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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힘입어
행 13:36-43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행 13:36-43 / 이 말씀은 다윗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ㄹ)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섬기며 살다가 죽어서 땅에 묻혔고 그의 몸도 썩어 없어졌습니다. (ㄹ. 왕상2:10) 37)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른 분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분은 무덤 속에서 썩은 일이 없습니다. 38) 형제들이여! 들으십시오. 그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39)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죄에서 해방되어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40-41) 이제 여러분은 예언자들이 ㅁ) `너희 유다의 반역자들아, 너희는 똑똑히 보고 또 쳐다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얼굴만 보며 기가 막히게 놀라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의 시대에 그토록 무서운 일을 할 것이다. 이런 일은 누가 이야기를 해주어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니 너희가 직접 보고 겪어야 할 것이다'라고 한 말이 여러분에게 적중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ㅁ. 70인역 합1:5) 42) 그날 사람들은 회당을 나오면서 바울에게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설교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43) 회당에서 예배를 드린 많은 유대인들과 신앙이 두터운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나서자 두 사람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였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따라서 일하심 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약속을 전혀 기억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이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증언과 복음으로의 초대(36-39)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바울은 다윗이 틀림없이 그가 죽은 후에 오실 이, 즉 하나님이 살리시고 썩음을 당하지 않을 이를 예언적으로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 사람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밝혀주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예로 들어 다윗에게 약속하신 이스라엘을 위한 구주가 예수라고 밝힌 바울은, 이제 회당에서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에 대해 설명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39)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모세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도 없고, 율법 자체가 사람으로 하여금 의롭게 하기에는 불충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사람(예수)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은 얻는 이것이라’(39)고 하였습니다.
청중을 향한 바울의 경고(40-41) 예수님을 통한 죄 사함에 대해 설명을 마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회당의 청중을 향해 경고를 하며 설교를 끝맺습니다. 바울은 하박국 1장 5절을 인용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백성들을 신랄하게 경고하였습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도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려 함이었습니다(40). 즉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초대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거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사실의 양면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에 대한 청중의 반응(42-43) 설교에 대한 반응은 다음 안식일에도 다시 말해 주기를 청할 정도로 성공적이었습니다.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도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전한 주의 말씀을 믿고 마음과 뜻을 모아 오직 예수에게 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면해줍니다.
적용: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의는 충분하고 완전하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해주십니다.
살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하여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돈을 벌기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이지, 일을 하기 위하여 돈을 버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는 것은 그 나라에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 나라에 가지 못한다면 헛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게 보십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결단이고, 조건 없이 사랑하기로 한 의지 덕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도무지 자격이 없는 사람을 유자격자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고, 천국과 지옥의 격차입니다.
호크마 주석
=====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 바울은 22절에서 언급했던 다윗을 다시 언급하여 예수의 부활과 다윗의 죽음을 대조시켜 예수의 부활 사건을 강조했다. 먼저 바울은 육대인들이 갖고 있는 다윗에 대한 인상을 재확인하고있다. 즉 22절에서는 다윗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세움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에게 용납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낼 사람으로 언급하였는데 여기서도 역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인물임을 말하여 다윗을 높이고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곧이어 다윗의 죽움과 썩어짐을 예수의 부활과 대조시켜 썩지 않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유효했음을 강조한다. 한편 '섬기다'란 동사의 목적어로 사용된 '하나님의 뜻을 좇아'란 구절은 전치사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라고 번역될 수 있다(Robertson, Alford, Haenchen). 이 해석을 취할 경우 본 구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윗이 그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수행했던 사람'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다윗의 업적과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22절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비록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썩음을당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하나님에의해 맡겨진 사명을 잘 수행했을지라도 죽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주어진 약속은 성취의 여지를 남겨두고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예수와 연관지어 35절에 이어 다시 한번 더 언급함으로써예수가 구약에 약속된대로 부활하셨음을 강조했다.
=====13:37
하나님의 살리신 이 - 부활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본 구절은 죽음으로부터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다윗의 유한한 생명과 예수의 영원한 생명을 대조시켜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 예수를 통해서 성취됨을 주장한다.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으나 - 이 말은 36절의 '썩음을 당하였으되'라는 말과 반대되는 표현으로 다윗과 예수를 극명하게 구분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 전통에 붙잡혀 있는 유대인들에게 다윗보다 예수가 위대함을 논증해 보임으로써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선입관이나 잘못된 의식을 바꾸고자 했던 것같다.
=====13:38
이 사람을 힘 입어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를 의미하여 어떤결과의 유래(由來)를 나타낸다. 그것은 '죄사함의 선언'을 한 이가 예수임을 의미한다. 죄사함 -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죄사함'과 곧바로 연결시킨 것은 약간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의 부활이 어떻게 해서 죄사함의 근거가 되는 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것 같다. 한편 바울이 '죄사함'을 복음의 핵심으로 선포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죄'의 문제가 신앙의 억압적 요소로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했으며 그 중 하나라도 범하게 되면 죄인으로 판명되므로 죄문제로 인해 항상 억압당하는 신앙 생활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예수에 의한 죄사함의 선포는 바리새인이었던 자신이 예수를 만남으로써 체험했던 사실에 대한 것임과 동시에 초대교회의 교리의 핵심이었다.
=====13:39
모세의 율법으로...의롭다 하심을 - 본 구절은 바울 서신과 일치된 사상을 전달하고 있으므로 본장에 언급된 바울의 설교를 본서의 저자인 누가의 작품으로 평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본 설교가 누가의 필치에 의해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부활'과 '의의선포'같은 내용은 바울의 독특한 신학을 형성하는 골격이 되므로 전체적인 내용은 분명히 설교자 바울의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의롭게 되는일에 온갖 정성을 다 바쳤던 유대인듸의 삶을 지적하면서 의롭게 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있다. 이러한 바울의 설교에는 (1) 사람이 율법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과 (2) 예수를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13:40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마무리 지으면서 마지막 경고를 주기위해 41절에서 합 1:5를 인용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삼가라'는 말은 41절의 인용 구절 중'멸시하는'과 연관되어 '멸시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놀라고 망하라'는 표현과 연관되어 '놀라고 망할까 조심하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지 확정할 수 없다.
=====13:41
일렀으되 -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했듯이 '선지자들'이 한 말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으로 예언서에서 발췌된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인용되는 구절은 합 1:5로서 70인역을 약간 변형시켜 사용되었다. 히브리 본문에서 이 구절은 갈대아 사람의 등장에 대한 예언과 관련되어 있다(Haenchen). 그러나 바울은 이문구를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배타적으로 우월감에 빠진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 인해 버림받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의 길로 인도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13:42
저희가 나갈새 - 본 구절은 바울이 설교를 마치고 회당에서 퇴장하는 장면에 대한묘사다. 문맥상 바울과 바나바가 설교 후 곧바로 퇴장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예배 도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퇴장했을 가능성은 희밖하다.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교 전통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예배를 마치기 전, 즉 자신의 설교만 마치고 퇴장한 것(Meyer, Knowling)이 아니라 예배를 마친 다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퇴장했으나 누가가 그 과정을 생략하고 간결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Haenchen). 사람들이 청하되 -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 47절부터 시작되는 다음 안식일의 설교가 있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 (2) 바울의 설교가 유대인들로부터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얻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유대교인들 중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이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13:43
폐회한 후에 - 예배의 종료(終了)를 알리는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폐회의 암시와부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즉 앞절에서 이미 예배의 종료가 함축적으로 언급되었다면 또다시언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퇴장할 때가 예배 도중이었을것으로 추측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도중에 퇴장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에서(42절 주석) 본절은 예배 종료를 알리는 말이라기보다는 본절에서 언급되는 사건이 예배가 패회된 이후에 있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 16절주석 참조.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 본 구절은 42절에서 언급된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기로 간청한 것과 맞물려 이방 지역의 유대인 공둥체에서 기독교의 새로은 공동체가 발생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설 교 >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박경수 목사 / 행 13:36
목적: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선한 영향력을 나누는 것이 참 인생이다.
