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의 역사는 종이의 발명에서부터 유래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종이 를 발명한 사람은 AD.105년
중국 후한의 채륜이다. 그 후 제지 기술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고 기술과 지질은 발전되어 갔다.
7세기 말부터 목판에 무늬를 새겨 먹물을 찍는 목판 인쇄술이 고안되었고 10세기 후반에는 먹물이 번지지 않는 가공상의 기술까지 터득하게 되었다.
채륜의 제지법이 유럽에 전래된 것은 8세기 중엽으로 아라비아인들에게 기술을 전파하게 되어 900년경에 이집트의 파피루스가 유럽에 전파되었고 11세기경에는 아프리카북부와 지중해 연안까지 전파되었다.
유럽에서 맨 처음 종이를 만든 나라는 1150년에 스페인에서 였다. 이어 1189년 프랑스에 제지공장이 세워져서 이를 근간으로 프랑스는 중세 유럽의 최대 제지 공업국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기계에 의한 초지법을 발명되어 근대 제지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1276년 이탈리아에 최초 제지공장이 세워 졌으며 종이에 문양은 넣는 기술까지 개발되었다.
15세기 이후 유럽의 제지공업이 급속도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1405년에 발명된 인쇄술의 보급에많은 영향을 받았다. 본격적인 기계 제지법은 1798년 프랑스의 니콜라스 루이 로베르(Nicholas Louis obert)가 기계식 초지기2)를 발명하면서 부터였고, 이것이 영국으로 건너가 완성되었으며, 현대 초지기의 원리와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2. 벽지의 기원과 발전
벽지의 기원은 벽걸이나 벽화 등 벽을 장식하는 액세서리에서 유래되었다. 중국에서 AD 105년경 종이가 처음 발명되었고, 수액(樹液)을 이용한색지의 발명과 BC 200년경에는 12×16인치 크기의 박엽지에 손으로 모양을 그려 궁전의 벽화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종이가 중국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시기는 8∼11세기였으며, 15세기에는양피지 대신 종이에 활자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중국의 벽지가 인도의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디아 페퍼(India paper)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전래되었으며, 이것은 동양풍의 벽지의 유행을 낳게 되었고, 영국의 시노와즈리(Chinoiserie) 벽지는 동양풍의모조 벽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벽지의 인쇄는 목판인쇄(Wood block), 레터 프레스(Letter Press)5)에서 시작하여 17세기 경부터는 색상을 넣기 위해 스텐실(Stencil) 인쇄방법을 사용했고, 다양한 효과를 얻기 위해 이러한 방법들을 배합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벽지는 18세기 초 영국을 중심으로 큰 발전을 보이게 되는데, 초기 목판인쇄 대신 금속판에 의한 롤러 프린트 기술이 도입되어 벽지의 양산 체제가 정비되었기 때문이다.이 무렵 영국에서는 플로킹(식모벽지)벽지가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벽지는 1509년 영국의 헨리 8세의 포고문 뒷면에 목판
으로 인쇄된 벽지로 1911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무늬의 반복적인 패턴에 의한 벽지는 없었고, 17세기에 프랑스의 장 파피용(Jean Papillon)이 목판 인쇄에 의해 무늬를 찍어 여러 장을 이어 붙여 전체를 꾸미는 작업이 시도되었고 이것이 근대벽지의 효시라 할 수 있으며 장 파피용을 근대 벽지의 아버지라 하는 것은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7) 이러한 수작업에 의한 벽지의 제조는 생산에 한계가 있으며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요구와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기계화에 의한 다량생산의 필요가 대두된다.
처음 벽지 인쇄 기계를 만든 사람은 1785년 경 크리스토프 필립 오베르 캄프(Christophe Phillipe Oberkamp)이며 루이스 로버트(Louis Robert)가디자인한 두루마리형의 벽지가 처음 만들어 졌다.
1798년 석판 인쇄술의 발명과 꾸준한 발전 과정을 거쳐 영국의 랭커셔(Lancahire)의 인쇄 회사에서 1840년 동력에 의한 기계 인쇄 벽지가 생산되어 기계 인쇄 벽지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산업혁명 시기에는 제지 기술의 발전과 공급의 확대로 영국을 중심으로 금속판 로울러 프린트(Roller Print)의 양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영국의 디자이너인 윌리암 모리스(William Morris)가 1861년 그들의 동료들과 Morris, Marshall, Faulkner&co.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1862년 첫번째 작품으로 유명한 트레일리스(Trellis), 데이지(Daisy)와 같은 디자인을 생산해 내었다. 최근까지도 이들의 디자인을 모방한 벽지가 생산될 정도로 강력한 인상을 주는 스타일의 디자인을 창안해 내었다.
이밖에 벽지 디자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월터 크레인(Walter Crane)과 고틱(Gothic)이나 로코코(Rococo) 스타일의 작업을 많이 한 푸긴(A.W.N Pugin)과 오웬 존스(Owen Jones), 제임스 헌팅톤(James Huntington)등의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에 비로소 다색 인쇄 및 엠보스(Embossed)벽지8)가 등장하게 된다.
