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성인보(成仁輔). 고려조에 중윤(中尹) 호장(戶長)을 지냈다. ‘계축보(癸丑譜)’ 세록(世祿)편에 보면, 그는 정조사(正朝使)로 송경(松京)(개성(開城))에 갔다가 병을 얻어 아들이 시신을 업고 창녕(昌寧)으로 돌아오다 지금의 대지면(大池面) 맥산(麥山)에 안장했다고 하였다. 또 그에 대한 이름과 관직(官職)은 ‘성원고보(成原高譜)’에 밝혀져 있다고 하였다. 호장(戶長)은 고려시대의 지방민(地方民)을 다스리는 호족장(豪族長)이다. 따라서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가계(家系)도 창녕(昌寧)의 호족(豪族)으로, 여러 대에 걸쳐 번거(繁居)해 왔음을 말해준다. 창녕(昌寧)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런데 ‘창원성씨문헌지(昌原成氏文獻誌)’, 선세고적(先世故蹟)편에는 본래 성씨(成氏)는 주문왕(周文王)의 아들 숙무(叔武)의 후예라고 한다. 그리고 성인보(成仁輔)의 아버지는 숙정(叔正)으로 신라 때 대관(大官)을 지낸 성저(成貯)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당(唐)나라 학사(學士) 성경(成鏡)이 우리나라에 와, 그 후손이 번창했는데, 고려 때 성숙창(成淑昌)이 호장부정(戶長副正)이 되었고 그의 아들이 성인보(成仁輔)라고 하였다.
본관지 연혁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比自火郡)-비사벌(比斯伐)인데, 뒤에 경덕왕이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 창녕군으로 개칭하고 현종 9년 밀성군(密城郡)ㆍ밀양군(密陽郡)에 예속되었다. 조선 인조 9년 영산군(靈山郡)에 편입시킨 뒤 인조 15년 복구하여 현(縣)이 되었다. 고종 32년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영산군을 합쳤다. 주요 성씨로는 성(成)ㆍ장(張)ㆍ조(曺)ㆍ정(鄭)씨 등이 있다.
시조는 성인보(成仁輔). 고려조에 중윤(中尹) 호장(戶長)을 지냈다. ‘계축보(癸丑譜)’ 세록(世祿)편에 보면, 그는 정조사(正朝使)로 송경(松京)(개성(開城))에 갔다가 병을 얻어 아들이 시신을 업고 창녕(昌寧)으로 돌아오다 지금의 대지면(大池面) 맥산(麥山)에 안장했다고 하였다. 또 그에 대한 이름과 관직(官職)은 ‘성원고보(成原高譜)’에 밝혀져 있다고 하였다. 호장(戶長)은 고려시대의 지방민(地方民)을 다스리는 호족장(豪族長)이다. 따라서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가계(家系)도 창녕(昌寧)의 호족(豪族)으로, 여러 대에 걸쳐 번거(繁居)해 왔음을 말해준다. 창녕(昌寧)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런데 ‘창원성씨문헌지(昌原成氏文獻誌)’, 선세고적(先世故蹟)편에는 본래 성씨(成氏)는 주문왕(周文王)의 아들 숙무(叔武)의 후예라고 한다. 그리고 성인보(成仁輔)의 아버지는 숙정(叔正)으로 신라 때 대관(大官)을 지낸 성저(成貯)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당(唐)나라 학사(學士) 성경(成鏡)이 우리나라에 와, 그 후손이 번창했는데, 고려 때 성숙창(成淑昌)이 호장부정(戶長副正)이 되었고 그의 아들이 성인보(成仁輔)라고 하였다.
