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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 법문 - 청화스님
이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는 금타 스님께서
성문십지, 연각십지, 보살십지 또는 오십오위라든가
여러 가지 밀교의 계위를 합해서 비교해 가면서
보살 10지를 근간으로 하여 회통을 시킨 수행 체계입니다.
물론 이 작업이 완전무결한 것인지 아닌지는
제가 그 경계가 못되기는 하나,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확실한 전거(典據)를 인용(引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수행자나 선지식들이 연구하고 검토할 소중한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삼보에 귀의하는 초삼귀지(三歸地)라,
그 다음
신심과 원력을 확립하는 신원지(信願地) ,
다음은
선택한 수행법을 닦아서 익히는 습인지(習忍地),
거기에 따라서
자기의 수행을 보다 더 맹렬히 지속적으로 정진하는 경지가 가행지(加行地)입니다.
이 4가행지까지는 범부지(凡夫地)입니다.
다음
5의 금강지(金剛地)는 금강불성(金剛佛性)
곧, 자성불성(自性佛性)을 직관적으로 견증(見證)할 때 이른바 증오(證悟)할 때요,
6은 희락지(喜樂地)라,
금강지를 성취해서 법락(法樂), 선정락(禪定樂)이
더욱 증장(增長)되어서 무한불멸의 희락을 느낄 때이고,
7에 리구지(離坵地)라,
금강지를 성취해서 욕계 번뇌를 대부분은 털어 버렸지만
아직도 제거되지 못한 욕계 번뇌의 습기를 완전히 제거할 경계입니다.
8에는 발광지(發光地)라,
진여 곧 진여불성(眞如佛性)의 모든 공덕의 광명이 현발(現發)할 때이고,
9에 정진지(精進地)라,
그래도 습기가 아직 남아 있으니 정진을 더욱 가속화하고,
10은 선정지(禪定地)라,
이른바 아(我)를 멸진(滅盡)하는 멸진정(滅盡定)이라,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의
4온(蘊)을 멸진해 버려야 누진통(漏盡通)을 하는데
그런 선정을 여기서 닦는 경지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닦기는 하였지만 완전한 것은 못되었고
깊은 선정으로써 습기(習氣)를 떼어버리니
11에 현전지(現前地)로서
일진법계(一眞法界)의 현상이 앞에 나타나는 경계입니다.
12는 나한지(羅漢地)라,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13에 지불지(支佛地)라,
독각승(獨覺乘) 즉 연각승(緣覺乘)의 자리로
모든 인연 관계를 모두 통달해 버리는 자리입니다.
그 다음
14에 보살지(菩薩地)라,
자기도 깨달을 뿐 아니라 무량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는 경지요,
그리고
부동지(不動地)라,
번뇌의 습기가 없기 때문에 조금도 후퇴가 없고,
임운등등(任運騰騰) 등등임운으로서 조작이 없이
자연적으로 모든 공덕을 할 수 있는 경계를 성취하였고,
15에 유여지(有餘地)라,
그래도 아직은 불지(佛地)와 같이 완전하지 못하나,
16에 무여지(無餘地)라,
부족함이 조금도 남지 않은 완전무결한 경지라,
따라서 우리 범부가 초삼귀지에서 삼보(三寶)에 들어가고,
차근차근 공부해서 무여지에서 정각묘각(正覺妙覺)을 성취하는 자리 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렇게 점차로 차근차근 올라가는 분도 있고,
또는 비약적으로 뛰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분도 있고,
또는 중간에 2·3지를 뛰어 넘어서 가는 분도 있고, 근기 따라서 구구합니다.
근기가 수승한 분들은
과거 숙세 선근도 많이 있고 용맹정진할 정력도 수승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뛰어 넘을 수가 있으나,
그렇지 못한 분들은 올라 갔다가 내려오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지를 성취하면 성자의 경계이기 때문에
범부로 내려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에 대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고
후퇴가 없는 완전한 부동지를 성취함은 14보살지입니다.
다음에 금타 스님의 해탈십육지 원문을 보겠습니다.
일체의 불타(佛陀)는 불보(佛寶)요,
협소한 사람들은 부처님도 꼭 석가모니 부처님만 믿는다거나
또는 같은 정토신앙을 하더라도 꼭 아미타불만 숭상합니다.
이렇게 되면 참 협소합니다.
역사적으로 필요하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지
부처님의 경계가 어느 한 부처님이 있고,
두 가지 부처님이 있다면 참다운 불교가 못됩니다.
그야말로 무장무애(無障無碍)라,
조금도 거리낌이나 한계가 없는 것이고 천지 우주가 바로 불타이기에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法界)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에 대해서 이부처 저부처로 따로 생각하면
대승적인 생각이 못되는 것입니다.
불타께서 설하신 교법은 법보(法寶),
그 교법에 의하여 수업하는 자는 승보(僧寶)라 말합니다.
불(佛)이란 각지(覺知)의 뜻 즉, 깨닫는다는 뜻이요,
법(法)'이란 법궤(法軌) 곧 우주의 규범이란 뜻이요,
승(僧)이란 화합의 뜻이며,
보(寶)란 기성(其性)이 밝고 청정함과 동시에
그 세력의 위대함이 최상무비(最上無比)하여
능히 세간을 장엄하되 영구불변하여 세계에 희유(希有)한 때문이라.
