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환생하면 기억을 잃어버린대.
나... 널 잊는 게 너무 두려워.
너와 있었던 이 아름다운 추억들을 잊는 것이 두려워.
환생해서 널 만나도 널 알아보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하지 마. 내가 찾을 거니까... 넌 기억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
반드시 내가 찾아낼게. 그러니까 넌 내 남은 수명이 다하기 전에
반드시 다시 태어나라. 그래서 우리 다시 한 번 사랑하자.
지금의 사랑은 너무 짧았으니까...."
해월동화(海月童話)
- 달의 이야기 -
1화
"늦었네."
"응. 길이 막혀서..."
"뭐 먹을래?"
"아무거나..."
"그래."
3시간이나 늦었음에도 유신은 나의 지각을 탓하지 않는다.
그저 메뉴를 펼치고 나와 자기의 점심 식사를 정할 뿐이다.
내가 늦은 탓에 점심 시간은 한참 지나서 거의 저녁 시간이 되어버렸지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든다. 내가 잘못한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냥 앉아서 유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왁스를 발라 살짝 흐트러뜨린 머리카락.
오늘은 특별히 더 신경을 쓴 모양이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정성이 묻어난다.
오똑한 코라던가, 쌍거풀이 있음에도 꽤나 남자답게 생긴 눈 때문에 유신은 꽤나 인기가 많다.
그런데도 나랑 사귀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난 감정이 없는 듯 이렇게 무미건조한데...
3년 전의 오늘.
난 유신과 사귀게 되었다.
그 때, 유신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넌 웃으면 참 예쁠 거야. 내가 너에게 미소를 선물할 기회를 줄래?"
다른 녀석들과는 다른 프로포즈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웃는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3년 간.
유신은 다른 여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남자들은 활달하고 감정 표현을 잘 하는 여자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아무리 예뻐도 처음만 그럴 뿐, 성격이 별로면 질려서 떠나간다고 한다.
하지만 유신은 그러지 않았다.
호감가게 생긴 탓에 주위에 자꾸 몰려들어 예쁘게 웃는 여자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나에게만 다정하다.
고맙다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샐러드랑 해물 올리브 스파게티를 시켰어. 너 해물 스파게티 좋아하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뜨거운 열기를 토하던 한낮의 해가 한풀 꺾인 시간이라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그래도 덥긴 더운지 부채, 또는 그 대용품을 하나씩 손에 들고 펄럭거리며 걸어다닌다.
'저렇게 더우면 나오지 말지.'라는 생각이 든다.
건조하다.
장마철이 막 지난 습도 높은 날씨임에도 난 건조하다고 느낀다.
이상한 일이다.
어떤 것도 날 적셔주지 못한다.
메마른 눈동자, 메마른 웃음소리, 메마른 대화, 메마른 마음.
나와 나의 주위를 둘러싼 것들은 전부 메말라있다.
메마름의 근원은 나일지도 모르겠다.
다들 자기들의 삶을 즐거워하고 촉촉하다고 여기지만 난 내 삶이 젖어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부족하다.
[2% 부족할 때]라는 광고가 있던가?
난 지금 100% 부족하다.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가 전부 다 으스러질 것만 같은 기분이다.
세상도, 나도 메말라있다.
사막 속에 들어온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유신은 굳이 내게 말을 걸진 않는다.
내게 하고픈 말이 산더미만큼 많겠지만 그래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유신의 성격이다. 남을 귀찮게 하질 않는다.
난 유신의 그런 성격이 마음에 든다.
누군가가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은 딱 질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유신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귀찮게 해주고, 자기 일에 간섭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부류의 사람들이다.
시킨 음식이 나왔다.
해물과 올리브 기름으로 만든 스파게티가 맛있어 보이도록 꾸며져서 나왔지만, 그다지 식욕이 돌지는 않는다.
그저 어디 시원한 물에 들어가 자꾸 빠져나가는 수분을 채우고 싶은 마음뿐이다.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다.
온몸의 수분이 전부 사라져버려서...
난 뭔가 마시기라도 하자는 생각에 앞에 놓인 콜라를 집어 빨대를 내려놓고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만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몸의 갈증이 아니라 영혼에의 갈증이다.
무엇이 날 이렇게 목마르게 하는가.
"수영 동호회에 들어볼래? 여름이고 하니까..."
"수영 동호회?"
"응.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수영장에도 가고, 강이나 바다에도 가고
그러는 모양이더라. 요샌 여름 방학이고 해서 자주 모이는 것 같던데...
어차피 집에 있어봐야 에어컨 비용만 잔뜩 나오고 심심하잖아."
수영이라...
수영을 본격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다.
흔하디 흔한 수영장에 가서 딱 달라붙은 수영복을 입고 남자들의 시선을 받아본 적도 없다.
물이 좋지만 다가갈 수 없다. 물을 사랑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냥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무척이나 아픈 기분이 들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섣불리 물에 다가갈 수 없다.
그 때문에 나의 삶이 건조한 걸까?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한 번쯤은 유신의 기분이 맞춰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유신이 나의 기분에 맞춰줬으니까...
"그래. 그러자."
내 허락이 오아시스처럼 느껴지는지, 유신은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기쁨으로 인해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아졌다.
나의 이런 작은 행위가 기쁨이 될 만큼 유신에게 못 했던 건가?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겸, 저녁을 먹은 후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유신은 새로운 영화가 나올 때마다 나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간다.
유신과 사귀기 시작한 3년 전부터 지금까지 안 본 영화가 하나도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이라던지, 우정이라던지, 정의라던지...
그런 것을 찾는 진부한 영화는 싫다.
그렇다고 아무나 닥치는대로 죽이는 잔혹한 장면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내보여
인간의 공포감과 잔혹성을 자극하는 공포 영화가 좋은 것도 아니다.
웃기지도 않는 코믹 영화도 싫고, 모르는 것으로부터 뭔가를 알아내려는 미스테리 영화도 싫다.
그냥 영화 자체가 싫다.
영화 속의 이들은 늘 뭔가를 갈구한다.
