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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공 묘(경기 기념물 148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미수 허목선생 묘역 초입에서 멀리 바라 본 모습 |
미수 허목선생 묘역은 네 번째만에 갈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주변에서 헤메이다 돌아오고, 두 번째는 오후 4시 이후 방문으로 민통선 출입통제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발길을 돌렸으며, 세 번째는 사전 군부대 허락을 받지 않았다고 군 검문소 입구에서 다시 발길을 돌렸으며, 네 번째 만에 민통선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묘지 관리하시는 후손 분에게 방문이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니 사전에 군 부대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다시 군부대에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방문하시는 분들은 출입통제 시간 내에만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
▲ 은거당 터(좌)와 허련이 그렸다는 십청원도(우) - 연천군 선사관리사업소 홈페이지 사진 발췌 |
미수 허목 묘역은 민통선 내에 있는데 묘역은 안월천을 건너는 강서5교를 지나 북쪽으로 300m 정도 직진하면 좌측의 능선 해발 100m에 위치한다. 선조인 허자(許磁)의 묘와 약 100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미수허목묘는 동남향한 나지막한 구릉 상에 6기의 묘 가운데 제일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
▲ 미수 허목선생 묘역군 하단 모습 |
묘역에서 동쪽으로 500m거리에는 그가 생전에 살던 집인 은거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은거당에는 10가지의 늘 푸른 나무가 있다하여 십청원이라 불리는 정원과 기이한 암석을 모은 괴석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이후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으며 허련이 그린 십청원도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 묘역 하단 우측에는 허목의 5대조 허훈과 배위 고성 이씨 석관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
▲ 좌측의 계단을 오르면 바로 허목선생 묘역이 나타납니다. |
허목(許穆.1595~1682)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다. 허 목의 자(字)는 문보(文父), 화보(和甫)이며, 호(號)는 미수(眉叟), 본관은 양천이다. 1595년 연천현감 허교의 아들로 출생하여 1615년(광해군 7년) 정언웅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7년 부(父)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
▲ 미수 허목선생 묘역 전경 |
1624년(인조2년)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다. 이는 독특한 전서체로 우리나라 서예 사상 혁명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며 후기 추사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관직에 뜻이 없었던 듯 여러 번 관직에 나갈 기회가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임하였다. |
▲ 묘역내 석물은 묘비(백색 대리석)만 제외하고 각섬석 운모편암이란 참 특이한 석재로 조성되어 검은색을 띠고 있습니다. |
1657년 정계생활을 시작, 1674년(현종15년)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삼공(三公)에 올랐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와 저서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
▲ 가까이서 바라 본 상석과 묘비 |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구를 스승으로 삼아 제자백가와 경서의 연구에 전심, 특히 예학과 고학에 일가견을 이루었으며 그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하였다. 효종 사후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하며, 사후에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다. |
▲ 문인석의 정면과 후면 모습 |
저서로 ≪동사(東史)≫≪미수기언(眉叟記言)≫≪경설(經設)≫≪경례유찬(經禮類纂)≫등이 있고, 특히 전서에 능하여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는데, 선생의 묘비 글과 삼척의 동해척주비를 통해 그 뛰어남을 알 수 있다. 허목 묘의 석물은 예술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
