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 13:44-52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44-52 /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45) 유대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자 질투가 생겨서 욕설을 퍼부으며 바울이 하는 말끝마다 반대를 하였다. 46)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하게 그들에게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이 기쁜 소식은 먼저 당신들 유대인들에게 전해져야 했소.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당신들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증명해 보였소. 그러니 우리는 이제 이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오. 47) 이미 주께서는 ㅂ) `나는 너를 세계 만민의 빛으로 세워서 온 세상의 어둠과 혼란을 없애고 땅 끝까지 이르는 세계 만민이 너를 통하여 나의 구원과 해방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으니 주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오.' (ㅂ. 70인역 사49:6) 48) 이 말을 들은 이방 사람들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은 다 신도가 되었다. 49) 하나님의 말씀이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50) 그러자 유대인들은 율법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쫓아냈다. 51)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항의하는 뜻으로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떠났다. 52) 안디옥의 신도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바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영적 호기심을 자극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의 시민들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다시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를 자아냈습니다. 유대인들의 비방은 박해로 발전하였고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그 지역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이 유대인 전도보다 이방인 전도의 문을 먼저 여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의 설교를 비방하는 유대인들(44-45) 다음 안식일에 수많은 사람이 회당에 모여 들었습니다. 바울의 선포가 성공적인 결과를 내자 유대인들은 질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들이 바울을 반박하고 비방한 동기는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은 다윗에게 약속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23)과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것(30), 그리고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38)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함(46-47)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적대적인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며 유대인들의 반박과 비방에 맞섰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유대인들)에게 전할 것이로되’(46)라고 하였습니다. 구속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고 있는 특권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1:8; 마 10:5). 이런 특권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13:17, 23, 32).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속사에서의 특권을 무시하며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 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했습니다. 이로써 바울이 선포한 경고의 말씀(40-41)을 스스로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이방인들과 박해하는 유대인들(48-52)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될 때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롬 8:28-30). 46절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았지만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믿는 행위’나 ‘믿지 않는 행위’를 작정했다는 뜻이 아니고 믿는 자는 영생을 주시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로 자처하며 박해하자 주께서 자신들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셔서 이방인을 구원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담대히 선언합니다.
적용: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핍박할수록 복음은 더욱 힘차게 전파되었습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과 비교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 인간의 행복은 이 한마디로 다한다.>- 톨스토이. 복음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왔던 이방인들, 죄인들을 변화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언제나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비방하는 것, 그리스도인과 함께 있는 것 자체를 못 견딥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공동체에서 냉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핍박이 심해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제대로 비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는 법입니다. 비방하는 자들이 주위에 많을지라도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의 빛을 더욱 밝게 비추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호크마 주석
=====13:44
온 성이 거의 다...모이니 - 이 같은 묘사는 바울의 설교가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하기위한 극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당시 온 성의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일 수 있을 정도의 회당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Bauernfeind). 누가가 이처럼 과장법을 사용한 것은 바울을 성공적인 설교가로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Haenchen). 하여튼 본절에서 누가가 진술하고자 하는 요지는 바울의 설교가 성공적이어서 비시디아 안디옥 온 성이 떠들썩했으며 더욱 많은 무리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회당으로 몰려왔다는 사실이다.
=====13:45
유대인들이 - 이들은 회당의 구성원들로 바리새파의 유전을 철저히 추종하는 유대인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회당의 핵심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가 자기 공동체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에 바울의 설교에 대해 무조건 비방하는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시기와 비방은 새로이 형성되는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있다.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 유대인들의 비방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가 응답함에 있어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진술을 권위있게 묘사하기 위해 '담대히 말하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이 말의 헬라어 '파르레시아사메노이(* )는 '자유릅게 말하다' 또는 '숨김없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대답이 매우 확신에 찬 것으로 청중을 설득하는 호소력이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 이 말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이는 유대인들 자신이 자처(自處)한 것이므로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하는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언급은 바울 자신도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비방하는 자들이 자신을 반(反) 유대적인 교리를 전파하는 자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다.
=====13:47
주께서...명하시되 - 바울은 다시 자신의 이방 선교의 정당성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주장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여 그 사역의 신적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선포하는 내용도 인간의 지혜나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섬기던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자신을 비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내가...구원하게 하리라 - 이 인용구는 사 42:6;49:6에서 발췌된 것이다. 이 이사야서의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바울과 바나바예게 하신 말씀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예언하신 내용과 연관지어 볼 때(9:15) 이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에게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하겠다. 즉 바울은 사 42:6;49:6에 예언된 내용을 전파하는 자로 자신들이 선택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 여기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들은 이방인들의 기쁨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45절에서 언급된 유대인들의 반응과는 매우 대조되고있다. 본절은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정된 자 - '작정(作定)된'으로 번역된 '테탁메노이'(* )는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작정'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과거 완료는 과거를 시점으로 어떤 사건이 그 과거 이전에 완료되어 그 시점까지 영향을 미칠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작정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버리지않고 모든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13:49
주위 말씀이 퍼지니라 - '퍼지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페레토'(* )는 미완료 과거로 '게속 퍼지고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주의 말씀이 점점 널리 퍼져가는것을 묘사한다. 그런데 누가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믿게 된 자들의 부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않고 있다. 아마 이 부류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13:50
경건한 귀부인들 -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 일행의 설교가 육대교 회당 중심의 공동체에 위협을 주고 았다고 판단되자 그들을 추방하기 위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영향력있는 인물들을 이용했다. 여기서 언급된 귀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 여인들로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짐작된다. 그 성내 유력자들 - 이들은 앞에 언급된 '경건한 귀부인들'의 남편(William Neil) 일 수 있으며 아니면 단순히 그 성읍에서 지도적인 인물로서 육대인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13:51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 추방당하는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에게 명령했던 예수의말씀(마 10:14)을 그대로 실천했다. 이러한 풍속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로서 이방인들의 지역으로부터 나올 때 행한다. 이고니온 -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부터 추방당하여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120km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이고니온(Iconium)으로 떠나게 된다. 이 곳 역시 B.C. 25년경 갈라디아가 로마의 한 도(道)로 복속될 때 로마에 합병되었다(F.F. Bruce).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비시디아 안디옥의 거주자들을 가리킨다. 누가는 그들에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로서 그 지역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과 동일한 성령을 받았음을 보여줌과 동시에(2:4;4:31;10:44) 기독교 공동체가 융성해 갔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 설 교 >
복음에 대한 긍정과 부정
김영규 목사 / 행 13장 44~52절
바울 설교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행한 설교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회당에 모였습니다. 어떻게 단 한 주간 만에 시민 전체가 동원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유대인 회당에 이방인들이 몰려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물론 성령의 역사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종교적인 관심이 첫째 이유입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종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종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영혼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천국 문제에 관심이 있고, 구원 문제에 관심이 있고, 영혼이 잘 되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심각한 문제는 도대체 영혼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애써 부인합니다. 오직 육체적으로 살다가 육체가 끝나면 종결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인간 만사는 오직 돈으로 통합니다. 돈 만 있으면 다 된다! 정치하는 사람은 오직 경제만 살면 다 된다고 외칩니다. 대학생들은 오직 돈 벌이 되는 전공에 매달립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은 돈 많은 배우자만 찾습니다. 그래서 연예인에 관심이 많고, 로또에 관심이 많습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착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어요. 종교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사느냐 아니면 짐승처럼 육체로 사느냐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닙니다. 육체적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이 잘 돼야 만사가 잘 됩니다. 영혼이 안 되면 만사가 안 됩니다. 안디옥 사람들처럼 영혼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다수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행13:43)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중심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인데, 이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유대화 된 이방인입니다. 둘째는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표현된 사람들인데, 이들은 할례는 받지 않았으면서도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입니다. 아무튼 이들 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듣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할례나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있고,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 복음을 듣고 크게 환영했습니다. 이 복음은 단 한 주간 안에 전 시민이 동원될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배척
이런 결과에 대해 유대인들을 매우 당황했습니다. 자신들의 회당에서 새로운 복음이 전파되고, 이방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부정하고 반대하고 배척했습니다. 이런 기조는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기심은 만사를 망치는 원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는지 보세요.
1. 반박하고 비방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45) 복음의 내용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적인 배척의 이유를 대지 못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을 근거로 반대하든지 비난하든지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감정만 드러냈을 뿐입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다 말고 회당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42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나갈새”라고 되어 있는데, 이 구절은 영문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And when the Jews were gone out of the synagogue, the Gentiles besought that”(KJV) 나간 사람들을 유대인들로 해석한 겁니다. 이 해석을 따른다면 과격한 유대인들은 바울 설교를 듣다 말고 흥분해서 나갔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든지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란 사실에 대해서 무조건 흥분하고 배척했습니다.
2.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도들을 도시에서 내쫓았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50) 유대인들은 종교 문제를 떠나서 정치적인 선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 도시에서 유대인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안디옥에 정착하여 종교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꽤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들의 존재가 흔들리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도층 인사들을 동원했습니다. 첫째는 “경건한 귀부인들”입니다. 아마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부인들인 듯합니다. 둘째는 성내 유력자들입니다. “유력자”(prwvtou")라고 번역된 단어는 우두머리나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아마 시장이나 거기 버금가는 관리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유대인들은 인맥을 동원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내쫓았습니다.
3.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으면서 바울은 중대 선언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
❶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❷ 유대인이라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나님 백성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❸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앞으로는 이방인을 향해 복음을 전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국면의 전환입니다.
이 선언 속에는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❶ 혈통적인 아브라함 자손이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이란 선언입니다. 역사상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 백성, 선민으로 자처해 왔습니다. 그러나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 자녀는 아닙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든 이방인이든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나님 자녀로 인정됩니다. 이런 내용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바울의 글에 명백히 선포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6-7,29)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4:16)
❷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한 결과로 이방인을 향해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은 어디 가든지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거부하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 우선, 그러나 배척하면 이방인에게로!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오늘날 복음은 유대인보다 이방인 중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거부한 것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런 섭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에 대한 부정과 긍정
복음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후통첩입니다. 복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고 거부하면 그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지 혹은 배척하는지 여부에 따라 최종 신분이 확정됩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믿는 자는 하나님 자녀로 인정받지만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 자녀에서 제외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여부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인류 구원은 창세기 타락 과정의 逆順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류는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하나님 자녀의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류가 같은 운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담의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불가항력의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즉, 인류의 죄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세요. 문명 발전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의 죄는 점점 깊어갑니다. 점점 인간성이 상실되어 갑니다. 점점 짐승처럼 되어갑니다. 세상 종말이 다가올수록 인간의 심성에서 사랑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0,12) 인면수심 되어가면서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 지금의 인간들입니다. 이런 구제불능의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죄 없으신 자기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이제는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미 창세전에 세워졌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예수님은 이런 구원 계획에 따라서 오셨고, 이런 구원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일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배척했습니다. 이유는 선민의식입니다. 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면 무조건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혈통이 하나님 백성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 타락한 아담의 자손일 뿐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0-18,20)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역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긍정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 최후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 자녀이기를 거부하는 최후 결정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 자녀로 인정되는 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믿는가, 거부하는가? 오늘 내 결단에 따라 하나님 자녀로 영원히 살기도 하고, 영원히 지옥 백성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분을 확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방의 빛이 되라
바울은 설교의 마지막에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들의 미래 행로를 제시합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47) 이제 우리는 이방의 빛이 되리라! 우리는 이방의 빛이 되어 땅 끝까지 구원하리라!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임을 선언했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롬11:13)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8)
오늘 우리는 이방인으로 예수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 자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로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이나 땅에 속한 모든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 자손보다 더 큰 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요즘 매주 식탁에서 이 말씀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49:25)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여러분, 이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방인의 빛이 되세요.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구주이신 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 중에도 아직 믿지 않는 이방인이 있습니다. 매일 어울리는 직장 사람들 대부분이 이방인입니다. 매일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 친구들, 이웃들이 다 이방인입니다. 이들에게 빛을 비추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빛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의 빛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구주라는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내용이 바로 복음입니다. 더 줄이면 예수님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신 그 자체가 바로 복음의 빛입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안디옥 교인들은 무슨 기적을 보고 모여들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구주라는 소식을 듣고 몰려 왔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48-49)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2) 안디옥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기적을 본 게 아닙니다. 단지 말씀을 듣고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찬송했습니다. 말씀 내용에 기뻐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써 능력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기쁨을 줍니다. 바로 이 복음이 우리가 가진 빛입니다. 안디옥에 기적이 퍼진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비췰 빛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비췰 빛은 복음의 빛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복음, 이 복음의 빛을 사방에 비취세요. 남은 생애 동안 어디서든지 예수 믿는 것을 보여주세요. 그것이 우리가 비췰 빛이며, 우리의 마지막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에게
사도행전 13:48-52 / 장경동 목사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본문 속에는 7종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 7종류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즉, 구원 받은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방인, 바울, 바나바, 제자들을 ○표 라고 놓고 유대인, 귀부인, 유력자를 X표라고 할 때, ○표는 구원받은 사람을, X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표의 사람은 기쁨이 있고 찬송이 있고 믿음이 있고 성령이 충만 합니다. 그러나 X표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X표의 사람들은 선동을 합니다. 선동은 구원받은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들은 또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합니다. 여기서 알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더라도 핍박을 하여서는 안된 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냅니다. 위의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같은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반응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 모든 것들에는 다 양면성이 있습니다. 또한 그것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습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듯이,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있습니다. 강한 것이 있으면 약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만 알면 안 되고, 둘을 다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13:34-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비유를 통해 나타내고 비유를 통해서 알게 하셨습니다. 마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 함이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알게도 하시고, 감추고 알지 못하게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비유의 양면성입니다. 그렇다면 양면성의 다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잔꾀를 부리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순진한자들에게는 나타내집니다. 마11:25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 하나이다’ 우리는 기도도, 감사도, 봉사도 순진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잔머리는 감동이 없습니다. 순진하게 우직하게 하십시오. 진실 속에는 언제나 감동이 옵니다.
2. 영생에 있어서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택함 받은 자는 은혜 입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자는 기쁨이 있습니다. 구원의 기쁨이 있어야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3. 십자가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처럼 여겨지시길 바랍니다.
4. 복음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고후4:3-4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이니라 ’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진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5. 구원에 있어서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 이니라’ 마10:5-6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오늘 우리가 구원 받았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마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구원 받은 자요 행치 않는 자가 구원 받지 못한 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한 자 입니까? “나는 지혜로운 자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자인가?” 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나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인가? 아니면,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인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인가? 아니면, 행치 않는 자인가? 나는 ○표 인생인가? 아니면 X표 인생인가? ”를 깊히 생각해보고 위대한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기도합시다. “ 주여 우리로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는 왜 그렇게 교파가 많은가
사도행전 13:48-52 / 장경동 목사
몰라서 오해하지, 다 알면 이해가 된다. 한편, 다 알고도 이해 못할 일이 있다. 또, 몰라도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은 네 박자로 보아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아 희미해도, 그때가 되면 다 알게 된다. 그러나 천국가도 어떤 부분은 잘 모른다. 다 아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안 계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정확하게 보신다. 그러기에 그 분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 아까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왜 그렇게 교파가 많은가? 교파가 하나면 다툼이 없으나, 전도 열의가 약해진다. 교파가 많으면 교인 쟁탈전이 벌어지나 전도 열의는 강하다. 중문교회 철야에 다른 교회 사람들이 모이니까 다른 교회에서 철야가 시작 되었다.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교파가 하나면 편협된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교파가 여럿이면 하나님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다. 개미들이 코끼리를 볼때 각기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과 비슷하다.
