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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明(http://cafe.daum.net/hopelight/)
게 시 판 : 신행담이나사찰에관한것
번 호 : 499
제 목 : 부처님의 광명을 만인의 가슴에 -불광사 광덕스님생애와사상
글 쓴 이 : 光明
조 회 수 : 2
날 짜 : 2003/09/03 12:51:08
내 용 :
부처님의 광명을 만인의 가슴에
글· 박경훈
1. 소년기(少年期)의 회의
속명은 고병완(高秉完). 1927년,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내리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지닌 집안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자매 사이에 화목하고 공부를 잘하는 소년이었다. 농촌의 초등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소도시 오산의 초등학교 5학년을 월반을 해서 전학을 한 것으로 보아서 학교성적이 매우 우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집에서 3km나 떨어진 학교를 병약한 몸으로 걸어서 다녔음에도 월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왕성한 독서욕(讀書欲)의 보람이었다. 어릴적부터 고병완 소년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과 혼자서 공부하는 독학(獨學)이 몸에 배었다.
이러한 소년 고병완은 형이 죽자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외동아들이 되었고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점차 가세(家勢)가 기울고 오래지 않아 부친께서 타계를 하시어 병완 소년은 상급학교 진학을 단념해야 하였다. 그러나 고병완 소년은 좌절하지 않았다. 어느새 책을 읽지 않으면 하루도 산 보람을 느낄 수 없게 된 그는 통신강좌를 통해서 중학교 과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학제는 중학교가 6년제였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을 합한 것과 같았다. 이 6년 과정을 3년에 마쳤다. 그가 6년 과정을 3년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의 독서열과 독학으로 공부를 해내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가 그의 나이 겨우 16세 때였다. 중학교 과정을 마친 16세의 소년은 고바야시 광업소(小林鑛業所)에 정식 사무원으로 입사를 하고 사택(社宅)도 제공받는다.
이로써 16세의 소년은 어엿한 가장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타계하고 가세가 기운 이후에 모처럼 찾아온 풍요였다. 그러나 이 소년 가장은 그 풍요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생활이 나아지자 그의 독서욕은 더욱 왕성해졌다.
그는 마치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보고 탐닉하듯이 책 속에 빠져들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주경야독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병약한 아들의 그러한 주경야독이 아들의 건강을 해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였다.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으려고 밤을 새워가며 읽느냐고 걱정을 하면, 웃으면서 하는 말이 “한방 가득히 읽을 것입니다.”하였다.
고병완 소년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했다. 형이 죽자 그 충격을 삭이기 위해 카톨릭에 입교한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따라 카톨릭 에 입교한 그였다. 그는 자라면서 평소에 부모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그가 독서에 있어서만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 무렵, 그는 다방면에 걸쳐 다양한 책을 읽었다. 철학, 역사, 법률, 경제 등 사회과학 분야와 물리학, 수학, 농학 등 자연과학 분야를 넘나들었다. 왕성한 지식욕(知識慾)은 그로 하여금 잡식성 독서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차츰 청년기에 들어서는 그는 독서를 통해서 갖게 되는 사유(思惟)가 깊어지면서 전쟁에 휘말린 식민지 청년의 민족의식이 눈을 뜨게 되고 삶에 대한 회의가 싹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회의와 민족의식은 그의 독서를 잡식성에서 벗어나 인생의 무브멘트를 전제로 하는 체계를 갖춘 지적(知的) 추구의 방향으로 전환하게 한다.
2. 방황과 오랜 행자 생활
그 하나가 법률서적의 탐독이었다. 그리고 나라를 빼앗긴 비애와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의 정신부흥을 주창하는 책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는 KBS TV대담에서 말하고 있듯이 카톨릭에서 멀어져 갔다.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지니까 카톨릭 교회에 나가는 시간이 줄었다.”고 한 그의 말은 체계적인 독서를 통해서 정신세계에 변화가 온 것을 시사하고 있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나라 안은 온통 환희와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그 환희와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라 안은 좌우(左右)로 갈라진 이데올로기의 싸움으로 인하여 극도로 혼란했다. 조국이 광복되기만 하면 마음껏 이상의 날개를 펼 수 있으리라 믿었던 청년 고병완은 그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이상이 깃들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방황을 한다.
우국충정(憂國衷情)에 넘치는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의 고담준론을 듣기 위해서 강연장을 찾아 다녔고 좌우정객(左右政客)들의 건국관(建國觀)을 알기 위해서 그들의 모임에 참석도 하였다.
이 무렵, 방황하는 20세의 대학생 고병완은 그의 생애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박종홍 교수이고 또 한 분은 신소천 스님이었다.
1946년의 대학가는 휴교상태였다. 좌우익(左右翼)의 대결의 마당이었다. 8·15해방이 되기가 바쁘게 날로 가열화된 좌우익 진영의 맞선 싸움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잇달았다. 그 중에서도 신탁통치의 찬반(贊反)세력의 대결과 서울대학을 국립대학으로 만드는 미군정(美軍政) 당국의 소위 국대안(國大案)에 대한 찬반대결은 학교를 상아탑이 아니라 목숨을 건 살벌한 전쟁터로 만들었다.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좌익학생·교수들은 공산주의 정당 사회단체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이데올로기 투쟁의 불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또 식민지 교육이라는 이유로 국대안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강행하였다. 공산주의 정당 사회단체의 조직적인 지휘를 받는 국대안 반대운동은 전국적인 동정동맹휴학으로 확대되었다.
고병완은 식민지를 자초(自招)하는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학생과 교수가 국대안을 식민지 교육이라고 단정해서 반대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인간정신의 부흥이 삶의 신조로 자리를 잡아가는 그는 모순이 지배하는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가 번민하였다.
