. 첫째는 신성모독 죄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으로 신성을 주장한 것이 죄라는 겁니다. 두 번째 죄는 성전 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전이신 예수님 자신의 육체를 가리킨 말씀이었습니다. 헤롯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진정한 성전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진짜 성전은 사람들의 심령 성전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솔로몬 성전이 무너짐으로써 구약적 의미의 성전은 사라졌습니다. 헤롯 성전 역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약 40여년 후에 완전히 로마군에게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진정한 성전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성전 모독죄로 죽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분노하여 빌라도 법정까지 몰려가서 외쳤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눅23:21,23)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성경을 오해한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관한 성경 말씀들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27) 識字憂患입니다. 아주 모르는 게 차라리 낫습니다. 조금 아는 것 때문에 메시아를 부정하고 배척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메시아는 실제 메시아와 완전히 성격이 다른 메시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는 모세와 같고 다윗과 같은 모습으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모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18:15) 유대인들이 생각한 모세는 정치적인 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지도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양식을 공급하면서 인도했던 지도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5천 명을 먹이고, 나사로를 살려낼 때에 예수님이 모세 같이 로마 황제로부터 독립시키고 양식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다윗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7)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에 이스라엘 독립 국가를 세워서 태평성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런 기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처음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에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시지 않자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고, 배척의 외침으로 변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은 맞지만 정치적인 왕, 세상적인 왕으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정치적인 왕이기 이전에 제사장적인 왕이고, 선지자적인 왕이십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제물이 되신 속죄 희생의 왕이십니다. 군림하는 왕이 아이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섬김으로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왕이 아닙니다. 모든 결과는 유대인들이 성경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이 성경을 오해한 것 자체도 성경의 예언대로입니다. 본문에 보세요.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27,29)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참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4-15)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어졌습니다. 유대인 군중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공회원들, 로마 총독이 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체포당한 후에 여섯 차례의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종교 재판 세 번, 정치 재판 세 번입니다. 안나스, 가야바, 공회 앞에서 종교 재판을 받으실 때 무슨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율법을 터럭만큼도 어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공회는 예수님에게 불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세 차례나 거듭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18:38, 19:6) 그러면서도 그는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사형에 처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다 성경의 예언대로입니다.
앞서 구약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구약 예언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여자의 후손, 아벨의 제사,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친 것이 다 메시야 죽음에 대한 예표들입니다. 유월절 어린양, 레위 제사에 나타나는 모든 희생 제물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나타냅니다.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된 시편 22편,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섬세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22:1,6-8,17-18)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예수님이 배척당하고 죽으신 것은 이런 모든 예언의 성취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환영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취되지 않았겠지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것은 성경대로 오신 예수님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 아닙니다. 수 천 년 동안 성경에 예언된 예언대로 인류 역사 속에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본문의 결론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29-30)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 good news 란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소식이 다 복음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인가요?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오늘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고, 부활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인간들이 지옥의 정죄에서 벗어나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망 아래 있는 모든 인류가 영생 부활을 하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생애의 가장 위대한 점은 바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유는 산상수훈의 고상한 교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4복음서는 일치되게 이 마지막 한 주간의 역사를 가장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傳記는 마땅히 생애 전반을 기록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傳記는 33년 6개월의 생애 중에 마지막 3년 6개월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 3년 6개월 중에서도 마지막 한 주간의 기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마태복음은 전체 28장 중에 17장부터 28장까지 열두 장이 마지막 한 주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마가복음은 전체 16장 중에 6장, 누가복음은 전체 24장 중에 6장, 요한복음은 전체 21장 중에 절반에 해당하는 열 장이 마지막 한 주간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의 결론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무덤에서 살리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본문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 생애의 목격자요 증인들입니다.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31)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목격자로 나서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예루살렘 사람들과 갈릴리 사람들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과 갈릴리 사람들은 어떻게 다릅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이 학식 있는 도시의 사람들이라면, 갈릴리 사람들은 배움이 짧은 시골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세련된 문명 도시 사람들이라면, 갈릴리 사람들은 투박한 촌뜨기들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지위와 권세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갈릴리 사람들은 힘 없고 지위 없는 약자들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세상을 좌우하는 유명 인사들이라면 갈릴리 사람들은 영향력 없는 무명 인사들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좋은 조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사회적 여건이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참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오히려 갈릴리 사람들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영접했습니다. 열두 사도들 대부분이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갈릴리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에서 많이 배웠다고 하나님을 잘 아는 게 아닙니다. 학식 많은 영적 무식쟁이들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알면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돼지 대가리를 섬기겠습니까?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5,27-29)
오늘 우리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세상에서는 화려하나 영적으로 빈곤한 예루살렘 사람들이 되지 마세요.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부족한 듯해도 영적으로 부요한 갈릴리 사람들이 되세요. 바울은 이런 자부심을 가지게 된 것을 자랑합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6-10)
달려갈 길을 마감 할 때
행 13장 24~27절 / 신성종목사
■ 벌써 3년이 되었는가요? 고 신 정수 장로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가족은 물론이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장로 훈련을 받고, 안수를 받았는데 단 한번도 공 기도를 하기도 전에 돌아가시다니. 저의 목회를 돕기 위해서 정말 충성을 다 하신 분인데.
사실 갑자기 죽음이 다가오면 우리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왜 지금인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죽음에 따르는 수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25절의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그의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자신을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눅 3:15) 자신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다. 그는 그분의 신을 풀어주는 종도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한 구절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고, 말라기4:5절에서 예언된 다시 오마하고 약속된 엘리야의 모형적 인물입니다. 그는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은 것을 책망하다가 결국 감옥에서 죽고 만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가 그런 메시야의 선구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사생 관]이 바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도 바른 사생 관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인생의 성공적인 경주를 하려면?
딤후 2장 5절에 보면 인생을 경주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인생은 마라톤 경주처럼 긴 경기입니다. 이 긴 마라톤 경기와 같은 인생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성공적인 인생 경주는 인생을 바로 사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바로 살려면 [사생 관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생각하려고 합니다만 그것은 이미 늦었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인물들은 다 사생 관이 바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사생 관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른 사생 관을 가지는 것이 성공적인 경주를 하는 기본 비결]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죽음을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departed]라고만 표현합니다. [떠난 분]이란 뜻입니다. 또 [죽음을 단순히 별세]라고만 표현합니다. 이 세상을 떠난 분이란 뜻입니다. 또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합니다. 장의사에 가보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단순히 잠자고 있는 것처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경비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일년 동안에 사용되는 화장품 값이 몇 억 달러가 더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잠자고 있는 것처럼 시체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사생 관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여기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사생 관에서 사명감도 나오고, 생의 목적도 나오는 것입니다.