사랑을, 우정을, 정의를, 평화를, 진리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것이 가까이에 있는데도 찾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이,
물이 곁에 있음에도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서 싫다.
영화 속의 어리석은 등장인물들은 나의 투영이다.
영화를 만든 자의 투영이 아닌, 나의 투영이다.
"이번에 두 개가 한꺼번에 개봉했네. 전쟁 영화랑 그냥 로맨스 코믹 영화다. 어떤 거로 볼래?"
"아무거나..."
"흐음..."
턱을 문지르며 포스터를 주의 깊게 살피던 유신은 결국 전쟁 영화로 결정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나머지 영화를 볼 거면서, 하루 빨리 보고 늦게 보는 것이 뭐가 대단한 거라고
이렇게 신중을 기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영화관엔 사람이 많았다.
보러 들어오는 사람, 보고 나가는 사람의 물결에 쓸려 내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 음료수를 뽑아들고 비어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멀거니 쳐다봤다.
옆에서 유신이 "영화가 재미있을까?"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별로 상관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라도 내게는 감명을 주지 못하니까...
물론 재미없는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남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영화가 보기 쉽기는 하다.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철학적인 부분을 담은 영화는 불편한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시간을
두, 세 배는 더 길게 느껴지게 한다.
주변의 사람들은 곧 보게 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다.
옆의 여자가 남자친구의 팔을 치며 깔깔대고 웃는다.
뭐가 저리도 즐거운 걸까?
단순히 남자친구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저렇게 즐거운 걸까?
무의미한 대화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그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의미 깊은 대화를 나누어도, 난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즐거움도, 고뇌도, 괴로움도...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갈증. 오직 갈증뿐이다.
그 이상의 감정은 내겐 사치다.
영화가 시작되기까지 15분 가량이 남았다.
이제 5분만 지나면 영화관 안으로 입장을 한다.
그리고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커다란 스크린을 쳐다보며,
한 손으론 팝콘을 먹고, 불편한 의자에서 몸을 틀며 2시간 정도의 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시끄럽고 잔혹하며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살려주는 주제의 전쟁 영화라면
조금쯤 시간이 빨리 갈지도 모르겠다.
"서진아. 팝콘 먹을래?"
"마음대로..."
"아... 나쵸도 있다. 나쵸로 할까?"
"뭐든..."
"콜라, 사이다?"
"상관없어."
유신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팝콘과 음료수를 사러 갔다.
키가 크고 보기 좋게 차려입은 유신이 움직이자, 영화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유신에게로 쏠린다.
그리고 그들은 자리에 앉아 유신을 기다리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유신 같은 남자를 잡은 행운의 여자는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인간들의 호기심이란 이렇다.
자기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관심을 보인다.
난 그게 싫다.
그런 관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유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유신은 매점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흘끔흘끔 유신에게 눈길을 주지만 유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저런 시선들에 익숙해진 거겠지.
인간은 적응 능력이 있어서 한 가지 자극을 오랫동안 받으면 익숙해진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난 태어날 때부터 이어지는 이 갈증에 익숙해질 수가 없다.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난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유신에게서 눈을 돌리다가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대체 왜....? 왜 이런...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이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심한 압박이 심장 부근에 느껴진다.
어떤 기분인지 설명할 수 없다.
그냥... 슬프고... 슬프고... 슬프고... 안타깝고... 그리고..........
그냥 남자였다.
평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바다를 떠오르게 만드는 청녹빛 머리카락과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인 남자다.
아주 아름답고 신선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는 흰 살결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영화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 역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늘색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해초처럼 아름다운 자태.
두 커플의 모습은 천상에서 내려온 선남, 선녀인 것처럼 시리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난....
그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바다가 떠오르게 만드는 그 남자에게서....
목이 마르다.
미칠 듯이 목이 마르다.
지금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몸이 산산히 부스러져 죽어버릴 것만 같다.
나의 영혼까지도 말라서 죽을 것 같다.
이 갈증. 괴로운 갈증이 날 미치게 만든다.
그에게서 눈을 떼야만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나의 뇌를 자극했지만
나의 몸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나의 시신경은 그를 담아야만 한다고 외치고 있고, 내 목의 근육과 뼈는 그를 향해 내 얼굴을
단단히 고정시킨 채 놓아주질 않는다.
난 그렇게 동상처럼 앉아 그를 응시하는 수밖에 없다.
내 영혼의 수분까지도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그를 응시하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상태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산산히 조각이 나서....
가루처럼 으스러져서....
단지 갈증 때문에....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해월동화(海月童話)
- 바다와 달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
2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돌리지 마라. 돌리지 마라. 돌리지 마라. 돌리지 마라. 제발 고개를 돌리지 마라.
너의 눈동자를 내게 보이지 마라. 절대로 보이지 마라. 보이지 마라. 보이지 마라.
너의 눈동자를... 내게 보이지 마라... 절대로...
그에게 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속으로 주문을 왼다.
혹시라도 이 주문이 우연찮게 들어맞지 않을까 생각하며 계속해서 주문을 왼다.
두려움. 두려움이다.
그의 눈동자를 보게 되면... 내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이 느껴져서 그의 눈동자를 보고 싶지 않다.
아니, 보고 싶다.
사실 미치도록 그의 눈동자를 원한다.
어째서 이렇게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눈동자를 보고 싶다.
하지만 보면 안 된다.
보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다.
커다란 두려움이 나의 욕망을 거세게 누르고 있다.
그의 눈동자를 보고자 하는 나의 욕망을.........
감정의 기폭이 심하다는 걸 느낀다.
그를 본 그 순간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목소리조차 닿지 않을 그를 본 순간부터
메말라 있던 나의 정서가 젖어드는 느낌이다.
두려움과 욕망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갈증은 여전하다.
이 미칠 듯한 갈증은 여전히 날 건조하게 만든다.
아니, 건조해서 갈증이 나는 것일까?
그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내게 다가왔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그의 청녹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파도.... 그래. 파도다.
은은한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파도처럼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아름다워서 가슴이 시린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묘한 압박감이 점점 심해진다.
나의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아름다움에 눌려서.......
눈...
그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아름답다.
너무나 아름답다.
존재하는구나.