삼보에 6종의 뜻이 있어서
1에
동체삼보(同體三寶)를
일체삼보 또는 동상(同相)삼보라고도 말하니
삼보 일일의 체에 삼보의 뜻이 있어
불(佛)의 체상(體上)에 각조(覺照)
곧 깨닫고 비춘다는 뜻이 있음은 불보(佛寶)요,
궤칙(軌則)의 뜻이 있음은 법보(法寶),
또는 다투는 허물이 없음은 승보(僧寶)며,
내지 승(僧)에 관찰하는 지혜가 있으면 불보요,
규범이 있음은 법보,
화합함은 승보입니다.
2에
별상삼보(別相三寶)를
화상(化相)삼보 또는 별체(別體)삼보라고도 말하니
제불의 삼신(三身)을 불보,
육도(六度)를 법보,
십성(十聖)을 승보라 말함은 대승삼보며
장육(丈六)의 화신을 불보,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의 법을 법보,
사과(四果) 연각(緣覺)을 승보라 말함은 소승삼보요.
3에
일승삼보(一乘三寶)란
구경(究竟)의 법신을 불보
일승의 법을 법보,
일승의 보살중을 승보라 말하니
이는 승만경,법화경 등의 뜻이요,
4에
삼승삼보(三乘三寶)란
삼승자를 위하여 현(現)하신
불의 삼신(三身)을 불보,
삼승(三乘)의 법을 법보,
삼승의 중을 승보라 말함도 역시 승만경, 섭론 등의 뜻이요,
5에
진실삼보(眞實三寶)란
불의 삼신(三身)을 불보,
일체 무루(無漏)의 교리행과(敎理行果)를 법보,
견체(見諦) 이상의 삼승성중(三乘聖衆)을 승보라 말함이요,
6에
주지삼보(住持三寶)란
불멸후(佛滅後) 세간에 주(住)하는 삼보로서
목불·화상 등을 불보
삼장(三藏)의 문구를 법보,
체발염의(剃髮染衣)를 승보라 말함이니
1, 3, 5의 삼종은 대승에 국한하고
2, 4, 6의 삼종은 대소승에 통(通)하니라.
비록 삼귀계를 초수(初受)할지라도
해탈을 목적할진댄 반드시 대승삼보에 귀의해야 합니다.
계(戒)란 입도방편(入道方便)이라 불가결이니,
우리가 방편이라 하면 안해도 무방하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세간적인 방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경론(一切經論)은 따지고 보면 다 방편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방편은 꼭 지켜야 합니다.
방편에 의지해서 통하고 방편에 의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계상(戒相)으로는 율의(律儀)를 섭(攝)하고
계덕(戒德)으로는 대도(大道)에 통할새
5계(五戒)는 계경(戒經)의 수위로서 위선 제일
불살생계(不殺生戒)에 있어 무생(無生)의 리(理)를 증하면 대승이요,
그렇지 않으면 소승이니라,
진여불성 자리에 입각해서 계를 지키면 대승인 것이고,
불쌍하니까 안 죽인다는 정도는 계를 지켜도 소승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삼보(三寶)를 풀이하는 것은 모두가 다 불경에 있는 것이니까
보다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승만경이나 법화경이나 경론을 보면 되겠습니다마는
아무튼 이와 같이 육종삼보(六種三寶) 곧 여섯 종류로 삼보를 말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소승삼보는 일차 참고로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결국은 대승삼보를 의지해야만이 대승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승삼보의 요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이고,
법보는 천지우주의 도리라,
따라서 어떤 것도 불보 가운데 안 들어가 있는 것이 없고,
어떤 도리도 법보 가운데 안들어가 있는 것이 없습니다.
승보는 바로 현상계 모두가 승보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부처님 도리 곧 우주의 법칙대로 바로 믿을 때입니다.
바로 못 믿으면 필요 없는 갈등과 정력의 소모를 많이 합니다.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공산주의나 따지고 보면 법보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네들은 법보를 제대로 온전히 모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서 집착하는 것이지
그것이 법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진실된 법보로 인도하면 되는 것이지
적으로 몰아세워서 싸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2에 신원지(信願地)라,
신심과 원력을 세우는 경지입니다.
증전(證前)에는 미신(迷信)이요, 증후(證後)에는 정신 (正信)이니,
사실 견성오도를 못할 때는 항시 회의가 남습니다.
자기 스스로 불성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안다고 해도 마음속에는 의심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원(願)도 미신에 근거하면 속인의 원이오, 정신에 입각하면 도인의 원이며,
비록 정신(正信)의 발원이라도 소법(小法)에 그치면 소승이요,
다시 대원을 발하여 동요가 없으면 대승이니,
신과 원에 있어 그 참뜻을 터득하여 거듭 성취해야 합니다.
성문 10지에 있어 초수삼귀지(初受三歸地)가 곧 초 삼귀지며,
2. 신지(信地)와 3. 신법지(信法地)가 곧 신원지(信願地)와 등(等)하나,
이것은 각 계위를 회통하여 대비한 것입니다.
