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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블레이크,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
2011년 3월 13일 사순 제1주일
창세2,7-9;3,1-7 로마5,12-19 마태4,1-11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오 4,1-1)
광야에서 /김찬선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십니다.
광야는 아무도 없는 곳.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
하여
광야에서 예수님은 외로우십니다.
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겪으실 고독을 앞서 체험하십니다.
당신을 따랐던 그 수많은 사람들과 제자들도 떠나고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세 제자도 쿨쿨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당신 곁에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괴롭다 해도 아무도 당신 마음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외로움은 누가 옆에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가 있다 해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의 십자가 고통 앞에서 너무도 고독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는 혼자 져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어머니도 이 십자가는 대신 질 수 없습니다.
허나
예수님께서는 이 절대 고독에서 하느님과 대면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절대 고독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 되고
이 절대 고독이 기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없는 광야의 고독 가운데서
하느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광야의 고독을 수없이 체험합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 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해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어
혼자 벙어리 냉가슴 알 듯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합니다.
이런 면에서 집안에서는 가장이 가장 고독하고,
직장에서는 최고 경영자가 가장 고독하고,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는 장상이 가장 고독하고,
더 올라가면 하느님께서 가장 고독하십니다.
제가 관구장을 할 때입니다.
형제들은 힘들다는 하소연을 저에게 쏟아놓습니다.
형제들은 불만도 저에게 다 쏟아놓습니다.
저희 수도회 여러 문제들을 저의 잘못이라 비난하며
해결책을 내 놓으라 합니다.
저 또한 같은 인간이고
그래서 힘들고 하소연하고 싶고 불만을 터뜨릴 데가 있으면 좋겠는데
형제들은 이런 저에게 온갖 것을 쏟아 붓고
저는 달리 터뜨릴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바로 이 때
누구 의지할 데를 찾기보다 홀로서기를 해야 했고
절대 고독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쓰레기를 쓰레기통이 받아들이는 덕분에 방이 깨끗하지요.
만일 쓰레기통이 쓰레기 받아들이기를 싫다하면
온 방이 지저분하겠지요.
‘그래 내가 형제들의 쓰레기통이 되어 주자!’
‘그리고 가장 큰 쓰레기통인 하느님께 쏟아버리자!’
‘나는 그래도 하느님이 계시니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찾아가 하소연하지 않고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한탄하지 않고 하느님께 한탄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힘을 얻지 않고 하느님께 힘을 얻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사순절 우리의 기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김 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느끼셨던 고독은
우리에게 교훈적입니다.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절대고독이라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는데도 모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하고,
하느님마저 의심되는 고독 말일세.
모든 것이 끊어져 나가고
나는 아주 깜깜한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느낌일세.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지면
오직 하느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시려고 그러시나봐.
하느님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려고 그러시겠지?”
두 번째로 광야에서 예수님은 배고프십니다.
광야에는 돌덩이밖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여 사탄이 다가와 예수님께 유혹을 합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시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우리는 이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안심도 하게 됩니다.
유혹을 받으시기까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심에 감사드리고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시니 수없이 유혹받는 우리도
유혹 자체가 죄가 아님에 안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심하고 감사만 드리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유혹의 본질을 깨닫고
유혹을 통하여 하느님 아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유혹은 배고픈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배부른 사람은 식욕이 없고
식욕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는 법이지요.
이것은 비단 먹는 것 뿐 아닙니다.
없을 때 소유욕이 생기고 소유욕이 있을 때 유혹을 받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자가 하는 짓은
뱀이 하와에게 부족한 것, 없는 것을 일깨우듯
없는 것을 일깨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고 가지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돌을 내밀며
당신은 빵은 없고 돌밖에 없으니
당신의 능력으로 빵을 만들어 식욕을 채우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빵은 없어도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 삶에도 유혹자가 많습니다.
명품을 걸치고 와서 내게 명품이 없음을 일깨우고
소유욕을 부추기며 유혹합니다.
갖가지 없음을 일깨우고 욕심을 부추기며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도 배고프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도
뱀이 가지지 못한 것 하나를 일깨우니 못 가진 것만 보고
가진 것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못 가져서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못보고 못 누리기에 불쌍하고 불행한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욕심내는 것을 못 가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많이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배고프고 궁핍하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빵에 대한 욕구를 단식을 통하여
말씀에 대한 욕구로 바꾸십니다.
아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빵에 대한 욕구를 잠재웁니다.
우리도 사순절 단식으로 우리의 온갖 욕구를 영적인 갈망으로 바꾸고
하느님 말씀, 즉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께서는
광야를 나와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기도와 단식으로 복음을 소유한 행복을 당신 혼자 소유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과 그 복음, 그 행복을 나누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나도 행복하니,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김 추기경의 말씀과 같습니다.
나누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왠 줄 아십니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줄 수 없는 법이지요.
같은 이치로 행복이 없는 사람은 행복을 나누지 못할 것이고
나눌 마음이 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진짜 행복한 사람은 자기 혼자 행복한 것을 미안해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주고도 나누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행복한 우리는
기도와 단식으로 우리 시대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불행한 사람에게
우리의 행복을 나누어야 하고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자선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유혹 /신은근 신부님
재의 수요일, 우리는 인간의 본질이 흙이라는 사실을 묵상하였다.
감각적인 오늘날 머리에 재를 뿌리며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신앙인들 외에 누가 있겠는가. 어린이들도 많이 나와 재를
받았다. 하나같이 웃는 얼굴이었다. 머리에 재를 얹는 것이
신기하고 장난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이 예절이
죽음과 연관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알았더라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린이들만 그랬을까. 누구라도
죽음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 죽음은
나와 거리가 있다.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재의 수요일에 교회는 강압적으로 죽음을 묵상케 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허무감을 주거나 두려움을 심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재를 받으면서 우리는 언젠가 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러니 유혹 앞에서 어떻게 해야겠는가. 죽음을 떠올리며 끊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순절 동안만이라도 이 연습을 시도하라는 것이
재의 수요일에 담긴 교훈이다. 무엇을 끊어야 할지는
오늘의 말씀 속에 들어있다.
