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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1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아주 뻔뻔합니다.
암 수술을 하고서 정말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나는 아주 미련한 사람이라서 어려서부터 아픈 것을 잘 참는 편이라서 진통제 없이도 그냥 견딜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가래가 들끓어 숨을 못 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도 할 수 없고, 물도 마실 수 없고, 아픈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숨도 쉬게 되고, 코 줄로 물도 주사기로 마실 수 있게 되고, 소형 칠판을 놓고 의사소통도 할 수 있게 되니까 여러 가지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낫게 해 주신다면 정말 잘 살겠다고 철석같이 약속도 하고, 통증을 이기려고 묵상도 하게 되고, 책도 쓰게 되고, 이런저런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이 좋아지자 그 때의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결심들은 다 눈 녹듯 사라지고 아주 내가 잘나서 나은 것처럼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느냐는 것처럼, 언제 그런 기적을 베풀어 주셨느냐는 것처럼 그렇게 까맣게 잊고 살고 있습니다.
논어의 술이 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왈 ; 덕지불수, 학지불강, 문의불능도, 불선불능개, 시오우야
子曰 ;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徒,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을 닦지 못하는 것과 배움을 익히지 못하는 것과 의로움을 듣고도 옮아가지 못하는 것과 선하지 못한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의 걱정이다.”
공자는 덕을 닦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덕을 닦는 것은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두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덕을 닦는 것을 아주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덕을 닦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친절하게 인사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덕을 닦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봉사하고 사는 것이 덕을 닦는 것입니다.
공자는 배움을 익히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갖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며 아는 것은 배운 것이 아닙니다. 배운 것을 익히는 것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이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면허시험을 볼 때는 잘 지키면서 운전면허를 따면 곧 난폭운전을 하는 것이 배움을 익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이 배움을 익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걱정 꺼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그 의로움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의롭게 살지 못합니다. 이제는 정의에 대해서 원론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무조건 대세에 따라서 부화뇌동(附和雷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혼란스럽습니다. 정의로워야 하는 기관에서 부당하고 부정하게 활동하기도 하고, 정의로워야 하는 정치가들이 의로움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의롭게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걱정거리입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걱정거리입니다.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거리입니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잘못합니다. 그래서 죄가 더 무겁습니다. 예수님도 그 점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뉘우칠 줄 모르고 더 뻔뻔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질책하십니다. 기적을 보고도 조금 있으면 까맣게 망각한 채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회개할 줄도 모르고 제 잘난 멋에 기고만장(氣高萬丈)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제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 또 이렇게 꼬집고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물에서 건져 냈다고 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그는 자란 뒤,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1-15ㄴ
그 무렵 1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길렀다.
3 그러나 더 숨겨 둘 수가 없게 되자, 왕골 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4 그리고 아기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기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5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공주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보고,
여종 하나를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다.
6 그것을 열어 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였다.
7 그러자 아기의 누이가 나서서 파라오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공주님 대신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하나 불러다 드릴까요?”
8 파라오의 딸이 “그래, 가거라.” 하자, 그 처녀가 가서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왔다.
9 파라오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기를 데려다 나 대신 젖을 먹여 주게. 내가 직접 그대에게 삯을 주겠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였다.
10 아이가 자라자 그 여인은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다.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11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12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다.
13 그가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자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 하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모세는 “이 일이 정말 탄로 나고야 말았구나.” 하면서 두려워하였다.
15 파라오는 그 일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였다.
축일7월 13일 성녀 데레사(예수의) (Teresa of Jesus)
신분 :수녀
활동 지역 :로스 안데스(Los Andes)
활동 연도 :1900-1920년
같은 이름 :테레사, 테레시아
성녀 로스 안데스의 예수의 테레사(Teresia de Jesus de los Andes, 또는 예수의 데레사)는 1900년 7월 13일 칠레(Chile) 산티아고(Santiago)의 상류 가정에서 후아나 페르난데즈 델 솔라르(Juana Fernandez del Sola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 깊었던 그녀는 프랑스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인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10월 1일)의 전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성인전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극복하며 모든 것 위에 다른 사람을 두는 방향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녀의 자기 변화에 더 큰 영감을 준 것은 첫영성체 때였다. 이를 통해 그녀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값진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였다.
