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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
바다와 땅의 조화가 돋보이는 섬
鳥島
조도는 목포와의 거리 100km, 진도의 팽목항에서 9km 떨어진 조도군도에서 중심지에 위치한다. 동서 7km, 남북 5km 섬으로 남북의 폭은 약 2.8km이다. 면적 10.55km2, 해안선 길이 38km이며 정상에는 돈대산(234m)이 있다. 인구는 1973년 895가구 5360명, 초등학생이 1,321명, 중학생이 418명이었다. 지금은 668가구 1242명(2014년 기준)이다. 현재 초등학생 48명, 중학생 30명, 고등학생 27명이 공부를 하고 있다. 참고로 조도면의 분교들은 거의 폐쇄되고 현재 서거차도분교 6명, 관사도분교 3명, 대마도분교 1명 등 세 곳의 분교가 운영되고 있다.
조도면은 전국에서 가장 섬이 많고 넓은 행정구역을 가졌다. 조도군도는 유인도 35개, 무인도 119개로 총 154개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목포에서 100km 떨어져 있는 이곳 조도면에서 가장 큰 섬은 면소재지가 있는 하조도이며, 그 다음은 하조도와 연륙된 상조도이다. 그밖에 관광지로 유명한 관매도, 가사도가 큰 섬이며 나머지 섬들은 거의 비슷하다.
조도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먼 바다에 연해 있어서 바람이 거세고 물살이 빠르며 파도가 높은 것이다. 한자 표기인 조도(鳥島)를 풀이하면 ‘새섬’인데 새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새떼들처럼 많은 섬들이 바다에 펼쳐져 있다 하여 조도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어미섬 진도는 육지를 연상할 정도로 큰 섬이다. 그러나 커다란 섬에서 태어난 진도 사람들도 조도를 가본 이들이 정작 많지 않다고 한다. 간혹 조도면의 섬을 여행한다 해도 면소재지인 하조도와 해수욕장이 있는 관매도 정도에 불과하다. 조도의 중심지 하조도에 태어났다 해도 조도의 부속섬으로 멀리 떨어진 독거도, 맹골도, 서거차도, 외병도 등 수많은 섬들을 대부분 가보지 못하고 이름만 들어본 경우가 많다. 그만큼 이들 섬들의 인구가 적고 접근성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에는 파도가 높고 어장이 형성되지 않아 섬이 텅 빌 정도이다.
이렇듯 운항으로 수지가 맞지 않아 정기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섬은 정부의 명령항로를 운항하는 ‘새마을호’를 투입하고 있으며, 일반 여객선을 차도선(차를 싣고 건너는 배)으로 바꾸어 주었다.
1997년에 서로 마주하고 있는 하조도와 상조도 간을 잇는 연도교가 개통되어 한 섬처럼 왕래하고 있다. 면소재지인 하조도에 가면 아름다운 정경에 푹 빠져든다. 바다 위에 올망졸망 떠 있는 섬들 사이로 고깃배들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미끄러져 가고, 고개를 돌려 섬을 바라보면 한적한 시골 농가의 전원 풍경이 정겹다. 산이 높아 바람도 상쾌하다.
주변의 많은 섬들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어 풍랑이 거센 겨울에도 상·하조도 주변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잔잔한 바다에서 조도 사람들은 각종 해조류 및 수산물 양식업을 별 어려움 없이 하고 있다.
하조도는 1700년대 중엽에 진도군 의신면에서 인동 장씨 장동보가 처음으로 섬에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 밀양 박씨 박필봉과 김해 김씨, 나주 이씨, 달성 배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조도 신육리 읍구동네 고개에 3기의 지석묘가 있으며 유토동네 앞에는 선돌도 있다. 석기시대 전석도 수습되는 등 석기시대 때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어림잡아 보면 하조도의 역사는 선사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신육리 입구에는 고려 때의 고분이 있다. 조선 중기에 남도 만호진 별장이 배치되었으며 신금산이 돈대로 쓰였다. 정조 때에는 소재지인 창리에 조도창이 있었다. 이미 이때 이 지역 해산물을 저장하는 창고가 생긴 것이다. 도감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동구리 성재산에는 성터가 남아 있다.
