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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우정(洪宇定)에 대하여
1593년(선조 26)∼1654년(효종 5).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계곡(桂谷).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가신(可臣)이고, 아버지는 한성서윤(漢城庶尹) 영(榮)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허성(許筬)의 딸이다.
1614년(광해군 6) 진사가 되었으나 1616년 장인 해주목사 최기(崔沂)가 해주옥사의
역적괴수로 몰려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천안에 부처되었다가 병이 중하여 석방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모든 것이 무고로 드러났으나 이어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자 태백산 속에 은거하매, 영남인사들은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칭하였다.
그 절의(節義)가 탁월함이 조정에 알려져 태인현감·공조좌랑·사부(師傅) 등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두곡집》 5권이 있다.
1820년(순조 20)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개절(介節)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英祖實錄
純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荷潭錄
凝川日記
□ 奉化 介節公 洪宇定 遺墟碑(봉화 개절공 홍우정 유허비)
경북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두동에 있다. 1748년 후세 사림들이 杜谷을 기리며 세웠다.
두곡 홍우정(1593~1654)은 조선중기의 문신 홍가신(洪可臣1541~1615)의 손자다.
그의 부친 홍영(洪榮1567~1624)은 한성부 서윤(庶尹종4품)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홍우정은 인조의 삼전도 굴욕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절의를 지키려 경북 봉화에 은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함께 은둔한 영의정 홍섬의 증손 홍석(洪錫),송강 정철의 손자 정양(鄭瀁),심의겸의 손자 심장세(沈長世), 참판 강진의 현손 강흡(姜洽)등 네 선비와 함께 太白五賢으로 불렸다.
碑에는
“대명천하무가객(大明天下無家喀 :명나라 천하에 집이 없는 나그네가 되어)
태백산중유발승(太白山中有髮僧): 태백산중에서 중처럼 살았다”이라는 두곡의 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영조가 이시를 보고 감복, 이조참의에 추증하고 ‘崇禎處士’라는 칭호를 내렸다. 순조때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이듬해 介節公이란 시호를 받는다.
□ 홍가신(洪可臣)
1541(중종 36)~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아버지는 온(昷)이며,
어머니는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민순(閔純)에게 수학했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했고, 1571년(선조 4) 강릉참봉이 된 이래 형조좌랑·지평·안산군수·
수원부사 등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그와 친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1593년 파주목사, 다음해
홍주목사가 되었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홍주를
방어하고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으로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때 장례원정·지의금부사·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610년 은퇴했다.
그의 시는 충직한 정의군자로서의 기개가 드러나면서도 감성이 뛰어나 품격 높은 것으로 인정받았고,
임진왜란중에 올린 〈적패퇴봉사 賊敗退封事〉는 치국(治國)의 대강(大綱)과 급무(急務)를 조목조목
논한 명문이다. 이기(理氣)의 본질을 우주의 본질로서 간파하여 기와 이로 보고, 기와 이의 순환과정에서 만물이 생성하며 음양으로 조화·분리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만전집〉·〈만전당만록〉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壯)이다.
□ 洪可臣(홍가신) 詩중에서| 아름다운 글
出山遊廣德山(출산유광덕산)산에서 나와 광덕산에 놀다
信宿禪窓月(신숙선창월) : 달 밝은 절 방에 묵고서
歸驢駐翠岑(귀려주취잠) : 돌아오던 나귀가 푸른 멧부리에 머문다.
應知夜來夢(응지야래몽) : 지난밤 꿈을 응당 알아
還到石門深(환도석문심) : 되돌아오니 돌문은 깊기도 하여라.
別尹泰亨(별윤태형)윤태형과 이별하고
別後長相思(별후장상사) : 이별 한 후 오랫동안 서로 생각하며
相思何日忘(상사하일망) : 생각하는 마음 언제 잊을 수 있겠는가.
黃牋數行字(황전수행자) : 편지에 쓰인 몇 줄의 글자
讀罷斷人腸(독파단인장) : 읽고나니 사람의 간장을 끊는구나.
강촌모경(江村暮景)강촌의 저녁
江樹遠芊芊(강수원천천) : 강가의 나무 촘촘히 아득하고
江村生暮煙(강촌생모연) : 강촌의 저녁,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른다.