성씨(成氏)가 중앙조정에 관직에 진출, 명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성인보(成仁輔)의 아들 성송국(成松國)대부터이다. 그는 문하시중(門下侍中), 혹은 군기감(軍器監)을 역임했다 한다. 창녕성씨(昌寧成氏)의 계보는 성송국(成松國)의 아들 성공필(成公弼)(판도판서(版圖判書) 추증)ㆍ한필(漢弼)(찬성사(贊成事)) 등 형제대에서 <노상파(路上派)>와 <노하파(路下派)>의 2개파로 갈리었다. 길을 가운데 두고 아래 윗 마을에 갈라 살았던 데서 계파의 명칭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의 분파(分派)는 6세조를 파조(派祖)로 하여 13개파로 나누어진다. 성기(成紀)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 성석린(成石璘)의 후손이 독곡공파(獨谷公派)(문경공파(文景公派)), 성석용(成石瑢)의 후손이 회곡공파(檜谷公派)(문숙공파(文肅公派)), 성석연(成石珚)의 후손이 상곡공파(桑谷公派)(정평공파(靖平公派), 성석번(成石璠)의 후손이 낭장공파(郎將公派)이다. 성연(成連)의 후손은 판사공파(判事公派)로 나누어지고 성준(成俊)의 후손은 시랑공파(侍郞公派),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은 정절공파(貞節公派), 성태준(成台俊)의 후손은 사인공파(舍人公派), 성사준(成士俊)의 후손은 좌랑공파(佐郞公派), 성갑신(成甲臣)의 후손은 평리공파(評理公派), 성을신(成乙臣)의 후손은 검교공파(檢校公派), 성언신(成彦臣)의 후손은 지사공파(知事公派)로 나누어진다. 성씨(成氏)는 조선개국기에 성석린(成石璘), 성석용(成石瑢), 성석연(成石珚) 3형제가 개국에 참여, 고관에 오름으로써 가문의 번성의 가져왔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성(成)씨는 조선조에 1백 3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이중 상신(相臣)(영(領)ㆍ좌(左)ㆍ우의정(右議政)) 5명, 대제학 10명, 청백리 5명 등 숱한 석학ㆍ절신을 배출, 명문의 이름을 떨쳤다. 창녕성씨(昌寧成氏)가 고관대작을 많이 낸 벌열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을 배출하여 절개로 이름난 문중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 무렵 성(成)씨 문중은 절신(節臣) 성여완(成汝完)(정당문학(政堂文學)ㆍ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과 성부(成溥)(형부총랑(刑部摠郞))ㆍ성사재(成思齋)(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를 배출했다. 성여완(成汝完)은 공양왕 4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국운이 기울었음을 통탄하고 경기도 포천(抱川) 주왕산(周王山)에 은거,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성부(成溥)는 조견(趙狷)ㆍ남을진(南乙珍)과 더불어 <유양삼은(維楊三隱)>이라 불렀던 절신(節臣)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李成桂)가 대사간(大司諫)에 임명했으나 거절하고 양주(楊州)에 은거했으며, 뒤에 두문동(杜門洞)에 입산했다. 성사재(成思齋)는 고려 멸망 후 ‘영위왕씨귀(寧爲王氏鬼) 부작이가신(不作李家臣)’이란 시를 지어 절의를 나타낸 뒤 부인과 아들은 선산을 지키도록 귀향시키고 자신은 만수산(萬壽山)에 들어가 일생을 마친 두문동(杜門洞) 명현(名賢) 중의 한 사람이다.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태종조ㆍ영의정(領議政))과 회곡(檜谷) 성석용(成石瑢)(태조조ㆍ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상곡(桑谷) 성석연(成石珚)(태종조ㆍ예(禮)ㆍ호조판서(戶曹判書)ㆍ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 3형제는 조선초에 성(成)씨 가문의 번성을 가져온 중추적 인물들이다. ‘삼곡(三谷)’으로 불린 이들 3형제는 고려말의 절신 성여완(成汝完)의 아들들이다. 성석린(成石璘)은 공민왕조에 등과하고,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공양왕을 세워 찬화공신(贊化功臣)에 창성군충의군(昌城郡忠義君)에 봉해졌다. 조선개국 후 정종 때 평양부윤(平壤府尹)을 지내고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으로 창녕백(昌寧伯)에 봉해졌으며 좌정승(左政丞)에 올랐다. 태종 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3명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태종 15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당대 명필로 이름을 날렸으며, 조선 태조의 건원릉신도비(建元陵神道碑)를 써서 현재에 남아 전한다. 성석용(成石瑢)은 우왕 2년 등과했다. 공양왕 말에 형 성석린(成石璘)과 함께 이색(李穡) 등의 일파러 몰려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책록되어 개성유후(開城留後),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고,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성석연(成石珚)은 우왕 3년 과거에 오르고, 조선개국 후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태종 6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우군총제(右軍摠制), 대사헌(大司憲), 우정승(右政丞), 예조(禮曹)ㆍ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했다. 