이처럼 조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공도정책이 해제된 조선 중엽부터였다.
진도와 조도에 관련된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다. 200여 년 전인 1816년, 청나라 산성동 위해(威海)에 갔다가 돌아가던 영국 함대 3척이 이곳을 거쳐간 적이 있다. 그 후, 이 함대 중 리라호 선장인 바실 헐은 『한국 서해안과 유구도 탐색 항해 전말서』라는 보고서에 진도와 조도를 언급하였다. 그는 도리산 전망대에 올라 크고 작은 섬들이 새처럼 곳곳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진도 조도해역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보고하였다.
그가 남긴 ‘항해기(1818년 발행)’ 일부를 보면 ‘산마루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섬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들을 세어보려 애를 썼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20개는 되는 듯했다.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3일간의 보고서에서 조도 사람들을 만나 조도 말과 생활습관을 기록해두었고, 섬이름을 자기네들 관점에서 붙이기까지 했다. 즉, 하조도는 앰허스트 섬, 상조도는 몬트럴 섬, 외병도는 샴록 섬, 내병도는 지스틀 섬이라고 명명하고 지역을 표기해두었다.
이처럼 조도는 국제적으로 일찍부터 알려졌으며, 하조도는 요지로서 영국에 더 잘 알려진 섬이 되었다. 70년 뒤인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후에 청나라와 협상하면서 홍콩처럼 일본을 의식한 군사적 요새지로 진도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 당시 조선 정부와 협상 끝에 진도를 영국에 빌려줬더라면 진도는 지금의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변해 있지 않을까. 진도 사람들은 서양문명 속에서 모두 영어를 사용하는 특구가 되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홍콩이 중국에 다시 반환되는 것을 계기로 중국의 거점이자 중추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역사에 만일이라는 가정은 없겠지만 섬 지방의 발전을 위한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20년 넘게 전국의 섬을 답사하였다. 이 가운데 조도처럼 신비롭고 특별한 섬은 많지 않았다. 필자뿐 아니라 나그네들의 발길을 묶어두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춘 섬이라는 생각이다. 역사와 문화, 특히 민속문화가 특출하며 문화적 향기가 짙은 곳이다. 아름다운 자연은 지친 심신을 안온하게 해준다. 풍부한 해산물 등 먹을거리가 널려 있어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조도는 옛날부터 바다에 ‘고기 반, 물 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어종이 풍부하였다. 조도는 외해에 속한 곳이라 오랫동안 범선으로 연안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살아가는 어선업자가 전국적으로 가장 많았다. 해방 후 당시 면사무소 근무했던 박종수 씨의 증언에 의하면, 조도에 닻배(닻으로 고정한 배에서 그물을 이용한 어선) 32척, 투망 51척, 중선(중형 어선) 10척이 있었는데, 모두 100여 척 정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조도의 어선업자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풍어시절, 전국 항·포구 어디에서나 “조도갈 이! 조도갈 이!”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다. ‘조도에 갈 인력은 내 배에 같이 타고 가자’는 뜻으로 “조도갈 이! 조도갈 이!” 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지금도 목포, 해남, 신안, 완도 일대에서는 조도 사람들을 일컫는 별명처럼 쓰이고 있다고 한다.
옛날 조도 뱃사람들이 전국 바다를 누빌 때에는 어느 포구에서나 조도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당시 조도 사람들은 비교적 어로기술이 숙련된 기능인이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전국 어디서나 조도 어부라면 그 어로기술을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처럼 유명했던 조도 사람들도 어탐기 출현, 어선의 동력화 등 어로장비의 진화, 원양어업의 발달로 더 이상 ‘조도갈이’로서의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도 지방의 풍어의 명성 또한 퇴색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도갈이’의 역사는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진도 팽목에서 차도선을 타면 조도의 관문인 어류포(魚遊浦)항에 닿는다. 물고기를 흔하게 볼 수 있는 항구라는 의미로 어류포항이라 했다 한다. ‘창유(倉遊)’항이라고도 불리는 어류포항은 면소재지로서 또 다른 여러 섬으로 뱃길이 연결된다.
