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은 내 육신의 명예,
이른 어두움에 태어나서
아침이 다 피기 전에 떠난다.
이국에서 보이지 않게 살다가
날이 밝으니 찢어진 갑옷을 벗는다.
죽은 이슬은 몇 방울의 물,
정성을 다해 사랑한다는 일은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 결단인가.
돈을 빌려 외국에 왔다.
밤낮없이 일해서 빚을 갚고
돌아가지 못할 나라를 원망하면서
남아 있던 외로운 청춘을 팔았다.
변명도 후회도 낙담도 아양도 없이
한길로 살아온 길이 외진 길이었을 뿐
피하지도 숨지도 않고 사라진 이슬.
어디로 갔을까 찾기 전에
이슬이 만든 무지개가 피어난다.
모두 떠난 자리에 의연히 서 있는
예언자의 훈장처럼, 눈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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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님이 1966년 미국으로 떠나실 때
마해송 아버님께서 50달러(지금 환율로 6만 원 정도)를
손에 쥐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친의 급작스런 별세 소식.
마종기 시인님은 오하이오에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이곳에 동생의 묘가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고 하더군요.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 뒤에 [그 나라 하늘빛]이라는 시를 쓰게 됩니다.
며칠 전에는 네 묘지 근처에
내가 묻힐 작은 터를 미리 샀다.
가슴 펴고 고국에 묻히고 싶기야
너와 내가 같은 생각이었지만
혹시 나도 그 소원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네 근처가 나을 것 같아서.
책을 읽든, 술을 마시든,
아니면 그냥 싱겁게 싱글거리든,
다시 한번 네 가까이에 살고 싶어서.
미국 출장 중 만난 교포들의 삶의 과정을 듣노라면
참으로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 서러움이
바위처럼 무겁게 가슴을 누르게 됩니다.
초창기 이민자들이 주로 많이 하신 것은 장사였으며,
특히 새벽에 몇 시간을 달려 야채시장에서 구매하여
아침부터 장사를 하신 분이 많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어 옮기고 어느 정도 살만하면
몸에 병이 들었다고 하시면서 건강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향이 평양이며, 6.25 전쟁때 국군 통역장교를 하셨던 분,
태권도 도장을 운용하시는 분, 교회의 목사님,
주한미군과 결혼하여 오신 분, 입양으로 오신 분.....
미국인은 Color people(유색인종)을 경시, 멸시, 무시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요즘도 가끔 뉴스를 통해서 이런 사건을 접하면
억울하고 또 울분을 감출 수 없더군요.
마종기 시인님은 의사이기에 죽음을 보는 것이 일상이었겠지요.
타국에서의 극한 외로움을 시로 승화시켜서인지 슬픔과 그리움을 위로하는 글이 많습니다.
흔히 인생을 풀잎에 맺힌 이슬(草露)과 같다고 합니다.
이슬을 가만히 바라보면 작은 무지개가 보입니다.
어느 순간 이슬은 보이지 않고 풀잎만 파르르 떨고 있지요.
그러나, 어느 날 또 다른 이슬을 보게 됩니다.
그래요,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귀한 것이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시작합니다.
=적토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