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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육산악회—7월 양주 천보산 산행—후기
일시:
장소: 양주 천보산--> 칠봉산
참석: 김간진, 김경흠,
특기사항:
금년 11월이면 일육산악회가 출발한 지 만 10년이 된다고 한다. 10년이면 무슨 일이든 큰 획을 긋는 의미 있는 기간이라 10월 산행에서 박정천 회장이 그 동안의 각종 기록을 종합해서 시상하는 이벤트를 하겠다고 예고했다. 꼭 그래서라고는 아니어도 건강을 더욱 다독이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산행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회장의 뜻일 것이다.
[회암사지를 거치면서 부도(浮屠,浮圖)에 대한 뜻을 잘 알지 못해 설왕설래하였다. 불교용어에 아는 바가 적어 나중에 찾아보니 부도는 고대인도어였던 범어(梵語:Sanskrit)로 부처를 의미하는 붓따(budda)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것이니 한자 자체로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부도는 부처나 중 또는 불탑(佛塔)을 말한 것이나 차차 스님의 유골이나 사리를 넣은 돌탑을 주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산행경과:
양주시 덕정 전철역에서 모여 9시40분경에 회암사행 버스를 탔다. 회암사 입구에서는 회암사 전시관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이곳부터는 벌써 조용한 산책길이었다. 그곳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회암사지(檜巖寺址)가 나오는데 이곳 전망대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절터와 그 역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해설이 끝날 즈음 뒤늦게
회암사를 거쳐 바위 길을 오르는 이 코스만 조금 힘이 들었을 뿐으로 곧 능선에 오를 수 있었다. 난코스는 아니지만 비가 올 때는 흘러 내려오는 물길이 되어 위험하지 않을까 싶었다.
능선에서 우측으로 잠시 가면 바로 천보산 정상이다. 날이 맑았으면 남쪽으로 양주, 동으로는 포천, 북으로는 동두천까지 훤히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사방이 시원하게 뚫려 있으나 오늘은 대부분이 비올 듯한 날씨로 잔뜩 흐려있다.
천보산을 내려와 다시 칠봉산의 일곱 봉우리를 오르기 시작했는데 여기도 역시 처음에만 조금 경사가 있을 뿐 대개가 그다지 힘들지 않은 산책코스라고 할 수 있다.
전날까지 큰비가 내린데다 오늘도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있어서 산길을 걷기에는 그만이다. 땀이 흘러도 덥다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고 휘-익 감겨 드는 바람에 가슴이 청량수(淸凉水)로 씻어내는 듯이 상쾌하다.
큰비 뒤끝이라 그러한지 모르나 천보산과 칠봉산 기슭에서 우르릉 콸콸 쏟아 내리는 개울물 소리가 청량감을 극대화(極大化)시켜주는데 이런 시원한 냇물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야 있는가? 발을 담그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피곤이 싹 가셔지는 듯하다.
일연사를 거쳐 동두천 송내동으로 내려오니 시간이
양천한담
날벼락에도 이유가 있다
천보산(天寶山)을 오르는 산행길 초입에 회암사(檜巖寺) 옛터가 있다.
이 절터는 오랜 기간 흙으로 덮여 밭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1964년에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고 조사발굴은 1996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넓은 절터를 보아도 그저 맨 바닥에 유구(遺構)의 형태만 있을 뿐이라 얼마나 번화했을까 어느 만큼 커다란 규모의 절간이 들어섰을까는 입체적으로 느낌이 탁 들어오지는 않지만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1만평에 달한다는 넓은 절터인지라 대략적인 상상은 할 수 있다.
회암사는 조선 초기의 불교의 성쇠(盛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회암사는 인도승 지공(指空)이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에 인도 사찰의 형태를 그리며 창건했고 이어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나옹(懶翁)선사가 중창했다고 한다. 고려조는 불교가 국교였던 만큼 회암사도 거듭 규모가 커져갔다.
조선조에 들어서자 유교가 국가통치이념이 되어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기본 정책으로 삼고 있었음에도 회암사가 여전히 사세(寺勢)를 떨치고 있었던 것은
회암사는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그다지 깊고 험준한 산속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왕실에서 불사(佛事)를 열기에도 좋아 자연히 왕실사찰(王室寺刹)처럼 되었는데 발굴된 사지(寺址)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만큼 건물의 구조도 왕궁에 걸맞게 지어졌다고 한다.
성종 3년(1472년)에 세조비(世祖妃)였던 정희왕후가 재중창(再重創)하게 되자 왕실사찰로서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아무래도 이즈음이 배불숭유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왕실의 비호(庇護)를 받았던 회암사의 최성기(最盛期)가 아닐까 싶다.
그런 회암사가 명종(明宗)대에 이르러서 영화(榮華)의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은 어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조선왕조의 11대왕인 중종(中宗)의 장자 인종(仁宗)은 조선의 역대 왕들의 왕위승계의 사실(史實)을 더듬어 볼 때 아마도 가장 정상적인 승계절차를 밟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마 그가 좀더 오래 살았으면 조선의 왕권이 안정되어 조선의 역사는 좀더 나아졌을 지도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재위 8개월 만에 30세의 나이로 급서(急逝)하여 이 때부터 시작된 정치적 불안정은 후기조선 정치사에까지 두터운 암운(暗雲)을 드리우게 된 것이다.
중종은 제1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았고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로부터는 명종을 낳았다. 여기에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7일만에 죽은 것이 대파란(大波瀾)의 시초가 되었다.
