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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연중 제23주일 (녹)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기념 없음
오늘 전례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인생을 꿈꾸다 실패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가 십자가를 외면하며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살면서 내려놓는 짐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 오라 하셨습니다. 내 삶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말씀의 초대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지혜서가 노래한 이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진리다. 주님께서 인도하셨기에 인류는 바른길을 걸어왔다(제1독서). 감옥에 갇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협조자였던 필레몬에게 편지를 쓴다. 종 출신으로 교우가 된 오네시모스를 돌봐 달라는 부탁이다. 참된 지혜는 사랑으로 감싸져 있다(제2독서). 건물을 세우려 한다면 먼저 경비를 따져 볼 것이다. 전쟁을 할 때에도 상대의 세력을 알아본 뒤 작전을 짠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결과를 맞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도 그 의미를 알아야 기꺼이 질 수 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련 앞에 나서면 어려운 삶이 되고 만다(복음). 제1독서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9,13-18 13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14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15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16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17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18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2독서 <이제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레몬서 말씀입니다. 9ㄴ-10.12-17 사랑하는 그대여, 9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복음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오늘의 묵상
[군종] 눈높이 사랑을 향한 버림
- 김태완 신부
수년 전 TV광고를 보던 도중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던 카피 문구가 있었습니다. ‘눈높이 교육’. 이 말은 교육자가 피교육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교육을 한다는 뜻으로서 교육자는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바라보고 교육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눈높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충분히 적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언젠가 어느 대기업의 간부시험 중에는 신세대의 노래 세곡을 불러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기업간부와 일반사원과의 관계가 아무런 연계성 없는 상하 명령 전달 체계에 머물 것이 아니라 보다 밀접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다양한 정보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함을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눈높이’라는 말은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연인은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하고 그것에 맞추어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외에도 연인들은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 서로에게 시선을 맞추려고 하고 자신이 버릴 건 버리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배울 것은 배우면서 결국은 부분적으로 닮은꼴이 되어 갑니다.
[복음생각] 십자가를 보물로 여기십시오 버려야 따를 수 있는 진리 인숙이 이야기 예전 교구 사제단 피정 때에 지도를 해주신 신부님의 체험담이 떠오릅니다. 전라도 광주에 천주의 성요한 의료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복지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 복지원에 인숙이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나이는 스물이 넘은 아가씨지만 정신 연령은 네다섯 살 정도의 어린 아이 수준이라 했습니다. 어느 날 수사님들께서 장애인 방에 간식을 넣어 주고 인숙이 방을 나오는데, 갑자기 인숙이가 죽겠다며 소리를 치더랍니다. 황급히 인숙이 방으로 수사님들께서 달려가 보았더니, 방금 나누어준 인숙이 간식을 다른 장애인들이 먹으려 하자 인숙이가 빼앗기지 않으려고 간식을 한 입에 털어 넣다가 그만 목에 걸려 숨을 못 쉬고 캑캑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님들께서 급히 간식을 토하게 하고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너무도 이상한 것이 숨을 못 쉬는 상황에서도 인숙이는 한 손은 목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잠시 숨을 쉬게 하고는 팔을 강제로 벌려 옷을 젖혀 허리춤을 보았더니 며칠 전 복지원 식당에서 닭 요리를 하고 버린 닭 내장을 인숙이가 나중에 먹으려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몰래 건져 허리에 매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신 연령이 낮은 인숙이 눈에는 닭 창자가 울긋불긋 한 것이 먹음직스러웠나 봅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는 인숙이야 정신 연령이 낮은 장애를 가졌으니 이해 되지만 정상인이며 어른인 우리들이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허리에 매달고 있는 썩은 닭 창자가 무엇인지 만져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 썩은 닭 창자를 잘라 버리면 자신에게도 이웃에게도 악취를 풍기지 않고 너 나 할 것 없이 개운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텐데 그것이 되질 않아 악취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라 버리지 않는 썩은 닭 창자는 ‘교만’ ‘이기심’ ‘자존심’ ‘썩은 냄새나는 고집’ 등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이 진정 버리기 어려운 고집과 아집, 이기심과 자존심, 교만도 함께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것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고 신영복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려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심지어 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뼈 속을 비워야 합니다. 그 위에 다시 비상을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역시 천상 하느님 아버지 집으로의 비상은 자신을 수없이 버리고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가득 찬 뚱뚱한 상태로는 날아서 하늘나라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사도 성 바오로의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필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듣고 복음을 믿게 되었는데, 얼마 동안 옥중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시중을 들어줍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원주인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를 용서해 주고 잘 받아줄 것을 부탁하며 편지를 씁니다. 당시 사회에서 노예는 그저 물건에 해당될 만큼 재산의 일부인 별것 아닌 존재로 비참한 대접을 받았는데, 바오로 사도는 그를 아들로, 심장과 같은 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레몬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필레 9, 16)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그만큼 자신에게 있는 자존심과 명예까지도 버리며 스스로를 낮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스승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2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짊어지다’는 ‘십자가를 소중한 보물로 알고 품에 안고 따라야 한다’로 번역이 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십자가가 마지막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천국 문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보물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는 이겨내고 받아들이며 안고 나아갈 때 분명 공로가 되는 것이며, 그 십자가로 인하여 영원히 갈라지는 심판대에서 천국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 배광하 신부〈춘천교구 게쎄마니 피정의 집 원장>
"[생활속의 복음] -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익숙하지만 미워하라는 오늘 복음은 낯설기만 합니다.
