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여러분은 “이해(利害)의 상충(相衝),
영어로는 ”conflict of interest”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줄로 압니다.
이 말의 뜻은,
여러 기관들이 관여하는 일에 있어서
어느 하나의 기관이나, 그 기관에 속한 사람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부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대체적으로 부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직이 비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더 그런 쪽으로 가게 됩니다.
사실 미국과 같이
전통보다는 법이라는 바탕위에 세워진 나라보다
대한민국처럼 전통이 법에 앞서는 나라에서는
“이해의 상충”이라는 문제가 더욱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미국에서
“이해의 상충”이라는 문제에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40년간의 미국생활과 그 곳에서의 30년간의
공직생활로부터 깊이 깨닫고 배운 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해의 상충”이라는 말을
조금 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키피디아 사전을 통해
이 말을 조금 더 알아보면 이러합니다.
어느 기관이 어떤 정당한 목적을 두고
여러 다른 기관들과 함께 목적을 수행할 때,
주무기관에 적을 둔 사람이
자기가 업무 중에 얻은 지위나 정보를 이용하여
이에 유관된 조직의 어떤 사람들과 비밀리에
사전 혹은 사후에 접촉하여 어떤 형태로든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잠시 부연하면,
내가 몸담고 있던 미국의 세관은
자체의 교육을 통해 “이해의 상충”이라는 주제를
여러 가지 가상 상황으로 만들어
직원들에게 확실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만약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어떠한 불이익이 있는가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직원이 처한 상황이 과연
“이해의 상충”이라는 범주에 속하는가가 확실치 않을 때는,
사전에 그 해답을 즉시 얻을 수 있도록
핫라인까지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늘 문제로 얼룩집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엔 여러 가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이 많아져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조직은 부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합하여 선(善)”을 이룬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이 글귀가 기독교의 성서인 성경의 로마서에도 실린 것입니다.
그러니 관청과 기업이 얽히는 각종의 사업에
얼마나 많은 잠재적 부패의 실타래가 자리 잡고
있을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발전하고
더 많은 물질과 사람이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적절한 규제와 감독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독을 받는 이들과
감독을 해야 하는 이들이
모두 한 통속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서 나온 말이 “관피아”인 줄로 압니다.
이 번에 세월호 사건으로
이 “관피아”라은 신조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끼리끼리의 사람들이
국가, 기업, 학교, 교회를 만들고 운영하고,
또 같은 사람들이
감시와 조절 그리고 규제의 기능까지 모두 한다고 합니다.
“우리들만의 리그”의 극치입니다.
아무개 무슨 전문가라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한국의 사태를 분석합니다.
그러나 이 번 사태를 들여다보는 데는
천체물리학이나 문서고증학과 같은
전문 지식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잘 살아보기 위해 시작했던
물질 지향적 삶이 빚어 낸 그저 총체적 부조리입니다.
그래서 “이해의 상충”이라는 상황을 만났을 때,
죄책감도 없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과거 이 땅에서의 가난은
모두 절대빈곤을 말하는 것이지만
지금의 빈곤은 상대적인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먹을 식량이 있고 잠을 잘 거처가 있으며,
함께 있을 동반자가 있으면 행복은
그저 거두면 되는 것인데,
사람들을 끝없는 욕심으로
물질에 대한 추구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집단이기주의로 갑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힘을 바탕으로
더 많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 저지르는
불법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모든 세상의 조직과 단체가 그러하듯이,
일단 커지면 여러 가지 문제가 수반됩니다.
이 것에 대한
“답은 없다”라는 것이 내 답입니다.
왜냐면 어느 한 인간이
자기의 순수한 면을 지키려는 것은
작은 조직에서만이 가능하다고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30여년이 지난 아주 오래전에,
독일의 경제학자이며 친환경주의자인
E 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읽고 난 후
지금까지 “작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라는 생각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당장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크게 굴려야 반사이익도 크다는
“규모의 경제”논리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아보면 조화로운 삶은
대규모로는 절대 되지 않습니다.
친환경적인 삶도
개발의 논리로는 절대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반사이익은
대규모의 개발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모술수를 바탕으로 한
힘과 권력의 관심이 여기에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이미 얻은 기득권을 더 단단하게 지키려하는 것이,
집단화된 인간의 욕심에서 오는 결과이고
모든 인간의 집단이기적인 속성입니다.
마치 이것은 신앙은 인간의 속성인데,
이 속성이 문제가 아니라
이 신앙이란 속성을 인간들이 제도화한 종교가
문제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해결책은 조직이 너무 비대화되는 것을
스스로 거부해야 하는데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입니까?
비대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그 것이 사기업이든, 공기업이든, 교회든, 학교든,
무한대로 확장하고 힘을 키우려하는 조직에 대한
정부와 민간에 의한 강력한 견제와 감독이
필요한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미국도 아직 많은 곳에서 자기가 속한 집단의
극단적인 이익만 챙기려는 모습은 많이 보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비대해져서 사회의 정상적인 흐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형태의 조직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문제는 이로 인해 받는 피해는
거의 대부분 그날그날 겨우겨우 살아가는
서민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물질이
이미 절대빈곤을 훨씬 벗어나 여유가 있어도
아직도 계속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어떤 규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런 이유로 분배와 평등이라는 문제에서
국가가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행복추구를 위해,
철저한 견제와 감독을 통해
적극적으로 간섭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의 상충”을 무시하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만을 위한
집단이기주의적인 단체행동, 특별히
관(官)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관피아”의 “부패”라는 것이
그 나라에게 어떤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보면 됩니다.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남에 대한 배려를 말하지 않고 시민의식을 말할 수 없고,
올바른 시민의식이 없이는
한 나라의 장래는 암담합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사과를 하고
담화를 발표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이 나라의 모든 구성원 각자 각자가 달라져야 합니다.
작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물질은 채 100년을 못 살고 갈
우리들에게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이미 우리의 주위에 두루 널려 있습니다.
그 행복을 거두는 일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 옮겨 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