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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문 기 (金 文 起) 후손의 주장
이제까지의 인간사의 비밀이 환생이고 신이 있으며 역사는
신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현자(賢者)이던 성인(聖人)이던 또는 학자(學者)이던 간에
신(神)을 알고 있는 자 없었고 더욱이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動植物)이 환생된다는 것을 아는 자 아무도 없었다.
이제까지 인간들이 수없이 만들어 놓은 책들도 이를 밝히지 못하였으며 다만 자신들의 욕망(慾望)을 기록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통하여 유일하게 신과 역사와 환생으로 들어가는 기록이 국보151호이며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다.
이 조선왕조실록은 신들이 영력(靈力)으로 보존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도 위서(僞書) 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태조
부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보(金普)는 종부시(宗簿寺)관리로 자(字)는 김평우(金平瑀)이고,
할아버지 김목경(金牧卿)은 자(字)가
김목경은 대대로 대구와 영천에서 살아오다가 가문에서 지켜오던 군위 석굴에서
수도하던 승려(僧侶) 지웅(志雄)을 만나 교우(交友)하였다.
고려가 망하여 원(元)의 속방(屬方)이 된지 칠 십여 년 동안 고려 왕족들은
몽골인들의 눈을 피해 승려가 되어 각지를 떠돌고 있었다.
지웅도 고려 왕족의 후손으로 속명이 왕신(王辛)이었다.
원이 망하자 원왕과 관리들이 몽골로 급히 도망쳤다.
고려인들은 고려를 재건하고 왕으로 추대한 것이 지웅 즉 왕신 이었다.
왕신이 고려의 현종(顯宗)이다.
태조
그 고려사는 고려를 완전하게 뒤바꿔 놓았다.
왕신(현종)을 공민왕으로 왕신의 승명(僧名)을 신돈으로 조작한 것이다.
현종의 부름으로 한양에 온 김목경은 전적(典籍)관리로 있었다.
현종의 공신들이 실정(失政)을 계속하자 벼슬에 뜻을 버린
김목경은 야인으로 돌아와 칩거하고 있었다.
태조
이에 김목경은 태조
태종이 직접 뽑은 충녕의 학우(學友)
이런 배경의
충녕은 정축생(丁丑生)으로
같이 뽑힌 개국일등공신 조준의 손자는 병약하여 충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찍 병사하였다.
충녕이 왕위에 오르자
밀명을 수행 중에 사용하던 이름이 사발(士發) 그리고 사철(士哲)이다.
국내에서는 사철을 사용하였고 중국 대륙에서는 사발을 사용하였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태종은
문서를 주며 연구하여 세종을 돕되 죽어서 까지 비밀을 지키라고 하였다.
이 비밀 문서는 고려를 만든 도종(道宗)이 사왕(嗣王)에게 몰래 건 내준
자신의 출생과 고려를 세운 비화를 적은 비록(秘錄)이었다.
왕건은 대진족(大震族)으로 괴산의 작은 절(현 각림사) 주지인 도광이
하녀를 겁탈하여 낳은 사생아이다.
왕건이 도광의 고향 김천 직지사에서 성장하면서 학문을 익혔고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물을 배우며 많은 승려들과 교우 하였다.
이때 승명을 도선이라고 스스로 지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서 왕건의 기록을 읽고 자신도 왕건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것이 후에 고려를 건국한 밑바탕이 되었다.
세종이 왕이 되었지만 일반적인 정사(政事)외에 무섭고도 무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태종도 손을 대보지도 못한 것으로 아들 세종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만들어 주었던 일뿐이었다.
태종도 세종도 무섭고도 무거웠던 짐이 바로 고대(古代)에서 전조(前朝)에 이르는
역사와 심지어는 태조와 자신들의 조상내력이었다.
고려의 도종이 중국의 사서(史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조국 대진(大震)을 배반하고
삼백여 년 전의 중국에 있었던 고구려를 왕건의 조국으로 하여 계승한다고
역사를 왜곡하여 놓았고, 이를 안 태조
이를 신하들이 알거나 중국의 명나라가 안다면 조선의 운명은 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태조
유물까지 훼손되고 멸실 시켜 놓았는데, 이를 복원하고 바로잡는 것은
모두의 공멸(共滅)을 뜻하므로 세종은 이 역사의 증거물을 없애는데 주력하였다.
