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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Tarrying with The Negative
부제 : 아방가르드는 잠들지 않는다
계원예술대학교 현대예술 창작과 기획 트랙 학생 22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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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불쌍하고 예술은 치사하다
이영준
컨템포러리 아트의 폭격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폭발의 상흔을 몸에 지니고 살아간다, 최소한 예술이라는 마당에서 일 하며 살아가기로 한다면 말이다. 그 폭탄의 이름은 관계의 미학, 개념미술, 정치적 미술 등 온갖 미술의 트렌드들이다. 이제 예술작업의 목적은 이 세상에 없는 깜짝 놀랄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요즘 예술작업의 목표는 예술폭탄들을 피해 자신만의 구덩이를 파는 것이다. 그리고는 물론 또 다른 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구덩이에 몸을 숨겨야 한다. 밝히기는 서글픈 노릇이지만 요즘의 예술의 의미는 그렇게 축소됐다. 예술의 재료와 장르와 물리적 크기가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은 미켈란젤로가 좋은 대리석을 찾아 피에트라 산타의 아푸아네 알프스의 골짜기를 헤매던 시대가 아니다. 요즘 창작의 원천은 유튜브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다.
문제는 그런 것들에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들(50대 아저씨 아줌마들)이야 들판에 나가서 찬 바람을 맞으고 흙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게 대지의 기운이라고 받아들이며 생명을 확인했지만 지금은 와이파이가 통하고 인터넷이 연결돼서 데이터를 다운 받을 수 있는 것이 생명력이다. 문제는 그런 디지털 생명력이 살과 뼈와 피로 돼 있고 밥 먹고 똥 싸야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비천한 육신의 존재들에게 ‘진정한’ 생명력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그렇다. 왜냐면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나가면 끈 떨어진 연 모양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 하다가 충전할 곳을 발견하면 생명수라도 찾은 양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 오늘날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학생이나 교수나 다 내장에 디지털기관을 하나씩 차고 태어난 변형동물들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어떤 종류의 생명력이 필요할까? 더군다나 온갖 종류의 예술폭탄을 피한 다음 찾을 수 있는 생명력이란 어떤 것일까? 지금 같은 추세로 디지털이 발달하면 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의 춤을 추고 있는 해골 밖에 없다. 멀리서 보니까 활기 차게 춤 추고 있는 듯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죽음의 춤일 뿐이다. 그걸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가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해골이 우리의 목을 틀어주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살려낸 사람도 많지만 인터넷이 죽인 목숨도 많으리라. 결국 온갖 정보의 폭격에 예술 트렌드의 폭격에 노출된 우리의 목숨은 참 가련한 것이 됐다. 이때 어떻게 살아야 보람 차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혹은, 멀리서부터 해골을 식별하고 미리 피할 수 있는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이때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마치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자는 얘기처럼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산부인과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사실 문제는 디지털이 아니다. 다지털이 마치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인 양 떠드는 사람이나, 도로 아날로그로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이나 똑같은 하멜린의 피리 부는 사람일 뿐이다. 피리를 불어서 마을의 쥐를 없애준 마법사에게 돈을 주지 않자 마을의 아이들을 몽땅 피리로 홀려서 물에 빠트려 죽였다는 그 통쾌한 마법사 말이다. 이 세상은 앞으로도 한참을 더 변한 후에야 지구가 멸망할 텐데 지금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 또 무슨 양자 컴퓨터냐 떠드는 것은 정말로 자잘한 얘기다. 문제는 자신의 생명력의 원천을 어디서 찾을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허구 헌날을 술로 지샌다면 우리는 쯧쯔 혀를 차면서 불쌍해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나날도 예술이라는 술로 떼우고 있는 것 아닐까? 당장은 취하지만 깨고 나면 속만 메슥 거리는 망할 예술로? 술을 즐기고 싶으면 술을 잊어야 하듯이, 예술을 하려면 예술을 잊어야 한다. 그 대신 이 세상의 수많은 생명력의 원천들을 더듬어 봐야 한다. 고생이 되더라도 찬 바람 부는 대지에도 나가봐야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하고 만지기 싫은 돈도 만져야 한다. 그래서 절대적이었던 것이 상대적이 되고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되고 마구 자리가 뒤바뀌는 혼란을 겪은 후에야 어떤 것이 진정한 생명력인지 알게 될 것이다. 생명력이라는 것이 꼭 원초적인 것만 말 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에 목을 매고 있는 가련한 팔짜도 생명이기는 하다. 다만 째째하고 유한할 뿐이다.
