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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왕산 정상은 제트기류 성 강풍과 체감온도 40 여도를 상회하는 혹한의 날씨였다. 서둘러 내려 가려다 몸을 녹여야겠다는 생각에 모닥불이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서로 상의 끝에 핫초코 더운 차를 시켜 먹기로 하고 기다리는 동안 창가로 다가갔다.
해안 산맥 안쪽으로 바가지를 업어 놓은 것 같은 산들이 올망졸망 몰려 있었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해안 쪽으로는 어촌이 발달하였고 대간 안부에는 크고 작은 산촌들이 발달되었다. 대간의 영향으로 높새바람이 기승을 부리면 산촌인 평창 횡계 일대는 폭설이 자주 내려 서로 왕래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쌓였던 곳이지만 기후변화로 옛일이 되어 버렸다. 눈이 많이 내리던 옛 기억을 회상하는 사이 더운 차가 준비되었다고 와서 마시라는 전갈을 보내와 다시 테이블로 다가 가 차를 마시자 온기가 퍼지면서 몸이 녹아내렸다. 차를 마신 후 다음 일정으로 소화하기 위하여 케이블카를 타고 리조 트로 내려왔다. 어제는 인문학적 박물관을 관람하였다면 오늘은 자연사 박물관인 공룡과 해양관을 찾을 목적을 해결하려고 서두른 것이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별로 일목요연하게 꾸며 놓았다. 공룡을 중심으로 모든 동물들은 동적으로 만들어 놓고 음향효과까지 곁들여 놓아 관람객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혼란을 부추겼다. 등을 돌리는 사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후 괴성을 지르는데 놀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혁이도 이러한 모습에 경계를 하며 두려움을 느끼는 모습이 감지되었다. 두려움을 없도록 하기 위하여 관람을 하면서 안내문을 읽고 전시물이 반복하는 동작을 유심히 관찰하도록 하고 마음 준비하도록 일러 주고 손으로 살짝 쓰다듬어 보라고 주문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적응하는 모습이 뚜렷해졌다.
여유를 찾은 모습이 느껴진다. 화석, 조형물, 식물 표본 등으로 구성된 자연의 역사에 대하여 알게 됨으로써 자연에 대한 친화성을 높여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자연사 박물관 관람에 대한 경험이다.
해양관으로 옮겨 가기 전 공룡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의자에 앉도록 한 후 사진을 만들어 주었다.
각종 어류의 진화 과정, 어패류와 산호초 그리고 곤충관에는 나비를 비롯하여 곤충들의 표본도 전시되어 있어 충분한 학습효과를 채울 수 있었다. 관람을 끝낸 후 좀 더 자연사에 대한 심층적인 기억을 남기려 머신을 타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안전벨트를 단단하게 조이고 제공해 주는 안경을 쓰고 기다리자 관리자가 출발한다고 소리쳤다. 레일 따라 달리는 청룡열차 깊은 절벽을 돌고 돌아 절벽 아래로 떨어지다 다시 솟구치고 공룡이 달려와 덮치고 낙석으로 큰 바위가 굴러오고 모든 것이 긴장감과 스피드가 있으면서 공포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프로그램이었다. 혼쭐난 후 머신에서 내리자 혼비백산하였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주혁이는 신난 모습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자연사박물관 마지막 관람 공간 포토존을 찾았다. 주혁이 보다 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할머니가 더 신이 난 모습이다.
아기 팬더곰 발바닥을 살피는 할머니와 주혁 군,
이를 발견한 딸도 엄마랑 사진을 남기겠다고 달려왔다.
코믹한 나무 인간의 모습에서 나무와 인간이 상생하며 교환하는 물질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껴다. 자연물 안에서 필요충분조건에 부합되어 서로 존치되며 스스로 이뤄 나가는 모습은 인간의 입장에서 진실하게 배울 필요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룡 먹잇감이 되어 버린 주혁 군, 그래도 신이 났다.
