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서른살을 맞이하던 때, 이 30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10대 때, 당시로서는 꽤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서른 살까지는 어떤 분야에서 제 구실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4년 가까이 골든 타임의 뉴스캐스터라는 큰 역할을 맡은 것으로, 겉으로는 제 구실을 하게 되었다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자신의 평가에서는 아직도 반 사람몫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만큼 서른살은 나에게 있어 새로운 출발의 해였던 것이다.
새롭게 30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했을 때, 오랫동안 마음 속에 두고 떨쳐 버리지 못했던 꿈이 생각났다..
10대 때, 나는 미국유학을 꿈꾸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히피붐의 후유증으로 앓고 있는 상태였다..그런 와중에 4년이나 외동딸을 미국에 보낸다는 일을 어머니는 허락해 주지 않으셨다..나는 세이신 여자대학에 입학하고,그후 유럽에 건너가 파리의 소르본느대학에 1년간 유학을 했다..그렇지만 나는 언젠가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줄곧 생각했었다.
10대,20대로 그 생각은 점점 강해졌다..
서른살을 맞이하던 때, 이것이 최후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전도 하지 않은 채 포기해 버린다면 일생 '만약 그때 갔었더라면...'하는 생각이 따라다닐 것이다..하는 데까지 해보면 만약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깨끗하게 단념할 수 있다..30대의 시작은 초심(初審)으로 돌아가 우선 이 10대, 20대의 꿈에 대한 도전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서른살에 또 학교에 갈 거야." 누구나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훌륭해"라고 덧붙이면서도 "이제 와서 왜 그런 일을 하는 거야"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인생 80년시대인 지금, 30대에 들어섰다고는 해도, 아주 늦은 것은 아니다..20대를 기초작업의 제 1 보로 한다면, 30대는 '알맹이'가 충실한 토대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젊음만이 장점이라면 80년 시대는 살아갈 수 없다. "피는 것도 빠르지만 지는 것도 빠르다"로는 진정한 캐리어우먼은 키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10년 만에 머리를 자르고,쇼트헤어가 되었다..익숙하고 정들었던 머리모양에 이별을 고하는 것은 마치 지금까지 열심히 쌓아올려 온 '나'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과도 같아 용기가 필요했다..막상 머리를 자르고 나니 줄곧 계속 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머리모양 하나로 이렇게 기분이 변할 줄이야 생각도 못했었다. 10년 전, 여대생이었던 나는 언제나 쇼트헤어였다. 싹둑 잘려나간 머리에서 시선을 거울로 옮기자, 거기에는 그리운 학생시절의 얼굴이 비춰져 있었다.
"옛날의 샤아민 같아" 대학 시절부터 내 머리모양을 맡아 주신 헤어디자이너 가카가와씨는 웃음을 띠며, 쑥스러운 듯이 거울을 바라보는 나에게 말했다.."다시 대학생이 되는 것이니까 기분을 전환해서 열심히 하고 싶어요" 나의 발걸음은 대학시절 이후 찾아간 적이 없는 청바지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하버드를 향한 동경
'미국의 대학'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으나.나의 마음속에 있던 것은 하버드의 대학원이다.미국이라고 하면 동해안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하버드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절실히 생각하게 된 것은, 작년 대통령선거무렵,보스턴을 방문했을 때다..듀카키스 후보의 장남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여 기분좋게 만나주기로 되었기 때문에 LA에서 보스턴으로 날아간 나는 그 기회에 동경하는 하버드를 방문하였다..
올해 350주년을 맞는 하버드는 미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학으로 국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뉴잉글런드지방 매사추세츠주에 있다. 대학이 위치하는 케임브리지와 매우 닮은 강이 흐르는 빨간 벽돌집들의 도시이다.. 강 저편의 보스턴과는 또다른 맛이 있는 알맞은 크기가 정말 마음에 든다.. 이 도시에 발을 한발자국 들여놓은 순간 자신이 찾아왔던 대학과 마침내 만난 것만 같아 흥분하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공부에 적합한 도시일까하는 것이 제일인상이었다.. 다수의 대학원을 수험할 것 없이 나는 하버드 하나로 좁히기로 결정하였다. 하버드가 안된다면 포기하기로 하자--그야말로 all or nothing(올 오어 낫싱)으로 임한 것이다.