살면서 누구나 하는 질문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존재의 질문이다. 나는 왜 살아 있는가? 둘째는 의미의 질문이다. 내 삶은 중요한가? 셋째는 목표의 질문이다. 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느 것도 목적 없이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나’가 살아있다는 것은 ‘나’의 삶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중세의 귀부인이 화장하는 그림이 있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채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겉모습과는 달리 흉측한 해골의 모습이었다. 세상에서는 화려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속사람은 흉측한 해골의 모습의 사람일 수 있다.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인생의 모습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의도하신 목적을 떠나서 살아왔다. 탈선한 기차처럼 우리도 자신의 고집과 죄의 선택으로 궤도를 벗어났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목적을 위하여 지으셨지만, 우리는 다 자기가 더 잘 아는 줄 알고 우회하며 살기 일쑤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보내셨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삶의 방향을 되찾아 주시고, 원래의 삶의 목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다. 우리는 악으로부터 구원받을 뿐 아니라 선을 위하여 구원받는다.
매튜 헨리가 쓴 성경 주해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인정되어 수세기 동안 많은 독자를 끌고 있는데, 헨리의 청년기에 관해 숨은 일화가 있다. 그의 처가인 매튜가는 유명한 귀족으로 그 집의 무남독녀와 헨리 사이에 혼담이 시작되었을 때, 그 여자의 부모는 헨리의 인품에는 만족했으나 그 집안의 배경이 약하다 해서 혼사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남자에게 우리 외동딸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당사자인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아버지,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디로 갈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고, 처녀의 이 말에 감동된 부모는 혼사를 허락하고, 헨리는 매튜 가에 입양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앞으로 걸어갈 길이 분명하기 때문에 장래가 촉망된다. 믿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면, 걸어갈 길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만약 내가 사위를 본다고 할 경우, 당연히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을 우선순위로 선택할 것이다. 살아가는 모습이 불분명한 사람에게 어떻게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을 내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살아갈지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까지 주었으니, 당연히 그를 위하여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한가?
양치기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사울에게 미움을 받아 광야로 쫓겨나갔던 다윗이, 살기 위해 미친 척하며 침까지 흘렸던 다윗이 왕이 되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왕이 된 다윗은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았다. 다윗이 그 중에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시 천대받고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이 사는 성으로 모셔오는 일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온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춤추며 노래하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왕인데도 하나님 앞에서는 체면을 차리지 않는다. 속옷이 없어서 춤출 때마다 속살이 다 드러난다. 그래도 좋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신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법궤를 내 집에 모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데, 이까짓 것쯤이야…….
다윗의 마음이 온전히 자신을 향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도 좋기는 매한가지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이 좋아 춤을 췄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향해 아낌없는 축복을 베푸신다.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며,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대상 17:13~14)
다윗의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한 구절이 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행 13:36). 표준새번역은 “다윗은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고”라고 번역한다. 다윗은 한 평생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었던 사람이다. 예수쟁이로서 이보다 더 귀한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주어진 시간과 시대 속에서 한평생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일,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인생을 바치는 것이다. 늘 변하는 세상의 환경 속에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목적이 이끄는 삶이다. 이보다 더 큰 모험도 없고, 이보다 더 큰 만족도 없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인생이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유대인이 병이 깊어져 식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의 시간을 맞고 있었다. “여보.” “예, 저 여기 있어요.” “아들아…….” “예, 아버지.” “딸은 어디 있느냐?” “예, 아빠! 저 여기 있어요.” 그러자 환자가 갑자기 안간힘을 쓰고 일어나 앉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러면…… 가게는…… 누가 보고 있단 말이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설교를 했다. “나의 장례식에서 노벨상을 탔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루터 킹은 남에게 봉사하는 일에 힘썼다고 전해 주십시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려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려고, 감옥에 갇힌 자를 돌보아 주려고, 인류에게 봉사하려 힘썼다고 말해 주십시오.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그 이상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윗이 한평생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었던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정말 한평생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었던 사람이 마틴 루터 킹이다. 이 문구가 나와, 우리의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면 어떨까? 영광 중의 영광이다. 누구나 나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평가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보다 더 큰 승리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고, 빚으셨고, 재능을 주셨고, 부르셨고, 구원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라고 말씀한다.
왜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을 때 감격했을까? 자기의 있어야 할 곳,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훌륭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감격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 마음속의 가장 깊은 갈망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경험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나는,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 창조 받았다.
모든 사람은 생존, 성공, 의미, 이 세 단계 중 한 단계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세상 대부분은 생존 단계에서 살아간다. 세상 인구 60억의 절반이 하루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생활을 한다. 하루 1달러 이하의 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도 10억이 넘는다. 이것이 생존 단계다.
같은 시기에 2명의 여자가 자살했는데, 공교롭게도 이자가 2,889%에 달하는 사채 때문이었다. 100만 원에서 시작된 사채였는데, 나중에는 갚을 돈이 1억 원까지 늘어났다. 안 쓰면 되잖냐고? 돈을 갚으라고 하루 40~50번까지 협박을 당했다. 이러고 사람이 어떻게 살겠는가? 이자가 너무 비싸도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비참하다(20100726 중앙일보). 단지 오늘을 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참판’은 우리나라 ‘차관’에 해당된다. 국방부 차관, 행정안정부 차관, 기획재정부 차관의 그 차관이다. 장관 다음의 직급이니, 정말 높은 자리이다. 조선시대 한 참판이 남긴 글이 있다. 오직 서적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게 하나, 환기할 창 하나, 햇볕 쪼일 마루 하나, 차 다릴 화로 하나,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하나, 청산을 찾아갈 나귀 한 마리면 족하단다. 더 가지면 사치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네 대다수는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다. 참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다.
만고의 진리가 있다. 성공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18가지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 생계 수단을 많이 가져도 삶의 목적은 없을 수 있다. 생활비를 버느라, 아니면 필요 이상의 것을 갖기 위해 너무 바빠서 삶에는 실패할 수 있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충남상회 류양선 할머니(78세)는 “내 직업은 기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란 옷 아가씨’, ‘책 할머니’. 36년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젓갈장사를 해온 유양선 할머니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노란 옷을 입고 장사를 하고, 노란 옷을 입고 기부를 한다. 산간 오지 아이들에게 책을 보내는 게 알려지면서 책 할머니가 됐다.
처음 기부를 했던 게 벌써 20년도 훨씬 전이다. 중학교에 입학할 학비가 없었던 소년은 할머니의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치고, 초등학생 자녀를 둔 작은 기업의 사장이 됐다. 할머니가 보내준 장학금으로 간호대를 졸업한 어느 여학생은 서울대학 병원에 취직했다.
그동안 얼마나 기부를 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걸 세고 있나? 주고 나서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거지?” 한두 번으로 그친 것도 아니고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닌데 굳이 기억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공개된 할머니의 기부 내역은 화려하다. 150여 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고, 10만권 가까운 책을 산간오지 학교와 양로원 등에 기증했다.
1998년에는 경기 광명시의 임야와 건물 1430㎡, 2006년에는 제주 서귀포시 성산면의 임야 4732m² 등을 한서대에 대학발전용지로 기부했다. 2008년에는 김포 고촌면 전호리의 대지와 전답 1038㎡를 또 한서대에 기부했다. 어림잡아도 수십억 원에 달한다.
할머니는 1000원 한 장 허투루 쓰질 않는다. 다 헤져 버려야 마땅할 걸레를 들어 보이며 말한다. “이거 낡아도 구석구석 닦기엔 최고야. 세상에 헤져서 버릴 건 없지.” 집에서는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불도 안 켜고 가로등빛을 형광등 삼아 생활할 정도다. 이렇게 안 쓰고 차곡차곡 모아 20년 이상 기부를 한 것이다(머니투데이 20100810).
우리가 지음 받은 목적은 성공을 훨씬 벗어나 의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러나 재물이나 쾌락이나 지위에는 그 의미가 없다. 의미란 섬김에서 온다. 즉, 자신보다 큰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주는데 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목적,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목적, 그 목적을 마침내 이루기 시작하면 그제야 깨닫게 된다. “여기가 내 자리다! 난 그래서 살아 있는 거다! 이것이 내 존재 이유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는 세상의 어떤 성공을 통해서도 절대 깊은 만족을 얻을 수가 없다.