북한은 당이 하나다. 그러므로 다른 당을 용납하지 않는다. 통일성은 있으나 자율이 없다. 한국은 당이 여럿이다. 복잡하다. 그러나 정당의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다. 이렇듯 교리적 차이는 인정 되어야 한다. 천주교는 오직 하나만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오류가 있다. 그예로, 초대 교황 베드로는 분명 결혼했다. 그런데 왜 신부님이 결혼을 안하는가? 결혼의 자유가 교권으로 인해 구속당하고 있다. 성경은 하라고 하는데, 왜 그런가? 민주주의는 부작용이 있어도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것처럼, 교파가 나뉘긴 했지만, 여러 관점으로 하나님을 좀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기독교가 옳다.
오늘은 예정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는데, 먼저 질문을 하나드리면 “내의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아니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가?” 하는 것이다. 감리교와 성결교는 내 의지를 강조하고 장로교는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다 말하고 있다. 요한 3:16 은 다 외워야한다. 군대에 가면 초코파이를 준다. 그런데 일요일 날 모두가 다 교회 간다고 하니까, 주기도문 할수 있는 사람만 교회 보냈다. 롬10:13 “주의 이름 부르면 구원 얻는다.” 구원의 의지가 너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문 48절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예수믿는 것은 작정되어 있다. 택함 받았다 는 뜻이다. 또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다.(요6:44) 즉,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셨다는 것이다. 행18:11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고 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대전 시민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따로 있다.
“내가 안 믿으면 지옥, 믿으면 천국이라면 억울하지 않은데,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이라면 좀 억울하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죄인이 지옥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죄인을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은 감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사형수가 사는 방법은 대통령특사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사형수는 죽어야하는데 김현희가 산 것은 감사한 것이다. 특사로 사는 사람은 당연한 게 아니다.
예수 믿으라는 것은 억울함에서 당연함으로 오라는 것이 아니라, 당연함에서 감사함으로 오라는 것이다. 선생이 잘 가르쳐야 한다. 한국에서 공부 못하는 애가 미국가면 잘하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작은 것에도 큰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
나의 나된 것은 주의 은혜다. 나의 노력까지도 주의 은혜다. 그러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 익명으로 까운을 해 준분이 훌륭하다. 뭐 해놓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신앙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침을 받기로 작정된자가 고침을 받는다. 여자 장로님에게서 메모가 왔다. 허리가 이상이 왔는데 다리가 아팠다. 목사님 부흥회에서 은혜받고, 안수를 못받아서, 길거리에서 안수를 해달라고 했다. 환자한명 때문에 과거 시험을 놓치는 허준이 생각나서 안수를 했다. 그런데 허리가 싹 나았다. 어떤 사람은 주차장에서 해도 되는데 어떤사람은 정식으로 해도 안되는가? 그답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교인이 테잎으로 전도했다. 안받는다고 테잎을 던져버렸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주어서 듣고 은혜받고 예수님 믿었다.
축복을 받기로 작정된자는 축복받는다. 그럼 하나님은 아무나 구원하고 아무나 축복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롬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또는 강팍케 한다. 즉, 그렇게 할 자를 그렇게 한다. 그가 하는 짓이 축복받을 짓이요, 응답받을 짓이었다.
1)이세상의 모든 일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다 이루어지고 있다. 우주, 자연, 사람이나 다 그렇다. 먹는 것은 내 의지이지만 소화는 내의지가 아니다. 혈압도 그렇다. 하나님의 예정도 구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엡1:3-5 “신령한 복주시되,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일 뿐이다. 내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정도 사는 것도 내가 한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러분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2)그러나, 의지와 무의지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음식 먹는 양을 조절하여 소화를 조절할 수있다. 내 삶은 조절하면 혈압을 어느 정도 조절가능하다. 가만 있어도 하나님이 다하신다는 것은 운명론자이다. 심방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그 집이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그분 말씀이 “누추해서 그런다.”그래서 제가 “담임목사가 못 먹는 음식을 누구에게 주겠는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긍지를 가져라. 여러분이 라면가게 하면 나를 라면 먹여라. 지금 만두가 어렵다. 만두 많이 사가라. 선량한 만두가 희생당하면 안 된다. 그 교인이 그 고비를 넘겨서 잘나가면 얼마나 좋은가? 이런 마음이 온 국민의 마음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기독인은 만두를 사먹어라. 기독인은 무슨 독을 마셔도 괜찮다. 어렵다고 낙심하지 말고 지혜롭게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있지만 인간도 해야 할 몫이 있다.
해찬들 창업주가 믿음이 있다. 예배를 드리니 좋아한다. 해찬들이 잘 될려면 직원이 해 찬들 고추장 먹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자기도 안 먹는 것을 누구에게 먹이겠는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긍지가 없다면 그만 둬라. 이것이 은혜의 소스가 된다.
비는 하늘이 내리지만 아무데나 내리지 않는다. 비는 사막에 내리지 않고 나무가 있는 곳에 내린다. 은혜받을 짓속에 은혜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리고, 믿는 사람답게 살고,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맡깁시다.
성령충만한 사람
사도행전 13:48-52 / 김경년 목사
이십여년전 통계청에서 금년도 인구센서스를 통해 밝혀진 국민의 종교분포 조사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여기보면 불교 인구가 1천 72만 6천명, 기독교 인구가 8백 61만 6천명, 천주교 인구가 5백 14만 6천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불교 인구는 3.9%, 천주교 인구는 지난 10년 사이에 74.4%로 급성장을 했는데, 기독교는 오히려 1.6% 감소했다는 사실입니다. 10년 전보다 14만 4천명이 감소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감소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보면 교회의 분열, 분쟁과 교회학교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 것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온 것은 1885년입니다. 그러나 유교나 불교사상의 박해와 조정의 박해 등으로 인해 교회가 세워지고 전도를 하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1907년 1월 16일, 평양에 있는 ‘장대현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어떻게 하면 이 나라에 부흥을 일으키고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 길선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핍박을 이기고,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기를 사모합시다.”
그래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께 회개하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 갑자기 성령의 역사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해서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병 고침을 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때서부터 한국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당시에 평양에서 한 해 동안 4만 명이 예수를 믿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시작된 그 부흥의 불길은 우리나라 전체에 번졌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의 부흥사건이 100년에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어게인1907년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다시한번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서 침체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고, 지금도 성령의 역사로 다시금 교회에 부흥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지키는 거룩한 날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대조적으로 사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과 술 취함은 매우 유사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술로 충만한 사람은 평소에 없었던 용기가 생겨 담대하게 됩니다. 술이 들어가면 겁이 많던 사람도 겁이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해집니다.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나 말도 잘 못하던 사람이 담대하게 말을 잘하게 됩니다.
본문 50-51절 말씀을 봅시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여러 동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드렸지만, 또 어떤 동네에서는 욕을 실컷 얻어먹고 쫓겨나기도 하고, 심한 핍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 가운데 귀부인과 유력자들이 선동하여 방해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고는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참으로 당당했습니다. 참으로 담대했습니다.
오늘 본문 52절에 보면“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기뻐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설교하실 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눅9:5절)
성도들은 인간적인 정에 끌리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발에 티끌을 떨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외로움이 되고,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된다고 해도 우리가 때로는 단호하게 끊을 것은 끊고, 떠날 곳은 떠나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핍박을 받고, 동네에서 쫓겨나면서도 조금도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타협하거나, 영적인 침체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않았습니다.
매우 당당하게, 담대하게 사명을 다했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기도회에 이명박장로님의 간증을 보았습니다. 금요일날 나오신 분들은 큰 은혜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명박장로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은혜를 받았지만, 그 가운데서 그렇게 가난하고, 힘든 삶 속에서 그의 어머니가 거지처럼 얻어 먹이지 않고, 얻어 입히지 않고, 자식들을 당당하게, 정직하게 키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자기에게는 거지 근성이 있었는데 어머니를 통해서 그것을 완전히 버리고, 당당하게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 서울시장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다가 보면 때때로 좋은 일과 평탄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적지 않은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험과 위기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할 일을 멈추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은 “성령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동력이 끊어진 방앗간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방앗간에 동력이 있으면 수십 가마도 금방 빻아줍니다. 그러나 동력이 없어 사람이 직접 하게 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쉬운데, 성령을 받지 못하면 혼자서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다가 지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마치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라면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상관없이 어디를 간다 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오토바이를 탄 사람과 같이 지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능력이 있습니다. 권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더 앞장서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족 지도자요,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장로님은(1882~1950) 16세까지 친구들과 술 마시고 도박하고 싸움을 하는 길거리의 불량배였습니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고, 서당에 가서 한문도 공부했지만, 친구들을 잘못 사귀어 불량소년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술에 취해 길을 걷고 있는데 미국 선교사가 그를 보고 “이 사람아,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일본이 이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있는 데, 젊은 사람이 술 마시고 방탕하면 되겠나?”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그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그의 귀에 맴돌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자신을 책망했던 선교사의 집을 찾아가 “내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는 그에게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으로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도박을 끊을 수 없습니다. 건달 생활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능력과 권능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모아놓고 이제부터는 술을 마시지 않고,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자신과 계속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읽고, 그 당시에 기독교정신으로 세워진 숭실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졸업한 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어 오산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을 가르쳐 지도자를 배출하고 3·1운동을 주도하여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 받습니다. 새로워집니다. 악한 사람이 착하게 됩니다. 용기가 없던 사람이 담대해 집니다. 정직하게 됩니다.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 충만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
사도행전 13:49-52 / 신성종 목사
옛 속담에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바이러스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삶의 활력소요 원동력이 되는 기쁨을 회복하여 우리들이 이 땅에서의 생활이 좀더 활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절)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기쁨이 항상 충만하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가장 짧은 구절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1장 35절의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말씀과 다른 하나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의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요한복음 11장 35절은 세 단어로 되어 있고,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만이 두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두 구절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동정의 눈물, 사랑의 눈물의 울음으로 인해서 우리들은 기뻐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참 기쁨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분들만 한번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세 가지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참 기쁨은 무엇인가?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기쁨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 기쁨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 모두가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참 기쁨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잠정적인 기쁨]이 있고, 또 [영원히 계속되는 참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참 기쁨은 항상 성령이 임할 때 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더라”고 기쁨과 성령을 함께 언급했습니다. 기쁨과 성령이란 말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수퍼마켓에 가면 일회용 종이 접시, 일회용 플라스틱 칼과 포크, 일회용 컵 등을 팔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쁨도 거의가 다 일회적 기쁨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화장실에 갔다오면 끝나고 맙니다. 좋은 옷을 새로 사 입어도 세탁소에 한번 갔다오면 끝나고 맙니다. 새 차를 사면 처음에는 열심히 세차를 하고, 닦지만 일년이 지나고 나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또 새 집을 사도 일년 지나고 나면 그 감격은 살아지고 맙니다. 미국에 이민 간 분들을 보면 처음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환경이나 집이나 자동차나 음식이나 모든 것이 좋아서 기뻐하지만 영주권을 받고 나면 끝나고 맙니다. 교회건축도 그렇습니다. 예배 볼 때가 없어서 공원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어디 세라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일단 들어가 놓으면 작아도 내 교회가 있으면 눈치 안보고 신앙생활 할텐데 하다가 이제 본당도 크게 짓고 나니까 그 감격도 없어져서 무엇이 불편하고, 무엇이 어떻고 하면서 불평이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참 기쁨입니까? 참 기쁨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영원한 기쁨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주는 기쁨은 다 잠정적인 기쁨이요 일회적인 기쁨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직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이라야 영원한 기쁨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위로부터 주시는 영적인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내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죄의 기쁨]입니다. 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 양녀]가 되었다는 기쁨입니다. 장차 누리게 될 [천국에서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천국에서 받게 될 상속을 생각할 때 더욱 커집니다. 이 땅에서도 밥이나 먹고, 그저 건강하게 돼지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가지고 산다는데 참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직업의 높고 낮음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물론 다윗처럼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에스더를 통해서 민족을 구원한 모르드개 같은 사람은 대궐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는 창녀출신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태 같은 사람은 세리출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큰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참 기쁨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2.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쁨은 어디서 왔습니까?
1. 48절의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대로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을 보면서 기뻐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때 기쁨이 옵니다. 저의 기쁨도 우리 교인들이 잘 믿는 것을 볼 때에 옵니다. 반대로 교인들이 주일성수를 하지 않고, 슬슬 잘 빠지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세상길로 갈 때에는 정말 고민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들에게도 이런 영적 기쁨이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제자들이 가졌던 두 번째 기쁨은 49절에 보니까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참 기쁨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기쁨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3. 그런데 이상한 것은 50절에 핍박을 받아 쫓겨날 때 제자들은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아요? 인정받고, 진급되고, 성공할 때 기뻐한 것이 아니고, 핍박을 받고, 쫓겨날 때에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고 이 핍박과 쫓겨남이 바로 경건의 증명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핍박은 천국에서의 상급에 대한 보증수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현재의 고난을 감사했던 것입니다.
4. 52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실 때에 기쁨도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참 기쁨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두 번째 선물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먼저 우리들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인도하여 형통케 하십니다. 그래서 참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믿습니까?
3. 그러면 오늘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 기쁨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1. 먼저 소극적인 방법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잊지 않을 때] 기쁨이 계속해서 생깁니다. 반대로 [건망증]은 우리의 참 기쁨을 상실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깁니다. 이것이 불행과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쁨은 표현할수록 커집니다. 나눌수록 커집니다. 반대로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집니다. 그래서 기쁨은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것이 좋고, 슬픔은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서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기쁨을 표현해야 합니까? [항상 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웃으면 엔돌핀이 나옵니다. 긴장하거나 슬퍼하면 아드레나린이 나와서 우리들을 더욱 슬프게 만듭니다. 그래서 한국의 속담에 [웃는 집에 복이 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기도가 영적 건강에 좋듯이 웃음은 신체적 건강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웃을 때에는 엔돌핀이 나와서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온 몸에 윤활유 노릇을 합니다.