꿈이 있다는 것은 젊음의 상징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당신의 영을 내리시리라는 약속을 요엘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3,1) 젊은이들이 아니라 노인들이 꿈을 꾸는 세상은 예수께서 꿈꾸시는 바로 그 세상입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의정부] 사랑이란, 하느님을 위해 온갖 피조물을 벗어버리는 것
- 배존희 신부
2007년 9월 9일 연중 제23주일 다해
Whoever does not carry his own cross and come after me cannot be my disciple. (Lk.14.27) 제1독서 지혜서 9,13-18
제2독서 필레몬 9ㄴ-10.12-17
복음 루카 14,25-33
어느 겨울 밤, 양치기 소년이 산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바로 다음날, 기적처럼 살아서 가족들에게 돌아왔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세상이 온통 캄캄해졌을 때, 저쪽 산에서 다른 양치기의 불빛이 반짝였어요. 저는 그 불빛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집에 돌아갈 생각만 했지요.” 누구에게나 어두운 밤이 있으며, 추위와 싸워야 하는 절망이 있습니다. 이 순간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는 건너편 산의 불빛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불빛은 우리 자신이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불빛을 찾고 있으며, 다른 꿈을 꾸고 있으며, 다른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불빛을 주님께서는 이미 주셨습니다. 그 불빛은 바로 세례 때,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은 아마 이런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이 아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마태복음 6장 21절의 말씀처럼 점점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처음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불러주시는 예수님께 그저 고마웠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순수한 마음이 바뀝니다.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소원을 만들어 가는 것은 물론, 가족이나 친지에 대한 소원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그들은 처음에 가졌던 단순한 마음이 차츰 퇴색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주님께서는 다시금 핵심을 찍어서 말씀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 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가요? 그 핵심만을 쫓아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혹시 세속적인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을 줄 모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는 원숭이를 잡을 때, 항아리 안에다 사과, 바나나 같은 과일을 집어넣고 기다린답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는 간신이 손이 들어가지만 그 항아리 안에서 물건을 잡았을 때는 손을 빼지 못하는 작은 입구를 가지고 있죠. 항아리 덧을 설치하고 조금 있으면 원숭이들이 그 항아리에 있는 과일을 먹으려고 손을 집어넣게 되고, 그 때 사냥꾼들이 들이쳐도 원숭이는 자기가 잡은 과일을 놓지 않으려고 손을 빼지 않아 결국 사냥꾼에게 잡히고 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놓아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우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대신 세상의 헛된 것들만 보일 뿐입니다. 헛된 쪽으로만 시선을 맞추다보니 하느님이 나를 불러도, 하느님이 내 옆에 계셔도 우리들은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을 처음 알게 되면서 가졌던 첫 마음을 다시금 떠올렸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겠다는 다짐들,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마음들... 그 마음들의 실천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세례 때의 마음, 첫영성체 때의 마음을 다시금 떠올려 봅시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미국 장애인 협회 회관에 걸려 있는 글'중에서)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신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If anyone comes to me without hating his father and mother,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한 아이와 함께 '추모의 집'을 찾았습니다. 아버지 흔적 앞에 홀로 선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아이 처지가 너무나 딱했습니다. 이제 겨우 15살인데 엄마는 어느 하늘 아래 있는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연고자인 형은 행방이 묘연하고…. 아이가 한 평생 지고 갈 외로움과 허전함, 상처와 번민을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짠했는지 모릅니다. 저녁기도를 하러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무실에 낯선 사람이 앉아 있어서 '누군가'하고 들어갔더니 연미사를 신청하러 오신 할머님이셨습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려다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이 멘 할머니 말씀을 듣던 저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할 말을 다 잃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따님 장례식을 치른 날이었답니다. 이제 겨우 40대 초반인 딸, 남한테 죽어도 싫은 소리 못하는 착하기만 했던 딸,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하느라 생긴 스트레스성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딸을 생각하니 너무도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하셨습니다. 딸 장례식에 가서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못했노라고, 그래서 하루 종일 분을 삭이느라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이 찢어지는 할머니 고통 앞에서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는 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할머니는 아마도 요 근래 밥 한술 제대로 뜨시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시다 쓰러지시겠다 싶어서, 아이들 식사시간인데 가셔서 밥 한술이라도 뜨고 가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마지못해 따라오셨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시끌시끌한 아이들 틈에서 할머니는 그나마 힘겹게 밥을 몇 숟갈 뜨셨습니다. 한 마음씨 예쁜 아이가 할머니께서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반찬을 더 가져오고 국도 좀 더 떠드리는 등 곰살맞게 시중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깊은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십자가에 속울음 우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때로 이웃들이 견뎌내고 있는 극심한 고통이나 십자가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직 어깨를 조용히 감싸안아 준다든지 가만히 등을 두드리며 달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음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왜 십자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왜 하필 나에게만 유독 큰 십자가입니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쩌면 저렇게도 큰 십자가를 보내십니까?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답답해하면서 지난 노트를 뒤적이다가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은 십자가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고통받는 사람들 얼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얼굴입니다.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의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땅과 생명의 땅, 그 사이에 당신 십자가를 걸쳐놓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하는 사다리로 당신 십자가를 걸쳐놓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의 도구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인 삶의 일부를 넘어 전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십 자가 없이는 구원 없고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결국 우리가 평생 친구처럼 여기고 끌어안고 가야할 삶의 동반자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번 한 주간,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로 인해 힘겨워하는 이웃들 삶에 우리 온기가 전해지는 날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홀로 지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이웃들 안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서울] 예수님을 따라갈 때 내려놓아야 할 것들
- 정원순 신부
누군가를 처음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 접하는 세계에 들어갈 때는 자신이 과거에 지녔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옛날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결혼에서 자주 다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 친정 가정에서 배운 태도나 규칙들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주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방해가 되는 옛것들은 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만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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