저리도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구나.
존재할 수도 있는 거구나.
청녹빛 맑은 바다를 지닌 눈동자가 날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난 더 커다란 갈증을 느낀다.
역시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눈과 마주치면 내 몸 안의 모든 수분이 증발해서 난 죽어버린다.
그는 내 수분을 가져간다.
내 몸에 얼마 남지 않은 아주 적은 촉촉함을 가져가 버린다.
말라간다. 나의 몸이 말라간다.
이제 곧 부스러져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누군가 날 건드리기만 해도 내 몸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릴 것이다.
무시무시한 갈증.
그 갈증에 괴로워하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 역시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아름다운 청녹빛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담고 있다.
그 눈동자 안에 잠긴 나는 헤엄을 친다.
난 이렇듯 갈증을 느끼고 있는데, 그의 눈동자 안에 담긴 나는 바닷물에 몸을 담고 있다.
우습게도 난 나를 질투한다.
그의 눈동자 안에 담긴 나를 질투한다.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진다.
얇은 입술이 벌어지며 내게 무언가 말을 하려 한다.
듣고 싶지 않다. 듣고 싶지만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 눈이 그러하듯 나의 귀도 나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감각을 세우고, 그의 음성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린다.
그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건만, 이 시끄러운 잡음 속에서 가느다란 한 줄기의 소리만 있어도
그의 목소리를 잡아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들어서는 안 된다.
"서진아?"
유신의 손이 나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난 으스러지겠구나.
수분이 모두 날아간 나의 몸은 이제 먼지가 되어 흩어지겠구나.
두 눈을 질끈 감고 내 몸이 흐트러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눈과 떨어지자 내 몸을 정상으로 돌아온다.
적당한 갈증과 적당한 메마름. 보통의 나로 돌아온다.
죽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데도 내 눈은 그를 찾는다.
그를 찾아, 그를 담으면 또 다시 미칠 듯한 갈증을 느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내 눈은 그를 찾는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모두 나의 명령을 거부한다.
나의 몸은.... 그를 원한다.
날 건조하게 만드는 그를........
"왜 그래, 서진아? 무슨 일 있었어?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거야?"
그는 없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바닷물 같은 청녹빛의 머리카락.
어디에 있더라도 발견할 수 있는 그 색을 찾을 수 없다.
난 환상을 본 것일까?
건조하고 메마른 나에게 환상이 보여진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는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그는 없다.
대체... 어디에 있을까?
"서진아?"
중독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몇 초 되지 않는 그 시간동안 나의 온몸이 그에게 중독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이리도 갈급하다.
그를 잠시 보지 않았음에 이렇게 안절부절 못 하는 기분이 된다.
어째서일까? 난 왜 이리도 그를 원하는 것일까?
수많은 의문 부호들이 날 괴롭힌다.
갈증과 더불어 의문이 몰려온다.
내게 필요한 것은 수분인데, 날 채운 것은 의문이다.
그를 향한 나의 감정의 의문, 그를 봤을 때 내 가슴을 짓누르던 압박감에 대한 의문,
그를 원하는 나의 눈과 귀에 대한 의문, 그를 구하는 나의 몸에 대한 의문,
그러면서도 그를 거부하는 나의 두려움에 대한 의문....
그 의문들이 날 채운다.
지금 내 몸은 의문 투성이다.
"서진아. 너 괜찮은 거야?"
숨을 쉴 수 없을 만큼의 의문 부호가 날 짓눌러 그 밑에 깔리고 말았다.
숨이 막힌다. 숨을 쉴 수 없다.
갈증 때문이 아닌 호흡 곤란으로 죽으려는 모양이다.
"서진아!"
"흐읍!!"
순간 내 팔을 거칠게 흔드는 유신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콜록, 콜록, 콜록!!"
갑자기 내 폐로 밀려들어오는 공기의 자극에 폐가 경련을 일으킨다.
난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유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등을 두드려줬다.
심한 경력에 목에서 "걱걱"거리는 소리까지 들린다.
기침을 할 때마다 입에서 튀어나가는 몇 방울의 침...
내 몸은 수분을 거부한다.
난 이리도 갈증에 괴로워하는데, 내 몸은 물을 밀어낸다.
"으휴...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숨도 못 쉬고 있었던 거야? 괜찮은 거야?"
조금 진정이 되어, 간간이 기침을 할 때쯤 유신이 걱정스레 물었다.
유신이 앉아있던 자리엔 팝콘과 콜라가 놓여있고, 유신은 내 앞에 한 쪽 무릎을 살짝 굽힌 자세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나의 등을 두드려주기 위해 내 옆에 서 있었으리라.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쳐다보고 지나간다.
웬 여자가 미친 듯이 기침을 하는 모습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분위기 있는 남자도
그들의 시선을 잡아두기엔 충분하다.
난 한 손으로 유신의 어깨를 밀어냈다.
유신은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괜찮아. 난...."
"정말 괜찮은 거야?"
"응. 영화나 보러 들어가자."
"괜찮겠어?"
유신의 표정이 못내 걱정스럽다.
유신은 나의 몸을 자기 몸보다 더 걱정한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과민할 정도로 반응을 해서 가끔은 부담스럽다.
지금 그 부담스러운 시선이 날 향하고 있다.
"응. 괜찮아."
영화관에 들어가 앉았다.
유명한 영화인지 빈 좌석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속닥거리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내 옆에 앉은 여자는 아주 빠른 속도로 팝콘을 먹는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다 먹어버리겠다는 듯이.....
영화가 시작됐다.
처음부터 아주 강렬하게 시작된다.
시끄러운 총 소리와 폭발 소리, 낭자한 선혈....
소리와 색채, 모든 것이 자극적이지만 난 아무런 감흥이 없다. 늘 그렇듯....
아니, 오늘은 좀 다르다.
한 가지 감흥.
청녹빛 머리카락의 그... 그의 모습이 떠나질 않는다.
내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커다란 스크린 위에 그의 모습이 떠올라 영화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스크린 위에 펼쳐진 그의 청녹빛 머리카락은 아름답다.