풍랑주의보라도 내릴라치면 특히 겨울에는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어류포항이나 진도 팽목항에서 발만 동동 구르면서 가족상봉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기도 한 곳이다. 배가 출항을 하는가 출항하지 못하는가 조바심을 가지고 서성이던 곳이 바로 추억의 어류포 선착장이다. 처자식을 육지에 놓고 와서 가르치는 선생님들과 공무원들은 바람이 불어서 발이 묶이면 다시 한 주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험상궂은 날씨가 얼마나 이들을 힘들게 하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정도란다. 주말이면 가장 큰 관심사는 배가 정상적으로 가는지 여부이다. 그래서 카페리호 선장의 휴대전화 번호는 매우 중요하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TV 프로그램 중 저녁 9시뉴스 마지막 부분의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어류포 항구는 지방어항으로 조도의 대표적인 항구이다. 연안어업을 위한 기지로 1972년에 지방어항(구 제2종 어항)으로 지정되었다. 목포항 ↔ 어류포항, 진도 팽목항 ↔ 어류포항을 오가는 여객선이 운행되고 있다. 진도군 남단의 팽목항에서 차를 실을 수 있는 여객선을 타면 약 30여 분 만에 하조도의 어류포항에 닿는다. 하루 5회 정도 여객선이 왕복 운항되고 있다. 목포항에서 조도행 신해7호가 출항하지만 이 배는 이제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진도와 목포간 육로의 발달로 1시간 반 정도이면 목포에 도착하지만 배는 3~4시간이나 걸리니 바쁜 세상에 배탈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아직까지 배는 다니고 있다.
이곳에는 방파제(68m), 선착장(82m), 물양장을 비롯하여 선박을 접안할 수 있는 부잔교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지방의 제2종 어항답게 조그마한 고깃배들이 제법 모여 있다. 방파제 왼쪽, 즉 내해 쪽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지만 바깥쪽은 경사제이다. 객선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배려이다. 반듯하게 들어선 매표소와 선원 대기실, 해상국립공원 분소에다 관광안내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합실 입구에 배 시간표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진도 팽목행 여객선이 하루에 5회 있다.
대합실 앞에 국립공원 조도분소가 위치해 있다. 조도분소 앞 오른쪽으로 해안도로가 나 있다. 이 도로를 따라가면 활목마을을 거쳐 조도대교로 이어진다. 조도분소 위쪽으로 남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위쪽 길과 조도분소에서 바로 이어지는 큰 길로 나누어져 있지만, 나중에 두 길은 만나게 되어 있다. 이 두 길 양쪽에 있는 집들이 민가의 전부이다.
윗길은 높은 지대라서 옹벽으로 되어 있는 집들과 집 뒤로 밭이 딸려 있는 구조이다. 낮은 지대의 집들은 주로 바다와 연해 있다. 길 따라 계속 가다보면 진도교육지원청 조도출장소와 제법 넓은 공간에 있는 쉼터정자 등이 보인다.
윗길과 큰길이 만나는 도로 합류지점에 ‘어류포리’라 쓰여 있는 마을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서 경사제가 있는 방파제와 함께 물양장을 갖춘 작은 포구가 보인다. 농수산물 냉장창고도 함께 서 있다. 옛날 선착장이다. 한때는 조기어장으로 유명하였으나 최근에는 어획량이 줄어들어 옛말이 된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돌톳, 돌미역, 멸치 등이 주 특산물이다. 특히, 이곳의 돌톳은 6월 한 달간 거두어 전 물량을 수출하므로 주민들의 중요한 수입원이 된다.
선착장 입구에 ‘어류포 산조’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을 지나면 또 다른 작은 마을이 보인다. 더 걸어가면 냉장창고가 나온다. 그 창고 뒤편의 첫 번째 집은 민박집이다. ‘항구민박’이라 쓰여 있는 간판도 깔끔하면서 아름답게 만들었다.