우리의 마음에는 언제나 빈자리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신뢰하고, 섬기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질문이다. 여태까지 시도한 어떤 일도 당신은 영혼의 그 갈망을 채워주지 못했음을 알면서, 이제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면 당신은 지난날을 용서받고, 삶의 목적을 얻고, 천국에 집이 생긴다. 이런 것은 어느 누구도 제시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내 삶은 무엇으로 인해 의미가 있는가? 내 삶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멋쟁이 성도
사도행전 13:40-43 / 김호일 목사
우리의 마음에 참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시온 찬양대를 통하여 우리의 영광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찬양을 통하여 새 힘을 얻게 해 주시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말씀 중에 찾아오실 줄로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아멘’ 과 ‘은혜’라는 말입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성도님의 얼굴에 은혜가 넘칩니다.” 은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은혜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헬라어로는 「카리스」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은혜 받은 얼굴을 보면 기쁨이 넘칩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뜻이 하나 있습니다. ‘멋쟁이’ ‘매력이 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에 보면 ‘char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charm’ 이라는 말은 ‘카리스’라는 말입니다. 헬라어 ‘카리스 = 은혜’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 ‘charm’이라는 말이 ‘매력이 있다. 멋쟁이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 한남제일교회 성도들은 멋쟁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속적으로 멋쟁이가 아니라 영적으로 멋쟁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멋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멋쟁이로 사는 것인지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멋쟁이 성도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을 보세요.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말을 했습니다. 바울전서에 보면 감사라는 말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도 감사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감사가 빠져버리면 불평이 되어 버립니다. 기도에 감사가 빠지면 원망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감사를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면 감사거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거리가 많겠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환난 중에서도 감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나 같았으면 그런 상황에서 원망하고 불평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환난가운데서도 감옥에서도 감사를 했습니다.
멋쟁이 사람들은 환난 뒤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복을 바라보면서 환난 중에서, 병중에서도 질고 앞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서소문교에서 이 장로님 이라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7년 전에 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수술 하루 전 날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나이는 저랑 동갑인데 ‘이 장로님이 수술을 앞두고 얼마나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될까 얼마나 두려워하실까?’ 걱정을 하면서 순천향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문을 열어보니 분위기가 다릅니다. 목사가 온다는 말에 세수를 하셨는지 얼굴이 환합니다. 활짝 웃으면서 저를 맞으시더라구요. 제가 장로님 얼굴을 보니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장로님! 어떻게 장로님 얼굴에 이렇게 은혜가 넘칩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불안하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목사님! 물론 처음에는 불안했지요.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나의 모든 병을 맡기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감사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수술을 통해서 내 육성이 깨지고 성령으로, 성령의 불로 나를 수술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시더라구요. 제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오면서 “그 장로님 환난 중에서도, 고통가운데서도 감사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쟁이이십니까?” 환난 중에서, 질고 가운데서, 고통가운데서 감사를 하는 사람은 참으로 영적으로 멋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나서 아주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직장예배와 교회에서 잘 봉사를 하고 계십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감사거리를 주십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금식기도원에 가 보았더니 군데군데에 「 감사하면 산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감사하면 산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면 삽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는 언제나 감사하는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불평하는 입을 통하여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입이 항상 열려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어느 개척교회 젊은 목사 부인이 소화가 안되서 병원에 갔습니다. “부인! 미안하지만 위암입니다.” “그래요? 내가 위암일 리가 없는데요? 내 나이 40인데요?” “위암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큰 병원에도 다 찾아가 보았습니다. 분명히 위암이었습니다. 사모님은 자리에 그만 누웠습니다. 남편 목사가 미웠습니다. ‘개척교회 사모라고 밤낮 수고만 하더니 그 뒷바라지하기에 얼마나 내가 피곤했나? 남편 때문에 내가 병이 났어!’ 그만 남편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모님의 입에는 기도는 있었지만 감사는 없었습니다. 하루는 개척교회 목사님이 선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선배목사가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는 집에 가려는 이 목사에게 “여보게, 문방구에 가서 공책한권과 연필하나를 사서 부인에게 감사거리를 노트에 다 적어보라고 하게나... ” 후배목사는 선배목사의 말을 듣고 집에 가는 길에 노트와 연필을 사가지고 갔습니다. 자리에 누어있는 아내에게 노트와 볼펜을 내 놓으면서 “당신이 감사거리를 노트에 적어 보시오.” 아내가 화가 나지고 버럭 화를 냈습니다. “내가 이 꼴이 되어서 감사거리가 어디 있냐고? 뭘 적으라는 거요?” 화를 냈습니다. 그는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아내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감사거리를 한번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내 육신은 죽어가지만 내 영이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첫째는 영혼구원에 감사드렸습니다. 우리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지는 못하지만, 좋을 옷을 입히지는 못하지만 학교에 가서 공부도 잘하고 이런 환경 속에서도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자녀를 생각할 때 이런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거리가 생겼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남편은 바람피운다고 하는데 우리 남편은 고지식하고 개척교회 한다고 바쁘지만 바람피움 없이 개척교회에만 온 신경을 쏟으니 이런 남편을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거리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감사거리가 없을 줄 알았는데 감사거리를 적다보니 노트 한권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면서 부인은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불평하고 원망했던 내 죄를 용서해주옵소서’하면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거리를 두고 회개를 할때 사모님의 마음속에 더 성령이 기름 부어지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사가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몸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암이 치유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면 산다” 여러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놀라운 건강을 회복해 주시고 현대의학이 손을 못 대는 병도 하나님이 치유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적은 감사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솔직히 하루에 세 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하나님의 이적을 보여주실 줄로 믿습니다.” 감사하면 멋쟁이입니다.
2. 환난 중에도 찬송하는 사람이 멋쟁이 성도입니다.
시편 33편 1편에 보세요.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불교와 원불교에도 찬불가가 있지요? 그런데 찬불가는 진정한 찬송이 아닙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참되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야 말로 찬송의 종교입니다. 성도의 찬송은 기쁠 때만 찬송을 하나요? 고난 중에도 슬플 때도 그래서 결혼식에서도 장례식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찬송을 끊지 말아야합니다. 욥기 1장 21-22절을 보세요.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 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심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원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언제 우리가 찬송을 불러야 합니까? 찬송은 평안할 때 불러야 하겠습니까? 물론 그럴 때는 당연히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환난 당할 때 소망이 없고 희망의 불꽃이 보이지 않을 때 더욱 그럴 때 일수록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런 자가 바로 멋쟁이 성도입니다.
■ 오래전에 영등포 시장에 큰 불이 났습니다. 1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에 소방시절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너무 큰 불이 났기 때문에 미팔군 소방대에 연락을 했습니다. 미팔군 소방대가 지원이 될 정도로 큰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영등포시장 안에 영은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 집사한분이 일 년 전에 남편을 여의고는 그 시장 안에 조그만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개조해서 살림방도 있고 자그마한 가게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불이 났습니다. 영등포시장에 불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목사님과 성도들이 그 집사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다 시장으로 가버린 후에 그런데 불이 난 참혹한 상황을 보면서 그 여집사님은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 한참이 지나 그 여집사님 입에서 찬송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일 당할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예수를 더욱 의지 합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아무일을 만나도 예수의지 합니다
(342장)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미팔군 소방관이 보니까 어떤 여자가 불 난 것을 보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여인이 찬송을 부르는지 몰랐지요. 그래서 통역관에게 ”저 여자가 미친 여자가 아닙니까?“ 통역관이 알아보니까 그 여자는 교회에 나가는 성도로 자기 가게가 타는 모습을 보면서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소방관이 ‘저 여인이 부르는 노래는 단순히 노래가 아니라 찬송이다” 찬송을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군대장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했습니다. “저 여인의 가게 터에 5층 건물을 지어 주겠소” 불이 다 꺼진 후에 몇 달 후에 그곳에 5층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찬송의 결과는 하나님의 엄청난 복으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소망의 불이 보이지 않을 때, 환난에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의 이적을 불러 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당해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역대하 20장에 보세요. 여호사밧이 유다 왕으로 있을 때 모압과 암몬과 에돔 사람이 연합하여 연합군대를 조직하여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여호사밧과 유다 민족이 얼마나 겁에 질렸던지 예루살렘에 모여서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중에 여호사밧왕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기도가 끝난 그 다음날 여호사밧은 찬양대를 조직했습니다. 찬양대에게 거룩한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는 몇 안되는 유다군대 앞에 찬양대를 앞세우고 찬송을 부르면서 연합군대를 진격했습니다. 그때 여러분 놀라운 이적이 일어난 것을 아시지요? 모압이나 에돔이나 암몬 사람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서로 죽였습니다. 유다군대가 적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는 시체만 널려 있었습니다. 환난 때에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의 이적을 가져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신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홀연히 지진이 일어나서 옥토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발에 걸려 있는 쇠사슬이 끊어지는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부모를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이웃을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바울과 실라처럼 여러분도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까? 우리들 가운데 분명히 어려움을 만난 사람이 있을 줄로 압니다. 환난의 밤을 만난 성도들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질고와 고통 속에 있는 성도들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 찬송 부르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찬송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칠흙같이 절망의 밤이라도 기도하고 찬송을 하면 하나님이 이적으로 응답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하는 사람이 멋쟁이입니다.