더 이상 젊은이란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말은 차마 해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횟집 수족관 속의 광어에게 언젠가는 바다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과 같은 일이다. 수족관이 사방이 막혀 있어서가 아니라 양식산 광어는 바다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돌아갈 곳이 있다. 바로 자신의 가슴 속이다. 프로이트가 자아의 이타성을 말 한 이후로 사람들은 자기 가슴 속에 타인이 들어 앉아 있다고 믿고 분열된 자아를 부둥켜 안고 살아 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가슴을 믿지 않는 시대에 가슴을 회복해야 할 것 아닌가. 생명의 원천은 자기 가슴 속에 있는데 다들 바깥에서 찾으려고 했었다. 자기 가슴이 뛰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남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온갖 담론과 수사와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가슴을 씻어내고 자신의 떨리는 작은 소리를 들어봐라. 나를 구해달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큰 일은 그 다음 문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맞는 말이었다. 다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각 항목들을 가르고 지나가는 슬래쉬는 뚜렷한 단절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질이 급한 옛사람들은 몸을 닦으면 자연스레 집안이 다스려지고 그 다음엔 자연스레 나라가 다스려 지고 하는 식으로 자동으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슬래쉬를 넣고 보면 아무리 몸을 닦아도 가정이 저절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음 단계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뜻이 된다. 즉 자기 가슴의 소리를 들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왜 해결이 안 되는지 알게 되는 시작일 수도 있다. 아니면 멀리 있는 힘든 해결로 가는 아주 작은 첫 단계일 수도 있다. 문제는 해결까지 한 12000000 단계 쯤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근차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나아갔다고 만족하지 말고 어떻게 나아갈 수 있었는지 성찰해 가면서. 그래도 여전히 지평선은 열리지 않는다. 그게 세상이다. 애초부터 예술은 구원이 아니었다. 그런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려는 신참 예술가들에게
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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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창작과 기획>이라는 괴팍한 이름의 전공을 선택한 이들이 이제 2년을 마감한다. 그들은 그 짧은 햇수동안 현기증을 느끼며 동시대 시각예술의 최전선을 기웃거렸을 것이다. 말과 개념과 담론, 관찰, 조사, 보고, 토론, 관계 맺기 등이 주요한 작업의 공정이 되어버린 예술적 실천의 세계와 마주하고 당혹스럽고 또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낯선 세계에 입장한 엘리스처럼 열심히 사색하고 즐겁게 놀고 뛰어나게 토론하고 무엇보다 많은 글을 쓰며 지냈다. 2년이라는 시간은 그 모든 것을 터득하기에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은 단거리 경주 주자처럼 열심히 달렸다. 이제 그들은 숨이 턱에 찬 채 골인 지점에 이르렀고, 무언가를 세상에 내민다. 그것을 그저 그들의 2년의 배움을 통해 만들어낸, 흔히 부르는 이름대로 “졸(업)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째 인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경기도의 어느 산자락에 도착해 2년을 기식하며 자신을 재조립하였다. 그들은 동시대 예술과 합성된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이제 그들이 출정(出征)한다.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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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전시의 제목은 제법 의미심장하다. 독일 철학자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론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는 어구는, 이를 자신의 책 제목으로 택한 슬로베이나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덕에 제법 알려졌을 것이다. ‘부정’이라는 개념보다 더 철학적으로 골치 아픈 것도 없다. 하물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는 발상, 모순이나 대립을 감당하고 그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더욱 그럴 것이다. 이들이 과연 부정적인 것을 감당하고 그 속에서 세계의 이치를 판별하며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청춘이 미래라 말하고, 긍정의 정신을 부르짖는 세계에서, 부정적인 것을 생각과 행위의 배경 속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은 대단하고 또 신기한 일이다. 알고보면 부정은 상당히 쉬운 일이다. 싸이코패스도 세상을 부정하고, 테러리스트도 세상을 부정하고, 세상을 등진 배낭여행자도 세상을 부정하고, 이단적 컬트 종교에 목을 매는 이도 세상을 부정하고, 은둔형 덕후도 세상을 부정한다. 이런 이들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오늘 날에는 더욱 희귀하게) 예술가나 혁명가라는 위치에서 세상을 부정하는 이도 있다. 물론 그 모든 부정은 종류가 다르다. 그런 이들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문다. 부정을 가르는 기준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는 것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것 자체를 숭배하거나 거부하는 것인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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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처럼 풍문으로 수집한 자질구레한 소식들로 그날그날 세계의 모습을 짐작하고 낌새로서 세계를 인식하는 일을 대신해 버리게 된 오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문다는 것은 이런 짓이지 않을까. 시야로부터 사라진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세계를 움직이는 엔진이 돌아가는 비밀의 방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마침내 스위치를 내리는 것. 외환위기 키드들인 이들은 영화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아이들처럼 미쳐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태어났다. 그렇지만 그 세계의 광적인 질주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누군가 엔진의 브레이크를 밟을 것이다. 그 날까지 이들이 무사하기를 바란다. 지난 해 모락산 끝자락에 수북히 눈이 쌓일 때, 그들은 대자보를 걸고, 예술과 디자인을 공부하는 벗들에게 안녕하냐고 물었다. 이제 나는 이들이 안녕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제자들아, 안녕!
자세한 내용은 http://midahm.co.kr/?sd=1&sc=1_1_view&gnum=344
첫댓글 내 머리로 따라 잡기 힘든 글... / 나중에 다시한번 도전해 볼게요~~** 정보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