민박집 앞은 시멘트 길이 나 있다. 그러나 더 가면 곧바로 흙길이 나타난다. 이곳으로 계속 가면 밭이 나오는데 조금 더 걸어가면 바로 해안이다. 암석해안 주변으로 폐허가 된 집이 몇 채 있다. 2차선 아스팔트 길은 약간 경사진 오르막이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 동산에 정자형 쉼터와 함께 비석이 한 기 보인다. ‘전몰호국용사 현충비’다. 6·25때 참전용사 중 조도 출신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계속 오르막길을 걸어가면 사거리가 나온다. 우측 방향은 조도대교 가는 길, 직진하면 신전 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좌측 방향은 등대 가는 길이다. 입구 주변에 영세불망비 등의 선정비석이 여럿 서 있다.
하조대 등대에 이르는 거리는 약 4km 정도 된다고 한다. 어류포에서 도보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라 할 수 있다. 해안 절벽을 따라 조성된 비포장 길을 걷다 보면 하얀 빛을 발하는 등대에 닿는다. 어류포 마을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길은 벼랑 위로 이어진다. 벼랑길 따라 가면 섬 끄트머리에 아담한 등대가 자리잡고 있다. 한가해서 추천할 만한 길이다. 등대에 이르는 길은 보도블럭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하조도 등대 산 구릉으로 올라가 내려다본 하조도 등대 주변에는, 멀리 서해의 인천에서와 남해의 끝 부산으로 지나는 바닷길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 장죽수도(長竹水道)가 있다. 등대 앞 바다물살이 요동치며 세차게 흘러가는 것을 보니 놀랍다. 조류의 흐름이 어찌나 빠른지 진도대교 울돌목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할 정도였다. 진도와 해남 사이의 울돌목이 좁고 소용돌이치며 도는 거센 물살이라면, 진도 팽목과 조도 사이에 놓인 하조도 등대 앞바다는 폭이 18km 정도로 넓은 거대한 물줄기가 거칠게 흐르며 요동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서해와 남해로 흐르는 물이 방향을 바꿔가며 힘차게 흐르고 있다.
하조도 등대 주변의 항로는 목포, 제주도, 인천으로 가는 삼거리이며 분기점으로 여객선, 화물선과 멸치잡이 어선이 북새통을 이룬다. 예전에 비해 어족자원의 감소로 그 수가 크게 줄었지만 지금도 목포, 진도에서 나온 꽃게잡이, 멸치잡이 배들의 불빛으로 밤을 훤히 밝힌다. 그래서 야간과 안개 속에서 종종 충돌사고가 일어났던 곳이다.
등대바위 옆에는 수많은 형태를 한 만물상이 있다. 해안절벽이다. 파도와 바람에 깎인 바위가 장관이다. 현재의 등대는 최근에 세운 것이고, 1909년에 세운 옛 등대는 철거되어 볼 수 없다. 예쁜 모습을 한 것이었다는데 볼 수 없어 아쉽다. 등대에서는 서, 북, 동쪽의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시설해 두고 있다. 조도를 가면 한 번 들러보기를 권한다.
등대는 단순히 배의 안전항해를 위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데, 배 운행비용과 시간을 줄여주는 역할도 한단다. 하조도 등대 불빛은 10초에 한 번씩 비쳐주고, 바로 위의 가사도 등대는 15초에 한 번씩 불을 밝혀주므로 배들은 이 불빛을 보고 어느 등대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안개가 자욱하면 고동소리를 울려준다. 그것도 각 등대마다 몇 초에 한 번씩 울리므로 배들이 어느 등대 근처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가장 짧은 거리로 이동하도록 유도하여 ‘경제적인 항로’를 선택하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셈이다.
등대의 이러한 임무는 등대의 수입과도 연결된다. 소형어선을 제외한 외국배와 화물선, 여객선으로부터 등대 이용료를 거둬들이기 때문이다. 큰 배들은 기계문명의 발달로 레이더와 GPS 장비가 있어 자체적으로 위치파악이 가능하고 등대 없이도 안전 항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배들은 이 값비싼 장비가 없어서 등대가 없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을 못 내린다. 그래도 큰 배는 큰 배대로, 작은 배들은 작은 배대로 등대는 그야말로 생명이나 마찬가지다. 작은 배들이 제 길을 찾아야 큰 배들도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다. 세상의 조화가 한 사람, 한 편의 노력만으로 될 일은 아니지 않는가!