다시 부활하고
할머니도 덩달아 부활하시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이젠 강릉으로 떠날 시간이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어 초당과 경포에 있는 김시습 박물관은 이번 여행에서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 차에 올랐다. 아름다운 국도를 넘으려다 시간을 체크해 보니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남은 일정에 도움이 되어 대관령 ic를 이용하였다. 강풍이 몰아치는 터널과 터널 사이 협곡을 지나 오죽헌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기묘사화로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학을 교육받았으며, 아버지가 아들 없이 죽자 경기 파주의 시댁과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병사하였지만 아들 이이는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였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으로 아호를 정하였다. 후대에서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별채를 의미하는 당(堂)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별호는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이다.
1504년] 10월 29일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北坪村) 태생으로 외가이자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으며 사임당의 형제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중에서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 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 온의 딸이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 씨(申氏)이다 조선 중기 이황과 더불어 으뜸가는 학자로 추앙받은 학자.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이며 어려서 어머니인 사임당 신 씨의 가르침을 받았고, 명종 3년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23세 되던 해에 도산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을 방문했다. 선조 1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판 돈녕부 사 와 이조판서에 임명됐다. 이듬해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우선 사당을 찾아 배례한 후
이어서 율곡 이이의 태몽실을 찾았다. 오늘 함께한 딸, 주혁이 엄마도 주혁이 보다 더 어릴 적에 오죽헌 함께 온 적이 있었다. 그 아이가 출가하여 자식을 낳고 키우며 이곳에 할아버지가 다시 데려 온 것이다. 감회가 깊었다. 당시 아비의 손에 이끌려 다니던 보람이를 생각하니 추억이라 하는 것은 묘한 기분과 함께 소중하다는 생각이 깊어져 갔다. 당시 찾았을 때 오죽헌 보다 오죽헌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장되었고 고요하고 정숙한 맛은 많이 사라진 것 같았다. 방마다 사임당의 그림과 글이 걸려 있었고 사임당 초상화도 큰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이 해주었는데... 옛 모습은 다 사라진 것 같다.
아들 사진을 정성껏 찍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추억의 샘으로 침잠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오죽헌 사랑채에 주련이 걸려 있어 다가 가 읽어보니 명나라 진계유의 암서유사에 나오는 시구였다.
주련이란? 시구나 문장을 종이나 판자에 새겨 기둥에 걸어 둔 것이 주련(柱聯)이다. , 주련은 정서적 분위기를 고무시켜 건물의 격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한자로 쓴 주련을 기둥에 걸어 두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장식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더욱이 주련의 시문 내용을 아는 사람이 보게 되면 주련은 단순한 장식 이상의 것으로 탈바꿈한다. 이 매력적인 건축 장식은 한자 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전각을 고상하고 운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시화일체(詩畵一體)라는 말이 있다. 시와 그림은 그 표현의 기교는 달라도, 화가가 붓을 들기 전의 정서와 시인이 시를 짓기 전의 정서가 서로 같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선비들은 '시는 형태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소리 없는 시'라고 하여 시화를 둘이 아닌 하나로 생각했다. 주련은 시의 세계이면서 그림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한 국가의 지폐에 모자(母子)가 나란히 실린 나라는 대한민국이 초유의 일이다. 그만큼 어머니로서 만인의 어머니로 추앙받고 있고 아들은 아들대로 대학자로서 존경받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관람을 끝내고 오죽헌을 내려와 다시 율곡 이이의 동상 앞에 섰다. 그리고 결기 있게 처신하며 평생 지켰던 생활자세에 대하여 손주와 공유하였다.
1) 몸과 마음의 자세 –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데는 아홉 가지 몸가짐(九容)이 필요하다
발을 무겁고, 손은 공손하게, 눈은 단정하게, 입은 다물고, 목소리는 조용하게, 머리는 바르게, 기운은 엄숙하게, 서 있는 것은 반듯하게, 얼굴빛은 씩씩하게 가져야 한다.
2) 학문과 지혜의 자세 – 학문을 진전시키고 지혜를 높이려면 아홉 가지 생각(九思)이 필요하다. 볼 때는 똑바로 볼 것, 들을 때는 총명할 것, 얼굴빛은 온화할 것, 용모는 공손할 것, 말은 충성되게 할 것, 일할 때는 공경할 것, 의심날 땐 물을 것, 분할 대는 참을 것, 재물을 얻을 때는 옳은가를 생각해야 한다.