3. 섬기는 사람이 멋쟁이 성도입니다.
마태복은 20장 28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섬기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3장11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6.25사변 때 서울에 있는 연세대학교 분교가 부산 영도에 있었습니다. 저는 영도교회의 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영도교회의 목사로 있었는데 그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전에 영도교회에 오기형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서울 영락교회의 오기형 원로 장로님이십니다. 교수님, 연대 교육학 교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부산에 연대 분교의 학장으로 계셨습니다. 영도교회가 가난한 교회였기 때문에 의자 없이 맨땅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안내 당번들은 신발주머니를 나누어 줘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도교회에는 연대교수는 물론 연대 학생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오기형 집사님은 주일마다 신발주머니를 들고 학생들이 오면 인사를 하고 신발주머니를 돌렸습니다. 학생들이 무안해 하면서 얼마나 겸손한 그 집사님께 은혜를 많이 받는지 모릅니다. 멋쟁이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서울의 소망교회를 보세요.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이명박 장로님 주차장에서 호루라기를 불고 주차안내 띠를 두르고선 주차 안내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그렇게 했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멋쟁이입니다. 우리 서소문교회를 보면 집에 식모를 두 사람씩이나 두고 아주 부자로 살면서 찬물에 손 하나 안 댄 사람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찬물에 손을 넣고 밥그릇을 나르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멋진지 모릅니다. 섬기는 사람이 멋쟁이입니다. 대접받는 사람이 멋쟁이가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멋쟁이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여인이 이유를 알지 못하는 두통과 불면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찾아 갔습니다 의사가 한참 검사를 하더니 부인을 보고 하는 말이 “부인! 내가 약을 처방해 주겠습니다. 그런데 하나 꼭 명심을 해야 합니다. 이 약은 당신의 병을 고칠 수는 없어요.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은 있어요. 자기에게 향하는 눈을 타인에게 한번 돌려 보세요. 자기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고 타인에게 눈을 돌려 보세요. 쉽게 말해서 봉사를 한번 해보세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 자기에게 집착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인이 집에 돌아 와서 ‘나를 향한 눈을 어떻게 남에게 돌릴 수 있을까?’ 그래서 병원에서 호스피스가 되기로 했습니다. 호스피스가 되었습니다. 큰 병원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대소변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말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잔심부름을 해 주었습니다. 자기에게 향했던 눈을 타인에게 돌렸습니다. 봉사하는 시간에 시간을 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시간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일 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면증과 두통이 사라졌습니다. 남을 섬기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멋진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환난 중에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멋쟁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멋쟁이 성도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멋쟁이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늘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사도행전 13:36-43 / 김영준 목사
저의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경 이야기를 해달하고 졸랐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시작해서 비롯되었는데 나중에는 저의 아이가 저에게 성경 이야기를 해 달라고, 피곤할 때도 조르고 또 할 말이 없을 때도 조르고. 처음에는 할 말이 많았습니다. 삼손, 다윗, 다니엘,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기둥만 보면 제 아이가 그걸 밀려고 했습니다, 삼손 흉내를 내느라고. 처음에는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이야기 거리가 고갈되기 시작했습니다. 시편 같은 것은 얘기해 주기가 어렵고 바울 서신은 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했던 말을 또 하면 그건 들었으니까 새로운 것을 해 달라, 새로운 이야기를 내가 어디서 찾느냐 해서 늘 뭔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 애쓴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본문의 이 성도들이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그에게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이렇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같은 말씀을 해달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결국 듣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말씀, 하나님이 주신 말씀, 우리에게 주신 말씀, 믿음과 순종과 사랑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표현하는 방법, 담는 그릇은 달라질 수 있지만 결국 그 내용은 늘 똑같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씀이라도 우리는 또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도 밥을 먹었고 그제도 밥을 먹었지만 오늘도 밥을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었지만 그럼에도 또 듣고 싶어 하는 이유도 단순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을 늘리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영적으로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하는 일은 단순해요. 먹고 내보내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기들이 성장합니다. 건강한 아이일수록 많이 먹고 식욕이 왕성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먹은 것을 소화할 능력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일수록 영적인 식욕이 왕성해서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라도 먹을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영적으로 체질이 약한 사람은 쉬운 말씀만을 소화할 수 있고 자칫하면 체합니다. 말씀을 듣다가 시험에 든다든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 최악의 경우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식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스스로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영혼이 그것을 갈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난 사람의 영혼의 양식이요, 기도는 영혼이 숨 쉬는 것입니다. 사람이 숨 쉬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것도 기도가 마치 어떤 귀찮은 일처럼 마지못해 하는 일처럼 되어서는 안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걸어가면서 기도하고 또 일하면서 기도하고 기도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되는 것, 그것이 영혼이 숨 쉬는 사람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인데 교인들의 ‘아멘’ 소리가 언제 가장 큰지 아십니까? 교인들이 이미 많이 듣고 잘 알고 좋아하는 메시지를 전할 때 그때 ‘아멘’ 소리가 제일 큽니다. 반대로 아무리 제가 생각하기에는 좋은 메시지라도 교인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메시지를 전하면 교인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두꺼비처럼 눈만 껌벅껌벅 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들을 때 그것이 감동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배움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을 처음 접하는 것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고 있었으나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그때 배움이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 교회에서 새로운 것만 추구하려고 하다가 이단에 빠집니다. 성경 말씀에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신약 성경은 이천 년, 구약 성경은 삼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설교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하는 그릇,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여전합니다. 이천년 전이나 천 년 전이나 오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에요. 반대로 이단은 화끈하고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미혹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할 때 따라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말세에 많은 이단이 거짓 이적을 행하고 믿는 사람이라도 미혹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단일수록 안 믿는 사람보다는 이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미혹하는 차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어야 되는데 그 지혜는 결국 성경 말씀과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어보면 씨 뿌리는 사람이 나가서 씨를 뿌렸을 때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자마자 새가 날아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새가 뜻하는 것은 마귀에요.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날아와서 그것을 먹어버리려고 합니다. ‘저건 목사의 개인 의견일거야. 저것은 하나의 철학일 뿐이야. 저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 말씀의 능력을 내가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게 마귀가 하는 일이에요.