1919년 5월 7일, 19살의 나이에 후아나(또는 후아니타 Juanita)는 로스 안데스의 카르멜회 여자 수도원에 입회하여 같은 해 10월 14일 착복식을 하고 예수의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의 짧은 생애의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영성 생활의 체험을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편지 쓰기 사도직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녀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치명적인 발진티푸스에 걸려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스무 번째 생일을 석 달 남겨 두고, 또 6개월의 법정 수련 기간을 완료하기 직전에 그녀는 죽음의 위험 중에 있는 상태에서 관면을 받고 1920년 4월 7일 첫 서원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12일, 그해의 사순시기 성주간 중에 선종하였다.
성녀 예수의 테레사가 선종한 후 그녀의 시신은 산티아고에서 90km 정도 떨어진 로스 안데스의 아우코 린코나다(Auco-Rinconada) 순례지에 모셔졌다. 매년 10만 명 정도의 순례자들이 그녀의 유해를 참배하기 위해 이곳을 찾을 정도로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에게 잘 알려진 그녀의 생애에 대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가 1990년대 초 칠레에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그녀는 1987년 4월 3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3년 3월 2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칠레의 첫 번째 성인이자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성인으로 선포된 첫 번째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의 수녀이다. 또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10월 15일), 예수 성심의 성녀 테레사 마르가리타 레디(Teresia Margarita Redi, 3월 7일),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10월 1일),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8월 9일)와 더불어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에서 다섯 번째로 테레사 이름을 가진 성녀이다.
축일7월 13일 성 에즈라 (Ezra)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4/5세기BC
같은 이름 :에스드라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성문서에,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역사서에 속하는 구약성경 에즈라서는 후반부(7-10장)에 가서 등장하는 주인공 에즈라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였다. 에즈라서는 느헤미야서와 함께 바빌론 귀양 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도움이라는 뜻을 지닌 성 에즈라(Esdras)는 바빌론으로 귀양 간 유다인들의 사제이자 율법 학자로서 페르시아 정부의 유다인 담당 기구 안에서 조언자의 직무를 맡고 있었다.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제7년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다인의 공동체를 다시 이룩할 명령을 받았다. 약 1,500명의 유다인과 많은 성전 봉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해(7장 이하) 법을 선포하고 그것을 의무적으로 지킬 것을 명하며 타민족과의 혼인을 금지하였다(9장 이하). 이는 많은 동포가 이민족들과 혼인하여 민족의 순수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페르시아로 돌아갔으리라고 본다.
축일7월 13일 : 성 요엘 (Joel)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4세기BC
같은 이름 :조엘
요엘서는 구약성서의 열두 소예언서 중 두 번째로 등장하는 예언서로 브두엘의 아들 요엘(1,1)이 선포한 말씀으로 모아져 있다. 요엘은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을 지니며 역대기와 느헤미야서와 에즈라서 등 구약성서 후대의 역대기계 문헌에는 18회나 언급되지만, 그 외에는 사무엘 예언자의 맏아들 이름으로 단 한 번만 사용된다(1사무 8,1). 그래서 요엘이 오래된 이름이기는 하지만 구약성서의 후대에 와서 흔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구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요엘 예언자가 언급되지 않는다. 요엘서 자체에서도 요엘 예언자 개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런데 요엘의 예언이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그가 유대인이고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요엘은 성전에서 거행되는 종교 의식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이사야나 에제키엘처럼 이스라엘인들의 잘못된 종교 의식을 비판하였던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가뭄과 메뚜기 떼의 침입으로 성전에서 매일 바쳐야 하는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여러 외적 궁핍보다 더 큰 불행으로 여긴다(1,9. 13. 16). 또한 그의 많은 표현도 전례 용어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직하던 ‘전례 예언자’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다른 한편, 기존의 성서에 정통한 요엘은 선배 예언자들의 사상을 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미 공포한 말씀을 다시 선포하고 그들의 어구나 어휘를 인용하고 재활용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예언자를 ‘성서 예언자’ 또는 ‘성서 해설가’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예언자로서 요엘의 성격을 흐리게 하거나, 그의 독창성을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여러 정황을 종합할 때, 기원전 4세기 초엽이 요엘 예언자의 시대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유대인들은 민족과 땅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나름대로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가 감행한 종교개혁 덕분에 예루살렘 성전은 유일한 성소로 자리를 굳히고, 그곳의 모든 전례도 이미 잘 정비되어 거행되고 있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예수의 데레사 자매님과 요엘, 에즈라 형제님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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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