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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일기(57Χ90㎝) : 1658년 제2차 나선 정벌에 참전한 신류 장군의 조총부대는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이후 러시아군은 청•러 국경 지대인 흑룡강을 넘지 못했다. 출병 84일 만에 개선한 신류 장군은 나선 정벌을 일기 형식인 『북정록』으로 남겼다. 우승우(한국화가) |
광해군은 명의 요구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명과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한 서인은 광해군이 명을 배신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를 들어 인조반정(1623)을 일으키고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냈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정묘호란, 1627). 후금은 세력을 키워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태종은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그리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해 왔다. 척화론이 힘을 얻어 청의 요구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1636). 왕과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여 45일 동안 항전했으나, 결국 청에 굴복하고 군신 관계를 맺었다. 전쟁이 끝난 후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 3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척화를 강경하게 주장했던 신하들을 인질로 데려갔다. 또 수만 명의 백성들이 청의 포로로 끌려갔다.
이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겉으로는 청에 사대의 예를 취했으나 속으로는 청에 보복할 기회만을 노리고 북벌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조선은 청을 오랑캐로 여기며 중화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소중화론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 지키고 청을 정벌해서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북벌운동은 실질적인 북벌보다는 서인들의 정권 유지 논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왕위에 오른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과 이완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했다. 그리고 허목과 윤선도 등 저명한 남인 인사도 등용하여 붕당 간 조화를 유지해 나갔다.
청의 요청으로 조선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흑룡강 일대로 파견하여 남하하는 러시아군을 정벌하기로 했으며,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는데,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효종 5년(1654) 2월 청나라에서 온 차관 한거원(韓巨源)이 러시아 정벌에 조선군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청조는 이듬해(1655) 호마이(呼瑪爾) 하구에 있는 러시아의 근거지를 공격하고 효종 8년(1657)에는 상견오흑(尙堅烏黑)에서 러시아와 싸웠으나 다시 패배했다. 그러자 효종 9년(1658) 재차 조선군의 출병을 요청했다. 효종은 함북병마우후 신류(申瀏)를 총병관으로 삼아 정벌군을 구성하게 했다. 러시아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어 11척의 선단 중 10척이 불타고 1척만 겨우 도망갔다. 불과 20여 년 전 삼전도 치욕을 겪었던 조선군으로선 청군이 연패한 러시아군을 꺾은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청군과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효종은 더욱 강하게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조선은 청에 무력으로 복수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청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늘어나는 군비로 재정이 어려워지자, 효종이 죽은 후 북벌 계획은 중단되었다. 당시 청은 이미 중국 지배를 확고히 하고 강력한 군대를 지닌 대국이었기 때문에 북벌의 시행은 현실적으로 어려움 많았다.
또한 17세기에는 벨테브레이와 하멜 등 표류인들이 나타나 서양 문물을 전해 주었다. 조선 정부는 벨테브레이와 하멜 등 표류한 서양 선원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서양식 대포와 조총 제조하도록 하였다.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 일행은 표류기를 지어 조선의 사정을 서양에 알렸다.
광해군 때 공납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 시행되었고, 김육의 건의로 대동법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확대했다. 대동법 시행으로 토산물 대신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 무명, 동전 등을 낼 수 있게 되자, 토지가 없는 농민은 부담이 줄어들어 크게 환영했다. 대동법에 따라 공납은 대체로 토지 1결당 쌀 12두를 냈다. 대동법은 점차 확대되어 숙종 때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은 대토지 소유자들에 완강한 저항을 받았고, 전국적으로 확대될 때(1708)까지 100년이 걸렸다.
16세기에는 부국강병을 반대하고 왕도 정치를 추구하는 사림의 의식을 반영하는 양반 문화가 발달했다. 사림은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 추구했고, 향촌 자치를 강조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성리학은 통치 질서는 물론 일상생활과 윤리적 측면까지 확대되었다. 사람마다 지위에 맞는 역할이 정해져있다는 명분론 내세웠으며, 이에 지배층과 피지배층, 남자와 여자, 적자와 서자의 구분이 뚜렷해졌다.
양 난 이후 조선 사회에는 신분 질서가 동요하고 상공업이 발달하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정통과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은 변화에 맞서는 보수적 학문이 되어 절대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인조반정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은 명분론을 강화하고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절대화했다. 성리학이 지배적 사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상하 관계 중시하는 명분론이 강조되고 삼강오륜이 기본 덕목으로 제시되었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인조 때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등 충청도 지역의 젊은 산림 인사들을 등용하고, 허적, 허목 등 남인계 인사들도 등용되었다. 산림(山林)은 시골에 은거해 있던 학덕이 높은 학자 가운데 국가의 부름을 받아 특별한 대우를 받던 인물들이다.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 산림이라는 이름으로 재야에서 그 여론을 주재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한 정파가 정국 독점적으로 운영했던 광해군 시기의 문제점을 거울삼아 남인을 정권에 참여시켰다. 정책이나 인사 결정할 때에는 일반 재야 사림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했으나, 효종의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일어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극심해졌다. 예송은 예학에서의 시비를 가리는 것을 말한다. 예학은 유교적 관혼상제의 의례에 관한 학문을 뜻한다. 17세기에는 예학의 시대라 불릴 정도로 예학이 발달했다. 이는 양 난으로 국가의 명분이 훼손되고 신분 질서 흐트러진 상황에서 유교적 질서 회복하려는 지배층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예학 연구가 심화되면서 각 학파는 제례나 전례 등 국가의 주요 전례 행사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다. 이는 정치적 대립으로 발전하여 예송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종 때 두 차례 예송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붕당 정치 체제가 무너지고, 숙종 때에는 당파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핵심 키워드】
☞ 광해군은 실리를 취하는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북벌 운동]을 전개했다. 청의 요청으로 조선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흑룡강 일대로 파견하여 남하하는 러시아군을 정벌하기로 했으며,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는데,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17세기에는 [벨테브레이]와 [하멜] 등 표류인들이 나타나 서양 문물을 전해 주었다. 조선 정부는 벨테브레이와 하멜 등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서양식 대포]와 [조총] 제조하도록 했다.
광해군 때 공납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 시행되었고, [김육]의 건의로 대동법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확대했다.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될 때(1708)까지 100년이 걸렸다.
16세기에는 부국강병을 반대하고 [왕도 정치]를 추구하는 사림의 의식을 반영하는 [양반 문화]가 발달했다. 인조반정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은 [명분론]을 강화하고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절대화]했다.
인조 때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 [산림(山林)]이라는 이름으로 재야에서 그 여론을 주재했다. 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했으나, 효종의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일어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극심해졌다. [예학] 연구가 심화되면서 각 학파는 제례나 전례 등 국가의 주요 전례 행사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다. ☜
[출처] 중앙SUNDAY 김취정 | 제 460 호 | 2016.01.03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