넓은 바다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난 마치 실제로 그를 보듯 스크린을 응시한다.
옆에서 집중하여 영화를 보고 있는 유신의 존재는 잊은지 오래다.
내 머릿속을 빽빽이 매우고 있는 것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청녹빛 머리카락의 그이다.
다시 한 번 그를 볼 수 있다면...
내 눈에 그를 담을 수 있다면...
역시 그는 마약이다.
심하게 중독이 된 모양이다.
난 지금... 내 몸이 말라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한 번 더 보고 싶어한다. 그를 원한다.
미치겠다.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에게 속하고 싶다.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해월동화(海月童話)
- 바다와 달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
3화
덥다.
하늘이 뚫린 듯 내리던 비는 수많은 침수 피해를 남기고 의기양양했던 기세를 접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더위가 몰려왔다.
살인 더위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날씨다.
더워서 온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다.
사람들은 인상을 찡그리고 걸어다닌다.
이 더운 날씨가 그들의 모든 감각 기관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모양이다.
이 여름을 나는 사람들에게 기쁨은 없다. 그저 짜증뿐이다.
더워서 짜증이 나고, 짜증을 내는 사람들의 표정에 다시 한 번 짜증이 난다.
오랜만에 일찍 준비를 하고 약속 장소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유신이 먼저 와 있다.
약속 시간이 되기 훨씬 전인데도 유신은 이미 나와있었다.
내가 유신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나오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유신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늘 바르고 다니는 왁스를 바르지 않아 아래로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였다.
유신의 옆에 서 있는 여자가 유신을 곁눈질로 쳐다본다.
그녀의 옆엔 남자친구가 서 있음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이렇다.
"난 너의 본질을 좋아해. 네 얼굴이나 능력, 돈 때문에 널 좋아하는 게 아냐.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잘 생겨도,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네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이런 말로 보기 좋고, 듣기 좋게 치장하지만, 결국 그보다 잘 생기거나 능력이 좋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 나타나면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너무나 유동적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
쉽게 변하는 봄철의 날씨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심심풀이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만 의미가 있지,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사랑을 하며 나타나는 몇 가지의 행위들...
이별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던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런저런 이벤트를 준비한다던가
하는 것들은 사랑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면 따라오는 몇 가지의 옵션일 뿐이다.
그냥 유신의 옆으로 다가가 가만히 서 있었다.
수영 동호회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하긴 하지만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고,
설령 약속 시간이 코앞이라 하더라도 신중한 표정으로 신문을 읽는 유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유신의 옆쪽에서 유신을 흘끔흘끔 쳐다보던 여자가 경계를 띤 눈을 내게 돌렸다.
난 여자를 무시했다. 그녀는 나와 유신의 관계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녀에게 뭐라뭐라 말하는 것이 들려왔지만 그 내용을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남의 일에 전부 관심을 갖는 바보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높은 톤의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생긴 것답지 않게 날카로운 음성이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데?"
날 향한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남자친구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커다란 목소리로 말할 줄 몰랐는지, 그녀의 남자친구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거리를 지나가던, 누군가를 기다리던, 무언가를 구경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거리를 시끄럽게 만든 커플에게로 쏠린다.
더운 여름을 깨뜨리는 불협화음처럼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뭘 어쨌다는 게 아니라......"
그녀의 남자친구가 순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다.
아마도 이 더운 날씨가 그녀의 짜증을 더욱 크게 만든 모양이다.
"아니긴 뭐가 아냐!! 네가 날 바람이라도 핀 걸로 몰아붙였잖아!
잠깐 딴데로 눈을 돌린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전부 너만 쳐다봐야 되는 거야?
너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애였니? 응?"
싸우는 이유 따위엔 관심이 없었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게다가 내 바로 옆이어서 어쩔 수 없이 전부 들어버렸다.
그녀가 유신을 쳐다본 것 때문에 이런 싸움이 일어난 모양이다.
웃기는 일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유신에게 은근한 눈길을 줬으면서 남자친구가 뭐라 한다고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한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라는 것이 이럴 때 쓰이는 말인 모양이다.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화를 낼 상황도 아닌데
예민하게 반응하는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거다. 사랑이라는 건... 이런 거짓으로 똘똘 뭉친 관계를 사랑이라 하는 거다.
남자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반 농담식으로 한 말에 여자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을 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어떻게라도 그 안에 비집고 들어가 숨어버릴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자기들도 이런 일이 닥치면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할거면서 지금 그렇지 않다고 남을 비웃는다.
마치 자기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나도 웃었다.
그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구경하는 똑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웃겨서....
여자가 흰 눈동자를 드러내며 날 째려본다.
난 가만히 여자의 시선을 받았다.
자기의 시선에 당황하지 않는 나의 모습에 더욱 심사가 뒤틀리는 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왜 남의 일에 그렇게 실실 쪼개고 그러는 거예요?"
".........."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를 해야지요! 그렇게 개념이 없어서야.... 남의 대화나 엿듣고..."
"그것보다는......"
이런 막무가내 꽉 막힌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해봐야 나만 지친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입을 열고 만다.
"남들에게 사적인 대화가 들리도록 싸워대는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뭐, 뭐라구욧? 누, 누, 누가 그랬다는 거예욧!! 괜히 남자 옆에 서서 남자 얼굴이나 기웃거리는 주제에!!!"
"나야 내 남자친구라서 그런다고 쳐도... 상관없는 남자에게 관심을 보인 당신은 어떤 주제인 건가요?"
"그게 무슨... 당신이 이 남자 애인이라구요?"
"지금 대화의 주제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거짓말이니까 말을 돌리는군요! 정말 별꼴이야."
"난....."
"아, 서진아."
내 목소리를 끊고 유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신의 커다란 손이 나의 어깨 위에 다정하게 놓이자 그걸 지켜보는 여자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해간다.
그녀는 자기가 지금까지 관심을 가진 남자가 나와 다정한 사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녀는 이것 보라는 듯이 자기의 남자친구를 찾았지만, 그녀의 남자친구는 화가 나서 이미 떠나버린 후였다.
