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머리기사로 장문의 글이 올라 있어, 우리가 이걸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이 글은 판본이 오래된 어느 고서에서 따가지고 와서, 김부식이 편집해서 실어놨다는 걸 느끼죠.
오래된 고서의 특징은 편년체로 이루어진 형식이 아니라, 열전 형식으로 되어 있어, 가족사를 이야기하면서, 몇 년도에 자식이 말갈과의 전쟁에 승리를 하여, 상으로서 식읍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적혀 있죠.
편년체 사서를 편찬할 때, 여기저기 열전 같은 책자를 여러 권 수집하여, 그걸 연도 별로 나누어서 수록해서 만드는게 삼국사기 같은 편년체 사서이지요.
그래서 <백제본기> 머리기사를 보면, "비류가 미추홀로 정착했는데, 막상 미추홀에 자리를 잡으니, 땅이 습하고 농사도 안 되는 소금끼 많은 땅이라, 비류는 이것을 괴로워하며 자책하면서 고민고민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김부식이 편집하면서, "(비류는) 괴로워하며 죽었다" 두 글자를 박으면서, 앞 문장과 연결해석이 되면서, 통설이 되었죠.
하지만, <백제왕기>는 다르게 적혀 있죠.
"비류왕은 BC2년에 낙랑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이것을 자책하며 괴로워하다가 죽었다."
이렇게 다르게 나오죠.
이 필사본은 좀 요상한 형태의 필사본인데,
저 비류왕 - 온조왕 두 섹션으로 나뉘어진 필사본 <백제왕기>는 망가진 <백제본기> 이전에 망가진 중간 형태의 사서라고 볼 수 있죠.
즉, 사서의 조작은 김부식의 조작 이전에, 더 과거에서도 조작은 단계적으로 행해져 왔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사서라고 볼 수 있죠.
최근 AI 검색에서는 위와 다르게 이야기해요.
1번째, 소서노는 비류, 온조가 분열되어 서로 싸우는 것을 통합시킬려고 애를 썼으나, 두 아들이 통합되는 것을 보지 못 하고, 눈을 감았다고 해요.
2번째, 비류는 온조가 자리 잡은 위례성을 공격했다고 해요.
실상은, 낙랑의 군대가 아니고,
"비류의 군대"가 위례성을 불을 질렀을 것이다"
溫祚統其衆 以繼立爲王 以新都爲慰禮城(彌鄒忽也)
= 온조는 무리를 거느렸고, 이어서 서서 왕이 되었고, 새로운 도읍을 위례성으로 하였다.(미추홀이다)
불탄 위례성을 수리를 한게 아니라, 되려 불탄 위례성을 새로운 도읍으로 하였다.
위례성에 쭉 살았는데, 새로운 도읍을 위례성으로 한다는게 말이 안 되죠.
BC2년 당시 힘이 약한 백제국이 낙랑군의 낙랑태수의 심기를 건딜어서, 위례성을 공격당하고 불을 지를만큼, 온조가 뭘 잘 못 했을까?
처음 저 글을 봤을 때도 "뭔 잘못을 했길래?
위례성이 불 탈 정도로.. 낙랑이 왜 쳐들어 왔지?" 의문시된 느낌을 받았죠.
근자에 와서.. 저 글은 조작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17년 봄, 낙랑이 쳐들어와 위례성을 불태웠다.)
夏四月, 立廟祀國母.
(여름 4월, 사당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 지냈다.)
<백제본기>에도 똑같은 기사가 있는데, 미추홀(비류 세력)이 힌트라 하며, 낙랑은 구라이며, 비류가 온조를 공격한 사실을 숨길려고, 제3자 낙랑을 끌여들어, 문장을 개작을 했다고 하네요.
해석하는 입장에서는 낙랑이 왜 나와? 하면서, 넘어가지.. 그 내막은 알 수 없죠.
별도의 야사집을 보지 않지 않으면, 내막은 모르죠.
처음에는 비류가 승승장구하다가 되치기를 당하여, 최종 승리는 온조에게 돌아갔다고 하네요.
BC5년~AD3년 시기는 비류왕의 아들인 보보왕(보호왕)의 시대라고 하네요.
어디서 그런 자료를 얻는지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