▲ 항상 예의 바르신 앵콜재창님께서 간단히 제수를 올리고 예를 하십니다. |
봉분은 원형으로 규모는 직경 670㎝, 높이 170㎝이며, 석물로는 봉분전면에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고 양쪽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1기씩 있으며 제수석이 마련되어 있다. 백색대리석의 묘비의 비신을 제외하고 모든 석물은 각섬석 운모편암으로 되어있다. 상석의 규모는 너비,폭,두께가 160*90*30㎝이고 향로석은 너비,높이,두께가 29*34*26㎝이고 장명등의 높이는 160㎝이다. |
▲ 허목선생 봉분 뒤에 부후묘로 조성된 배위 전주 이씨 봉분 |
▲ 측면 뒤에서 바라 본 부인 봉분과 허목 선생 봉분 모습 |
모든 석물에는 탄흔이 있다. 묘비는 전·후 양면에 비문이 있으며, 전면에 종1열로「右議政文正公眉수許先生之墓」의 비문이 있으나 일부 글자는 파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
▲ 허목선생 봉분 우측에서 바라 본 부인과 고조부 그리고 조부의 묘역 |
비문은 후면에 「許眉叟自銘」으로 보아 생전에 자명자찬(自銘自撰)한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비신 높이 117cm, 상단 너비 51.5cm, 하단 너비 46.5cm, 두께 21cm이다. |
▲ 허목선생 묘역 뒤에 위치한 고조부인 허원(許瑗) 묘 |
▲ 허원 묘도 부후묘 조성되어 부인의 묘가 뒤에 있습니다. |
▲ 허원 묘 우측에서 바라 본 배위 선산 김씨 묘(뒷 봉분) |
▲ 선산 김씨 묘 |
▲ 허원 배위 선산 김씨 봉분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허강[許橿, 중종 15년(1520)∼선조 25년(1592)], 자는 사아(士牙), 호는 송호(松湖)·강호거사(江湖居士), 본관은 양천(陽川), 좌찬성 허자(許磁)의 아들이며, 우의정 미수 허목(許穆)의 할아버지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박람강기(博覽强記)하며, 심성이 높고 깨끗하여 이달(利達)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가 문정왕후 때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홍원에 귀양감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였다. |
▲ 상단에 위치한 허목의 조부 허강(許橿) 묘/역시 뒤에는 배위 진주 강씨 봉분이 있습니다. |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자, 여막살이로 죽을 먹으면서 매우 슬퍼하였다. 복상을 마치매 행의(行誼) 때문에 전감사별제(典監司別提)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40년간 강호에 방랑하면서 옛사람의 책으로 자오(自娛)하고 교유를 사절하였다. 다학박식하여 만물의 변에 능통한 정작(鄭碏)·이지함(李之菡)·양사언(楊士彦)·김태균(金太鈞)과 교계(交契)가 특별히 깊었다. |
▲ 배위 진주 강씨 묘역 정면 모습과 후면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임진왜란 때 토산(兎山)에서 피난하던 중 죽었다. 아버지가 편찬하던 《역대사감(歷代史鑑)》을 완성하였다. 저서로 《송호유고》가 있으며, 시조 7수와 가사 〈서호사(西湖詞)〉(일명 서호별곡) 1편이 허목이 엮은 《선조영언(先祖永言)》에 수록되어 전한다. 〈서호별곡〉은 양사언의 친필사본 첩책(牒册)에도 들어 있다. |
▲ 허목선생의 아버지 허교 묘를가기 위해서는 긴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
▲ 계단을 오르면 바로 허교 묘가 나타납니다. |
▲ 허교(許喬)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허목선생과 선조 묘역군 모습 |
허교[許喬, 명종 22년(1567)∼인조 10년(1632)], 자는 유악(維악)·수옹(壽翁), 본관은 양천(陽川). 증조는 의영고령 허원(許瑗), 조부는 좌찬성 허자(許磁), 아버지는 별제 허강(許橿), 어머니는 진주강씨, 배위는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는 시인 임제(林悌)의 따님 나주임씨, 아들이 우의정 미수 허목이다. |
▲ 허목선생 아버지 허교(許喬) 묘 전경과 후경 |
어려서 수호자(垂胡子)에게서 시(詩)를, 신붕생(申鵬生)에게서 《사기》를 배우고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피난지 토산에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많은 가족을 이끌고 각지를 전전하며 이들을 부양하였다. |
▲ 허교 묘역내 문인석 전측면 모습. 역시 각섬석 운모편암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
재상 김명원(金命元)의 천거로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이 되고, 그 뒤 직장·판관을 거쳐 거창현감이 되었다. 인근 읍에 살인자가 있었는데 세력 있는 자가 그를 숨기고 오래도록 의옥(疑獄)이 되게 하였다. 이에 그가 추관(推官)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였다. 인조 10년(1632) 포천현감이 되었다. |