漁人獨罷釣(어인독파조) : 어부는 홀로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明月滿空船(명월만공선) : 밝은 달빛 빈 배에 가득하다.
詠竹(영죽)대나무를 노래함
手種南墻竹(수종남장죽) : 남쪽 담장에 몇 종류 대나무
今成數百竿(금성수백간) : 지금은 수백 줄기가 되었구나.
婆娑月庭影(파사월정영) : 인간세상 달빛 아래 뜰에 그림자 드리우고
留待主人還(류대주인환) : 주인 돌아오기를 머물러 기다린다.
蕩春臺(탕춘대)-洪可臣(홍가신)
芳草溪邊坐(방초계변좌) : 방초 가득한 개울가에 앉으니
靑山影裏身(청산영리신) : 청산의 그림자 속에 이 몸이 있네.
斜陽無限恨(사양무한한) : 지는 해가 무한이 한스러운
殘柳故宮春(잔류고궁춘) : 버드나무만 남은 고궁의 봄이여.
菊(국)국화
爲愛秋香晩(위애추향만) : 늦가을 향기 좋기도 해라
樽前折一枝(준전절일지) : 술잔 앞에 한 가지 꺾어두었네.
海雲千里隔(해운천리격) : 바다 구름 천리 먼 곳이라
無路贈相思(무로증상사) : 드리어 그리워할 길이 없도다.
詠老松(영로송)노송을 노래하다
春雨滿春城(춘우만춘성) : 봄비가 성에 가득 내리니
紅綠各得時(홍록각득시) : 꽃과 나무들 때를 만났구나.
老松獨偃蹇(로송독언건) : 노송만 누운 채로 멈춰서
蒼然無娟姿(창연무연자) : 고운 자태 없이 푸르기만 하다
□ [종가기행 ⑦] 杜谷 洪宇定
인조의 '삼전도 치욕'에 벼슬 버리고 은거
남양 홍씨 두곡 홍우정
1595년 (선조28) - 1656년 (효종7)
▲ 유허비.
‘낙향한 뒤로 머리에는 벙거지를 쓰고 해진 배잠방이에 짚신까지 신었다.
그리고 망태기를 둘러메고 장사치 등 하류배들과 섞여 살았다.
때로는 북쪽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렸으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두곡 문집에 보이는 그의 고결한 모습의 한 단편이다. 철저한 진은(眞隱)으로서의 자기 성찰과
은둔의 삶이었다.
두곡은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요 서윤(庶尹) 홍영(洪榮)의 아들이며 허균의 형님인 허성의 외손자이다.
만전당이 “우리집에 필시 이인(異人)이 태어날 것이다”라는 현몽을 한 후 얼마 안되어 태어난 손자가 꿈에 본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장인은 해주목사를 지낸 최기(崔沂)이다. 홍우정은 5형제 중 맏이며 아우는 홍우원(1605-1687)인데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 대사성, 이조판서 등 요직을 지냈다.
남파 홍우원은 허목, 윤휴, 권대운, 이봉징 등과 함께 남인 중에도 주류인 청남(淸南)을 형성해 서인은
물론 같은 남인인 허적, 민희 등 탁남(濁南) 세력과도 대립하였다. 또 아우 홍우량(洪宇亮)은 무과에
급제해 제주목사와 수사(水使)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들었다.
중앙 정치무대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문 배경과 학문적 기반이 있었음에도
두곡은 인조의 삼전도 치욕에 부끄러움을 느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며 한양에서 산간벽지 봉화 뒤뜨물 마을로 은둔했다.
이후 그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다.
내 차리리 죽을지언정 불의와 타협해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게
선생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두곡을 기리는 숭정처사유허비는 1748년(영조24) 사림(士林)의 뜻을 모아 마을에 세워졌다.
특히 이 비의 전면에는 사론(士論)에 따라
‘대명천하무가객(大明天下無家客) 태백산중유발승(太白山中有髮僧)’이라는
선생의 시 귀절을 좌우면에 새겨 놓았다.
명나라 천하에 집이 없는 나그네가 되어 태백산 속에 스님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이다.