하조도 등대는 1909년 2월 일제가 조선을 수탈할 목적으로 세운 등대이지만, 이제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관광의 섬으로 거듭나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등대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학생들도 찾아와 체험학습을 하는 등 해양문화유산으로 거듭날 필요성이 절실하다. 그러나 싼 값으로 위치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정보의 시대에 아날로그 시설인 등대의 모습이 점차 작아져 가는 것 같다. 여기저기의 유인 등대들이 무인 등대가 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등댓길에 무성하게 잡초들이 자라나 사람이 다닐 수도 없는 곳들이 여럿이다. 세상사가 반드시 경제 논리만으로 풀어갈 게 아님을 등대를 찾다 보면 느끼게 된다. 간만에 사람이 북적거리는 등대를 찾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하조도에는 두 개의 산이 있는데 동쪽에는 신금산(神禽山, 231m)이 있고, 서쪽 끝에는 최고봉인 돈대봉(敦大峰, 234m)이 있다. 여기서 돈대란 높은 언덕에 옹벽을 쌓은 곳이나 성벽을 쌓아 적의 침입 등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던 곳을 말한다. 흔히 이곳에서 봉화를 올려 다른 지역으로 정보를 전하는 구실을 했다.
한적한 산길을 타고 가면 솟대바위처럼 거대한 형상의 손가락바위가 그 위용을 드러낸다. 손가락바위는 켜켜이 쌓인 퇴적암 덩어리로 되어 있다. 정면에서 보면 엄지손가락 모양으로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의좋은 삼 형제처럼 달라붙은 형상이다. 손가락바위(구멍바위)에는 구멍이 있다. 바위 위로 올라가는 통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선 다음에 구멍을 통과해서 손가락바위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전망대마냥 구멍에서 바라보는 먼 바다와 수많은 섬들은 또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손가락바위에서 내려와 돈대봉 정상으로 가는 등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지천으로 피어 있는 예쁜 들꽃들을 맞이하게 된다. 계속해서 오르자 다시 한 번 정상에서 다도해의 절경을 만난다.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남해바다는 신의 조각품 같다. 새떼와 같이 펼쳐진 섬들을 볼 수 있다.
손가락바위에서 내려와 돈대봉 정상으로 가는 길 내내 들꽃이 지천이다. 봄이면 백두대간에서부터 이곳 절해고도에 이르기까지 꽃 없는 곳이 있으랴만 쪽빛 바다를 보면서 만나게 되는 섬의 산꽃은 멋을 넘어 정겨움까지 주는 것 같다. 섬의 산길은 바람 때문에 풀도 짤막해서 마치 잘 가꾼 정원의 잔디를 관리한 것 같다. 바람이 풀을 관리해 주는 것이다. 그 위에 희고 노란 들꽃이 잔잔히 피어 있으니 알프스의 여름 못지않게 절경이다.
돈대봉 정상에서 나무계단을 내려와 투스타바위 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읍구마을로 가는 방향을 따라 접어들면 숲길이 나온다. 거기를 지나 돌무더기가 있는 작은 봉우리를 넘으면 마침내 신금산 정상에 다다른다. 이곳에서는 조도면 면소재지인 창리가 또렷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신금산 정상에서 기다란 로프 구간 따라 내려오면 갈림길 지나 면소재지인 창리에 다다른다. 창리는 옛날에 세곡창고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다르게 도청리라고도 했단다.
어류포에서 창리로 넘어오면 오른쪽 조도대교 방향의 길로 들어선다.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은 어느 섬이든 전망이 좋아 기분 좋은 길이다. 경사진 지역이지만 밭이 제법 넓다. 길 양쪽은 짙푸른 보리밭뿐이다. 얼마를 가면 조도 저수지가 있는 창리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의 오른쪽은 조도대교, 왼쪽은 신전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이다.
조도 저수지 주변에는 화단을 잘 조성해두었다. 가까이에 돌담으로 두른 별장 같은 하얀 집이 보이고, 떡방앗간에서는 하얀 김이 굴뚝을 타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섬의 중심지다. 제법 큰 섬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다. 다양한 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 미용실도 있고 식당도 여럿 들어서 있다.