웃음은 아무런 값을 지불하지 않지만 많은 것을 창조합니다. 웃음을 준다고 가난해지지도 않지만 그것을 받는 사람을 풍족하게 만듭니다. 웃음은 잠간 동안 번득이고 지나지만 그 기억만은 영원합니다. 웃음은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 가정의 행복을 창조합니다. 피곤한 사람에게는 안식을 주고, 낙심한 사람에게는 빛을 주고, 슬픈 사람에게는 위로를 줍니다. 또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해독제가 됩니다. 그래서 일본의 속담에는 “웃음이 명약”이란 말도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시간에는 우리의 웃음을 연습하여 보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하면서 옆에 사람에게 여러분들의 웃음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 강아지는 절대로 웃지를 못합니다. 그냥 꼬리만 흔들고 와서 손을 빨 뿐입니다. 왜냐하면 웃음은 사람만이 가지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웃음을 잃고 사는 사람은 죄송하지만 개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웃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2. 장차 [주실 기쁨을 소망할 때] 우리에게 기쁨이 넘칩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을 보면 보는 사람에게도 기쁨이 옵니다. 신랑감은 싱글벙글하고, 신부는 표현하지 않으려고 문을 닫고, 혼자서 거울만 보면서 "흥 나한테 반했어" 하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아느냐구요? 저도 한 때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주실 기쁨을 소망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주안에서 살 때에] 기쁨이 넘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주안에서 기뻐하라”(4:4)고 했습니다. 주안에서 사는 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의 삶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기쁨은 두 번째 열매가 바로 기쁨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런데 성령의 열매를 조사해보면 처음의 세 가지,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기쁨이 옵니다. 믿습니까?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불신] 속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유명한 불신자였던 볼테르는 “나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행복은 [쾌락]에도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쾌락의 삶을 살았던 바이런 경은 오직 내게는 벌레와 궤양과 슬픔만이 있을 뿐이라고 탄식했습니다. [돈]에도 참 행복은 없습니다. 미국의 백만장자였던 제이 굴드는 죽으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또 행복은 [지위와 명예]에도 없습니다. 지위와 명예를 가졌던 비콘스필드 경은 “나의 젊음은 실수요, 장년은 투쟁이요, 노년은 후회뿐”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3장 1절에 보면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 우리가 기쁨을 누리는 실제적인 방법은 우리들이 주님의 [기쁨 조]가 되는 것입니다. 북한에는 김정일을 위한 기쁨조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 교회에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모를 위한 기쁨 조가 있습니다. 사모가 교인들이 하는 말에 충격을 받고,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우울증 같은 증세가 나타날 때에는 몇몇 분들이 자원해서 사모를 위로하기 위해서 만든 모임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 모두가 주님의 기쁨 조가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됩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나는 주님의 기쁨 조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옆에 있는 부부들끼리는 손을 잡고, 혼자 사시는 분들은 주먹을 꼭 잡고 이렇게 서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부들은 [나는 당신의 기쁨 조입니다]라고 고백하고, 혼자 사시는 분들은 [나는 오직 주님의 기쁨 조입니다]라고 다같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웃기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속에 참 기쁨이 옵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방법은 우리가 [의미 있고, 보람있는 일을 할 때]에 참 기쁨이 옵니다. 제가 왜 목회를 하는지 아십니까? 가장 보람있고,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보람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위를 보면서] 살 때옵니다. [밖을 향해서] 볼 때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소라처럼], 조개처럼 자기 안에 갇혀서 살고 있습니다. 이 안에서 나와야 기쁨이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월평 동산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너, 나를 막론하고, 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안에 있을 때에 오고, 과거에 주신 은혜와 기쁨을 잊지 않을 때 오고, 성령을 받을 때옵니다. 중요한 것은 기쁨을 표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기쁨들이 충만키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1차 선교-안디옥
행 13장 42~52절 / 정방원목사
사도행전 1장부터 12장까지는 사도행전의 전반부이고, 13장부터 마지막 28장까지는 사도행전의 후반부입니다. 전반부는 베드로의 유대인 선교가 핵심이고, 후반부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핵심입니다. 특히 바울의 선교는 1차 선교, 2차 선교, 3차 선교, 그리고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 선교까지 이어집니다. 바울의 1차 선교의 중심지는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에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을 방문합니다. 그곳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도 있습니다. 회당장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설교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 때 바울은 담대하게 말씀을 전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첫 설교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분석하면 3대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대지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에게 이르기까지 간략하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합니다. 특히 다윗을 주목하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시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두 번째 대지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말씀’은 복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일까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데, 유대인들과 유대 교권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빌라도 총독에게 요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세 번째 대지에서 바울은 청중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왜 결단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과 의롭다 함 즉 구원을 받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바울의 설교를 들은 청중의 반응은 어떠할까요? 오늘 본문은 바울의 설교를 들은 청중의 반응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본문 42절>“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말씀을 듣고,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다음 안식일에도 구원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합니다. 그 동안 회당에서 랍비들을 통하여 수 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그러한 설교와는 차원이 다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3절에는 심지어 그들은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도 바울과 바나바를 따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다음 안식일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더 듣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본문 43절>“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어떻게 시작할까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음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엡 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받고 신앙 생활을 시작합니다. 신앙 생활의 과정은 교리적으로 성화의 삶입니다. 신앙이 꾸준히 성장하는 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 죄와 세속과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일, 사명에 사는 일, 교회를 섬기는 일, 직분을 감당하는 일, 이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히 4:16>“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전 15:10>“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신앙 생활의 결론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일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있을까요?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시며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반대는 인간의 공로입니다. 바리새인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이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열심히 신앙으로 사는 것 같아도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갈 5: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신앙 생활은 내 힘, 내 의지, 내 노력, 내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해야 합니다. <벧전 5:12>“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시기와 비방과 선동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한 이후 한 주간 동안 소문이 쫙 퍼져나갑니다. 아마도 바울의 설교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널리 소문을 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본문 44절>“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한 주간 동안 소문을 듣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듭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무슨 문제일까요? 회당의 장소가 비좁은 것일까요? 아니면 바울이 육성으로 설교해야 하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소란스러운 것일까요? 문제는 항상 생각하지 못한 데서 발생합니다. 본문 45절에 유대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온 무리를 보고 시기심이 생긴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입니다.
아마도 이런 경우와 흡사합니다. 사무엘상 17장에 소년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장군과 싸워 승리합니다. 그 소문이 퍼지고,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삼상 18:7>“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사울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부르는 그 노랫말을 불쾌하게 여기고 심히 노하며 다윗을 시기합니다. 그 이후 사울에게 악령이 역사합니다. 사울의 시기는 한 마디로 마귀짓입니다. 유대인들은 시기와 질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말씀을 반박하고 비방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문 50절에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의 시기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비방에 주춤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동에 위축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대응합니다. 본문 46절에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리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회당이나 예배당 안에는 그렇게 마귀짓을 하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들의 비방이나 선동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은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중에 가라지 비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데, 밤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립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 곡식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보입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말합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가라지가 생겼나이다.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은 뭐라고 말할까요?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자라게 두라.’ 무슨 의미일까요? 밭에는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어 교회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 2:1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여러분, 가라지나 거짓 형제들에게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반박하며 비방하지만, 오히려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면 바울과 바나바는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까요? 본문 46절에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시기하고 반박하며 비방하는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 때문에 이제 이방인에게로 향합니다. 바울은 이사야 49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더 확신합니다. <본문 47절>“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바울은 분명 하나님이 세우신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전한 구원의 말씀을 듣는 이방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본문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전략은 ‘유대인 먼저!’입니다. <롬 1: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으로 전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는 뭐라고 말씀할까요? 그도 역시 ‘유대인 먼저’라고 말합니다. <행 3:26>“하나님이 그 종(예수 그리스도)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유대인)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먼저’라는 단어를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믿게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가족과 이웃과 친구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바울이 한 주 전에 설교할 때와 한 주 후에 설교할 때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43절에 한 주 전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많이 따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추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한 주 후에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돌아섭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적극적으로 비난하며 대적합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한결같은 자세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본문 48절>“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바울과 바나바는 이제 이방인들을 상대로 말씀 사역을 계속 진행합니다. 본문 49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져나갑니다. 그런데 본문 50~51절에 유대인들은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더 노골적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합니다. 결국 그 지역에서 쫓아내버립니다. 그러면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말씀의 훈련을 받은 이방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본문 52절을 놓치면 절대 안 됩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 핍박 속에서도 기뻐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가 됩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으로 훈련받고, 성령으로 충만하며,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의 1차 선교의 중심지는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처음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지만, 한 주 후에는 상황이 바뀝니다. 유대인들은 시기하고 비방하고 선동합니다. 결국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방향을 돌리고, 이방인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둘째, 시기와 비방과 선동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셋째,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분노
행 13장 42~52절 / 성서아카데미
설교 이후의 반응
지난 주일에 우리가 함께 공부한 바울의 설교 이후에 일어난 반응인 오늘의 본문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진술은 아니다. 그 이유는 저자인 누가가 이 사건을 현장에서 확인한 사람이 아니라 충분하지 않은 자료에 의지해서 어떤 신학적 의도를 전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진술에 일관성이 부족하더라도 이 진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추호도 없다. 성서 텍스트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새로운 지평에서 해석한 문서이기 때문에 그 해석이 바른 길에 놓여 있기만 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잘못된 게 아니다. 예컨대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불기둥과 구름기둥’ 같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공동체가 화산폭발 현상을 하나님의 현현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시각에는 좀 미숙한 세계이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 나름으로 야훼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점에서 크게 잘못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실제적인 초자연적 사건이라고 고집을 피우면서 오늘도 역시 신자들로 하여금 그런 초자연적인 사건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처럼 가르친다면 성서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만약 성서에서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중요하다면 오늘 기복신앙이나 감상주의적 신앙 같은 것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아닐까? 왜냐하면 그런 모든 가르침도 역시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니까 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놓여 있다. 하나는 이미 우리가 주술 이후의 세계에 돌입한 상태에서 주술적인 세계관으로 기독교를 선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오류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 시대의 신앙이 비록 신화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 집중했지, 요즘처럼 대중추수주의(포퓰리즘)나 대중선동에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말이 약간 옆으로 흘렀는데, 본문으로 돌아와서, 설교 이후의 전반적인 사태 진행을 검토하면서 이 텍스트에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들을 짚어보도록 하자. 본문에 따르면 바울이 회당에서의 예배를 모두 마치고 나올 때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다시 와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42). 그런데 청중이 흩어진 다음에 많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왔으며,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해서 살아가라고 권했다(43). 42절의 청중들과 43절의 청중들은 같은 사람들인가, 다른 사람들인가?
이야기는 한 주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다음 안식일로 접어든다. 온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였다(44). 그런데 그 군중을 본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대하고 욕을 했다(45). 그 모인 곳이 회당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유대인들이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인가. 그렇다면 바울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집결시켰다는 말일까? 이런 것에 관해서 본문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다시 말씀을 전해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에 따라서 그 다음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게 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박했다는 사실만을 적시하고 있다. 저자는 바울을 적대하는 유대인, 호응하는 유대인, 적극적으로 따르는 이방인들을 필요에 따라서 적당하게 등장시키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누가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의 적대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46,47). 다음과 같은 바울의 언급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다. “바울로의 말을 듣고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정된 사람들은 모두 신도가 되었다. 이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48). 이어서 유대인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바울 일행을 억압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출신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귀부인들과 유지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르나바를 추방했다. 바울과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125km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복음서의 전통에 따라서 발의 먼지까지 털어버리고 떠났지만(눅 9:5, 10:11) 그곳에 기독교 공동체가 설립되었다는 사실(52)에 비추어보면 그렇게 자연스러운 진술은 아니다.
회당 설교
바울로와 바나바는 분명히 유대인들을 떠나서 이방인에게 간다고 단언했는데도 불구하고(46) 그 뒤로 계속해서 회당 출입을 하였다(14:1, 17:1). 그는 오늘의 사건이 있은 뒤로도 매우 오랫동안 안식일과 회당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에게 회당은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예수님도 공생에 초기에는 회당과 가깝게 지내셨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경건하게 살려든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영적인 훈련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최소한 종교적인 대화가 소통되는 이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회당과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대신 그 당시 종교 엘리트 집단이라 할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 의해서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으면서 회당으로부터 축출당한 셈이다. 우리가 사도행전 앞부분에서 살펴본 대로 팔레스틴 공동체는 물론이고 바울 같은 이방인 선교사들도 여전히 회당 전통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초기 공동체의 모든 정신적 뿌리가 바로 유대교라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제도 중의 하나가 곧 회당이다. 회당에 관한 연구가 제법 이루어졌지만 정확하게 그 기원이나 의미에서 대해서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회당이라고 일컫는 단어는 70인역에 등장하는 ‘시나고게’인데, 이것은 단순히 모임이라는 뜻이지 어떤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다. 시나고게보다 좀더 종교적인 용어는 ‘프로슈케’인데 이것은 ‘기도’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나고게와 프로슈케가 반드시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지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유대인들의 종교교육과 일반교육을 위해서 별도로 모일 수 있었던 장소가 곧 회당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의 성전은 종교 엘리트들이 독점할 수 있던 공간인 반면에 회당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보아도 괜찮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분간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며, 바울도 역시 회당을 복음 전파의 전초기지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박해
본문은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보인 박해를 매우 부도덕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일단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심에 북받쳐서 바울의 말을 반대하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자는 유대인들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민족적인, 혹은 종교적인 문제에서는 매우 민감하다는 점에서 이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지금의 장소가 예루살렘이나 더 넓게 보아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 도시인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런 표현에는 약간의 과장이 엿보인다. 누가는 여기서 사건 진행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비약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누가가 제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박해는 급기야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는 데까지 발전한다. 그런 행동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선동이겠지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었다. 안티오키아에서는 디아스포라인 유대인들도 역시 소수 민족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적 전통을 해체하려는 사람들을 그런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바울의 설교를 듣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은 원래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있었는데(43), 바울과 바나바가 추방당할 때 이들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설명이 없다.
저자 누가가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났던 소동에 대해서 그렇게 수미일관하게 접근하지 않기는 하지만, 선교 초기부터 복음과 유대교 전통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으며, 그런 갈등으로 인해서 복음이 주로 이방인들을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사실 누가가 말하려는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제 유대인들이 분노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짚어보려고 한다. 그것은 곧 복음의 본질에 관한 해명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의 거부
이미 바울이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희 비웃는 자들아, 질겁하고 죽어 없어져라. 나는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엄청난 일을 하리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줄지라도 너희는 결코 믿지 않으리라.”(13:41, 하박국 1:5). 유대인들과 논쟁을 다루고 있는 오늘 분문에서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고 지적한다(46).
유대인들은 왜 믿지 못하고 거부했을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표상과 달랐다는 게 그 대답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인간에게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대답이다. 유대인들이 예수에게서 발생한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지 못하고 믿지 못했다는 말은 결국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하나님 경험을 폐쇄적으로 수호하는 데 머물렀다는 뜻이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자신들의 인식 범주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 스스로 자유롭게 열어간다는 사실을 좀더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예수의 사건에서 메시야 표상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선입관, 또는 전(前)이해에 근거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본질에 접근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모든 해석은 전이해가 작용한다는 말이 일리가 있긴 하지만 문제는 그런 전이해에 매달리는가, 아니면 그런 전이해가 지양되는가에 달려 있다. 자기의 전이해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인식의 층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곧 공부다. 특히 세계를 창조하고 완성할 하나님에 관한 공부에서는 거의 혁명적으로 자기의 생각들을 허물어내야만 한다.
