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 예수 승천에 대한 오해
하느님 계신 곳은 하늘 어디인가?
— 우리 마음이 하늘입니다
1. 승천은 공간 이동이 아닙니다.
과학적 이성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예수님의 승천은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씀은, 현대인의 감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은 어디입니까.
구름 위입니까.
우주 저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정말 이 땅을 떠나 먼 공간으로 이동하신 것입니까.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승천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하늘”은 머리 위의 공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생명,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다스리심,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세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멀리 하늘로 사라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지나, 예수님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영광 안에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승천의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승천은 떠남이 아니라 더 깊은 현존입니다.
이별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함께 계심입니다.
부재의 시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현존의 시작입니다.
2. 한 장소의 예수님에서 모든 곳의 그리스도로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는 한 장소에 머무르셨습니다. 갈릴래아에 계시면 예루살렘에는 계시지 않았고, 한 마을에 계시면 다른 마을에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승천 이후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한 장소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체성사 안에서, 기도 안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고통받는 이웃 안에서, 그리고 우리 양심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현존하십니다.
한 장소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모든 곳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제자들 눈앞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 안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천은 예수님께서 멀어지신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현존이 온 세상으로 확장된 사건입니다.
촛불 하나는 방 한쪽을 비춥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빛은 더 이상 한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산과 들과 바다와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비춥니다. 승천도 이와 같습니다. 지상에서 눈에 보이시던 예수님께서는 한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셨지만,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와 모든 사람의 삶 안에 현존하십니다.
승천은 촛불이 꺼진 사건이 아닙니다.
해가 떠오른 사건입니다.
3.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사도행전에서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이 말씀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닙니다.
승천을 오해하지 말라는 신학적 깨우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는 모습을 보며 멈추어 섰습니다. 놀라움과 허전함 속에서 다시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말은 분명합니다. 하늘만 바라보며 서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찾는 주님께서는 이제 저 먼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그들이 돌아가야 할 땅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승천에 대한 오해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오해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을 저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구름 너머, 성전 안, 특별한 기도의 순간, 내 삶과 조금 떨어진 거룩한 영역 안에 하느님을 가두어 두곤 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이웃 안에 계시고, 우리 관계 안에 계시며, 역사의 아픔과 갈등과 눈물 한가운데 계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로 곁에서 함께 걸으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부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당 안에서는 하느님을 찾지만, 식탁 앞의 침묵 속에서는 잘 찾지 못합니다.
기도문 안에서는 하느님을 부르지만, 불편한 이웃의 얼굴 안에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성체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지만, 가난한 사람의 지친 눈빛 앞에서는 쉽게 지나칩니다.
하늘의 하느님은 믿으면서, 땅에서 울고 계신 하느님은 외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승천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일 것입니다.
4. 승천은 파견입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음을 배울 때를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손을 꼭 잡아 줍니다. 아이는 그 손이 있어야만 안심하고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머니는 손을 조금 놓습니다.
손을 놓는다는 것은 버림이 아닙니다. 아이가 자기 발로 서도록, 자기 걸음으로 세상 속에 들어가도록, 사랑이 한 걸음 물러서서 더 깊이 함께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승천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손을 놓으셨지만,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눈앞에서 사라지신 듯하지만, 성령 안에서 더 깊이 그들 안에 머무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서,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했습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이 걷기 시작한 사건입니다.
승천은 부재의 사건이 아니라, 파견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승천을 믿는 사람은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지 않습니다.
땅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에게로 돌아갑니다. 상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용서가 필요한 곳으로 돌아갑니다. 평화가 깨진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합니다.
그곳에서 용서합니다.
그곳에서 평화를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상처 입은 이를 일으킵니다.
그곳에 승천하신 주님께서 이미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기도 안에 승천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늘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땅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의 용서와 정의와 평화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승천은 현실을 떠나는 신앙이 아닙니다. 현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라는 부르심입니다.
5. 우리의 마음이 하늘입니다
예수 승천을 묵상하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나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 더 가까이 나에게 계신다.”
이 놀라운 말씀은 단순히 신비주의자의 아름다운 표현만은 아닙니다.
승천의 복음이 도달하는 깊은 진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먼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숨 쉬는 이 순간,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분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자리를 “신의 불꽃”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선을 갈망하고,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부당함에 아파하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일 때, 그 깊은 자리에서 하느님의 흔적이 빛납니다.
그러나 그 현존을 알아보려면 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이 불안, 욕망, 자기 집착, 체면,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어렵습니다. 에크하르트가 말한 “내려놓음”은 삶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집착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머무실 자리를 마련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순간에만 오시는 손님이 아닙니다. 우리 삶 전체의 주인이십니다.
부엌에도 계시고, 병실에도 계시고, 지하철 안에서도
일터에도 계시며, 외로운 사람의 눈빛에도 계시고, 화해하지 못한 마음의 떨림에도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은 저 멀리만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늘입니다.
사랑이 선택되는 곳이 하늘입니다.
용서가 시작되는 곳이 하늘입니다.
상처 입은 이가 다시 일어나는 곳이 하늘입니다.
양심이 깨어나는 곳이 하늘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먼 구름 위입니까.
우주 저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입니다.
그러나 아무 마음이나 하늘은 아닙니다.
비워진 마음, 사랑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진리를 따르려는 마음,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이 하늘입니다.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사라지신 것이 아닙니다. 더 가까이, 더 깊이, 더 넓게 우리 삶 한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습니까.
왜 곁에 계신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까.
왜 내 안의 양심에서, 이웃의 눈물에서, 관계의 상처에서, 역사의 고통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까.
승천은 우리를 깨웁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저 먼 곳에서가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구름 위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이것이 승천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승천의 깊은 반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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