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죽도에서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을 회상하다.
금강의 상류에 천하의 절경 죽도가 있고, 그 죽도를 바라보는 산이 천반산이며, 감입곡류 하천이자 하회마을이나 회룡포처럼 아름다운 물도리 동이 죽도라는 섬이다.
산 위가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이름붙은 산, 천반산 아래에서 남쪽 장수에서 흘러내려온 장개천과 동쪽 무주 덕유산에서 시작되는 구리향천(동향천)이, 파(巴)자형으로 굽이쳐 흐르는 중간 지점에 섬아닌 섬 죽도가 있다. 그 끝자락에서 몸을 합하여 금강으로 태어나 휘돌아가는 죽도에 조선의 혁명가인 정여립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곳 죽도를 사랑해서 호조차 죽도 선생이라고 지었던 정여립,
400여 년 전 1589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났던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답사길이나 사석에서 정여립에 대해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람 아마 모반을 했다지?” 하고 말끝을 흐리거나, “그 사람 역적이었다지”라고 되묻곤 한다. 하지만, 어쩌다 예외인 경우도 더러 있다.
이 지역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몇 사람은 정여립에 대해 남겨진 것은 없지만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동시에 대사상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실제 이발이나 정개청, 최영경 등 기축옥사 때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은 여러 형태로 남아 전해오는데 비해, 유독 정여립에 대한 기록은 불과 몇 줄뿐이고 그의 흔적이나 일가 친척들 그리고 후손들에 대한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정여립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으로써 그의 생각이 담겨 있던 저술이나 흔적들을 남김없이 없애버렸고, 그의 이름을 들먹이는 일까지도 꺼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기축옥사나 ‘정여립’이라는 단어조차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다만 두텁게 각색된 부정적인 이야기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해져왔을 뿐이다. 기축옥사와 정여립에 관한 것들은 여러 문헌이나 백과사전 등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여립(鄭汝立 ?~1589~선조22>) 조선 중기의 모반자. 자는 인백(仁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로. 전주 출신이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으나 성격이 포악 잔인하였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이․성혼의 문인.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퇴관하였다.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東人)에 아부, 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 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중 의연(依然)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정감록(鄭鑑錄)》의 참설(讖說)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선조 22) 거사(巨事)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여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안악 군수 이축(移築)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잡히자,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천여 명의 지식인이 희생되었고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정여립은 군신강상설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이다.“라고 평하면서 정여립을 새롭게 부각시켰고, ‘3백 년 뒤에나 4백 년 뒤에나 그 유음이 알려질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의 말이 맞아서 전주에 정여립로가 만들어지고 그가 태어난 완주에 정여립공원이 만들어졌다.
“천하는 공공한 물건이지 어디 일정한 주인이 있는가!” 그의 대동사상, 공화주의 사상은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인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60년 앞선 선진사상이었고, 그는 역모사건이라 알려진 기축옥사의 희생양이 되어 꿈도 피우지 못하고 죽도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그가 세상을 하직한 죽도를 국가 명승으로 만들고 새롭게 정여립을 재조명하기 위해서 김현모 문화재청장과 안호영 국회의원, 전북일보 윤석정 사장님, 그리고 전춘성 진안군수, 문화재청 장철호 과장을 비롯 전라북도 관계자들이 죽도를 찾았다.
죽도가 명승이 되고, 대동사상 기념관이 들어서고 그의 동상이 세워지면 기축옥사로 희생당한 천여 명의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이 편히 잠들 수 있을까?
구리향천과 금강이 만나서 휘감아 도는 죽도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던 하루도 저물고, 그 자리에도 지금쯤 칠흙같은 어둠이 내렸겠지,
죽도 일원이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는 날, 조용히 찾아와 맑은 물 한 그릇 올리고 정여립이라는 사내와 그 때 희생당한 모든 분들에게 큰 절 올려야겠다.
2020년 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