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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식 사진(임정의 엮음 그때 그모습1995)
차례: 나의 아버지 임인식 | 임정의 ... 7
1. 전쟁 발발 17
2.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45
3. 전쟁의 상흔과 동족상잔. 89
4. 북진과 평양 입성 119
5. 전란에 내몰린 민간인들 135
6. 끝나지 않은 전쟁 171
작가 약력 ... 191
한국전쟁 연표 193
참고문헌 200
참고문헌
-김광준 사진으로 읽는 한국전쟁, 예영커뮤니케이션, 2005
-김학준, 한국전쟁, 박영사, 1989
-중국 해방군화보사, 그들이 본 한국전쟁 (1권) 눈빛, 2005
-미 해외참전용사협회 엮음, 그들이 본 한국전쟁 (2,3권) 눈빛, 2005
-박도 엮음,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3권) 눈빛, 2007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 대륙연구소 출판부, 1989
-안천, 남침유도실 해부 교육과학사, 1993
- 임인식 사진, 임정의 엮음, 그때 그 모습 발언, 1995
-전쟁기념사업회, 한국전쟁사 행림출판,1992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6
-조지 풀러 사진, 신광수 엮음, 끝나지 않은 전쟁 눈빛 1996
-휘문출판사 편집국 눈으로 보는 한국전쟁 휘문출판사, 1970
-Office of Information Headquarters, ROK Army, Republic of Korea Amy Vol. 1,1954
임인식 사진(임정의 엮음 그때 그모습1995)
우리 집안은 일생 산 사진만 찍다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 임석제부터 시작해 아버지나 그리고 현재 미국 뉴욕에서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까지 4대가 카메라와 인 연을 맺는 셈이다. 아버지에게 6.25전쟁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전후의 서울의 변화하 는 달동네 모습들이 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삶은 놀랄 만큼 닮은 구석이 있어서 인지 속내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를 닮은꼴이라고들 말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나를 엄하게 가르쳤듯이 나 역시 내 아들에게 그렇게 한다.
아버지가 전쟁 중인 1952년 6월 육군 대위로 제대하면서 정도선, 문제안, 박진석 씨와 함께 대한사진통신사를 국내 최초로 설립한 일이나, 1961년에 정희섭 선생과 함께 한국사진협회를 창립한 일은 내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진의 밭을 일궈 가는데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비록 주제는 다르지만 아버지의 발자취와 비슷 하게 걸어가다 보니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자랑스러움과 더불어 아버지의 반도 못 따라 가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때도 많다. 내 앞에 있는 바위가 든든한 만큼 한편으로 는 벽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6.25전쟁은 아버님의 인생에도 커다란 회한을 남겼다. 낙동강을 방어하는 다부동 전투에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압록강 부근 신의주까지 복진하여 갔지만 중공군의 개 입으로 돌아서야 했다. 신의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바로 우리 고향인 평북 정 주인데, 그만 부모님을 남겨 놓고 남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살아 계실 동안 명절만 되 면 못내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하셨다. 더구나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내려온 아버지는 종로구 가회동 38번지의 한옥 초가집을 구 입하였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으셔서 집도 직접 수리하셨다. 나의 재동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나를 이끌고 새벽마다 삼청공원으로 산책을 가셨다. 어린 나이에 새벽잠을 줄 이는 일도 고통스러운데 여름이나 겨울이나 냉수마찰까지 해야 해서 힘들었던 기억도 난다.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웠는가 하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떻게 만나셨어요"라 고 물어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어머니와는 중매로 만났겠지 하는 추측만 할 뿐이다. 나이가 들면 자식한테 약한 면을 보일 법도 하건만 아버지의 빈틈없 는 성품은 여전했다. 아버지는 상업사진이 아닌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으셨으니 경제적 인 문제로 어머니와 다투는 것을 어린 시절에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찍은 그 많은 필름이며 인화 비용을 무슨 수로 감당하셨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 사진들을 정 리하고 보관하는 일은 내 몫인데 걱정이 앞선다.
