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들’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제3편]
이름은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특이점을 조형하고, 본질을 외시(外示)해내는 효과가 있다. 군중이라는 무리와 이름을 가진 개별자들의 집합체는 분명 다르다. 군중은 개인에게 이름을 허여하지 않고, 개별자를 무리의 일원으로서만 인정한다. 이름을 가진 자는 군중이라는 무리 속에서 이미 이탈한다. 개별자는 이름을 갖고 욕망이라는 탈주선을 타고 달아난다. 시인은 감각의 자발적 착란 속에서 사물들에게, 타자에게 제각각의 이름을 붙여 호명한다. 시인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김수영, 「사랑의 변주곡」)고 선언하거나, “번개처럼/금이 간 너의 얼굴”(김수영, 「사랑」)에 알맞은 이름을 붙여 호명한다. 호명하는 목소리는 길게 여운을 남기면서 저 너머로 사라진다. 사라지는 목소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짐승 속에서 나와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도벽이 발견되었을 때 완성된다
그녀뿐이 아니라
나뿐이 아니라 천역(賤役)에 찌들린
나뿐만이 아니라
여편네뿐이 아니라 안달을 부리는
여편네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새끼들까지도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의 새끼들까지도
그녀가 온 지 두 달 만에 우리들은 처음으로 완성되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 김수영, 「식모」 전문
‘식모’는 사라진 구시대의 직업이다. 직종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 명칭이 사라진다. 지금은 파출부나 도우미와 같은 말들이 그 호칭을 대신한다. 「식모」에서 ‘그녀’는 이름이 없다. 이름 없이 ‘그녀’로 호칭되는 존재라니! 이름이 없다는 것은 개별적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소녀는 입주해서 가사를 도우려고 어디에선가 왔는데, 시인에게는 무수히 많은 ‘그녀’들 중 하나다. ‘그녀가 개별자로 발명되는 것은 ’도벽'이 발각되는 계기를 통해서다. 천역에 찌들리고, 안달을 부리는 가족에게 겉도는 ‘그녀’의 도벽은 ‘그녀’의 개별적 특이함을 확실하게 각인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나’와 여편네, 그리고 새끼들이 만드는 ‘가족’의 일원이 되지 못한 채 그 바깥을 떠돌던 ‘그녀’는 도벽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개별자로 완성한다. 이때 도벽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습관이라는 점보다 욕망의 존재라는 사실을 더 드러낸다. ‘완성’이란 존재성이 미미하던 소녀가 실체로서 그 현존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김수영은 「꽃잎」이란 제목으로 세 편의 시를 남긴다. 이 연작시는 그의 후기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모호성 때문인지 정작 이 연작시를 분석하는 비평문을 찾아보기 힘들다. 「꽃잎3」에서 열네 살에 시인의 집에 고용살러 온 소녀는 ‘순자’라는 이름으로 호명된다. 순자는 “열네 살 우리집에 고용을 살러 온 지/3일이 되는지 5일이 되는” 소녀다. 시인의 언급대로 소녀란 나이를 초월한, 어린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존재다. 시인은 소녀 ‘순자’에게 감탄한다. “야아 순자야 깜찍하고나/너 혼자서 깜찍하고나”. ‘순자’는 “나의 방대한 낭비와 난센스와 허위를/나의 못 보는 눈을 나의 둔갑한 영혼을/나의 애인 없는 더러운 고독을/나의 대대로 물려받은 음탕한 전통을” 단박에 꿰뚫어보는 존재다. 오직 소녀만이 “썩은문명의 두께”를 물리치고, 문명의 어마어마한 낭비에 대항한다고 하면서 “공허한 투자”를 일삼는 “나의 전모”를 파악하고, ‘나’를 비웃는다. ‘소녀’가 드러내놓고 비웃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시인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 시인은 소녀에게 이 모든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감탄하며 묻는다.
이 시의 의미를 열기 위한 열쇠 말은 ‘변화’와 ‘완성’이다. 변화는 자연 만물, 삶과 사회를 모두 포괄하는데, 이것은 항상 처음과 끝 사이에 걸쳐 있는 중간이고, 멈춤이 없는 지속이며, 내적 성분과 지형을 뒤흔드는 동요를 품는다. 만물에게는 변화하지 않음이 없다. 완성은 성분적 요소가 겪는 동요의 멈춤이고,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멈춤이다. 완성은 동요를 정지함으로써 형태와 내용을 확정한다. ‘순자’는 ‘변화’하고 ‘완성’에 도달하는 당사자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기 바깥 세계의 ‘변화’와 ‘완성’의 관찰자이자 매개자다. 먼저 ‘순자’는 꽃과 더워져가는 회원의 변화를 보고 느끼는 존재다. 식물의 초록빛은 나날이 짙어지고 꽃들은 연이어 꽃망울을 터뜨린다. 이 “너무나 빠른 변화”에 놀란 벌과 나비들은 “회원”에 찾아오기를 그친다. 물론 그것은 잠시 동안만의 현상이다. ‘순자’는 “잠시 찾아오기를 그친 벌과 나비의 소식을 완성”한다. “꽃과 더워져가는 화원”은 ‘순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변화에 이른다. 계절은 빠르게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간다. 시인이 말하는 “실낱 같은 완성”이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완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낱 같은”이란 수식어다. 이것은 가능성의 빈곤을 암시한다. 그런데 왜 “실낱같은 여름날”인가? “실낱 같은”이란 수식을 받고 있는 것은 “여름날” 뿐이 아니다. “여름 바람의 아우성”과 “여름 풀의 아우성”도 실낱 같다. 여름이면 양의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고 식물들은 무성해진다. 그것들은 실낱 같음으로 ‘완성’에 이른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 간단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남자 어른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 ‘소녀’에겐 너무 간단한 일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