이들 ‘삼곡(三谷)’ 집안 중 특히 회곡(檜谷)의 후손에서는 성삼문(成三問)ㆍ성담수(成聃壽) 등 절신이 나와 유명한가 하면 상곡(桑谷)의 후손에서는 성현(成俔)ㆍ성혼(成渾) 등 이름난 학자가 많이 나왔다.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은 도총제(都摠制)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자이다. 1456년(세조 1년)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탄로나자 유학자(儒學者)로서의 신념과 절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던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정권의 변동기에 고고하게 절의에 충실했던 그는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정신적 지주로 일컬어져오고 있다.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세조는 “나의 녹을 먹는 자가 어찌 반역을 꾸몄느냐”고 물었다. 이때 매죽헌(梅竹軒)은 “나으리(매죽헌(梅竹軒)은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 불렀다.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는 나라를 도둑질했거니와 삼문(三問)은 신하된 도리로서 임금이 쫓겨남을 차마 볼 수 없어 옛 임금을 다시 모시고자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사건으로 성삼문(成三問)의 일문은 멸족의 비운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 성승(成勝)(도총제(都摠制))과 삼고(三顧)ㆍ삼빙(三聘)ㆍ삼성(三省) 등 세 아우, 그리고 원(元)ㆍ맹첨(孟瞻)ㆍ맹평(孟平)ㆍ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아들들까지 모두 죽음을 당했다.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회두일욕사(回頭日欲斜) 황천무객점(黃泉無客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歌)(북소리가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어, 황천길엔 주막도 없을 것이니 오늘밤은 뉘집 찾아 쉬어갈거나)” 그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지었다는 이 시는 지금도 숱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성삼문(成三問)은 1418년 태어나 145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불과 38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역사상에 남긴 그의 행적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1447년 문과에 장원 급제, 집현전 학자로서 정음청에서 겨레의 자랑인 훈민정음 창제와 음운 연구에 종사했었다. 당시 세종은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하여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최항 등의 젊은 학자들을 매우 총애했다. 세종은 또한 그들에게 왕손(王孫)(단종)을 잘 보필하도록 부탁했다. 세종의 고명신인 이들이 그 왕손의 양위라는 정권변동기에 서로 다른 영욕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성삼문(成三問)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 세종의 유명(遺命)을 상기시키면서 신숙주를 꾸짖었다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세조가 가산을 몰수해 보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의 녹은 한 톨도 손대지 않은 채 쌓여 있었고, 그의 방에는 거적만이 깔려 있었다 한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성담수(成聃壽)는 성삼문(成三問)과 6촌간이다. 그는 아버지 성희(成熺)(교리(校理))가 단종복위사건에 관련되어 장배(杖配)되었다가 돌아와 죽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 파주(坡州)에 은거했다. 그후 조카 성몽정(成夢井)이 경기도관찰사가 되면서 그의 집을 찾아가 보니 방안에 자리조차 없어 몽정(夢井)이 돌아와 자리를 보냈으나 끝내 거절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상곡(桑谷) 성석연(成石珚)의 후손은 연산조의 사화(士禍) 때 크게 다쳤다. 성종 때 우의정을 지낸 양정공(襄靖公) 성봉조(成奉祖)는 상곡(桑谷)의 손자로 세조와는 동서간이다. 연산조에 영의정을 지낸 성준(成俊)과 대제학 성현(成俔)은 성봉조(成奉祖)의 조카이다. 성준(成俊)은 세조조에 등과한 후 연산군 원년(元年)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연산군 9년 영의정에 올라 세자사(世子師)를 겸했으나, 다음해 갑자사화(甲子士禍)(1504년)가 일어나자 예전에 성종비(成宗妃)(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의 폐위에 관련된 혐의로 중온(仲溫)ㆍ경온(景溫) 두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성현(成俔)은 서거정(徐居正) 이후 사가(四家)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한문학의 대가이다. 