살아서는 철저하게 벼슬살이를 거부했던 선생은 사후에 더욱 빛난 분이다. 인조11년 사재감 직장에 잠깐 나아간 것이 벼슬살이의 전부였다. 그러나 사후인 영조22년, 이조판서 원경하가 경연에서 선생의 절의를 아뢰며 ‘대명천하무가객, 태백산중유발승’이라는 시를 읊자 영조는 무릎을 치며 칭찬하고 곧바로 추증을 명했다.
그 결과 이조참의로 추증이 이루어지고 국왕이 직접 ‘숭정처사’라는 칭호를 내렸다.
순조16년(1816)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이듬해에 개절공(介節公)이란 시호까지 받아
구봉사(九峯祠)와 문산사(文山祠)에 봉안되었다.
묘갈명은 미수 허목, 묘지명은 갈암 이현일이, 전(傳)은 눌은 이광정, 행장은 대산 이상정,
구봉사 봉안문은 옥천 조덕린, 문산사 봉안문은 소산 이광정이 각각 지었는데
이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던 대정치가요 명유(名儒)였다.
이들의 글을 읽지 않더라도 두곡의 위상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사료는 많다.
비워서 채우는 삶을 살았고, 물러나서 청사에 길이 남은
두곡 선생은 오늘날 이 시대의 사표(師表)라 아니할 수 없다.
두곡 문집
충신의 절의와 탈속한 작품 가득
두곡집은 1824년(순조24년)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간행된 5권 2책과 현 종손의 부친이
석판본으로 중간(重刊)한 두 종류가 남아 있다. 문집에는 충신의 절의가 절절이 느껴지는 주옥 같은
문장과 탈속한 시 작품들이 가득하다. 현대인이 읽더라도 그 서정성과 꼿꼿한 정신에 놀라게 된다.
그중의 하나가 도중음(道中吟)이란 작품이다.
대지는 산하 만리 눈내려 덮였는데
하늘은 서북풍 한바탕 휘몰아 치네
행인들마저 끊긴 이 석양 길을
홀로 지친 나귈 몰아 동으로 가네.
地負山河萬里雪
天噓西北一箕風
行人已盡斜陽外
獨策玄黃猶向東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곡의 전집은 한국문집총간에도 실려 있지 않고 국역 출간도 안돼 일반인이 쉽게
접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종손 혼자 힘만으로는 조상의 문집을 번역해 후손은 물론 사회에 널리 읽히려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난관에 봉착한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국역 출간을 어느 종손이 선뜻
나서겠는가.
그래서 물질적 기반이 종가에 없다면 부자 지손들이 나서야 한다. 지손들이 모여 머리를 맞댄다면 충분히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조상 현양 사업이다.
이해관계를 넘어 조상을 받들고 알리는 것은 문중의 단합과 후세 뿌리교육에도 큰 도움을 주는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느 종가나 그러하지만 문중의 인적 네트워크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또한 조상 현양 사업을 종손에게 떼미는 지손들이 많다. 이름난 문중의 불천위 제사에조차 참사하는 이가 십여 명 남짓한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다행히 두곡 문집 국역 작업은 후손에 의해 격조있게 완성되었다고 한다. 문집을 쉬운 우리말로 옮겨
적으면서 보냈을 세월과 고초를 생각하면 경의를 표할 일이다.
□ 태백오현
은둔의 삶 산 조선의 지성 다섯 명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평소 오랑캐라 칭했던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다.
이는 조선의 지성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래서 후일 ‘태백오현’으로 불리는 서울 출신의 선비 다섯 명이 봉화 문수산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단순히 이름없는 선비나 말단 관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의정 인재 홍섬의 증손 손우당 홍석, 송강 정철의 손자인 포옹 정양,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인
각금당 심장세,참판 강징의 현손(玄孫)인 잠은 감흡과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 두곡 홍우정 다섯 사람이 그들이다.
오현은 춘양 노리, 도심, 모래골, 버정이, 뒤뜨물 등에 터를 잡아 정착했으니 서로 간에 거리는 멀어야
수십 리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빈번하게 교류했는데 그 주된 만남의 장소가 사덕암과 그 위에 있는
와선대(臥仙臺)다. 춘양면 학산리(鶴山里) 골띠마을의 와선대 아래로 폭포는 그들의 충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처럼 정겹게 떨어지고 있다.