2.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전15:26절에 보면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바로 우리 인류의 공통된 마지막 원수입니다. 죽음은 또한 하나님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본래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를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죽이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계획을 반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1. 왜 죽음은 슬픔을 가져옵니까?
그것은 우리의 애착(attachment)을 끊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게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슬픈 것입니다. 또 하려고 했던 일을 하지 못 한 체 [미결된 사업]으로 남기 때문에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죽음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한꺼번에 거품 속으로 던져 버리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2. 죽음은 왜 옵니까?
우리는 착실하게 살려고 애쓰던 젊은 사람들이 갑자기 죽었을 때 왜 그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죄 많은 사람들은 건강하게 성공을 하면서 살고 있는 데 왜 하필이면 그 착한 젊은이가 갑자기 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집니다. 어린아이가 죽을 때도 꼭 같은 의문이 우리들을 괴롭힙니다. 솔직히 우리는 왜 그 착하게 살려고 한 젊은이가 갑자기 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현재라는 골짜기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도 없고,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의 근본적 원인을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또는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본래 인간은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다시 말해서 원죄로 인해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시편 116편 15절에서 ”성도의 죽는 것은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계 14:13)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살전 4:14)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3절에서는 소경된 사람의 이유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세군에서는 사관생도들의 난에 사망이란 난이 없고, 다만 진급의 난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망은 바로 천국으로의 진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 14장 13절의 말씀을 유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다시 말하면 성도들에게는 죽음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현관문입니다. 믿습니까?
3.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생명체는 다 한번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죽음은 궁궐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오두막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두 번 오는 사람도 없고, 안 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꼭 같이 한번씩 옵니다.
(4) 또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아무도 자기의 죽는 날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암에 걸려 의사의 마지막 통고가 있는 말기환자들도 “나만은 더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계는 항상 [착각, 착각]하고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나도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안 죽을 것이란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가?
1. [모든 것은 다 잠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은 그리고 나에게 속한 것만은 영원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올 때 우리는 낙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여인숙이요 우리는 이 여인숙에 잠간 머물다가 가는 나그네입니다.
2. 죽음이 올 때 우리에게는 몇 가지의 영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준비 없는 죽음은 너무도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무신론자인 토마스 스코트는 “아 나의 운명은 너무도 비참하다”고 탄식하면서 죽었습니다. 프랑스의 볼테르는 주치의에게 나의 생명을 6개월만 연장시켜준다면 나의 가진 것의 절반을 주겠다고 했지만 죽고 말았습니다. 중국을 처음으로 천하통일한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동서의 문화를 비교해보면 사생 관이 전혀 다릅니다. 동양에서는 아프지 않고 [갑자기 죽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얼마동안 아플지라도 죽음을 준비하기를 원합니다. 유언도 작성하고, 하던 일들도 정리를 하고, 특별히 마음의 준비를 하기를 원합니다. 의사들도 자세가 전혀 다릅니다. 암 말기의 환자에게 한국에서는 가족들에게만 말하고 본인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환자에게 말하면 석 달 살 사람이 석주도 못 살기 때문입니다. 모든 소망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상세하게 말하고, 서로 농담도 합니다. 그것은 준비를 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방법을 쓰든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최근에 이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Hospice라는 단체를 통해서 말기 환자들에게 소망을 갖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문제는 그가 죽은 후에 가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은 후에 환자의 영혼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첫째로 알지 못하는 죽음의 세계에 갈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많습니다. 둘째는 가족들에 대한 염려가 많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생명보험을 듭니다만 큰 도움이 못됩니다.
갑자기 죽게 되는 분들을 만나보면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분노가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왜 지금 죽어야 하는가? 내가 남보다 더 성실하게 살았으면 살았지 죄가 더 많은 것도 아닌데 이것 너무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창조주에 대한 [분노]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다음에는 [하나님과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살려만 주시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재산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이 타협을 해도 안 될 때에는 죽음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때에 소망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죽을 때 소망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달려갈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로 가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사실 오늘 날 가장 인기 없는 단어가 지옥이란 단어입니다. 심지어 19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인 Robert Ingersoll이란 사람은 [지옥이란 말은 종교의 허수아비(scarecrow)]라고까지 악담을 했습니다. 물론 우리 중에 죽음의 체험을 가져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래서 가보지 않은 천국을 믿고, 지옥이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서의 통계를 보면 53%가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통계가 내려갑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또 다른 방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 두려움을 버리라고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계 2:10),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계 1:17)라고 했습니다. 또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됩니다만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길은 천국에 갈 준비를 하고 날마다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요5: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끝으로 죽음을 준비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종말론 적 삶을 삽니다. 그것은 바로 쓸모 있는 삶, 필요한 삶, 유익을 주는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는 히브리 격언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죽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놓고 갑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우리 모두 자신들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물어볼 때에 다 같이 [천국입니다]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죽는다면 나는 어디로 갑니까? (천국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다 한번은 죽습니다. 그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번은 꼭 죽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준비하였다가 그것이 내개 찾아올 때에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맞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첫 설교, 복음에 감격하여
행 13장 24~31절 / 정 우목사
미국에 윌리엄 쿠퍼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운 사람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거의 모든 사건들을 신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도 신화요, 예수님의 기적 사건도 신화라고 주장합니다. 신화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들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 사건이 실제로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fact)보다 의미(meaning)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 사건에 대한 경우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런 기적을 행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병이어 사건을 신화(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그게 뭘까요?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고자 하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해석입니까?
이런 해석의 결과입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윤리적인 종교로 전락시켰습니다.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종교는 다 똑같다’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도 종교다원주의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윌리엄 쿠퍼는 이런 신학적인 토대 위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고난주간 전 주입니다. 쿠퍼 목사는 토요일 날, 고난주일 주보를 만들었습니다. 그 교회는 주보를 이렇게 만든다고 합니다. 1면에 주일설교 제목을 쓰고, 그 밑에 목사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 교회 고난주일 1면은 이렇습니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설교 제목입니다. 바로 아래에‘윌리엄 쿠퍼 목사’라고 썼습니다.
