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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택(35) - 새언약 10
99,1,18 이근호 (김진철 정리)
☞ 하나님의 선택, 192 페이지
⊙ 선택이란 구약에서 늘 그랬듯이 '하나님의 이름'의 언약 활동을 증거하기 위해 뽑는 작용을 말한다. (책)
* 구약에서 늘 그랬듯이 이것이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면 구약에서 언제 늘 그랬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출20:24 에 번제와 화목제를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번제와 화목제를 유지 보존하는 일에 동원되는 사람이 선택된 사람인 것이다.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 모세의 경우가 그렇고, 다윗의 경우에는 에봇을 입었던 것이다. 다윗 중심의 제사, 왕 중심의 제사가 되는 것이다. 에스겔에서는 새 성전에서 왕이 제사를 드리는데, 왕이 제사를 드리다가 나중에는 왕 자신이 제물이 된다는 것이다(사53장). 요한일서에서는 메시야가 화목제물이 되는 것이다.
* 보통 종교는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가르침에서 시작되는 깃이 아니고, 노아 때부터 계속해서 제사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벨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고, 모세의 가르침은 제사 제도법을 통해서 가르친다는 것이다.
*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은 제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씩 축제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장으로부터 모세의 말씀과 그 제사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가 나중에 가르치는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 백부장의 믿음 - 마 8장에서, 백부장의 믿음과 그 당시의 유대인의 믿음의 차이를 보여준다. 백부장의 믿음은 '말씀대로 하옵소서' 라는 것인데, 이것은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는 믿음인 것이다. 백부장은 '말씀대로 하옵소서' 하면서 그 옆에서 관람자가 아니라 '말씀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는 그 정황 속에 들어간다. 내 밑에도 부하가 있는데 저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온다 라는 것이다. 자기 자선을 말씀이 실행되는 과정 속에 던지는데,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면 믿겠다는 것이 아니다.
(마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 8: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마 8: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 신약성경이 놀랍게도 모두가 다 그러하다. 실로암 못 가에서 소경이 눈을 떠는 과정을 보면 소경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는 것이다. 지시 받는 그 행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말씀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는 과정 속에 자기 자신을 던지므로 자기 자신이 말씀대로 움직이게 된다.
*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사람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과정에 참여되는데, 이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은 말씀의 생활화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백부장의 '말씀대로 하옵소서' 라는 것과는 다르다. 말씀을 듣고 계시라는 것이 언어를 통해서 자기에게 들어오면 나는 그 언어를 통해서 연구 분석하여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는 이런 것이 아니다. 제자들의 운명 자체가 말씀화가 되어 버린다.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쥐고 있는 분을 증거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보여주는 그 말씀의 핵심이 바로 십자가의 희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희생적인 면을 반드시 보여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 헌?- 헌금이란 성전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곧 우리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우리 가정을 위해서 돈을 쓰는 것도 헌금이라는 것이다. 나만이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지체가 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씀과 복음을 주어도 자기의 이기주의적으로 사용하면 헛것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한다 할지라도 이기주의적이면 헛것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이 소경에게 하는 모습을 보자. 예수님이 소경으로 눈을 뜨게 하시는데, 진흙을 침으로 이겨서 눈에 발라서 씻으라고 하신다. 처음에는 나무와 같은 것이 보이고, 그 다음에는 사람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여호와 창조 사역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소경의 입장에서 보면 말씀으로 낫게 해 주시면 좋은데, 그러나 그 소경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교육 도구가 되는 것이다.
* 12제자들 - 12제자가 다 그렇다. 가룟유다가 선택된 것은 이런 사람을 잘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논리는 믿음 더하기 행위가 다 깨어진다는 것이다. 믿고 행하자는 논리가 다 깨어지는 것이다. 내 쪽에서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움직여 나아가는 것뿐이다. 윤리가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행함은 주께서 시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충만하라' 라는 것은 빛이 있으라는 창조의 차원인 것이다. 진흙을 눈에 발라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명령과 성령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같은 차원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원망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을 80년 살았다고 생각할 때에 지나온 것을 생각하고 후회하는 것은 병신인 것이다. 천당가면 되는데 말이다.