조선이 영원히 살길은 경주의 역사를 완전하게 없애고
왕건이 이미 꾸며 놓은 중국에 있었던 유당 신라(有唐 新羅)의 역사로 하여
중국대륙을 신봉하는 길뿐이므로 사대(事大)하고 유학을 숭상을 하는 것이라고
태조와 태종 그리고 세종은 결심하였다.
고려의 왕건이나 조선의 세종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이 바로 경주의 역사이다.
경주의 역사가 중국에 알려 지면 대륙의 대군이 쳐들어오기 때문이다.
세종은
세종의 평생동지
세종은
사서의 조작과 위조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웅(大熊)의 개주(開洲)도 조사하였다.
이어 대진(大震)의 마지막 도읍지인 금화(金化)를 답사하였다.
두만강 가의 대진의 도읍지인 금성(金城)도 조사하였고
동진(東晋)의 땅 함경도 일대를 조사하고 세종에게 복명 하였다.
다시
중국으로 잠입하여 당(唐)나라 때의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와 왜의
옛 땅을 조사하여 복명 하라고 한 것이다.
동진의 함주(咸州)와 부여의 졸본(卒本)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 그리고
신라의 동경(東京)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공주와 왜의 김해는 답사하지 못하였다.
세종이 만리장성을 넘지 말라는 특지(特旨)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도종이 중국에서 있었던 당과 고구려, 신라, 백제간에 있었던 중국역사를
고려 왕건 당시의 한(漢)을 신라로 가락(伽洛)을 동경(현 경주)으로 하고,
남이(南夷)를 왜로 웅천(熊川)을 김해로 하였으며, 서라벌(徐羅伐)을 가야로 하였다.
대웅(大熊)을 백제로 개주(開洲)를 부여로 하였고, 대진(大震)을 고구려로 금성(의
주)을 평양으로 금화(金化)를 철원으로 하였다.
동진(東晋)을 발해로 하였고 도읍지를 함주로 하였다.
세종이
혜종(惠宗)이
그리고 고구려의 사서 등 도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에 있었던 나라로 왕건이 조작한 고구려의 사서가 있었다.
세종은
하게 하여 역사의 진실을 확인한 것이다.
세종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경주의 신라가 한(漢)나라이며 시조가 황제(黃帝)라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실 때문이었다.
중국이 중화(中華)라고 하며 자신들은 한(漢)족으로, 주변을 이적융만(夷狄戎蠻) 으로 하고, 그들의 시조를 삼황오제 즉 황제(黃帝)라고 하는데, 조선이 한(漢)족으로 황제(黃帝)가 시조이며 황제능(黃帝陵)이 경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이 좌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조(前朝)의 왕실에서 비전(秘傳)된 사서(史書)를 불태워라.
세종은 과거의 조작되고 왜곡된 모든 역사를 모두 없애기로 결심하고,
태종은 환관(宦官)을 여진족(女眞族)에서 뽑아 왕명을 비밀리에 수행하는 조직을
만들었고, 이들을 세종에게 인계하여 전조(前朝)의 사초(史草)를 만들게 하였다.
세종은 고려사를 완결하여 놓고 이들에게 언어(言語)를 연구하게 하였다.
조선은 한(漢)족과 여진족(女眞族) 그리고 대진족(大震族)과 남이족(南夷族) ·
대웅족(大熊族)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백성들의 통합(統合)이다.
이 통합을 이루려면 언어 즉 말이 통하여야 한다는 것을 세종은 깨달았던 것이다.
고려가 이것을 못하였기에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고
왕실과 백성이 이간(離間)되어 있어서 원(元)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삼백 여 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세종은 드디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여진족의 말을 이용하여 여진족출신의 환관들이 만든 것이다.
세종의 조상(祖上)은 동진(東晋)의 유민(遺民)이다.
동진을 발해(渤海)라고 왜곡하였지만 동진도 엄연히 중국의 역사가 아닌
이 땅의 역사이다.
요(遼)에게 망할 때까지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가 그들의 땅이었다.
동진의 백성을 여진족(女眞族)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조상도 조작하고 미화하여 놓았으나 실록의 기록은 모두 거짓이다.