윌리엄 쿠퍼 목사는 이렇게 주보를 만들어 놓고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윌리엄 쿠퍼 목사.’ 계속해서 다시 읽었습니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윌리엄 쿠퍼 목사.’ 그 순간 자기의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쿠퍼 목사, 자기가 예수를 죽였다고 깨달아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신화가 아니었습니다. 사건이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제야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다음 날, 그는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설교했습니다. 감격스러운 설교였습니다. 그 교회는 그때부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볼 말씀도 그와 같은 말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갔습니다.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이들은 회당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유대교 회당에 갔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랍비였기 때문에 회당예배에서 자주 말씀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율법서와 예언서, 즉 성경을 많이 읽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회당장이 읽은 성경 말씀에 대해서 율법에 맞게 설교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윌리엄 쿠퍼 목사처럼 전혀 새로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왜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유대교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통해 주시는 교훈을 듣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면서 특별히 구약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신약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세례 요한부터 예수님에 대한 부분입니다.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신 하나님>
24절을 보십시오.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마가복음 1장 2-4절을 보십시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기 앞서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두 가지 목적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요, 또 하나는 회계의 세례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와서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는데 그는 당시의 제사장들과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전합니다.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곳에 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대답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메시야)가 아니다. 그는 내 뒤에 오신다. 나는 그의 신발 끈조차 풀 수 없는 사람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 사명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이루어야 할 평생 사명은 무엇입니까? 사명이란 나의 존재 목적입니다. 사명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뜻있게 살려면 거기에 걸맞은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이 있을 때에 우리 삶은 존재 가치가 있게 되고, 열정이 생겨나고, 성취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만의 사명을 찾을 수 있을까요?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가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에‘네 가지 사명’이라는 글이 나옵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이 사명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어느 날 근사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모두들 그를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합니다. 그때 마당을 쓸 던 한 청년이 투덜거립니다. 빗자루를 내팽개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 참 불공평하십니다. 누구는 저렇게 존경받고 살고, 누구는 이렇게 사니 말입니다.”셰익스피어가 그 소리를 듣고 그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젊은이, 나는 펜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한 쪽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네. 그리고 자네는 지금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한 쪽을 아름답게 가꾸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자네나 나나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는가?”그러자 그가 다시 빗자루를 잡았다고 합니다.
참 멋진 말입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이 사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 이루었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생을 마감하는 날,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예수님처럼‘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일 이루려고 했습니다.’내 일 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일 하다가 마치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신 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바울 사도는 26-31절까지에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26절, ‘구원의 말씀을 (구원자를 이미) 우리에게 보내셨다’
27-28절,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30절,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31절, ‘우리가 증인이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안타까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메시야가 이미 보내주셨는데도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2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안식일마다 성전과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알지 못하여 이미 오신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도 이곳 회당에서 성경을 듣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오신 메시야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울 설교의 초점입니다.
사실 바울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도 메시야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녔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세종 때 좌의정, 우의정을 지낸 맹사성(1360-1438년)이라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고향땅 온양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고향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길에 나왔습니다. 길도 고치고, 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도 맹사성이 안 옵니다. 누군가 말합니다. 이미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몰랐을까요? 사람들은 맹사성이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대단한 가마를 타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맹사성은 초라한 옷을 입고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앞을 지나갔음에도 그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대단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또한 만왕의 왕으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베들레헴 말구유간에 오셨고, 훗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백성들의 기대와는 딴판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알지 못해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는 압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메시야요,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요?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체험이 있었기에 바울은 복음에 감격하여 힘차게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안수현 청년의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2003년에 군의관으로 입대한 후, 2006년 1월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그 청년의사가 쓴 글들을 엮은 것입니다.
그는 고려대 의학과 91학번 내과 전문의입니다. 그는 유명한 명의도 아닙니다. 의학계에 어떤 족적을 남긴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졸지에 세상을 떠나자 조문객 4000여 명이 줄을 이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그는 정말 참 의사였다고, 예수님처럼 살았던 의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국군 의무사령관 김록권 장군은 안수현 대위를 추모하면서 ‘예수님께서 군의관의 옷을 입으시고 한국 땅에 나타나셨다가 가신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환자의 살이 베일 때 아프겠거니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베인 것처럼 아파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는 달랐습니다. 환자의 생명을 마치 자기 생명처럼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야외로 며칠 훈련을 나갈 때입니다. 군의관이기에 앰브런스 안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편안하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는 풀밭에서 사병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부하들의 건강을 먼저 챙겼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삶은 치료와 전도였습니다. 그는 계속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 안 믿는 환자나 가족을 만나면 책이나 선물을 사서 찾아갔습니다. 병실만 아니라 집에도 빈소에도 찾아갔습니다. 말로만 전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어느 날 전방에서 유행하는 유행성 출혈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처럼 33세였습니다.
영정 사진이 걸리기 전부터 장례식장은 조문객으로 들어설 곳이 없었습니다. 병원 매점 앞에서 구두를 닦는 아저씨부터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노점상 할머니까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주님 만난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과거에 랍비로 있으면서 많은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설교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람이 된 후 했던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예수님을 그렇게나 미워했고, 또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던 죄인이었지만 오래 참아주시고, 만나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 때문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그래야 용서의 은혜, 죄 사함의 은혜 받습니다. 그래야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심으로 복음에 감격한 삶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구원의 말씀
행 13장 25~41절 / 김 조목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줄 알면서도 주어진 현실의 아픔으로 계절의 감각도 잊어버리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정치적, 경제적인 문제와 인간관계의 악화입니다. 병마의 시달림이 우리의 삶을 지치게 합니다. 더욱이 불확실한 미래로 사회가 더욱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절망한 자도 있고 말세에 최후에 발악을 하는 사단의 공격은 심하여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 간수가 외쳤던 것은 온 인류가 한결같이 외치는 소원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구함 얻고 질병과 억눌림에서 해방되며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건짐 받는 것 영원한 절망에서 어떻게 새 소망을 갖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을 얻는 것은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로 안 되고 수많은 금은보화로도 얻을 수 없으며 전 세계를 호령할 정치권력으로도 아니 되고 막강한 군사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또한 고행과 수련으로 인격이 변화된다 해도 구원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하셨습니다. 이 분명한 구원의 말씀을 제목으로 삼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 사도의 설교의 내용으로 구약 성경에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대로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구원의 길을 여신 것으로 26절에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하셨으니 구원의 말씀 바로 깨달으시기 원합니다.