중세에 기독교가 타락했을 때 성경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누가 가로막았는지 아십니까? 가톨릭교회가 체계적으로 그것을 금지했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라틴어를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성경뿐만 아니라 예배 집전까지 라틴어로 할 것을 고집했습니다.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도 못했고 예배를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로 모든 것을 집전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앙이 자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 중에 그 지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해서 화형을 시켰습니다. 틴데일 같은 사람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 성경으로 번역하다가 이단으로 몰려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교회사에는 그런 아주 이상한 과거가 있습니다. 사람이 성경을 읽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제일 먼저 한 일 중에 하나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 그것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과 맞물려서 불처럼 성경말씀이 퍼져하면서 영적이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례한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퍼져갈수록 부흥이 일어나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쇠하면 그것은 영적인 쇠퇴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의 신앙이 자라기를 원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는 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법과 묵상하는 법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되고 부모가 먼저 그렇게 하는 본을 보여주어야 됩니다.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수학, 논술을 가르치고 이것저것을 가르치는 그 열심만큼이나 그들의 영혼과 정신과 가치관과 도덕과 참된 인생의 방향을 심어주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내 도덕 수준으로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아주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자신을 PR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예수님, 그 안에 계신 성령의 주시는 감동과 지혜를 전할 때 거기에 힘이 있고 생명이 있고 그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게 하시고 사람들이 거듭나고 회개하고 또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소위 디지털 시대라고 하는 지금이나 과거나 마찬가지에요. 사람의 믿음을 돕는 방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기도, 말씀을 전하는 것, 성령을 의지하는 것, 이 방법은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방법인데 그것은 이십 일 세기의 우리도 똑같이 사용합니다.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이것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문화, 기술, 과학은 굉장히 발전했지만 사람의 신앙을 돕는 방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사용하셨던 방법을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사용합니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법입니다마는 그러나 인터넷, TV를 통해서 설교든 예배를 접할 수 있지만 그것이 교회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입원을 하면 인터넷 설교가 여러분을 심방해 줍니까? 자녀가 결혼할 때 TV 설교자가 주례를 해 줍니까? 아니에요. 성경말씀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에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병들었을 때 누가 찾아가느냐? 교회의 장로, 감독, 목회자가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친히 기름을 바르고 주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은 이천년, 삼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방법은 여전히 효험이 있고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평이하게 가르치고 또 전하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방법 외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중세의 교회 개혁자들은 말씀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반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포함해서 시각적인 것을 다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에는 의자와 강대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듣고 믿는다는 취지에 의한 것입니다. 사람이 듣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보는 것은 필요 없고 오히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감각에 어필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 치운 것이 아니고 파이프 오르간을 비롯한 예배당의 악기를 다 제거해서 찬송 부를 때 악기 없이 불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악기라는 것은 사람의 영혼보다는 감정에 어필하기 때문에 엉뚱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그들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데 음악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심지어 화음을 넣는 것조차 금지할 때가 있습니다. 화음을 넣으면 음악이 아름다워지지요. 그런데 교회 개혁자들은 그 아름다움까지도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고 오히려 영혼에 어필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지나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족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 말씀만으로 족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에 비교하면 이러한 개신교의 전통을 생각할 때 요즘 우리나라 개신교의 소위 열린 예배니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예배는 너무 극단적으로 반대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각적인 효과를 아주 극대화하는데 여러분, 유치부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습니다. 유치부 아이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인형극도 하고 그림도 보여주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언어의 훈련이 아직 안 돼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을 데려다가 말씀만으로 그들이 변화 받는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별의별 시각적인 효과를 동원해서 화려하고 재미있는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예배를 드려야만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잇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고 안식일에 모였습니다. -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더니 그들이 요청하기를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지만 첫 번에 다 믿은 것이 아니고 이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한 번 더 듣고 싶다, 한 번 더 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되풀이 하실 때가 있었지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것은 예수님이 말을 더듬은 것이 아니고 반복한 것입니다. 반복의 필요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도 당장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당장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 놓으세요.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여섯 개의 돌 항아리, 여섯은 인간의 숫자입니다. 돌 항아리는 인간을 뜻합니다, 사람은 토기와도 같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섯 개의 물 항아리에 물을 채운다, 물은 성경 말씀을 상징합니다. 물을 사람 속에 가득 채워 놓으면 예수님이 어느 순간에 그것을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포도주가 뜻하는 것은 성령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가득 채워 놓으면 적절한 순간에 예수님이 그것을 성령과 은혜로 바꾸셔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하고 거듭나고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화시키시는 분은 예수님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그릇에 말씀의 물을 가득 담아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이 그것을 성령으로 바꾸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고 죄 사함을 받으라
행 13장 32~41절 / 김영규목사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오늘은 바울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구약 메시야 예언의 핵심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32-33) 메시아 예언의 핵심은 다윗 왕국의 회복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다윗 왕국, 평화의 왕국 태평성대의 왕국, 영원한 왕국, 축복의 왕국을 세울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다윗과 관련된 메시아 예언을 세 가지로 언급합니다.
첫째는 시편 2편에 예언 된 메시아 출현의 예언입니다.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32-33) 시편 2편 7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이 부분은 신약성경에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입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3:21-22) 둘째는 변화산에서 세 제자들에게 들려온 음성입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눅9:35) 예수님은 다윗이 한 예언대로 오셨습니다.
둘째는 시편 16편에 나타난 부활 예언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34-37) 이 부분은 바로 시편 16편의 말씀을 인용한 겁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10) 시편 16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다윗 자신을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다윗 자신은 죽어 장사되어 시신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유대인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썩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윗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육체가 썩지 않고 그대로 계신 분은 오직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다윗이 한 예언대로 장사되셨다가,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셋째는 다윗 왕국의 번영과 영화에 대한 부분입니다.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34) 다윗 왕국의 영광에 대해서는 이사야 55장과 사무엘하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55:3)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6) 역사상 다윗이 세운 왕국은 BC586년에 바빌론에게 멸망당함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영원한 왕국은 곧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다윗의 영원한 왕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권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그의 왕국입니다. 바울은 지금 비시디아 안디옥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그냥 무덤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주시며 영원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경 예언대로 다윗 자손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무덤에서 육체가 썩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영원한 다윗 왕국, 즉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구주, 바로 그분이십니다.
믿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뭡니까? 바울은 청중들에게 그들이 취해야 될 한 가지 결단과 행동을 촉구합니다. 바울이 권하는 것이 뭡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반복하는 말씀이 뭡니까? “이 사람을 힘입어....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38,39)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라!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들이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의지할 때에 우리에게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선물은 죄 사함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38)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세상을 떠난다 해도 꼭 해결해야 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죄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 이 땅을 떠날 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하나님 앞에서는 단 한 가지의 죄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산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불행합니다. 영적으로는 늘 불안하고 두려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왜 뭔지도 모르는 죽음의 공포 속에 살고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 앞에서 받을 심판 때문입니다. 죄란 본질상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지은 죄는 사과 하나를 도적질 한 죄가 아닙니다. 돈으로 치면 사과 하나가 몇 푼이나 되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한 겁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몰라서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벌의 규정이 죽음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실수로 선악과를 먹은 게 아닙니다. 고의적으로 먹었습니다. 고의성과 반역성! 이것이 모든 죄의 본질입니다. 요즘도 보세요. 죄 짓는 사람들마다 이 말 저 말 하지만 결국은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것뿐입니다.
에덴동산의 모든 축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이 원리는 영원히 마찬가집니다. 인간은 하나님 계명에 순종해야만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요 반역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죄를 오직 지옥의 심판 한 가지로 다스립니다. 지옥이라고 하니까 무슨 도깨비들이 있는 곳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지옥은 하나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곳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두렵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오늘 이 땅에 살면서 지옥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이미 지옥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모든 죄를 용서받기 위함입니다. 죄는 당사자의 용서로써만이 해결됩니다. 죄는 결코 범죄자가 갚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온갖 죄목이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살인, 간음, 강도, 상해, 사기, 횡령, 공무집행 방해 등등. 살인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 값을 무엇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사기 쳐서 남을 망하게 한 사람이 무엇으로 그 죄 값을 갚을 수 있습니까? 인간은 누구도 자신이 저지른 죄 값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성경 마태복음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의 얘기가 나옵니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평범한 사람이 수 백 억 빚을 졌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 비유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아니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빚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각 나라마다 엄청난 빚에 파산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미국 금융 위기가 어디서 왔습니까? 빚 때문입니다. 국가가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기업이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나라마다 빚으로 살림살이를 하면서 남의 돈으로 흥청망청 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어떤 나라도 자기가 진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방법이 뭡니까? 탕감해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의 원리요, 바로 예수님의 속죄를 통한 용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 값을 자신이 갚겠다는 사람이 가장 교만하고 큰 죄인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가 뭐라고 말합니까?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마18:26)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갚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뭡니까? 인간의 종교적 행위들이고, 인간적 자선 행위들입니다.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스런 행위로 자신의 죄가 어느 정도 없어지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뜨거운 불 위를 걷거나, 땅에 몸을 묻고 수행을 하거나,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거나, 갖가지 수행들이 실제로 자신의 죄를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한 두 차례 자선 행위를 했다고 그것이 죄를 갚는 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임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께 죄 지은 사람은 사람 앞에 당연한 행위를 했다고 공로로 인정될까요? 죄는 아무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가 전혀 없는 분이 죄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저는 한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죄를 짓지 말든지, 아니면 자기 죄는 자기가 갚아야지 왜 밤낮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하나? 하나님께 용서받지 않으면 해결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용서의 길이 얼마나 위대한 길인지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 길로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가 지은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 이 짐을 주님께서 내려놓게 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55:1-3)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목마름은 죄로 인한 의에 대한 갈증입니다. 누가 이 시원한 생명수를 내게 줄까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생수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을 중심에 영접하세요. 예수님 오늘 내 마음에 오셔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세요! 그리고 모든 마음의 죄를 용서받으시기 바랍니다. 죄 사함 받으면 영혼이 시원합니다. 평안합니다. 행복합니다. 