신법(信法)에 있어서
생멸사제(生滅四諦)나 무생사제(無生四諦)에 국집하지 않고
무량사제(無量四諦) 또는 무작사제(無作四諦)를 신(信)하여
장·통·별·원(藏通別圓)의 사교의(四敎義)를 회통(會通)하여
이 자리에서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리(理)를 달하고,
구경성취를 목적하여 먼저 신심과 원력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제3은 습인지(習忍地)라,
복인(伏忍), 신인(信忍), 순인(順忍),
무생인(無生忍), 적멸인(寂滅忍) 등 5인(忍) 중
전 4인에 각각 상, 중, 하 삼품(三品)이 있고
후 일인(一忍)에 있어 상, 하 이품(二品)이 있으니
특히 복인(伏忍)에 있어, 복인은 번뇌를 다 끊은 것이 아니라
번뇌를 눌러 억제하는 경지입니다.
따라서 범부지에서는 강인하게 번뇌를 억제해야 합니다.
요사이 개방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보는대로 자유롭게 하려고 합니다만
그래버리면 수행도 못하고 불교가 안되어 버립니다.
마땅히 부당한 것은 버리고 눌러야 합니다.
복인에 있어
상(上)을 도종인(道種忍),
중(中)을 성인(性忍),
하(下)를 습인(習忍)이라 칭하는 바,
복인을 이렇게 셋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상품은 도종인으로서
이미 도(道)의 종자가 심어져서 범하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으려해도 먹을 수 없습니다.
중품은 성인(性忍)이라,
성품에 종자가 깊어가는 것이고 하품은 습인(習忍)이라,
습인은 강한 의지로 공부를 익혀가는 것입니다.
성문승의 4. 내범부지(內凡夫地)
곧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닦는 자리나,
5. 학신계지(學信戒地)
곧 삼학(三學) 성취의 자리에 속하고,
연각승의 1. 고행구족지(苦行具足地)
곧 계행을 닦는 자리
2. 자각심심십이인연지(自覺甚深十二因緣地)
곧 십이인연의 관법을 닦는 자리
3. 각료사성제지(覺了四聖諦地)
곧 사제관을 닦는 자리 등에 속하나,
습인지란
소승의 수법(修法)에 국집하지 않고 무량법문으로써
근기에 따라서 잘 익혀 편안하게 감내하는 경즉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보통 초심 수행자는 습인지에 있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근본불교도 공부하고 율장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기 스승이 말했다고 해서 꼭 한 가지만 생각하고 말아버리면
그만치 국량이 좁아져서 법집(法執)하기 쉽습니다.
불교란 천치 우주를 통섭(通攝)한'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확 열어서 좋은 것은 모조리 받아들여 조도(助道)로 삼아야 합니다.
특히 이조(李朝) 때는 불교가 중국과 교류되지 못하고
고려말(高麗末) 불교 그대로 산중에서 국집하게 되였습니다.
또한 8·15 해방 뒤에도 제대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4에 가행지(加行地)라,
어느 수법(修法)이든지 득정(得正)하면
곧 본체를 여의지 않고 정당성을 얻으면 되는 것이며,
습인을 성취한 후 법대로 결제(結制)하고,
동안거(冬安居)가 절호(絶好)합니다.
인도 지방은 우기(雨期)가 있으므로 하안거(夏安居)이지만
동북아시아 지방은 겨울이 되어야 훨씬 긴장도 되고 잡연(雜緣)도 적게 됩니다.
경험자의 외호(外護) 지도 하에서 정진하는데, 역시 스승이 있어야겠지요.
마장 때문에 공부가 막히거나 무슨 경계가 나와서 산란할 때는
적절한 지도를 못 받으면 안됩니다.
일심불란(一心不亂)하여 삼밀(三密)을 지키며,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본질적으로 삼밀이라 합니다.
용맹정진으로써 간단없이, 꼭 수행은 간단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습인도 성취가 되고 업장의 습기가 녹아지는 것이지
하다말다 하면 조금 나갔다가도 다시 후퇴해버립니다.
한철 공부하고 나서 해제철에 그렁저렁 방만해 버리면
공부 기운이 간 곳이 없게 됩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하면
반드시 난위(煖位)에서 명득정(明得定)
곧 마음이 밝아오는 경지입니다.
그리고 정위(頂位)에서 명증정(明增定)으로 밝음의 정도가 증가되고
또 안 쉬고 닦아나가면 참으로 '모두가 비었구나 이 몸뚱이도 별것이 아니구나'
나도 공(空)하고 만법이 무상함을 사무치게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느끼면 함부로 망동할 수가 없겠지요 이 자리가 인순정(印順定)입니다.
인위(忍位)에서 인순정(印順定),
다시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에서 무간정(無間定)인데
이 자리는 세간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입니다.