첫째,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인간의 어떤 공로나 선행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하셨으니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1. 무죄하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27-29절)
십자가의 죽음은 흉악범을 처형할 때에 쓰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여 재판장 빌라도도 자기도 죄를 찾을 수가 없다(눅23:22) 하면서 손까지 씻으면서 이 사람의 죄와는 상관이 없다고(마27:24) 하였는데 왜 흉악한 범죄자가 죽는 십자가에 죽음을 당해야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선지자 통해 말씀하셨던 대로 만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죄인은 남의 죄를 담당할 수 없기에 죄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하셨습니다. 죄 지은 연고로 낙원(에덴)에서 좇겨 나고 죽음이 찾아왔으니 죄의 값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치루어 십자가에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사랑 베푸는 적십자, 안전제일의 청십자가 하고 쓰여집니다. 성도들이여! 나 같은 죄인 위해 고통과 멸시천대의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려 생명 주신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2. 무덤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30-37절)
무덤에 묻히신지 3일 만에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11번이나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500여명이 보는 가운데서 승천하셨습니다.(고전15:) 이것이 사53:3 이미도 다윗의 가문에서 되어질 것을 약속하신대로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고로 높이는 다윗도 하나님 섬기다가 죽어 썩음을 당하셨으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기에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고정관념이나 작은 머리로는 죽은 자가 살았다는 것 이해되지 않고 잘 믿으려 하지 아니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니 못할 것이 있나요? 또 예수께서 부활하심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절망에 처한 우리의 부활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최대의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죽이 이길 자 아무도 없고 죽음은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믿으면 우리도 부활한다는 확실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 부활의 능력 의지하여 영, 육간에 소생하며 새 역사 이루는 성도되시기 소원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나 같은 죄인 구원하기 위함이요 부활의 영광 보여 주신 것 우리의 산소망 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니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 역사 이루시기 원합니다.
둘째,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38-41절)
행위의 법인 율법으로는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고 예수그리스도를 힘입고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라(39절) 하나님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셨으니 이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면,
1.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38절)
그 어떤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 믿을 때에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어 깨끗하게 용서하시고 죄의 대가를 예수께서 담당해 주십니다. 내 힘이나 재주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습니다.
2.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다. (39절)
행위 완전하여 의롭다 할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롬3:10,21) 오직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거룩한 자 되게 하시어 하나님과 함께 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할 일입니까?
3.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33절)
시편 2편 “너는 내 아들이라” 인정해 주셨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 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면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 그 능력, 그 역사 이어가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4. 영생을 얻게 됩니다. (48절)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사는 특권을 받게 됩니다. 이 영생이야 말로 얼마나 인간이 갈구하는 것입니까? 이는 믿을 때 얻게 됩니다.
셋째,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믿음이란 형식이나 이론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7) 했습니다. 죽은 믿음은 아무 쓸모없습니다. 복음을 믿는 것이니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잘못된 생각과 삶과 방법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갈5:24) 되어야 합니다. 철저히 하게하고 예수님 부활 하셨듯이 새로운 모습, 자세, 생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기에 예수님께 내 모든 염려, 근심, 외로움 다 맡기시고 주님 가신 곳에 나도 가고 주님 하시던 일 나도 하고 그 말씀 따라 실천하며 그 사랑을 나도 나타내는 삶이 산믿음 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영원히 멸망 받은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구원이란 멸망 받고 주었던 우리를 건져내어 살려주었다는 것이요, 과거 죄악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현재도 우리를 보호 인도해 주시고 미래의 영원한 불심판에서 이미 건져주시어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천국의 시민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제 확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며 영, 육간에 복된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의 첫 설교
행 13장 26~39절 / 이상웅목사
오늘 말씀은 바울의 첫 설교입니다. 바울이 처음 한 설교가 아니라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설교입니다. 바울이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방문한 첫 사역지는 구브로였습니다. 구브로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한 설교가 첫 설교로 기록되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바울을 파송한 수리아의 안디옥과 구분하기 위해 비시디아 지방에 있는 안디옥이라고 불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헬라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였으나, 이곳이 터키를 횡단하는 도로가 있는 요충지였기에 로마제국에 편입되어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되던 도시였습니다. 이곳의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당시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던 세 가지 세력이 이 도시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도시를 세운 헬라의 철학적 영향력과 이 지역을 통치하는 로마의 정치적 영향력과 유대인의 회당을 통한 종교적 영향력이 공존하는 곳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BC 200년경에 유대인 2천 가구가 이 지역으로 이주를 했다고 합니다. 이들 중 다수가 남아서 회당을 중심으로 살아오면서 주변에 종교적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할 때 경건한 이방인들이 꽤 있었다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바울이 설교를 하면서 그 대상을 부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한 이들은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 사회는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적 상황이었고, 신전행사가 음란하고 비도덕적인 활동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방인들 중에서 이런 종교적 활동을 싫어하고, 윤리적 삶, 절제된 생활, 유일한 신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유대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방인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선민의식으로 우월감에 사로잡혀 이방인을 차별하고 멸시했었습니다. 이런 차별이 있었는데도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정말 종교적으로 진지한 성찰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도시의 회당에서 바울의 첫 설교가 이루어졌습니다.
1. 하나님의 통치를 설교하다
비시디아 안디옥이 헬라와 로마와 유대의 영향력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이런 배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헬라적 배경에서 자랐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교 가말리엘 학파에서 랍비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할 준비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태에서부터 복음 전할 자로 예정하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된 바울이 안식일에 이 도시의 회당을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회당에서는 랍비들이 앉는 자리와 유대인이 앉는 자리와 경건한 이방인들이 앉는 자리가 달랐습니다. 회당에서의 집회는 적절한 기도문과 성경말씀을 낭독한 후 회당장이 적절한 사람을 지목하여 교훈을 베풀도록 했습니다. 15절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회당장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온 랍비였기에 교훈을 말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히 돌아보면서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7-18절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통치하신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의 악행을 참으시면서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사사를 세우셨고, 극성스럽게 왕을 구했을 때 사울을 왕으로 주셨습니다. 그후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에서 구주가 오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간의 악함과 그럼에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대조하며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절정은 예수라고 한 것입니다. 23절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하나님은 약속대로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통치의 절정은 예수님을 이 땅에 구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끄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력히 논증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심을 보이시기 위해 아들을 구주로, 선물로 보내셨습니다. 혹시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확신이 없으십니까? 최고의 선물을 받고도 부족하다 말하십니까?