고려 도종이 이 땅에 있었던 나라들을 멸망시켜 놓고,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로
사서를 왜곡하여 만든 것은 중국이 중화로 이 땅을 동이(東夷)로 여겼고,
무관심과 무지로 이 땅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조선조의 태조와 태종 그리고 세종이 알았으며
이들의 심복인 극소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삼국사기가 거짓 인것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유래(由來)를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조작된 내용으로
정사(正史)로 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논(論)하는 것은 왕건과
선조(先祖)의 땅 가락과 불노동 그리고
삼천 오백여 년 전 현 중국대륙의 황하 강에서
하(河)나라의 왕이었던 태군 대왕(太君大王)께서는 서역의 여와(女渦)대왕의 침범으로 전쟁보다는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고자 다른 땅으로 이동하였다.
동으로 새로운 땅을 구하여 자리잡은 곳이 가락(伽洛)이다.
왕국을 한(漢)이라 하고, 천도(天道)인 환생의 도(道)로 교화하였다.
이 태군 대왕이 바로 황제(黃帝)이시다.
황제(黃帝)가 우리 한조(漢朝)의 개국 시조(開國 始祖)이신 한가야(漢伽倻)대왕 이시다.
황제께서 천도를 깨우쳐 교화하였으니 드디어 환생에서 벗어나
신(神)되어 천상(天上)에 오르셨다.
황제(黃帝)의 신격(神格)은 천신(天神)이시다.
황제의 무덤은 문무대왕의 무덤에서 오 분 여 올라가면 있다.
(배역(背逆)의 요괴서(妖怪書) 삼국유사엔 문무대왕을
김유신으로 폄하(貶下)하여 위조(僞造)하여 놓았다.)
한(漢)의 마지막 왕은 경지 대왕이다.
대진(大震)의 도선이 중국의 왕건을 자칭하고 중국의 역사인 고려를 흉내 내어
대진을 멸망시킨 다음 위계(僞計)로 경지 대왕을 살해하여
황제께서 세우신 천명의 왕국 한(漢)을 멸망시켰다.
경지대왕(敬祗大王)의 왕자이신 심 상공(沁相公)이 경지 대왕의 시신을 불로동에 모시었다.
경지대왕의 한을 심상공이 자손들에게 전하여 천도를 닦게 하였다.
경지대왕이 신이 되어 천상에 오르셨으니 신격이 천왕(天王)이시다.
심 상공이 천도를 행하였으므로 신이 되어 천상에 오르셨으니 신격이 사덕(士德)이시다.
상공의 손자 연(淵)이 천명을 받고 천도를 행하여 천상의 신이 되었으므로 사덕 이시다.
후손인
저승으로부터 환생되어 천도를 닦아 환생의 굴레에서 벗어나
천상의 신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즉 역사는 신이 되신 분들의 인간이었을 때의 일을 말함이다.
이에
대진족(大震族)의 왕조(王朝)와 (여진족(女眞族)의 동진(東晋)왕조는 요(遼)가 멸망 시켰다) 대웅족(大熊族)의 대웅왕조, 한(漢)왕조( 남이족(南夷族)의 왕조는 한의 성덕 대왕이 이미 멸망 시켰다)를 멸망시키고
역사를 중국의 역사를 가지고 왜곡시켰다고 알리고,
세종이 다시 인멸하고 고려의 역사도 왜곡시켰다고 밝혔다.
이 인간세상인 이승은 인간이 생로병사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저승에서 이승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환생하여 천도를 닦게 하여
신이 되어 천상에 오르게 하는 것임을 밝혔다.
이에 놀란 세조는
노산군 복위라는 사건을 만들어 처형하였다.
남몰래 옮겨 무덤을 만들고. 이 곳을 지키며 천도를 닦으라고 하였다.
김계훈이
그 문서가 바로 감결(鑑訣)즉 정감록(鄭鑑錄)이다.
정감록(鄭鑑錄)은 이십 세기 말에 사는 후손에게
천기(天機)를 문사(文士)들에게 알리라는 암호이다
정감록의 내용은 우리의 역사가 황제(黃帝)로부터 시작하여 경지 대왕에 이르기까지
이 천 오백여 년 동안 천명으로 천도를 행하였고, 왕건에 의한 역사왜곡은 고려조에서 조선조를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어
모든 이 땅의 백성들이 천명과 천도를 알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배역(背逆)의 책으로 선조들의 역사를 모욕(侮辱)한 것이니,
이는 천신(天神)이신 황제를 모욕한 것이요 천장(天長)이신 문무대왕을 모욕하고,
천상의 모든 신(神)들을 모욕한 것이니 이는 천도인 환생을 모욕한 것으로
천벌인 조상 벌(祖上 罰)로 다스렸다.