번뇌가 낄 간격이 없고 오직 청정한 정념만 지속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차례로 성취하는 것이니,
이를 오상성신위(五相成身位)
곧 단계로 공부해가는 밀교의 법상인
오상성신위에 배치한다면 명득정은
통달심(通達心)의 전상(前相)이요,
명증정(明增定)은
곧 제1 통달보리심위(通達菩提心位)라,
명증정을 얻으면 마음이 밝아져서
무슨 경전이든 문자 해석만 되면
그 뜻이 술술 풀이가 되므로 통달보리심위라 합니다.
따라서 강원 교육을 받고도 참선을 못하면 제대로 소화를 못하는 것입니다.
강사가 되려는 분은 더욱 꼭 참선과 같이 병행해야,
견성오도는 미처 못한다 하더라도 통달보리심이 되어
경전을 바르게 지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순정(印順定)은
제2 수보리심위(修菩提心位),
곧 통달보리심을 더욱 닦아 익혀지는 자리입니다.
무간정(無間定)은
제3성금강심위(成金剛心位)니,
아직 금강심을 확실히는 못 증(證)한다 하더라도
금강심을 어렴풋이 증(證)하니
곧 4선(四禪)을 통관한 일심지(一心支)로서,
일심지는 4선정을 통관합니다.
일심지(一心支)란 동요되지 않는 맑은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초선 들어가나 2선, 3선, 4선 들어가나
일심지는 그대로 지속이 되는 것입니다.
일심지가 안되면 선정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흐트러뜨리지 않는 경계입니다.
지금 세간에서 주체의식(主體意識)이라는 말을 하지마는
사실은 일심지(一心支)가 되어야 참다운 주체의식이 됩니다.
그전에는 항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마음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 극점이 멸진정(滅盡定)이며
무간도(無間道)의 직후가 해탈(解說)입니다.
따라서 금강지(金剛地)부터는 모두가 해탈도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명득정과 명증정에서 성인(性忍)을 성취하는데
이자리가 공십지(共十地)의,
공십지는 성문·연각·보살 등의 계위(階位)를 다 합하여 이루어진 계위를 말합니다.
제2 성지(性地)요
인순정에서 도종인을 성취하닌 이가
공십지의 제3 팔인지(八忍地)인 동시에
성문승의 제6 팔인지
곧 성문 견도(見道)의 자리인데,
성문 견도(見道)는 대승의 참 견도(견성)가 아니며
수자(修者)가 인순정(印順定)에 들어가면
마음이 밝아서 기분이 쇄락하고 지견(知見)이 발하여
일체법을 헤아려 알 듯한 경계이므로
아만심을 내어 참 견성했다고 날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인(性忍)과 도종인이 아울러 연각승의 제4 심심이지지(甚深利智地),
곧 심심의 무상지(無相智)를 생하는 자리와,
제5 팔성도지(八聖道地), 팔성도를 닦는 자리와,
제6 각료법계허공계중생계지(覺了法界虛空界衆生界地),
삼계를 각료(覺了)하는 자리 등에 해당합니다.
5에 금강지(金剛地)라,
보살이 장차 정각(正覺)에 오르려 할때,
금강불성(金剛佛性)
곧 자기자성(自己自性), 우주의 실상(實相)을 깨닫는 것이므로
정각이라 하는데 온전한 정각은 습기를 다 없앤 보살십지를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정각의 초보인 셈입니다.
개좌(皆坐) 금강좌(金剛坐)라 설하신 금강좌란 곧 금강지 (金剛地)로서,
금강좌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생명의 본질이 훤히 빛나서
금강불성으로 화(化)해 버린 경계입니다.
밀교의 수행차서인
오상성신위차(五相成身位次)의 제4 성금강신위(成金剛身位)니
해탈도에 제일보를 자리하였으며
그 자리가 공십지(共十地)의 제4견지(具地)요,
또 성문승의 제7 수다원지(須陀洹地) 곧 예류과의 자리며,
연각승의 제7 증적멸지(證寂滅地) 곧 연각 견도(見道)의 자리인 동시에
제8 육통지(六通地) 곧 육신통(六神通)을 얻는 자리의 초보니,
육신통을 하려면 필수적으로 금강지를 먼저 성취해야 합니다.
다시 바꿔말하면 5 금강지란
지층(地層)의 최저인 금강륜(金剛輪)이 나타난 경지로서
무쇠의 녹을 제거함과 같고 새장에 갇혀있는 새가 새장을 탈출함과 같이
생사(生死)의 그물을 떠나야 합니다.
범부 중생은 새장의 새처럼 생사(生死)의 그물에 갇혀 있습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금강불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모두가 다 번뇌의 새장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중생 몸의 실상인 금강불성을 깨달아 증명하였고
진실로 본격적인 육안(肉眼)을 성취하였으니,
우리 육안은 탐진치에 어두워져 바로 보지 못하니 온전한 육안이 못됩니다.
금강지를 성취해야 바로 보게 됩니다.
점차로 천안(天眼), 법안(法眼), 혜안(慧眼), 불안(佛眼)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금강지를 성취하여야 비로소 금강살타(金剛薩睶)
곧 금강지를 성취한 보살이라 이름하게 됩니다.