그런데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적 신앙을 고수하는 일에 몰두한 유대인들은 예수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자신들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믿을 수 없었고, 더 나가서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행 13장 42~48절 / 신성종목사
먼저 저와 여러분들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설교를 듣기 전에 서로 인사를 합니다. 인사는 사람들끼리 만나거나 헤어질 때에 주고받는 말을 말합니다. 그런데 각 나라별로 보면 인사법이 아주 다양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good morning] 하면서 인사를 하는 것은 영국에는 항상 안개가 많고 날씨가 좋은 날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오늘 날씨가 좋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으로(I wish you have good morning), 이런 인사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만나면 [How are you?] 하고 인사를 하는데 이것은 상대방의 형편이나 기분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guten morgen]하면서 영국 사람들과 같이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지만 그러나 임산부나 용무로 출타한 사람들은 인사를 안 받는 것이 통례입니다. 인사 속에 마귀가 있어서 인사를 받으면 그 마귀가 옮아와서 해를 가져온다는 미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요즈음뿐만 아니고, 항상 전쟁으로 시달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만나면 [shalom](평화)라는 인사를 합니다. 그것은 너무 전쟁 속에서 시달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Karis]하고 인사를 하는데 그것은 은혜, 혹은 돈을 안 받고 거저 주는 선물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서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와서 그것을 그냥 이웃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 보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편지에 쓰고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다 같이 인사하는 법대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인사법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옛날 가난할 때에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고 인사하였습니다. 웃기는 것은 새벽에도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가 변했습니다. 이유는 세상이 너무 어지럽다 보니 “지난밤에 총에 안 맞았습니까”하는 뜻입니다. 요즈음에 저는 “반갑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고 정광욱 목사님은 “잘 쉬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하고 또 어떤 분들은 “건강하시지요?”하고 인사를 합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인사가 미국 사람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오늘 제가 장황하게 서두를 시작하는 이유는 은혜란 말이 헬라 사람들의 인사였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이 은혜란 말은 성경에 267회나 나옵니다. 역사적인 뜻은 [공짜]란 말이고, 글자의 뜻은 [호감](favor)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이 뜻을 변질시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설교에 감동이 있었을 때에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목회자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예배시간에 졸던 사람도 나올 때의 인사는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은 교인들이 목회자들에게 인사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는 은혜란 말을 본래 성경의 뜻으로 사용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5년 전에 미주 성산 교회에 와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회에 가장 저를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으면서 항상 방해를 해왔습니다.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신 성종, 그 사람입니다. 저는 지난번 특별기도 때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강해하면서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이 단에 설 수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용서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슈퍼맨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저의 간증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은혜에 동참하기를 축원합니다.
1. 그러면 은혜의 참 뜻은 무엇입니까?
자격을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갚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이와 비슷한 것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목회자에게 대한 인사로 변질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처럼 사는 신자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녀처럼 사는 신자입니다. 종처럼 사는 신자들은 행위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염려 속에서 삽니다. 주인께서 나를 싫어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입니다. 그러나 자녀는 신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잘하던 못하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이렇게 행위 지향적인 성도가 있고, 은혜 지향적인 성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자입니까? 자녀처럼 항상 확신 속에서 사는 은혜 지향적인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에 살면 은혜 받는데 장애물이 많습니다. 미국의 문화가 말로만 청교도의 신앙에 근거한다고 했지 사실은 은혜를 받기 어려운 장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존(홀로 서기, 부모로부터의 독립, 자녀로부터의 독립), 개인주의(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행동주의(열심히 하면 된다는 사상),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착한 사람이 되라는 식의 가르침은 다 은혜 받는데 장애물이 됩니다.
2.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들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존 뉴톤 목사는 천국에 가면 세 가지의 기적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와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꼭 만나리라고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오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천국에 와있다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인간적으로도 얼마나 부족한데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제가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습니까?
(2)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통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가는 곳마다 성공했습니다. 능력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경험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3) 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주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많은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사실 바울은 설교를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찬송가에 보면 우리가 “바울 같지 못하나”란 말이 나옵니다만 사실과는 다릅니다. 고후 10장 10절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그러므로 주의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합니다. 믿습니까?
(4)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축복이 나의 공로나 수고로 된 것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돈도 내가 땀 흘려 벌었고, 다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보다 더 노력하면서도 가난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북한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중국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무원들이 한 주에 60시간 이상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한 달 동안의 임금이 200불이 안됩니다. 북한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 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때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다 물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노아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의 선행이나 공로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기록한 점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큰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창 33:11)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소서”(출 33:13).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3.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겠는데 어떤 종류의 은혜가 있습니까?
(1) 먼저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행 15:11).
(2) 다음에는 [부르심의 은혜]가 있습니다(갈 1:15).
(3) 또 [믿음의 은혜]가 있습니다(행 18:27).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동정녀 탄생이 믿어지며, 어떻게 부활이 믿어지며 어떻게 수많은 이적이 믿어집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죄 사함의 은혜]가 있습니다(엡 1:7).
(5)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형통의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그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4. 그러면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예 화) 저는 가구를 만드는 공장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가구의 겉에 광택을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샌드페이퍼로 표면을 문지르고 또 문지르고 그런 다음에 락카를 칠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만족할 때까지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광택 나는 가구처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험이라는 샌드페이퍼로 우리들을 문지르고, 다음에는 은혜라는 락카로 칠을 해서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사할 수 있는 최고급 신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화) 저는 지난 화요일 밤에 두 시간쯤 자고 일어났는데 시계를 보니 밤 한시입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최근에 저는 대화식 기도를 많이 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제가 먼저 불평을 했습니다. 왜 저는 열심히 설교를 준비하고 내용도 풍성한데 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예, 너의 아이큐가 얼마냐? 잘 모릅니다. 그러면 너는 내가 성경을 통해서 한 말을 다 이해하느냐? 아니요. 너는 내가 한 말을 다 기억하느냐? 아니요. 너는 내가 한 말을 다 실천하느냐? 아니요. 그런데 너는 이런 것을 교인들에게 요구하고 있지? 예. 그러면 설교할 때, 먼저 쉽게, 다음은 재미있게 그리고 유익이 되게 하라. 그러면 은혜가 충만할 것이다. 하나님, 얼마나 쉽게, 얼마나 재미있게, 얼마나 유익이 되게 해야 합니까? 쓸 것이 없도록 쉽게 하고, 조는 사람이 없도록 재미있게 하고, 출석한 사람들이 오늘 수지맞았다고 생각하게 하고, 결석한 사람들은 오늘 손해가 많다고 생각하게만 하라. 예, 그러면 오늘 설교는 준비가 다 끝났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지요. 사실 저는 화요일까지는 설교 준비가 끝날 정도로 열심히 준비합니다. [비우고], [씻고], [담으라]고만 하라.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저는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카리스마적인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감동대로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은혜 받는 비결은 먼저 비우고, 닦고, 담으면 됩니다.”
(1) 먼저 비울 것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릇과 같아서 별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본인들은 모르지만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움도 들어있고, 음란도 들어있고, 고집도 들어있고, 마치 쓰레기통처럼 더러운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여기서 버릴 것이 아주 많지만 중요한 것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가 은혜 받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까?
먼저 우리의 [체면]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합니다. 다음에는 [자존심]이 뭐기에 이것이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또 과거의 신앙 스타일이 새로운 것을 못 들어오도록 방해를 합니다. 소위 전통성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특별히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과 오해가 우리들을 방해합니다. 이런 것들을 먼저 쓰레기 비우듯이 다 버려야 합니다. 버리실 분만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나 비우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는 마음의 그릇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은혜를 충만하게 담을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깨끗이 닦을 수가 있습니까? 옛날 구약시대에는 성전 안에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들어갈 때마다 거기서 손과 발을 씻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씀의 물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그것으로 씻김을 받아야 우리의 심령이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2천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이 어떻게 나와 관계가 이루어집니까? 어떻게 나와 연결이 됩니까? 오직 믿음뿐입니다.
(3) 끝으로 담아야 합니다.
구슬이 세 말이라도 꾀어야 하듯이 담아야 합니다. 담는다는 것은 기도하여 간구 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롬 8:15-27). 지난번에 3주간의 특별 새벽기도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금식 기도에 약 200명이 참여했습니다. 새벽에 많이 나온 날은 175명이 나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는데 그 중에 4분만 간증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간증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또 담는다는 것은 순종을 말합니다. 감이 나무에서 아무리 많이 떨어져도 담아야 내 것이 되고,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그릇에 담아야 식수가 됩니다. 이것은 바로 순종을 말합니다. 때로는 목회자가 “박수를 칩시다, 무릎 꿇고 기도합시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금식기도 합시다, 특별새벽기도회에 참석합시다, 전도합시다”하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어린아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바로 순종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왕도 처음에 순종을 잘 할 때에는 왕이 되고, 하나님이 형통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서부터는 왕의 직분뿐 아니라 심지어 생명까지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형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데 이것을 교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브라질의 아마존 강은 세계 최대의 하구를 가진 강입니다. 무려 7만 평방킬로나 되기 때문에 너무 넓어서 양쪽 언덕이 안 보입니다. 처음에 이 곳에 오는 사람은 강 위에 있으면서도 아직도 바다 가운데 있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한번은 대서양에서 폭풍으로 인해서 오랜 동안 표류하던 배 한 척이 아마존 강 하구에 도착했습니다. 지도상으로 보니 하구인데 여전히 언덕이 안 보였습니다. 마침 다른 배가 내려오고 있으므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식수를 구하는데 아마존 강을 어느 쪽으로 가면 됩니까?” 그러나 마주 오던 배에게 말합니다. “지금 이미 아마존 강 한 복판에 있소 하면서 물통을 내리고 뜨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물론 풍성한 삶의 축복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의 한 복판에 있기 때문에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필요한 대로 받으면 됩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수용과 거부
행 13장 42~52절 / 김필곤목사
옛날 서울에서 부목사로 봉사하던 교회에 충청도가 고향이신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 때 성도들이 늘 하시는 말씀이 충청도 사람들을 느리다고 하였습니다. 충청도 사람이 얼마나 느린지 일하다가 돌이 굴러가면 "아부지 돌 굴러가유" 하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충청도 분들이 느릴까요? 사투리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 돌아가셨습니다."라를 경상도 사람은 " 운명했다 아임미까."라고 하고 전라도 사람은 " 뒤져버렸어라."라고 하며 충청도 사람은 " 갔슈."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 잠시 실례합니다."도 경상도는 " 좀 내좀 보소." 전라도는 " 아따 잠깐만 보더라고." 그런데 충청도는 " 좀 봐유. "라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 괜찮습니다."도 경상도는 " 아니라예." 전라도는 " 되써라 " 충청도는 " 되슈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녹색 연합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작은 것은 아름답다"에 의하면 충청도 사람들이 성격이 급하고 빠르다고 합니다.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제주도에 거주하는 5백명을 대상으로 책읽기 속도. 자동차 과속 사례, 50m걷기 속도, 114안내원 신속도 등을 조사해 보았더니 충청도 사람이 제일 빠른 것으로 드러났다고 합니다. "충청도 사람이 자동차 과속위반이 잦고 책읽기. 걷기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말잘하는 게그맨 반절 이상이 충청도 출신이라고 합니다. 이영자. 서세원. 서경석. 홍기훈. 임하룡. 최병서. 최양락. 김학래. 신동엽. 황기순. 김정렬 등 내로라 하는 개그스타들이 모두 충청도 출신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도 어떤 분들은 그래도 충청도 사람은 느리다라고 말하시는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을 고정관념이라고 합니다. "경상도 사람은 어떻고 전라도 사람은 어떻게, 큰 교회는 좋은 교회고 작은 교회는 나쁜 교회고, 공부 못하면 불행해 지고, 일류학교 다니는 사람은 인생도 인류이고 3등 열차 타는 사람은 인생도 3등 인생이고, 돈많은 사람은 행복하고 가난한 사람은 불행하고, 10년 동안 셋방 살았으니 앞으로 죽을 때까지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등등과 같은 것 다 고정관념입니다. 고정관념(Stereotype)이란 특정한 한 집단에 대하여 기존에 부과된 지나치게 단순화된 기대나 생각을 말합니다. 웹스터 사전에서는 고정관념이란 강박 관념적이고 불건전한 집착이나 편견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은 마음이 돌같이 단단하게 굳어 버린 관념입니다. 사물이나 사건을 스테레오로 보지 못하는 단순한 관념입니다. 자신의 경험만을 맹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물을 볼 때 자기 시각으로 왜곡하고 축소하고 확대하고, 변색, 변질, 날조하기가 쉽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생각이라도 그것이 사람의 마음 속에 한 번 달라붙으면 여간해서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공화국"에 동굴 이야기가 나옵니다. 깊숙한 동굴 속에 손발과 몸이 묶인 채 모닥불이 비쳐주는 그림자만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겨우 그 포박을 풀고, 동굴을 나와 태양이 비치는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다시 동굴에 돌아와서 동료들에게,“너희는 태양이 아닌 그림자만 보고 있는 거야!”라고 설득해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 익숙하다 보니 그림자를 실체로 간주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과거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할 때 지구가 둥글다고 믿지를 않습니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둥글다고 하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1. 거부하는 유대인들
1)본문: 오늘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당시 유대교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바울이 설교를 하였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첫 번째 한 설교입니다.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15-22),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23-31)에 대하여, 용서와 자유(36-39)에 다하여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시고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어 죄 씻음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으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5절을 읽어보십시오. 마음에 시기가 가득찼습니다. 과거에는 자신들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를 따르니 시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반대하면서 비방했습니다. 자신들의 고정관념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고, 어떻게 다윗은 죽었는데 예수님을 살아 날 수 있고 어떻게 그 분을 믿으면 죄씻음을 받고 의롭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그들의 관습적으로 그들의 경험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선동합니다. 핍박케 합니다. 쫓아 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서도 이런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자기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설교를 들어도 불평하고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조금도 변화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씨가 문제가 아니라 밭이 문제입니다. 씨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기름지지 않은 밭에 씨가 떨어지면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돌밭, 길가 밭, 가시덤불 밭을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말씀을 거부할 때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4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지만 그들이 영생을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여 결국 복음은 이방인에게 갔고 그들은 영원한 형벌 지옥의 형벌을 당할 자가 된 것입니다.
