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3.2.14.화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827-869)와 성 메토디오 주교(820-885) 기념일
창세6,5-8;7,1-5.10 마르8,14-21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깨달음의 여정-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와닿는 첫 느낌은 주님의 인간에 대한 참 깊은 좌절감입니다.
창세기의 하느님이나 복음의 예수님이나 똑같습니다.
이는 때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을 보면서도 때로 느끼는 좌절감이기도 합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참 구제 불능같다는 불경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광야인생 제대로 미쳐 살면 성인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된다고
주저없이 단언하곤 합니다.
참 사람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생공부가 사람되는 공부요, 평생공부해도 될까 말까한 참사람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 대해 후회하고 아파하는 마음이 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내가 그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마음에 들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사람들같습니다. 그 장구한 세월이 지난 오늘에 주님께서 보셔도
똑같은 인간 현실에 깊은 좌절감을 지닐 듯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끈 솟았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막연히 남탓 할 것 없이 나부터 참사람이 되고자,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해 보자는 결의입니다.
삶은 부단한 선택입니다.
참사람되고자 하는 선택보다 고귀한 선택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좋은 선택에 이어 부단한 의식적 훈련에 습관화입니다.
참 요즘 제가 많이도 강조한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바로 창세기에서 반갑게 발견되는 모델, 한사람이 바로 노아입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8절에 이어 생략된 9절까지 내용입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Noah walked with God)’라는
영어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직역하면 평생 하느님과 함께 걸어갔다는 것이니 평생 도반, 평생 동반자 하느님입니다.
앞서 5장 24절에 나오는 에녹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소망이 담겨 있는 서품 상본의 성구이기도 합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longer here, for God took him)’
참 멋지고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죽음 없이 승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에서는 에녹, 모세, 엘리야 셋을 승천한 인물로 여깁니다.
에녹 역시 평생 도반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걷기의 도보 운동을 할 때는 혼자가 아닌 하느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의식하기 바랍니다.
저는 수도원 하늘길을 걸을 때 그렇게 합니다.
이 또한 복된 영성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가까이 있는 제자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느끼시는 모습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악한 성향, 부패와 타락의 상징인 누룩에 견주어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주의를 줬는데
동문서답식으로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며 현실적 걱정을 합니다.
제대로 경청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완고한 영혼들입니다.
창세기의 악한 사람들이나 복음의 완고한 제자들 대동소이 무지의 악에서, 무지의 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참 고질적 인간 마음의 질병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완고함, 탐욕, 질투등 온갖 악의 원천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 동방영성에서 참 많이 강조하는 무지입니다.
무지의 인간, 인간의 부정적 정의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무지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어 5천명을 먹이신 기적,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상기시키며, 다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로
끝맺습니다.
망각은 영성생활의 적입니다.
기억없이는 영성생활도 없습니다.
영성생활은 기억입니다.
주님 은혜 잊지 말고 기억하라 얼마나 많이 강조합니까?
기억하여 현재화하여 살기 위해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수도자들입니다.
말그대로 기억의 훈련입니다.
이래서 본의 아니게 맞이하는 치매가 영성생활에 얼마나 큰 재앙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비관할 것도, 좌절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포크레인으로 뽑아놓은 거대한 배나무 뿌리들을 보며 장구한 세월, 침묵중에 묵묵히, 살기위해,
뿌리내리기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얼마나 분투의 노력을 다한 치열한 배나무들이었는지 생각하며
제 믿음의 뿌리를 연상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뿌리를 상징하는 거대한 배나무 뿌리들은 참 좋은 희망의 표지가 되어
우리의 분발의 의욕을 북돋아 줍니다.
다음 시편 말씀과 찬미가의 기도도 참 좋은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 주소서.”(월요일 3시경)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들이요, 우리 마음 안에 심어주신 하느님 향한 믿음과 희망,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목적없는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무지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여정, 회개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정에 따라 주님을 닮아감으로 무지에서 해방되어 겸손하고 지혜롭고 순수하고 의로운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슬라브인의 사도들이라 칭하는 데살로니카 출신 메테디오 주교와 치릴로 수도자 형제의 기념일입니다.
9세기 성인 형제들로 이들의 평생 분투의 노력도 감동적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기존의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외에 슬라브의 사도들인
치릴과 메토디우스의 두 수도자와 함께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 성녀와 스웨덴의 브리지따 성녀,
그리고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함으로 모두 6명 성인이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늘 생각하는바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은 평생 휴식이 없었다는 것, 평생 고통이 따랐다는 것,
고통중에도 내적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베네딕도회 아빠스의 묵상글도 좋은 힘이, 격려가 되었습니다.
“영성생활은 경주와 같습니다.
아픔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것입니다.
결국 아픔도 사라집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인생경주에서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다리의 고통을 느낄 때 동료 경주자들도 똑같이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느긋해지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통은 느긋하라(slow down)는 신호가 아니라
더욱 힘차게 달리라(speed up)는 신호입니다.
평범함과 위대함은 이런 순간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영성생활은 경주와 같습니다. 유혹의 순간은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우리는 편안함을(for comfort)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위대함(for greatness)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복음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이것이 의로움(righteousness)이요, 이것이 아름답습니다(beautiful).”
프란치스코 교황도 신자들에게 “믿음은 최소한도(minimum)의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최대한도(maximum) 열망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부단히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의로운 삶이요
아름다운 삶이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의롭고 아름다운 깨달음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 한연을 나눕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시종여일始終如一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묵상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