6에 희락지(喜樂地)란
삼계(三界)를 9지(九地)로 구분하여
욕계(欲界)는 5취(趣) 즉 지옥·아귀 ·축생·천상·인간이 같지 않으나
동일한 산란심의 경계이므로 다 합하여 산지(散地)라 하고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각각 4지(地)로 구분합니다.
1에 욕계오취지(欲界五趣地)니,
욕계 내에 지옥·아귀·축생· 인(人)·천(天)의 오취(아수라는 천(天)에 포섭함)가 있는바
이를 합하여 일지(一地)를 이룬 것이며,
2에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니,
욕계의 생을 떠남으로 말미아마
회수(희受) 곧 의식에 나오는 기쁨과,
락수(樂受) 곧 몸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생(生)하는 지(地)로서 안·이·신·의의 4식(識)만이 있고,
비·설(鼻舌) 2식(識)이 없으므로 무분별의 락수가 상응하며
의식에 유분별의 희수가 상응하니 곧 색계의 초선천이며,
초선에 들어가면 냄새도 모르고 맛도 모르는 것입니다.
3에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니,
초선정의 희락(喜樂)을 인(因)으로 하고
다시 승묘(勝妙)한 희락이 생하는 경지로서
이 지(地) 이 상에는 모두 오식(五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을 여의고
곧 눈으로 봐도 안 보이고 귀로 들어도 안 들리고, 코로 냄새 맡아도 냄새가 안 나고,
입맛도 모르고, 몸에 촉감도 모르고 다만 의식(意識)만이 있으므로
2선천 이상은 의식뿐이고 5식은 없습니다.
혹 희수가 상응하고 혹 락수가 상응하니
곧 2선천이며, 희수나 락수가 서로 교차한다는 말입니다.
4에 리희묘락지(離喜妙樂地)니,
기쁨을 여의고 신묘한 안락인 묘락을 얻는 경지니
희수도 오히려 추심(추★528心)이므로,
추심은 거치러운 마음으로 기쁨도 공부로 보아서는 거치러운 번뇌입니다.
2선의 희(喜)를 떠나고 오로지 정묘한 무분별의 안락에 머무는 경지로서 곧 3선천이며,
5에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니,
모든 번뇌 망상을 떠나 청정한 경지니,
락수(樂受)도 오히려 거치러운 마음이므로 이를 떠나고
청정하고 조금도 조작이 없고
고나 락을 받는 것이 전혀 없는 생각에 머무는 경지로서
곧 4선천인데 이상 4지(地)는 색계입니다.
6에 공무변처지(空無邊處地)니,
색지(색계)의 색을 싫어하여 공(空)을 생각하되
공에 한계가 없다고 관찰하는 지혜를 짓는 자가 생하는 경지로서
즉 무색계의 제 1천이며.
7에 식무변처지(識無邊處地)니,
앞의 외공(外空)을 싫어하여 내식(內識)을 생각하되
식(識)에 한계가 없다고 관찰하는 자가 생(生)한 경지로서
무색계의 제 2천이며,
8에 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니,
앞의 내식(內識)을 싫어하고 무소유를 생각하여
무소유를 관찰하는 지혜있는 자가 생하는 경지로서
즉 무색계의 제 3천이며,
9에 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니
앞의 경지와 같은 거치러운 추상(★想)이 없고〔非想〕,
극히 미세한 상념〔非非想〕만 있는 경지
곧, 삼계의 꼭대기인 비상비비상처도 아직은 생각인가 아닌가 하는
미세한 생각은 남아 있다는 경지입니다.
이러한 경계가 무색계의 제 4천으로서
삼계 중 제일 수승(殊勝)한 과보(果報)입니다.
그런데 무색계를 식계(識界),
색계를 근계(根界),
욕계를 경(境:塵)계로 구분할 수 있으나
각계 (各界)가 각각 삼계(三界)를 갖추어서
다만 현상적인 상(相)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성품 차원에서는 다 일여평등(一如平等)합니다.
그래서, 횡(橫)으로는 구분할 수 없고,
횡으로는 하나가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습니다.
우주란 따로따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사, 김씨 박씨가 따로 따로 있다고 알지만
현대 물리학으로만 보더라도 산소나 수소 등의 원소로 구성된 몸이기에
산소나 수소 등의 원소 차원으로는 결국 다 붙어 있는 것입니다.
원소의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다 붙어 있는 것인데,
하물며 원소를 구성한 근본 성품인 불성(佛性)차원에서는
나나 너나 공간이나 모두가 다 동일한 불성뿐입니다.
근래서 횡으로 보아서는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근본에서, 진여불성 자리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더욱 그럴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네 문중 내 문중, 네 종파 내 종파, 내 종교 네 종교로
부질없는 소모와 갈등만 할 뿐입니다.