연산군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로 대제학을 겸했다. 그의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초기의 정치ㆍ사회 제도 및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 음악을 집대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며칠 뒤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되는 비운을 겪었다. 후에 신원되고 청백리에 올랐다. 성현(成俔)의 아들 성세창(成世昌)은 중종 때 5조의 판서(이(吏)ㆍ호(戶)ㆍ예(禮)ㆍ형(刑)ㆍ공조(工曹))를 두루 지내고 양관 대제학ㆍ좌의정까지 올랐던 당대의 석학이다. 부자가 모두 학문을 책임지는 대제학을 지내는 영예를 누렸다. 그는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능해 <삼절(三絶)>이라고도 불렀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돼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성임(成任)은 그의 형으로 성종 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는가 하면 특히 붓글씨에 뛰어났다. 성희안(成希顔)(중종조ㆍ영의정)은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중종(中宗)반정을 일으킨 인물이다.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이 되어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중종조에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중종묘정(中宗廟廷)에 배향되었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함께 선조조 성리학의 쌍벽을 이룬 거유(巨儒)이다. 상곡(桑谷) 성석연(成石珚)의 6대손이다. 그는 일찍부터 이이(李珥)와 친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는 이이(李珥)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성혼(成渾)은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는데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 중에 조헌(趙憲)ㆍ이귀(李貴)ㆍ정엽(鄭曄)ㆍ안방준(安邦俊)ㆍ강항(姜沆) 등이 대표적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성천희(成天禧)는 성안의(成安義)ㆍ조열(曺悅) 등과 함께 민병 1천여 명을 일으켜 왜군을 무찔렀다.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이 전략상 요충지임을 비변사에 아뢰어, 수축토록 하는 등 그 공이 커 선무(宣武) 1등공신이 되었다. 진주판관(晉州判官) 성수경(成守慶),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 성윤문(成允文), 문구현감(汶構縣監) 성원조(成元祚), 여양현감(與陽縣監) 성천지(成天址) 등도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했다. 성안의(成安義)는 곽재우(郭再佑) 장군과 더불어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 공이 컸고 후에 창녕(昌寧)의병장이 되었다. 이밖에도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이름난 학자ㆍ문인을 많이 배출했다. 성현(成俔)의 작은 형 성간(成侃)(수찬(修撰))을 비롯, 생육신 성담수(成聃壽)의 아우인 정재(靜齋) 성담년(成聃年)(교리(校理)), 선조(宣祖) 때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문인 성로(成輅), 정조(正祖) 때의 대표적 실학자인 성해응(成海應)과 성운(成運)ㆍ성초(成樵), 서예가 성자제(成子濟) 등이다. 창녕성씨(昌寧成氏) 문중의 숙원 사업은 현조(顯祖) 19위를 모신 물계서원(勿溪書院)을 복원하는 것이다. 조선조 숙종 37년에 창건된 물계서원(勿溪書院)은 춘추석전(春秋釋奠)과 강학(講學)의 도장으로 쓰였으나 고종 9년에 철폐되고 그 자리엔 유허비가 서 있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모셔졌던 19명헌은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성송국(成松國), 동고공(東皐公) 성준득(成準得), 이헌공(怡軒公) 성여완(成汝完), 정절공(貞節公) 성사제(成思齊),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문두공(文斗公) 성담수(成聃壽), 우계공(牛溪公) 성혼(成渾),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인재공(仁齋公) 성희(成熺), 청송공(聽松公) 성수침(成守琛), 절효공(節孝公) 성수종(成守琮), 대곡공(大谷公) 성운(成運), 동주공(東洲公) 성제원(成悌元), 판곡공(板谷公) 성윤해(成允諧), 판서공(判書公) 성수경(成守慶), 창랑공(滄浪公) 성문준(成文濬), 청죽공(聽竹公) 성람(成灠), 부사공(浮査公) 성여신(成汝信),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 등이다.