기뻐합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된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의롭다 하심을 얻으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에게 주시는 두 번째 선물은 의롭다 하심입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39)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을 완전한 의인으로 보십니다. 이것을 힘든 말로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칭의란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법을 적용해도 범법, 위반이 없는 완벽한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상 이런 상태의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가끔 국가의 요직을 임명할 때에 국회에서 청문회를 합니다. 요즘 청문회는 업무 수행 능력을 평가하는 것보다는 흠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은 무슨 실수나 잘못이 없는지 한 건 올리기 위해 정신이 없습니다. 조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앞에 놓고 심판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감히 아무도 먼저 돌을 들지 못하고 다 도망쳤습니다. 감히 남을 죽여라 살려라 할 만큼 의로운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의로워서 천국 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완벽한 의인,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이 의로움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극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행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하라는 계명이 둘이고 하지 말라는 계명이 여덟 가지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소극적 계명입니다. 최소한 행하지 않으면 의롭게 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 숭배 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탐욕을 내지 말라 등등. 이런 계명은 하지 않음으로써 충분히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적극적인 계명입니다. 즉, 행하라는 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어디까지 행해야 되는지 한계가 없습니다. 사랑이란 계명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얼마나 사랑하면 됩니까? 이런 의미에서 완전한 의라는 것은 인간적 측면에서 불가능한 요구사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모든 금할 것을 금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고, 모든 행할 것을 행한 것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1-24)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5-26)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1-28)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창세기에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아담이 입은 가죽 옷이 그것입니다. 아담은 자기의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 잎으로 엮어서 만든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마르고 해져서 곧 부끄러움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아담에게 하나님은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죄의 수치를 가리워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의는 보잘 것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입혀 주신 속죄의 옷, 칭의의 옷은 완벽하여 모든 수치를 가려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장차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그 때에 우리는 무죄자의 옷, 완벽한 의인의 옷, 흰옷을 입게 됩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3-14) 모든 사람이 의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로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의인 대접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경고
바울 설교의 결론은 경고입니다. 복음을 듣는 것은 선택적 사항이 아닙니다. 모든 죄인들의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대세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이나, 오늘 우리 시대 사람들이나 다 마찬가집니다.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40-41)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시기 600여 년 전에 이미 이런 예언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합1:5) 역사 속에 놀라 자빠질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보세요.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관심이 있습니까? 죄 때문에 멸망에 빠지고, 죄 때문에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도 죄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돈 얘기만 합니다. 모든 인간이 다 부패하고 타락해서 멸망해 가도 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자신의 의만 내세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경고합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당신들도 구주를 믿고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놀라고 놀라 자빠질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께 내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고백하세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의를 입혀주십니다. 완벽한 의인으로 인정하십니다. 천국 자녀로 삼으십니다. 현재 지상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천국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장차 세상을 떠나게 될 때 하나님 품에서 영원한 천국 생활이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축복, 하나님 자녀된 축복을 지금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 결단을 하지 않는다면 놀라 자빠질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자
행 13장 36절 / 강성찬목사
죤 맥코넬은 혼자서 "워싱톤 인더스트리사"를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그 회사는 획기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오백만 달러의 연간 순수입을 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맥코넬이 이토록 놀랍게 성공을 거두자 행정 관료들까지도 그의 성공 비결을 배우려고 공장을 빈번히 방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맥코넬은 자신의 성공 비결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이른바 황금율에 있다고 말한다 합니다. 황금율은 달리 표현해 보면 남들이 당신을 대해 주기 원하는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는 말입니다. 맥코넬은 이와 같이 말한다 합니다. "우리 회사는 황금율 회사입니다. 황금율은 내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황금율의 핵심은 남의 처지를 나의 처지로 바꾸어 생각할 줄 아는 생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렇게 하면 어떤 문제라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 단순한 철학이 "워싱톤 인더스트리사"가 위대한 성공을 거두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예화뱅크-황금율을 실천하라)
우리도 교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의 성도로 단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설명하는 사도는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기의 시대를 섬기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말씀합니다.
다윗은 유익하고도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세상에서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그의 통치를 통하여 실현시켰습니다. 그는 헌신적이며 또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인물이었으므로 삼하 3:36 에는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였다"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행 13:22)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고 합니다.
섬기는 일에는 두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시 107:11)하는 일들입니다.
고라 다단 온의 일당입니다.(민16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친히 택하신 나라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그 나라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간섭으로 세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덧입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라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교만히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함으로써 반역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민 16:1)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민 16:2)고 합니다.
사실 고라는 모세와는 사촌지간으로서 자신에게도 이스라엘을 이끌어 갈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과 조건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자리를 넘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범죄한 무리들을 징벌하고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세와 아론은 자기 동족에 대한 깊은 연민의 마음으로 그 같은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생명을 내건 참으로 진지한 중보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들은 직후 백성들로 하여금 세 명의 반란 주동자들로부터 속히 떠나갈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는 더 이상 그들 주동자들로부터 죄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성이 반란 주동자로부터 떨어져 나간 직후 하나님께서는 급작스럽게 땅의 입을 벌려 고라 일당을 전멸시키셨습니다. 또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불경스럽게 분향하던 250명의 족장들을 모조리 불살라 죽게 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는 범죄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잘못된 것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라 일당의 반역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만한 반란이었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과 역할에 대한 감사와 자족의 마음이 결여된 불신앙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진정 섬기기를 원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비록 조그만 하고 보잘 것 없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며 섬기는 일꾼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자에게 칭찬과 상급을 아끼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아니니아 삽비라 부부입니다.(행5장)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았습니다.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합니다.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아나니아가 죽은 후, 그의 아내 삽비라는 남편의 급사를 알지 못하고 그들의 땅 값으로 받은 금액을 속입니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아나니아와 같이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한다고 책망했습니다. 삽비라 역시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삽비라를 남편 옆에 장사했습니다. 온 교회와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다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포도원에 일하라고 한 맏아들의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권세에 대한 변론을 하시고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고 하면서 한 비유를 드십니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 21:28-31)고 합니다.
여기에서 맏아들은 물론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뜻이 함께 합니다. '너희'(32절)는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을 망라한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맏아들은 기만과 불순종을 했음에도 회개할 줄을 모르는 자인데 비하여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불순종했으나 회개하고 나중에 순종한 자를 뜻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맏아들인 '너희'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늦게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심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바른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김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다가 그 집사님은 기도가 끝날 즈음 무작위로 성경을 펼쳤습니다. 무심코 성경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성경말씀을 그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살았습니다. 집사님은 그런 생활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서 믿음을 키워갔고 힘을 얻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자연 일도 잘 되었고 삶에 기쁨도 주어졌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 기쁨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흉내 내어 자기도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눈에 확 들어온 말씀이 마태복음 27장 5절이었습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 메달아 죽은지라” 기분이 이상해서 또 다른 곳을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누가복음 10장 37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해야 그것이 복이 되고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됩니다. 그것이 아니고 내 뜻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끌어다 맞추면 이렇게 됩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면 기쁨과 즐거움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다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모습들입니다.
모세의 경우입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 3:5)라고 합니다.
'사환'은 '자발적인 수행인'(데라폰)을 뜻합니다. 그와 같이 모세는 자발적인 충성심으로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충성스런 위치는 천사보다 뛰어납니다.
하나님은 그의 뛰어난 충성스런 위치를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민 12:6, 7)고 증언하셨습니다.
다른 선지자와 달리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입과 입으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역사상 모세만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한 그의 자발적인 헌신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바였습니다.
모세는 장래에 되어질 일들을 위해 사환으로 충성하였습니다. 물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사명은 그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부르심을 받아 충성했던 것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이 그 '아들 안에서'말씀하실 새롭고도 최종적인 계시를 증거 할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사명은 찬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충성도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을 예표하는 충성이었으며, 그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한 충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충성을 표현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모세는 주님의 용서의 사역을 예표 하는 사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의 반역에 대해 그들을 멸할 것이며 모세와 함께 시작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은 주의 백성임을 강조하며 애굽 사람에 대한 증언과 족장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하여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을 탄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출 32:9)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 32:10)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출 32:11)...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출 32:31)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 32:32)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히 3:6)고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8)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39)하셨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눅 22:42)시었고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 19:30)고 하십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 10:9)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0)고 합니다.
바울 사도의 사역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고후 1:1) 사도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7)고 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11)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사역이기도 합니다.(행10장)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냈습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였습니다.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고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고 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 하였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또 두 번째 소리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합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라가고 맙니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사시는가라고 불러 묻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십니다.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하자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합니다 라고 전합니다. 베드로가 불러들여 머물게 하고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는데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 게 됩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하며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고 묻습니다.