▲ 허서(許舒) 묘 - 허목의 셋째 동생 |
▲ 허서 묘에서 내려다 본 허교 묘역 |
▲ 허서의 봉분 뒤에서 내려다 본 허자 묘역군(좌측 능선)과 허목 묘역군(우측 능선) 전경 |
▲ 허목선생 증조부 허자(許磁) 묘역에서 바라 본 허목 묘역군(좌측 능선)과 허교 묘역군(우측 능선) 전경 |
허자[許磁, 연산군 2년(1496)∼명종 6년(1551)], 자는 남중(南仲), 호는 동애(東崖), 본관은 양천(陽川), 증조는 허비(許扉), 조부는 허훈(許薰), 아버지는 의영고령 허원(許瑗), 어머니는 김수온(金粹溫)의 따님 선산김씨, 배위는 이종암(李終巖, 양녕대군의 손자)의 따님 전주이씨, 계배는 광산김씨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중종 11년(1516) 생원, 152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525년 저작을 거친 후 사가독서하였다. |
▲ 허자선생 배위 광산 김씨 묘(좌/앞 봉분)와 허자 묘(우/뒷 봉분). 계단 위의 묘역은 허목선생 5대조인 허훈 묘입니다. |
1539년 충청도관찰사, 1541년 형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 대사헌을 거쳐 예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543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거쳐 이듬해 우참찬이 되고, 인종 1년(1545) 지중추부사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해에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로 전임되었고, 이어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과 함께 소윤으로서 대윤 윤임(尹任)을 제거하는 데 가담, 위사공신 1등으로 양천군(陽川君)에 봉하여졌으며, 좌참찬 겸 동지경연사를 거쳐 우찬성에 올랐다. |
▲ 허자 묘역내 장명등의 화창이 없는 것이 특이합니다. |
▲ 드물게 배위 묘가 앞에 있고, 남편 묘가 뒤에 있네요 |
또한, 이듬해 좌찬성에 올랐으나 이기 등 강경파와 대립함으로써 그들의 미움을 받아 한직인 판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명종 4년(1549)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대윤일파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가 유배된 민제인(閔齊仁)의 동생 민제영(閔齊英)을 당진현감으로 임명함으로써 이기의 심복인 진복창(陳復昌)·이무강(李無彊) 등의 탄핵을 받아 홍원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뒤에 홍문관에서 그의 무죄를 상주하자 명종이 관작을 복구시키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문집으로는 《동애유고》가 전하며, 시조 2수가 증손인 허목(許穆)이 편찬한 《선조영언(先祖永言)》에 수록되어 있다. |
▲ 묘역군 상단에 위치한 허훈(許薰) 묘 - 허목의 5대조 |
보물 1509호(허목 초상)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의 초상으로 오사모에 담홍색의 시복을 입고 서대를 착용한 좌안 7분면의 복부까지 오는 반신상이다. 화폭 상부의 제발문에 따르면 1794년(정조18) 정조가 허목의 인물됨에 크게 감동하여 그 七分小眞을 얻고자 채제공으로 하여금 사람들과 의논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은거당(恩居堂, 1678년 숙종이 하사한 집)에서 선생의 82세진을 모셔다가 이명기가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영정의 오른 쪽에는 채제공이 당시에 쓴 표제가 붙어 있다.
이 <허목 초상>은 생시 진상은 아니지만 현재 원본이 전해오지 않는 실정에서 17세기 대표적인 사대부초상화의 형식을 보여줌과 아울러, 노학자의 문기어린 풍모를 잘 전달해낸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 이명기의 솜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하겠다. 규격(세로x가로) : 72.1 x 56.8 cm(그림), 28.6 x 65.8 cm(발문) |
미수 허목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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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 화살표가 있는 부분에 허목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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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간다간다 못가본 곳 잘 보고 읽었습니다.
지난 번 근처까지 갔다가 못 보았는데, 언제 인연이 닿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