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밉든 곱든 그 나름으로 뭔가 가진 게 있어 보이고 하나같이 넉넉한 인상인데 박정희는 그게 아니다. 고난의 상이다. 궁하고 고생 팔자를 타고 난 모습이다. 1미터65 키도 작다.
박정희 가족들은 모두 키가 컸다. 한국인의 평균치보다 큰 키에 좋은 체구를 지닌 편이었는데 5남2녀의 막내 박정희만 키가 가장 작았다. 어느 집을 보아도 보통은 맏이가 키가 작고 생김새도 가장 구형이며, 뒤로 갈수록 키가 크고 얼굴도 신형으로 진화된 모습이게 마련인데 박정희는 그게 아니다.
모친이 40 중반에 원치 않는 잉태를 해서 부끄럽고 망신스러워 간장도 먹어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굴러도 보았건만 지워지지 않고 태어난 생명이라 했다.
박정희의 작은 체구는 낙태를 원하던 모친의 몸부림 때문이라 하고, 또는 걸음마 타던 시절에 화상(火傷)을 입은 충격, 또는 제대로 못먹은 탓이라고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고난에 짓눌린 아픔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소년 시절의 박정희를 모친은 매우 안쓰러워했다.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으로 모친은 막내에게 정을 쏟았다. 겨우겨우 대구사범을 졸업해 혼자 돈을 벌게 된 박정희가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또는 만주에서 군대생활을 하다가 잠시 돌아와 용돈을 드리면 한참 세월이 흘러도 그 돈을 허리춤에 그대로 갖고 있었다는 모친이다. 그 막내가 대통령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모친이다.
구미 생가에 그가 소년시절부터 먹고 자고 공부하던 토방(土房)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한 사람 누우면 뒹굴어볼 공간도 없는 아주 작은 방을 보고 어떤 할머니가 “아이고!” 탄식하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이런 방에서 사시느라 그렇게 작으셨나봐”하며 방바닥을 손으로 쓸어보던 할머니…. 할머니는 방문 앞을 물러나며 머리 숙여 합장을 했다.
박정희 평전을 쓴 어떤 사람이 박정희의 원치 않았던 출생을 들어 ‘고아(孤兒) 의식’을 특징으로 강조했는데 이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안이한 관념이 낳은 추론이다.
고난의 시절엔 어느 집이든 축복의 출생이 없었다. 작은 토방에 아이들은 오밀조밀한데 남정네가 출타했다가 돌아오면 또 아이를 낳아 웃목에 밀어놓고 누운 아내를 보고 한숨으로 구들장이 꺼질 듯하던 시절…아이의 출생은 축복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고난일 뿐이었다. 기구한 생명이라 굶길 수는 없고 어떻게든 또 하나 먹여야 하는 입, 버릴 수는 없지만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모진 생명이 박정희뿐은 아니었던 것이다.
집집마다 어지간히도 부모들은 자식을 윽박지르고 매질을 했다. 운명만 같았던 생활고에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밥 달라고 울어대는 자식을 오죽하면 원수라고 했을까. 일년 삼백예순닷새 중에 아이들이 매맞지 않는 확실한 보장의 날이 있긴 있었다. 몸이 아파 학교에 못가고 누운 날, 명절날, 그리고 생일날이다. 그런 날이면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자식을 바라보던 부모의 저린 마음을 그 자식이 부모가 되어서 깨닫게 되는, 지난날의 생일날은 그런 아픔을 동반하고 있다.
1917년 음력 9월 30일이 그의 생일이다. 양력으로 11월 14일이다.
박정희는 군시절 양력 생일에 동료들이 생일을 지내자고 하면 음력으로 지낸다고 피하고, 음력 생일이 오면 양력으로 지낸다고 피했다. 무슨 날이라고 해서 격식 차리는 것을 번거로워했다. 그는 음력 생일을 양력으로 바꾸지도 않고 내버려둘 만큼 자신을 챙기는 일에 무심했다.
먹는 것, 입는 것, 무엇이든 걸치는 것에 무신경했다. 국가원수 급이나 저명인사들이 서너개 또는 여남은개씩 걸치는 흔해빠진 명예박사 같은 것도 그에게는 없다. 그거 가진다고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아무짝에 쓸데없다고 말하는 박정희.
60년대 청와대 시절에 ‘각하의 생신’을 모른 체할 수 없다 해서 양력 9월 30일이면 주변에서 가만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각하의 생신’을 번듯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그는 “국민소득 3백달러가 되면 보란듯이 잔치하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3백달러 6백달러로 나라살림이 껑충껑충 뛰어가도 그 생일은 밥이나 한끼 먹는 매양 그 타령이었다.
그가 생일의 양력, 음력 날짜에 불편을 느껴 양력 11월 14일로 바로잡은 것이 1976년이었다. 그 전까지 생일날도 아닌 날에 생일을 지내다가 제대로 된 날짜의 생일을 세번 치르고, 그리고 세상을 떠났다.
