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01. 08.
어제는 웬일인지 저녁때부터 물이 나오지 않아 고생을 하였다. 저녁밥은 아가다 자매에게 부탁하여 때아닌 성찬으로 채웠으나 보일러도 돌릴 수 없고 세면조차 불편하다. 다행히 데레사가 챙겨둔 비상물통이 있어 물을 덮이고 하여 고양이 세수를 한 다음 7시에 있는 면형의집 미사에 참예하고 해안가 시장 터를 찾아가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한 뒤 이른 올레길 걷기를 시작했다.
12번 코스 출발점인 용수리에 도착하니 9시 반이라 바로 걷기를 시작하여 용수포구-용수저수지-숲길-낙천리 아홉 굿 마을-저지 오름-저지마을에 이르는 15.3Km를 3시간 만에 걸었다. 이 코스는 지금까지의 다른 코스와 달리 전혀 해안이 없는 내지로 들어가는 것이 특이하다. 용수리에서 숲길까지의 사이에 이어지는 들녘과 특전사숲길-고목숲길-고사리숲길로 이어지는 비교적 평이한 숲길을 걸으면서 전혀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고 걷자니 옛날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어릴 쩍 충화 태봉에 살던 시절 한산 여사리에 있는 외가에 갈 때 갈태 마을을 지나 험준한 산길과 들녘을 놀며 걸으며 뛰어가던 일이며, 보문산 언저리와 유성 들녘을 테레사와 산책하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되살아 온다.
낙천리 아홉 굿 마을은 무언지 알 수는 없으나 전통 굿 놀이를 하는 곳이 아닌지 싶다. 마을에 굿판인지 싶은 광장이 있고 마을주변을 돌며 편히 쉬어 갈 수 있도록 곳곳에 미적 감각을 살린 의자를 배치해 놓은 것이 다른 곳과 달리 마음에 와 닿는다. 혹시 굿을 하는 일정을 알게 되면 다시 한번 와 보고 싶다.
코스 끝자락에 있는 저지 오름은 이 코스의 백미이다. 저지리 마을 뒤에 위치한 200여 M의 나지막한 오름인데 산 둘레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봉우리 분화구 주변으론 제주의 각종 식생 들이 무성하다. 옛날 마을의 집들이 초가였을 때에는 산 전체가 억새로 뒤덮여 이 풀로 지붕을 엮어 썼는데 개와와 슬레이트 등으로 개조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억새를 캐어낸 다음 나무를 심고 산책로를 가꾸었다 하는데 그리 힘들지 않으면서도 풍취가 물씬 나는 곳으로 2007년에는 전국의 숲길 심사에서 금상을 받았다 한다.
12시 반 경 걷기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을 물어 찾아 가니 마침 12시 59분에 고산리로 가는 차편이 있는지라 이 차를 타고 나가려 기다리는 데 방향이 틀려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버스는 2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 판이고 한림에 가서 차를 갈아타려 해도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 처지라서 시골마을에 흔치 않은 중국집에 들러 짬뽕으로 점심을 먹고 나서 아침에 물이 안 나와서 못 본 볼일까지 마을회관에 들러 보고 나서도 한참을 기 둘러 한림행 버스를 탄다는 것이 잘못 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한림행 버스로 바꾸어 타고 금악리에서 다시 서귀포행 버스를 갈아탔다. 재미 있는 것은 이렇게 돌아 온다고 한 것이 알고 보니 고산리 방향 버스를 탄 것보다 더 빨리 서귀포로 돌아오게 되었다. 버스기사의 설명을 들으니 후자의 경로가 직선코스이어서 전자의 경로를 따랐을 때보다 한 시간 이상 덜 소요된다는 것이다. 외지인이 정확한 지역정보 없이 걸으려니 뜻하지 않은 에피소드가 생기게 마련이다.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수도사정이 풀려 더운 물로 샤워도하고 보일러도 돌려 놓고 이 글을 쓴다.
2010. 01. 09.
새벽 4시에 눈을 뜨고 밖을 보니 달이 밝고 하늘에 별도 총총하다. 오늘로 올레길 14번 코스를 걸어 15개 올레길 전 코스 완주를 마치고 내일이나 모레 중에 한라산 등반으로 이번 제주생활의 대미를 장식할까 생각하였는데 날씨가 화창하니 한라산 등반을 먼저 해야지 않을까 싶다. 일단 감자를 찌고 사과를 깎는 등 산행준비를 하고 아침 7시 미사에 참예했다. 미사를 마치고 나와보니 그사이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여 곧 진눈깨비라도 내릴 태세다. Mart에 가 비닐로 된 비옷을 사 배낭에 챙겨 놓고 마음을 바꾸어 당초대로 올레길을 걷기로 작정하고 시장 통에 가서 따로 국밥을 시켜 배를 채우고 금악행 버스를 탔다.
금악에서 내려 14번 올레길 출발지인 저지마을 회관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려니 버스시간도 모르고 정확히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인지도 알 수 없어 당황해 하다가 마침 지나치는 택시가 있어 잡아 타고 보니 6Km가 넘는 꽤 먼 거리다. 10시 조금 전에 걷기를 시작하여 저지마을회관-저지밭길-나눔허브제약-숲길-무명천-월령해안-협재해수욕장-옹포포구-한림항에 이르는 19.3Km의 길을 3시간 반에 서둘러 걸었다. 한림에서 서귀포로 오는 1시 55분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막판엔 잰 걸음으로 걷다 보니 땀을 꽤나 흘렸다.
저지마을에서 월령 해안까지는 내지의 들녘과 숲길을 걷는 코스로 다른 곳과 유사한 점이 많으나 이 지역엔 선인장농장이 많은 것이 눈에 뜨인다. 옛적에는 선인장 열매를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는데 이곳 한경면에는 지천으로 선인장열매가 깔려있다. 20 여 년 전 페루의 수도 리마에 갔을 때 선인장열매로 만든 샐러드를 처음 대하고 당혹스러워 했던 기억이 새롭다. 월령 해변에는 아예 자생한 선인장이 바위와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선인장 자생지라 하여 제주도에서 보호지역으로 지정해 놓았다. 민가에서 기르던 선인장을 바닷가에 버린 것이 군락을 이룬 것인지 해역을 지나던 외국 선박에서 버린 선인장이 파도에 밀려와 번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한다.
협재리 해수욕장 주변의 모래는 여전히 곱다. 조개 껍질이 바스러져 이루어진 하얀 모래를 덮은 바다 빛이 마치 우유를 풀어 놓은 듯 하다. 월령 해안에 STX가 설치한 대형 풍력발전기가 돌지 않고 서 있으니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든다. 월령에서 한림 항 까지는 왼편에 비양도와 바다를 보며 걷는 길로 드문드문 짝지어 걷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림항 목적지에 도착하니 벌써 1시 반을 지난 지라 길을 물어 서둘러 버스정류장에 와서 서귀포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제주도에 내려와 지내면서 오늘로 제주 올레의 15개 정 코스(Net 234.3Km)를 모두 걸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걸은 것까지를 합하면 아마도 240Km는 넘으리라. 1코스 바다 건너 있는 외도는 오래 전에 여행 왔을 때 데레사와 함께 걸은 적이 있고 외돌개에서 시작하여 내지를 돌아 월드컵 경기장 쪽으로 나오는 파생 7-1코스는 다음으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