* 저주를 받지 않았으면 인생을 고민하지 말라, 남편이 술을 먹고 라서 때려도 저주의 대상이 아니면 고민하지 말라, 어차피 인생을 어떤 식으로 살든 간에 도착지점을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저주의 대상이 아니면 어떤 시궁창에 빠져도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좋은 세상 만들기에 나오는 할머니나 정주영이나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예수님을 동격으로 다루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로 만들어서 백부장이 믿게 한 것은, 백부장과 예수님을 비교해 볼 때에 백부장은 의인이 되고, 백부장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본 자손들이 지옥 불에 가는 것은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다' 라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나다나엘과 니고데모의 차이점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셨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인간적으로는 니모데모가 더 성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 예수님이 그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가까이 에서 모셨지만, 그러나 그를 믿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오빠가 살 줄로 믿는다는 것이다.
◈ 선택 -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라는 것이다. 선택이란, 예수님의 자신의 품성이 담겨 있는 사람이다. 소경이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사람 이런 사람은 '나는 죄인인데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는데, 이런 사람이 바로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의 이름이 베드로에게 있다는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앞장세우고 자기를 낮추는 그 모습인데,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잇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화목제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인이면서도 희생했기 때문인 것이다. 십자가의 희생이 담겨 있는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화목제물 되시는 의인이시라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베드로라는 것이다. 앉은뱅이는 자기가 죄인 됨을 베드로가 요한 앞에서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여기서 사도행전 3장을 보자.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 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행 3: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행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행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행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 베드로에게 있어서, 오직 구원은 주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에, 그 믿음으로 앉은뱅이가 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베드로 속에 있는 주의 이름이 이러한 일을 했다는 것을 모르고, 이것을 베드로가 한 줄로 알고 착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속에 있는 주님과 자기 자신을 분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92 페이지
⊙ 죄악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인간은 선과 악의 대결 구조에 예속되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인간의 선택을 관찰한 것도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에게서 이다. (책)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죄와 은혜 - 그런데 가인의 경우는 반대인 것이다. 가인 속에는 죄가 있는 것이다. 롬 7장에서, 바울은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죄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없어졌는가? 죄가 없어지면 율법이 필요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죄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온 은혜의 왕 노릇과 대결이 항상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 속에 죄가 없다고 한다면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죄가 없어지면 이제는 우리는 말씀을 실천에 옮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함으로 받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호식은 죄가 없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죄라는 것이다.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 그런데 성령이 들어오면, 악을 행하는 이것을 성령께서 은혜로 용서해서 이제는 악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희생하심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성령은 바로 십자가의 영인 것이다.
* 사도 바울이나 십자가의 강도가 의지한 것은 오직 십자가의 화목제물인 것이다. 화목제물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화목제물이 바로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이다. 화목제물이 우리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내부가 옛날의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죄인이고 화목제물은 의인인데, 의인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언약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약속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선(善)이 나온다면 그 선은 하나纛?의(義)에서 나오고, 의가 나온다면 그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 즉, 성령 안" 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죄를 짓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베드로가 십자가가 필요가 없었는가? 아닌 것이다. 사도요한이 그 다음에는 십자가가 필요 없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요한도 어린양의 피로 희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즉, 그리스도는 내 안에 사신 분이 되고, 나는 내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의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러면 예수 안에 있는 사도바울은 완전한가? 아니다. 결코 아닌 것이다.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고, 또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의 몸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 새 육체, 새 장막을 주님 부활 때에 얻게 되는 것이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그래서 가인 속에 죄가 있고 죄가 가인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로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벨은 죽었지만 아벨이 영생을 얻는 것은,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 로마서 7장을 보자.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성령의 투입이 종말 때의 하나님의 선택 행위이다. 이 선택 행위의 근거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과 살해당하심이다. (책)
* 성령의 투입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투입이라는 것이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여기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것이 나온다. 도대체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그 내용이 로마서에 나온다. 8장 3-4절을 보자.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일을 맡기지도 않고 우리가 못하는 것을 제 3자의 몸인 예수의 몸에다가 일을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작업이다. 이것이 몽땅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우리가 부활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기도할 수 없는 것을 성령께서 대신 기도하시고(롬8:26),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롬8:34/히7:25).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그런데 사람들은 전에는 예수님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나를 통해서 일을 하신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을 잠시 들어왔다가 빠지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 율법의 요구는 의(義)인 것이다. 롬 3장에 보면 의가 없어서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롬 5장에 의(義)의 왕 노릇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율법은 우리의 입을 막기 위해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의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 의는 우리 육신의 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요구했던 그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롬 8장은 예수님의 의를 말하며, 로마서 전체가 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롬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완전케 하겠다는 것은 실제로 이루어 내겠다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심판으로서 이루어내시는 것이다. 이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마지막 때에 장수가 나매 다 무너진다는 것이다. 안 무너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 외에는 말이다.