70년대 후반의 그는 생일날이면 진해, 강릉 같은 곳에 내려가 쉬는 것을 좋아했다. 그를 가장 편하게 했던 곳은 진해의 해군공관이다.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고 경호의 번거로움도 없는 한적한 곳이라 좋아했다. 또 그에겐 군시절 셋방살이부터 부인 육 여사와의 추억이 있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 진해였다.
그는 번거로운 생일차림을 귀찮아했지만 술은 좋아해서 거의 매일 마셨다. 술 좋아하는 사람 치고 악인 없다는 말이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군인 출신답지 않게 인간 박정희는 섬세하고 여리다. 강자에게 무섭게 강하지만 약자에게 한없이 약하다.
3선개헌 때문에 등을 돌려 소위 ‘민주인사’로 변신한 옛 부하가 박정희는 술을 좋아해서 수전증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도 납득이 안된다. 박정희는 말년까지 붓글씨 쓰는 붓을 놓지 않았다. 손떨림이 허용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붓글씨 쓰기를 수전증 술꾼이 어떻게 쓴단 말인지… 하기야 자기의 공을 앞세워, 또는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모든 허물을 고인에게 뒤집어씌우는 자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TV 드라마의 박정희역을 연기했던 배우들도 왜 한결같이 무뚝뚝하고 무서운 상인지…. 그의 이미지가 그렇다고는 해도 삼백예순날 한순간도 웃지 않는 듯한 표정 연기는 좀 더 자연스럽게 바뀌었어야 할 것이다. 박정희도 웃음이 나면 웃고 슬프면 눈물짓는 보통 인간이라고….
어쨌든 박정희역을 연기했다는 이유만으로 택시 기사가 그 배우에게 요금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우리 시대에 어떤 지식인들이 내리는 평가보다도 정확한 민심을 반영하고 있다.
또 있다.
술꾼들 역시 “술” 소리만 나와도 안색이 달라지는 박정희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군시절로 가보자.
술 한잔에 시 한수, 노래 한자리라고 했다.
박정희가 일어나 ‘낙화유수’를 부른다. 허리에 양손을 얹고 상체를 좌우로 흔들어 박자를 맞추며 절도있게 부르는 ‘낙화유수’.
군대 시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행군간에 군가를 시작한다. 군가는 낙화유수. 반동은 좌로부터 우로! 군가 시작!”
“이 강산 낙화유수”
“하나 둘!”
“흐르는 물에”
“하나 둘!”
이렇게 구령에 맞춰 ‘낙화유수’를 부르는 박정희를 상상해 보라.
이건 논픽션이다.
근엄해서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박정희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웃을 때도 많았다. 박 대통령 20주기를 맞아 본회가 주최한 특별사진전(1999년 10월 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당시 김대중 정부의 김종필 총리가 사진을 감상하고 있다. 김 총리는 인사말에서 “저도 미처 보지 못했던 사진들이 많이 전시되고 있어서 박 대통령 시대를 돌이켜볼 수 있는 좋은 전시회가 될 것”이라며, 본회 임원진과 회원들에게 “박 대통령을 좋아하고 또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순수한 뜻으로 모임을 결성하여, 오늘 이처럼 뜻깊은 행사를 마련하신 데 마음속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육 여사가 초대한 서울 사당동의 난민촌 할머니들을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1967년 4월 13일). 보통 국가기록 사진은 격식에 치우치게 마련이지만, 이 경우는 소탈한 대통령의 함박웃음과 할머니들의 수줍은 표정이 잘 포착돼 있다.
11월 14일.
생일은 그에게 무덤덤했지만, 이날이면 수더분한 모습으로 그가 우리에게 온다.
완행열차 손님의 한 사람으로 그가 우리에게 온다.
특급열차 타고 싶지만 왠지 쑥스러워서
완행열차 타고서 간다
그리운 고향집으로
차가운 바람 맞으니 두눈이 뜨거워지네
고향으로 가는 이 마음
이 기차는 알고 있겠지
말 못할 설움과 말 못할 눈물은
차창밖에 버리고 가자.
한영애의 가락을 타고 흘러오는 한 사람. 완행열차가 어울리는 사람.
또 있다.
햇볕은 싫습니다
그대가 오는 길목을
오래 바라볼 수 없으므로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
어서 오세요 그대
비 오는 날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오실 땐
햇볕 좋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제격이지요
그대의 젖은 어깨, 그대의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해주는 은사시나무
비 오는 간이역, 그리고 젖은 기적소리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는 싫습니다
……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그대처럼 더디게 오는 완행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정하)
은사시나무 한그루의 심정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
그가 짊어졌던 어깨 위의 고난, 그 고난에 기대어 주고 싶은 은사시나무.
긴 세월을 숨가쁘게 달려갔으니 이제는 천천히 돌아오라고, 특급열차가 아닌 완행열차로 오라고, 비 오는 간이역에서 소주 한잔 하며 기다려도 좋은 사람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 박정희를 보고 싶은 곳은 그런 곳이다. 비 오는 간이역 같은 곳. 일년 삼백예순닷새 중 11월 14일 하루쯤은. ◎
※필자 주 : 전에 썼던 것을 조금 손질해서 올립니다.
첫댓글 박정희대통령각하 ! 오로지 국민생각으로 일평생사시다가셨습니다1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