첫째는 빵의 유혹이다. 얼마만큼 소유해야 잘 사는 것인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무작정 소유의 충족만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일생이 계획대로 되는가. 그렇지 않다.
계획의 삼분의 일만 이루어도 대성공이다.
나머지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행복으로 갈 수 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소유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이끄심을 찾아야 한다. 생활 속에 잠겨있는
그분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왜 사는지,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지, 삶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사탄은 예수님과 함께 성전 꼭대기로 가서는 뛰어내리라고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면 천사들이 바쳐 줄 것이 아니냐며 유혹했다.
그래 '뛰어내리마' 하고 뛰어내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렇다.
나서야 할 자리인지 아닌지는 쉽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았는데 이럴 수 있는가.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생각이 과거에 얽매이면 잔소리꾼이 된다.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신앙인이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고 했다.
세상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말씀이다. 모두가 내 몫이며 내 책임인 것이다.
무모하게 뛰어내리지 말라고 하신다.
무모하게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유혹받으셨다는 사실은 위안이 된다.
그분을 유혹한 사탄이라면 우리를 유혹하는 것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혹은 죄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삶의 한 형태일 뿐이다.
실제로 인생은 절반이 유혹이다. 아무도 예외일 수 없다. 끊임없는
기도만이 유혹 앞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얼마나 자주 이 기도를 바쳤던가.
그만큼 필요한 기도였다는 증거다. 결국은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인생이다.
재의 수요일, 머리 위에 뿌려진 재 속에 이 진리가 숨어있다.
그러니 소유의 유혹 앞에서 인정받고 싶은 유혹 앞에서 다시 끊고
돌아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금년 사순절동안 실천 해야 한다.
또 다른 기쁨으로 부활절을 맞이할 것이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은퇴(?) /박동호 신부님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의 처음과 마지막 대목입니다.
시인이 마음에 둔 ‘그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에게는
엉뚱하게도(?) 30여 년의 짧은 삶을 사시다 가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시였습니다. 그분의 삶은 참 힘들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근근이 사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구름 같은
군중을 몰고 다니시기도 한 화려한 삶을 사신 분이기도 했습니다.
얼굴만이라도 보고파,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고파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었지만 고독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이라며 환호받았던 분이었지만 아무도 뒷수습해 줄 겨를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난기약’을 했음에도 아무런
유비무환할 겨를 없이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데, 세월이 흘러도 한참이 흘러 까마득히 옛날 일인데도,
아직도 그분을 잊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잊는 것은 한참, 영영(永永) 한참이라는 시인의 노랫말 그대로입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며 힘들게 피었다 잠깐의 순간에 저버린, 누구도
쳐다볼 틈 없이 그렇게 쉽게 삶을 마치신 예수님, 그분을 한참
아니 영영 기억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너나할것없이 “돌을 두고 빵이 되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세태에 한 몫을 한 것이 죄스러워서입니다.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손에 쥐겠다고 달음질치는 그 경주에
뛰어든 것이 부끄러워서입니다. 전지전능한 초인이 되겠다고 그래서
천사들마저 보호하고 받쳐 줄 것이라 믿는 그 교만함을 부러워한 탓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 부를 탐하는 사람, 초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삶은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인간적으로 어리석은 삶을 사셨던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겠다고
다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사순 시기는 회개와 정화의 시기여야 합니다.
입술로는 회개와 정화를 노래하면서도 몸으로는
빵을 구하고 권세와 영광을 얻겠다며 발버둥을 친다면 예수님을
유혹한 악마가 되는 것이며 1독서의 이스라엘의 처지처럼
이집트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은퇴(?)하셨던 것은 그분께서
성령으로 가득 차셨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뜻대로만 사셨기 때문이며,
하느님을 의심치 않고 하느님만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빵을 구하고 권세와 영광을 탐했다면 억울해서라도 그렇게 일찍
시들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그분을 기껏해야
그것도 억지로 훌륭한 성현 중의 한 분쯤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영영 기억하고 따르며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 섬기는 이유는 아무것도
탐하지 않고 때가 되자 주저함 없이 은퇴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 그분만큼은 아니어도 흉내는 낼 정도의 아름다운
퇴장을 위해 비우고 비우자고 다짐 또 다짐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큰 산 같은 예수님 /양승국신부
형제들과 ‘1박2일’ 비슷한 것을 하러 바닷가로 갔습니다.
큰 방파제가 하나 있길래, 답사해보려고
차를 몰고 방파제 쪽으로 향하는데,
진입로 양쪽에는 ‘유혹거리들’이 얼마나 많던지요.
수족관 마다 가득 차 있던 ‘자연산 횟감’들,
식당들로부터 풍겨 나오는 흐뭇한 냄새,
떠들썩한 분위기는 강하게 우리들을 손짓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계속 되뇌었습니다. 마음 약해지면 절대 안 되,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 뭐야? ‘극한 체험’을 하러 왔는데,
초반부터 이렇게 흔들리면 안 되지.
그런 마음과는 달리 몸은 따로 놀았습니다.
마침 한 청년이 우리 차 앞을 가로막더니 맛있게, 푸짐하게,
그리고 싸게 해주겠다고 말하면서 앞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마침 뱃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꼬르륵 소리... 저는
단 몇 분 만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다양한 유혹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이란 존재,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입니다.