이년 전부터 이 무서움을 알리었으나 어리석은 인간들이 읽지도 듣지도
생각도 아니하고 무시하였으니 이는 인간들이 만든 지식의 속임수에 빠져들어
허상(虛像)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정감록은 이십일 세기는 없다고 하였다.
인간이 신을 모욕하였고 신을 무시하였으며 환생의 도인 부부 도(夫婦 道)를
혼탁(混濁)시켜 성의 상품화와 성의 자유화가 인간의 권리인 줄 망상하여
어린아이부터 늙은 이까지 미쳐 날뛰고 있다.
이에 환생의 극벌(劇罰)로 인류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천지개벽(天地開闢)하여 인간들의 혼(魂)을 반혼 반귀(半魂 半鬼)로 만들어 새로운 세상으로 환생시키는데
죄업이 무거운 자는 움직이지 못하는 초목(草木)으로 나머지는 들짐승 날짐승과 벌레등으로 환생되는 데 물로도 환생된다.
인간이 멸망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니 천상의 모든 신들이 도(道)로서,
영력(靈力)으로서, 조화(造化)로서, 인연 있는 후손들 중에서 깨달은 자가 있으면,
환생의 무서운 벌을 면할 수 있음을 알리고자,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정도령은(鄭道令)은 정감록의 소문을 들으면
천신이신 황제의 도를 받으라는 암호이다
역사(歷史)는 살아 있다.
역사는 신(神)의 역사이다
신은 환생(還生)의 영광(榮光)이다
이제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환생과 신을 알고자 한다면,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모든 인간의 기록 중에서 유일한 것은 조선조의 조선왕조실록뿐이다.
인간(人間)의 비밀, 우주(宇宙) 비밀(秘密)의 문(門)은 조선왕조실록 중 세조실록의
단종 복위사건이다.
단종이란 왕은 조선조에 없었다.
문종의 아들 노산군은 왕위에 오른 적이 없다.(문종은 생식불능자(生殖不能者)이다
영월에 있는 노산군의 묘는 확실히 노산군의 시신(屍身)이 들어 있다.
그러나 노산군은 두 발로 영월에 간 것이 아니고 누워서 간 것이다.
노산군은 세조가 죽인 것이 아니다. 자살한 것이다.
그것은 병자년 초에 일어난 일이며 당황한 세조는 극비리에 심복인
곧바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이 일을 극비로 숨겼고 모든 사실을 꾸민 것이다.
세조는 애초에 노산군을 보호하여 성년이 되면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 동안 왕권 강화에 힘을 다하려고 하였다.
정신 박약아인 노산 군이 부왕인 문종마저 잃고 또한
삼촌인 안평대군의 위압적인 태도에 겁에 질려 생의 허무함에 죽음의 길을 간 것이다.
당시의 신하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왕위 계승권자인 노산군이 삼촌인 수양에게 왕위를 양보하여 수양이 왕위에 오르자
병자년 6월 초1일 조회가 열리면 세조에게 건의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날 열릴 예정이었던 조회가 열리지 않아 다음을 약속하였으나
성삼문이 고집하여 집현전에 모여 토의하게 되었다.
결론이 나지 않아 다음에 모일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까지 밤을 세워 토의하였다.
아침 일찍 대궐에 들어왔던 김 질 이 집현전에 성삼문 등이 밤을 새웠다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들어오다가 노산 군 왕위계승과 세조의 등극이 부당하다는 소리를 엿듣고 깜짝 놀라 그의 장인인 정창손 에게 말하였다.
정창손은 이것을 기회로 생각하고 세조에게 달려가 역모가 있다고 고하였다.
김 질이 문밖에 있다 달아나는 것을 본 성삼문은 큰일났다 생각하고
이 개에게
출근하던
이 개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집으로 되돌아와 맏손자인 효현 에게 천명을 전달하였다.
이 천명이 계훈(繼勳) 이고 효현의 아명을 버리고 김 계훈 이라 하였다.
