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ngest Day (추기): 열쇠전망대를 다녀와서
내가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43년만이 아니고 20여년만이다. 아이들 어릴 때 가족 여행으로 이곳을 찾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세월이 더 많이 흐른 어제 더 많은 것이 회상되었고, 그런 이유로 더 많은 것을 보았다. 잠실종합경기장에서 대광리까지는 1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 휴가를 나오거나 들어갈 때는 기차를 탔는데,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렸다. 한탄강을 건너는 철교를 지날 때였다. 휴가 날짜가 끝나 어쩔 수 없이 귀대하는 병사의 우울한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백사장에서 빨갛고 파란 수영복을 입고 공놀이를 하는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 그리고 그들이 설치해 놓은 까맣고 노란 텐트 두 개였다. 어제, 그 백사장은 물론 보지 못했다. 연천역이나 연천 읍내도 보지 못했다. 우리 버스는 새로 뚫린 우회도로를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광리에서는 버스가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40여년 전, 나는 이곳의 식당들을 드나들곤 하였다. 한 번은 이곳의 여인숙에서 잠을 잔 적도 있다. 파견을 나갔다가 귀대할 때였다. 조바 아가씨가 나를 안내하였다. 그녀는 구태여 방안으로 들어가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보온을 위해 펴놓은 요 밑에 손을 쑥 집어넣고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나를 쳐다보면서,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시선을 피하는 나에게, 따뜻하다고, 어서 들어오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의 풍성한 웨이브와 그녀가 입은 바지의 색깔과 질감을 기억한다. 그 여인숙이 남아있을 리는 없다. 나는 무심하게 달리는 버스에 앉은 채 고개를 쑥 빼고 내다보았으나 단 한 군데도 기억나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버스는 드디어 민통선 검문소에 이르렀다. 검문소를 중심으로 일종의 네거리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민통선 바깥쪽에서 바라볼 때, 우회전을 하여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205 본부 포대가 나오고, 좌회전하여 좁은 길로 들어가면,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오르막길이 나오는데, 그 정상에 내가 근무하였던 무선중계소 둘팔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검문소에는 네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이 내가 찾던 그곳이 아닐 리가 없다. 5사단이 관리하는 민통선 검문소가 여러 개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5사단 전우인 권홍표 회장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금 이 검문소를 관리하는 것은 36연대라는데, 205는 바로 36연대 지원이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이곳에 네거리가 분명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는 본부 포대에서 밥을 타가지고 검문소 앞을 지나 둘팔로 올라가곤 하였다. 땅콩 서리를 계획하고 있는 날이면, 지나는 길에 검문소의 보병들에게 그 계획을 알려주었다. 있다가 밤에 수상한 소리가 나도 총 좀 쏘지 말라고. 어두워지면 우리는 스릴을 만끽하면서 알철모 가득 땅콩을 캐와 생땅콩 그대로 먹었다. 촉촉하고 약간 비릿하였지만 먹을 만했다. 특히 맥주 배급이 나온 날 우리는 그 작전을 수행하곤 하였다. 어제 보니, 땅콩밭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모내기를 끝낸 논이 펼쳐져 있기는 하였지만, 이곳이 그곳이 아닐 리는 없다.
버스는 검문소를 통과하여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포장도로가 나왔다. 78년 4월에는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었다. 어제, 나는 40여년 전에 달렸던 그 길을 그대로 달려 요즘 열쇠전망대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하였다. 브리핑이 끝난 뒤, 이곳 지형을 나타내는 모형을 둘러보았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곳은 단 한 곳이다. 8동굴. 내가 포대경으로 관측하였던 지점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8동굴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그 명칭이 적힌 작은 팻말이 지형 모형에서 발견되었다. 예전에는 저 동굴에서 북한군 대포가 나왔다 들어갔다 했는데, 요즘도 그런가요? 브리핑한 병사는, 자기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 병사와 한참을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내가 근무하였던 곳은 열쇠전망대의 왼쪽 멀리 더 높은 곳에 자리잡은 OP인 것 같다. 그 OP는 열쇠전망대에서 육안으로 보였다. 그 OP 방카 위에는 아카시아가 여러 그루 있었고 나는 그 꽃향기에 어지럼증을 느낀 적도 있다.
우리는 열쇠전망대를 내려와 민간인 통제 구역을 나왔다.당연히 민통선 검문소를 다시 통과하였고 검문소 네 거리를 다시 지났지만, 그 모습은 한 시간 전의 그 모습과 같지 않았다. 나도 일반 관광객들처럼 무심하게 그곳을 지났다. 일반 관광객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내 마음 한구석에는 무엇인가 아쉬움 같은 것이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을 많이 보았고 확인하고 싶은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였으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노동당사가 있는 곳을 스쳐지나 백마고지를 구경하고 고석정을 구경하였다. 그것으로 동창회에서 준비한 일정은 다 끝났다.
버스는 오던 길을 되짚어 신탄리, 대광리를 지나고 연천을 지났다. 나는, 갈 때와는 다르게 고개를 길게 빼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40여년 전의 옛 일을 반추해보지도 않았다. 아침 6시 반에 나왔으니 피곤한 것은 당연하지만, 이렇게 덤덤한 것도 당연한가? 곰곰이 따져보니 당연한 것 같다. 40년 전의 옛 애인을 만났다고 하자. 만나기 전에는 애틋함도 있고 설레임도 있었겠지만, 커피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면 피차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가 아쉬움을 느꼈던 것은, 이 곳에 와도 내 청춘은 만나볼 수 없었고 그 흔적조차 희미해져버렸기 때문일까? 그럴지 모른다. 철교밑 백사장의 빨갛고 파란 수영복도, 조바 아가씨의 웨이브진 치렁치렁한 머리카락도, 땅콩밭의 스릴과 생땅콩의 비릿한 맛도, 방카 위 아카시아의 진한 향기도 모두 다 사라지지 않았는가? 땅을 치며 통곡할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숨기면서 폐부 깊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길고 긴 탄식을 뱉어낼 만하지는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색없이 덤덤하였다. 그러니 내가 아쉬움을 느낀 정확한 대상은, 사실은, 무심하고 덤덤한 나 자신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내 진짜 마음인지, 나는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냥 꾸벅꾸벅 졸았다.
쪼인타 상사는 제부도에서 횟집을 한다고 한다. 지금도 말을 할 때면 여전히 더듬댄다고 한다. 주종선병장은 부천에서 페인트 가게를 하고 있고, 영감 유병장은 울산여고로 돌아갔는데, 교장을 역임하고 정년퇴직하였다. 권순호중사는 경고 표시를 무시하고 철조망을 넘어가 더덕을 캐다가 그만 지뢰를 밟고 세상을 떠났다. 순하디 순한 이 분은 평소에, 숨만 계속 쉬면 죽지 않지 않느냐, 나는 죽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농담을 하곤 하였다.(끝)
첫댓글 아! 더 롱기스트 데이의 글의 끝이 여기구나
영태가 이번 하계동창모임을 위해 장장 다섯편의 글을 올린 의도를 이제서야 알겠다..
동기들을 많이 사랑하는 영태교수에게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진다..감사합니다!
따로 만나면 물어볼 말이 있다.. 그때 질감(?)이 어떠했는지?? ㅋㅋㅋ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조바는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잔심부룸하는 아이..
성택성, 웃자고 하는 야그 죽자고 달려들지마라
점잖은 영태교수가 조바 데리고 설마 바지 벗꼈겠어? ㅎㅎ
ㅎㅎ 옆자리에 앉은 진섭에게도 말했지만, 용기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