죽어도 끄떡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지만
작은 바람 한 줄기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 때 금강석 같던 다짐도 오래가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큰 산’처럼 여겨집니다.
악마의 유혹은 참으로 달콤했습니다.
악마가 눈앞에 펼쳐놓은 장밋빛
청사진,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유혹들 사이로 난 생명의 길로 홀연히 걸어가십니다.
그 달콤한 제안들 앞에 눈길 한번 주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당신의 길을 유유히 걸어가십니다.
참으로 당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인(聖人)이란
한 가지 일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성인들이 지닌 공통점 한 가지는 자신의 내면
안에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에너지들을 통합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정렬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 ‘한 방향’이란 결국 영성적인 삶이겠지요.
가난한 이웃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이겠지요.
예수님의 일생 역시 비슷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자렛에서의 30년간 숨은 생활 동안
예수님은 많은 수련을 닦으셨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 들어있는 에너지들을 한 방향으로 통합하는 수련,
인류구원을 위한 희생의 삶이란 유일한 목표를 위해
많은 가지치기 작업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삶을 극도로 단순화시키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의 선택을 위해 부차적인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작업을 계속하셨습니다.
짧은 생애, 오직 한 가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데만
충실했던 예수님, 보다 큰 목표를 위해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내면이, 예수님의 삶 전체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의 자세 /배광하 신부님
세상의 유혹
구약의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후 그들은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 십계명(율법)을 받은 은총을 기념하여 ‘오순절’ 축제를 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계명이 자신들을 옭아맨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안에서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또다시 은총의 시기인 사순절이 돌아왔습니다.
사순절은 교회가 교우들을 옭아매거나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시기를 통하여 세상에서 만나게 될 유혹과 시련을
이기도록 만들어 주는 은총의 시기인 것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를 지내는 오늘, 교회는 인간이 세상에서 만나게
될 모든 유혹과 그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약한 우리에게 또다시 용기를 줍니다.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께 던진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첫 번째 유혹은 결국 인간의 보다 나은 세속적 의식주에 대한
유혹인 것입니다. 화려한 명품 옷에 대한 유혹, 보다 맛있고
희귀하며 이름난 음식에 대한 유혹, 남들보다 넓고 안락하며
쾌적한 집을 소유하고 싶은 유혹인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의식주에 대한
유혹을 모두 뿌리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단호한 대답은
그것들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루카 4, 4)
악마의 두 번째 유혹은 높은 곳에서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경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자신이 모든 삶에 중심이 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가정, 직장, 교회에서 남들이 자신만을 보아주고 인정해 주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경배해야 하는데 세상 것들을 그 중심에 두려하고
더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유혹에 늘 노출되어 삽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 8)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려는 종교적인 구원놀이의 유혹입니다.
엉터리 진리, 기복적인 신앙, 값싼 은총, 진정한 자기 투신이 아닌
안락과 일신의 안일을 위한 신앙 유혹인 것입니다.
또한 이 유혹은 주님의 뜻이 아닌 제 뜻에 의한 신앙,
제 멋대로 살고자하는 유혹인 것입니다.
자주 우리는 주님과 거래하듯이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루카 4, 12)
사순 시기는 진실로 우리 인생에 순간순간 다가오는 피하기
어려운 이 같은 유혹들을 말씀 안에서 이길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하는 값진 은총의 시기입니다.
믿음으로 유혹을 이김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빈 구멍을
하나씩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 같은 빈 구멍을 인간들은 역사 이래 권력과 부귀와 영화와 지식 등으로
메꾸어 보려 하였지만, 언제나 빈 공허함으로 인생 무상함,
외로움을 느끼며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빈 구멍은 하느님으로만 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의 빈자리를 채우실 수 있는 믿음,
그분만이 세상의 전부이며 중심이신 분이시라는 믿음,
주님께 의탁할 때, 그분께서 인생 순례의 여정에 동반자로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깨닫고, 느끼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에게 이집트는 세속 도시문화의 환락과
방탕과 쾌락의 유혹이 널부러진 곳입니다. 그곳에는 돈이 곧
절대자이며, 권력과 부가 사람의 정신까지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 같은 유혹의 이집트에서 우리가 헤어 나오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때문에 하느님을 찾기 보다는 술집이나 게임장, 도박이나 운동장,
노래방이나 온갖 취미 생활에 흠뻑 젖어 살아가는 이집트 도시 유혹에서,
이 사순절에는 진정 벗어나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강한 손과 뻗은 팔로, 큰 공포와 표징과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신명 26, 8)
사순절은 새로운 광야의 길 /강길웅 신부님
은혜로운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이 은혜로운 것은
우리가 이 시기에 보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도
부활의 빛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필요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오늘 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은 첫 곡식을 하느님께 바치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백년 동안 남의 나라 땅에서 노예생활을 했으며
그리고 약속의 땅을 얻기까지에는 무려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수확을 얻게 되니 그 감회가 얼마나 깊었는지 모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세월 어려웠던 사건들은 모두 다
자신들의 죄의 결과였으며 그때마다 하느님은 벌을 주셨지만 그것은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해 주시기 위한 그분의 섭리요
계획이셨습니다. 지내고 보니 하느님의 사랑이 아주 새롭게, 그리고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래서 하느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은 누구나 광야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몸 붙일 곳이 없는 황량한 벌판을 혼자서 고달프게 걸어가며
여러 가지 고난을 두루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을 느끼기도 하며 버림과 치욕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느님 사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드뭅니다.
언젠가 병상에 누워 있는 어떤 형제를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때
그 형제가 그랬습니다. 아프고 보니 예수님이고 하느님이고
안 보인다는 것이며 기도하며 선하게 살았던 결과가 고작 그것이냐면서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사실
고통을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면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없다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던 바로 그 비슷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을 하시며 시험을 받으십니다.