3) 독서하는 자세 – 책을 읽을 때는 단정히 앉아서 마음을 모으고, 극진하여 골돌히 생각하고 깊이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책 속에 담긴 뜻을 깊이 이해하고 구절마다 반드시 실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만일 입으로만 읽고 마음으로 본받지 않거나 행동으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말 것이다. 이렇게 책을 읽는다면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4) 학문이란? – 학문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애롭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임금께 충성하고, 부부간에는 분별이 있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고,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 간에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5. 친구에 대한 자세 – 친구는 반드시 배우는 일과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 행실이 바르고 엄숙한 사람, 곧고 진실한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 내 마음을 비워 그 사람의 규범과 경계를 받아들여 나의 단점을 받아 다스려야 한다. 게으르고 장난을 좋아하며 말이나 꾸미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과는 사귀지 말아야 한다.
사천 해변은 경포대 해변과 연곡 해변 사이에 있는 길이 300m, 18,000㎡의 매우 조용하고 깨끗함을 자랑하는 해변이다. 1975년 7월 1일 개장되었으며, 경포 도립공원과 인접해 있어 매년 많은 피서객이 찾고 있다. 해송 숲이 넓게 우거져 있고 깨끗한 백사장과 얕은 수심으로 조용하게 피서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조용하고 소나무 숲에서 풍겨 나오는 향긋한 냄새와 시원한 그늘은 깊은 추억을 만들기에 더욱 좋은 곳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변이고 소나무 숲 깊은 곳에 허균의 시비가 숨어 있는 곳이다.
방어를 중심으로 모둠회를 시켰다. 전식 상이 차려졌는데 주인의 고운 솜씨가 가득 들어있다. 이 전식만으로도 주혁이 입은 귀에 걸렸다. 맛 집으로 기억해 두겠다고 한다. 홍게 라면을 유난히 좋아하는 주혁 군, 라면도 주문해 두었다.
이 상차림이 끝이 아니다. 모둠회가 이어서 차려지고 다시 매운탕과 식사 상이 차려진다. 그렇다고 가격이 달라지는 것도 없다. 주문진이나 그 주변 해안선 식당들과 는 비교가 안된다. 생선을 구매한 후 반 강제적으로 상차림 집으로 끌려가 상추 몇 잎, 초고추장까지 돈을 지불해야 먹을 수 있는 집과 비교가 안된다. 옛 정취가 사라진 대포항이나 주문진 항은 발 길을 끊은 지 오래되었다. 오늘 같은 회 전문 집이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몇 집이 있다. 아주 천천히 술만 빼고 음미해 가며 저녁 성찬을 즐겼다.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보며 식사를 끝 낸 후 숙소로 돌아가기 위하여 북강릉 ic로 진입하여 여러 개의 터널을 지난 후 대관령 ic를 이용한 후 숙소 지하상가로 갔다. 후식으로 딸이 지정해 놓은 터어키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간 것이다. 후식을 즐긴 후 숙소로 돌아와 맥주 한 켄씩 딸아이와 놓고 마시다 샤워 후 자리에 누웠다. 발왕산 바람소리는 여전히 소란을 부렸다. 여러 번 뒤척이다. 눈이 왔다는 딸에 소리를 듣고 밖을 확인하니 수복하게 내린 눈이 보였다. 다음날 아침~~~
이불을 정리한 후 이불장에 넣고 재활용을 분리하여 처리한 후 샤워 후 짐을 챙겼다. 공동물품과 나의 물품만 일단 챙겨 차량 짐칸에 옮겨 놓은 후 조리대에 놓인 사용한 식기를 정리하여 제 자리에 놓아둔 후 손을 씻고 다른 식구들의 준비를 기다리다 가족과 모든 짐을 싣고 호텔 식당으로 이동하며 체크아웃도 함께 하였다. 아침은 부페식으로 차려져 있었다. 기호대로 갖다 먹으며 음식을 즐겼다. 후식으로 과일과 부드러운 커피를 마신 후 다음 일정을 위하여 자리에 일어서서 주차장으로 가 차량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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