2) 우리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복음을 받아들여 영생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하는 고정관념이 무엇입니까? 내가 알고 격은 경험입니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입니까?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고 경험하면 얼마나 경험합니까? 내가 경험하지 못했다고 존재하는 것이 없습니까? 내가 알지 못한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할 수 있습니까?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 중에 내가 경험하는 것은 60억 만부의 일 100억 만분의 일도 아니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면 얼마나 경험하겠습니까? 우리 나라만 해도 매년 한해 신간이 2만 3천 종 이상 발행되고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하루살이와 매미와 개구리의 우화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날씨 좋은 어느 여름날이 었습니다. 하루살이와 매미 그리고 개구리가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처럼의 회동이라선지 할말들이 많았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촐랑대는 하루살이가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세상살기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습니다. 매미와 개구리는 물끄러미 하루살이의 이야기를 듯는 둥 마는 둥 무덤덤한 표정을 짓습니다. 하루살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내일 만나자는 것입니다. 매미가 개구리에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루살이는 제 분수도 모른다고 툴툴거립니다. "개구리 형님. 쟤는 언제나 철이 들지 걱정입니다. 자기수분도 모르고 날뛰니.. 자기가 이 세상을 보면 얼마나 본다고. 오죽하면 하루를 살다 가는 것이 하루살이 아닙니까. 제 주제에 감히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닌데." 매미는 하루살이가 겪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일주일을 살기위해 7년 동안 땅속에서 지내는 구더기생활에서부터 이슬을 먹고 사는 이야기 등을 흥미진진하게 말합니다. 매미가 작별 인사를 하며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자고 합니다. 동그마니 앉아 있던 개구리가 입맛을 쩍쩍다시며 구시렁댄다. "야, 여름 한철 사는 너희들이 어찌 내 삶과 견줄 수 있다고 떠벌려. 고작 하루나 일주일을 살면서 세상을 다 본 양 떠들고 있으니.."개구리의 독백은 계속됩니다. 나는 너희들이 보지 못하는 가을도 보고 겨울의 세계도 겪는다고 으스댑니다. 사람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너무 크도 보지 못하고 너무 적어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세균이 없고 우주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크도 듣지 못하고 너무 작아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제 까지 알지 못했던 하늘의 세계를 알게 됩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생활이 변화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천국에 갑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내 성격이 바꾸어집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절망적인 사람이 소망적인 사람으로 바뀝니다. 예수를 믿으면 소극적인 사람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바뀝니다. 예수를 믿으면 비관적인 사람이 낙관적인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단순합니다. 나의 고정관념을 바꾸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 나의 구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어떤 사람은 술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사 때문에 어떤 사람은 담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서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잘못된 고정관념입니다. 그것을 부수어야 합니다. 술 때문에 담배 때문에 예수를 못믿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사 때문에 돈 때문에 예수를 못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참 자유를 누리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고 질병에 걸린 자가 건강해 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데이비드 퍼킨스는 "달팽이는 어떻게 고정관념의 틀을 깼을까?"라는 책에서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 들어가는 순간 깨달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까지, 그리고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에서 인상주의까지, 불의 사용에서 레이저까지, 어떻게 고정관념을 깨고 몇 마디 말로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쿠데타적인 사고가 일어나 문명을 형성하고 진보하였는가를 5가지 단계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1단계 : 오랜 탐색 - 생각의 쿠데타는 오랜 탐색을 필요로 한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르키메데스, 비행기 다 오랜 연구 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단계: 눈에 띄는 변화의 부족 - 원래 쿠데타란 외면적인 변화가 거의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3단계: 예기치 못한 사건 - 일반적으로 생각의 쿠데타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욕조,
4단계 : 순간의 인식 - 생각의 쿠데타는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명한 '유레카'가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5단계 : 변형 - 혁신은 우주의 정신이나 물질세계를 변형시킨다는 것입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나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그들의 깨달음에 의한 혁명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변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 기도한 사람이 있고 우리 하나님께서 곡식 거둘 때까지 무르익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건을 통해, 순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 후에는 완전히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주님께서 내의 생각과 나의 생활과 나의 미래와 나의 인생을 지배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 예수님께서 우는 자의 위로가 되시고 낙심자의 소망이 되시고 죽을 자의 부활이 되시는 것입니다. 고집하지 마십시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을 전적으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인생의 주관자로 모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인생의 결과와 과정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시며 천한 자의 높임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94장 1절)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 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의 생명 되시네 (94장 2절)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94장 3절)"
2. 수용하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1)본문: 그러나 이방인들을 보십시오. 바울의 설교를 듣고 어떤 반응을 하였습니까?
(1)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전해 달라(42)고 합니다. (2)폐회 후에 바울과 바나바를 좇습니다(43). (3)그 다음 날도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 듣고자 모였습니다(44).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과거의 고정관념을 버렸습니다. 복음이 활화산처럼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48절을 읽어 보십시오. (1)이방인들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다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48) 복음을 받아들이니까 마음에 신비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문밖에 두르리시는 예수님을 마음 속에 보시니까 믿음이라는 신비한 것이 생겨났습니다. (2)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49). 핍박으로 움추려 질 것 같은 복음이 더욱 퍼지게 됩니다. (3)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5). 이것이 복음을 수용할 때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2)우리는 복음을 수용하여 믿음과 능력을 체험받고 기쁨과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두나미스 다이나 마이트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죽음이 물러갑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불신이 살아집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슬픔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영적 풍요로움이 일어납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분열이 살아집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의심이 살아집니다. 복음들어가면 시기와 질투, 불안과 근심이 살아집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 들이면 어둠이 거쳐지기 시작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9)"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그 빛이 있으면 인생이 환하게 밝아 옵니다.
"(842)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 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이 있음으로 내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묾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저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예수 나의 당신이여"
결코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불신이 믿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악령이 성령을 이기지 못합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온다하여도 예수와 함께 있으면 승리합니다. 믿음이 보배입니다. 믿음이 재산입니다. 믿음이 들어가니까 그 핍박 중에서도 기뻐하고 즐거하며 찬양합니다. "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397장 1절)"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앉은 뱅이가, 문둥병 환자가, 귀머거리가 주님을 만남으로 일어납니다. 믿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힘이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한국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이며 지금 한국인으로서는 미국 행정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강영우 교수를 알 것입니다.
강영우 교수는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을 맞아 앞을 못 보게되었다. 망막이 떨어져나간 것이었습니다. 시력을 잃은 후 5년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불운했던 시기였습니다. 사고 1년 전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어머니마저 아들이 실명한 데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부모를 대신해 공장에 다니면서 동생들을 돌보던 누나마저 과로로 사망했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게 되었고 당장 먹고 살길이 없어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보내지고 남동생은 남의 집 철물점으로 보내졌습니다. 2년 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고 2년간 하나님에게 기도로 매달렸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결국 1년간 점자와 한글 타자를 배워 맹학교 중등부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고통을 당하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팔자를 탓하며 세상을 비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으로 절망의 늪에서 일어났습니다. 연세대학에 입학하려 했습니다. 원서접수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NCC 총무였던 김관석 목사님의 도움으로 결국 입학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가려고 했습니다. 국제로터리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았지만 당시 장애가 해외유학 결격사유라 학생여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장애인 최초로 정규 유학생이 될 수 있었고 한국 최초의 맹인 박사가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려고 했습니다. 숙명여대 영문과를 나오고 미국에서 유학한 석은옥씨입니다. 부모가 결혼시키겠습니까?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모를 끝까지 설득해서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큰아들은 하버드대를 나와 지금은 하버드 의대 안과전문의 과정을 밟고 있고 작은아들은 시카고대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듀크대 법대에 진학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본래 아내 이름은 석경숙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바꾼 것은 처음 10년은 석(石)의 시대, 다음 10년은 은(銀)의 시대, 다음 10년은 옥(玉)의 시대로 정해 석의 시대는 시련과 역경으로 가득찬 기구한 운명에 도전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데 목적을 두었고, 은의 시대는 행복한 가정을 꾸미며 새로운 가정의 공통된 이상을 위해 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고 옥의 시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산다는 목적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때 세운 세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했습니다. 시각장애라는 역경을 극복하고 박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두 아들을 훌륭히 키워 내고 남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장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루스벨트재단 고문으로, 국제재활교류재단 회장으로 활동하며 장애인을 위한 사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 유엔사무총장 등 세계 지도자들을 움직여 사회봉사를 하고있는 세계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실명을 하고 한때 세상을 원망했던 그가 이제 실명을 도구로 해서 세상에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쫓겨나면서도 성령 충만하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꼭 잘 되어서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나는 비록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들이 다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교회가 부흥됩니다. 믿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쓰지 않고 있어요. 어느 제가가 스승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에 보지 못한 자기가 하나있습니다. 귀중한 도자기입니다. 값지 도자기입니다. 이것 어디에서 가져왔습니까? 굶주려 죽은 거지에게서 가져 온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 이렇게 값지 도자기가 있는데 왜 굶주려 죽습니까?" 값지 도자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그것으로 밥만 얻어 먹으로 다녔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도자기의 가치를 모르고 결국 굶주려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만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값진 보배 믿음,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활용하지 못합니다. 늘 불평합니다. 비관적입니다. 낙망합니다. 부정적입니다. 소극적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 보다 환경이 좋겠습니까? 가진 것이 많았겠습니까? 미래가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며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문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waitley가 지은 "being the best-통념에서 벗어나 삶의 변화를 이루는 방법"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은 3가지 성격의 유형의 사람을 마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자-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현상 유지자-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현재를 지나치게 근심하는 자라고 합니다. 셋째는 몽상가-말은 잘하지만 좀처럼 실천에 옮기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열려있는 미래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현재를 근심하며 걱정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몽상가들도 아닙니다. 주님 주신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683)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행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우리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1)"
우리는 복음을 수용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나에게 있는 복음을 복음을 수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합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쁨,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성령 충만,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을 그들에게도 전합시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일할 것입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 다 믿게 될 것입니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장 42~52절 / 서금석목사
2000년 6월13일 오전 10시 38분. 평양의 순안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를 하는데 제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났습니다. 저만 그랬겠어요? 국민모두가 그랬겠지요.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는 동안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통역이 필요없는 같은 민족끼리의 정상회담. 김대통령이 비행기에 오르시기 전에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냉철하게"회담에 임하겠다 하셨는데, 회담기간 내내 정말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6월 14일 밤11:20에 남북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지요. 금방 통일이 되지는 않겠지만 더 두고 보아야 하기는 하겠지만 서로 믿고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남북한 화해와 협력,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이산가족 상봉, 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교류협력 등 점차적으로 나아지는데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참여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사랑의 주일 헌금은 북한동포를 위해 쓰여지도록 하겠습니다.
한주간 흥분과 감격으로 지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부담스럽고 힘겨운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사도 하면서 설교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목사들이 설교에 대해 부담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권목사도 설교할때마다 참 힘들어 합니다. 설교를 잘해야 하는데, 묻겠습니다. 어떤 설교가 잘하는 설교입니까?
첫째는 설교할 때 조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는 누가들어도(저학력자나 고학력자나)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평범해야 합니다.
셋째는 감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주에는 어떤 설교를 듣게 될까 하는 기대감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 설교들으면서 조는 사람이 있어요. 설교 해 놓고도 어떤 때는 아쉬운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지요. 격주로 결석하는 사람있지요. - 이런 것을 보면 저는 설교가로 남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제가 바울의 설교를 직접 육성으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성경을 보면 대단한 설교가 였습니다. 짐작 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설교한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1.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1)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42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바울과 바나바가 설교를 마치고 회당에서 나올 때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러한 말씀을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목사가 설교하고나서 제일 마음이 흐뭇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목사님 설교 한번 더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보다는 설교 다시 한번 듣게 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그랬어요. 다음 안식일에도 이러한 말씀을 더 듣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2)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습니다.
"43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예배마치고, 설교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많은 사람들이 뒤좇아갔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따라갔을까요? 한마디로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설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는 '나도 당신 처럼 살고 싶소. 당신이 믿는 하나님' 당신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소'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부흥회때 설교듣고 목사님과 이야기 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때가 있지 않습니까? 설교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듣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바울도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어떤 마음으로 들었기에 설교 한번듣고 세속말로 '뿅'갔겠습니까? 성령의 역사와 함께 평소에 삶과 신앙에 대해 진지하고도 무엇인가 사모하는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저도 감동적인 설교하려고 힘쓸터이니 여러분도 감동받도록 사모하시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뭐라했지요?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 은혜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이 그들에게 말을 건네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으라"권면했습니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사는 것" - 성도가 지녀야 할 소망이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내게 넘치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깊이 느끼며 감사하며 사는 생활 - 복받은 생활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3절과 44절 사이에 1주일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바울의 설교 후 다음 안식일에 온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회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다'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물론 바울과 바나바도 한주간 온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전도를 했겠지만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열심히 소문을 냈을 것입니다.
김대통령을 맞이하는 평양60만 시민들의 표정이 어떻했습니까? 동원되고 만들어진 것이었겠습니까? 그렇게만 볼 수는 없겠지요. 그들도 불신을 거두고 신뢰하며 평화롭게 살고 싶어하는 염원이 아니었겠습니까?
온동네 사람들이 다시 바울의 설교를 듣고자 하여 몰려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몰려들었습니다. 방송도 없었을 것이고 신문도 없었을 터였지만 소금 먹은 사람이 물 안 먹겠어요? 말씀듣고 은혜받은 사람들 가만이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와서 말씀을들으려 했습니다.
명심하세요. 은혜받았다는 증거는 다른 사람에게도 권면해서 같이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 복음을 전할 때는 언제나 박해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모하여 말씀 들으러 나온 사람들이 많으니 당연히 축제 분위기여야 한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에 핍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듣고 은혜가 되어서 기쁨이 넘치는데 반드시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하고 비방하고 나아가서 박해까지 합니다. 왜 반대하고 박해합니까?
(1) 박해하는 이유
①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도행전13:26에서 유대인과 관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유가 '몰라서' '무지'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머리에 뿔이 두 개쯤 달렸는 줄 알았어요. 왜 그랬겠습니까? 무지했기 때문에. 무지한 사람일수록 고집과 편견이 대단해서 양보할 줄 몰라요. 설교를 듣고도 몰라요. 내용도 모르고 무조건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② 45절 봅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변박(반대)하고 비방하거늘"
시기 때문입니다. 많이 모여서 설교듣고 은혜와 감동을 받는 것을 시기했습니다.
