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TV드라마 ‘해신’이 승승장구하며 안방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완도에 설치된 드라마 세트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웠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며 아쉬운 생각을 하는 강진사람들이 많았다. 옛날 청해진이라면 당연히 강진도 포함됐었고, 장보고가 활동했던 곳이 강진도 속한다는 이런저런 연구가 많은 터에 완도에만 국한돼 드라마가 촬영됐기 때문이다.
이는 틀린 생각이 아니다. 이번 해신열풍을 통해 장보고의 활동범위가 완도에만 한정돼 국민들에게 각인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강진쪽에서 ‘장보고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장보고가 지금까지 해신(바다의 신)이란 명칭까지 받으며 존경받고 있는 이유는 그가 지금부터 900여년 전 세계를 무대로 무역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말로 거대 무역회사의 총수였다.
그럼 장보고가 거래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가장 중요한 거래품목은 도자기였다. 그 도자기는 청자였다. 청자는 어디에서 생산됐는가. 강진 대구였다. 다시말해 지금까지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완도지역은 청해진을 지키는 군사적 방패 역할을 했고, 강진은 장보고 선단의 상품을 제작했던 본사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장보고의 연구는 일관적으로 완도중심으로 진행돼 왔다. 그 첫 번째 이유가 완도군은 일찍부터 장보고와 완도를 연결짓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80년대부터 중앙의 학자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으며, 지속적으로 이들을 관리하며 완도를 부각시켰다.
지금 왠만한 중국전문가나 , 한.중을 연구하는 역사학자, 해양학자, 해로를 연구하는 학자들중에 완도군의 초청을 받아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학계나 관계에서 중요한 자리에 올랐고 장보고 얘기가 나오면 반드시 완도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70년, 80년대 청자발굴에 헌신했던 정양모씨 같은 40대 초반 젊은 학자들이 나중에 중앙박물관장까지 지내고, 지금도 문화재계의 거물로 활동하면서 강진은 세계적인 도자기 발생지라고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뿐 아니다. 당시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젊은 학생들도 지금은 대학교수나 박물관의 주요 자리에 있으면서 강진하면 청자가 떠오른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80년대부터 장보고 연구에 들어간 완도지역은 지금 장보고를 선점하는데 많은 우군을 가지고 있고, 국가 정책적으로 이를 뒷받침 받을 많은 인맥도 형성해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장보고 연구가 완도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은 장도라는 섬 때문이다. 장도는 청해진의 상징물 처럼 얘기되며 지금도 개발이 한창이다.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는 지난 84년 청해진 터로 인정돼 사적 308호로 지정된 이후 지난 91년부터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해발 40m의 이 작은 섬이 장보고의 청해진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섬 해변가에 있는 거대한 목책이 당시에 설치한 것으로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증명됐고 발굴과정에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활용된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장도가 청해진의 본거지였을 것이라는 증명은 해내지 못하고 있다. 1만의 군사가 한꺼번에 주둔할 규모의 섬이 아니려니와 청해진이라는 거대한 군사진의 중심부 기능을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하고 있다.
장도건너편 장좌리가 장보고의 고향 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이 또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지금 장좌리 주민들이 장도 당집의 주신을 장보고 장군으로 모시고 있으나 10년전 까지만 해도 송장군이란 주신을 모시다가 전남대 나경수 교수가 쓴 ‘완도군 장좌리 당제의 제의구조’란 논문을 통해 송장군이 장보고 장군의 변이 전설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 이후 바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청해진의 범위는 당연히 넓어진다. 공주사대 이해준 교수는 지난 90년대 초 목포대 재직시절 학생들을 데리고 장도에 들러 본 후 “장도가 모든 부분에서 중심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완도 내에서만 청해진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강진, 영암, 장흥 등을 포괄하는 해안세력으로 시각을 넓혀 나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여기에서 강진의 위치는 단연 중요시 될 수밖에 없다. 전 전남농업박물관장 김정호씨는 지난 93년 내놓은 ‘완도청해진의 자연과 인문’이란 논문에서 장도와 강진만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김씨에 따르면 완도읍에서 13km 떨어져 있는 장도는 북쪽으로 강진만으로 통하는 마로해와 접해 있으며 마로해는 후대에 와도 마도진이 설치됐으며 다시 이 마도진이 강진의 남원포(지금의 남포)로 옮겨 간 것은 예전 장도의 기능 역시 강진현을 지키기 위한 포구방어 구실도 했을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장도가 청해진의 사령탑 기능을 수행하며 강진만 일대를 보호해야 할 이유가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91년부터 진행된 장도 발굴사업에서는 강진청자의 초기형태라고 할 수 있는 자기파편들이 다수 발견됐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조유전 실장은 지난 93년 발표한 ‘완도 청해진 유적에 관한 일고’라는 논문에서 장도에서 발굴된 중국월주요계 해무리굽 청자 저부편, 청자사이 호구연부편 등은 고려청자의 발생문제와 관계된 중요한 유물이다고 평가했다.
김문경숭실대 명예교수는 본지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장보고와 강진과의 관계는 청자분야에 있어서나 해로에 있어서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면서도 지금까지 연구의 중요 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며 “완도나 강진에 정확한 사료가 없는 처지에서 학자들에게 이 문제를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게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장보고선단이 중국의 월주요제작기술을 강진의 대구에 가져오고 일본등지에서도 이를 전파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TV드라마 ‘해신’ 확인됐듯이 장보고는 국민적인 관심을 폭발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관광자원이다. 여기에 기업인들 조차도 앞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해양강국이 되어야 한다며 그 모델을 장보고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완도에서 선점한 장보고 이미지를 빼앗아 오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강진과 장보고의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찾아봐야 한다.
첫댓글 강진 이라면 완도하고 접해 있는곳 .특히 포구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