종(縱)으로 나눈다면 욕경계(欲境界)를 추진삼계(추★530塞三界),
번뇌가 거치로운 경계, 색근계(色根界) 세진삼계(細塵三界)
번뇌가 좀 미세한 경계, 무색식계(無色識界)를 극미삼계(極微三界) ,
번뇌가 아주 미세한 경계로 나눌 수 있겠으나,
하여튼, 삼계란 근(根), 경(境), 식(識)의 별칭으로서,
우리 마음의 번뇌로 본다면 6근, 6경, 6식이 맑아 들어가는 정도를 별칭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相)적으로는 경(境)이오,
성(性)적으로는 근(根)이며,
분별적으로는 식(識)일새,
오온(五蘊)이 각기 오온을 갖추어 구별하기 어려우나
평등일여한 가운데 성상(性相)이 분명하니 또한 구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금강지를 성취하여
공무변처를 관념(觀念)하면 리생희락지에 이르고,
식무변처를 관념하면 정생희락지에,
무소유처를 관념하면 리희묘락지에,
비상비비상처에 머물면 사념 청정지에 이르는 것인데,
6 희락지란 리생희락과 정생희락이 생하는 경지로서
성문승의 제8 사다함지(斯陀含地)
즉 일래과(一來果)로,
욕계 번뇌가 마저 녹지 못해서 욕계에 한번 오는
위(位)와 공십지(共十地)의 제5 박지(薄地)에 해당하고,
5 금강지와 6 희락지를 합해서 보살승의 초환희지에 해당합니다.
여기까지가 보살초지에 해당합니다.
금타 스님께서는 보살십지를 표준하고
여러 가지 계위를 대비(對比) 회통(會通)시킨것입니다.
7. 리구지(離垢地)라,
거치러운 희수(喜受)를 여의고 묘락(妙樂)을 얻는 경계를 거쳐서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에 이르는 경지니,
성문승의 9 아나함지 즉 불환과(不還果)의 위(位)로 욕계 번뇌를 떠났으니
욕계에 다시 오지 않는 자리에 해당하고,
보살승의 제 2지에 합(合)하며 공십지(共十地)의 제6 리욕지(離欲地)에 해당합니다.
8. 발광지(發光地)라,
수행자는 가행공덕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간단(間斷)없이 공부해야 앞으로 나가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안됩니다.
따라서 게으름이라는 것이 수행자로서는 큰 원수입니다.
혼침(箌沈)과 도거(掉擧)도 가행공덕으로서 사라지는 것인데
가행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할 별도리가 없습니다.
정진을 않고서 말로만 알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가행공덕으로 일시적으로 삼계를 출리(出離)하니
심광(心 光)이, 마음의 광명이 발하여
구차제정(九次第定)
곧 4선정(四禪定), 4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이 구차제정입니다.
구차제정은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서 성도 하실 때도 구차제정에 의거하고,
열반드실 때도 구차제정에 의거했습니다.
아함경(阿含經)이나 성도기(成道記)에 다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인도지방의 도인들은 대체로 이와 같이 구차제정에 의거했고,
현재 우리도 공부하는데 있어서 이 4선정, 4공정, 멸진정의 한계를 알아야
자기 공부를 정확히 점검할 수가 있고 우리 번뇌 습기를 온전히 여읠 수가 있습니다.
현대 과학만능 시대에 있어서
구차제정(九次第定) 법문은
부처님께서 몸소 실천하시고 역설한 가장 합리적인 선정(禪定)의 차서이니
우리 수행자는 깊이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 발광지(發光地)에서 삼계(三界) 번뇌를 소멸함에 따라
심광(心光)이 발하여
구차제정의 마지막 자리인 멸수상정(滅受想定)
곧 멸진정(滅盡定)을 비로소 음미하는 경지이니
보살승(菩薩乘)의 3지(三地)에 해당합니다.
9에 정진지(精進地)라,
보살십지에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성취하고
십진여(十眞如)를 증험하게 되는데,
환회지(歡喜地)에서 시바라밀(施波羅蜜)을 성취하고
아(我) ,법(法), 이공(二空)의 경계에서
제법에 두루 통하므로 변행진여(遍行眞如)를 증험하며,
리구지(離垢地)에서
계바라밀(戒波羅蜜)을 성취하고,
리구지가 되어야 과거 지었던 죄를 소멸합니다.
단순히 참회한다고 해서 과거에 지었던 죄가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은 녹아지나 이른바 4바라이(四波羅夷)죄는
리구지에 들어가야 없애는 것입니다.
리구지를 성취 못하고서는 파계의 습기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무변(無邊)의 덕을 구족하여 일체법에서
최승함으료 최승진여(最勝眞如)를 증험하며,
발광지(發光地)에서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을 성취하고,
이 진여(眞如)에서 유출(流出)되는 교법이 지극히 수승하므로
승류진여(勝流眞如)를 증험하며,
염혜지(檷慧地)에서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을 성취하고,
걸리는 바 없어서 아집 등에 의하고 또 취하는 바 아니므로
무섭수진여 (無攝受眞如)를 증험하며,
난승지 (難勝地)에서
선정 바라밀(波羅蜜)을 성취하고,
차별의 종류가 없으니 안(眼)·이(耳) 등의 구별이 없으므로
무별진여(無別眞如)를 증험하며,
현전지(現前地)에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성취하고,
본성이 본래 오염됨이 아니니 후에 다시 맑힌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무염정진여(無染淨眞如)를 증험하며,
원행지(遠行地)에서
방편선교바라밀(方便善巧波羅蜜)
곧 모든 공덕을 회향(廻向)하는 방편과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바라밀을 성취하고,
다수법에 종종으로 안립(安立)하되 다름없으므로
법무별진여(法無別眞如)를 증험하며,
부동지(不動地)에서 원바라밀(願波羅蜜)
곧 구보리원(求菩提願)과 이락타원(利樂他願)바라밀을 성취하고,
증감(增減)의 집착을 떠나서 정염(淨染)에 따라 증감됨이 아니므로
부증감진여(不增減眞如)를 증험하는 동시에,
또 상토자재소의진여(相土自在所依眞如)를 증험할 수 있으니
이를 증득(證得)하게 되면
몸을 나타내고 국토 자연을 나타내는데 자재하며,
이 경지는 자기 몸을 마음대로 작게도 크게도 할 수 있고
또는 다른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통지혜입니다.