이들 태백오현의 후손들이 와선정계(契)를 결성하여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는 모습은 영남 지역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끈끈한 유대이다. 다섯 사람의 그때 그 약속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경북 봉화군 문수산 아래 산수유 마을이 있다. 봄에는 노랗게 산수유가 물들고 가을에는 마을 전체가
발갛게 불탄다. 산수유 고목은 10여 그루가 넘는데, 여름에는 느티나무처럼 시원한 그늘을 만든다.
그래서 마을이 산수유를 품고 있는지 아니면 산수유가 마을을 안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과 하나가
된 평화스러운 곳이다.
마을의 생김새도 또한 특이하다. 앞뒤가 산으로 꽉 막혀 있다. 이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을명에
막힐 두(杜)자가 들어 있다. ‘막힌 마을’이다. 그러니 앞이 트여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이방인에게 신기한 것은 그 막힘으로 인한 답답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편안함이
가슴 속에 스며들 정도다. 행정명으로는 봉성면(鳳城面) 동양리(桐陽里)며 더 작게 가르면 후곡(後谷)마을, 또는 뒤뜨물이다.
400년 전 이곳에 터를 잡은 이가 절의를 상징하는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이름 높은 개절공(介節公)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이다. 두곡은 연산군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참의공 한(瀚)의 5대손이요 선조 때의 명신 문장공(文莊公) 홍가신(洪可臣)의 손자이기도 하다. 명신(名臣)의 자손에 명절(名節)이 난 경우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 안동상공회의소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두곡 선생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근자에 만전당 홍가신의 유촉지를 찾으면서 다시 한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두곡 홍우정의 종손을 찾아 나섰다.
▲ 남양 홍씨 종손 홍대교씨.
16대 종손은 홍대교(洪大敎, 1939년생)씨로 안동사범학교 10회 졸업생이며 평생 초등학교에 봉직하다
2000년 8월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원로 교육자다. 42년 5개월을 봉화에서만 근무했다는 종손의 외가는
안동 부포의 진성 이씨요 처가는 경주 양동(良洞)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 종가다.
진외가(陳外家: 아버지의 외가)는 안동 하회 묵계댁(默溪宅)이다. 그러니 종부가 회재 종가(종손 이지락의 고모부가 홍대교다)의 종녀(宗女)라는 말이다. 영남 명문가의 통혼(通婚)의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 짐작케 해준다.
종손의 부친 홍성원(洪性源)은 1975년 73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선친은 글씨에 뛰어났는데 태백오현(太白五賢)의 한 사람인 각금당 심장세 선생의 묘비문과 두곡 선생의 문집 석판본을 썼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느 종가가 그러하듯이 두곡 종가에도 한때 가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소개령마저 발동돼 험준한 산악지대였던 이 마을에 남아 있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소개령으로 지금 살고 있는 봉화초등학교 앞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이사온 것이 74년 전. 이제 환고향(還故鄕)이다. 평소 종손은 조상이 살던 마을로 돌아가 선조의 얼을 계승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는데 그 숙원을 푼 것이다.
선조의 얼 계승은 마을에 종택을 짓는 일로 시작했다. 옥류암 정자 옆에다 터를 다져 토종 목재로 25평의 아담한 한옥을 지었는데 이제 완공을 앞두고 있다. 몇 번씩이나 ‘74년 만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그동안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옥류암은 홍우성 선생이 두곡마을 맑은 샘물이 흘러내리던 문수산 기슭에 은거하며 지었던 정자. 그런데 이 옥류암에는 현판이 없다. 누군가 그 현판을 떼간 것이다. 도난당한 옥류암 현판은 미수 허목이 특유의 유려한 필치로 쓴 가로120cm, 세로 60cm나 되는 대작이다.
▲ 옥류암 현판 미수 허목.
그런데 필자는 일전에 서울 인사동 모 골동품 수집가의 방에서 몸통과 생이별한 옥류암 현판을 상면할 수 있었다. 두곡의 평생 지기(知己)였던 원두표(元斗杓, 자 子建)의 멋스러운 시 한 편을 새긴 아담한 현판도 함께 만났다.