시기는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부자지간/부부지간에도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말할 것도 없구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하지 않습니까?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어요.(우리 교회는 말구요) 교인들이 잘되면 축하해 줘야 하는데 안 그래요. '지가 언제부터 '때로는 목사와 교인간에도 있어요. '시기.질투'는 마귀의 역사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깊이 보아야 할 것은 지금 박해하고 시기 질투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그리했습니까? 당시 세계정치를 이끌어 가는 나라는 로마였습니다. 정치는 로마였습니다. 철학과 문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헬라문화였습니다. 그리고 종교하면 유대교였습니다. 로마와 헬라에도 다신교적 종교가 많이 있었지만 힘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신교적 종교는 우상숭배가 심하고 도덕적인 타락이 극심했으므로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그에 비해 유대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니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종교는 유대종교다'하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방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새로운 설교-종교가 등장하는 듯 하자, 종교의 중심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시기, 질투 때문에 박해를 합니다. 대단한 교만 아닙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이 처음부터 환영받으며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참으로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더구나 선민으로서의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복음 안에서는 모두다 동일하다고 이야기 하니 가만이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할때는 쉽게 받아 들이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반드시 반대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꼭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군대에 가면 고참 중에 꼭 이런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만 보면 밥맛없다" 이유가 있겠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무슨 감정이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보면 입맛까지 잃어버린다니 어쩝니까? 밥 먹지 말아야 지요. 직장생활하다보면 비슷한 사람 만납니다. 그런데 기죽지 말아요. 복음 전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해 주셨지 않습니까? 힘내시기 바랍니다. 복음 전할 때 어려움이 오면 '당연하다'하고 생각하세요.
3.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하여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얻음에 합당치 않은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 향하노라"
(1) 담대하게전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담대하여야 합니다. 무모해서도 안되지만 기죽지 말고 담대해야 합니다. 이방지역에 전도하러온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곳에 이미 자리잡고 살던 유대인들이 비방하고, 공개적으로 반대하면 위축되기가 쉬웠을 터인데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하게,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조그만 반대에 부딪쳐도 쉽게 주저 않거나 포기하는 것입니다. 비겁합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지만 담대하지 못합니다.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때로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체면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따돌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따돌림이라는 것 - 무서운 것 아닙니까? 이슬람교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또 예수를 믿을 때 경찰이나 나라에서 반대해서 당하는 위협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집안에서 외면당하고 동네, 이웃에게 따돌림 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것 힘든일입니다. 학교에서 '왕따'(일본말로 이지메라고 한다지요?) 당하는 것 참 본인에게는 심각한 일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방하고 반대한다해서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2)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이유: 유대인이 하나님 말씀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둘씩 짝지어 세상으로 내어 보내시면서 '이스라엘의 길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하셨습니다. 유대인에대하여 뭐라 했습니까? 유대인의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47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유대인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창세기적인 표현을 하면 '축복의 근원'으로 삼아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셨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그 사명을 외면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제 내가 직접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과 은혜를 전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유대인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씀은 먼저 내가 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만 복과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를 주셨습니까? 먼저 여러분이 누리세요. 즐기세요. 그리고 거기서 머무르지 말고 반드시 이웃과 함께 나누셔야 합니다. 건강하십니까? 재능이 있으십니까? 재물이있으십니까? 쓰고 남은 것 묻어 두지 마세요. 하나님 영광과 이웃을 위해 쓰세요.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채워주십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유대인과 다를바가 없지요.
(3) 고난의 다른 이유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왜 고난이 옵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박해와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세상살이가 힘든 사람들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겠습니까? 세상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겠습니까? 세상 살만한 사람들, - 휴가가고, 여행가고, 놀러가느라 신앙생활하기가 힘이 들지요. 세상살기 힘들어야 간절하게 진실되게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때로는 신앙생활하면서 고난도 당하고 핍박도 받아 보아야 진신하고 깨끗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고난이 왔습니까? 그래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더 좋은 신앙, 더 귀한 은혜, 더 많은 축복이 눈앞에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의 순간들을 경험했던 유대인 학자('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썼음)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삶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이 저주이지만 의미를 깨닫는 자에게 고난은 놀라운 축복이 될 수 있다." 수용소 안에서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들은 이미 고난을 잘 극복하고 있었지만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저주요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4. 복음을 담대하게 전한 결과
바울과 바나바가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1)48절을 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말씀을 듣는 자는 기뻐했습니다.
말씀을 들으실 때 마음이 기쁘십니까?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기쁩니다. 특별히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마으이 기쁜 사람들 - 은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48절을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자'는 예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했어야 믿게 된다는 주장이 가능한데 46절에 '영생을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라는 구절과 연관시켜 보아야 합니다. 묻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예정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까? 예정때문이 아니라 영생에 합당지 않게 행동했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이방인이 구원받게 된 것은 예정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인 그들의 태도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했지요.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는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일이 귀중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심고 물주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심지 않고 물주지 않으면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찬송했습니다.
(2) 49절을 봅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전하니까 퍼졌어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열심히 전하십시오.
5. 계속되는 핍박에 바울과 바나바는?
말씀이 그 지방에 계속 퍼져나가자 바울과 바나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 핍박은 계속됩니다. 50절을 같이 봅니다.
"50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보세요. 핍박하는 자들도 집요하지 않습니까? '경건한 귀부인들'이란 누구를 가리킬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로마 정치와 헬라문화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하니까. 특별히 이방신을 섬기는 일은 성적인 타락이 심하다는 얘기인데, 귀족부인들 중에 그런 분위기에 혐오감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고 입교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바로 그런 귀부인들을 앞세우고 성읍의 지도층인사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했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세력도 만만치가 않지요? 끈질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깁니다. 성도는 싸움의 결과에는 마음쓰지 않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결과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겨놓고 싸운다" 언제냐가 문제이지 승리는 이미 결정된 싸움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51절 봅니다.
(2) 이고니온으로 떠났습니다.
"51두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몇가지 관심있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핍박이 지속되니까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왜 이고니온으로 갔을까요? 이고니온에도 복음이 필요하니까.
힘든 일 만나실 때 견딜때까지 견뎌야 하지만 계속되는 시련이 올 때 하나님은 다른 곳에 다른 일을 예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이길 막히면 저기 딴길이 있어요. 벽도 문이라 하고 나아가는 집념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벽이 단단할때는 문을 찾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 '발에서 티끌을 떨어 버렸다' 했지요? 유대인들은 발에서 티끌을 떨어버리는 경우는 그 사람과 관계를 끊겠다는 의미입니다. 때로는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결단도 필요합니다.
(3)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52절을 봅니다. "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핍박받고 이고니온으로 가면서 패배감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때 핍박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만 그러나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은 감사에서 오지요. 현재는 힘이들어도 인도하시는 하나님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쁨이 있으십니까? 주의 일 하십시오. 전도하십시오. 헌신하십시오.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충만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전도하는 사람에게 성령충만을 허락하십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기쁨과 성령충만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정리>
주님은 당신께 진심으로 기대를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은 외면하거나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문둥병자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도 고쳐주셨습니다. 간음한 여인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도 만나 주셨습니다. 삶의 현실이 고달프십니까? 주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하여 이기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주님 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하다가 핍박도 받았지만 기쁨과 성령충만함도 체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제가 바울은 아니지만 온성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온 가족이 함께 주 앞에 나아와 말씀 속에서 하나님 만나고 큰 은혜와 기쁨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남북의 화해의 기쁨이 여러분들의 삶가운데서도 퍼져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행 13장 42~52절 / 김 조목사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며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감찰하신”다고(히4:12)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들러날 것이라(13)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말씀이 아니요 지난날의 역사나 교훈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기에 육적인 문제뿐 아니라 영적인 문제도 시원하게 해결해 주십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은혜를 의지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 고침을 받으며 가난한 자 부자 되고 무능한 자 능력자가 되며 실패자가 성공자가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사도가 설교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나타난 반응, 결과가 오늘의 말씀입니다. 42,44,46,48,49에 다섯 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 제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보면서 몇 가지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됩니다. (42-43절)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니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히브리어 “헨”과 헬라어 “카리스”라고 합니다. 다양한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호의를 보이다, 베풀다, 자비롭다, 동정하다 라는 뜻으로 신약성경에 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롬3:24, 고전1:4, 갈2:21)을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눅1:30, 2:40, 행14:46)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호의를 받게 된다, 또 하나님의 동정 즉 사랑을 받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가 영적으로 구속의 은혜를 말하는 것으로 죄 용서함 받게 되고 의롭다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시니 영혼이 잘됨 같이 육적인 범사도 잘 되고 육적 건강도 주시어 언제나 평강의 축복이 충만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받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되니 사단의 시험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고 언제나 평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저 주시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의 어떤 공로나 노력에 의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기대 이상의 풍성함으로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롬5:15, 고후4:15) 이렇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갈2:21, 고후6:1)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함 받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 속에 있으면서 그것을 잊어버리고 내 생각, 내 고집, 내 계산으로 부정적으로 사는 것이 헛되게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이제 하나님의 말씀 귀로만 듣지 말고 마음으로 받고 삶으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2. 큰 부흥의 역사가 있습니다. (44-49절)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이게 되었고(44)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49) 하셨으니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부흥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요, 하나님의 말씀 받은 결과였습니다. 이 부흥이 내 심령,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임하시기 원합니다. 여기 부흥은 외적으로 숫자의 부흥도 있지만 심령과 영적 변화도 하나님과 가까이 한 부흥입니다. 유대인들의 시기에도 이방인들은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다 했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48,49)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받고 영육간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병 들고 약해진 심령이 새롭게 되고 육체도 강건하며 깨어지고 아파하는 가정이 치료되고 소생되며 혼탁한 정치가 답답해진 나라 경제가 회복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 나도 받고 힘 있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복음 전하여 큰 부흥 있게 한다는 것 쉽지는 아니합니다. 반대자의 모습을 보십시요. 처음에는 설교를 하라고 했습니다.(15절) 그런데 많은 무리가 모이자 마음으로 시기하는 죄를 짓습니다. 자기보다 따르는 자나 인기가 많으니까 자기중심으로 시기하고 말로 면박하고 비방했고 행동으로 성내의 유력자 통해 추방하려고 핍박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전할 때에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도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 다 믿었다 했고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삼락교회가 오늘날 이렇게까지 라도 부흥된 것은 많은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적인 복음 전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받고 전함에 어떤 어려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 받아 큰 부흥 역사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3. 기쁨과 성령의 충만한 삶이 됩니다. (50-52절)
사도들이 추방될 때에 발에 티끌을 떨어버린 것은 예수께서 제자 파송하실 때 이르신 말씀으로(마10:14) 그대로 행한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추방당하는 아픔을 겪은 것은 안정된 삶보다 하나님의 뜻인 널리 전파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받게 되니 성령 충만해지고 기쁨이 충만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받으니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사람의 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이 있게 되니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했습니다. 이렇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 예루살렘 공동체의 융성함 같게(2:4, 4:31, 10:44)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말씀 충만이 성령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받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충만하시고 내 심령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도 이러한 복 누리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안디옥교회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덧입고 구속의 은총으로 날마다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삶이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 받은 곳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듯이 영육간의 큰 부흥의 역사가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힘들어도 전하는 자 되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시고 극심한 반대자가 있다 하여도 하나님의 역사 이룹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성도에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듯이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꼭 같이 주어지고 있는데 왜 받는 자와 받지 못한 자가 되는지요. 이제 스스로 내 자신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판단, 경험, 지식으로만 받지 말고 자기의 입장이나 형편에 맞추어 따지지 마시고 하나님의 세우신 종을 통해 주시는 말씀 듣고 받아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다 받아 누리는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
행 13장 43절 / 김영규목사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행 13:43)
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
바울은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안디옥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ejpimevnein th'/ cavriti tou' qeou'”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번역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라”(공동번역)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으라”(현대인의 성경) “to continue in the grace of God.”(NASB, NIV, ASV, RSV, KJV) “By God's grace, remain faithful”(YLT) 항상 은총을 입고 살라는 말은 은총 없이는 못 산다는 뜻입니다. 은혜 가운데 계속 머물라는 말은 은혜 가운데 머물지 않으면 인생은 망한다는 뜻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cavri"” 인데 본래의 의미는 “여러 사람들에게 혜택을 가져오는 것” 즉, 복리를 의미했습니다. 이런 본래 의미에서 여러 뜻이 생겨났는데, 은혜, 호의, 친절, 감사, 기쁨, 보답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합니다. 생애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은혜는 바울 삶의 철학이며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신약성경에 바울이 보낸 13개의 편지들이 있습니다.(로마서에서 빌레몬까지) 이 편지들을 보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납니다.(롬1:7,16:20, 고전1:3,16:23, 고후1:2,13:13, 갈1:3,6:18, 엡1:2,6:24, 빌1:2,4:23, 골1:2,4:18, 살전1:1,5:28, 살후1:2,3:18, 딤전1:2,6:21, 딤후1:2,4:22, 딛1:4,3:15, 몬1:3,25) 너희에게 은혜가 있을 지어다! 은혜로 사는 것은 피조물로써 최고의 축복입니다. 은혜로 사는 것은 특히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써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 은혜보다 더 인생을 복되게 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은혜로 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은혜로 사는 것입니까? 왜 은혜로 살아야 합니까? 이제 그 중요한 의미를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 받으시고, 은혜로만 사는 축복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로 구원 받았다
은혜 가운데 첫 번째 은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죄인이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는 유일의 길입니다. 은혜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애와 관련하여 은혜라는 말을 두 가지 중요한 부분에 적용했습니다. 첫째는 구원에 적용된 은혜이고, 둘째는 사역(삶)과 관련된 은혜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은혜, 즉 하나님께 모든 죄를 용서 받은 은혜입니다.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가졌습니다. 부활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귀와 싸워 이기게 되었습니다. 죄를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복을 바울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지옥에 떨어질 죄인이 죄를 해결함으로써 이 모든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죄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최대의 현안입니다. 우리는 종종 강호순 같은 흉악범이 등장할 때마다 탄식합니다. 아아! 말세로다! 이 죄인을 어찌할꼬?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강호순이나 우리나 다 똑같은 처지입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요, 이미 심판을 받아 지옥을 약속받은 죄인들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처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0-18) 이 말씀이 지적하는 인간의 죄는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윤리적인 죄악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적인 죄악입니다. 윤리적인 죄란 사람들에게 짓는 죄악입니다. 살인, 강도, 사기, 도적질에서, 미움, 시기, 질투까지 손과 발, 입술, 혀, 눈, 귀, 신체의 모든 부분을 사용하여 죄를 짓습니다. 신앙적인 죄란 하나님께 대한 범죄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무신론입니다. 엄연히 하나님 세계에 살면서 그 주인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을 배척합니다. 하나님 대신 피조물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유엔 총회의 최대 의제가 뭡니까? 인류의 죄를 의제로 다룬 적이 있습니까? 아하, 인류의 죄를 어찌하면 좋을꼬? 의제로 채택한 적이 있습니까? 금년 대한민국 국회의 최대 쟁점이 뭡니까? 타락한 인간을 어찌하면 좋을꼬? 그래서 “타락한 인간 본성 개선 대책 위원회”를 만든 적이 있습니까?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인류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인류는 죄 때문에 망했고, 죄 때문에 지옥에 갑니다. 죄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류 최대의 현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될 형벌을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용서하시기로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면 용서 받습니다. 완전 무죄자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천국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구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아무 대가 없이 거저 주셨기 때문에 은혜라고 합니다. 만일 죄인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을 무슨 대가를 받기로 하셨다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까요? 무슨 이웃돕기로 되겠습니까? 사회봉사 명령으로 대치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보석금 1000억 원으로 되겠습니까? 30년 감옥살이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티베트 사람들처럼 평생 고행을 해야 되겠습니까?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수단으로 해결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푸시지 않는 한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하나님 자녀로 선택해 주신 것부터 은혜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천국을 바라보고 소망으로 살게 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도 갈 곳이 있으니 은혜입니다.