☞ 하나님의 선택, 192 페이지 [ 4. 유대인들로 표현된 육의 내막 ]
◈ 유대인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선택되었는가?
* 출애굽기 3장을 통해서 살펴보자.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스스로 있는 자 -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에,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라고 하신다. 이 대답은 기존의 신들과 차별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기존의 신들은 이름이 있고, 그 이름으로 인간과 교제를 하고 있으며, 인간이 그 이름으로 요청하면 들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고 "스스로 있는 라" 라고 하시는 것은 사실은 이름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 → 내 약속을 내 스스로 이루신다
* 육이란 스스로 행하는 분 앞에서 비로소 육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십자가 앞에?설 때에 비로소 인간은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스스로 행하시는 분 앞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답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스스로 계신 분 앞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불러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계신 분이 아브라함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가지고 일하셨다.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뜻대로 절대로 안 해주는 분이신 것이다.
* 스스로 계신 분이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낼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이 대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출4장에 대립됨을 보여주는 기적이 3가지 등장하는 것이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 손에 문둥병이 생기는 것, 지팡이로 물이 피가 되게 하는 것이다.
* 3 가지 재앙의 의미 - 이 3 가지 재앙은 애굽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과의 대립되는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애굽이 생각했던 그런 여호와가 아닌 것이다. '아니고', '아니고'를 보여주기 위한 심판의 징표가 바로 3 가지의 이적이다. 뱀은 애굽을 뜻하고, 문둥병은 이스라엘의 뜻하고, 피는 심판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 그런데 심지어 모세 본인도 여호와 하나님과 대립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찾아갈 때에의 바로 그 성향을 또 다시 반복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서운 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뜻은 물 건너갔다는 것이다. 우리의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계획도 날아간 것이다. 그래도 좋은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하시기 때문이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의 뜻만 바꾸면 되는 것이다. 저주를 받지 아니하면 천만 다행인 것이다.
*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육이다' 라는 것을 미리 설명을 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3장을 거론하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육이라는 내막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주니까 그 이름을 가지고 처음에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해 놓고 나중에 여호와라 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에도 대립되는 입장을 유지하게 된다.
* 이것을 광야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많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해서 그것이 복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요즘 예수를 부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듯이, 대립된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희생인 것이다. 자기 집을 위해서 쓰는 것도 헌금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자기 집만을 위해서 쓰는 것이 헌금인가? 아닌 것이다. 희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성전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 희생을 모세가 배우게 되고, 요셉이 배웠고, 이삭과 아브라함도 다 희생자인 것이다. 아벨도, 12제자, 소경도,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도 다 희생자인 것이다.
◈ 유대인들은 스스로 계신 분의 원칙을 거부하고 자기와 신과 합작을 하는 그러한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육의 한계인 것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육의 내막 - 마 5장 20절의 말씀은 바로 육의 내막을 보여준다. 이것은 모든 육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구원론에 대한 거부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완전하게 율법을 일점 일획이라도 다 지키지 못하는 대표자로 본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만 완전치 못하니 봐 달라는 것이 거부된다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이다.