고넬료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느니라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게 됩니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였습니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께서 구원코자 하시니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줄 믿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며 세례를 베풍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 55:8)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9)고 합니다.
두 어머니가 각각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유하였고 또 한 사람은 무척 가난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집의 외아들이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자, 어머니들은 절망적인 슬픔에 사로잡혔습니다. 부유한 쪽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라는 목사의 말을 듣지 않고 "그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그가 죽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라고 열렬히 중얼거리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과부인 가난한 어머니는 그의 아들이 회복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그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그것이 행하여지기를 바랐습니다. 부유한 쪽의 아들은 회복하였으나 가난한 편의 아들은 죽었습니다. 이 부유한 청년은 좋지 않은 친구와 휩쓸려 방탕한 생활로 그의 어머니를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살인공모로 교수형을 받았으며 끝끝내 그의 어머니를 부끄러움 속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슬픔과 고난을 겪으며 여생을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찬미하며 살아온 불쌍한 과부는 조용히 행복하게 마치 아들을 본 것처럼 팔을 모으고 "오! 귀여운 아들아, 너는 이 늙고 불쌍한 어미를 천국에 데려가려고 나를 찾아 왔구나"라고 말하면서 죽었습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엡 6:6)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엡 6:7)듯 하는 모두가 됩시다.
너희가 알 것은
행 13장 36~41절 / 신성종목사
이 세상에는 꼭 알아야 할 것이 있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 있고, 알아서는 안 될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체성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또 세상에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 참 많습니다.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여성 잡지를 보면 까십을 중심으로 되어있습니다. 모 잡지에 보니까 정주영 회장의 첫 사랑의 딸이 북한에 있다는 제목으로 글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아니 그게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서는 안 될 것도 있습니다. 남의 프라이버시는 알아서는 안 됩니다. 악의 세계도 너무 알면 안 됩니다. 램파트 경찰서가 오늘에 이르도록 부패된 것은 바로 악의 세계를 너무 알다가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지식의 중요성
지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너무도 좋은 말이어서 저는 그 말을 저의 책상 위에 써놓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그 말이 저에게 채찍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지식은 힘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지식을 활용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에 힘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역사를 많이 배우면 슬기가 생기고, 시를 많이 읽으면 재치가 생기고, 수학을 잘하면 계산에 빨라지고, 철학을 공부하면 생각이 심오해지고, 도덕적 지식을 가지면 사람이 신중해집니다.
그러나 베이컨 보다 먼저 솔로몬은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잠 24:5)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4장 6절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주님은 지식이 바로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
2.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것을 알아야 합니까?
오늘의 본문을 보면 적어도 우리는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먼저 [죄 사함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셋째는 의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죽음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려고 황주에 사람을 보내었고, 심지어 제주도까지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죽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 보면 에녹과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였다고 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였습니다.
죄의 문제는 중세에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의미의 문제는 현대의 가장 큼 문제입니다. 오늘은 죄의 문제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정부가 가장 심각하게 다루는 문제도 바로 이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못하도록 법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게 하고, 심지어 사형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경찰의 숫자를 늘리고, 교도소를 많이 만들고 했지만 그러나 해마다 범죄자의 숫자는 늘어만 갑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양을 받아도 안 됩니다. 공자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했지만 어디 됩니까? 또 석가모니는 깨달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네 가지 고통(생로병사)을 알고, 모든 욕망을 버리면 된다고 했지만 욕망은 누르면 누를수록 용수철처럼 튀어 오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죄는 세상에서 말하는 죄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제가 명지대학교에서 교목실장으로 있을 때에 매달 한번씩 교수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우리는 다 죄인이란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총장이 제게 말합니다. “신 목사님, 저는 법제처 장관으로서 이 나라의 많은 법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고 죄인이라니 너무 하지 않습니까?”하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우리말에는 죄란 말이 하나밖에 없지만 영어에는 crime이란 말과 sin이란 말이 있습니다. crime이란 말은 사회적으로 지은 죄를 말하고 성경이 말하는 죄는 sin입니다 하면서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생의 불행의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죄는 고무줄처럼 우리의 목을 점점 조여서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크렛타이 목사님의 개가 몸이 점점 붓더니 마침내 죽었습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조사를 해보니까 아이들이 놀다가 장난삼아 목에 고무줄로 묶어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전쟁 때 캬리각크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술집에 들어가 어떤 여자와 방탕한 짓을 하다가 자녀를 낳았습니다. 거기서 150년 동안에 480명의 자녀가 생겼는데 다 창녀, 도적, 사기꾼, 도박자, 살인자 등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쟁 후에 고향에 돌아와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거기서 태어난 자녀가 150년 동안에 500명이었는데 다 변호사, 의사, 목사, 선교사 등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죄의 결과를 통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나 사회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을 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객관적인 근거와 주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객관적인 근거란 바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라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이는 절대로 나와 여러분들의 죄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객관적인 근거만으로도 안 됩니다. 죄 사함을 받으려면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입니다. 내가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한 것만 용서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으니“(요 1:12절).
회개하고 믿으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의가 내 의로 전가가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기업이 됩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것이 나의 것이 됩니다. 믿습니까?
오늘 본문을 이 심오한 죄사함의 영적 진리를 꼭 알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다음에는 [의롭다 함을 받는 비결]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바티칸의 계단을 오르면서 매 계단마다 성경을 외우고, 기도하였지만 그가 원하는 의로움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가서 금식도 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그러나 역시 하나님 앞에 설만큼 의로워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는 시편을 연구하는 가운데 31장 1절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구절이었습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주의 의로 의롭게 된다는 원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로마서 1장 17절과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갈 2:16).
여기서 루터의 유명한 종교개혁의 3대 표어의 핵심이 나왔습니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 만인 제사장 주의, Justification by Faith(이신칭의).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들이 의롭게 되는 비결을 깨닫게 되면 우리들에게도 종교개혁에 준 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믿습니까?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고 천국의 기업의 참여자가 됩니다.
(3) 끝으로 [자신의 때]를 깨달아야 합니다.
롬 13장 11절에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시기란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때와 시간은 인간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시간 엄수에 소문이 난 사람입니다만 그러나 역사를 보면 워싱톤 장군이나 나폴레옹이나 웰릴톤 장군이나 다 시간을 엄수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의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분별해야 합니다.
(예 화) 연극에서 세 가지 안타까운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나가서 연기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우물쭈물하는 배우, 나가기는 했는데 그만 자기가 해야 할 대사를 잊어버리고 우물쭈물 하는 배우, 역할이 끝났는데도 퇴장을 안 하고 왔다 갔다 하는 배우입니다.
때에 관해서 제가 제일 좋아는 구절이 전도서 3장에 나옵니다. 1-11절에 때란 말이 30번이나 나옵니다. “천하게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사실 때를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때를 바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면에서 때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좀 어려운 말입니다만 성경에 보면 때란 말이 여러 개가 있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이 [크로노스]란 말과 [카이로스]란 말입니다. 크로노스란 [인간의 때]를 말합니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역대기(Chronicles)란 말입니다. 그러나 카이로스란 말은 [하나님의 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기회]란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누가 성공합니까? 카이로스를 아는 사람, 즉 하나님의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누가 지혜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 어떤 때를 분별해야 합니까? 먼저 세 기둥의 때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창조의 때를 알고, 다음에는 십자가와 부활의 때를 알고, 끝으로 주님의 재림의 때를 알아야 합니다. 창조의 때는 우리가 그 연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는데 심지어, 시간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나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창조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때를 분별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2천년 전에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역사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중심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역사의 의미도 바로 십자가와 부활에 있고, 역사의 방향도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재림의 때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6-37).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재림의 때를 알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시한부종말론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때를 알고 싶어서 주님께 따로 와서 물었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주님은 네 가지의 징조를 말씀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겠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4-12). 그러나 14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언제 주님의 재림의 때가 온다고 했습니까?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바로 그 때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입니다. 그 해답이 로마서 13장 11-14절에 나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어두움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고,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네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방탕, 음란, 싸움,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마치 더러운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자의 삶과도 연결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꼭 알아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죄 사함의 원리요 둘째는 의롭다 함을 받는 비결이요 셋째는 너희 때, 곧 우리의 때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세 가지 때를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인적으로 나의 때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의 때는 바로 역사의 세 기둥과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종말론적인 징조를 보면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 함이니라”(마 24:42-43). 먼저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기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다 지혜와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서 언제 주님이 재림하시든지 영접할 수 있는 준비를 다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사람을 힘입으라
행 13장 32~41절 / 정 우목사
엊그제 어느 분으로부터 언더우드 선교사님에 대한 책을 몇 권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년)는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입니다. 1885년에 왔습니다. 26살에 왔습니다. 참 귀한 분입니다. 이분이 오셔서 하신 일이 많습니다만 세 가지를 말한다면 교회를 세웠고(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21개 교회를 세웠고), 학교를 세웠고(연세대, 경신중고등학교 등),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했습니다.