무슨 일인지 구경하는 구경꾼들 틈에서 그녀는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하늘의 태양보다도 더 빨갛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이 날 덥게 만든다. 숨이 막힌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자기 때문에 이렇게 소란스러워진 것인데도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나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는...
자기의 관심사가 아니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찌 보면 상당히 편리한 성격이다. 이런 성격이 아니었더라면 아까의 싸움에 끼어들어야 했을지도 모르니까......
"별 일 아냐."
"언제 왔어?"
"방금..."
"무슨... 싸움이라도 난 거야?"
유신이 주먹을 꽉 쥐고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렇게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아니, 그런 거 아냐."
"남자친구 앞이라고 착한 척 하는 모양이지요?"
여자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날 어떻게 말하던 상관없지만 저 째지는 듯한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저 목소리가 내 삶에 균열을 가지고 올 것만 같다.
내 어깨에 올린 유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실례지만... 말씀을 좀 막 하시는 것 같군요."
유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땅에 깔리는 듯한 목소리. 이런 목소리일 때의 유신은 화가 났다는 거다.
나와 사귀는 3년 간, 유신의 목소리가 낮아지는 적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못 보고 넘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없는 곳에서의 유신이 어떤 모습일지는 나도 알지 못 하니까...
여자는 유신까지 나서자 인상을 찌푸리며 유신과 나를 한 번씩 노려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그제야 사람들도 웅성대며 자기 갈 길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웃기는 여자네. 왜 저러는 거야?"
".........."
난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유신이 다급히 나의 걸음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기분 괜찮은 거야?"
".............."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흐음... 기분 안 좋으면 기분 전환 할만한 다른 곳으로 가도 되는데..."
"아니... 괜찮아. 내가 기분 나빠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그 여자 혼자서 난리를 친 거니까..."
"그래. 그럼 다행이고...."
".........."
"수영 동호회 카페에 한 번도 안 들어와 봤지?"
"응."
"가입이라도 해놓지 그랬어."
"......."
"난 가입했는데... 다들 되게 괜찮은 사람들 같더라. 농담도 잘 통하고, 성격들도 괜찮은 것 같고..."
"인터넷상에서의 성격이 자기 성격과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하. 하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까?"
"네가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어떤 표정을 하고 너와 채팅을 했을지 모르는 일이잖아."
"에이, 에이..."
유신이 예의 그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렇다고 썩 좋은 기분도 아니다.
약간쯤은 괜찮다고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 가끔 유신이 이렇게 내 볼을 만져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래. 내가 그것을 원하는 모양이다.
유신은 웃을 때 눈이 가느다랗게 변한다.
쌍거풀이 있어서 커다란 눈이 가느다랗게 접히는 것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웃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유신을 사랑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난 유신이 웃는 것을 보는 게 좋다.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세상이 재미없잖아. 좀 더 즐겁게 생각해보자구."
"......."
"표정 좀 풀고... 이래봬도 이 동호회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수영 동호회야.
인원도 많고, 관리도 잘 되고, 친목 도모도 아주 잘 된다고 하더라. 잘 알아보고 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별로 걱정이 되는 건 없다.
난 유신처럼 인간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만난 사람들이 최악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별 상관없다.
단지 약간 귀찮을 뿐이다.
새로운 만남을 갖게 되면 그들은 내게 학교를 물어보고, 과를 물어보고,
자기들이 궁금하지도 않은 나의 장래희망과 앞으로의 계획, 내가 사는 곳, 나의 취미, 특기,
좋아하는 것.... 그런 것들을 예의 상 물어와 날 귀찮게 만든다.
차라리 아무 것도 묻지 않느니만 못 하다.
관심이 없으면서도 관심이 있는 척, 지겨우면서도 즐거운 척...
그게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
난 그런 가식적인 관계가 싫다. 그래서 새로운 만남이 싫다.
"서진아. 넌 인어의 존재를 믿어?"
말없이 걸어가는 것이 무료했던지 유신이 입을 열었다.
혼잡한 거리에서 유신의 목소리만이 내 청각을 자극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냥... 아까 집에서 인터넷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어디였더라... 아무튼 유럽 어디에서
인어가 잡혔다는 기사가 실렸더라고.... 사람들은 그거 다 주목받기 위한 거짓 기사라고 악플을 달고,
어떤 사람들은 설마 거짓말을 썼겠느냐고 리플을 달고... 넌 어떻게 생각해?"
"뻔하잖아."
인어 따윈 없다.
이 세상의 공상적인 모든 것들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상일 뿐이다.
삭막하고 메마른 세상을 약간이나마 적셔주기 위한 이슬비 같은 하나의 즐거움.
인어, 요정, 피터팬, 슈퍼맨, 신, 귀신...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되지 못한 초월적 존재를 그리며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난 그런 것들을 믿지 않는다.
"그런 건 다 거짓말이야. 그런 식으로 자기네 나라를 홍보하고 관광지로서 한 발 나아가려는 수작이지."
"후후. 그럴까?"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없잖아. 좀 더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은 정온 동물(기온과 관계없이 일정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동물)인데,
어류는 변온 동물(바깥의 온도에 의하여 체온이 변하는 동물)이야.
인간과 어류가 한 몸이 된다면 그들의 체온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거지?
인간과 어류는 한 몸으로 살아갈 수 없어."
"흐음... 그건 너무 삭막하다. 살아갈 수 없음에도 살아가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신비한 기적이잖아."
"난...."
난 기적을 믿지 않는다.
온갖 신비한 것들과 더불어 기적 또한 믿지 않는다.
그것 역시 삶에 찌든 사람들이 만들어낸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허상에 불과하다.
난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난 현실만을 믿는다. 내 눈 앞에 닥친 현실...
"기적을 믿지 않아."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어떤 신기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것은 어떤 일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하나의 결과일 뿐,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수영 동호회의 약속 장소에 발을 디디는 순간, 아니, 그 곳에서 청녹빛 바다를 발견하는 순간...
난 기적을 경험했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바다를 가득 담은 그가........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해월동화(海月童話)
- 바다와 달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
4화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바다를 가득 담은 그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다.
그의 옆에 자리잡은 하늘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청녹빛의 바다뿐이었다.