은혜는 삶의 원리다
은혜의 두 번째는 삶에 나타난 은혜입니다. 은혜는 죄인 구원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삶의 원리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다 하나님께 그 존재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붙드시지 않으면 자연만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제 서쪽으로 넘어간 해가 오늘 동쪽에서 떠오르지 않을까봐 걱정해 보셨습니까? 지난 겨울에 봄이 오지 않을까 걱정해 보셨습니까? 겨울에 얼어붙은 땅이 녹지 않고, 금년 봄에는 산과 들에 나무와 풀이 새로 돋아나지 않을까 걱정해 보셨습니까? 논밭에 곡식을 뿌리면서 뿌린 곡식이 그냥 사라져버릴까 걱정해 보셨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서해바다의 물이 태백산으로 거꾸로 흐를까 걱정해 보셨습니까? 고맙게도 우리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자연계의 질서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계의 질서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질서를 세우시고 은혜로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없다면 자연 만물은 다 파괴되고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원자의 세계가 무질서 하다면, 만일 태양계와 같은 천체들이 무질서하게 움직인다면 서로 충돌하고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우주는 영원히 무질서 속에서 파괴되고 말 겁니다. 그러나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이 만물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자연계의 질서, 물리학의 법칙이나, 화학의 법칙이나 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질서 때문에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시104:10-15)
인간의 생존도 그렇습니다. 인간 생존은 하나님 은혜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하나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단 하루도 생존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사망의 골짜기입니다. 질병의 죽음, 사고로 인한 죽음, 천재지변으로 인한 죽음, 각종 재난, 불량 식품으로 인한 죽음, 공해 등등. 이런 가운데 하나님이 숨 쉴 공기를 주셨으니 매일 숨을 쉬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경작할 땅을 주셨으니 양식을 얻습니다. 적절한 기후를 주셔서 햇빛과 비를 주시니 농작물이 자라납니다. 공중에 새를 주시고, 바다에 물고기를 주시고, 들에 짐승들을 주셨으니 인간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 양식이 있고, 숨 쉬는 공기가 있다고 다 생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숨 쉬고 호흡할 수 있는 건강이 있어야 생존합니다. 양식을 먹고 소화시킬 수 있는 건강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환경과 건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창세기에 보세요. 아담이 타락했을 때 자연 환경도 징벌을 받았습니다. 땅이 소산물을 제대로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초목 대신에 가시덤불이 나오고 척박한 대지가 생겨났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3:17-18) 잘 살고 못 사는 것 때문에 원망 불평하지 마세요. 숨 쉬고 살아가는 생존 자체가 하나님 은혜요, 하나님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맡은 모든 직분과 사역이 하나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1:12-14) 하나님 교회에서 사도직을 맡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크게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인데 충성된 자로 여기시고 직분을 계속 맡겨주셨습니다. 저는 강단에 설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별로 신통치 못한 종에게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할 직책을 매주 맡겨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직분자 여러분! 내가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된 것이 내가 잘 나서 된 일입니까? 오늘 내가 성가대원이 되고, 교사가 되고, 구역장이 된 일이 내가 잘나서 된 일입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충성스럽지도 않은 사람을 충성된 자로 여기셔서 거룩한 직분을 맡겨주신 줄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 교회에서 모든 직분은 다 하나님 은혜의 선물입니다. 오늘 내가 남보다 조금 더 일을 잘 한다면, 오늘 내가 남보다 조금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줄 알고 자랑하지 마세요. 오히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세상의 모든 직분이나 일도 마찬가집니다. 가정의 직분, 직장에서의 직분, 국가적 직분, 사회적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 다 은혜입니다. 저는 청년 시절 장가들기 전에 이런 근심을 가끔 했습니다. 내가 결혼하면 과연 한 가정의 가장 노릇을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한 가정을 지탱시킬 능력이 있을까? 내가 과연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 그런 가운데 얼떨결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the best"는 아니지만 그래도 “average” 정도의 가장 역할은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은 어머니도 주시고, 좋은 아내도 주시고, 좋은 자식들도 주시고, 좋은 일을 하게 하신 결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말씀을 맡고 영혼 살리는 일을 가장 좋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살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 은혜입니까?
오늘 내가 세상에서 맡은 모든 직분은 다 하나님 은혜의 선물입니다. 아버지 역할도 하나님 은혜입니다. 어머니 역할도 하나님 은혜입니다. 부모의 역할, 자녀의 역할이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직장에서 어떤 위치를 얻은 것도 하나님 은혜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세요. “나는 사장할 사람인데, 나는 경영자가 되어야 할 사람인데 이런 말단에서 썩고 있네!” 이런 생각 하지 마세요. 공주병이 뭡니까? 나는 공주처럼 살아야 될 사람인데 왜 재수 없게 이런 남자 만나서 불행하게 살고 있을까? 요따위 생각 하지 마세요. 오늘 내가 어떤 직분을 맡았든지 다 하나님 은총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노예가 되었다고 원망했습니까? 감옥 일을 하게 됐다고 불평했습니까?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왜 포로 신세가 되었느냐고 낙심 절망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이 다 하나님 섭리인 줄 알고 순종했습니다. 모든 직분은 하나님 은혜입니다. 심지어 노예가 된 것까지도 하나님 은혜로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을 30세에 총리로 세우셨지요. 그러니까 다니엘을 바빌론 파사의 고관이 되게 하셨지요. 내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존과 사역이 다 하나님 은혜임을 잊지 마세요.
은혜의 비전을 가지라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철학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과 환경을 다 은혜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합니다. 항상 긍정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혜택을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좋게 생각하고 호의를 갖고 대합니다. 자연히 대인관계가 잘 되고 성공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둘째는 인생을 우연히 존재하게 된 로또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자기 환경 자기 조건을 남과 비교합니다. 그래서 항상 남보다 못한 점에 대해서 불평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이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을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자연히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대인관계가 나빠질 수 밖에 없고, 실패하는 인생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크나큰 선물입니다. 은총입니다. 이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이 관점에서 모든 사람을 대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부탁은 은혜의 비전입니다. 항상 현재보다는 장차 받을 더 큰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보다 미래에 더 큰 축복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4:6, 벧전5: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다음 세대, 다음 세대보다는 내세에 더 큰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미래 천국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1-4) 바울은 항상 이 환상을 기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 이후에 다가 올 천국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빌1:22-23) 그래서 항상 이 비전을 기대하고 달렸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베드로 사도 역시 은혜의 비전을 갖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13) 성도들은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과거 엄청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현재에도 은혜로 살고 있고, 은혜로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받을 은혜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은혜입니다. 이 큰 은혜의 비전 속에서 날마다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행 13:44~14:1 / 홍종일목사
믿음 생활을 오래하게 되면 처음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도 감격도 좀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옛날엔 주님의 보혈이야기만 나와도 눈물이 나왔지만 이젠 무덤덤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아무런 감격없이 타성에 젖어서 그냥 습관적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표현으로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 해당되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고 따르는 삶을 사는 겁니다. 이 안에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 때 지나기 전에는 우연인 것 같은 일들도 지나고 나면 그게 우연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만드는 필연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우연도, 우리가 정말이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것이 일단 영생과 관련된다면 그건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세상은 경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는 어김없이 경쟁이 있습니다. 그냥 경쟁도 아닙니다. 경쟁률이 너무 치열해서 웬만큼 해서는 그 경쟁을 뚫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서 경쟁을 뚫었습니다. 뭘까요? 목숨에 대한 경쟁.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면 코웃음치면서 거들떠도 안보겠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하면 난리가 날겁니다. 영생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가장 꿈꾸는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경쟁하며 난리를 치는 이유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지요? 그러니 영생을 얻게 되면 우리는 경쟁에서 자유로워지고 삶에서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에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면 무엇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을까요?
뭐를 먹고 살지, 뭐해 먹고 살지 걱정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경쟁하고 우리 스스로 이 세상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뭐를 먹을지 뭐를 입을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 하늘의 참새도 저 들판의 백합화도 먹이고 입히신다고 우리는 새보다 들꽃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말씀은 귓등으로도 안듣습니다. 계속해서 걱정합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네가 재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네가 재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너를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하셔도 인간들은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해서 빨리 많은 재물을 얻으려고 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고에 쌓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약속을 믿지 않고 내 주머니에 들어온 것만, 내가 잡은 것만 중하게 여깁니다. 원래 인생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영생을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에 번개처럼 세월이 흐를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실천하려고 하는 겁니다. 늙어지면 못노나니.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특권이고 축복입니다. 우리는 실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분야에서 경쟁에 승리한 겁니다. 목숨이라는 가장 중요한 분야에서 경쟁을 당당하게 뚫고 여기 있는 겁니다. 지상에서의 평안과 죽음이후의 영원한 삶이라 정말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사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엄청나게 많은 복음 전파자들의 노고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주 긴 길을 돌아 돌아서 오늘 우리에게 이 복음의 정수, 영생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너무 오래 믿어서 우리 스스로 성경을 볼 때 착각하는게 있습니다.
뭐냐면 우리가 마치 이스라엘 족속인 것처럼 착각해서 ‘이방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전혀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는 겁니다. 마치 우리하고 이방인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생각하고 생활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히 육적인 이방인이 맞습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육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저들이 지금 말하는 ‘이방인’인겁니다. 틀림없이 우리도 역시 복음을 전해 받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 안에 들어옴으로써 이방인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믿는이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열렬히 믿는 우리와 경쟁할 영적 이스라엘은 지상의 이스라엘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선민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길을 따르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택함받은 선민인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선민이 약 천만 정도가 있습니다. 물론 명목상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실제로 속으로도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며 행동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상당수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지 싶습니다만 모르는 거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믿지 않는 이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이들, 하나님을 윤리적인 것하고는 상관없이 재물과 정성만을 보고 복을 주는 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할 일도 없으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를 힘들어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이가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증거도 하지 않고 ... 이런 사람은 미안하지만 하나님의 성도가 아닙니다. 심지어 신자도 아니고 교인도 아닙니다.
이런 이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기는 곤란합니다. 아직은 이들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는 사람들인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천만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이 단지 교인이 아니라 신자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성도인지가 참 궁금하지만 그건 하나님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드디어 예루살렘교회 시대가 지나고 복음이 이방으로도 왕성하게 확산되는 시대에 접어 들었습니다. 처음 이방에의 전도는 베드로가 시작했지만 안디옥 교회의 바나바와 바울에 이르러 체계적이고 공식적으로 이방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복음의 전파가 돌고 돌아 이 땅 한반도의 남쪽에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이지 은혜입니다.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온 토마스 선교사가 형장에서 목이 잘리면서 망나니에게 성경을 전했다고 하는 이야기, 신앙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의 목으로 산을 이루었다고 해서 절두산이라고 하는 이야기며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의 기독교인들이 월남하면서 남한에 복음이 급속도록 전파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그런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서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지 않고 서로 한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는 한 머리,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한 머리에 속해 있는 한 몸입니다.
이번 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주여 부흥을 주시옵소서”입니다. 제가 지난 2년동안 전도에 대해서 별로 강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이므로 하나님이 채우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기 보니까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택한 백성들은 다 예수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영생을 주시기로 하나님이 작정하지 않은 자는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가 작정된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하지요?
솔직히 우리는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인지 아닌지 한번 보고 알 수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영적 존재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예수믿는게 싫어서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들어가서 아내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집으로 간 남편, 마구 때리고 심지어 이불까지 하수구에 갖다 버린 패악쟁이 남편이 나중에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정말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주를 섬겼다는 그런 이야기.
우리 신앙 선조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디서나 이런 이야기가 한둘쯤은 있습니다. 그 남편이 패악을 지길 때 과연 그 사람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으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 남편이 핍박한다고 해도 옛날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때에 비하면 솔직히 핍박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포기하고 단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도 부르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가 이미 생명책에 녹명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한다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도 아니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기독교가 인기를 끌자 이를 질시하여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나바와 바울을 내쫓으려고 획책했습니다. 여기는 유대가 아닙니다. 공권력을 동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동하는 겁니다.
본문 47절에 보면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았답니다. 여기서 ‘너’는 바나바와 바울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오늘 이 땅에서 주께서 이방의 빛으로 삼아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할 사명을 주신이는 바로 우리들이 본문의 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들이고 영적 이스라엘이며 믿지 않는이들 세상사람들이 바로 이방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서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저들에게 단순히 ‘예수믿고 구원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줌으로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도 저들 가운데 한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우리도 경건한 삶을 살고 싶다고, 저들 성도들 무리에 가입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빛이란 원래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은 그런 기능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빛은 인간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기능까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혀서 착하고 의롭게 만드는 기능까지 하게 만듭니다.
백일하에 드러난 추악한 죄악은 밝은 빛 속에서 보기가 너무 역겹고 더럽기에 깨끗하게 치워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야 더러운 죄악 속에 있어도 더러운 줄을 모르지만 밝은 빛 가운데서는 도저히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 빛이 되려고 하면 그래서 이 세상을 더 밝게 하려고 하면 우리가, 우리 자체가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더러운 죄악 속에 있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깨끗해지는 겁니다. 자연적으로 깨끗해 지지는 않겠지요?
그래요,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씻고 이후로는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요즘도 언론에 목사와 교회의 비리에 대해서 심심찮게 나옵니다. 이게 한번 나오면 사실 전도에 엄청나게 부정적인 피해를 주는데 그 폐해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왜냐면 교회란게 빛처럼 이 어두운 세상에서 너무 너무 잘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빛이 있으면 그 빛은 정말 잘 보입니다. 밝은 곳에서 빛은 켜나 켜지 않거나 거의 차이가 나지 않지만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드러나게 되어 있는게 빛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와 목사와 성도가 겁도 없이 범죄를 저지르면 그 범죄가 드러났을 때의 타격은 말도 못할 정도입니다.
자기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동역자들 다른 교회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얼굴과 이름에 무지무지하게 큰 피해를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빛인 우리는 더 더 절제하고 조심하고 스스로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 남한 땅에만 주를 믿지 않는자가 무려 4000만에 가깝습니다. 해외선교도 좋고 단기 선교도 좋지만 먼저 이 땅의 잃어버린 형제를 되찾는 것은 더 시급하고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동포의 죄악 속에 사는 삶’을 방치 하고 바깥만을 쳐다본다면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형제를 소흘히 하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약하고 믿음이 신실하지 못하다면 해외선교를 할 여력 자체가 없어지는 겁니다. 당연히 해외선교를 하려고 한다면 이 땅의 교회부터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의에 헌신된 사람도, 물질도, 기도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누가 작정된 자인지 누가 작정되지 못한 자인지 우리가 알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48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그렇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전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들을 수가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믿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맡기신 귀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게으른 종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예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자가 아마 없을겁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에 대해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증하는 일은 드뭅니다. “굳이 내가 입증해야 할까? 지가 알아서 해야지”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합시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전도합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입증하는 것. 세상이 오케이 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 세상이 깨끗해 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서고 서로 화합하며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 온 세상이 ‘저기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찬탄할 때까지 하나님의 도를 일상의 삶에서 우리의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번에 정말 획기적인 일을 시작했습니다. 매 주일, 수요일마다 뜨개질로 수세미를 짜와서 여기에 전도 명함을 붙여서 전도하는 일은 정말이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단순히 전도 명함만을 받을 때의 사람들 반응하고 이 수세미를 받을 때의 반응은 천양지차입니다.