* 그러나 오직 완전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 크다고 일컬음을 받을 수가 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의지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사랑 - 산상설교를 요약하면 사랑인데, 그러나 우리 속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화목제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바로 화목제물이다. 화목제물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게 때문이다. 이것이 참 사랑이고, 이것이 완전한 의(義)라는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의 고발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개판이었고, 즉, 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酉쪄杉째?하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마태복음 5장에서,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몫 간다고 말씀하시고 난 후, 바리새인의 의를 설명해놓은 것이 마태복음 28장까지이다. 바리새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한 모든 수단을 다 끄집어낸다. 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전에서 제사했고 율법을 지켰고 또 백성들을 가르친다.
* 그런데 예수님은 나만 믿으면 된다라고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그리고 나라의 본 자손들은 쫓겨난다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것이 전혀 천국과는 의해서 해당이 안된 다고 하시는 것이다. 마5:20에 의해서 말이다.
⊙ 율법과 선지자는 이런 식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이용하는 자들을 공박하기 위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책)
* 말씀이 주어진 것은 스스로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겠다고 바둥바둥 애를 쓰고 있는 인간들을 향하여, 인간을 심판하실 분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율법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율법이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가지고 있는 인간과 율법이 증거하는 예수님과의 사이에 대림을 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이다 !
* 결국은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율법이 십자가에서 완성이 된다는 말은 마태복음 8장에 나온다.
(마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마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 8: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마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 8: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마 8: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낫게 하시고 난 후, 문중병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예물을 드려 증거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이 문둥병을 낫게 하는 행위와 레위기의 제물과 동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예수님만이 제대로 행하실 수 있는 것이며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오히려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다.
* 육(肉) - 이것을 사도바울은 육(肉)이라 한다. 육이라는 말은 공관복음에는 나오지를 않는다. 사울서신과 요한복음에 나오는 용어이다. 육이란 개념은 십자가 이후로 규정된 인간의 모든 행위와 인간 자체를 말한다. 십자가 이후에 인간의 본성을 육이라 한다.
* 영(靈) - 육의 반대말은 영(靈)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육의 대표자를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남에게 의를 받아서 의인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만 축적이 있는 의를 스스로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는 자들이다.
* 남에게 의를 받으면 내가 말씀을 순종해야 된다는 측면이 사라진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의를 외부에서 받거나 예수를 따라다니면 된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축적한 의는 그 의미와 가치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다.
◈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행한 것이 누락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애초부터 우리에게 명령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믿기도 해야 하지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신학이었다. '믿으라는 것은 믿으면 되고, 하라고 한 것은 하면 되는데, 이것이 뭐가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자청년과 바리새인의 딜레마였다.
* 걸림돌 - 성경에서는 이것을 걸림돌이라 한다. 걸림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십자가의 옆의 강도는 안 넘어졌다. 그래서 강도 같은 마음을 가진 자자가 누구인가를 찾는 것은 걸림돌을 제시하면 된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 이 모든 것은 다 배설물인 것이다.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 선한 문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남에게 의를 받아서 의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만 축적이 되는 의를 스스로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는 자들이다. (책)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고 하면 화를 낸다. "성경에 분명히 '하라' 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행한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무엇이냐" 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자기의 의를 대비시킨다. 이들은 하나님은 어떤 단계를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다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도 하나님과 상대를 하고, 나도 하나님과 상대하는 것이지, 하나님과 인간 사치에 예수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있는데, 왜 중간에 예수님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나만 있으면 된다고 보는데,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단인 것이다.