2.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하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구주로 주신 예수님께 집중하여 설교를 이어갔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였으나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성경의 성취입니다. 33절입니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예수를 일으키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부활시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시편 2:7의 말씀인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는 구절과 연결시켰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망에서 일으켜 부활하게 한 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은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편 2편은 왕의 즉위식을 노래한 시입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심으로 그를 만왕의 왕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시편 2:12입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의 말씀처럼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입맞추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다른 시편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말했습니다. 35절입니다.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시편 16:10의 말씀으로 다윗이 한 말이지만 다윗 자신에 대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죽어 무덤에 묻혀 썩음을 당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는 다윗이 미리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부활하심으로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바울의 첫 설교의 결론은 38-39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바울은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너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죄없이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하나님이 부활케 하신 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아야 하고, 이 예수님을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입어’라는 단어는 ‘~을 통하여’라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즉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은 율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한 것입니다. 죄인이 죄를 용서받는 길은 예수님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그 죄가 용서되는 것밖에 없고, 인간이 의롭게 되는 길은 예수님을 통하여 그를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힘입는 자는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의 첫 설교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의 설교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관한 것은 스데반의 설교와 유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할 때는 베드로가 인용한 시편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함으로 베드로의 설교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표절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회심전에 스데반의 설교와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그 설교에 반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거부했습니다. 바울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분노했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고, 베드로는 옥에 갇혀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첫 설교에서 자신이 거부했던 그 설교를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설교를 했을 때 자기처럼 거부하고 분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과거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성령님께서 누군가는 믿음으로 반응할 것을 기대하며 설교한 것입니다. 바울의 첫 설교는 많은 위험 부담을 앉고 한 설교였던 것입니다. 복음에는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일부러 불화할 필요는 없지만 불화하게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위험 부담을 지지않으려 한다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담대함으로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구주 예수님을 힘써 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3. 사람들이 설교에 응답하다
바울의 첫 설교는 잔잔한 강물을 한바탕 휘저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도 경건한 이방인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안식일에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몰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보이는 이방인들을 보는 유대인들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45절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시기심이 그 마음을 장악했습니다. 유대인의 이 시기심이 이해가 가십니까? 네, 저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동안 자신들만이 누려왔던 특권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되었을 때 상실감이 들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어느날 누군가를 양자로 들여 그 아이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자녀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그동안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유대인들은 어느날 외부에서 온 자가 한번 말씀을 전했는데 온 도시가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씁쓸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시기심은 색안경을 끼고 바울을 바라보게 했고, 그래서 반박하고 비방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시기심은 이해는 가나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일부만 누리던 특권이 누구나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시기심이나 미움, 분노 등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과연 정당한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 아래 살던 사람들이기에 죄에게 길들여졌던 본성이 불쑥불쑥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잘못된 감정에 대응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제어하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시기심으로 반응했다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48절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참 비교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은 시기심으로 이방인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유대인은 반박했고, 이방인은 찬송했습니다. 유대인은 비방했고, 이방인은 믿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복음에 대한 열렬한 수용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사야 49:6을 인용하여 바울이 말했습니다. 47절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예언이 바울의 첫 설교의 현장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바울의 첫 설교는 회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도행전에 바울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그때는 자연만물과 그들의 삶에서 출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 대상의 입장에서 출발하여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의 삶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연결되어 있는가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을 통해 전해졌던 복음이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전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복음이 필요한 이들의 마음을 보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구원의 말씀
행 13장 26~39절 / 조동천목사
시가 350만 달러(약 40억원)에 달하는 첼로 '키드 장군(General Kyd)'이 도난당했다가 사흘 만에 되찾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키드 장군은 이탈리아의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가 1684년 제작한 명품으로, 키드장군이란 이름은 18세기 말 영국에 처음 반입한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며 1896년 영국에서 열린 드보르작의 첼로 콘체르토 시연회에 연주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첼로의 소유자인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첼리스트는 2004년 4월 24일 밤 샌타바버라에서 연주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깜박 잊고 차에 내려놓은 채 집으로 들어갔다가 분실되었습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전담 수사팀을 구성하는 등 대대적인 탐문수사에 나섰습니다. 경찰은 보안경비 폐쇄회로 카메라에 자전거를 탄 젊은 남자가 은색 케이스를 끼고 가는 모습이 들어있자 전단과 비디오를 제작, 인근 학교 등에 뿌렸고 런던에서 홍콩에 이르는 세계 도처의 경매현장과 첼로주자 피터 스텀프 집 주변를 중심으로 용의자를 찾았으나 모두 헛탕을 쳤습니다.
정작 문제의 첼로는 사흘 뒤 29세의 한 여성이 LA 인근 실버레이크를 지나다 교차로에서 교통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 쓰레기통 옆에서 첼로 케이스를 발견한 덕에 되찾게 된 것입니다. 경찰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29세로 알려진 여성이 LA 인근 실버 레이크를 지나다 교차로에서 교통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다 쓰레기통에서 문제의 첼로 케이스를 발견, 집으로 가져온 뒤 변호사와 협의한 끝에 수사팀에 신고했다고 밝혔습니다.
첼로 하나의 값이 40억원에 이른다니 놀라운 일이지만 그 귀한 것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여 두었다 잃었다니 더 놀랍습니다. 거기다 그 귀한 명품이 쓰레기통에서 줍게 되었다니 더 놀랍습니다. 귀한 것은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즉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얼마나 소중한 구원의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의 구원의 진리를 너무 소홀히 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값진 말씀을 천대합니다. 쓰레기 통에 쳐 박혀 있는 키드 장군처럼 말입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는 이 진리의 말씀을 오늘 꼭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구원의 말씀인 복음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1, 말씀의 주체: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약속하신 말씀(23, 32-33절)
첫째, 구원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구원의 말씀은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어로 나와 있습니다. 철학이나 명상처럼 인간이 고안하거나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독자적으로 먼저 시작하신 일이고,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기 위해 약속을 말씀하셨고, 선지자들은 다만 받아서 전달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태에 따라 좌우되시지 않고, 절대적인 주체성을 가지고 구원의 사건을 진행시켜 나가신 분입니다. 그것의 한 가지가 바로 “약속”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의 약속이라는데 큰 감동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쪽의 적정선에서 타협한 계약이나 조약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시작하고 조건을 제시한 약속입니다. 이것은 거의 하나님의 사랑의 서약에 가까운 것입니다. 아직 사귀지도 않았는데, 아주 유명한 연예인이 예를 들면 장동건이나 이은주 같은 배우가 여기에 앉은 여러분 중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여 혼자 서약하고 감격하며 약속을 다짐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수준이나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서약에 의해 우리가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잘 알리고 싶으셔서 거듭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32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33절). 우리는 기대도 못했고, 상상도 못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약속을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yes)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현실화되어졌습니다. 그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입니다.