지금 원자력이 무시무시한 재주를 부리고 있지만
그런 것은 불성 가운데 들어있는 능력의 일단에 불과합니다.
불상은 대소, 시비, 선악의 차별이 없는 무한공덕이기 때문에
크다 작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겨자씨 속에다 삼천대천 세계를 다 집어넣는다 해도
조금도 줄어지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선혜지(善慧地)에서 력바라밀(力波羅蜜)
곧, 수습력(修習力)과 사택력 (思擇力)바라밀을 성취하고,
지(智:受用法樂智와 成熟有情智) 자재소의진여(自在所依眞如)를 증험하니
이를 증득(證得)하게 되면 거리낌없는 지혜에 자재하게 되며,
법운지(法雲地)에서 지바라밀(智波羅蜜)을 성취하고
모든 업(業)을 자유자재하는 진여를 증득하면
일체 신통 경계에 자재하게 됩니다.
진여성(眞如性)은 실로 차별이 없으나
원만하고 수승한 덕(德)에 따라 십종(十種)을 잠시 구분하여 세운 것인데
보살초지 중에서 이미 일체에 달(達)하여 능히 증험하고 행할 수 있으나
아직 원만치 못함으로 원만케 하기 위하여 부연 설명한 것입니다.
해탈십육지에 있어
7, 8, 11의 3지(地)는 보살십지의 2, 3, 6의 3지명(地名) 그대로이고
9, 10의 2지는 십바라밀중 4, 5의 관사(冠詞: 머리말)를 인용하고
12, 13, 14, 15, 16의 5지는 유가십칠지(瑜伽十七地) 중
(유가는 밀교의 유가사지론인데 굉장히 훌륭한 론장입니다.
유가사지론은 무착보살이 미륵보살의 감응을 받아서 저술한 것입니다.)
13 성문지, 14 독각지, 15 보살지, 16유 여의지, 17 무여의지 등과
공십지(共十地)의 7 성문지, 8 지불지, 9 보살지, 10 불지(佛地) 등을
참작한 것이니 대조하면 되겠습니다.
10에 선정지(禪定地)라,
보살승의 5. 난승지에 해당하며,
11에 현전지(現前地)라,
보살승의 6. 현전지에 합당하고,
12에 나한지(羅漢地)라,
성문승(聲聞乘)의 마지막 자리인
10. 아라한지 즉 무학과(無學果)의 자리와 연각승(緣覺乘)의
9. 철화밀지(微和蜜地) 즉 무학과를 증득하는 자리와 보살승의
7.원행지와 공십지(共十地)의 7. 이변지(已辨地) 즉 아라한과의 경지에 해당합니다.
13에 지불지(支佛地)라,
연각승의 마지막 끝자리인 10. 습기점박지(習氣漸薄地)로서
습기를 침해하는 경계니
공십지의 8.지불지에 합하고 원리를 증명하는 의미에서는
보살승의 8. 부동지에 해당합니다.
14에 보살지(菩薩地)라,
보살승의 9. 선혜지와
공십지의 9. 보살지에 합당합니다.
15에 유여지(有餘地)라,
유가십칠지(瑜伽十七地) 중
제 16. 유여의지(有餘依地)의 약칭으로서
보살승의 마지막 끝자리인 10. 법운지에 해당하고
공십지로는 9. 보살지에 들어가며
또 등각위(等覺位)도 이에 포함되나 인위(因位)의 등각이란
오십위 (五十位)의 총 대명사라 말할 수 있으므로 이를 생략합니다.
16에 무여지(無餘地)라,
열반에도 유여열반, 무여열반이 있는데 해석이 구구합니다.
유가17지의 마지막 위인 무여의지(無餘依地)의 약칭으로서
공십지의 10. 불지(佛地)에 당하는 묘각(妙覺)의 자리니,
4각중 본각(本覺)을 제하고 16지에 안배하면
이가 구경각(究竟覺)이요,
4지까지가 상사각(相似覺), 5지부터 수분각(隨分覺)이며,
5인(忍)으로 안배하면
4지까지 복인(伏忍),
8지까지 신인(信忍),
11지까지 순인(順忍),
14지까지 무생인(無生忍),
나머지 2지가 적멸인(寂滅忍)으로서
3지까지가 하복인(下伏忍:習忍),
4가행지(四加行地) 중 명득정과 명증정이 중복인(中伏忍:性忍),
인순정(印順定)이 상복인(上伏忍:道種忍),
5, 6합지가 하신인(下信忍),
7지가 중신인(中信忍),
8지가 상신인(上信忍),
9지가 하순인(下順忍),
10지가 중순인(中順忍),
11지가 상순인(上順忍),
12지가 하무생인(下無生忍),
13지가 중무생인(中無生忍),
14지가 상무생인(上無生忍),
15지가 하적멸인(下寂滅忍),
16지가 상적멸인(上寂滅忍) 인바
이를 14인(忍)이라고도 말하고
상적멸인을 제하여 13관문(觀門)이라고도 말합니다.