196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아버님과 가까웠던 동료들이 동참해 주지 않는 다고 많은 압력을 가해 왔다. 그 당시 정부 요직은 모두 아버지가 잘 아는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아버지는 직업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프로 의식이 강하신 분이었다. 정치가는 정치를 잘하고, 경제전문가는 경제에 온 힘을 쏟아 제각기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 지고 계셨다. 그래서 함께하자는 권유도 뿌리치고, 상 식과 정의가 통하는 나라로 미국을 염두에 둔 것 같았 다. 이민 허가까지 나왔지만 나의 군복무 문제가 덜컥 발목을 잡고 말았다. 아버지는 장손을 두고 갈 수는 없 다고 이민을 포기하였지만 이미 가회동 집을 처분해 버 려 친구분 집의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그때가 제일 힘 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집도 없고 아버지도 몇 달 동 안 일을 못해 부업으로 집 한 귀퉁이에 식용 토끼 열쌍 을 키우기도 했다.
아버지의 엄격함은 곧 사진 작업으로 이어졌다. 아 버지는 행동하지 않고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셨다. 언제 가치를 인정받을지 모르는 기록사진 을 하느라 늘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 과 갈등을 빚곤 하셨다. 50년대에 우리는 절대 가난 에 허덕이고 있었다. 사진계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 고 미군 부대나 외국에서 필름과 재료를 구해야 했다. 그나마 아버님은 라이카 카메라와 독일제 라이즈 확대 기가 있어서 좋은 사진을 남길 수 있었고, 손수 외국 원 서를 보고 화학약품의 양을 맞춰 현상까지 하셨다.
요즘 사진 하는 이들이 현상소에 필름을 맡기고 편하게 작업하는 것에 비하면 먼 얘기이 다. 아버지가 출장만 다녀오면 우리 집은 암실로 변했고, 나는 아버지가 현상하고나면 수세를 하고 말리느라 다음날 학교에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러나 당시에 집에서 제대로 수세를 했기에 사진이 이 정도라도 남아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사진은 특별한 기 술이 아니라 이렇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본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깨너머로 사진을 배우면서 무수하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에게 육 친이기도 하지만 스승이나 원로 선배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처음에 아버지는 내가 사진 을 직업으로 하는 걸 반대했다. 사진으로는 빛도 못 보고 큰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는게 그 이유였다. 아마 아버님은 좋아서 하셨지만 자식한테까지 그 어려움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내가 1978년 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건축사진연구소를 개업할 때 아버지는 건 축설계 사무실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사진 찍는다는 걸 숨기고 '건축'만 강조해 말씀드렸기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의 오해도 많았다. 괜찮은 집 하나 설계해 달라는 부 탁도 심심찮게 들어왔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내가 하는 일을 아신 후 아버지는 처음 으로 나를 인정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때 하신 말씀이 "하려면 제대로 해라"였다. 역시 프로 의식을 강조하신 것이었다. 그와 함께 내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작가냐, 잡가냐'라는 화두도 늘 내 가슴을 찌르는 가시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일 처리에 철저한 분이셨는지 알려 주는 일화는 너무나 많다. 그중에서도 내가 서울 한복 판 충무로에서 건축사진연구소를 운영했을 때 사무실 이 어려워 아버님께 얼마간 돈을 빌려 쓴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과 아비 사이니 이자는 그냥 두고 원금 은 꼭 갚으라" 라고 하셨다. 물론 갚아 드렸다. 아버지 는 미국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여기에 있지만 서로 사진 을 교환해 보는 일이 잦았다. 그때도 필름값, 인화 비용 은 꼭꼭 챙겨 드려야 했다. 물론 내가 사진을 보내 드렸 을 때도 정확한 금액을 보내 주었다. 아버지의 성품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야박하다고 머리를 흔들 정도다. 하지만 이러는 사이에 아버지는 중요한 가르침을 은연 중에 심어 주셨다. 그것은 바로 "너 혼자 똑바로 서 라'는 거였다.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일을 스스로 책임 지지도 못하고 연약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버지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내가 연구소에서 일할 때는 자청해서 조수 겸선배님이 되어 이것저것 조언도 해주고 나의 일을 도와 주었다.