이 언약은 그 내용에 따라 언약한 분의 수준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때 그것은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일방적인 축복의 선언이고 서약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태와 무관하게 그분의 자비로운 성품에서 파생한 것이기에 일관성이 있습니다. 져드슨은 "미래가 하나님의 약속처럼 밝다"는 말을 했습니다. 언약 전체가 은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의미를 주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내 자신의 반응이나 실력이나 변화의 여부가 서약을 변경시키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그 주도권을 결코 포기하지도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그분이 먼저 홀로 서약하신 것이기에 그분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지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의 성품에서 나는 것이기에 은혜입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는 복음을 '한 큰 약속'(A Great Promise)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마차를 타고 켄터기주를 방문하고 있었습니다.그때 한 육군 대령이 대통령에게 얼음을 탄 위스키를 권했다.링컨은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대령, 성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대령은 잠시 후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대통령에게 권했습니다.링컨은 대령에게 거듭 사양의 뜻을 전한 후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아홉살 때 어머니가 나를 침대 곁에 앉혀놓고 말씀하셨소.`에이브야, 이제 나는 회복이 불가능하단다. 죽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해야겠다. 평생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수 있겠니?' 그날 나는 어머니께 약속했다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약속을 지켜왔소. 이것이 바로 술과 담배를 거절하는 이유라오." 대령은 링컨에게 머리를 숙여 존경의 뜻을 표했습니다. 링컨이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은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에게는 신용과 부와 명예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개인 개인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 필요한 요소입니다. 이 시대는 자기의 자비의 한계를 상대편의 인격의 수준에 따라 변질시키고 낮춥니다. 사랑도 진실도 윤리도 모두 상대적입니다. 반응에 따라 대우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돌변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당한 것이라고 항의하고 소리치고 스스로 한 모든 약속을 깨뜨립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베풀기로 했으면 그 사람과 상관없이 은혜로 일관해야 그것이 은혜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족이나 친구나 심지어 원수에게도 “내가 용서를 빌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화해를 청했으면, 그 사람의 반응과 상관없이 늘 겸손하게 그 사람에게 화해의 모습을 견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용서를 빌러 갔다가 그 사람이 오히려 “너 죄를 이제 알았구나”하면서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자기 죄를 시인했다고 떠들고 오히려 의외의 태도 즉 공격의 자세를 취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돌변합니까? 오히려 용서나 화해를 요청하러 가기 전보다 더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기 쉽습니다. 자기의 선의 때문에 더욱 적개심을 불태우고 더욱 스스로정당성을 획득하고 옵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화해의 몸짓이었습니까? 이것은 일관성이 없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용서나 화해를 시도했으면 그 사람의 반응과 상관없이 나는 내 성품과 기준으로 끝까지 용서하고 화해를 선언하고, 그의 냉랭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기로 약속했으면 상대방의 적의를 녹이면서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관성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세상은 그 하나님의 주체적인 사랑의 시도, 그 사랑의 언약을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맛보길 원합니다. 아니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언약, 주체적인 사랑에 대해 눈으로 보일 수 있는 증인이 우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16년을 지내는 동안 그다지 위험했던 일은 없었다. 단지 그가 아프리카 중심부에서 적대적인 원주민에 싸여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어 밤에 도망할 생각까지 했으나, 어떤 힘이 그로 하여금 평안을 찾게 해 주어 마음을 바꾸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1856년 1월 중순 어느 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거대한 지역과 내일이면 야만인들에게 목숨을 빼앗길 많은 사람,-그들의 복지에 대한 나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됨을 느꼈다-그러나 나는 예수님께서 '가서 모든 사람을 가르쳐라 나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와 함께 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을 읽었다. 이는 가장 강경하고도 성스러운 자의 말씀이었기에 그것이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오늘밤이 마지막이 된다할지라도 나는 세상을 살펴볼 것이다. 나는 지금 대단한 평온함을 느끼며 이를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2, 말씀의 진실성: 선지자들의 예언이 응한 말씀(27-29절)
이 구원의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언과 성취라는 코드를 사용하십니다. 그 사랑의 서약, 약속이 틀림없는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해 먼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그 이후에 그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27절).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는 것에 강조를 두고 계십니다. 도대체 왜 이렇습니까?
첫째, 이루어지기 힘든 일의 성취 즉 고난이도의 성취로 진실성을 입증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2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특이한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외우면서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응하게 하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있게 하심으로 구원의 말씀의 신성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은 분이 자신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인식시키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향력이 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을 알리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의 범주를 넘어선 사건, 논리적인 인식이 불가능하지만, 꼭 알아야 하는 진리를 알리기 위해 이렇게 예언과 성취 즉 말씀이 응하게 하는 것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신적인 도우심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방법의 하나로 기드온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들어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시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양털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여쭈어봅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타작마당은 마른 상태이면 자기를 택하신 줄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반대로 되기를 요청합니다(삿 6:36-40).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그분이 축복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도 이렇게 인간들에게 확신을 주시고 증거를 주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가서 5장 2절의 구주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얼마나 다각적인 면에서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일이 진행되었는지 모릅니다. 나사렛에 사는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배가 만삭이 된 상태에서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도가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로마를 위한 군사력 및 노동력 동원이나, 세금을 효과적으로 걷기 위한 것이었는지 몰라도, 식민지를 살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예언의 말씀의 성취를 위해 로마의 황제가 엑스트라로 사용되고, 고대근동의 정치적인 복잡한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라는 한 청년의 지극한 자기희생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한 쌍의 연인의 지극한 사랑을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관에 있는 사람들의 강퍅한 마음 즉 해산하는 여인의 부르짖음에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예수님은 마구간 구유에 태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 희생의 제물, 생축으로 태어나신 것을 상징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장면은 온통 시편 22장과 이사야 53장에 예언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세계사를 움직이시고, 황제와 평민을 사용하시고, 정치적인 야욕과 지극한 사랑을 사용하시고, 인간의 악함과 탐욕까지 사용하시에 당신의 말씀을 진실로 이루십니다.