김 계훈은 노산 군과 같은 해 4월 21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현석으로 병자년 당시 거창 현감으로 6월 12일 세조가 보낸 도사에게
목이 베어 살해되었다.
어머니는 권 영금으로 태종의 외증손녀로 열 두 명의 아들을 낳아 몸이 쇠약하여 병치레가 잦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천명을 들은 김 계훈은 충복인 막쇠 와 같이 몸을 피하였다.
의금부부근에서 동정을 살피던 김 계훈과 막 쇠는 6월 5일 두 사람의 시신이
나오는 것을 보고 누구인지 수소문한 결과 박 팽년 선생과 유 성원 선생임을 알았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두 분의 시신을 모시고 남산에 와 묻었다.
6월 8일 서소문 밖 저승고개를 넘어 처형장에 들어온
성 승, 성 삼문, 하 위지, 이 개, 이 휘, 유 응부 등의 순서로 목을 베었다.
삼일 동안 이분들의 시신을 남산으로 모시고 와 묻어 주었다.
그리고
거창현으로 가 아버지
그리고 오백여년 동안 계훈(繼勳)을 지키며 살았다.
이곳에는 대대로 후손들이 만들어 놓은 비결들이 있다.
그 중에는 감결이 있으니 세상에서는 정감록이라 불리운다.
정도령이 나오고 앞으로 정씨 세상이 된다는 등 혹세무민하는 요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감결을 풀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 감결이 우리 민족의 역사이며 천기이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 구세주는 없다.
인간은 구원받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숭배하여서는 안 된다
인간은 기도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기의 업보를 멸하여야 한다.
인간은 환생되는 것이다 우주는 환생하는 곳이다.
이것이 감결의 내용이며 우리 민족이 행하여야 할 도이다.
감결은
비결로 만들어 오백 년 후의 후손에게 깨우치려 한 것이다.
이 감결의 내용이 성 삼문 선생 등이 절손(絶孫)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세조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 나오는 정감(鄭鑑)은 모동의
심(沁)은 바로 세상에서 불리 우는 마의태자의 본이름이다.
마의태자는 왕건이 조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왕자를 상공(相公)이라고 하였다.
연(淵)은 마지막 상공이신 심(沁)의 손자이다.
김
연(淵)은 바로 한나라의 마지막 왕 경지대왕의 증손자이시다.
한나라의 위대한 대왕이시며 천명을 받아 대진(大震)의 극명왕을 멸하였고,
대웅 (大熊)의 개루 왕을 멸하셨던 대(大) 한(漢)의 영웅이 계시니,
그 분이 바로 문무대왕(文武大王)이시다.
경지 대왕은 문무 대왕의 후손이시다.
왕건은 우리 한(漢) 나라의 모든 기록을 파멸하였고 역사를 위조하였다.
또 일연은 삼국유사라는 괴서(怪書)를 지어 왕건의 역사왜곡을 진실인양 꾸미었다.
왕건과 일연은 문무대왕을 훼손하기 위해
문무대왕의 손자인 성무대왕 능을 김 춘추 즉 태종무열왕이라고 꾸며 놓았다.
이들은 또한 문무대왕의 아버지이신 흥무대왕 능을 진평왕이라 날조하고
선덕여왕의 아버지라고 꾸몄으나 우리 한나라에는 여왕은 없다.
만덕 대왕은 문무대왕의 고조이시다.
선덕 여왕이라 능에 써놓았으니 역사의 왜곡이 어찌 이것뿐이랴
모두 중국 대륙에 있는 역사로 개조한 것이다.
문무 대왕은 우리 한(漢)의 개국시조이신 황제(黃帝)의 후손이시다.
황제는 천명을 받고 천도를 행하려 동쪽으로 이동하여 이곳 완산에 도읍을
정하시고 자손들에게 천도를 행할 것을 명하셨으나, 후손들은 허상의 도에 빠져
천명을 어겼으니 어찌 나라를 유지 할 수 있겠느냐.
왕건이 허도(虛道)로써 중생을 속이고 대진(大震)의 마지막 왕 미지 왕을 살해하여
궁예로 둔갑시켰으며, 대웅(大熊)의 마지막 왕 경애 왕을 살해하여 견훤이라 둔갑시켰다.
우리 한나라를 신라로 위조하였다
경지대왕을 불국사에서 살해하여 대왕의 목을 안압지에 던지었다.