아버지는 미국 이민 중이던 1991년 봄, 중국 베이징을 거쳐 북한 고향을 방문하였다. 40일간의 여정으로 그토록 바라던 고향을 방문하고 여러 친척들을 만나고 고향에 있 는 할아버지, 할머니 등 가족묘지를 참배하고 귀국한 일은 평생 바라던 소원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언젠가 남북이 통 일되어 더 좋은 그날이 되기를 바라는 생각뿐이었을 것이 다. 북한 방문 후 교통사고와 당뇨병로 고생을 하여 1998 년 2월경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모시고 왔다.
일기를 쓰는 것은 아버지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그것도 시간대별로 메모하는 습관은 나에게 많은 기억을 남겨 주었다. 일기장이 무려 30여 권이나 되는데 보관하는 일조차 어려울 따름이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몸이 불편 하여 글을 쓰지 못하게 되자 내게 대신 일기를 적으라고 하셔서 귀찮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기록과 메모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1998년 4월 4일 오후 4시 44분에 타계하셨다. 그간 아버지가 남긴 귀중한 사진들을 정리하여 후세에 남기는 일에 소홀했던 것 같아 송구스럽다. 그렇지만 아버님의 사진은 역사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이 글은 1996년 월간 '샘이깊은물'에 발표했던 글을 수정·정리해 수록한 것이다.)
종군 사진일기(국방부 정훈국 사진대장 육군 대위 임인식)
1 전쟁 발발
6월 24일(토요일) 명동 정훈국으로 출근해서 청소하고 퇴근하였다. 섬머타임으로 인해 정오인데도 아침 기분이 들었다. 퇴근 후 국방부 정훈국의 두 선배 안동준, 김병률 소령과 함께 동부이촌동 한강 모래사장으로 가 팬티 바람 으로 어린아이들처럼 해질 무렵까지 뛰어놀았다. 저녁에 김병률 소령의 용산 육군 관사로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육 본 장교 클럽 개관식에는 참석지 못하고 셋은 밤늦게까지 놀다가 내일 우이동에 갈 것을 약속하고 밤 11시에야 헤어 졌다.
6월 25일(일요일) 아침에 연락병이 비상소집이라고 집 으로 찾아왔다. 가끔 옹진지구나 38선에서 충돌이 있을 때 마다 비상소집이 걸리기 때문에 그리 대단치 않게 생각하 면서 평상시의 카키 군복 차림으로 명동에 있는 국방부 정 훈국 사무실로 나갔다. 정문 보초가 전에 없이 긴장한 표정 으로 거수경례를 하였다. 보도과로 들어가니 전화받는 참 모들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고 국부적인 충돌이 아님을 직 감할 수 있었다. 각 신문사와 통신사에서 문의 전화가 빗발 쳤다.
곧 비상소집 회의가 열렸는데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이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하였고, 지금 개성지 구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상황의 전부였다. 보도과장 김 중령은 나에게 "각 신문사의 출입기자 들을 인솔하고 개성 방면으로 가서 취재를 하라"라고 명 령하였다. 그리하여 오전 10시 30분경에 GMC트럭 한 대 에 동아일보 김진섭, 조선일보 윤거정 기자 외 7, 8명의 기 자들을 태워 가지고 문산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문산을 거 쳐 임진강 다리를 향하다가 길에서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과 마주쳤다.