이곳을 지나면 왼쪽으로 조도우체국이 보인다. 2층짜리 건물로 빨간색 우체통이 유난히 붉다. 그 주위로는 새파란 밭이 있다. 조금 더 가면 오른쪽으로 보건진료소가 나타난다. 보건진료소 역시 2층짜리 현대식 건물이다. 그 옆은 빨간 벽돌건물의 해남소방서 조도 119 지역대이다.
하조도에는 3개의 교회가 있다. 이 가운데 창리에 있는 교회가 조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1973년에 설립되었다 한다. 조도 119지역대 옆에 2층으로 된 제법 큰 건물이 있고, 그 뒤로 ‘해가든 이랜드 목욕장’이라는 건물이 있다. 2008년에 지어진 공중목욕탕 건물인데, 대중목욕탕이 없는 어려움을 안 이랜드 그룹에서 만들어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면사무소 옆 이면도로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학교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합류지점이 나오는데 이곳이 유토마을이다. 하조도에서 이 마을만 바다가 없다. 마을이름은 옛날 ‘유태미’ 또는 ‘유토구미’라고 했는데 ‘웃대미’라는 말의 변화로 보고 있다. 윗마을 즉 바다의 윗마을이란 뜻으로 보인다.
마을회관과 함께 이곳에 입석(선돌)이 있고 높이 17m, 둘레가 2.8m의 팽나무가 서 있다. 전해오는 말로는 옛날 이 동네를 지나던 스님이 앞의 돈대산 뒤에 신금산이 높이 솟아 있어 마을에 살기(殺氣)가 있으므로 선돌을 세워 방비를 했다고 한다. 그때 세운 두 개의 선돌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학교 담장이 재미있다. 담장은 학교 분위기에 걸맞은 그림으로 도색되어 있다. 학교 정문 양쪽 기둥에 ‘조도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 명패가 새겨져 있다. 제법 넓은 운동장에는 흙이 하나도 없고, 인조잔디에다 가장자리에는 보도블록을 깔아놓았다. 이 잔디구장은 ‘국민체육기금으로 조성된 것’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창유리는 창리마을과 유토마을을 합친 지명이다. 초등학교는 유토마을에 속해 있다.
읍구마을 앞에서 해안도로(모래미길)를 타고 가면 곤우마을이 나타난다. 곤우마을은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밭이 제법 많다. 이곳에는 논이 없기 때문에 산행마을까지 가서 논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그 대신, 자연산 톳과 미역 등 해안어업권을 산행마을과 함께 행사한다.
마을 남쪽에 있는 고개의 이름은 모래개 잔등이다. 거기를 넘으면 신전과 읍구 사이에 위치한 육동마을이 나타난다. 소나무 방풍림이 일품인 이곳의 해안은 온통 갯벌이다. 이곳에서 마주 보이는 섬이 관매도와 각흘도인데 상당히 가까운 편이다.
이곳 해안은 깊숙한 만을 형성하고 있다.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된 마을은 이 하천을 따라 내륙으로 이어지는데 아주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하조도에서 가장 깊은 골인 여섯 골짜기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하여 ‘여섯 골(六洞)’이라 했다. 그러다 지금은 ‘육동(陸洞)’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는데 1780년대 이전부터라고 한다.
논에 둘러싸인 육동마을은 예로부터 서당 공부가 가장 활발했던 곳이라고 한다. 글 배움을 소중히 여기고 책을 읽은 덕분인지 이곳에서는 재담가를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육동 바로 옆에 ‘작은 육골’이 있는데 이곳에는 집이 몇 채 되지 않았다.
신전(新田)마을은 신육리에 속한 육동, 읍구, 신전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동네로 하조도에서 으뜸가는 어촌으로 알려지고 있다. 써푸레(일명 청섭나무)가 많은 곳이라 ‘섶발기미’라고도 불린다. 면소재지인 창리에서 동쪽 7km 떨어져 있다. 50여 가구에 100여 명의 주민들이 있다고 한다.