대왕의 목과 시신을 수습하여 왕건의 눈을 피해 대구에 안장하였다.
한을 품은 심 상공은 동화사의 중이 되었으나 이내 환속하여 우리
한나라의 중흥을 꿈꾸었으나 허상임을 알고 천도를 행하려고
영주에 자리잡고 자손을 엄히 가르쳤다.
심 상공의 손자 연(淵)은 할아버지의 훈도에 따라 방방곡곡을 돌며 도를 행하였으니
그 자취가 마이산의 돌탑과 운주사의 천불 천탑이다.
이 역사의 진실이 허상의 눈에 어두운 중생들에게
천상의 경고임을 알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천상이 있고 저승이 있으며 초라한 이승이 바로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에 주인인 혼(魂)이 들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들은 혼보다
전생(前生)이 짐승인 반혼반귀(半魂半鬼)가 더 많이 들어 있다.
환생을 깨달은 신들의 역사.
신들이 역사를 알려 주셨다.
신은 인간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김 계훈(金繼勳)이 할아버지
김 계훈(金繼勳)은 신격(神格)이 천상(天上)의 신장(神將)이시다.
막쇠는 신격(神格)이 천상(天上)의 신장(神將)이시다.
세조 병자 6월2일 오후
의금부(현 조선일보 원표 앞)
선비 차림을 하고 의금부 앞에 숨어서 기다렸다.
당시는 선비 차림을 하지 않으면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의금부 앞에는 관리들이 역모로 잡혀 오기에 이들을 수발하는 가족들의 밥집이 있어
여기에서 묵었다.
의금부 앞에서 기다리니 밤에
삼일 후 두 사람의 시신이 나왔다.
막쇠가 알아보니 박 팽년과 유 성원의 시신이었다.
관원들이 서소문 밖으로 옮겨갔다.
서소문 처형장
서소문에서 아오개를 넘는 길이 저승고개라 하였다. 현재 아현로 고가도로이다.
현 마포 지방법원 서부지원 앞 사거리가 처형장이다.
박 팽년과 유 성원의 시신의 목을 참수하는 것을 김 계훈과 막쇠는 숨어서 지켜보았다.
박 팽년과 유 성원의 시신을 거두어 밤중에 남산으로 가 묻었다.
현 남산 케이블카 있는 부근으로 포장 도로 밑이다.
6월 8일 처형장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리니,
이휘부터 참수하였다.
삼일 동안 일곱 구의 시신(성 승, 박 중림, 성 삼문, 하 위지, 이 개, 유 응부, 이 휘)을 남산으로 옮기어 묻었다.
현 장충단 공원 위 동국대 뒤쪽이다. 철조망을 쳐 놓았다.
가매장한
현 마포대교 북쪽의 밤 섬이 마주 보는 강가이다. 배는 삼개 포구에서 빌렸다.
서쪽으로 가 현 안양천 변에서 남쪽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강을 건너 안양천 변까지 오는 동안 뜻밖에 사건이 있었다.
믿고 의지하던 막쇠가 두 번이나 배신하여 도망을 갔었다.
김 계훈의 나이 열 다섯이었다. 그러나 막쇠가 후회하여 돌아왔다.
겪은 일이 너무나 무서워서 도망을 한 것이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 이 곳 야산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떠났다.
현 경수산업도로 안양자동차학원근처.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초가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통사정을 하고 헛간에서 비를 피하였다.
그대로 잠이 들어 다음날 아침에야 밥을 부탁하여 사먹고 떠났다. 군포 수리산 밑 초등학교 정문 부근이다.
현 수원 호매실동 칠보산 밑을 지나가는데 일하던 농부들이 불러
새참 술을 주면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아버님의 시신을 안장하러 고향 에 간다고 하니 젊은이가 효심이 대단하다고 하면서
농주(農酒)를 주어 갈증이 나는 끝에 받아 마셨더니 하늘이 핑 돌아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하였다. 처음 먹어 본 술이었고 인심이 후한 동네이었다.
현 발안의 안중 가는 도로 부근까지 오자 졸음이 앞을 가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막쇠가 조금만 더 가자고 하는데도 그냥 쓰러져서 잠을 잤다.
그 동안에 막쇠가 먹을 것을 구해와서 요기를 하였다.