사단장은 개성지구는 전투 중이니 들어가지 말고 문산 의 사단전방지휘소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지휘소에 서는 참모들과 통신병들이 정신없이 무전기를 잡고 교신 하고 있었지만 전투상황은 알 수 없었고, 기자들이 물어도 참모들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대답을 못하는 판 국이었다. 왜냐하면 개성 전면의 제12연대가 분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모른다는 것이다. 여하간 기자들은 발이 묶 여 취재를 못해 아우성쳤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점심과 저 녁도 거른 채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만을 들으며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백선엽 사단장은 26일 새벽 2시 30 분경에야 전방지휘소에서 돌아왔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북괴군이 대거 남침을 하고 있지만 우리 1사단의 강력한 반격으로 격퇴 중이어서 낙관적인 상 황이라고 했다. 나와 기자들 일행은 새벽에 서울로 빈손으 로 돌아와 "국군의 정예부대 북상! 반격 중!" 이라는 호외를 찍어서 뿌리고 방송을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서울 거리는 불안에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6월 27일 정오경 국방부와 육군본부로부터 전세가 불 리하니 한강을 건너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사진기와 중요한 원판을 정리하 여 시흥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도착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다시 원위치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내일 28 일에는 일본 동경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의 전방지휘소 가 영등포에 설치되고 미군이 참전한다는 기쁜 소식이 전 해졌다. 나는 여러 동료들과 함께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는 안도감 속에 다시 명동의 정훈국으로 복귀하여 짐을 풀고 정리를 하였다.
어느 때부턴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는 미아리 쪽 에서 피아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적의 포탄이 돈 암동 부근에 떨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는 긴박한 상 황이었다.
한편, 시내 각 대학생들이 몰려와 이선근 정훈국장에게 전방에 나가 싸우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우리에게는 그 들에게 줄 총 한 자루 없었다. 또한 애국시민들이 많은 위 문품을 가져와 싸우는 장병들에게 보내 달라고도 하였다. 정훈국에서는 오늘밤만 넘기면 내일 미군들이 참전하게 된다는 기대감에서 긴장이 풀렸다. 서울 거리는 정전이 되 어 암흑지대였고,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3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피로한 몸으로 사진반 암실에 들어가 잠에 취하고 말았다. 얼마 후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면서 후퇴하라고 소리 치고 나갔다. 정신을 차려 일어나 보니 스카라극장 쪽에서 북한군의 따발총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의 유일한 무기인 라이카 카메라를 어둠 속에서 찾아 목에 메고 정문으로 나왔다. GMC에 탄 우리는 소나 기를 맞으며 용산 쪽으로 나오는데 시민들이 피난하느라 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보였다. 당시 는 등화관제로 헤드라이트를 켤 수가 없어 서행하면서 나 의 집이 있는 삼각지 로터리를 지날 무렵에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들렸다. 순간 적기의 공습인가 아니면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의 폭파음인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집 앞을 지나면서 그쪽을 똑바로 바라볼수가 없었다. 가족 들의 얼굴을 잊으려는 심산이었고, 군인으로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소걸음으로 움직이던 차량 대열이 용산역 부근에 이르 자 아예 정지하고 말았다. 한참 후에야 우왕좌왕하는 사람 들의 말을 통하여 한강 다리가 모두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각자 행동하기로 하였다. 나는 이영치 대위 와 인도교로 걸어갔다. 중지도 섬에 이르니 다리 밑에서 파 괴되어 부서진 수도관의 받침대가 불타면서 수면을 비치 고 있었다. 불빛 속에서 나룻배 한 척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이 대위와 함께 다리 밑으로 내려가 강가에 떠 있는 배 를 끌고 왔다. 이때 갑자기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10여 명이 개미떼처럼 배에 올라탔다. 위험했지만 철교 있는 쪽으로 배를 대어 무사히 한강을 건넜다.