성서에서 광야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곳이며 또한 마귀의
유혹을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사순절이라는 광야에서 똑같은 것을 체험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셨던 세 가지 유혹, 즉
빵과 권력과 공명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욕망에 대해 묵상을 해야 하며
그것들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가지고 있는 그것들을 나누기 위해 우리의 '광야'를 걸어가야 합니다.
사순절은 바로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한번 바라보는 시기입니다.
돈이고 권력이고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마치 바닷물과 같아서 배가 가득 차서 터질 지경인데도
"물! 물!"하면서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나누면 나눌수록 넉넉하게 됩니다.
호주머니에서 아무리 꺼내어 나누어 줘도 늘 가득 차 있는 넉넉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은혜입니다.
성당마다 아름다운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서 자신들을 희생하며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봉사자들을 보면 그 안에 꼭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고의 영광을 자기들이 얻으려는 공명심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돌리면 얻는 명예와 은혜가 더 큰데도
그걸 모르고 이기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기가 있고 분열이 있습니다.
요즘 가정에서 문제되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자녀가 여럿일때는
형제들이 서로 이해와 양보와 희생이 저절로 뒤따랐습니다. 그래야만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녀가 하나나 둘이기
때문에 그들이 양보와 희생을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고집,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형제들간에 위 아래로 부딪치면서 고통을 배워야 하는데
그 수련이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불화가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광야를 체험하고 고난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주일 미사를 봉헌할 때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에서 내 자신을 이웃에게
내주고 베풀어 줄 때 참다운 신앙고백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사순절은 교회 가 의미있게 걸어가는 광야의 길입니다. 고통을
체험하며 그것을 은혜로 성화시키는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또다시 광야로 부르셨습니다.
용기있게 걸어가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어둠을 이겨내는 삶 /박태식 신부님
사랑은 그대들에게 왕관을 씌워주지만 고통의 가시관을 씌우기도 합니다.
사랑은 그대들을 자라게 하지만 그대들의 가지를 쳐내기도 합니다.
사랑은 그대들의 꼭대기로 올라가 햇살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그대들의 가장 연한 가지를 어루만져주지만,
그대들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 뽑힐 정도로 뿌리를 흔들어 대기도 합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있는 글입니다.
처음 연애를 하는 연인들은 사랑이 마냥 설레기만 합니다.
마냥 좋고 달콤할 것만 같고, 웃음만을 가져다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속에 커다란 가시를 숨기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그 가시가 솟아나와 사람의 마음을 사정없이 찔러대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성경의 코헬렛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찾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다’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하나는 붙잡고 싶지만,
다른 하나는 피하고만 싶고 멀리하고만 싶습니다.
하지만 멀리하고 싶어도 멀리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림자는 항상 우리를 따라 다닙니다. 빛이 있는 한 그림자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를 피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어둠을 경험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착각에 쉽게 빠집니다.
‘나에게는 그런 어두운 순간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런 착각을 합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냐고.’ 하지만 둘 다 우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어둠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어둠 속으로 뛰어드셨습니다. 광야라는 그 어둠 속으로
몸소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겨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어둠을 부정하기만 하고, 멀리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이겨내야만 합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이번 사순 시기에는 어둠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도록 해 봅시다.
효과 만점인 화살기도 /양승국 신부님
하루 24시간 내내 수많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부대끼느라 거의
기도할 시간을 내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던 살레시오
회원들을 향해 돈보스코께서는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틈날 때 마다 화살기도를 바치십시오.”
화살기도란 말마디 그대로 화살처럼 순식간에
하느님께로 쏘아 올리는 기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께서는
화살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화살기도는 우리의 사랑을
하느님께 신속히 전달하는 가장 충실한 전령입니다.”
돈보스코께서는 화살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화살기도는 아침기도와 묵상기도의 요약입니다.
아침기도와 묵상기도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는 짧은 기도인데,
이 기도는 즉시 하느님께로 날아갑니다.”
“화살기도는 우리 영혼의 적,
유혹과 악습을 일거에 물리치는 불에 달군 화살입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분들,
하루 24시간이 짧게 여겨지는 분들, 기도할 시간을 따로
내기 어려운 분들에게 화살기도를 권장해드립니다.
화살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바칠 수 있는 특별한 기도입니다.
화살기도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바치기 쉽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화살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루 온종일을
기도 속에 보낼 수도 있습니다. 지속적인 화살기도를 통해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화살기도가 별로 효과 없는 기도,
차원 낮은 기도, 큰 의미 없는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화살기도는 짧지만 핵심적인 기도,
하느님과 나 자신이 직접 통교하는 내밀한 기도이기에
그 효과가 상당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화살기도를 통해
우리의 하루 온종일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화살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루 온종일을
기도 속에 지낼 수 있게 됩니다.
하루 온 종일 성화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돈보스코 기도생활의 뿌리였습니다.
돈보스코께서는 화살기도를 아침기도와 미사,
묵상기도의 연장선상에 두었습니다.
돈보스코께서 하루 온종일 되풀이했던 화살기도는
그가 아침에 체험했던 하느님과의 만남의 열매였습니다.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침기도 중에, 혹은 아침 미사전례 기도문 가운데,
아침 묵상 중에 하느님께서 건네주신 말씀 가운데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문구 하나를 선택합니다.
짧은 기도문을 하나를 직접 만드셔도 좋습니다.
그게 힘들다면 그날 복음을 묵상하는 가운데
가장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한 구절을 선택합니다.