주요 세거지
‘성인보행장(成仁輔行狀)’과 ‘성시중효행록(成侍中孝行錄)’에 의하면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아들 성송국(成松國)은 창녕인(昌寧人)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창녕(昌寧)에서 지냈다고 했으며, 창녕성씨(昌寧成氏)의 각 파보(派譜)에도 후손들이 대대로 창녕군(昌寧郡)에서 세거했음이 나타나 있다. 6세 판서공(判書公) 성기(成紀)의 후계(後系)는 영천군(永川郡)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신유보(辛酉譜)’를 보면 독곡공(獨谷公) 성석린(成石璘)은 아버지 성여완(成汝完)이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켜 포천(抱川)에 은거하자, 포천군(抱川郡)에서 세거하였다. 13세 성사동(成士仝)은 남원군(南原郡)으로 이거(移居)하였고, 성세경(成世卿)은 성주군(星州郡)에 터를 잡았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는 15세 성수재(成守載)가 영산군(靈山郡)으로, 성이명(成以命)은 칠곡(漆谷)으로 화(禍)를 피해 옮겨갔다. 성석린(成石璘)의 증손 성계조(成繼祖)는 사육신옥사(死六臣獄事) 때 평산군(平山郡)으로 퇴거해 후손이 금천군(金川郡) 일원으로 산거했으며, 성계종(成繼宗)은 금산군(錦山郡)에 터를 잡았다. 성계종(成繼宗)의 아들 성세필(成世弼)은 진안군(鎭安郡) 용담(龍潭)에 은거하였고, 손자 성응상(成應祥)은 완주군(完州郡)에 터를 잡고 살았다. ‘병인보(丙寅譜)’에 의하면 6세 회곡공(檜谷公) 성석용(成石瑢)의 후손은 파주군(坡州郡)에서 세거하였다. 9세 성삼석(成三錫)의 아들 성중손(成仲孫)의 대를 전후해서는 당진군(唐津郡)으로 移居하였고, 13세 성세중(成世中)은 임진왜란 때 거창(居昌)으로 피난하여 터를 잡았으며, 14세 이후로는 공주(公州)ㆍ예산(禮山)ㆍ금릉(金陵)ㆍ상주군(尙州郡) 등지에 산거하였다. 9세 성담년(成聃年)은 공주(公州)에 적거(謫居)하였으며, 후손들이 대덕(大德)ㆍ연기(燕岐)ㆍ개풍(開豊)ㆍ고양(高陽)에 산거하였다. 성담명(成聃命)은 고양군(高陽郡)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이며, 후계가 시흥군(始興郡)ㆍ가평군(加平郡)ㆍ광주군(廣州郡)ㆍ음성군(陰城郡)ㆍ해남군(海南郡)으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9세 성담령(成聃齡)은 이천(利川)에 은거, 터를 잡았고, 둘째아들 성수(成需)는 서천군(舒川郡)으로 옮겨갔다. 동생 성담중(成聃仲)의 아들 성몽기(成夢箕)는 부여군(夫餘郡) 임천면(林川面)에 은거하였고, 성담로(成聃老)의 손자 성수원(成守源)은 성주(星州)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9세 성습지(成習之)의 後系는 인천시(仁川市)에서 세거하였다. 한편 ‘을축보(乙丑譜)’에 의하면 6세 상곡공(桑谷公) 성석연(成石珚)은 과천(果川)에 터를 잡았고, 손자 성염조(成念祖)의 대 이후 파주군(坡州郡)에서 세거하였다. 성봉조(成奉祖)의 아들 성율(成慄)은 경상도관찰사(觀察使) 재직 중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의성군(義城郡)에 은거, 터를 잡고 안동(安東) 등지로 산거하였으며, 그의 아들 성옥정(成玉貞)은 여주군(驪州郡)에서 세거하였다. 참판공 성순조(成順祖)는 장단골안에서 세 아들 성숙, 성준, 성건을 데리고 산거터잡이하여 대대로 세거지화되 장남면 자작리 다 공의 14대손 성보호가 고양관산에 산거 집대성하고 철원에 산거했다. 성준의 아들 성계온이 갑자사화를 피하여 청원군에서 개,성,명해가며 은거해 터를 잡은 것 같다. 