잔잔한 파도를 담고 있는 바다.
기적의 바다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난 걸을 수 없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러했듯이 난 움직이지 못 했다.
숨조차도 쉴 수 없었다.
나의 폐는 활동을 멈추었고, 나의 심장은 크게 부풀어갔으며, 나의 뇌는 그에게서 떨어져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고,
나의 몸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했다.
그에게 다가갈수록 난 점점 더 건조해져감에도 불구하고.......
"서진아. 저쪽에 앉은 사람들이 우리 수영 동호회 사람들이야. 사진으로 봤었거든."
유신의 손가락이 그를 가리킨다.
아니,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나의 눈엔 그만이 보인다.
청녹색의 바다만이 나의 눈에 가득 찬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
그는 여전히 하늘과 함께 내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그제야 나의 눈에 하늘의 존재가 들어온다.
저이는 누구인가.
그의 곁에 저리도 다정하게 딱 달라붙어 앉은 저 하늘빛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인가.
대체 왜 지금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을 시기하지 않던 내가,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외모를 이리도 질투하는가.
속된 속물들처럼 외모를 이리도 시기하는가. 부러워하는가.
주먹을 꽉 쥐었다.
달아나고 싶지만 달아날 순 없었다.
내 온몸의 세포가 그를 향해 걸어가라고, 가서 그를 포옹하라고 울부짖는 이상
도망갈 수는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몸이 그를 이리도 사랑한다면, 그를 이리도 원한다면
원대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나의 뇌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를 알지 못한다.
그는 그저 청녹빛 바다와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남자일 뿐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유신이 눈치를 챈 모양이다.
내 눈이 그를 향하고 있음을... 그를 향한 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그리고 내 몸이 그에게 달려가 안기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유신의 크고 따뜻한 손이 나의 손을 감싸쥐었다.
난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3년 간의 익숙한 손길.
그 손길이 나의 격동하는 심장을 조금씩 달래주었다.
저 바다와도 같은 남자가 내게 흥분제라면, 유신은 내게 진정제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나의 진정제.
"괜찮아, 서진아?"
"그래. 괜찮아. 난..."
괜찮지 않다. 괜찮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의 뇌는 이성을 되찾아감에도 나의 몸은 이성을 찾지 못한다.
내 몸은 너무도 저 푸른 빛 바다에 안기고 싶어한다.
바다 한가운데에 표류되었을 때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은 굶주림이 아니라 갈증이다.
바닷물을 마시면 더 큰 갈증을 느끼며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순간의 갈증을 견뎌내기 위해 바다의 짠물을 들이키고 목숨을 잃는다.
지금 나의 몸이 그런 무모한 시도를 감행하려 한다.
내 몸은 그에게 안기면 갈증으로 메말라 죽을 거란 걸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안기지 못하는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그에게 안기려고 한다.
이성이 지배하기 어려운 순간이다.
그에게...
안기고 싶다.
"괜찮아."
침을 삼켰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에 침을 축인다.
넘어가는 침도 없을 만큼 마른 상황에서 나의 입술을 적셔주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난 이 순간 날 적셔줄 무엇인가를 갈망한다.
고개를 돌려 유신을 올려다봤다.
유신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지켜보고 있었다.
저 신중하면서도 따스한 눈빛.
이제는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저 눈빛.
팔을 뻗어 유신의 목에 휘감았다.
유신의 향기가 짙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향기는 날 기절시킬 듯 강하지는 않다.
그저 익숙하고 편안한 유신의 향기일 뿐이다.
난 유신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부벼댔다.
나의 마른 입술이 유신의 촉촉한 입술에 닿아 그의 수분을 앗아갔다.
처음엔 당황한 듯 하던 유신은 나에게 자기의 수분을 빼앗기면서도 강한 팔로 나의 허리를 감아
천천히, 천천히 나의 입술을 적셔줬다.
유신의 젖은 혀가 나의 마른 입술을 적시고, 조심스레 안으로 밀고 들어와
말라버린 나의 혀를 적셔준다.
유신은 내게 오아시스다. 유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날 적셔준다.
유신이 있기에 난 마르지 않는다. 건조에 지쳐 스러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오랜 시간 함께할 사람들도 아니고, 그들의 시선이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난 지금 이 순간을 느낀다. 유신의 입술이 나의 입술과 맞닿아 있는 이 순간..
유신의 따뜻한 입술을 느낄 뿐이다.
유신의 키스는 언제나 다정하다.
내가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위태로운 아이스크림이라는 양 아주 조심스레, 부드럽게 내게 입을 맞춘다.
지금도 유신의 키스는 여전히 부드럽고, 섬세하다.
입술을 떼었다.
늘 먼저 물러서는 것은 나다.
그러면 유신은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아직 뭔가 부족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날 응시한다.
그 눈빛이 부담스럽다.
그에게서 수분을 빼앗아간 것은 나인데, 서진은 마치 나에게서 무언갈 받았다는 듯 행동한다.
그 행동이 슬프다.
이제 마음이 안정된다.
무언가가 날 조금쯤은 채워준 기분이다.
유신이 옆에 있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될 듯 하다.
돌아서는 나의 눈에 부딪혀 오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그 많은 시선들 중 날 잡아두는 그.... 청녹빛 시선....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 눈빛... 그 눈빛... 그 눈빛...
아아... 너무나 아름다워 탄식이 흐르는... 그... 아름다운 눈빛...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없다.
그의 눈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
그의 눈은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내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그는 다르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너무나 다르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나의 의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등을 살짝 민 유신의 손길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그들을 향해, 아니.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그의 청녹빛 눈동자는 여전히 날 향하고 있다.
내게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날 꿰뚫어버릴 듯 날 응시하고 있다.
아아. 이름 모를 이여.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이름 모를 바다여.
제발 내게서 그 시선을 거두어 달라.
그 바다와도 같은 눈동자를 거두어 달라.
들리지도 않을 부탁을 간절히 하며 조심조심 다가갔다.
아니. 유신의 손에 떠밀려 그를 향해 나아갔다.
그는 내가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봄에도 눈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전히 뚫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날 응시하고 있다.