인종은 어머니 없이 자라게 되었으나 아버지뿐 아니라 계모가 된 문정왕후에게도 효성이 지극했다고 하며 성격이 매우 온후하고 학문을 즐기며 맏이로서 동생들과도 우애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모나지 않게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하여 온 것은 곧 소심하고 심약한 성격이었으리라고 생각되니 분명 터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정왕후가 언제부터 아들의 왕위계승을 생각하며 인종에 적대적(敵對的)인 생각을 갖게 되었을 지는 알 길이 없다. 문정왕후가 독한 여자였다거나 강단이 있는 여자였다고 하여도 적어도 명종을 낳고 어느 정도 성장하기까지는 다른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으리라고 추단할 수는 있다.
아직 왕위계승의 제1후보에 불과하기는 하나 명종을 낳을 때만 해도 이미 중종은 20살의 청년이었고 더구나 중종의 어머니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 일파가 권력을 다투고 있어 당장 왕위 계승을 노릴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0세가 넘어 장년에 접어들어서야 겨우 인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이때 명종은 이제 겨우 12살이 되었으니 통상적으로 볼 때 인종이 죽거나 쿠데타를 일으켜 내쫓지 않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급사를 하였으니 갖가지 해괴한 괴설(怪說)이 난무(亂舞)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하다 할 수 있다.
인종은 허약하기는 해도 갑자기 쓰러질 정도의 약골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심약(心弱)한 탓에 부모나 동생들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쓰다 보니 어찌 보면 신경쇠약으로 골골거리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 해도 둘째인 명종과는 어떤 면으로든 왕위계승으로 각축을 벌일 상대가 아니었는데 인종이 부왕의 병을 간호하는데 과도하게 심혈(心血)을 쏟은 탓이었는지 몸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아마 이 때의 인종의 건강상태는 인종이 병사했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래, 효심이 깊은 인종이 부왕의 병 수발을 들다가 몸을 상해 죽었나 보다”라고 인정할 만큼 건강이 나빴을 것이다.
바로 이때 문정왕후의 머리 속에서는 “저러다 인종이 죽는다면 자연히 내 아들이 왕이 될 터인데”라는 생각이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속으로 “얼른 죽어주라” 하고 빌었을 지도 모르나 그 빌빌거리는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가 얼마나 실망을 했을까?
그래서 문정왕후의 성격으로 보아 무언가 모계(謀計)를 꾸미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인종이 문정왕후가 보낸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독살설(毒殺說)이 그러해서 나왔을 것이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개연성(蓋然性)도 있지만 그 진실을 알 길은 없다.
하여튼 인종이 급서함으로 해서 급속한 권력 이동이 생겼다. 이미 이전부터 암투(暗鬪)를 벌여왔던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과 문정왕후의 남동생
이로부터 20년간에 걸쳐 문정왕후가 정권을 농단(壟斷)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끼어든 것이 불교 중흥에 힘쓴 보우대사(普雨大師)로 문정왕후가 불교에 심취하였고
보우는 오래 전부터 문정왕후와 인연이 있었는데 문정왕후가 권력을 쥐게 되자 1548년에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면서 문정왕후의 권력에 기대어 불교중흥에 힘썼다. 그러나 불교를 재흥시키려는 마음이 지나치게 성급하여 봉은사와 봉선사를 확장하면서 유생(儒生)을 포함한 잡인의 출입을 제지하였으며 능침(陵寢)이 있는 회암사와 같은 능침사(陵寢寺)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유생 황언징(黃彦澄) 등을 처벌하게 하였다.
이런 일로 유생들과 문정왕후, 보우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사실 문정왕후가 불교를 비호하였다고는 하나 그것이 곧 유교에 대한 억제는 아니었지만 유생들이 느끼기에는 상대적 박탈감(剝奪感)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보우는 “내가 아니면 불법이 끊어질 것이다.”라는 사명감을 갖고 종단(宗團)을 다시 일으켰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랄까 재흥운동의 반작용으로 문정왕후가 죽자 그 역시 곧바로 종말을 맞았다. 율곡
불교의 보호자들인 문정왕후와 보우가 죽고 나자 바로 불똥이 튄 곳은 회암사였다. 문정왕후와 보우가 죽은 다음해인 1566년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질러 버린 것이다.
어찌하여 회암사를 불질렀을까? 아마도 “회암사가 왕실사찰로서 여전히 맥을 잇는 한 불교의 뿌리를 뽑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 유생들의 생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보우는 불교를 다시 일으켜 국교였던 고려시대처럼 되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이미 유교가 조선의 국가철학이자 통치이념이 되었는데 이를 단지 문정왕후의 권력에만 의존하여 되돌이킨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일로서 현실을 감안한다면 보우는 유생들과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면서 오히려 권력의 주변에서 벗어나는 것이 도리어 불교의 저변확대에 좋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일본에서의 신도(神道)와 불교의 관계처럼 말이다.
이후 불교는 더욱 혹독한 탄압을 받게 되었지만 적어도 문정왕후 20년 집권기간 동안에는 불교가 한숨을 돌리고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같은 고승을 배출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보우가 불교중흥에 힘쓴 것은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조선초기 불교중흥의 역사는 “회암사에서 시작하여 회암사에서 끝이 났구나” 라고 생각하니 회암사의 옛터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향적사가 어디였나
구름 산속으로 한참을 들어가도
무성한 고목에 사람 다닌 길이 없네
깊은 산속 어딘가에서 종이 울리네
不知香積寺 數里入雲峰
古木無人徑 深山何處鐘
[왕유(王維)의 과향적사(過香積寺) 중에서]
(양천서창에서
첫댓글 다 방면으로 해박한...우리는 양천서창을 통하여 오늘도 많은것을 배운다......고맙네...양천서창!!!
그렇게 커다란 사찰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유를 이제야 알겠구먼... 상두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