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의 회복
마태복음 21:1-17
▪씨뿌림 주일
오늘은 종려 주일이며, 교단에서 2005년부터 제정한 ‘씨뿌림주일’입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 ‘호산나!’을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한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교단에서 2005년부터 씨뿌림주일을 제정한 것은, 급격하게 사라지는 토종식물의 씨앗을 보전하는 일의 중요성과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유전자조작 농산물)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붕괴하여가는 농어촌과 농어촌교회를 위해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돌아보고자 하는 의도로 제정되었습니다. 2017년 현재, 대한민국은 일본에 이어 GMO관련 농산물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이며, 공업용을 제외하며 식용으로는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GMO식품에 대한 안전성 문제는 아직 과학적으로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적인 다국적 식량기업인 몬산토는 최대시장인 한국에 ‘몬산토 코리아’를 두고 GMO관련 농산물을 판매하는데, 우리나라의 흥농종묘도 몬산토에 합병되었습니다. 몬산토는 농부들에게 씨앗을 판매하는 것 외에 농약 판매, GMO 유전자조작 식품 개발, 종자 개량 등의 사업을 주 분야로 하고 있는데, 이 기업은 월남전 때 고엽제를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전략은 아주 치밀합니다. 한 예만 들면, GMO종자에는 다른 씨앗들을 공격하면서 자신을 지키게 하는 유전자를 심어두었습니다. 그래서 GMO종자를 심으면, 토종 씨앗은 맥을 추지 못하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GMO농산물은 아무리 좋은 종자를 남겨두어도 이듬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종자를 구매해야만 합니다. 또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농약을 칠 때에는 ‘몬산토’ 회사에서 만든 농약만 듣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몬산토 GMO종자를 사면, 농약도 몬산토에서 만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농약을 안 치고는 재배할 수가 없고, 농약을 치면 특정 GMO농작물을 제외한 나머지 식물들은 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우울한 이야기죠?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우리 토종종자 지키기 운동’을 하면서, 사라져가는 토종 씨앗들을 보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토종 씨앗도 많이 사라졌지만, 안타까운 일은 토종 씨앗이라는 것이 열매가 작고, 풍성하지도 않다 보니 농민들조차도 토종 씨앗을 외면한다는 점입니다. 자본이 논리에 따라 돈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나라의 농촌은 알게 모르게 몬산토라는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충족시켜주면서 점점 피폐화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유일한 방법은 ‘토종 씨앗을 지키는 것’입니다. 조금 생산량이 적어도, 이익이 적어도 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농민이 각성한다고 해도 소비자가 같이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때깔 좋고 값싸고 맛있는 농산물에 길든 소비자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온 다국적기업의 교묘한 소비전략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울하지만, 현실입니다.
▪본질 1 - 겸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지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물론이고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누구 신지’ 최후의 순간까지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에 군중이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로마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시켜 다시 다윗왕 때와 같은 전성기를 누리게 할 ‘혁명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다윗의 왕조’를 회복할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멍에를 매는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알았어야 했지만,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전쟁을 마치고 개선장군이 도시로 들어올 때에 ‘말’을 탔습니다. 당나귀는 ‘말’은 ‘말’인데, 주로 ‘운송수단’으로 사용합니다. 나귀는 말보다 체질이 강해서 저항력이 높고, 말처럼 많은 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말보다 빨리 자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은 더 크고, 빠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요긴하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일반병사들은 탈 수 없고 장군들이 탑니다. 전쟁터에서 일반병사는 장군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말은 상징적으로 ‘힘의 논리’를 가리키는 것이요, 나귀새끼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겸손’의 상징입니다. 결국, 에수님의 나귀를 타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뤄가실 하나님 나라는 ‘힘의 논리’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겸손, 서로 섬김’으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힘의 논리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사로잡히게 되면, 수확의 양과 보기 좋은 모양에 현혹되어 GMO농산물에 환호하다 그들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이나 소비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겸손,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첫 번째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교만은 멸망의 선봉(잠 18:12)’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 분(시편 147:6)’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늘 겸손하여지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에서만이 아니라 매사에 겸손하여지기 바랍니다. 교만한 자들은 겸손한 사람을 보면 우습게 여기지만, 성숙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을 보면 귀하게 여깁니다. 누구에게 귀한 대접을 받고 싶으십니까? 겸손하게 살아가심으로 성숙한 사람들과 하나님께 귀한 대접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질 2 – 기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정화’입니다. ‘성전숙청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숙청’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래 ‘꼼꼼히 청소하다’란 뜻으로 ‘정화’와 어울리는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후에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되면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분단된 나라에서 종종 우리는 북한발 소식에서 ‘숙청’이라는 단어를 듣습니다. 그래서 ‘숙청’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단어로 여기기도 합니다. 과연, 예루살렘 성전이 어떠했기에 ‘꼼꼼히 청소하여 정화하는 것’으로는 모자라서, 아예 ‘제거를 해야 하는 숙청의 단계’까지 온 것일까요?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 오경에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특별히 제사규정에 대해서는 레위기에 집중적으로 나오는데 번제든 소제든 화목제든 ‘흠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3대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월절(무교절), 오순절(칠칠절, 맥추절, 초실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이 그것인데 이 중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이며, 절기때마다 순례자들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부자들은 소를 바치기도 했지만, 가난한 이들은 비둘기 같은 작은 새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물로 바치려면 ‘흠 없는’ 것이어야 했고, 그것을 판단해 주는 제사장이 있어야 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다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이 돈벌이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절기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나온 이유는, 예배하고 기도하기 위함인데, 성전을 관리하고 각종 예식을 집행하고, 순례자들의 종교적인 의식을 도와야 할 이들은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각종 야합을 통해서, 하나님을 빙자해서 돈을 법니다. 단순히 장사해서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바자회 같은 것도 금지하는데 너무 문자적으로 성경을 인용하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분노하셨습니까?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기도는 사라지고 오로지 돈벌이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 두 번째입니다. 한남교회는 ‘기도하는 곳’일 때 의미가 있고, ‘예배하는 곳’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한남교회가 기도하는 곳이요, 예배하는 곳으로서의 본질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모임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본질 3 – 순종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출애굽기 산책이 이어지고 있는데, 지난주에 24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 나답, 아비후, 이스라엘 장로 70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경배하라”고 하십니다.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시내 산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감히 백성은 가까이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올라오라’고 ‘허락’하십니다. 비로소 모세 외에 다른 이들도 그 허락으로 시내 산에 올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한남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셨기 때문이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올라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분들이 지금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까?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고 싶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은 성령을 받은 분들입니다. 성령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으셨다면, 이 시간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락하셨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올라오라고 하실 때”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 세 번째입니다.
그 행위가 바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함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가 바로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크냐 작으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고 ‘기도하는 집’으로 인정해 주시는 한남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그런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저는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의 본질을 상실했기에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그들 앞에 현현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은, GMO종자식품의 횡포 속에서 토종 씨앗을 지키는 일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입니다. 겸손, 기도, 순종, 이 본질을 회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