일본에 돌아와 원서를 요청해 받고 1년 가까운 수험공부가 시작되었다.
고맙게도 이 학교에서는 사회인의 육성에 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만큼, 나와 같은 미드캐리어들(일단 사회에 나가 어는 정도의 캐리어를 몸에 지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널리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교육이라는 것은 시대의 요구에 스스로 대응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늦게나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시대를 만들고 리드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인생 80년 시대라는 말이 완전히 정착한 것 같은데, 무엇으로써의 80년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장수세계를 자랑해도 그 인생의 알맹이를 충실하게 하는, 예를 들면 이러한 미드캐리어 프로그램은 아직 일본에는 정착하지 않았다. 교육을 젊은이만의 것으로 한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다. 분명히 'Time'에서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미국의 대학생 인구는 600만이고, 그중 45%가 25세 이상이라고 한다. 21세기에는 50%,곧 젊은이와 사회인이 반반으로 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소위 '중년학생'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일본과 미국의 경우는 사회의 구조가 다르니까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지금의 일본에서도 그전에 비하여 전직하는 사람의 수도 늘었으며 교육현장에서도 개성을 키우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현재까지 질질 끌고 있는 '인생 50년 시대'의 틀을 벗어난 삶의 방식이 조금씩 주류가 되어간다고 생각할수 있다. 그런 만큼 하버드를 위시한 미국의 교육제도에는 강한 관심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버드 중에서 두 개의 코스를 수험하기로 하였다.. 하나는 존 F.케네디 스쿨 오브 거버먼트라고 하는 정치행정학을 가르치는 대학원이다. 하버드에서는 가장 오래전부터 사회인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 학교의 미드캐리어에 합격하여 모든 성적이 B이상이면 하버드의 석사학위를 1년에 취득할 수가 있다. 이 학교에는 정치가, 외교관 등의 국가공무원, 그리고 수는 적으나 저널리스트 등이 입학한다..국가나 사회의 리더를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학교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우선 없을 것 같은 전문적인 수업이 눈길을 끈다. 예를 들면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와 도덕'이란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국제개발이나 환경 등 지금 바야흐로 제기되고 있는 여러 문제의 정책 수립방법 등을 가르친다. 세분하여 몇 개 소개하면 '미국의 대통령제' '관리자의 교섭술' '국제 경제 정책의 분석' '환경법과 정책' 등등 광대한 수에 이른다..
또 하나는 니만펠로, 여기는 상당한 실적을 가진 저널리스트가 1년의 휴가를 얻어 하버드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하고싶은 연구를 하도록 하는 코스이다. 한해에 극소수의 사람밖에는 받아들이지 않는 명예로운 코스이지만 학위는 받지 못한다. 학생이라고 부르기보다 객원연구원이라고 하는 쪽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양쪽의 원서준비만으로도 대단한 양이 되었다. 니만펠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자신이 지금까지 방송 혹은 출판한 것 중에서 가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영어의 해설을 붙여 보내야만 한다. 내 경우 텔레비젼저널리스트이므로 방영된 비디오 중에서 자신이 평가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아내서 재편집하였다. 새삼 느낀 것이지만 자신이 출연하고 있는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창피한 일은 없다. 시간이 흐르면 방영 당시의 긴장감도 사라지고 자신의 결점이 화면에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밖에 두 개의 논문을 제출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자신의 캐리어를 회고하여 자기평가를 시도할 것, 그리고 금후 연구하고 싶은 테마를,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포함하여 소개할 것, 이 두 개이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로서 얼마나 사회에 공헌하였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사회에의 공헌이라... 글세... 하는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주어진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해 왔으나 그것이 누군가 다른 삶들에게 공헌하는 것이었을까. 생각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심각하게 몰두한 끝에 완성된 원서를 보내고 나서는 지금의 자신에게는 결국 '학생'의 신분이 무엇보다도 어울린다는 결론을 지었다. 아직 젊으니까 하버드에서의 지도를 받고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를 받는 것이 좋다. 나에게는 니만펠로보다 케네디 스쿨쪽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니만용의 원서를 다 쓰고 나서부터 나로서는 진짜 수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자 한구절에 너무 얽매여 필요이상으로 자신을 괴롭힌 것인지도 모른다..