그 구절을 낮 시간 내내 수시로 되풀이해서 암송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린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예를 들면 이런 문구가 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밤낮 부르짖는 백성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시나이다.”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가장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은
자비와 겸손과 찬미와 평화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런 짤막한 기도나 마음에 와 닿는 글귀를
하루 온 종일 되풀이해서 하느님께로 쏘아 올리는 것,
그것이 바로 화살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처럼
밤낮으로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끈질기게 하느님께 매달리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루 온종일 기도 속에 지내라고 부탁하십니다.
바쁜 일과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의 강도가 높은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부단히 기도하라는 것은 무리한 당부가 되겠지요.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화살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휴식시간에, 화장실 갈 때 마다, 1교시 끝날 때 마다,
사는 게 힘들다고 느껴질 때 마다, 피하고 싶은 고통스런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질 때 마다, 숨을 내쉴 때 마다
그 짧은 화살기도를 바침을 통해 우리는 하루 온 종일
기도 속에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화살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된 하루를 보내시길 빕니다.
준비, 땅!!! /최병규신부님
하늘엔 만국기가 걸려 있고, 잡음 섞여 나오는 확성기에서는
위풍당당 행진곡이 울려 퍼지던 날... 운동장 어귀에는 번데기나 솜사탕,
아이스크림과 화약총을 파는 좌판이 즐비했고, 저마다
노란색 혹은 파란색 머리띠를 하고 운동장을 돌아다녔던 날.
1년 중 몇 안 되는 맛있는 김밥을 먹을 수 있던 날. 그날은 바로
운동회 날이었습니다. 운동회의 백미를 꼽으라면 저마다 다르겠지만,
제게는 100미터 달리기였습니다. 석회가루로 그려진 달리기선
오른편에는 어머니와 가족들이 숨죽이며 날 쳐다보고 있고,
일렬횡대로 늘어선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출발선 앞에 서서 어깨를
들이밀던 순간의 적막. '준비, 땅!!!' 출발 소리에 귀 기울이던 그 순간의
긴장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 다시금 성공적으로 달리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번엔 100미터를 달리는 게 아니라,
40일을 달리는 것입니다. 출발 신호 '준비, 땅!!!'은 지난 재의 수요일을
기해 이미 울려 퍼졌습니다. 이제는 대여섯 명이 뛰는 것이
아니라, 10억 명이 넘는 전 세계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하느님을 향해 뛰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이 풍경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겠습니까?
출발선 옆에는 어머니와 가족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호천사와
하늘의 성인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숨죽인 채 날 바라보고 계십니다.
힘껏 뛰라고, 그래서 내 품에 안기라고...
그렇습니다. 사순 시기는 두 팔 벌려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기간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온 힘을 다해
뛰어야 하는 기간이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간교한 악마에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단식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 하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믿음을 기억하며, 기도와 단식과
자선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기간입니다. 온 힘을 다해
주님께로 나아간 40일 동안의 달리기가 끝나면, 주님께서는
우리 손목에 1, 2, 3등이 새겨진 서열 도장을 찍어 주시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영혼에 새겨져 있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의
인호를 보시고 '참 잘했다.'고 꼭 끌어안아 주실 것입니다.
유혹은 내 집착의 그림자 /권철호신부님
무릇 삶이란 살아 있을 때 향기를 간직하고 삶이 다한 자리에
울림으로 자리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기운 한가득 아지랑이 피어나는 그 길가에서 삶의 향기를 간직하기 위해
오늘도 숱한 떨림 속에 자리하는 삶이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그 떨림만큼 울림을 간직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언젠가 선배 신부님께서 기도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해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유독 마음속에 와 닿았던 것은
내 집착의 드러남이 유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도 않는 것에 유혹당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유혹이란
내 집착하는 것의 드러남이고 기도는 그래서 나에게 다가올
유혹의 실체를 확인하게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광야를 향해 나아갑니다.
황량한 모래 언덕만이 자리한 그곳은 간혹 보이는 산조차
산이라 말하기 어색한 흙과 돌로 이루어진 언덕 같은 곳이었을 뿐입니다.
우리네 산이 철따라 옷을 갈아입어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긴다면
이스라엘 광야는 맨몸, 맨살을 속절없이 내보이는 통에
보는 이가 오히려 난처해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자연의 풍요로움에 마음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입고 있던 옷조차 벗어 덮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광야는 빛의 색감이 그 어디보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시시각각 태양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음영이 드러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햇살에 의지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광야를 찾으신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였을 겁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삶, 인간이 자신을 가리고자 입은 온갖 옷들을
벗어 던진 채 오직 하느님의 손길로만 자신을 치장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 숨 쉬는 곳이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란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이 입고 있는 위선과 거짓,
탐욕의 실체를 유혹의 그림자를 통해 확인해 보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한 끼만 굶어도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약함을 마주해야 하는 곳,
채워질 수 없는 탐욕의 창고와 결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욕망의 깊이를
위해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 사순절입니다.
하느님의 따사로운 햇살 한 조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삶이었는데,
어찌하다 이렇게 덧씌워진 욕망들의 두터운 옷들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는지 되돌이켜 보는 시간이 사순절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순절이 은총의 시간일 수 있음은
하느님으로만 지탱되어지고자 하는 우리의 간절함이 자리하기 때문이고,
단지 고통과 고난으로 초대된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손수 시중들기 위해 초대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에게 광야가 그러했듯이….__
예수님은 마스터키 /김훈일 신부님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사람은 너무나 잘 압니다.
아무리 가난하여도 세상을 다 잃는다 하여도 하느님이 함께하시면
그곳에 희망이 있음을 압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겉으로 봐서는
그리 화려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근하고, 꾸준하고, 진실되고, 영원합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각각 한두 가지 그 효용성을 지니지만,
하느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분야에서 그 효용성을 발휘합니다.
