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의 천사도를 돌아보고, 김대중 대교를 통하여 다시 무안으로 나왔다. 계획대로라면 목포에 가서 유명 맛집을 찾기로 하였지만 하지가 멀지 않는 절기라선지 해는 아직 서산 마루에 걸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검색으로 찾아보았던 무안의 유명 사찰은 법천사였다. 아들도 아직 해가 많이 남았으니 아버지가 말하는 법천사에 들리자고 하였다.
법천사는 승달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산 이름에 스님이 의미인 ‘僧’자로 시작한다. 승달(僧達)은 스님이 깨우쳤다는 뜻이니, 법천사가 고찰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전설에 의하면 남북조시대 서역 금지국의(인도의) 승려 정명이 창건한 사찰이다. 경상도 지역의 창건설화는 거의가 신라시대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다. 남북조 시대라니, 백제 땅이라서 인가.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산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725년(성덕왕 24)에 서역 금지국(金地國)의 승려 정명(淨明)이 창건하였고, 1131년(인종 9)에서 1162년(의종 16) 사이에 원나라 임천사(臨川寺)의 승려 원명(圓明)이 중창하였다.
원나라 스님 원명은 이곳에다 초암을 짓고 수행하였는데, 그의 제자 500명이 찾아와서 크게 중창한 뒤 함께 달도(達道)하였으므로, 산 이름을 승달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뒤 1622년(현종 3)에 영욱(靈旭)이 중창하였으며, 1896년에 폐허화된 것을 1913년에 나주에 살던 효자 정병우(丁丙愚)가 조그마한 암자를 새로 건립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승려 활연(活然)이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거의 대부분이 임진-병자 양란을 겪은 후에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찰 중창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유물로는 약 2,000여 평의 사지와 입구의 장승 2기, 초석 10여 개, 석탑재 및 좌불파편 각 1점, 흙으로 만든 불두(佛頭) 1점 등이 있으며, 목우암(牧牛庵) 옆에 있는 부도들도 원래는 이 절의 부도전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부속암자로는 목우암이 있다.
법천사는 불교계에서 그다지 주목되지 못하였지만 고승(高僧) 연담 유일이 나타나서 절을 일으켜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승려인 蓮潭有一(1720-1799)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19세에 무안의 승달산 법천사에서 출가한 후 전남과 경남지방의 여러 사찰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보림사, 대흥사, 미황사 및 법천사 등 전남 지역의 여러 사찰에서 30여 년간 강의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숭달산 법천사를 찾아가는 길은 좁은 아스팔트 길이다. 아스팔트 포장을 뻬고는 우리가 어릴 적의 도로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거의가 걸어다녔다. 차들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갔지만, 어릴 때의 기억으로는 절을 찾는 좁은 길에서 차를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금이야 차를 자주 만난다. 비껴갈 때는 조심해야할 만큼 길이 좁다. 그러나 무안-목포는 영산강 하류 지역임으로 들이 넓고, 농시짓는 사람이 많다. 이곳의 민중들이 아픈 마음을 여기에 와서 달랬으리라.
오늘이 초파일인데도, 불교의 가장 큰 잔칫날이라는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름 없는 사찰에 평일 날에 들렸을 때의 절 분위기이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하다. 연등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법당 채는 조금 낡아 보인다. 오전에 원법사를 들려서인지, 고요한 절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인다.
법천사로 오르는 중에, 목우암과 갈리는 삼거리 길을 거쳐왔다. 그곳에 석장승이 서 있었다. 장승이 원래 절의 영역을 나타내는 표지석 역할도 한다 하니, 절집 부근에서 돌장승을 만났다고 하여 신기한 모습일리는 없다. 그래도 경상도 사찰에서 보기 힘든다. 목우암은 법천사의 부속 암자이지만, 전설이나 유물을 보면 어느 절이 더 본사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아마도 법천사보다 더 높은 곳인지 길이 더 가파르고, 험하다.
이 목우암은 원나라 승려 원명이 초암을 짓고 살았던 곳이라 하고, 또 인도승 정명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나는 창건 설화를 액면대로 믿지 않으니 정명이건, 원명이건 문제삼을 일이 없다. 전해오는 말로는 원명스님의 꿈에 백운산에 있는 소 한 마리가 나와서 이 암자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스님이 이상히 여겨서 따라가 보았더니 계곡의 바위에 소의 발작국이 찍혀 있었다.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이 암자를 지었다고 하였다.
현재 대웅전과 축성각(祝聖閣)·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법당 앞에는 1681년 조성한 석등이 있다. 나는 절집을 찾아가면 산신각에 관심을 가진다. 산신각은 토속신앙의 흔적이다. 절의 부속 전각으로 산신각이 빠진 곳은 거의 보지 못했다. 독성각이나, 삼성각이라는 전각이 대신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 목우암은 축성각(祝聖閣)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그 뜻을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명을 보니 산신령도 모셨다고 하였다.
축성각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 인조 때 중창하면서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본존불 외 24구의 나한상을 봉안한 나한전과 산신당의 2칸으로 나뉘어 있다. 산신각이 없는 이유가 축성각 안에 산신령을 모셨나 보다.
목우암에서도 법천사처럼 오랜 풍상을 겪느라 고달픈 행색이 역력하다. 제대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본사인 법천사가 폐사 지경에 이르자 법천사 유물을 이곳으로 옮겨서 보관하였다 한다.
지금의 유물로는 아미타불과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을 모셨으니, 이 법당의 현판이 극락전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법당 건물이 절집같지 않고 민가 같아서 특이했다. 더욱이 측면은 양반가의 집모습이다. 여기는 목우당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이런저런 것들을 종합하여, 엷게 먹물이 베여있는 내 머리는 ‘목우’의 개념이 선불교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불교가 유행함에 따라 선불교도 수용하고, 아미타도 수용하고---살기 바쁜 민중들이야 어느 부처님인들 어떠하리.
법천사와 목우당이 갈리는 길에 서 있는 돌장승도 같은 이유리라. 어쨌거나 돌장승은 우리의 민간신앙이다. 불교에서는 사찰 영내를 경계짓는 표지판이고, 사찰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지만, 절집을 찾는 민중들이야 그냥 손을 마주잡고 소원을 비는 신령님일 뿐일게다. 부처님이면 어떠하고, 신령님이면 어떠리.
날이 어두워지려 한다. 아들은 목포의 맛집에 들려 저녁식사를 하잖다. 시내로 들어서니 하늘은 보이지 않고 자동차 불빛이 길을 밝힌다. ‘덕자 회,찜’ 집이 유명하다 하여 들렸지만, 나는 그냥 배만 채우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