* 사도바울은 예수님과 나의 의를 대비해서 인간의 무능함을 고발한다. '이제 예수를 믿고 새 사람되었으니 바르게 살자' 라고 하면 이단인 것이다. 중간에 예수가 빠진 것이다. 마귀는 기름 부은 자라의 관계를 끊고자 하는 것이다. 마귀는 이것만을 노리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97 페이지
⊙ 참된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자아 내부가 아니라, 자아 밖에서 다가오시는 분에 의해서 제공을 받게 되어 있다. 동시에 그것은 자아를 포기하도록 한다. (책)
* 참된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 자기 내부와는 상관이 없으니,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말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백부장은 자기 내부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기 앞에 다가오시는 분에게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그 분은 창조자요, 나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이러한 정신에 무지했고, 또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무지했던 것이다. 인간들이 율법과 선지자에 실패했다는 것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 만든 원칙이 타인의 구원에 하등의 도움이 될 수 없다는데 있다. (책)
⊙ 인간의 모든 선택은 우선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오히려 타인을 배척하고 죽이는 원칙일 따름이다.(책)
* 이것은 마치 물에 빠진 자가 자기의 운동화 끈을 잡고 구원을 받으려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고, 오히려 어리석게까지 보이는 생각인가! 이것이 바로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갖고 일던 믿음이다.
*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의지하는 결단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대상을 가지고 믿음을 결정하는 믿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여호와인가, 아니면 이 땅에 온 예수님인가로 결정하는 것이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믿었다든지 완전히 귀의했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은 누구를 믿느냐는 그 내용이 중요하지 자기의 믿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의 선택, 198 페이지
⊙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 의해 율법까지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 말씀들을 무효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인간들의 손에 맡기면 무효가 되어버린다. 육신에 속한 자는 율법의 요구를 담당할 수가 없다. (책)
* 두 가지 선택론 - 그런데 육에서 만들어 낸 선택론이 바로 자기 구원을 위한 선택론인 것이다. 인간은 나름대로 선택론을 믿는데, 그 선택론이 바로 마귀가 심어준 선택론이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구원을 위한 선택론은 잘못된 선택론이라는 것이다.
* 진짜 선택론은 마태복음 24장에 나온다. 마지막 때에 환난이 있을 것이데 하나님께서 택한 자만이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것이다. 누가 선택했느냐 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른 선택론이다. 내가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했는데, 주님이 노력하는 나를 불쌍히 여겨서 선택해 주셨다는 것은 바른 선택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 주님의 선택론은 주님 자신의 고유 권리로 그냥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 우리는 구원받을 권리가 없는데, 선택되지 않는 사람들이 꼭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선택된 사람은 이미 구원해 주신 주님에 대하여 더 알고 싶고 주님의 사랑의 깊이라 높이와 길이와 넓이를 더 알고자 하는 것이다. 구원되지도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이다. 구원받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주님의 선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00 페이지
⊙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하는 것이 그 당시 서기관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그의 주장을 건방진 것으로 본 것이다. (책)
(막 2:1) 수일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막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막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막 2: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막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막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 2: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막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막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 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막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막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서 왜 신의 범주에까지 침범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라고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되묻고 있는 것이다. 둘 다 하나님이 맡겨준 권세 아니라면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고도 모르느냐는 것이다. 걸어가는 것도 죄 사하는 권세로 하신다는 것이다.
* 사실은 이 둘은 다 같은 말이다. '가라' 라는 명령이나,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은, 둘 다 선언인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다 선언인 것이다. 성경의 모든 명령은 그 명령을 듣는 그 순간 능력이 나와서 성령의 능력으로 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이것은 인간이 공부하고 납득해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믿으라는 것이 실천해서 될 일이 아니다. 믿으라는 그 명령 자체가 우리 속에 파급이 되어서 저항할 수 없는 능력으로 우리가 믿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는 것이다.
*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은 택한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이런 현상으로 종말 때에 교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것이다. 무엇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그냥 감사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01 페이지
⊙ 예수님의 표적과 기적은 현 세대의 악하고 음란함을 고발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책)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 십자가 - 음란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을 총칭해서 쓰는 말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표적은 요나의 표적, 즉,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유대인들은 떡을 보았지만, 표적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표적은 오직 십자가인 것이다. 인자의 피라 살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 '술 취하지 말라' 라고 하면, 사람들은 술을 끊으면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충만을 받으라는 이 말씀 속에 있는, '십자가를 믿어라 십자가 안에서 너는 죄인이다' 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알맹이는 놓치고 껍데기만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이다.