그것은 마치 자물쇠와 마스터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특정한 열쇠는 해당되는 자물쇠만 열 수 있지만,
마스터키는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물쇠를 특정한 열쇠로 여는 것이 더 편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쇠를 잃어버릴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 마스터키가 필요합니다.
부모가 있음이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부모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재산이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재산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마스터키가 되어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평소에는 되도록 나의 노력이라는 좋은 열쇠를 가지고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문들을 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마스터키를 늘 호주머니에 넣고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마스터키가 우리의 인생에서 필요할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너무 자주 그 마스터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유혹, 그 뿌리깊은 영혼의 적 /오상선신부님
예수님 또한
우리 보다 앞서 갖가지 유혹을 당하신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유혹에 넘어간 것과 달리
예수님은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제2의 아담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는, 식욕이다.
단식으로 허기져 있을 때 가장 큰 유혹은 음식의 유혹이다.
마귀는 바로 빵으로써 예수님을 유혹한다.
식욕은 이렇게 모든 유혹의 첫번째의 것이다.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은 수도자 자격이 없다>고 하신
어떤 성인의 말이 기억난다.
40대에 가장 신경써야 할 미덕이 <절제>라고 읽었다.
사실 소식하고 음식을 절제할 수 있어야만
모든 욕심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사순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식탐에서 해방되어
영적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주기에 거룩한 시기이다.
둘째 유혹은 소유욕이다.
음식으로 배가 부르게 되면 그 다음으론 소유욕이 발동한다.
우리가 배고플 때는 없이도 잘 살았는데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니 엄청난 소비주의가 발동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식욕이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소유욕으로 넘어가게 된다.
소유욕은 끝이 없다.
비단 큰 집이나 자동차, 물건 등에 대한 소유욕만이 아니라
자식이나 사람에 대한 소유욕도 문제이다.
50대는 특히 이 소유욕을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소유욕에서의 해방을 통해 더욱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50대 신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셋째 유혹은 권력욕(명예욕)이다.
사람이 먹는 것이 해결되고
덧붙여 돈도 많이 벌어 가질 것은 다 가져보고 나면
마지막으로 발동하는 것이 이 권력욕(명예욕)이다.
한국의 정치가들을 보라!
대부분이 이런 전철을 밟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정치가들이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노름에
기대할 필요도 실망할 필요도 없다.
탐욕 덩어리의 사람들 앞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치란 사실 기대할게 못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돈많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무슨 장(長)자리라도 하나 해보려고
덤비는 미성숙한 모습들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미성숙한 욕심을 지닌 장을 맡은 신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가게 되고
이들이 그 장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면
이상한 싸움박질을 벌이기도 한다.
특히 60대 신자들이 조심해야 할 유혹이다.
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유혹을 받으신 것은 아닐까?
우리가 당하게 될 유혹들을 미리 보여주시고
어떻게 이런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지
그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
이 유혹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을 무서워해야 한다.
내 안에 어떤 유혹이 이미 도사리고 있는지 잘 살펴보자.
나는 어떤 음식이든지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미하며 먹고 있는가?
쓸데없는 음식투정을 부리거나 맛있는 음식만 먹으려는
미식가, 탐식가는 아닌가?
내가 갖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때문에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말 없어도 될 것인데도 소유욕 때문에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도 많이 사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남들보다 윗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회장님, 단장님 등
장 소리를 듣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상류층의 부류에 속하기를 바라고
아니 그런 이들과 친분을 갖는 것만으로도
내가 높아졌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우리가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빠졌던 그 뱀의 유혹에 다시 빠지는 길이고
이것을 의식하고 과감히 물리칠 때
예수님처럼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욕심이 없는 나라이리라.
그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소명이라면
우리 먼저 이러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아멘.
기도 없이 죄를 알 수도, 이길 수도 없다 /유영봉 몬시뇰님
묵상길잡이 :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자유란 선택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선택은 항상 갈등과 고뇌를 동반하는 것이며, 이는 항상 유혹을 불러오는 것이다.
기도 없이 죄를 알 수 없고, 죄를 이길 수도 없다.
1. 사순절은 기도에서 시작되고 기도로 끝맺어야 한다.
지난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사순절(四旬節)이란 교회 전례 안에서는 속죄의 재계(齋戒)를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며 부활축일을 준비하는 40일을 말한다.
교회는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신자들의 머리에 재(災)를 뿌리며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하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초대한다.
막연히 "이번 사순절은 좀 잘 지내봐야지!"하는 결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우선 조용히 하느님 앞에 머무는 기도의 시간을 통해
"하느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 모습인가?"를 비춰봐야 한다.
자신의 빚이 얼마인지 모르면 빚을 갚을 수 없듯이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는 그 허물을 벗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인간다움을 손상시키는 벗어버려야 할 악습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서도 먼저 기도의 시간이 요구된다.
때로는 분명히 이것은 죄인데도 죄라고 느껴지지 않는,
아니 죄(罪)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죄(罪)는 인간을 비인간화(非人間化)시키고 왜소(矮小)하게 만드는 것이다.
죄(罪)를 죄(罪)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기도는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마음의 교만은 죄를 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끊어버려야 할 악습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구체적인 결심을 해야한다.
아무리 구체적인 결심을 했더라도 그 결심을 살아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의 결점을 고치기 위한 자신과의 진검승부(眞劍勝負)를 할 때마다
내 자신의 힘만으로는 악(惡)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도를 통한 위로부터 오는 은총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결심을 살고 악습을 쳐 이기기 위해서도 기도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옛날부터 '기도'와 '재계(단식, 고행)'와 '희사'를 속죄의 방법으로 제시해 왔다.