신전마을은 신금산(232m)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 사이에 위치하여 능선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산이 북서풍을 막아주어 겨울에도 일조량이 높고 따뜻한 남향 마을이다. 특히, 산줄기가 뻗어내려 돌출해안을 이루므로 경관이 아름답고 바람을 막아주어 항구로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갯벌이 많은 조도에서 이곳만큼은 모래사장이 발달되어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다. 모래질은 매우 단단해서 자동차가 지나가도 바퀴가 빠지지 않을 정도이다. 길이 1km 정도의 해변 한가운데에는 갯바위가 발달해 있고 해수욕장 뒤편 도로변에는 민박집들이 여러 곳 보인다.
해안으로 툭 튀어나온 부분에는 데크 시설이 있다. 데크는 전망대 역할도 한다. 목재로 벤치와 원형탁자 등의 휴게시설이 만들어져 있어 휴식하기 좋은 곳이다. 좌우로 모래밭이 있는데, 여기에서 관매도와 그 주변의 섬들이 다 보인다. 이런 자연환경을 배경 삼아 이곳에 전남도의 핵심사업인 ‘행복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한옥마을이 지정되었다.
방파제에 올라 바다를 보면 작은 섬들이 마치 새떼가 앉아 있는 것처럼 수없이 산재해 있다. 각흘도와 죽항도 그리고 그 주변의 이름 없는 무인도들과 함께 관매도가 길게 누워 있다. 예전에는 관매도와 신전해수욕장의 포구를 잇는 연락선이 운항됐으나 지금은 이용객이 거의 없어 배편이 사라졌다. 이 앞바다 역시 온통 톳 양식장이다.
창리와 유토, 읍구, 육동마을을 지나니 포구 깊숙이 신전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경치가 좋은 산 중턱에는 전통 한옥마을이 질서 정연하게 들어서 있다. 인근 바다의 해안선이 아름답고 고운 모래가 있는 신전해수욕장이 있으며, 청등도와 관매도 사이로 방아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전마을은 여행객 유치로 주민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해문수산 김향동 선생은 1948년 생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평생을 수산업에 종사하였다. 부친은 고 김석두 씨인데, 최초로 미역 양식에 성공한 사람으로 20년 전 요절했기에 못 다 이룬 꿈을 아들이 이어가고 있었다. 김 선생은 미역을 양식하여 일본으로 수출하였으나 결국 사업에 실패하였다. 어민후계자로 선정되어 연안 연승 어로와 김, 멍게 양식 등 다양한 사업에 종사하면서 살다가 1988년부터 10여 년 동안 모자반을 연구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톳과 비슷한 모양을 지닌 모자반은 경상도와 제주도에서 많이 찾을 수 있는 해조류인데 초기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숱한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까다로운 모자반의 대량양식에 성공해 고수익을 올리는 분이 신전마을의 김향동 선생이다.
참모자반은 성숙된 모조에서 어린(곤봉형) 배를 추출하여 육상배양장에 옮겨 약 2개월 정도 성장하면 양식이 가능하다. 1997년 우리나라 최초로 참모자반 양식에 성공한 자로 신지식인 인증을 받았고,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까지 받았다. 그 뒤 2006년 진도군 수산업협동조합 조합장에 선출되어 손실조합을 흑자로 전환시키는 경영자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발휘하였다. 그는 재선의 유혹도 물리치고 4년의 임기를 끝으로 고향 신전리에서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면서 모자반 양식의 대중화를 위하여 전념하고 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김향동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신전마을 앞바다에 떠 있는 모자반과 톳 양식장에 사용되는 부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모자반은 무침이나 국으로 먹지요. 푸른 바다에서 건져내는 해조류 덕으로 살고 있어요.” 이제 모자반이 부산, 마산, 대구로 나가고 있으며, 마산은 마른 모자반을 선호하고, 제주도는 마른 모자반을 돼지뼈에 넣어 푹 삶아 잔치 때 먹는다고 한다. 서울은 경상도의 10분의 1 정도 나가고, 부산은 하루 8-9톤 정도 실려 나간다.