20세기 초에 들어서 독일의 바우하우스(1919∼1933) 설립과 여기서 실시한 건축과 연계된 여러 가지 공예 교육은 오늘날까지도 이 분야에 많은 영향을 주고, 이곳의 워크 샵에서 만들어진 것들은 널리 복제되고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지만 이의 영향은 1937년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가 창설되는 데까지 이르며 세계적으로 공예와 디자인분야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세계 1, 2차 대전중이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의 내핍이 따르고 벽지 산업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종전 후 1945년 런던의 벽지 전시회를통해 전문적인 벽지 디자이너들이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9) 1950년을 전후하여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서서히 그 수요가 증가되고 산업화가 확산되어 갔으며, 이것은 재료의 다양성도 요구되어 종이 벽지를 포함하여 섬유 벽지, 염화 비닐 레저 벽지가 개발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비닐 벽지의 시초가 되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소재의 벽지가 개발되는 데, 이는 건축의 증가와 건축공법의 변화, 소비자의 요구와 맞물려 마감재료로서의 공사기간 단축은 물론 작업의 간편성과 경제성, 그리고 좋은 장식성 때문에 급속한 발전을 가져 왔다.
3. 한국벽지의 유래와 발전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벽지를 바르기 시작했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 중에서 신라의 주택에 성골이하의 신분에는 회벽을 못 바르게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옥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종이가 귀중품이므로 종이로 벽을 발랐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며 다만 성골 이상은 회벽을 바르고 그 이하 신분은 흙벽으로 처리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조선조 초기 민가에서는 건물 내부에 회칠 또는 벽지를 발랐으며10) 병자호란(1637년)을 겪고 100년쯤 지나 영·정조시대에 정치, 경제 사회가 인정됨에 따라 팔대가에서는 능화지를 벽지로 사용하였다.
“솟은 대문 줄행랑에 고주칠량 선자추녀 좌우분합 물림퇴에 국화새긴 완자창에 각장장판 백능화로 도배하고 황능화로 굽드리고 청농화로 띠 띄우네11)” 이와 같은 가사를 살펴보아도 조선조 말엽에는 능화지를 벽지로서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실내에 도배를 할 수 있었던 계층은 조선시대 상류층이었으며, 궁
중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벽지를 발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한지를 원형 그대로 바르다가 약간의 채도가 있는 색지를 바르기 시작했고, 영·정조에 이르러 목판 인쇄를 한 한지를 사용하였다.12)
도배는 종이의 발달과 생활방식의 변화에도 밀접한 관련을 찾을 수 있다.
창호나 출입문을 뚫어 놓고 가리거나 널빤지로 문짝을 만드는 구조에서 채광과 통풍을 위한 문짝과 창살이 생김으로 해서 밝은 태양을 방안으로 끌어 들이는 시도를 했고,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도배를 홀겹으로 하여투명하게 창호를 바르는 것을 명장지라 했고, 벽면이나 차광을 할 필요가 있는 문짝이나 창호에 어둡도록 바르는 것을 맹장지라 했다.
충북소재의 한 오래된 고옥에서 발견된 도배를 보면 목판으로 찍은 수복 무늬가 채색으로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먹물이나 채색을 이용해서 목판으로 무늬를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상의 주류는 백자와 같은 대황색이나, 상아색, 대회색 같은 청초하고 단아한 느낌을 많이 사용했다 한다. 도배의 방식을 보면 한옥의 장지문이나 칸막이, 벽장문에는 도배를 한 후에 가운데 서화를 붙여 장식하였고 벽과 장판이 맞닿는 부분에서 일정 높이를 윗 부분보다 약간 진하게 굽두리를 바르는 습관이있었으며 기계제품의 벽지가 나온 후에도 천장과 벽, 굽지를 구분하는 방식이 남아 있었다.13)
인쇄기로 만든 벽지는 한일합방 이후로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수동 옵셑 인쇄에 의한 4×6 전지나 반절지 정도의 갱지로 된 낱장 벽지가 처음 생산되었고, 1943년 부산 서면에 지금의 대동벽지가 ‘대동지공사’로 국내 최초의 벽지제조사로 시작 하였다. 1963년경 대동벽지가 외국에서 도입한 기계에 의한 두루마리 형태의 롤(Roll) 벽지가 생산되어 본격적인 벽지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이 시대에는 종이 벽지와 갈포 벽지를 포함한 초경 벽지가 생산되어 수출을 통한 정통 공예 벽지의 자리를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라비아 인쇄에 의한 다색 인쇄 및 엠보스 벽지의 발전과 자동화는 정부 차원의 주택 보급 확대 정책과 함께 빠른 속도로 발전되었다.
70년 중반부터 염화 비닐 발포 벽지의 신소재가 유럽에서부터 개발되어 우리나라에도 종이에서 탈피한 소재 개발이 활발하게 발전하였고, 발포 벽지는 거친 벽면의 커버력이 우수하여 아파트 보급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다양한 벽지의 소재 개발에 시발점이 되기 시작했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염화 비닐 발포 벽지와 함께 염화 비닐 벽지의 개발이 더욱 가속화되고 아파트의 보급률이 단독주택보다 훨씬 많아지고 해외 여행의 자유화 바람을 타고 한국 벽지 발전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었다.그러한 때 대동벽지가 88년 수출탑을 수상하면서 대한민국의 벽지 디자인을 세계시장에 선보이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90년 초반부터 해외에서는 지구 환경을 고려한 천연소재의 개발이 다양하게 발전되어 고급화된 종이 벽지, 부직포 벽지 등 시험적인 다양한 소재의 제품을 개발하는 반면, 국내는 여전히 비닐 벽지의 다양한 발전과저렴한 가격의 합지 벽지의 양분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는 내구성과 디자인의 다양한 표현력이 뛰어난 비닐 벽지의 장점이 대중화되어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발포 벽지의 황변 현상, 오염의 단점은 고급화된 종이 합지 벽지로 대체 되면서 중저가 벽지 시장을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