주님과 함께하는 여정 /양승국 신부님
심한 식중독에 걸려 호되게 고생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꼬박 일주일간 링거주사에만 의지한 채
단식을 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님은 매정하게도
제 침대 앞쪽에 '절대금식'이란 팻말을 달아놓았지요.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이틀간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습니다만
사흘이 지나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매끼 식사 시간은 제게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옆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분이 병원밥 투정을 하면서
딱 한 숟가락만 뜬 식판을 물리며 '그냥 내어가라' 할 때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저런, 저런!'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배가 출출해지는 9시 뉴스시간 때마다 통닭이다. 족발이다
몰래 야식을 즐기는 '날라리 환자'들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야속한 사람들이 다 있던지요.
당시 제 머릿속은 온통 평소 제가 좋아하던 음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라면,
푹 고아서 얼큰한 우럭찌개, 매콤한 갈치조림, 그리고 소주 한 잔,
닷새가 지나가면서 헛것이 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가져온 꽃바구니는 싱싱한 사과가 가득 담긴
과일 바구니로 보이면서 입에 침이 다 돌았습니다.
창밖에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보니 달콤한 솜사탕 생각이 나더군요.
인간 생리구조상 하루 세끼 식사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입니다.
단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 욕구인 식욕에 통제를 가함으로써
나름대로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이어트나 건강진단, 질병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단식은 하나의 목적성을 지닙니다.
사순시기 동안 그리스도 신자들은 작은 몸짓이지만
단식을 통해서 예수 수난에 상징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를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들 신앙 여정 주변에는 항상 갖은
유혹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광야를 걸어갈 때
우리가 느끼는 큰 유혹 중 하나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거라,'는 유혹일 것입니다.
아버지 집을 향해 순례를 떠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순례를 지속하기란 어렵습니다.
광야를 향해 출발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횡단하고 광야에 머무르기란 어렵습니다.
세례를 받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살기란 어렵습니다.
수도자로 서원을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서원을 살고
지속적으로 서원에 충실하기란 진정 피곤한 일입니다.
가끔씩 포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포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공통된 성격 유형을 지닙니다.
자신의 의지나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보겠다는 자존심 강한 유형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끼리끼리' 혹은 '나홀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광야를 횡단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 한가운데 언제나 함께 계셨음을 기억합시다.
때로는 불기둥으로, 때로는
장막 안 성궤로 당신 백성들을 보살피셨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에게서 유혹도 많겠지만 그 여정이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하는 은혜로운 나날이 되시길 빕니다.
2011.3.13 사순 제1주일
창세2,7-9;3,1-7 로마5,12-19 마태4,1-11
사탄아, 물러가라 /이수철 신부님
어느 고승의 깨달음의 말씀보다 절절히 와 닿는
어느 세 분 자매들의 말이 지금도 화두처럼 뇌리에 생생합니다.
말 그대로 인생광야 한복판에서 치열히
살아가는 ‘믿음의 戰士’인 자매들입니다.
“앞으로는 기도하는 사람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매일 남편과 하루의 일이 끝나면 함께 기도합니다.
수녀원에 있을 때 보다 더 기도 많이 합니다.
낮 12시부터 3시까지 매일 3시간씩 성체조배를 합니다.”
“몸 하나 먹고 부지하는 게 이리도 힘듭니다.”
저희 수도원에는 금요일 꼭 시간에 맞춰 오시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행려자분들이 있는 데
저는 이분들을 대할 때 마다 구도자들을 대하는 듯
산다는 것의 엄숙함을 깊이 배우곤 합니다.
어느 분의 고백과도 같은 한 구절의 글도 생각납니다.
“세상을 살면서 참 막막할 때가 있다.
밥벌이가 곤란해서 그럴 때도 있고,
하는 일에 신명이 돋지 않아서 그럴 때도 있다.”
모두가 고단한 광야 삶에 대한 토로입니다.
살기위해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
일해야 함은 엄숙한 현실입니다.
살아있는 한 그 누구도 사는 것, 먹는 것,
일하는 것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여,
세상 널려있는 게 일터요,
밥집의 식당이요, 밥벌이의
수단이 된 교회당들입니다.
이 세상 광야에 희망을 잃고 좌절하여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방 어디를 둘러 봐도
빛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맙게도 사순 1주일,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광야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갈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살아야 합니다. 광야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 광야인생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인적이 없는 외딴 곳만 광야가 아니라
막막하고 암담할 때의 마음의 광야, 삶의 광야도 있고,
군중속의 고독이란 말도 있듯이
도시의 광야도 있습니다.
옛날 수도승들은 순교열정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느님을 만나러, 악마와 싸우러 광야에 나갔지만
우리는 굳이 광야를 찾아
밖으로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깊이 들여다보면
하느님을 찾는 모든 구도자들이 광야의 은수자들입니다.
광야의 은수자들처럼 살지 않으면
참으로 살기 어려운
수도승 영성의 보편화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바로 내 몸담고 있는 지금 여기가 광야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은 고독과 침묵의 자리가 광야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하느님
못 만나면
밖에서도 하느님 못 만납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샙니다.
지금 여기서 악마와의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밖에 나가도 이기지 못합니다.
바로 여기 광야에 하느님도 계시고
악마도 있습니다.
광야가 하늘나라입니다.
광야를 떠나선 하늘나라도 없습니다. 하여
광야 같은 수도원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수도원 광야에서 끊임없이 꽃처럼
피어나는 수도자들의 찬미입니다.
모든 ‘찬미의 사람들’은 그대로
광야세상의 꽃 같은 이들입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수도원만이 광야가 아니라
온 세상이 광야이니
온 세상이 수도원입니다.