케네디 스쿨의 원서는 8개의 논문을 제출하는 것과 TOEFL(어학검정시험)에서 550점 이상의 취득을 의무화하고 있다. 3개월 동안 매일 오전 3시 4시까지 세우며 논문을 썼다.
실제로 8편의 논문은 모두가 생각하면 할수록 어떻게 쓰면 좋을지 어려워지는 것 같은 테마였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자신이 관계해 온 정책문제를 소개하라.어떤 구체적인 정책을 세웠는지도 설명하라'이다. 그러나 나는 저널리스트이므로 정책문제와 구체적으로 관련돼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한 끝에 '나는 정치가와 달리 정책을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정책이 수립되는 과정과 정책 그것에 대한 평가는 중요한 일이다. 또한 정책분석이 더 몸에 익숙해지도록 꼭 구체적인 정책수립에 참가하고 싶다'라고 썼다. 그 밖의 테마도 이 이상은 쓸 수없다고 생각될 때까지 고쳐 써서 제출하였다
하는 데까지 했으니까 이젠 합격해도,합격하지 못해도 좋다. 그렇게 여겨질 만큼 나 자신이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다 썼을 때 오래간만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슈퍼타임'을 해낸 후의 '해냈어'라는 기분과 비슷했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
TOEFLdml 결과를 보내왔다. 놀랍게도 677점 만점 중 670점. 기뻤으나 어학력은 심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논문의 심사에는 많은 교수들의 평가가 걸려있다. 합격발표는 5월말부터라고 듣고 있었는데 6월이 되어도 통지가 오지 않는다. 역시 안 됐구나...하고 포기하려고 할 때 3일에,합격통지와 함께 커다란 서류봉투가 왔다. 나도 모르게 "하느님 고맙습니다!"라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머니가 제일 놀라셨다. "정말로 이제부터 공부하러 갈 셈이냐. 시집이나 가면 좋은데" 라고 걱정스런 얼굴로 말씀하셨다.
미국의 새학기는 9월이라고만 믿었던 나에게 대학측은 놀랄 만한 스케줄을 알려왔다. 입학의 조건으로서 8월 1일부터의 서머프로그램을 의무화해 온 것이다. 1년간의 유학에 준비기간은 1개월밖에 없다. 나는 너무나 당황하여 평온한 생활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닥친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수학' '컴퓨터' '케이스 스터디' 캐리어 프래닝'=서머 프로그램의 필수과목이 한꺼번에 눈 앞에 떠올랐다. 수학은 고등학교 이후로 공부하지 않았고, 마이크로 이코노믹스에 이르러서는 전혀 미지의 학문이다. 비즈니스 스쿨이라면 그런대로 알겠지만 나에게는 의외의 필수라고도 여겨졌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으니까 마음껏 자유롭게 공부하고 오너라."그런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케임브리지로 출발하였다.
비상식적인 가격이 '상식'이 되어버린 일본의 땅값과는 달리 미국이라면 꼭 싼 집세로 넓고 탁 트인 방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보스턴의 땅값은 미국에서도 다섯 번째로 비싸서 뉴욕 이상이었다. 도착하고 금방 찾아본 '보스턴 글로브'지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호놀룰루, 애너하임.LA에 이어 비싸다는 것이다. 그래도 일본보다는 싸지만 예상 이상으로 비쌌으므로 부담이 되었다. 참고로 말하면 뉴욕은 여섯 번째였다.
다행히도 대학원에서 걸어서 2분,하버드스퀘어에서 1분 걸리는 곳에 조용한 아파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구는 전부 렌턴으로 하였다. 수도료는 집주인이 부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기,전화,가구와 모든 것을 사흘내로 들여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호텔 숙박은 닷새만으로 끝났다.