모자반은 2월부터 4개월 정도 채취되는데 1킬로에 2,500원에서 3,500원까지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다. 미역이나 톳보다 최고 10배 정도 비싼 값에 팔리는데 그 이유는 엽체가 쉽게 탈락하는 등 양식이 까다롭고 어려워서 그만큼 공급량이 달리기 때문이란다. 톳보다 쫄깃쫄깃하고 고소한 모자반의 맛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입소문으로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수도권의 소비 물량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모자반은 장기보관도 가능하다. 또 말린 모자반도 판매하고 있다. 김이나 미역, 멸치잡이에 비해 사람의 손이 많이 가지 않아서, 모자반은 침체된 어촌에 꿈과 희망을 주는 고마운 해조류이다. 이곳 신전리는 물살이 거센 곳에 위치하나 천혜의 항구에 들어선 마을로 이 바다에서 자라는 미역과 톳, 모자반이 유달리 맛이 좋다고 한다.
참모자반은 갈조식물이다. 칼슘, 당질, 비타민 등이 많이 함유돼 있어 웰빙식품이다. 김 선생은 아버지 뒤를 이어서 수산업에 종사하는데 최근에는 아들 김성환(36세) 씨가 수협 직원으로 일하다가 부친 대를 이어가려고 귀농하여 함께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신전리 바로 옆에 읍구(邑口)마을이 있다. 조도면에서는 면소재지인 창리와 관매도리 그리고 가사도리 다음으로 큰 동네다. 옛 기록에 의하면 ‘읍구미(邑九味)’ 또는 ‘읍동(邑洞)’ ‘꼴기미’ ‘골애’라는 여러 이름이 있다.
읍구마을의 앞 바다 양쪽 해안으로 두 개의 방파제가 나란히 보인다. 관매도 가는 배가 정박하는 지점이라고 한다. 군의 보조를 받아 읍구와 관매도 사이를 하루에 3회 운항한다고 한다. 읍구마을 앞 약 300m 거리에 면적 0.0410km2의 작은 섬 ‘수륙도(水陸島)’가 있다. 물론 무인도이다. 읍구마을은 해안 쪽에 위치해 있고 뒤로는 온통 밭이다. 읍구동네 고개에 3기의 지석묘가 있다. 전석 등 석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된 바 있고 고려 시대의 묘가 있는 등 유서 깊은 마을이다.
면 소재지 가까운 명지마을에는 중·고등학교가 있다. 이곳을 지나면 섬과 섬을 잇고 있는 조도대교이다. 상·하조도의 두 섬을 잇는 조도대교는 1997년에 개통이 되었으며 진도대교보다 길다. 2차선 길이 510m의 조도대교는 차를 타고 오가며 두 전망대를 모두 둘러볼 수 있다. 교량 중간의 높이는 50m로 대형 선박들의 통행에도 지장을 주지 않는다.
다리가 시작되는 하조도 끝자락에 공원화가 진행되고 있다. ‘나루꾸지’라는 옛 이름을 갖고 있는 이곳은 일찍이 상조도와 당도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이곳에 공원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공원 옆 습지는 매립지이다. 간척한 이곳은 1837년에 바다를 막아 염전으로 썼으나 지금은 농지가 되었다.
하조도 섬주민 중 ‘몰’이라는 해초를 개발하여 특허권을 가진 사람도 있다. 이 주민은 신지식인으로 인정을 받았고, 몰을 개발한 후에 양식에 성공하여 출하하였다. ‘모자반’과 비슷하게 생긴 몰은 씻어서 날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그냥 먹어도 씹히는 맛이 일품인 해초이다. 공기주머니를 톡톡 터뜨리는 느낌과 입 안에서 넘기는 느낌이 신선하다.
진도군 기획조정실 관계자는 “조도면은 다도해에 점점이 박힌 섬들마다 아름다운 절경을 갖고 있다.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해제로 난개발이 아닌 환경을 생각하는 개발을 함으로써 조도면을 ‘한국의 하롱베이’로 개발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진도군은 동서남해안발전종합계획에 의해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조도면 어류포·명지·활목 지구에 항만정비, 마리나 리조트, 콘도미니엄 등 가족 중심의 해상관광 휴양지를 개발할 계획이라 한다. 조도면 도리산에 해안경관을 테마로 하는 해안관광 일주도로와 전망대를 2011년부터 설치하여 ‘다도해 관광의 메카’로 거듭나고자 노력하고 있다.
첫댓글 저는 아직 진도를 가보지 못했네요....금년이 다하기 전에 한번 계획을 세워 봐야 할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