내 삶의 자리가 광야 수도원이니
모두 광야세상의 수도자 되어 기도 바쳐야
하늘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눈만 열리면 광야가 바로 하늘나라 수도원이요,
무수히 널려있는 하느님 축복의 선물들입니다.
얼마 전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저는 이를 감히 하느님 체험이라 명명합니다.
맑고 푸른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가슴 벌려 심호흡을 하는 중
떠오른 글에 참 행복했습니다.
“가슴에/담고 담아도/끝없는 별들, 가슴에/담고 담아도/끝없는 행복”
정말 이 행복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십자가의 길 중,
몰아치는 쌀쌀한 바람이 지난 후 쏟아지는
밝고 따뜻한 햇볕을 통해
체험한 하느님 사랑입니다.
“참/밝다/따뜻하다/위로부터 /쏟아지는 햇볕 사랑
참/밝다/따뜻하다/위로부터/쏟아지는 하느님 사랑”
우리가 살고 있는 광야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광야에서 하늘나라를 살게 합니다.
겪어야 합니다. 악마의 유혹을 겪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신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 따라 살 때
악마의 유혹에 백전백승입니다.
도대체 유혹을 떠나 살 곳은
이 세상 어디도 없습니다.
사실 유혹이 없이는
내적 성장도 성숙도 없습니다.
평생 철부지, 미숙아로 살아야 합니다.
그 유토피아
이상향으로 꼽는
에덴동산에도
뱀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악마는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에, 십자가 뒤에,
내 마음 안에 숨어 있습니다.
도고마성,
도가 높은 곳에 악마의 유혹도 많습니다.
교활한 악마들은 결코 매력 없는
게으른 이들을 유혹하느라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않습니다.
부지런하고 충실한
매력적인 이들을 유혹하기위해
전력투구합니다.
유혹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열심히 산다는 반증입니다.
한 쪽 어깨 위에 천사가 있다면,
한 쪽 어깨 위에는
날 유혹하는 악마가 있습니다.
하와나 예수님이 들은 악마의 유혹은
바로 내면에서 들려온,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습니다.
우리도 때로 내면에서 이런 악마의
유혹의 소리들을 듣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우리 내면은
세상의 축소판과도 같고
천사와 악마의
싸움터와도 같습니다. 하여,
악마의 유혹을 겪지 않게 기도하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바치는 주의 기도입니다.
바로 이 광야 유혹의 중심에
악마의 온갖 유혹을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자리 잡고 계심이
참으로 큰 위로와 힘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유혹과 수난을 당하신 주 그리스도께 어서 와 조배 드리세”
바로 이 주 그리스도님이 고마워
새벽 성무일도 시 우렁차게
초대 송을 노래한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창세기의 하와와 아담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지만
예수님은 지체 없이 세 차례나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하와와 아담 부부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결과가
자기 식대로의 이분법적
선악의 판단 잣대입니다.
이 평생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유혹에
빠지지 않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악마의 유혹을
겪지 않게 해 주십사 기도할 게 아니라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사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악마가 유혹해도 거들 떠 보지 않으면
악마도 힘쓰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정 위태하다 싶을 때 예수님처럼 일갈하여
악마들을 퇴치하는 것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이래서 평생 말씀 공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거룩한 교회의 성사들을 통해
하느님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광야에서
악마의 모든 유혹을
하느님 말씀의 무기로 물리칩니다.
하느님 말씀의 무기가 아니곤 악마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악마의 정체는
낱낱이 폭로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보다 더 좋은 분이 없는 데
도대체 하느님과 사는 분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우리를
어찌 사탄이 유혹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돌들로 빵이 되게 해 보라는 악마의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보기 좋게 물리친 주님이십니다.
밤낮 사십일의 단식으로 시장하실 때에도
하느님으로,
하느님 말씀으로 충만하셨기에
빵의 유혹을, 탐욕을
이기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라는,
한 번 기적을 일으켜 보라는 허영을
부추기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신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이시지
결코 우리의 욕구 충족의
대상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아끼시는
예수님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얼마나 통쾌한 주님의 승리인지요.
예수님의 3전 3승이요 악마의 3전3패입니다.
자기에게 절하면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교만의 유혹을 극복한 예수님입니다.
악마의 유혹에 빠져 밥에, 돈에, 기적에,
부귀영화에 영혼을 판 영혼들,
영혼 없는 사람들
날로 늘어나는 추세가 아닙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살 때
이 말씀의 힘이 악마를 물리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곤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는 없습니다.
인생 광야 중심 한 복판에
유혹을 이기신 주님을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인지요.
만일 이 광야 인생 중심에 바라볼
희망의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어둡고 춥겠는지요.
그러니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힘없이 늘어진 손을 쳐들고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악마의 온갖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신
그분을 생각하면
낙심하여
지쳐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광야의 사순시기, 악마의 유혹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풍성한 은총을 주십니다. 아멘.
사랑의 바다에 빠져라 /강영구신부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그대에게
가장 큰 계명(誡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사랑에로 초대(招待)합니다.
계명(誡命)은 그릇입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담는 그릇입니다.
계명(誡命)은 너와 나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입니다.
계명은 바른 삶을 위한 길잡이입니다.
계명이라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출렁거리던 나도 잠잠해질 수 있습니다.
계명이라는 그릇에 담겨 쏟아지지 않고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계명의 인도를 따라 가면 사랑이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듭니다.
바다는 흘러드는 모든 것들을 말없이 받아들입니다.
바다는 온갖 쓰레기와 더럽게 오염된 강물들을 받아들이고
정화(淨化)의 과정을 거쳐서 새 생명을 선사합니다.
하느님은 바다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의 바다에 빠지라는 말씀입니다.
바다에 빠지면 죽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의 바다에 빠져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새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