드디어 하버드 대학 첫날의 서머 프로그램이다. 3층까지 아래 위가 탁 트인 커다란 홀의 1층 현관 입구 부근에 커피와 브리오슈의 모닝 서비스를 준비해 놓고 학교측은 맞아주었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 마음도 풀려 자신과 같은 입장에서 와 있는 '동급생들'에게 말을 걸 용기가 솟아났다. 홀 안은 300명 가까운 사람으로 가득차 있었다. 모두 패기에 넘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말을 건 사람은 미국 위생국의 여성이었다. 앞으로의 보건제도의 연구를 위해 직장으로부터 1년 휴가를 받아 자비로 왔다고 한다. 다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스페인 정부관리로서 경제의 전문가라고 한다. EC가맹이나 올림픽을 앞두고 주목을 끄는 스페인 경제인 만큼 매우 활기에 차 보였다. 부인과 함께 온 유학이라고 기쁜 듯이 말하였다. 다음은 독일에서 온 여성 한명을 포함하는 3명의 그룹인데 이야기해 보지 않고 겉모양만으로는 미국인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정부의 관리로서 보조금을 얻기 위해 엄격한 국가시험을 몇 개나 통과하여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보면 외국에서 온 유학행은 정부나 회사에서 파견되어온 사람이 많으나 미국인은 자비로 온 사람이 많이 눈에 띠었다..그리고 미국인들 중 상당수는 지금까지의 직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고 케네디 스쿨에서의 체험을 탄력으로 하여 새로운 자기의 가능성에 도전하기 위해 힘을 기르러 온 것 같았다.
일본에서 온 여성은 나 혼자로 아는데 남성은 몇 명이 와 있을 것이다.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걸어 보았었으나 일본계의 사람이었다. 조금 지나서 4명의 남성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1명은 원래 경제지의 기자, 다음 2명은 신문사의 기자다. 다른 1명은 항공회사 사람이고 여기에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온 유학이라고 하였다.
커다란 계단교실로 이동하여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다.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이프로그램에 이번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의 평균연령은 내 나이를 조금 상회하는 38세이다. 캐리어 연수는 5년에서 38년, 평균잡아 12.5년으로 이것도 나의 10년보다 많다. 모두 나름대로 상당한 엑스퍼트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점점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내역은 미국인 176명, 그 밖의 45개국에서 108명으로 여성은 33%에 유색인종이 20%. 명민한 두뇌가 모여든 그야말로 국제적인 그룹이다..
첫 스피치를 하다 !!
교수들의 대강의 설명이 끝나자 이번에는 우리들 한명한명에게 앞에 나와 자기소개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하고 있는데다 저 300명+교수들을 앞에 두고 말하라는 것은 아무리 원래 캐스터인 나로서도 발이 움츠러드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아니 캐스터이기 때문에 더욱 압박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내용 없는 발언을 하면 일본의 저널리스트의 수치가 되기 쉽다. 그리고 순서대로 나가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자발적으로 한명한명 나가서 말을 하는 진행방식이었다. 맨 처음에 일어선 것은 미국 지방 방송국의 전직 저널리스트였다. 직업상 압박감을 느껴 입후보한 것이리라는 생각을 했다. 잇따라서 명스피치가 계속되었다.
자기소개에서 눈에 띤 것은 유머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유머는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떠오르지 않는다. 지성은 유머의 센스에 나타난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자기 소개의 시간은 끝나고 30분의 휴식시간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각 그룹으로 나누도록, 각 그룹은 그룹의 목적을 어필하는 자기 PR을 겸한 스피치를 하도록 지시받았다. 색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같은 색의 종이를 잡은 사람들이 한 그룹을 구성한다. 내 색깔은 TIEL(녹색계열의 색)이었다..
1층의 캐피테리어에 열명씩 모여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그룹은 히스페닉계의 코뮤니티 리더를 역임한 사람을 포함하는 7명의 미국인과 이스라엘 군인 2명, 이스라엘인과 히스퍼닉계인 그를 제외하면 남은7명은 여성이었다.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동안에 모두가 나에게 그룹의 대변인이 되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일본에서 캐스터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사퇴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스피치를 하게 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난처하게도 잡담에 꽃을 피우고 있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버려 그룹의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였다. 오직 하나,건네받은 색종이에 연관지어 'TIEL'이라는 그룹의 이름을 지었을 뿐이다. 하버드에서 첫 스피치를 하는데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내심 조마조마하면서 우리들은 교실로 돌아왔다.