마음이 급하여 빨리 오다 보니 발이 불어 물집이 생겨 고통이 이만 저만 아니어
죽은 듯이 잠을 잤다. 현 안중사거리 위 한국통신 부근으로 노숙(露宿)하였다.
아침을 먹고 천안으로 떠났다. 대흥리 흥정사 앞에서(화물차 검문소입구) 노숙하였다.
다음날 현 풍세면 궁리에 도착하여 하루 밤 신세지고자 사정을 하자
시신을 지고 잠을 청하느냐며 거절하므로 노숙을 하였다. 현 영광사 간판 있는 곳이다.
풍세에서 새벽에 떠나 이곳에서 녹초가 되어 쓰러져 묵으셨다.
현 반포면 봉안리 외삼동 갈라지는 길 산성부근이다.
현 대전 보문산 공원 보문 맨션 끝에서 해가 저물어 머물렀다.
막쇠가 먹을 것을 많이 구해와 먹고 지친 몸을 쉬었다.
민가가 몇 채 있었지만 야숙((野宿)을 하려 하니 한 노인이 와서 보고,
효성이 지극하다고 하며 먹을 것과 약초 몇 가지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따뜻하게 위로하여 주어 눈물이 나와 같이 울었다.
이 고마운 동네가 현 보은군 원남리 삼송 방범 초소 앞이다.
현 옥천 청산면 샘터재에 오는데 누군가 뒤따라오므로 신경이 곤두서 숨어서 지켜보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안면이 있는 이 번의 머슴이었다.
이 번은
이곳 동네에 들어서자 초상이 났다 한다.
이 동네 노인들에게 이 시신은 한양에서 벼슬한 분으로 고향에 친척도 없고
더 내려 갈 수도 없으니 이 곳에서 묘를 쓰자고 통사정을 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무덤이 한양의 김 대감 무덤이라고 소문을 낸 다음 한 밤중에
이 동네가 법하리이다.
새벽에 영동읍을 지나며 동정을 살펴가면서 부지런히 걸었다.
미행자가 없는지 경계하면서 현 라제 통문에 왔다.
이 곳에서 노숙하다가 혹시 관원들이 순찰하면 들킬 염려가 있어 조금 더 걸어 잠을 잤다. 현 방향 표시판이 있는 곳이다.
밤늦게 까지 걸어 현 무주 삼곡리 초입 산기슭에서 미행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여 고단한 몸에 잠을 푹 잤다.
드디어 현 모동의 넘터 고개에 도착하였다.
당시에는 고개가 아니어 길도 나지 않고 인적도 없는 오지(奧地)였다.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일찍 모동 골짜기에 들어가 지정하여 놓으신 곳에 안장을 하였다.
쉴 틈도 없이 거창현 청으로 갔다.
현청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한양에서 내려 보낸 노비를 만났다.
아버지
버려져 있는 것을 현감댁 노비를 설득하여 야산에 가매장을 하였다고 한다.
노비와 같이
모동으로 들어가
막쇠가 어느날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나타났다.
화를 내며 사연을 물으니 김 계훈이 어느 날 혼잣말로
시신이 없어 진 것을 세조가 알면 나라 안을 뒤질 터인데,
가 무덤을 만들어 놓을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걱정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잘못한 것도 후회되고 하여 속죄하는 마음으로 혼자 한양으로 가
이 곳이 노량진 사육신 묘로 잘못 알려진 것은,
병자년의 군간( 奸)이라고 모욕한 남 효온의 이름을 도용(盜用)하여
육신전을 지어 선조에게 바친
이상과 같은
경주의 왕국을 세운 김씨들은 한나라 한족의 왕실 후예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태종과 세종, 세조 등은 역사서를 모두 변방에 보내 불태우고 증거를 인멸하였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였다. 명나라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자기 나라를 찾겠다고 백만 대군이 쳐들어 올 것이 먕약관화하였기 대문이다.
몇 가지 놀라운 사실(?)들,
문종은 성불능자였고 (
사육신이 된 집현전 선비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산군의 정체도,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이 성계의 후손 들 중에는 장남 만이 정신병에 걸리는 특이한 유전병이 있었고 노산군도 정신병이 있었다. 그리고 역쿠데타의 상황이 끝나자 노산군은 자살을 했다. 그러한 연유로 해서 조선시대에는 장남들이 왕위를 승계한 경우가 삼분지 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지방의 선비들은 중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살았다.