그의 시선 때문에 내가 말라간다.
내 몸을 채우고 있던 모든 것들이 점점 날아간다.
"아... 혹시... 정유신님?"
안경을 쓴 쾌활해 보이는 남자가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온다.
"네. 수영 동호회 맞죠?"
그 남자만큼이나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유신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내 귓가에서 윙윙거리다 사라질 뿐...
내 청각을 자극하는 건... 나의 귀를 세차게 두드리는...
그의... 저 청녹빛 바다의 숨소리. 거친 파도 소리...
어째서... 저이는 저토록 힘들게 숨을 쉬는 걸까.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며,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내며 그들이 마련해준 자리에 앉는다.
호의적인 미소와 인사말, 질문... 쏟아져 들어오는 질문들...
그들은 서로 원래 친했던 듯 말을 트고 있었다.
유신 역시 남들에게 잘 동화되는 성격답게 금새 말을 놓고 그들과의 대화를 즐겼다.
하지만 난 그렇지 못 했다. 그럴 수 없었다.
나의 시선을 잡아놓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와 내가 1m도 되지 않는 거리에 앉아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청녹빛 머리카락, 나직한 숨소리, 옅은 바다 내음...
내 눈이, 내 귀가, 내 코가 온통 그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에게서 시작되는 모든 것들이 내 감각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난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
그 역시 날 응시하고 있다.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운 청녹색 눈동자에 날 한가득 담고 있다.
날 붙들고 있다.
내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꿀꺽. 마른침만 삼킨다.
목이 마르다.
뭐든 마실만한 것이 없나 탁자 위를 살피지만 아무 것도 없다.
아니. 무언가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너무 급하게 눈을 돌려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 눈을 뗀 그 찰나의 순간이 날 죽일 것만 같아서 제대로 찾지도 못 했다.
꿀꺽. 다시 한 번 침을 삼킨다.
넘어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뭐든 바짝바짝 말라 가는 나의 목을 적셔줬으면 좋겠다.
내 목을 쥐어뜯을 듯한 이 갈증에서 해방시켜줬으면 좋겠다.
그의 입술...
저 입술이 날 축여줄 수 있다면... 날 적셔줄 수 있다면...
순간 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는 얼른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더 이상 그를 쳐다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쳐다봤다가는 그에게 빠져 절대 헤어 나오지 못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바다 한복판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토록 이성으로 외치는데도... 내 눈은 결국 그를 담는다.
그의 숨결을 느끼고자 촉각을 곤두세운다.
알 수 없는 눈으로 날 응시하는, 나만큼이나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의 향기를 원한다.
손을 뻗어 그를 만지고 싶다. 그를 느끼고 싶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
이 갈증에 미쳐버릴 것만 같다.
"유신이 너랑 같이 온 사람이 네가 데려온다던 애인?"
"응. 예쁘지?"
"오오. 기대 이상인데? 원래 잘 생긴 녀석들은 좀 못 생긴 여자랑 놀잖냐.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 선남선녀 커플이잖아."
"그러게 말이야. 너무 부럽다, 너희 커플..."
"야, 야. 장미희. 나 같이 멋진 애인을 두고서 누굴 부럽다고 하는 거냐?"
"흥! 멋있긴, 개뿔이... 그래. 확실히... 놀이공원 귀신의 집에 들어가서 벌벌 떨기 전까지는
네가 무척이나 멋있게 느껴졌었지."
"앗!! 그 말은 다른 애들 있는데서 안 하기로 합의 봤잖아!!"
"하하하하. 정말이야? 우준이 너... 정말 귀신의 집에서 벌벌 떤 거냐?"
"그렇다니까... 너무 이미지에 안 맞지 않아? 생긴 건 꼭 뭐처럼 생겨서는...."
"그 뭐처럼이 무슨 뭐처럼인데?"
"네가 사람들에게서 많이 듣는 말 있잖아. 조폭!!"
"뭐야? 내가 무슨 조폭을 닮았냐?"
"하하하하. 그러고 보니... 정말 인상 험악하네. 우준이 네가 카페 아이디도 그런 쪽 아니었냐?
[형님]이었던가?"
사람들의 무의미한 잡담.
그 속에 존재하는 침묵.
그와 나 사이에만 흐르는 이 침묵.
당신은... 대체 왜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가.
차라리 무심하게 눈을 돌려버린다면 내 식도가 끊어질 듯한 이 갈증이 사라질 것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슬픈 눈으로 날 응시해 나의 갈증을 더하게 하는가.
왜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가.
차라리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겠거니, 느껴지지 않겠거니 생각되어 눈을 감았다.
잠시 내려앉은 어둠.
그 어둠 속에 희미한 빛이 떠오르고, 그 빛은 그를 비추었다.
그리고 난... 그를 느낀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그를 보고, 그를 느낀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그의 손길을 떠올린다.
그 부드럽고도 다정한, 하지만 격동적인 손길을 떠올린다.
그리고 깨닫는다.
난 이미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해월동화(海月童話)
- 바다와 달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
5화
"애인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 아. 한서진이었던가?"
나의 이름이 들려온다.
이제 내 존재가 그들의 도마 위에 올라갈 차례인 모양이다.
난 그들의 대화에 나의 이름이 올라도 반응을 하지 않는데, 순간 그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응. 서진이야. 나랑 같은 나이고... 서진아. 인사해. 이 사람들이 내가 말한 수영 동호회 사람들이야."
유신이 나의 팔을 살짝 건드리며 재촉한 후에야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있었다.
떼고 싶지 않았지만, 내 눈은 떼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지만 떼어야만 했다.
더 오랫동안 그를 응시하다가는 그의 아름다운 입술에 내 입술을 부벼댈 것만 같아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라던가, "반갑습니다."라는 겉치레 인사를 나불거리고 싶진 않았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팔자 편하게 동호회 모임이나 가질 리 없고,
그들이 반갑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니까....
그들은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내가 꾸벅 인사하는 것을 단지 수줍음이 많다는 것 정도로 생각하려는 모양이다.
내 속을 알 길 없으니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유신과 오랜 친구처럼 대화를 하던 남자가 내 생각을 증명해준다.