각 그룹의 대표는 모두 훌륭한 소개를 하였다. 정치에 관계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원래 캐스터인 내가 보아도 뛰어나게 스피치가 능숙하다. 감탄하고 있는 사이에 마침내 3조만이 남게 되었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손을 들어 말하기 시작했다.
전에 하지 못했던 자기소개를 겸해서 "훌륭한 스피치가 계속되었습니다만 여기에서 한 말씀 양해를 얻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제가 그룹의 대표로 뽑힌 것은 다만 그저 제가 일본에서 앵커우먼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오후 6시 뉴스에서는 별로 유머는 쓰지 않았었는데..."
라고 말했을 때 모두가 웃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멤버 한명한명의 장점 등을 소개하고, TIEL의 머리글자에 연관시켜 멤버의 장점을 살린 그륩명이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여성 7명,남성 3명. 그러므로 이 그룹명을 ' Talkative Innovative Energetic Ladies' 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남성으로부터 크레임이 걸려 Ladies를 Leaders 로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명스피치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나 반응은 그럭저럭이었으므로 안심하였다. 준비부족도 있고 해서 긴장하였지만 1년 후에는 명스피치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말하는 기회가 있는 수업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90분간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 3시간의 실력 테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학과 미크로경제학!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될줄이야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수학교과서를 펼친 것은 고등학교가 마지막, 그후 고등수학과의 인연은 전혀 없다. 문제를 보고 점점 더 한심스러워졌다. 멀고 먼 그 엣날에 본 듯한 문제가 장장 6페이지나 이어져 있다. 방정식이라도 기억하고 있으면 그래도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기억이 소생할 조짐은 전혀 없다. 기억상실이라는 것은 이런 상태인 것일까 등등 생각하면서 마지막 2페이지는 백지인 채로 제출하였다.
시험이 끝나자 찝찔한 기분이 들었다. 아아 어떡하지..하버드의 선생님들은 틀림없이 기가 막힐 것이다... 교실 밖에 나오자 "어려웠어"라는 구세주와 같은 말이 들려왔다. 평균 연령 38세가 말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까, 모두 학교를 나와서 그만한 시간이 지났던 것이다. 일의 백그라운드도 각양각색이었고 수준도 제각기 달랐던 것이다. 하버드는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 각 과목마다 세세하게 수준을 나누어 실력에 맞게 가르쳐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또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초라해진 우리들을 향해 교수 한사람이 말했다.
" 시험은 어떠셨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자신이 하버드에 합격한 것은 무슨 착오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계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하버드는 착오를 범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갖고 사람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한 곳을 조금은 알게 되셨겠지요.. 강한 부분을 더 강하게 하기보다 여기에서는 프라이드를 버리고 약한 부분을 극복해 주십시오"
정말 고마운 말씀이었다.
흥미로운 케이스 스터디
수학과 미크로경제학 이외에 컴퓨터와 케이스 스터디의 수업이 있었다. 내가 강한 흥미를 느낀 것은 케이스 스터디다. 그것을 처음 시작한 것은 하버드 로오 스쿨(법학대학원)이고 목하 스탠포드대학에서도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뉴욕의 도로에 아스팔트를 깐다. 그 아스팔트는 민간기업에 의뢰해야 할 것인가, 뉴욕시가 만들어야 할 것인가~.케이스 스터디는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 정책을 검토하고 가르치는 수업이다..' 어느 학교에서 수학 조교수의 채용시험이 있었다. 백인 남성과 흑인여성이 남아 있다. 시험 결과는 1점차로 백인 남성쪽이 리드하고 있는데 그러면 어느쪽을 채용해야만 하는가.'
이것은 지금 미국에서 논의 되고 있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의 시비,
곧 역차별의 문제이다. 이 학교에는 흑인 교사는 한명도 없다. 여성을 채옹함으로써 메리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을 채용하지 않았을 경우, 역차별이 되는 것이 아니가?