"옥류천 가 처사의 암자, 그 청유(淸幽)함은 영남에서 으뜸일세, 연꽃이며 구기자, 국화며 매화와 송죽을 심었는데, 도연명이 은거했던 그곳 보다 멋있어" 친구가 살고 있는 옥류암을 노래한 시이다.
수집가가 그것을 구입한 사연을 들어보니 글씨가 너무 좋아 내용도 모르고 경매장에서 거금을 주고 산 것이라 했다. 그러나 수집가의 마음이야 이해되지만 아무리 좋은 글씨라도 응당 그것이 있어야 할 곳을 떠나 외롭게 존재한다면 그 진가는 떨어지는 것.
아름다운 신록의 숲속에서 울음 우는 뻐꾸기 소리와 물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라진 현판을 애타게 기다리는 옥류암 정자가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일찍 신학문을 접하고 평생을 초등 교육에 봉사하느라 한학이나 보학(譜學)에 정통하지 못했다”는 종손은 “타 문중과의 교류도 폭넓지 못해 아쉽다”는 회한도 덧붙였다. 하지만 종택 사랑방 한 켠에 마련된 서책이나 문서 더미들을 보며 그런 말이 겸사(謙辭)라 생각이 든다.
17대 종손이 될 맏 자제에 대해 물었다. 종손은 부모로서 자식의 진로 지도를 잘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올해 마흔네 살인데요, 제가 평생 교직생활을 했으니 자식은 넓은 세상에 나가 잘 살라고 이공계(영남대 공업화학과)로 보냈어요. 지금은 수원에 살고 있지요. 지나고 보니 인문학을 배우도록 하는 건데···.”
자식에 대한 걱정은 종가의 종손도 예외일 수 없지만 자식이 자신을 이어 종택을 지켰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종손의 선친도 외동, 자신도 외동이라서 가까운 핏줄이 6촌이라는 말도 했는데, 집안이 고적(孤寂)해 걱정이라는 의미다.
“우리 선조께서는 정말 깨끗하게 사셨습니다. 서울에서 이곳 태백 산중으로 내려오실 때 가재도구 하나도 가져오시지 않았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선조께서 쓰시던 유품이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덧붙여 종손은 “두곡은 우리 선조의 호와 똑같은 마을인데 참 산 좋고 물 맑은 곳입니다. 개울에 가보면
아직도 가재가 살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라고 자랑한다.
가재가 사는 마을이라는 말을 들으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어릴 적 가재를 잡은 기억까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도 산골에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두곡은 세파에 오염되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된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내 종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어요. 관에서 마을에다 무슨 전원단지를 만든다고 야단입니다.” 분노를 내뿜는다.
종손의 말에 따르면 봉화군은 ‘대도시 전원생활을 꿈꾸는 은퇴자들을 위한 파인토피아 전원단지 조성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5만~ 6만평 규모에 막대한 국비와 군비를 투자한다는 마스터 플랜이다.
민간자본을 유치해 단지 내에는 도로, 상하수도, 주차장, 오폐수처리장, 클럽하우스, 바비큐장, 한방웰빙체험장 등을 설치할 계획이라고도 한다. 사업 기간은 2007-2009년.
조용하던 마을은 이제 거대한 개발의 회오리가 닥칠 운명이다. 종손의 분개를 보니 주민의 동의를 모두
얻지 못한 것 같다.
종손은 그래서 요즈음 잠이 안온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사업을 구상한 군 당국과 공무원을 향한 원망이 대단했다. “모든 것을 걸고 마을을 지키겠다”며 반대의지도 결연하다.
개발을 하면 선대(先代) 토지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종가에 막대한 금전적 보상이 따르겠지만 종손은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고 한다. 현대인이 편하게 살고자 아름다운 자연을 누더기로 만든다면 이곳을
찾아와 은둔한 조상들에게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다. 환경훼손의 불의를 거부하는 종손에게 만전당과 두곡 선생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피는 못 속인다’고 말했는가 보다.
첫댓글 무엇보다 아름다운 한시(漢詩)에 오래 눈길 머뭅니다.
백석님읭 글 잘 보고갑니다. 몇번을 봐야 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