* '돈을 泳浩舊?말라' 라고 하면, 돈을 사랑 안 하면 되지 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십자가를 보지 못한 증거인 것이다.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욕구가 내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십자가만 나를 구원하며 그 피 없이는 나는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이 아니라, 언어 또는 문자로만 듣기에 이러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표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02 페이지
⊙ 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치신 자로서의 권세이다. 이처럼 참된 기적은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메시야성을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런 유일무이성을 표현하는 뜻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고 있다. (책)
◈ 인자(人子)에 대해서
*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한다. 인자는 모든 인간과 차별되는 독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자란 구약 때부터 묵시적 언어로서 마지막 때에 전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분을 의하는 것으로 고유명사인 것이다.
* 그러므로 아무나 보고 인자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올 것이다' 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격분한 것이다(마25:64).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변화산 위에서 영광된 인자를 보았던 것이다.
* 인자란 묵시적 개념으로서 구약의 예언했던 메시야를 인자라고 한다는 것이.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갈 자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자만 올라오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인자는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 '모세가 놋뱀을 든 것처럼 인자가 들여야 하리라' 라는 말씀은, 그 때에 비로소 예수님이 이 땅에 온 인자임을 니고데모가 알 것이다 라는 말씀이다. 그 당시의 놋뱀은 '누가 너희들을 심판을 했는 줄을 아느냐?' 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가 너희에게 뱀을 보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인용할 때에는 '위를 쳐다 보라' 라는 것이다. 인자의 출처가 땅이 아니고 위라는 것이다. 곧 하늘이라는 것이다.
* 인간과 분리됨을 보이기 위해서 특정한 개인을 향하여 인자라고 호칭한 경우는, 구약에서는 에스겔과 다니엘의 경우이다(겔2:1/단8:18).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이 종말을 맞이하던 때의 인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의 고유의 기능은 바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기능인 것이다.
* 다니엘의 인자 - 다니엘에서는 전 세상을 심판하는 기능인 것이다. 한 분은 구름을 따고 오셨고 한 분은 깨진 성전과 함께 고난을 같이 하는 분이 인자라는 것이다. 특히 다니엘은 장차 하늘의 보좌로부터 출발하여 지상으로 오실 메시아를 '인자 같은 분' 이라고 못박고 있다(단7:13,10:16/요3:13). 인자 같은 분이라고 다니엘을 말한다. 다니엘과 같은 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장차 올 메시아는 고난받고 있는 자기와 동일한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 에스겔의 인자 - 에스겔에 의하면 인자 된 자는 성신을 가득히 받은 사람으로서(겔2:2) 여호와의 말씀을 널리 전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겔2:3-3:27). 그와 함께 잘고 있는 백성들은 그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겔12:2-11). 그는 예루살렘을 부정적인 안목에서 예언해야 했고(겔4:7), 종말을 예고하면서 위협하는 투로 말해야만 했던 것이다(겔11:9-11). 에스겔이 전하는 말은 하나의 수수께끼요, 비유요, 은폐된 말이라는 것이다(겔17:2).
* 에스겔에서 예언한 그대로 예수님이 하시고 계신다. 그러니까 이 땅에 온 에스겔 다른 말로 하면 인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보아도 모르는 것이다. 비유요, 수수께끼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자기들이 다 안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신앙이 좋고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선택론인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선택론이기도 하고 말이다.
◈ 하나님의 선택 - 그러기에 기존의 선택론을 부정하고 예수님이 새로 제시한 선택론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존의 인간들이 자기 구원을 위해서 만들어낸 모든 선택론을 일시에 모두 다 부정해 버리고, 인간의 구원욕구와 전혀 별개의 문제로 예수님이 선택한 그 선택론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선택론이라는 것이다.
◈ 새언약의 선택론 -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인간은 바로 육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구원되고자 하는 노력은 얼마든지 있지만, 성전을 짓고 구제하고 금식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단?하나님의 의(義)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의 선택론인 것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죄인 됨을 깨닫게 하시고, 그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게 됨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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