둘째는 말씀의 진실성은 자기희생적인 성취로 입증됩니다. 그 확증을 주기 위해 즉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거기서 모진 고난을 겪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 말씀이 응하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주님은 죽음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아시면서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리는 가족이나 제자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종종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마 26:2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4). 주님은 사랑의 약속 그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진실성의 입증은 이렇게 자기희생적인 사랑이 없으면 성취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열어 믿게 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문빗장 보다 더 견고하게 닫혀진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들과 한 약속을 위해 기꺼이 죽음의 호수로 다시 뛰어드는 아버지의 희생적 사랑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큰 호수에서 유람선이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는 아버지는 다행히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한 명씩 죽을힘을 다해 호수가로 데려가서 건져냈습니다. 그런데 여섯 번째 아이 순서가 되기 전에 아이에게 아버지가 반드시 돌아 올 테니까 어쨌든 살아만 있어 달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다섯 때 아이를 호수가에 건져 냈을 때 아버지는 이미 탈진 상태였습니다. 온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들어가면 죽는다고 말렸지만, 아버지는 아이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고 물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아이가 있는 곳까지 가서는 아이를 안고 안심시키고는 기운이 다하여 함께 물에 다라 앉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도 당신이 죽으실 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신실한 사랑을 보여 주시려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약속한 말의 성취를 위해 기꺼이 희생적 사랑을 하는 진실한 사람이 없기에 불신사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드 포메로르의 부인이 자기 남편을 위하여 아카데미회원의 선거운동을 하느라고 시인 꼬뻬에게로 가서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아무쪼록 제 남편에게 투표해 주십시요. 낙선하면 죽겠다고 한답니다." 꼬뻬는 약속한대로 드 포메로르에게 투표했지만 당선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드 포메로르가 죽지도 않았습니다. 얼마 후, 그 부인이 꼬뻬에게 인사를 갔더니 꼬뻬는 손을 저으며 "부인, 그만하면 알겠습니다. 더 이상 할말이 없군요. 나는 약속을 지켰는데 부인의 남편께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까요." 말했답니다. 정치인이나 노동자나 “결사반대”라는 핏빛의 현수막들을 걸어 놓고 죽는 이 많지 않습니다. 약속은 많은데, 조금만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쳐도 말을 바꾸고 그것을 회피합니다. 예수님처럼 진실을 이루기 위해 언약한 말씀대로 십자가의 그 길을 담담히 걸어가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이런 사회적 가치관을 정립하지 않으면 진실성이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기업인도 노동자도, 학생과 선생도, 정치인과 종교인도 모두 진실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당연히 희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이 민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무엇보다도 부활의 영광 즉 최후의 승리가 진실성을 입증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으로 진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죽음이 가장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비겁자의 도피일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패자에 불과합니다. 가장 이루기 힘든 진실, 그것이 바로 죽음에서 부활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소망이고 생명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해야 우리는 그 진리에 인생을 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의 신실성을 입증하는 최종적인 단계를 부활로 설정하고 제자들과 사도들이 바로 이 일의 증인들로 부름받은 것을 말합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4절에서도 이것을 강조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그리고 35-37절까지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치 아니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부활승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실성을 입증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이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 즉 부활의 권능을 믿고 의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난에서 승리하시길 축원드립니다.
3, 말씀의 효력: 죄사함과 의로움을 얻게 되는 말씀(38-39절)
이렇게 약속을 하시고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해 희생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의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38-39절). 예수님을 믿는 것은 즉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윤리적인 문제이전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본을 보이기 위해 오셨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예언을 하시고 성취하시는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한 구주이심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이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는 선언말입니다. 또한 모세의 율법으로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를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너무나 깊고 인간들에게는 고통스런 것입니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니”(28-29절).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고, 늘 선한 일만을 했으나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한 이유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감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힘입어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만이 완전하신 분이셨기에 우리의 죄 값으로 드려질 수 있는 분입니다.
예를 들면 한 절세의 미인 헬레네 때문에 트로이라는 당시 최고의 도시국가가 희생을 당할 정도라면, 하나님의 독자, 예수님은 흠 없고 완전한 분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온 인류의 죄를 사 씻고도 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힘입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은혜의 통로가 열리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언약의 성취들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로 멸망하고 있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얼마나 열정으로 다가 오셨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힘입으십시오. 당당히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13)
이 시대를 치유하기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이 죄사함의 문제임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모든 성공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혼란의 깊은 사회적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경제문제도 정치문제도 근본에 있어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를 적당히 넘어가면서 세련된 채, 세상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비법이라도 있는 듯 설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외치는 것은 가장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입니다.
데드맨 워킹이란 영화는 한국에서도 오래 전에 상영되었습니다. 1996년 아카데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인 ‘데드맨 워킹(dead man walking)’이란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말입니다. 구태여 번역한다면 “사형수 입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볼 만한 풍경이 없습니다. 어두컴컴한 교도소와 허름한 빈민가와 낡은 카톨릭 교회가 배경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사형수와 수녀 두 사람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는데 이 두 사람 숀펜과 수산 서랜든의 연기가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주었습니다.
남자 주인공 매튜는 어느 날 데이트 나온 십대 청소년둘을 덮쳐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강간한 후 잔인하게 살해합니다. 매튜는 경찰에 잡히고 사형 언도를 받게 되자 헬렌이라는 수녀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씁니다. 수녀를 만난 매튜는 자기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며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고 수녀는 그 말을 믿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구명운동에 나섭니다.
그러나 확실한 물적 증거 때문에 수녀는 그가 살해범임을 알게 됩니다. 사형집행 일은 다가옵니다. 그녀가 살인자 매튜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그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영혼이 겉으로는 남의 일처럼 냉소적이고, 거칠고 야비해도, 속사람의 영혼은 외롭고 사랑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을 전하며, 하나님 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참 안식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집행 하루 전 잔인하리만큼 냉정한 사형수도 헬렌 수녀의 어머니처럼 포용하는 한결같은 사랑 앞에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말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일이 잘못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참회의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수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고 확신을 준 후 "당신을 세상에서 마지막 보는 것이 웃는 얼굴이기를 바래요" 하며 그의 마음에 안정을 줍니다.