이 때, 박종홍 교수는 인간정신의 부흥을 주창하는 그에게 한국인의 정신을 부흥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상에 대한 바른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한국의 유교, 특히 실학사상(實學思想)을 알아야 하고, 불교 중에서는 원효와 보조의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선(禪)을 직접 체험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고병완은 박종홍 교수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기 이전에 서울 봉익동 대각사에서 신소천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우국지사(憂國志士)들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 종로거리를 누비고 다닐 때, 금강경 강의를 통해서 구국운동(救國運動)을 펴는 소천 스님을 만난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뒷날 소천 스님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그 서문에서 세계적으로 사상이 혼란한 와중에서 금강반야바라밀에 눈뜬 소천 스님의 금강경 강의와 구국운동은 깨달음을 불교 속에 가두어 두지 않고 인간사회의 모든 영역에 반야의 대용(大用)을 열었다고 평하고 있다.
소천 스님에 대한 이 같은 평은 인간의 정신부흥을 주창하는 청년 고병완이 소천 스님을 평생 사숙하게 된 동기를 아는 데 도움을 준다.
이 무렵, 소천 스님과 박종홍 교수는 이미 짙은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뒷날 광덕 스님의 은사가 되신 동산 스님과도 박종홍 교수는 교분이 남달랐다. 자연히 세 사람은 번민하는 젊은이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범어사행(行)을 제안하게 된다.
그 때 청년 고광덕은 건강을 해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범어사행은 불교에 입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건강 때문에 쉬러 가는 것이었다. 한 3개월 쉬면 건강도 회복되고 불교도 조금은 알겠거니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범어사행을 결행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행자생활(行者生活)을 시작한다. 입산(入山)을 하면 곧 머리를 깎고 머리를 깎으면 충분히 습의(習儀)를 익히기도 전에 사미계를 받고 사미계를 받으면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않고도 비구(比丘) 행세를 하는 요즘의 세태와 비교할 때, 그의 오랜 행자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3. 부처님의 광명을 만인의 가슴에
그가 범어사행을 결행한 것은 1950년 24세 때였다. 범어사 선방에서 행자생활을 하는 고행자(高行者)를 대중은 고처사(高處士)라고 불렀다. 나이가 많은 탓이었다. 선방생활은 그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했다. 나이가 많은 것도 행동에 제약을 가져오는 요인이었다.
운력(運力)을 할 때 남보다 앞장을 서야 했고 좌선을 할 때는 육체적 고통과 산란해지는 마음과 싸워야 했다. 뒷날, 두 번의 큰 수술을 받고 투병을 할 때 괴롭지 않은가 물으면 “고통을 느낄 때 살아있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하는 스님은 이 때의 선방생활이 훨씬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3개월의 선방생활로 선(禪)이 그가 추구해 온 것과 같은 인간과 인간의 정신, 인간의 참 모습, 일체 존재의 근원 등을 주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불교 전반에 걸친 탐구욕을 자극해서 그로 하여금 행자생활을 계속하게 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치열한 선의 실수와 간경(看經)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은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동산 스님은 건강이 악화된 그를 요양을 위해서 기장의 포교당으로 보냈다.
머리를 깎고 염의(染衣)를 입은 고처사는 포교당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했다. 예불을 하고 불공을 올리는 의식을 집전했다. 그러나 축원과 법문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구족계를 받은 스님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처사의 비구관(比丘觀)을 엿볼 수가 있다.
또 소천 스님의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金剛經讀誦救國願力隊)에 참여해서 국민계몽운동을 펼 때도 강연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불교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성품탓이었다.
KBS TV의 대담에서 스님은 ‘안다’는 것은 관념적인 지적 해답이 아니라 직하(直下)에 주체적으로 자기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처사의 행자시절에 그가 입을 열지 않은 것은 아직 관념적인 지적 세계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처사에게 동산 스님은 늘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날 중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가까운 도반들이 스님이 되라 권유하면 그 때마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병객이 스님이 되어 단월(檀越)의 시주를 축내는 것은 죄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한 고처사가 구족계를 받았다. 1956년이었다. 스님의 나이 30세. 승명(僧名)은 광덕(光德). 은사이자 계사인 동산 스님이 기다리던 백척간두에서 내디딘 진일보였다.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곧 비구·대처 양측이 합작한 통합종단 발족에 참여해서 끝맺는 데 기여를 한다. 이 때 스님은 새로 탄생하는 종단의 종헌전문(宗憲前文)에 보조 국사를 종조로 명기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종조시비(宗祖是非)에 종지부를 찍었다.
또한 종헌과 종법의 작성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이때 제정된 종헌 종법은 한국불교사상 초유의 현대적 법률이었다. 스님이 젊어서 익힌 법률연구가 크게 힘이 된 것은 물론이다.
종단이 안정되자 스님은 국가와 불교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대학생을 위한 대학생불교연합회를 조직해서 그 지도법사를 맡는다. 그리고 당신이 주지로 있는 봉은사에 이 연합회의 구도부를 두고 침식을 제공하여 학업과 신행생활을 병행하게 함으로써 새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포교의 장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문서포교를 위해서 월간 「불광」을 창간하였고 출판사를 만들어 불모지였던 불교도서출판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한 불광회를 조직하여 최초로 도심포교의 성공적인 모델을 제시하였다.
낱낱이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스님의 불사는 스님이 순수불교 선언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인간의 실상을 알고 구국의 진리인 불성을 실현해서 부처님의 광명이 모든 사람의 가슴에 가득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