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금요일. 밸런타인데이였던 이날 WYBE방송(채널 35)에서는 ‘태조 왕건 쇼’가 벌어졌다.
이 방송은 펜실베이니아와 뉴저지주를 비롯해 뉴욕과 워싱턴의 일부까지 커버하는 필라델피아의 공영 채널이다. 미국 동부의 심장부이자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이 지역에서 한국 쇼가 벌어진 것은 이곳 교민은 물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평소 이 35번 채널을 구성하고 있는 주체들은 세계 유력의 민족과 방송사였다. 영국 독일 중국 인도 등 문명이나 인구 측면에서 한가닥씩 하는 민족들과 필라델피아 자체가 이 방송을 이용했다.
여기에 한국 프로그램 ‘태조 왕건’이 어렵사리 끼여들어 지난해부터 오후 10시(재방송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1시간 동안 방영됐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5회 한국말이 그대로 나오고 하단에 영어 자막이 나오는 형태로 전파를 탔다.
그런데 이 방송이 기대치 않게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태조 왕건’이 그만 이곳 보수적인 주민들에게 문화적인 쇼크를 주며 큰 인기를 모은 것이었다. 미국의 두번째 수도이자 미술관 박물관 등 미국 문화의 모태가 된 이 지역의 콧대 높은 문화애호가들을 사로잡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인기를 간파한 방송사는 급기야 ‘태조 왕건 쇼’를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어려움에 빠진 공영 방송의 재정상황을 알리고, 시민들의 기부를 받기 위한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한 것이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려 6시간이나 ‘태조 왕건’을 돌려댔다. 이 시간대에 나가야 할 영국 BBC의 방송을 비롯해 독일 중국 인도 방송(나머지 민족들은 명함도 못 내민다)이 무참하게 밀려나고 하루 종일 1000년 전의 한국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다.
장면은 왕건과 견훤이 대접전을 벌이는 금성 대회전이었다. 이미 며칠 전 바람의 힘을 빌어 어려운 해전을 대승으로 이끄는 놀라운 장면을 지켜본 미국 시청자들이었다. 견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수달의 충성심에 경탄을 했고, 왕건과 견훤을 둘러싼 여인들의 사랑과 질투에 여성 시청자들은 ‘환상적’이라는 말을 연발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궁예의 연기에 반한 한 자원봉사자는 기부행사에서 궁예처럼 한쪽 눈을 가리고 기부 전화를 받아 이채를 띠었다. 음울하면서도 충성심 강한 은부장군과 한물간 백제의 책사 이찬, 난세를 독특한 방법으로 헤쳐나가는 아자개를 비롯한 전 출연진들의 중후한 연기가 화제가 되었다.
이날 행사는 ‘태조 왕건’의 필름을 30분(반 회분) 돌리고 15분 동안 토크쇼를 벌이는 형식으로 종일 반복했다. 토크쇼는 “이렇게 재미있고 환상적인 드라마를 내보내는 시의 공영방송에 기부하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다 보니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한국과 한국의 문화에 대해 우호적인 이야기로 시간을 메워 나갔다. 한국 음악 4000년이란 디스켓도 소개했고, 한국의 공영방송인 KBS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사회자는 “최근의 북한 핵문제만 생각하지 말고, 이런 대단한 드라마를 만드는 한국 문화의 저력에 갈채를 보내자”는 말까지 했다.
이 드라마의 애호가인 카렌 해리슨(방송작가)은 “영국이 자랑하는 BBC 방송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보다 태조 왕건이 더 훌륭하다”고 극찬했다. 한 주부는 “이 드라마 시청 이후에 인터넷을 통해 한국 음식과 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열기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한국인에 의해 운영되는 한 방송사가 일체의 방송료와 프로그램 공급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이 채널에 진입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었다.
‘태조 왕건’ 방영을 성사시킨 중앙방송의 김덕수 대표는 “시 공영 방송 관계자들을 설득해 드라떳?내보내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으나 이 작품의 완성도라면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도 충분히 그 내용에 빠져들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밝혔다.
이것이 비록 미국의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하나의 사건임에 분명하다.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미국인들은 우선 1000년 전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 놀라고, 또 이같은 대형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한국 문화의 힘에 대해 놀라고 있다.
전세계가 전쟁의 광기로 흉흉한 이런 시점에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심는다는 것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도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동안 계속되어 온 한국에 대한 온갖 갈등들이 이날만은 모처럼 잊힐 수 있었다.
여론으로 움직여지는 초강대국 미국의 마음을 붙잡는 지름길이 바로 문화를 통한 접근이다. 그래야 강대국들이 개입돼 자칫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복잡한 정치 문제에 휘둘려 싸잡아 넘어가지 않는다.
대미 사절단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태조 왕건’의 경우처럼 한국을 알리는 문화행사를 조용히 지원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다. 노무현 대통령의 새 정부는 그 점을 알아야 한다.
요란하고 거친 무력보다 연기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문화의 힘은 대단하죠! 강요하지 않고도 타민족을 동요시킬 수 있으니..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세계의 어린이들을 일본 문화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처럼. 유럽이나 아메리카 쪽에도 우리의 문화 시장이 많이 접근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첫댓글 정말잘읽엇습니다..^.~
좋아죽겠습니다.
kbs1 텔레비젼에서 하는 역사극은 지루한듯 하지만 중독성이 강함!!
주한 미군은 왜 그모양 입니까? 내가 옆에 있었으면 교도소 감행 하고 반 죽였을걸,,,, 앞으로 그런넘은 시민이 반만 죽입시다.
할랑님 의견 동감... 지루하지만 중독성이 강함 원츄 ㅎㅎ
저 드라마 본 미국사람이 한국와서 한다는 소리가 "이보게, 나를 보필하게"라고 말했다가 뺨맞았다는...
요란하고 거친 무력보다 연기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문화의 힘은 대단하죠! 강요하지 않고도 타민족을 동요시킬 수 있으니..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세계의 어린이들을 일본 문화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처럼. 유럽이나 아메리카 쪽에도 우리의 문화 시장이 많이 접근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