성석연(成石珚)의 둘째 아들 성억(成抑)의 후계(後系)는 서산(瑞山)ㆍ괴산(槐山)ㆍ아산(牙山)ㆍ부여(夫餘)ㆍ단양(丹陽)ㆍ청원(淸源)ㆍ옥천(沃川)ㆍ춘천(春川)ㆍ완주(完州)ㆍ남원(南原)ㆍ영일(迎日) 등지에 세거했으며, 셋째아들 성급(成扱)의 후계(後系)는 대덕(大德)ㆍ연기(燕岐)ㆍ청원(淸源)ㆍ옥천(沃川)ㆍ아산(牙山)ㆍ이천(利川) 등지에 터를 잡고 살았다. 6세 낭장공(郎將公) 성석번(成石璠)의 후손은 하동(河東)과 진양(晉陽)에서 대대로 살았고, 판사공(判事公) 성연(成連)의 아들 성효순(成孝淳)의 후계는 창녕(昌寧)ㆍ상주(尙州)에서, 성효수(成孝修)의 후계(後系)는 연기(燕岐)에서, 성효덕(成孝德)의 후계는 순천(順天)에서 세거하였다. 시랑공(侍郞公) 성준(成遵)의 후손(後孫)은 지금의 서울에서 터를 잡았다. 또한 6세 정절공(貞節公) 성사제(成思齊)의 후손(後孫)은 대대로 창녕(昌寧)에서 세거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경신보(庚申譜)’에 기록되어 있다. 6세 사인공(舍人公) 성태준(成台俊)의 후계(後系)는 온양(溫陽)에서, 좌랑공(佐郞公) 성사준(成士俊)의 후계(後系)는 옥구(沃溝)에서, 평리공(評理公) 성갑신(成甲臣)의 후계(後系)는 월성(月城)ㆍ영천(永川)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검교공(檢校公) 성을신(成乙臣)의 손자 성만용(成萬庸)의 후손(後孫)은 창녕(昌寧)ㆍ거창(居昌)ㆍ진주(晉州)ㆍ청도(淸道)ㆍ김해(金海)에서 산거했고, 성대용(成大庸)의 후계(後系)는 함평(咸平)과 광주(光州)에서 세거하였다. ‘갑자보(甲子譜)’에 보면 6세 지사공(知事公) 성언신(成彦臣)의 후손(後孫)은 양주(楊州)에서 대대로 살았으며, 13세 이후로 부여(夫餘)ㆍ예산(禮山)ㆍ영동(永同)ㆍ광주(廣州)ㆍ여주(驪州)ㆍ이천(利川)ㆍ장성(長城)ㆍ고창(高敞)ㆍ통영(統營)ㆍ거창(居昌) 등지로 산거하였다. 1930년 당시 충북 음성군(陰城郡) 원남면(遠南面), 충남 대덕군(大德郡) 구칙면(九則面), 예산군(禮山郡) 신양면(新陽面), 전북 진안군(鎭安郡) 동향면(銅鄕面), 경북 영천군(永川郡) 북안면(北安面)ㆍ화북면(華北面), 상주군(尙州郡) 내서면(內西面)ㆍ모서면(牟西面), 봉화군(奉化郡) 물야면(物野面), 경남 의령군(宜寧郡) 궁류면(宮柳面), 창녕군(昌寧郡) 창녕읍(昌寧邑)ㆍ고암면(高岩面)ㆍ이방면(梨房面)ㆍ대지면(大池面), 거창군(居昌郡) 가북면(加北面),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좌면(左面), 평산군(平山郡) 고지면(高之面)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특히 오늘날의 대표적인 집성촌인 경남 창녕군(昌寧郡) 대지면(大池面) 모산리(牟山里)에는 70여 호의 성씨(成氏)문중이 살고 있다. 창녕(昌寧)지방의 중윤호장(中尹戶長)이었던 성인보(成仁輔)가 왕(王)에게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송경(松京)으로 갔다가 병사(病死)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그의 아들 성송국(成松國)이 아버지의 시체를 지고 곡을 하며 천리(千里)길 고향인 창녕(昌寧)으로 내려와 맥산(麥山)에 묘자리를 썼다 한다. 고려말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도 이 고장 출신이다. 정승 성유득(成有得)의 아들인 그는 ‘영위왕가귀(寧爲王家鬼) 부작이가신(不作李家臣)(차라리 죽어 고려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될 수 없다)’는 글을 남기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한다.
첫댓글 좋은 자료임다.