그 당시 단종은 즉위한 적도 없고 이미 자살을 한 상태였으므로 걸어서 영월에 간 게 아니고 누워서 갔다. 등등이다.
“천만 리 머나 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라고 읊은 금부도사 왕 방연이, 왜 하필 왕씨가 노산군(단종)을 모시고 영월로 갔단 말인가?
가정이지만, 수양대군 세조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킬 만한 사람으로 왕 방연을 꼽은 것이 아니었을까?
첫댓글 백촌 김문기 선생은 김녕김가의 관조이신 시자 흥자(時興)할아버지의 9세 손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순(順), 아버지는 관(觀)으로 우리 가계보에 나온다. 따라서 본문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나 충정공파 혹은 문기파. 백촌파로 부르는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김녕김가의 장손 집안인 우리의 가계보가 틀렸는지 본문이 틀렸는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밝힌다. 백촌 김문기 선생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1976(?)년 경. 김재규에 의해서이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잡았던 김재규는 서울대학교 유모 교수에게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를 탐사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 결과 (유모교수의 주장 ) 사육신 묘에는 6구의 시신뿐만 아니라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또 한 구의 시신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한다. 그래서 한때는 '사육신 묘라 부르지 않고, 충절지묘'라 불렀다. 10,26이 일어난 직후까지...
당시 유묘교수의 주장은 신빙성이 상당하다. 왜냐하면 사육신 묘는 특정인 (특별한 6인의 시신)의 시신 일습을 모아 만든 것이 아니라 수양대군에게 극도로 저항하던 매월당 김시습이 마포, 용산 등에 버려진 시신을 남몰래 수습하여 만든 묘이기 때문에 성삼문이나 박팽년 등의 시신 전체가 묻히지 않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추정하면 사육신 묘에 김문기의 육신 일부분이 함께 묻혔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요즘으로치면 수방사령관 쯤으로 추정되는 김문기의 위치가 당시 사육신의 리더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김문기의 품계가 유응부의 직속상관에 해당하는 사실로 추정할 때...)
따라서 김재규 생전에 충절지묘라 부르는 데 대한 거부감은 없었으나......... 근자 이상한 글이 자주 오르므로 반박의 의미로 긴 댓글을 올리며 글쓴이께 요구한다............ 이글을 쓴이여!! 당신의 목적이 김재규의 복권에 있다면 당당하게 주장하라!!! 김재규는 죄인임이 분명하나, 후세 인들의 검증이 필요한 죄인이다!!! 이를 정정당당히 주장하지, 해괴망측한 요설로써 그의 죄를 합리화 하려 들지말라!!!!!!!!!!!!!!!
그리고 본문에 대한 지적 하나... 10대 장손이면 10세 손이지 어떻게 20대 손이 되는지...장손의 항렬은 곱하기 2를 하는 건가?... 또하나 10세 손이 맞는 표현인가? 10대 손이 맞는 표현인가?...
저는 퍼온 글입니다. 그리고 장손으로만 10대 즉 2 곱하기 10입니다. 그래서 20대손이라고 합니다. 정도령이라는 필명을 다른 곳에서 쓰는 분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 중 대부분은 그분이 영적인 채널링으로 위의 모든 할아버지들 (아홉 분)을 만나고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이 분들 (영혼들?)이 특별히 미워하는 것이 빨갱이인데 그 빨갱이라는게 말하자면 치우군대의 빨갱이와도 통하고 지금의 북의 빨갱이와도 통하지 않나라고 생각합니다. 2002월드컵때 3,4위전에서 터키와 우리가 진한 피를 느꼈떤 일 등등 역사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김재규씨는 좋고 나쁘고
를 떠나서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위한 도구로 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시습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내용은 김시습의 전기에서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김재규씨가 금녕김씨인가요?
다른 분들은 금녕김가라고 부르는데... 김녕김가가 맞습니다.... 네. 김재규는 분명 김녕김가입니다. 또한 김영삼도, 김운용도, 김덕룡도... 김자도 김녕김가입니다.
아 그렇군요 김녕김 화이;팅 ~~~
김시습의 어머니가 울진의 선사장씨라는데 안동장인지 인동장인지 모르겠음 울진장시가 세 부류 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