다음날 "데드 맨 워킹!" 하는 간수장의 목소리와 함께 사형실로 들어옵니다. 방탄유리 건너편에서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과 변호사 그리고 수녀가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봅니다. 팔다리를 벌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벨트로 조였습니다. 그리고 최후로 그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님께 용서를 빌며 수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깁니다. 그의 이 한마디가 모든 이의 가슴을 적실 즈음 그의 혈관에는 마취제가 흘러 들어가고 뒤이어 독극물이 투입되기 시작합니다. 메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잔인한 강간 살인범이었습니다. 순진하기만 한 수녀 헬렌을 그의 구명을 위해 이용할 만큼 그는 뉘우침 없는 용서 못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 앞에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회개하며 그를 묶고 있던 죄악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됨을 이 영화에서 다시 배우게 됩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문제 또한 진정한 사랑으로 해결될 수 있으며 또 해결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도 연습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친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는 자신을 버려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배워나가야 하겠습니다.
이 구원의 말씀, 죄에서 사함을 받게 하고 의로움을 얻게 하는 이 복음으로 승리하시는 개인과 이 민족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행 13장 28~35절 / 신성종목사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계약 사회이기 때문에 항상 계약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계약이란 사회적 약속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연약해서 못 지키고, 이해관계 때문에 못 지키고, 잊어버려서 못 지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절대적으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을 보면 “말씀을 다 응하게 하려 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여기서 [응한다]는 말은 [이룬다], 즉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어떻게 응하였는가, 어떻게 성취하였는가를 기록한 성취의 역사책입니다. 오늘은 이 응한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성경에 기록된 언약의 성취의 내력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성경에 기록된 언약의 내용
성경에 나오는 언약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구약과 신약입니다. 구약이란 옛날에 맺은 옛 언약이란 뜻이고, 신약이란 예수님과 새롭게 맺은 새 언약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언약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여섯 가지의 언약으로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신약에 나오는 새 언약을 합쳐서 모두 일곱 가지의 언약이 있습니다.
최초의 언약은 창세기 3장 15절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이것을 에덴동산에서의 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구절을 [원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이 구절이 복음이 되는가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외형적으로 보면 이 구절은 복음이라기보다는 저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최초의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세력이 마침내는 파멸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저주밖에는 받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을 상하게 하듯이 예수님에게 해를 끼칠 것이지만 그러나 여자의 후손은 뱀(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듯이 궁극적인 승리를 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여자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왜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남성의 도움 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동정녀에게 잉태되게 된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의 역사로서 궁극적으로는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의 승리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기록한 성취의 역사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언약은 노아와 맺은 언약입니다. 창 6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했습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그래서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13절)고 하시면서 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18절에 “그러나 너와는 언약을 세우리니..”그래서 잣나무로 방주를 짓고 그 안에 간들을 마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시면서 노아와 언약을 맺어 그들의 생명을 보존케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셨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전에 있었던 미주 성산 교회는 방주를 테마로 지었습니다. 들어오는 앞부분을 보면 배처럼 되어있고, 오른 쪽 앞 부문에는 물이 흘러서 물위에 뜬 방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노아의 방주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고 또 우리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공통점은 첫째로 하나님의 지시와 설계로 건설되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기능적인 면을 보면 다 같이 구원을 주된 사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교회는 그 규모가 큽니다. 넷째는 게다가 방주는 추진력이 없이 하나님이 직접 운행한 것처럼 신약 교회도 그랬고,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직접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노아의 방주에서 신약의 교회와 우리 월평 동산 교회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언약과 두 번째 언약은 무조건적인 언약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함의 조건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언약은 창세기 15장 18절과 17장 7절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약속했습니다. 먼저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25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다음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430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겨우 사라의 무덤을 헷 족속에게서 은 400세겔을 주고 막벨라 굴을 산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430년이 지난 다음에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약속은 성취됩니다. 마지막 약속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언약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며 그를 통해서 온 인류가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2100년이 지난 후에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다 이루어집니다. 다만 그 시기가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언약은 조건적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잃고, 2500년 동산 나라 없이 방황을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나라가 1948년에 독립하였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언약은 시내 산에서의 조건적 언약(출 20장)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내산 언약은 바로 십계명인데 이것은 관계를 어떻게 바로 가질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는 조건적 언약입니다. 1-4 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고, 5-10 계명까지는 사람들과 관계를 바로 가지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 22장 37-40절에서 사랑의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하여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조건적 언약을 이스라엘은 지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심판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섯 번째 언약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레위 지파와의 언약입니다. 민수기 18장 19절에 나오는 일명 [소금 언약]을 말합니다. 이 언약은 레위 지파에게 제사장 직분을 주시면서 화해의 사명을 맡겨주신 것을 말합니다. 말라기 2장 5절에 이 레위 지파와의 언약이 잘 나타납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언약은 신약시대인 지금에 와서는 [만인 제사장 주의]로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을 크게 깨달은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입니다. 벧전 2장 9절에서 만인제사장 주의는 분명히 말씀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섯 번째 언약이 사무엘하 7장 9-16절에 나오는 바로 다윗과 맺은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을 통해서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는 이 언약은 무조건적인 언약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오실 것이고 그가 메시야 왕국을 이룩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마지막 예수님과 맺은 새 언약, 즉 은혜 언약입니다(눅 22:20). 이 언약은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했는데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고 있습니다. 호세아 2장 18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예레미야 31장과 에스겔 37장에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맺은 은혜의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성취가 되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언약입니다.
2. 언약의 백성인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언약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병은 건망증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시외버스 정거장에 [잊지 말자]라는 큰 비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Holocaust Institute]을 세워서 과거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머리가 가장 좋으면서도 건망증이 제일 심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2)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으면서도 우상숭배에 빠져 그 모든 축복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기고 만 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아야]합니다. 이스라엘은 바알 신에게 빠졌고, 금송아지 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가장 무서운 우상은 탐욕입니다.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는 자기애가 문제입니다. 지금 교회도 이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3) 언약의 백성들은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제2의 [디아스포라]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았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때에는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에 낮의 구름과 밤의 불이 살아졌을 때에 하나님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신 주님을 꼭 붙들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5) 하루하루를 [마라나타] 즉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매일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종말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종말론적 현상은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말씀만 이루어지면 우리 주님은 재림하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말씀이 다 성취되었습니다. 다만 주님의 재림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곧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통해서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