오늘 청년주일인데, 우리는 이분을 통해서 배울 것이 참 많습니다. 이분이 한국에 대한 꿈과 비전과 열정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1891년의 일입니다. 그가 한국에 온지 6년 뒤입니다. 첫 안식년을 맞이하여 미국에 갔습니다. 테네시에 있는 내슈빌에서 미국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거기서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은 내 마음 한가운데 있는 나라입니다(Korea is the country that is nearest to my heart.)”
언더우드는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13살 때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과거에는 영국 사람이었고, 그 당시는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국이 자기 마음 한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을 가장 사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꿈을 들어보시겠습니까? 그가 한국선교 20주년 되던 해(1904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에 가서 행한 연설의 일부입니다. 1904년이면 우리나라가 대단히 어려웠던 때입니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입니다. 병원이나 학교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 그의 꿈을 보십시오. ‘저는 미래에 모든 마을에 세워질 학교들과 거기에서 가르칠 기독교 교사들을 바라봅니다. 저는 앞으로 대도시에 세워질 중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의과대학과 간호학교, 또한 소도시에 세워질 병원들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저는 전국 방방곡곡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봉사기관들이 세워질 것을 바라봅니다.’몇 년 가지 않아 그의 꿈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1908년에 이런 꿈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가정, 예수 믿는 마을, 예수 믿는 지도자, 예수 믿는 정부가 세워져서 이들이 모든 영역을 주도하고 영향을 미치는 사회가 건설되는 나라를 꿈꾸고 있다.”언더우드 선교사의 글을 읽으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의 글을 읽으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상상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첫째, 항상 긍정적이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누구를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그러자 주님 대답하셨습니다. “그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무슨 일을 하실 것이다”
사람들은 무슨 좋지 못한 일을 당하면 누구를 탓합니다. 상대방 탓도 하고, 환경 탓도 하고, 심지어 조상 탓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긍정적이십니까?
왜 사람들이 부정적이 될까요? 누구 탓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으시다’라고 생각하면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조니 에릭슨 타다’라는 여자 수영선수가 있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였습니다. 17살 때 바닷가에서 다이빙하다가 목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결과 목 아래는 다 마비가 왔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손 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물론 눈물도 스스로 닦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얼마나 절망이 되었겠습니까? 죽으려고 해도 자기 힘으로는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면도칼 하나도 손에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날을 보내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이런 생각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무슨 일을 하실 것이다. 그게 무슨 일일까?’기도하는 가운데 입으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으로 그려도 어려운 것이 그림인데, 입으로 그리다니요. 그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입으로 찬양을 합니다.
그러자 그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어느 볼펜 회사로부터 광고모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조니는 한 가지 단서를 달았습니다. “내가 나오는 광고 밑에 PTL이라는 영어글자를 써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나가겠습니다.”회사가 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나가는 광고마다 다 PTL이 들어갔습니다. 광고를 보는 사람들마다 이 PTL을 봅니다. ‘저 PTL이 뭐지?’다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방송국이나 볼펜 회사에 물어봤을 것입니다. “PTL이 뭐예요?”PTL은‘Praise The Lord(하나님을 찬양하라)’의 첫 글자입니다. 그는 광고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책도 40여 권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곳에 강연자로 나섰던 것입니다.
누구의 힘으로 된 것입니까? 자기 자신의 힘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힘입니다. 예수님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힘입음으로 놀라운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둘째, 항상 소망적이셨습니다.
상황과 형편이 어려우면 사람들은 다 두려워하고 염려합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기만 하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사람들은 어려우면 그게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 현재가 절대로 끝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더 나은 미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제 1차 선교여행을 하는 중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갔습니다. 안식일을 맞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설교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언급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언급했고, 모세도 언급했고, 다윗도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스라엘 역사도 설명하고, 또 여러 조상들도 언급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이 사람을 힘입어라’ 이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 그렇게 길게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을 힘입으면’나타나는 결과가 두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을 힘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죄 사함을 받게 된다>
여러분, 우리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조니 에릭슨을 보지 않았습니까? 건강하지 못한 데도 너무너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가 없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아무 잘못 없이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기도와 찬송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가장 불행하게 만들까요? ‘죄’입니다. 죄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대가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아들, 조지에게 도끼 한 자루를 주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것 갖고 나무 베는 연습을 하라고요. 아버지가 아끼는 나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체리나무입니다. 봄이면 아름다운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며칠 외출을 했습니다. 조지는 도끼가 얼마나 날카로운 지를 실험한다가 하다가 그만 이 체리나무를 베고 말았습니다. 야단났습니다. 누가 본 사람이 있을까 하여 두리번거려 보았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일하는 아주머니가 그것을 보았습니다. 조지에게 말합니다. “도련님, 우물에 가서 물 떠다가 항아리에 채우세요.” “내가 왜 그 일을 합니까? 그것은 아주머니 일인데요?”아주머니가 말합니다. “그럼 내일 아버지에게 다 일러바칠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심부름을 다 시킵니다. 아주머니가 시키는 일은 일대로 다 해야지요, 거기다 죄책감까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체리나무, 누가 벴어?” “저 모르겠는데요.”아주머니는 그것을 무기 삼아 온갖 일을 다 시킵니다.
다음날 아침입니다. 또 아주머니가 일을 시킵니다. 그때 조지가 말했습니다. “나 안 합니다. 아주머니가 하세요.” 아주머니는 주인님에게 일러바치겠다고 말합니다. 조지는 마음대로 하라고 합니다.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왜 조지가 아주머니 말을 듣지 않고,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요? 조지는 간밤에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고, 아버지로부터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함 받았기에 이젠 죄책감도 없습니다.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죄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육신적으로 죽는 것만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도 영원한 형벌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대가입니다.
바울 사도가 설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는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데,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다’ ‘이 사람을 힘입어야(예수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게 된다’
바울은 그 내용을 3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우리의 그 어떤 노력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입니다. 주님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죄악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악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죄를 들춰내시고, 죄를 꾸짖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죄인임을 아시면서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품어주셨습니다. 사랑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해진 것입니다. 아멘?
<의롭게 된다>
39절을 보십시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38절에서도‘이 사람을 힘입어’라고 했는데, 39절에서도‘이 사람을 힘입어’라고 했습니다. 38절에서는‘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게 되었다’라고 했고, 39절에서는 ‘이 사람을 힘입어 의롭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39절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첫째,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왜 모세의 율법으로는 우리가 의롭게 되지 못할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구원(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하시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주셨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율법이 천 가지가 있다고 합시다. 그 중에 999개를 지켰다고 해도(지킬 수 없지만)그 중 한 가지라도 못 지키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의롭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그래서 이 사람(예수님)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종류의 의가 있습니다.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창세기에 두 가지 의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범죄했습니다. 자기들이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옷은 얼마가지 않아 말라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끄러움이 드러났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습니다. 물론 양의 가죽옷입니다. 이것은 장차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의가 있지요?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인간의 의는 보잘 것 없어서 우리의 수치(죄악)를 가려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입혀주신 속죄의 옷(칭의 옷)은 완전하여 우리의 모든 수치(죄악)를 가려줍니다. 수치가 가려졌기에 우리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크게 세 단계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칭의(稱義)의 단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나의 구원자’라고 믿음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십니다. ‘의롭다’라는 용어는 원래 법정 용어입니다. 재판관이‘당신은 무죄입니다’라고 선언한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원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너는 죄가 없다, 너는 의롭다”라고 선언해 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둘째, 성화(聖化)의 단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의롭게 살기 위해 힘쓰는 단계입니다. 전에는 심판받지 않으려고 의롭게 살려고 했지만 이제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의롭다고 해주시기에 이제는 기쁨으로 의로운 사람 되려고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셋째, 영화(榮華)의 단계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가기에 가면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힘입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면, 내가 나의 일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니 내 능력 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불안과 실패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내 일을 더 이상 내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시기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니 평안과 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언제든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심으로 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으시고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능력들이 나타나는 복된 삶들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