또한 공(空)·성(性)·상(相) 3종(宗)은
원래 횡적으로 간별할 바 아니요,
종적으로 그 정도를 각각 시설한다면
복(伏)·신(信)· 순(順) 등 3인은 상종(相宗)이요,
무생인은 성종(性宗)이며 적멸인은 공종(空宗)이니라,
그리고 4가행위(四加行位)·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등
제위를 도합한 56위설
또는 등각위를 제한 5위설
또는 4가행위를 제한 52위설
혹은 51위설
또는 십신위 (十信位)를 외범부위(外凡夫位)라 하여
이를 제한 42위설
혹은 41위설 등이 있고,
또는 십주·십행·십회향을
내범부위(外凡夫位) 혹은 삼현위(三賢位)라 하며,
십지를 십성위(十聖位)라 이르는 삼현십성설(三賢十聖說).
또는 초·2·3지를 삼현위(三賢位),
4지를 입성지문(入聖之門),
5지부터 10지까지를 육성위(六聖位)라 말하는
삼현육성설(三賢六聖說) 등이 있는데,
필자(금타 스님)는 55위설과 삼현육성설을 지지하는 동시에
55위를 점차한 차제점수설(次第漸修說)을 타파하고 내(內)의 50위에 있어
오위십중(五位十重) 또는 십위오중(十位五重)으로 종횡 관찰하여
오온개공을 증득하는 경지로서
곧 오지여래(五智如來)를 성취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삼계(三界) 사대(四大)의 색음(色陰)을 걷고,
우리 중생이 공부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제가 누차 말씀드린
색 곧 물질이 있다고 하는 유병(有病)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지금 없다고 밝히는데 하물며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는
불자들이 유병에 걸리면 공부가 안됩니다. 꼭 색음을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법공의 도리를 깨달아야 반야바라밀이 되지 않겠습니까.
반야지혜에 어두우면 보시(布施)도 제대로 못되고
또는 사회운동도 아무것도 제대로 못되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누구한테나
가장 소중한 보배가 제법공(諸法空)자리를 증득하게 하고
제법공도리를 깨닫기 위한 신심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제법공을 증해야 비로소 정신(正信)이 생하니
초신(初信)이우 수음(受陰)을 걷고
이무아(二無我: 我空·法空)를 증(證)하면
초발심의 환희지에 머무를새 초발심주(初發心住),
상음(想陰)을 걷고 분별심을 없애버리면
여래의 묘덕으로써 시방에 수순하여
환희로 행할새 초환희행(初歡喜行)이요,
행음(行陰)을 걷고 일체에 통하면 일체 중생을 구호할새
초구호일 체중생회향(初救護一切衆生廻向)이요,
식음(識陰)을 걷고 처음으로 정각(正覺)에 등(登)하여 환희용약할새
초환희지(初歡喜地)며 또는 가행공덕으로써 초지(初地)를 성취하면
초신(初信)과 같은 신이 생하고
초주(初住)와 같은 지에 주하고
초행(初行)과 같이 행하고,
초회향(初廻向)과 같이 회향하나니,
나머지는 다 이와 같습니다.
이에 더해서
초·2지란 색음(色陰),
3·4지란 수음(受陰),
5·6지란 상음(想陰),
7·8지란 행음(行陰),
9·10지란 식음(識陰)을 걷는 등의 과위(果位)로서,
가행(加行)이란 인위(因位)를 의미합니다.
부지런히 수행하여
이러한 50위를 원만성취하면
곧 묘각(妙覺)이라 이름하니
해탈십육지란 보살십지를 근간으로 하고
성문십지, 연각십지, 삼승공십지, 밀교십지, 유가십칠지,
신(信)·주(住)·행(行)·회향(廻向) 등
넷의 10위, 오상성신위(五相成身位),
오인(五忍), 십삼관문(十三觀門), 사가행(四加行) 등을 지엽으로 하여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를 회통(會通)한지라,
수행자는 처음에 삼보에 귀의하고
점차 수행하여 16무여지(無餘地)에 이르러
마지막까지 빠짐없이 성취하는 것이니
바로 십육생성불설(十六生成佛說)에 합당합니다.
첫댓글 범부가 부사의한 해탈경계로 나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수행의 나침판 해탈 16지에 대한 큰스님들의 가르침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 같은 가르침이 없었다면 닦음의 과정에 밝지 못하고 문득 깨달음만을 구하는 이 시대에 어찌 길을 찿아 나아갈 수 있을까요,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_()_
해탈16지!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