부활절에 삶은 달걀을 나눠줄 때보다, 추수감사절에 떡을 나눠줄 때보다 반응이 더 좋습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부담이 많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노고를 백배로 갚으시리라 믿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참 기쁘고 또 이걸 짜 온 우리 성도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그러니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실 때는 얼마나 흐뭇하실까요? 참 감사합니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49절에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바나바와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그 지방에서 복음이 무서운 기세로 전파된 겁니다. 복음의 전파가 일시적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시기가 났습니다. 나는 안되는데 남이 잘되면 시기가 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하나님도 믿지 않는 여인을 보고 뭔 ‘경건한’ 이란 용어를 쓰는지 의아하시지요? 이들은 예수는 믿지 않아도 하나님은 믿는 여인입니다. 이들의 행동이 경건해서 경건한 여인이라고 한게 아니라 ‘경건한 여인’은 여자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한 경우에 쓰는 관용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이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인들이 기독교인에게 질투를 느껴서 훼방을 놓는 겁니다.
이처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종 또는 비슷한 사람들이 시기하게 되는 겁니다. 같은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에 경쟁이 되기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래서 분내는 겁니다. 당시에 ‘경건한 귀부인들’ 가운데는 직접 행정직을 담당한 이도 있었고 또 그녀들의 남편들이 행정관이었으므로 충분히 바나바와 바울을 추방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인들은 복음을 받아 들였지만 고위직에 있는 이들은 오히려 예수를 배척하고 핍박했습니다. 핍박했다는 말에는 단순히 말로 욕하고 수치를 준 정도가 아니라 신체적으로 해를 끼쳤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타나 그런.
여기 보면 참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51절에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주님이 승천하시고 남은 제자들은 이전에 주께서 누가복음 9,10장에서 복음을 영접지않는 사람들에게 하라고 한 그 명령을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이것을 보시고는 빙긋 웃으실 것입니다. 내 말을 아직도 묵묵히 지키는 제자들이 있구나!
발에 먼지를 떨어버린다는 행위는 먼지만큼도 너희들과 연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안디옥 사람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으므로 그들과 관계를 끊은게 아니라 바나바와 바울을 핍박하고 쫓아낸 이들과 그들을 사주한 유대인들하고의 관계를 끊었다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안디옥에서 쫓겨난 두 사도는 동남쪽으로 120km정도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갑니다. 여기서 그들은 다시금 힘을 내서 전도합니다. 14:1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는 말로써 본문이 끝을 맺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복음은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들어가는 모든 곳에서 복음은 그 땅을 점령하고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도 충분히 그렇게 됩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예배당이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무시할 수도 있지만 그건 그네들의 눈이 잘못된 것이며 그네들이 믿기로 작정된 자가 아니라서 그런 것이고,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된 자에게 교회당의 규모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아니 문제가 되어서는 완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우리의 영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2절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새롭게 주님을 믿게 된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기쁨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영죽을 운명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되었으며 소망을 가지고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제자들을 얻고 또 이고니온에서 제자들을 얻고 그렇게 그들이 가는 곳마다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마의 방해가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도착한 이고니온은 주요 교통로 상에 위치한 도시로서 안디옥보다 훨씬 더 크고 번성한 도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거나 곤란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절대로 낙망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에게 섭섭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 좋은 다음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잘쓰는 말로 무슨 차가 가면 벤츠가 온다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우리가 진실로 흡족해 할때까지 주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기회를 자꾸 자꾸 준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설치는 것들에게도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처럼 보입니까? 화내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끼리 얘긴데 저런 것들에게 저 정도 주셨다면 나에게는 더 좋은 것을 주실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거 있쟎아요. 저런 엉터리같은 삯꾼은 큰 교회에 많은 돈에 대우도 잘받고 나는 길거리에서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도데체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지 불평하거나 그가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지 회의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모른다 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위하여 애쓰고 힘쓴 노고와 헌신을 그냥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기뻐하고 감사하는 겁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백배의 결실을 맺느냐 아니냐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정하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주님을 향하여 나의 단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실겁니다.
게다가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오늘 나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가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안디옥에서 새롭게 복음 안에 들어온 제자들처럼 기쁨과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삽시다.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힘써 전한 두 사도들처럼 확신에 찬 감사한 삶을 삽시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두 사도가 가는 곳마다 훼방꾼들에게 쫓겨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가는 곳마다 복음이 확산되고 마귀가 쫓겨나고 하나님의 이름이 승리하며 그의 사역자들이 승리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은 신념에 찬 소수의 인물들이 흐리멍텅하게 사는 다수를 이끌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에 신념을 가진 우리들은 머지않아 이 정관을 부산을 한국을 그리스도의 복음 안으로 이끌게 될 것이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가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다스리는 규율이 되며 경쟁과 시기보다 협력과 화합이 분냄과 증오보다 사랑과 진리로 다스려지는 세상입니다.
너무 극심한 경쟁 때문에 우리 모두는 힘들어 합니다. 그럼에도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는 우리가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사랑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사탄의 법 아래서 생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자유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게 습관이 안된겁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에서 느낀게 뭐냐면 너무 넓다 그리고 풍족하다 그리고 낙천적이다. 이들은 경쟁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새파란 잔디위에서 마음껏 즐기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저렇게 편안하게 걱정근심없이 사는 사람도 있구나!’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남을 짖밟고 나만 잘살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고 안분지족한다면 충분히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인구밀도가 솔직히 우리나라가 높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몸 눕힐 공간도 없는 형편은 아닙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쌀은 남아 도는 형편입니다. 이 땅에 인간의 발걸음이 아직 닿지 않은 원시림도 있을 정도입니다.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지요. 다만 서로 감사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제가 산기도를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밤에 어둠이 밀려오는 산정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이 나라의 강토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외국 특히 유럽이나 미국의 경치를 좋아하지요? 우리의 산하도 충분히 그 만큼 아름답습니다. 다만 인문적 환경이 그 정도가 안되기 때문에 구미보다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선다면 우리도 충분히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유럽의 풍부한 인문적 환경이나 문화생활, 경제적 여유가 부럽습니까? 그들은 그것을 건설하기위해 하나님의 법을 시행한지 벌써 천년이 넘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복음을 받아 들이는데 더 열정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지금 약간 변질된 그래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려고 하는데 충분히 우리가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주의 자녀된 우리들이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않고, 이미 가진 것은 무시하고 남의 것을 빼앗지 못해서 서로 투쟁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도 도로 빼앗아 가실지도 모릅니다. 주어진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지상 천국을 만들려고 한다면 바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며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그의 법을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 땅이 가득하게 된다면 저절로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될 것입니다. 저 하늘나라 천국의 모형을 여기에 건설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으니 너희들은 열심히 노력하고 경쟁해라. 경쟁이 발전을 가져오쟎아’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고자 하신 인간다운 위엄과 여유를 가지며 단순히 육적인 것에 갇혀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이 서로 영교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손자녀들, 약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법을 이 땅의 최고 법으로, 최고의 원칙으로 모두가 준행하는 규례로 만듭시다. 그러기위해 복음의 재확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채우시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일당을 지급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단 하루만, 단 한번만 전해도 그 노고를 잊지 않으시고 나의 하나님은 평생에 걸쳐서 연금을 주실지도 모릅니다.
옛날 청나라는 모든 공에 우선하여 전쟁의 공을 가장 으뜸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수의 만주족이 천배가 넘는 한족을 다스리게 된 겁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신념에 찬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모든 덕목 가운데 최고는 전도라고. 그것도 남의 교인을 끌어오는 전도가 아니라 불신자, 믿다가 낙담하여 넘어진 자를 복음 안으로 인도하는 전도가 가장 큰 공입니다. 모든 것에 우선하여 하나님이 상을 주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투쟁과 비난 대신에 사랑과 관용이 흘러 넘치고 그 사이에서 인간다운 삶이 있으며 미래에 대한 소망,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그런 나라를 우리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민족개조의 큰 사역가운데 우리 교회가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우리가, 우리교회가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미미하지만 우리의 나중은 창대할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바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어서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도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올 한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 함께 어깨동무해서 손에 손을 잡고서 서로 격려하며 힘을 북돋우며 도우며 제자도를 걷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올 연말에 승리의 개가를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승리는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감사하며 그 길을 가기만하면 됩니다.
우리 함께 갑시다.
그래서 이 해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찬란한 기간의 시작이 되도록 하십시다.
내 주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하심이,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들 가운데 충만하게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 함께 갑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위해 나아갑시다.
예 정
행 13장 48~52절 / 장경동목사
몰라서 오해하지, 다 알면 이해가 된다. 한편, 다 알고도 이해 못할 일이 있다. 또, 몰라도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은 네 박자로 보아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아 희미해도, 그때가 되면 다 알게 된다. 그러나 천국가도 어떤 부분은 잘 모른다. 다 아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안 계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정확하게 보신다. 그러기에 그 분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 아까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왜 그렇게 교파가 많은가? 교파가 하나면 다툼이 없으나, 전도 열의가 약해진다. 교파가 많으면 교인 쟁탈전이 벌어지나 전도 열의는 강하다. 중문교회 철야에 다른 교회 사람들이 모이니까 다른 교회에서 철야가 시작 되었다.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교파가 하나면 편협된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교파가 여럿이면 하나님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다. 개미들이 코끼리를 볼때 각기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과 비슷하다.
북한은 당이 하나다. 그러므로 다른 당을 용납하지 않는다. 통일성은 있으나 자율이 없다. 한국은 당이 여럿이다. 복잡하다. 그러나 정당의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다. 이렇듯 교리적 차이는 인정 되어야 한다. 천주교는 오직 하나만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오류가 있다. 그예로, 초대 교황 베드로는 분명 결혼했다. 그런데 왜 신부님이 결혼을 안하는가? 결혼의 자유가 교권으로 인해 구속당하고 있다. 성경은 하라고 하는데, 왜 그런가? 민주주의는 부작용이 있어도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것처럼, 교파가 나뉘긴 했지만, 여러 관점으로 하나님을 좀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기독교가 옳다.
오늘은 예정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는데, 먼저 질문을 하나드리면 “내의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아니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가?” 하는 것이다. 감리교와 성결교는 내 의지를 강조하고 장로교는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다 말하고 있다. 요한 3:16 은 다 외워야한다. 군대에 가면 초코파이를 준다. 그런데 일요일 날 모두가 다 교회 간다고 하니까, 주기도문 할수 있는 사람만 교회 보냈다. 롬10:13 “주의 이름 부르면 구원 얻는다.” 구원의 의지가 너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문 48절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예수믿는 것은 작정되어 있다. 택함 받았다 는 뜻이다. 또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다.(요6:44) 즉,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셨다는 것이다. 행18:11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고 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대전 시민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따로 있다.
“내가 안 믿으면 지옥, 믿으면 천국이라면 억울하지 않은데,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이라면 좀 억울하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죄인이 지옥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죄인을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은 감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사형수가 사는 방법은 대통령특사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사형수는 죽어야하는데 김현희가 산 것은 감사한 것이다. 특사로 사는 사람은 당연한 게 아니다.
예수 믿으라는 것은 억울함에서 당연함으로 오라는 것이 아니라, 당연함에서 감사함으로 오라는 것이다. 선생이 잘 가르쳐야 한다. 한국에서 공부 못하는 애가 미국가면 잘하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작은 것에도 큰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
나의 나된 것은 주의 은혜다. 나의 노력까지도 주의 은혜다. 그러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 익명으로 까운을 해 준분이 훌륭하다. 뭐 해놓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신앙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침을 받기로 작정된자가 고침을 받는다. 여자 장로님에게서 메모가 왔다. 허리가 이상이 왔는데 다리가 아팠다. 목사님 부흥회에서 은혜받고, 안수를 못받아서, 길거리에서 안수를 해달라고 했다. 환자한명 때문에 과거 시험을 놓치는 허준이 생각나서 안수를 했다. 그런데 허리가 싹 나았다. 어떤 사람은 주차장에서 해도 되는데 어떤사람은 정식으로 해도 안되는가? 그답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교인이 테잎으로 전도했다. 안받는다고 테잎을 던져버렸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주어서 듣고 은혜받고 예수님 믿었다.
축복을 받기로 작정된자는 축복받는다. 그럼 하나님은 아무나 구원하고 아무나 축복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롬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또는 강팍케 한다. 즉, 그렇게 할 자를 그렇게 한다. 그가 하는 짓이 축복받을 짓이요, 응답받을 짓이었다.
1)이세상의 모든 일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다 이루어지고 있다. 우주, 자연, 사람이나 다 그렇다. 먹는 것은 내 의지이지만 소화는 내의지가 아니다. 혈압도 그렇다. 하나님의 예정도 구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엡1:3-5 “신령한 복주시되,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일 뿐이다. 내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정도 사는 것도 내가 한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러분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2)그러나, 의지와 무의지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음식 먹는 양을 조절하여 소화를 조절할 수있다. 내 삶은 조절하면 혈압을 어느 정도 조절가능하다. 가만 있어도 하나님이 다하신다는 것은 운명론자이다. 심방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그 집이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그분 말씀이 “누추해서 그런다.”그래서 제가 “담임목사가 못 먹는 음식을 누구에게 주겠는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긍지를 가져라. 여러분이 라면가게 하면 나를 라면 먹여라. 지금 만두가 어렵다. 만두 많이 사가라. 선량한 만두가 희생당하면 안 된다. 그 교인이 그 고비를 넘겨서 잘나가면 얼마나 좋은가? 이런 마음이 온 국민의 마음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기독인은 만두를 사먹어라. 기독인은 무슨 독을 마셔도 괜찮다. 어렵다고 낙심하지 말고 지혜롭게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있지만 인간도 해야 할 몫이 있다.
해찬들 창업주가 믿음이 있다. 예배를 드리니 좋아한다. 해찬들이 잘 될려면 직원이 해 찬들 고추장 먹어야 한다고 권고 했다. 자기도 안먹는 것을 누구에게 먹이겠는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긍지가 없다면 그만 둬라. 이것이 은혜의 소스가 된다.
비는 하늘이 내리지만 아무데나 내리지 않는다. 비는 사막에 내리지 않고 나무가 있는 곳에 내린다. 은혜받을 짓속에 은혜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리고, 믿는 사람답게 살고,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맡깁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