6월 28일 노량진역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시흥으 로 향하였다. 만일 우리가 시흥에서 다시 시내로 복귀하지 않았다면 군부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뒤에 알게 된 사실 이지만 인도교를 건넌 사람은 채병덕 참모총장을 비롯한 일부 병력이고,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각 참모부 장병들은 전혀 건너지 못한 상태에서 다리가 폭파되었다.
수원에 가서 확인해 보니 나의 사진대원들은 한 사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지 않았다면 수많은 서울 시민들과 군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6월 29일 수원에서 주먹밥 한개를 먹고, 라이카 카메라 를 목에 메고 취재차 영등포 한강방어선으로 나갔다. 후퇴 했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장교 계급장을 떼어 버리고 행동 하였다. 한강철교 부근의 국군방어선과 파괴된 한강철교 등의 장면을 담고 영등포를 거쳐 시흥 쪽으로 향하였다. 언 덕길에 이르러 서울 시내 쪽을 촬영하고 있는데 시흥 쪽에서 여러 대의 차가 오더니 내 옆에 정지하였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와 채병덕 참모총장이 김종갑 대령의 안내를 받으며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있었다. 나는 우연하게도 맥아더 장군의 최전선 시찰장면을 촬영하는 행운을 얻었다.
7월 10일 어제 우연히 만난 한국 공군의 미 고문관 니콜 라스 씨와 미 제24사단 지휘소에 들렀다가 어젯밤에 충남 연기군 전의면 부근에서 적의 T-34 전차 3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니콜라스 씨에게 사진촬영의 방편 을 부탁했다. 그러나 미군 참모들은 교전지구라 일반 차량 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결국 우리는 미군 전차 를 타고 현장까지 들어가는 편의를 얻었다. 미군의 엄호사 격을 받으며 우리가 탄 전치는 전의와 전동 사이의 철로 옆 에서 파괴된 적의 T-34 전차의 잔해를 찍을 수 있었다. 또 한양손을 전깃줄로 묶어 총살한 미군의 시신도 찍을 수 있 었다. 나올 때도 미군 전차의 지원하에 적의 총탄이 스치는 속을 무사히 통과해 대전으로 돌아왔다.
현상된 사진을 제일 먼저 AP통신의 신화봉 기자에게 건 네주었다. 이것이 한국전쟁의 최초의 사진으로 전송되어 7 월 12일자 전 세계의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 사진들은 개전 후 처음으로 대전·대구·부산 등지에 가두 전시되기도 하였다.
8월 23일 한국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의 아들인 랜돌프 처칠 기자가 대구에 있던 국방부 정 훈국에 찾아와 취재와 안내를 부탁했다. 나는 지프차로 영 천방면 제2군단사령부 유재흥 장군의 예하부대를 돌며 취 재하게 하고 이어서 왜관의 미 제1기병사단으로 안내하면 서 동행 취재를 하였다.
저녁 때 처칠 기자는 브리핑을 받았다. 그는 적진을 취재 하겠다고 제의했고, 그날 밤 11시경 미군 정찰대원 5명의 지원하에 적진 취재에 나섰다. 왜관철교 아래쪽 과수원에 서 위스키 한 병을 서로 나눠 마시고 난 후 그는 나에게 소지 품을 맡기고 5명의 미군 정찰대원과 함께 물살을 헤치면서 낙동강을 건너갔다. 이때 아군의 맹렬한 지원사격이 있었 다. 그러나 1시간 뒤에 돌아오겠다고 한 일행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두 시간이 지난 새벽 1시경에야 복귀 예상 지점으로부터 2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돌아왔다. 처칠 기자는 왼쪽 다리에 적의 총탄을 맞아 미 정찰대원의 부축 을 받고 있었다. 그는 OP관측소에 들러서 적정을 설명했 다. 곧바로 그곳에 포격이 집중되었다. 적진에 들어가 취재 하다 부상당한 처칠 기자의 모습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 다. 그가 영국으로 귀국한 뒤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