나는 이 케이스에 한해서 1점차로 리드한 백인 남성을 채용하는 입장을 선택하였다. 동점이라면 모르지만 1점이라도 리드하고 있으므로 이 남성은 그 일에 종사할 권리가 있다. 또한 학생들은 더 질높은 (비록 1점이라도)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도 많고 실로 흥미진진한 수업이었다. 톱 자리에 선자가 검토해야 할 문제이지만 저널리스트에게도 중요한 훈련이 된다. 나는 지구 규모에서의 환경문제에 대해서 정치와 비즈니스 쌍방의 입장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여기서도 케이스 스터디는 빼놓을 수 없다. 하버드에서는 이러한 케이스 스터디와 프래젠테이션을 통해 클라스에서 발표하는 것이 상당히 중시되어 채점의 일부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노트를 많이 준비해 오라는 지시를 받아 90분간의 브레인 스토밍
(집단 개발)이 시작되었다.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는 시간은 1분간, 화살 같은 질문이 연이어 던져졌다.
"이제부터 24시간 당신은 무엇을 달성하고 싶습니까."
"오는 1주일에는?"
"2주일에는?"
"서머 프로그램이 끝나는 1개월 동안에는?"
"반년간에는?" "1년간에는?"
"1년 후의 자신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 말하시오."
"2년 후의 자신은?" "3년 후?" "5년 후?"
"2010년에는 몇살이 되었는지 계산하고 그 때의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을 쓰시오"
"20년 후는?" "30년 후는?"
이 모든 질문을 불과 1분에 대답하라는 것이다. 3년 후 정도까지라면 어떻게든지 쓸수 있었으나 10년후 20년 후의 자신이 되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되기를 바라느냐고 하면, 역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엿다.
이번에는 "100세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여 우선 0세부터 10세까지 사이에서 자신이 해낸 가장 의미있는 일을 쓰시오" 라고 한다.
"10세부터 20세 사이"라는 질문에는 나는 '일본무용'이라고 썼다. 고등학생 때 예명의 사용자격을 받았는데 당시의 나에게는 그것이 긍지엿던 것이다.
"20세부터 30세" "30세부터 40세" "40세부터 50세"...그리고 "90세부터 100세"
100세까지 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만큼 이 질문들도 또한 쇼크였다.
다음으로 "만약 당신의 생명이 한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선고 받으면 어떻게 살 것인가 쓰시오" "만약 1주일 밖에 생명이 없다고 선고 받으면?" 이라는 질문이 계속되었다. 이때 실감하여 아아 나도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신이 죽었다 하고 자신의 사망통지를 신문에 어떻게 쓸 것인가 미국의 신문에 쓰는 경우와 모국의 신문에 쓰는 경우 양쪽을 쓰시오"
마지막으로 "자신의 묘석(墓石)에 쓰는 말을 쓰는 차례가 되었다. 나는 마지막 두 개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버드에 와서 불과 며칠, 또다시 백지답안이 된 것이다. 이 수업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얼마나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못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비젼이 결핍된 삶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나 자신이 보이는 것 같았다 . 인생은 한정된 시간만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더욱 소중하게 살지 않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9월부터는 본격적인 수업의 개시다. 요르단의 핫산 황태자가 강연을 하러 내방하기도 하고, EC의 들로르위원장이 유럽과 미국의 미래에 대해서 강연을 하였다. 들로르위원장이 "EC의 미래의 이미지로서는 관대함을 중요시하고 싶다. 나는 일본과 같은 행동방식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 라고 말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앙골라의 대통령과 자이레의 대통령이 남아프리카의 장래에 대해서 논의 하는 프로그램도 실현될것 같아 기대된다.
나는 미드캐리어 이외의 젊은 학생들과도 함께 배울 수 있는 것이 기쁘다. 로오 스쿨,비지니스 스쿨(상경 대학원),MIT(매사추세츠 공과 대학), 태프트대학 플레쳐 스쿨(외교학 전문)등 다른 대학원의 수업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으나 1학기는 케네디 스쿨만으로 집중하기로 하엿다.
하원의원 1년생 중의 상당수도 공부하러 온다는 이 하버드 대학은 실로 풍부한 인재의 보고이다. 이 1년간을 통해 얼마나 성장 할 수 잇을지 모르겠으나 생애를 통해 둘도 없는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