"야아. 유신아. 너랑은 다르게 네 여자친구 되게 수줍음이 많구나."
그래. 난 유신과 다르다.
이 세상 뭐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유신과는 달리,
난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리고 그것에 속해 있는 내가 건조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신을 사랑하고, 날 멀리한다.
내게 가까이 오면 내가 그들의 수분까지도 빼앗아가니까...
"응. 좀 말이 없는 편이지. 그 대신 내가 말이 많잖아.
우리 서진이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니까 된 거 아냐?"
"열부 나셨구만, 열부 나셨어."
"그럼 서진씨. 우리랑 같은 나이면 말을 놔도 되나요?"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
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존댓말, 반말. 그런 것에 커다란 의미는 없다.
그저 형식적일 뿐, 진심으로 존경하는 이에게 이런 형식적인 태도는 필요치 않다.
"야, 야. 좋아, 좋아. 난 이런 분위기가 좋다구. 이상하게 이번엔 동호회에 23살이 많은 것 같아.
그럼 우리 소개도 해야하는 거겠지? 안녕. 난 연우라고 해. 반갑다.
이번에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동호회 회장으로 뽑혔더라구. 앞으로 잘 지내보자.
맞다. 그... 우리 카페에도 가입하고 그래. 넷상에서도 자주 만나자."
다들 자기 소개를 한다.
가슴이 뛴다.
그들의 소개 때문이 아니라 곧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심장이 불규칙하게 두근거린다.
조금 더... 조금 더...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는 그 시간이 너무나 길다.
아주 짧고 간단명료함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길게 느껴진다.
그의 목소리를 듣기까지의 그 시간이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난 이수훈이야. 너 정말 예쁘게 생겼다. 밖에서 만났더라면 연예인인 줄 알았을 거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이제 그다.
그가 자기 소개를 할 차례다.
숨을 멈추고 있었다.
내 숨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어디선가 들려오는 잡음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손상되지 않도록 청각을 곤두세웠다.
날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날 향하고 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의 입술이 벌어진다.
얇고 매력적인 입술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난...."
단지 한 단어. 한 음절. 그것만 들었음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입술을 꽉 깨물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눈에 조금 더 힘을 줘서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독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울지 않고 살아왔다.
어떤 것도 내 삶에 감흥을 주지 못했고, 내 감정을 건드리지 못 했다.
오래 전...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들으며 꺼이꺼이 목놓아 운 것 빼고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 땐, 왜 그리도 인어공주 이야기가 슬펐는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이 괴로웠었다.
그리고 지금... 난 그 때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
"루... 루다."
루.... 루.... 아아. 루...
그의 이름이 내 귀에 울린다.
루... 나의 루여.
"외국에서 살다 와서 이름이 이렇군."
루. 나의 루...
"널 만나서 기쁘다."
루.. 루...
"잘 부탁한다."
나의 루여.
내가 기억하던 그 목소리. 들어본 적 없으면서도 내가 상상했던 그 목소리와 똑같이
나직하고 부드러운 바리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이 날 녹일 듯 내 귀를 통해 들어와 나의 뇌를 자극하고, 나의 심장을 자극하고,
내 심장에서 나가는 피에 섞여 내 온몸을 자극했다.
목소리로부터 시작되는 이 짜릿한 쾌감에 난 눈을 감아야 했다.
신체적인 접촉이 없이도 이런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서진...."
아아....
그의 목소리가 나의 이름을 읊는다.
미칠 것만 같은 갈증이 날 두드린다.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해야만 이 갈증을 없앨 수 있다.
그의 혀가 나를 적셔줘야만 내가 이 건조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를 원한다. 그를 가져야만 한다.
그가 불러 아름다운 내 이름이여.
주먹을 꽉 쥐고 이성을 붙잡았다.
난 유신과 사귀는 사이다.
루와는 초면과 마찬가지인데 이런 행동을 할 수는 없다.
조금 더 내 이성을 차리고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엘이야."
문득 찬물을 끼얹는 듯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하늘...
하늘과도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
그녀가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눈부신 하늘과도 같은 자태로....
"내가 나이가 더 많은 것 같은데... 말은 놔도 되는 거겠지?
나 역시 외국에서 살다 와서 이름이 이래. 그래도 나름대로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데...
아, 그리고 루와는 한 집 살림을 하는 사이야.
아직 결혼을 한 사이는 아니지만 말이야."
가슴이 욱씬거린다.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영화관에서 저 두 사람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바다와 하늘은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이야기에서 바다는 하늘을 닮고 싶어, 하늘은 바다를 닮고 싶어한다고 한다.
그런 걸 알면서도 난 하늘을 배제해버리고 바다만을 그리워했다. 바보처럼...
그래놓고 이렇게 아파한다.
찢어질 듯 아프다.
"엘... 말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루의 목소리가 엘의 이름을 담는다.
엘의 이름을 담을 때의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답다.
또 한 번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의 목소리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담을지라도, 한 번 더 나의 청각에 즐거움을 주고 싶다.
"외국인치고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나의 목소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목소리가 추하다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엘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루에게로 돌렸다.
루는 아까처럼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잔잔한 바다와 같은 눈동자로...
"한국어 발음이 좋네."
바보 같은 말을 해버렸다.
사람들이 날 비웃는다 해도 난 할 말이 없다.
정말 바보 같은 말을 해버렸다.
루의 입술이 부드럽게 원을 그린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황홀한 미소. 가슴이 벅차 터질 것만 같은 황홀한 미소를 지어준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눈이 부신 바다와도 같은 미소에 난 다시 숨을 멈춘다.
오늘 내 폐가 많이 시달리는 것 같다. 루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 살다시피 했으니까...."
기적이다.
그가 내 질문에 답해줬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단지 그가 내 말에 대답을 해준 것만으로도 온몸이 반응한다.
첫댓글 와;; 재밋어요... 뭐라고 해야대나... 신비하면서도 루랑 서진이랑 뭔 일이 날것 같은;;;
음..백묘님 소설중에 기다린 사랑을 가장 좋아했는데..그 순위가 바뀔것같은 예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